2024년 06월 23일 일요일
[연중 제12주일]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 (마르4,35-41)
제1독서<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기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화답송>시편107,23-24.25-26.28-29.30-31(◎1)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배를 타고 항해하던 이들, 큰 물에서 장사하던 이들. 그들은 주님의 업적을 보았네. 깊은 바다에서 그분의 기적을 보았네. ◎
○ 그분 말씀에 사나운 바람 일자, 커다란 파도가 높이 솟았네. 그들이 하늘로 솟았다가 바다 깊이 떨어지니, 그들 마음이 괴로움에 녹아내렸네. ◎
○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거친 파도 잔잔해졌네. ◎
○ 바다가 잠잠해져 기뻐하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그분은 이끄셨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
제2독서<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4-17)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복음<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욥기38,1.8-11)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10~11)
'경계를'에 해당하는 '훅키'(huqqi; limits)의 원형 '호크'(hoq)는 '자르다', '그리다', '정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하카크'(haqaq)에서 유래하여 '규정되거나 제한된 것', '할당된 몫', '할당된 과업', '한정된 경계', '한계', '지정된 시간'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 창조때 하느님께서 바닷물의 양과 바다의 위치 등을 정확하게 규정해 놓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계가 나름대로의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긋고'에 해당하는 '와에쉬보르'(waeshibor; and I fixed; and I brake up)의 원형 '샤바르'(shabar)가 원래 '깨뜨리다', '산산히 부숴뜨리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산산히 조각을 내듯이 세밀하게 경계를 그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빗장과 대문'이라는 용어는 당시 가장 견고한 것으로 여겨졌던 성문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성문은 열리고 닫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성문에 빗장이 걸리면 어떤 사람도 출입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을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 바다의 한계를 정해 땅과 분리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은 인간들을 향한 모든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아주 세밀하게 계획하시고(욥기28,4) 역사(役事) 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욥기 38장 11절은 욥기 38장 8절에서부터 언급되었던, 하느님께서 바다와 땅을 분리하고 경계를 그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결론이며, 동시에 바다가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바다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이다.
욥기 38장 11절에서 '~할 때에 말이다'에 해당하는 '와오마르'(waomar;and said)의 원형 '아마르'(amar)의 기본적인 뜻은 '말하다'이다.
여기서 이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의 주어와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본문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피조물인 바다도 이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서 '도도하다는 것'은 파도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넘쳐흐르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이상은 안된다'는 말과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의미상으로 같은 말인데, 반복을 통해 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출렁이는 파도, 그리고 그것의 한계를 정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 그것에 복종하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여기서 바다를 향해 '너희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에게 이제 더 이상 무익한 변론이나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를 간과하고, 함부로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거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뜻에 대해 판단하는 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연중 제12주일 복음(마르4,35~41)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9~41)
'꾸짖으시고'로 번역된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는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경우에 베드로를 향해서(마르8,33), 더러운 영을 향해서(마르1,25; 9,25), 열병에 대해서(루카4,39), 그리고 여기서는 바람을 향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 인간과 영계와 질병에 대해서까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권세가 미치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 구원 사업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를 꾸짖으셨으며, 질병과 부마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을 꾸짖으셨고, 게리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막는 풍랑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꾸짖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표출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권위 있는 활동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희생 제사를 바치며 달래거나 겁을 주는 방법이 아닌, 권위 있는 말씀으로 꾸짖는 방법을 이용하셨다.
한편, '바람'과 '호수'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가 동시에 등장하는 점이나 마르코 복음 4장 39절 후반절에서 호수더러 잠잠하라고 했는데,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점을 보면 그렇다.
구약 성경에서 '호수' 또는 '바다'는 욥기 38장 8~11절, 예레미야서 5장 22절에서 태고의 혼돈을 나타내며, 시편 69장 2절이하와 이사야서 43장 2절에서는 의인이 당하는 시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타신 배를 삼키고 그들을 죽이려 하는 호수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39절의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페피모소'(pephimoso; be still)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 분사 '페피모소'(pephimoso)는 그리스 문학의 이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령 제압을 위한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예수님 활동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부르짖음을 듣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역사는 오로지 주 하느님께 돌려지는 구약적 배경을 갖는다(시편107,29.30).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41절의 '복종하는가?'에 해당하는 '휘파쿠에이'(hypakouei; obey)의 원형은 파쿠오'(hypakouo)인데, 여기서는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으로 쓰였고, 어떤 곳에서는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형인 '휘파쿠우신'(hypakouousin)이 쓰였다.
복수로 쓰인 것은 '바람과 호수'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풍랑의 원인을 여러가지 자연적인 요소들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단수로 쓰인 것은 풍랑의 원인을 한 위격 또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연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흉폭해져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자연을 악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락한 자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조종받는 자연도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24년 06월 23일 일요일
[연중 제12주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에는 언제나 불확실함이 있으며, 만일 너무나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사에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일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을 확실히 만났다고 말하면서도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표지입니다”(『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 없기에, 너무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자 노력할 뿐이고, 그 노력으로 숨겨진 의미를 아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순과 고통, 예기하지 못한 사고, 소중한 이와 헤어짐 등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유를 붙일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분의 뜻을 찾는 여정을 걸어갈 뿐입니다.
제1독서의 욥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모험에 나섰습니다.
그의 눈으로는 무고한 의인의 고통, 아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불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고, 이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묻고자 합니다.
이에 대하여 결국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답변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크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크심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인간 사고의 틀 안에 가두기보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분의 크심을 인정하고, 불확실성 안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럴 때 알 수 없는 고통의 신비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06월 23일 일요일
[연중 제12주일]
오늘은 무엇을 위해 미사를 드렸나요?
내 소원을 위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마르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 호수 저쪽은 어떤 곳일까? 앞 26절 이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저절로 사람들에게 열매 (구원)를 맺게 해 주시는 그 은총은 사람의 지혜로 보면 겨자씨 처럼 작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래서 거짓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그 새들이 주는 죄악들을 다 품으시는 큰 나무, 곧 모든 죄를 품으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십자 나무를 진리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그 모든 비유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진리로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리를 못 알아듣는다. 왜? 선악 구조의 그 인간의 지혜로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성경을 사람의 뜻, 지혜로 깨달으려 하기에 말씀이 어렵고, 그래서 선악의 하느님으로 믿음과 상관없는 곧 그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한껏 쫄아 있는 모습을 겸손으로 착각하는 그 헛된 신앙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하느님은 그 종의 신분,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로마8,15)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진리, 사랑(아가페)은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흉내 낼 수 없는 진리이며 사랑임을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아이돌(우상), 블랙보우(시험)의 단계에 머물러 호라우(깨달음)을 하지 못한, 빛(아침)으로 파스카(건너가다)하지 못한 그 어둠(저녁)의 풍랑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시작이 어둠의 호수 건너편, 빛으로 건너가자(파스카)로 시작하신 것이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 깨닫지(호라우) 못한 군중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 곧 깨닫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지혜, 그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여 자신들의 뜻,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열심히 따르는 것이다.
독서(2코린5,15-16)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러, 죽으러 오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기 위한 메시아, 구원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피조물)은 자신의 뜻이 아닌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사도는 말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피조물은 창조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주신 숨(영)으로만 살 수 있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 말씀을 깨닫지(호라우) 못한, 그래서 자신의 뜻을 위한 예수님으로 그 속된 기준으로 생각하는 그 선악의 말, 그 헛된 말, 물이 배(교회)에 가득 찼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현실임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성경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 이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 잠은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주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배(교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제자(성도)들에게 죽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깨어나심은 그 죽음에서 부활인데 죽어야 할 제자들을 대신해 죽으셨고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헛된 말을 갖은 제자들을 살리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닌 풍랑을 일으켰던 바람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대속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신앙이 아닌 자신의 선 의(善 義)를 위한 신앙으로, 그래서 능력의 주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는 그 자신의 열심을 더 의지하는 믿음과 상관없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 그 믿음 없는 그 헛된 신앙을 살피라 하신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배(교회) 안에 있는 제자들이 배(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도대체 모른다.
오늘 사도는 말한다.~
독서(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옛것- 율법(제사와 윤리)의 신앙은 지나갔다. 다른 말로 성경을 호라우(깨달아)해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시는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이 아닌, 내 죄를 대속하신 그 그리스도를 구원의 진리, 새 계명, 새 계약으로 깨달아 그분 안에 있으면, 믿으면 옛것, 그 율법에 머물러 땅(흙), 그 없음의 존재일 뿐인 이들이 새것, 하늘의 진리로 있음의 그 새 존재가 되는 것이다.
(1베드1,18-20)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선악)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새 계약)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 오늘 예물기도에서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셨는데 주님께서 죄의 대속, 그 속죄 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제사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피로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해 졌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섬겨 주셨다(마르10,45) 그것을 알아야, 믿어야 올바른 섬김이 나온다.
올바른 섬김이란 우리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주셔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 죄인들이 하늘의 용서, 평화, 안식을 얻게 되었으니, 구원을 다 이루셨으니 그 진리이신 하느님께 찬미의 감사를 드리는 그 섬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최종 목적이다.(이사43,7.21)
(사도17,24-25)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성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죄인(없음)의 자리에서 의인(있음)의 자리로 파스카한 그 안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으심이 있었음을 늘 기억하며 감사의 신앙,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