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마르8,14-21)

2024. 2. 13. 오전 6:34:38

글자

 

20240213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마르8,14-21)


1독서<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화답송>시편94,1213.14-15.18-19(12ㄱㄴ)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생각하였을 때,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받쳐 주셨나이다. 수많은 걱정들 제 속에 쌓여 갈 때, 당신의 위로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나이다.

 

복음<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4-21)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1,12~18)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3~15)

 

야고보는 1장 2-12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 13-18절에서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면의 욕심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사와 선물에 대하여 말한다.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온갖 좋은 선물들만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2절과 12절에서는 '시험'이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13절에서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페이라스모스'(pheirasmos)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페이라조'(pheirazo)는 인간의 욕심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 (창세22,1 ; 탈출15,25 ; 신명8,2 ; 13,3 ;33,8 ; 2사무24,1 ; 시편26,2).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테스트하는 성격의 시험일 뿐,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마태4,1-11),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의 성향을 가진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서 발생한 죄의 유혹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창세3,12-13 ; 잠언19,3).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죄의 유혹들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3)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 누구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가 쓰였다는 것은 이 사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마치 죄를 부추겨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탈출4,21 ; 7,3 ; 10,1.20 ; 2사무24,1; 1열왕22,19-23). 여기에 대해 우리는 로마서 1장 28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오히려 온 천하에 주 하느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셨다(탈출10,1.2).

또한 하느님께서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교만에 빠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부추기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1역대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이미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합 왕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마음을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꾀어 죽게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열왕22,19-23).

이러한 세 가지 사례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14)

 

'사람은 저마다'라고 번역된 '헤카스토스'(hekastos) '각 사람'이라 말할 수 있고, 인간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시험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스'(ephithimias)의 원형 '에피튀미아'(ephithimia)는 '~을 향하여'란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hi)와 그 자체로 이미 '열망' 혹은 '뜨거운 감정'이란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고, 죄악된 자아만을 충족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욕망에'에서 '~에' 번역된 전치사 '휘포'(hypo)는 '~아래에'라는 문자적 의미와 더불어 '~의 영향력 하에서' 라는 비유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욕심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로잡혀'(끌려)로 번역된 '엑셀코메노스'(ekselkomenos)는 사냥감이 덤불에서 끌려 나오듯이 사람이 자기의 욕심에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 수동태로서 그 무력한 태도가 강조된다.

 

'꼬임에 넘어가는'으로 번역된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는 낚시나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유혹에 걸리도록 속이는 것 의미한다. 이 단어 역시 수동태로서,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꼬임에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사냥이나 낚시에서 사용되는 두 단어의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유혹을 받는 그 원인이 다른 제3자나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를 짓고 싶어하는 각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있다.

이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의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므로 죄에 빠진 그 원인을 하느님께 결코 돌릴 수 없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5)

 

이 구절은 욕망(욕심)이 갖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악의 진행과정을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잉태와 출산, 성장과 죽음의 모습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쉴라부사'(shillabusa)의 원형 '쉴람바노'(shillambano)동사는 마치 여자가 은밀하게 아이를 가지듯이 마음에 욕심의 씨가 뿌려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욕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 '욕심'에 눈이 멀어 유혹된 인간의 내면에서 '욕심'은 그를 사로잡아 '죄'(하마르티아 ; hamartia)를 낳는다.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그 '죄'를 낳는 것이다. (잠언7,15-23)

 

여기서 죄는 태아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죄는 갓난 아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죄를 방치하면 성장한다. 

여기서 '다 자라면'(성장한 후)로 번역된 '아포텔레스데이사'(aphotelestheisa)의 원형 '아포텔레오'(aphoteleo) '완성하다', '다끝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성취될 때'(when is accomplished), 또는 '완전히 자랄 때'(when is full-grown)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자란 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 '죽음'이다(로마5,12 ; 6,20-21 ; 7,11). 여기서 '죽음'(다나토스; thanatos)은 바로 영적인 죽음, 즉 최후 심판때의 두 번째 죽음(묵시20,14)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최종 결과인 '죽음'은 12절의 '생명의 화관'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전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7-18)

 

이제 야고보는 17-18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심을 밝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선물'로 번역된 '도시스'(dosis)와 '은사'로 번역된 '도레마'(dorema)는 동의어이다. '도시스'는 주로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도레마'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일 뿐이고, 둘 다 영역으로는 'gift'이다.

'위에서'라는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어지는 '빛의 아버지에게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빛의 아버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이다. 좋고 완전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내려옴을 강조한다.

'뜻을 정하시고' 번역된 '블레테이스'(buletheis)의 원형 '블로마이'(bulomai)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나오는 사악한 욕망(욕심)의 반대 개념을 지니기도 한 동사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이는 외부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써 인생에 대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낳으시어'로 번역된 '아페퀴에센'(aphekiesen)의 원형 '아포퀴에오'(aphokieo)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 동사가 부정 과거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거듭남 일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거듭남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첫 열매', 즉 '아파르케'(apharche)는 원래 구약의 전문적인 제사 용어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과 동식물의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말론적 새 창조(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첫 열매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이다. (1베드1,23 ; 2코린6,7 ; 에페1,18 ;콜로1,5 ; 2티모2,15 ; 로마10,13-17).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말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무라실까 싶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두 번이나 일으키셨습니다(마르 6,30-44; 8,1-10 참조).

제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군중에게 그 빵을 나누어 주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에 먹을 빵이 없는 상황이 닥치자 다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오천 명을, 한 번은 사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분을

자기들 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교회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나라로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우리가 대개 염려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나 필요한 물품,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는 많은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그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의지하는 법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거센 풍랑에 배가 파선되지 않을까 염려하였고(마르 4,35-41 참조),

오늘은 배 안에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염려가 결국 불필요한 것이었듯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염려하는 많은 부분도 불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시고,

그분께서 험난한 항해의 여정 속에 늘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마르8,14~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15)

 

마르코 복음 8장 15절의 두 동사는 모두 현재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명령임을 드러낸다.

'너희는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 be careful)의 원형 '호라오'(horao)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실체를 알고서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블레페테'(blepete; beware; watch out)의 원형 '블레포'(blepo) 역시 사물이나 현상을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통찰하는 것과 어떤 것에 유의하고 조심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한 문장에서 동일하게 비슷한 뜻의 동사가 함께 연속해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할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누룩'에 해당하는 '쥐메스'(zymes; leaven)의 원형 '쥐메'(zyme)는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침투성과 영향력이 강한 악(惡) 상징적, 비유적 매개체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누룩'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타인에게 강하게 미칠 수 있는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징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불신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형식주의에서 비롯한 그들의 독선과 위선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는 그를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향에서 비롯되는 불경건과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6장 11절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 으로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사이 '사두가이들' '헤로데'라는 차이가 있다.

사두가이들 천사, 영적 존재와 영적 세계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는 등 비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며,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헤로데 당원들도 역시 정치적이며 불경건하고 비신앙적인 삶을 사는 세속주의자, 현세주의자들이므로, 두 집단이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바리사이, 사두가이, 헤로데 모두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태오 복음사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강조하여 기록했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헤로데를 강조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20240213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도 빵을 나누고, 또한 남은 빵을 모으며 이 기적에 직접 참여하고도 주님의 권능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먹일 빵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체험한 기적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닌 데도, 그들은 불안해하며 수군거립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고도 왜 여전히 주님의 권능을 의심하고 불안해할까요?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도,

막상 비슷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다.

주님 체험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강렬한데도, 계속 돌이켜 생각하거나 쇄신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많은 것을 체험하고도 이를 계속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런 체험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여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사람들이고,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축복입니다.

어떤 계기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은총을 체험하지만,

그 체험이 단단한 믿음과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개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갑니까?

기억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구원으로 이끕니다.

미사 가운데 언제나 최후의 만찬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듯이,

우리 삶에서 베푸신 주님의 은총을 늘 기억합시다.

그 기억이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열고 의탁하게 하는 용기와 희망을 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2월 13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지녔으면서도아직 땅에서 기는 신앙인들

 

복음(마르8,13-22)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달마누타(과부) 지방에 있는 그들이다. 그 과부의 삶을 고집하는 이들을 떠나신 것이다.

땅(현세)의 것을 위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열심히 지킨 옛 계약, 그 율법(제사와 윤리)으로는 죄의 심판을 받을 수 없어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곧 그 율법을 대속하시고 용서, 생명을 주시는 그 새 계약의 예수님께서 남편(신랑)으로 찾아오셨는데 시험, 논쟁까지 해가며 다른 신랑(표징)을 청했기에 떠나신 것이다.

먼저 앞1절 이하의 표징을 복습(復習)하자 - 7개의 빵으로 4,000명을 먹이신 표징(標徵)이다. 7은 안식을 뜻하며, 그 안식은 율법, 그 옛 계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으로 완성하시고 용서, 의, 구원을 주시는 그 새 계약으로 얻는 것이라 했다.

 

(마르2,28)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에페5,23)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 그 예수님을 거부(적대)했기에 떠나신 것이다.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 배(교회) 안에는 빵이 ‘한 개’ 밖에 없어야 한다. 곧 ‘교회의 머리, 주인이신 새 계약의 그리스도’ 그 한 분만이 생명의 빵, 구원의 말씀이신 것이다.

 

(마태8,8)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코린8,6)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 바리사이(율법학자)와 헤로데(세상과 섞인 임금)는 ‘율법을 열심히 지킨, 그 자기 의로움으로 존재(存在)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조심하라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그 한 분만으로 존재 한다는 것을 적대(敵對)한다.

 

(로마3,19) 19 우리가 알다시피율법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 온 세상(世上)과 타 종교(宗敎), 모두 율법(律法)신앙(信仰)인 것이다.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그들(구원이 없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깐, 의문(疑問)을 풀고 가자.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要求)하지 않으시는가?’ 아니다. 율법은 반드시 다 실행(實行)되어야 한다. 율법은 하느님의 성품이며,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설명, 메뉴엘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흙(티끌)인 인간은 그 창조주 하느님의 법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가 없기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대속(代贖)으로 다 완성하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을 전가(傳家)시켜 주심으로(로마8,1-3)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그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는 것이다.(갈라4,4-5참조) 믿음으로....(믿음은 성경(聖經) 말씀 안에 머무를 때 생긴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 지금까지 의 말씀을 모르면 세상(땅)의 양식(빵), 죄(罪)등을 걱정하게 된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복습(復習)해 보자. 육(肉, 땅)의 빵, 그 죽음의 빵 다섯개를 예수님께서 받아 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빵)으로 바꾸어 내주시어 열둘(12)로, 하늘 백성으로 살리셨다.(6장 오병이어 참조) 그러므로 열둘은 하늘의 안식(7)을 받은 것,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식(7)의 빵을 받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용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곧 이미 간직하고 있는 용서, 하늘의 안식을 깨닫지 못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 4,000명에게, 그들이 이미 간직하고 있는 그 일곱 개의 빵이 안식임을 다시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안식을 누리도록 가르침으로 주신 것인데(8장)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의 죽음, 그 사랑, 곧 피의 새 계약, 그 한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간직했던 빵 한 개가 생명의 빵’임을, 자신들이 따르는(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명, 안식임을 모르고 근심,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너무나 안타까우신 것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과 한 몸이 되지 못한 달마누타(과부)의 사람인 것이다.

 자신들의 생명, 안식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먼 소경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절이 눈먼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22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참 진리구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 정작 하늘의 용서안식을 누리지 못해 세상것으로 근심걱정하는 눈먼 과부의 삶을 사는 저희들을 의탁합니다하늘의 용서안식을 이미 간직하고 있음을그래서 하늘을 날 수 있게 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이끌어 주소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9,22-25)24.02.15조회 10[재의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마태6,1-6.16-18)24.02.14조회 12[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마르8,14-21)24.02.13조회 9[연중 제6주간 월요일]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 (마르8,11-13)24.02.12조회 10[설날] 깨어 있는 종들! (루카12,35-40)24.02.09조회 14[연중 제5주간 금요일] “에파타!” (마르7,31-37)24.02.09조회 11[연중 제5주간 목요일]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 (마르7,24-30)24.02.08조회 11[연중 제5주간 수요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 (마르7,14-23)24.02.07조회 9[연중 제5주간 화요일] 사람의 전통 (마르7,1-13)24.02.06조회 10[연중 제5주간 월요일](아가타 축일) 예수님의 옷자락 (마르6,53-56)24.02.05조회 9[연중 제4주간 토요일] 가엾은 마음 (마르6,30-34)24.02.02조회 12[주님 봉헌 축일] 구원을 보는 눈 (루카2,22-40)24.02.02조회 12[연중 제4주간 목요일] 둘씩 짝지어 파견(派遣) (마르6,7-13)24.01.31조회 10[연중 제4주간 수요일] 고향(故鄕) 방문 (마르6,1-6)24.01.31조회 40[연중 제4주간 화요일] “탈리타 쿰!” (마르5,21-43)24.01.29조회 10[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귀와 돼지 떼 (마르5,1-20)24.01.29조회 7[연중 제3주간 토요일] 호수를 잠재우시다. (마르4,35-41)24.01.27조회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