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 11일 목요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容恕) (마태18,21-19,1)

제1독서<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에제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화답송(시편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복음<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제12,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11)
여기서 3인칭 복수형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어원상 '유배를 당해'(포로로)로 번역된 '밧셰비'(bashebi)는 '벌거벗은 상태로'라는 의미이고, '끌려'(사로잡혀)로 번역된 '빡골라'(baggolla)는 '포로의 상태로'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둘 중 한 단어만을 가지고도 포로로 끌려간다는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이 본문에서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B.C.586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보다 생생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옷이 다 벗겨진 채로 손과 발이 결박을 당해 약속의 땅 밖으로 이방인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주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끝까지 범죄할 경우,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2)
본절에서는 치드키야 임금이 도주하는 광경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가 처한 절박한 상황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임금은 '짐을 어깨에 메고' 피난길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팔을 늘어뜨려 운반하지 못하고, 어깨에 지고 운반한다는 것은 그 짐이 매우 무거움을 암시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피난가는 것도 치욕스럽지만,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쫓겨 무거운 짐까지 져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이것은 짐을 질만한 신하가 없거나 혹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으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평생 힘든 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피난을 가야 했던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주는 '어두울 때에' 이루어졌다. 원문에 '빠알라타'(baallatah)인데, 이것은 어스름한 상태가 아닌 '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
즉 이동하기에 매우 불편한 시간에 체면을 버리고 도주하였음을 나타내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깊은 밤에 비겁함과 나약함으로 도주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남부 유다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통하여 나갔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는 치드키야 휘하의 가신과 군사들일 수도 있으며, 혹은 바빌론 군사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본문에서 언급하는 벽은 가신들이 치드키야를 도망시키기 위해 일부를 파쇄한 성벽일 수도 있고, 혹은 바빌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가 훼손된 성벽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일개의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동물과 같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도망간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구멍을 뚫음을 나타내는 동사 '야흐테루'(yahtheru)의 원형 '하타르'(hatar)는 도둑질을 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것(욥기24,16)과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요나3,2)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이런 용례는 치드키야의 비참함을 묵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치드키야 임금이 취하게 될 이러한 행위 역시 에제키엘이 취하였던 상징적 행위와 동일하다(에제12,7).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크나큰 슬픔과 비통한 마음 때문에 치드키야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땅을 애써 외면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치드키야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으나 바빌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두 눈이 뽑힌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 후,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었다(2열왕25,1~7; 예레52,11).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치드키야가 도망치면서 땅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두 눈이 뽑힐 것에 대한 예표라기 보다는, 그후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통치했던 그 땅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에제12,13참조).

2022년 08월 11일 목요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130,3).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잊으십니다.
반면 우리는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심 기둥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회개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오늘 복음처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서로 약간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앞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곧 용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곧바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6,14-15).
마치 주님의 기도의 핵심이 형제들에 대한 용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용서의 범위가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현재 시제를 통하여 용서의 행위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본능에 맞서 언제나 용서를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점점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용서가, 용서받는 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신앙 - 용서, 구원은 죄로부터 출발
복음 (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일흔 일곱 번 까지 용서(容恕)는 희년의 정신으로 하는 용서임을 배웠었다.
(레위25,8-9)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 숫양이 죽어 남긴 뿔 나팔 소리다. 곧 나팔 소리는 죄인들에게 용서(容恕), 자유(自由), 해방(解放)을 주시기 위해 그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 선포의 예표(豫表)다.
(레위25,10)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 그리스도를 통(通)해 거저 얻는 회복(回復)이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인간(人間)은 용서 받아야 할 존재(存在)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 하늘 임금은 죄인(罪人), 원수(怨讐)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들 죄의 속죄 제물로 당신 아드님을 내주신 그 무조건적 용서, 자비, 사랑이심을 봤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 심판(審判)을 받을 때, 그 하늘 임금님의 용서, 자비, 사랑만을 의지해야 한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 만 달란트-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조공(租貢)으로 바쳤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이란다. 사람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金額)인 것이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 빚은 죄 값이다. 곧 우리의 죄 값은 우리 스스로가 갑을 길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 팔아- 자신이 갖은 모든 것이 아무 가치(價値)없음을 인정하는 버림, 자기부인(自己否認)을 하라는 것이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안 되니 자신이 갚겠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되었다면 “잘못 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다 갚겠단다. 어떻게 그 많은 빚(죄)을 ‘해결(解決)하겠다’는 것인지....
자신의 처지, 주제(主題)파악을 못하고 오만(傲慢)을 부리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사랑, 자비이신 분의 눈에 애초로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 무조건적(無條件的) 하느님의 은총(恩寵), 은혜, 용서, 회복이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 멱살을 잡고(프니고- 숨을 막다) 곧 죽이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용서, 죄의 더러움, 흉측함의 무게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없는 사랑, 자비로 자신의 추악(醜惡)한 죄가 없어졌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큰 잘못, 죄악보다 다른 이의 잘못을 더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픔, 고통만 보고 다른 이의 아픔, 고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다른 이의 잘못에는 사정이 없다. 그래서 숨을 막는 것이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죄)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죄)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로 용서 받았듯이 다른 이 또한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 예수를,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렸을 때 마음으로부터 용서(容恕)가 나오는 것이지 우리의 작심(作心), 결심(決心)으로는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34절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갚을 수 없는 그 많은 빚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 답(答), 길은 회개(悔改)다. 자신의 생각에서 돌아서서 주인, 임금과 다시 셈을 하면 된다.
“주님! 저에게는 능력(힘)이 없습니다. 빚(죄)을 갚을 길(방법)이 없습니다.” 하는 그 자기 버림, 부인(否認)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대속 하시고 갚아주신, 주인께서 예비하신 그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다. “하느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시로 잘못을 하고, 실패하고 넘어진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하며 대속의 십자가를 예비하신 하느님께 감사가 나오게 되고, 그 감사가 나를 바꾸는(변화) 힘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죄, 실패가 있는곳에 하느님의 은총(恩寵)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로마5,20-21)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모든 것- 희로애락(喜怒哀樂), 선과 악을 통해 선(용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다. 용서(容恕), 구원(救援)의 신앙(信仰)은 죄로부터 출발(出發)하는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 속죄 제물로 죽은 숫양의 소리, 곧 하느님의 사랑, 용서, 회복인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러 가셨을 것이다.
☨보호자 성령님! 당신의 가르침과 이끄심으로 우리 자신의 본질(흙-없음, 죄인)을 깨닫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 자비만을 의탁하는 자녀로 돌아가게(회복)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8,21~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2022년 08월 11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죄(罪)는 없어지고, 용서(容恕)는 이루어졌는데,
복음(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한없이 용서(容恕)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존재(存在)가 아니라 용서 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이전 세우신(에페1,4)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용서받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코린15,21-22)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로마5,12-18보충)
= 하느님의 용서(容恕)는 곧 사라질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平和) 정도가 아니다. 죽음도 어둠도 없는 영원한 빛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쉼, 평화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용서, 곧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즉 다른 이기 나에게 잘못한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하느님께 잘못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리 커도, 인간이 하느님께 잘못한 것과는 비교불가(比較不可)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이웃의 뒷통수를 치면 한다 되 맞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통령(大統領)의 뒷통수를 치면 그 자리에서 경호원에게 총 맞아 죽을 죄(罪)다.
(골로2,13-14)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그리스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 ‘만(萬) 탈렌트’는 인간이 빚을 질 수도, 같은 길이 없는 큰 금액이다.(당시 국세(國稅)보다 더 큰 금액이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예화를 들어 하느님의 크신 자비(慈悲)와 인간의 무지(無知)를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 종인 자신과 아내, 자식을 팔아도 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런데 그것을 갚은 것으로 해 주겠다는 것이다. ㄷ자비(慈悲)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정도의 자비(慈悲), 용서(容恕)를 말씀 하셨을까? 다 팔아서, 곧 자신과 아내, 자식만을 위ㅏ해서 살았던, 그래서 하느님께 빚(죄)을 졌던 그 자신의 삶을 팔아 버리고, 부인(副因)하고, ‘탕감(蕩減)하셔서 다 없애주시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갚을 길(방법)이 없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 해결(解決)하겠단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무지(無知), 교만(驕慢)이다. 그 모습을 가엾게 보시는 하느님이시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 하느님의 크신 자비다. 그러나 공의(公義)의 하느님이시다. 그냥 탕감해 주신 것이 아니다. 앞에서 확인 했듯이, 탕감(蕩減), 그 안에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 들어 있음이다. 그 빚 문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없애 버리셨기 때문이다. 감사(感謝)로 늘 마음에 새기고 살자.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 ‘백 데나리온’, 용서받은 ‘만 탈렌트’ 비하면 껌 값도 안된다. *멱살을 잡고(프니고- 숨을 막고) ‘죽일 듯이’라는 말이다. 거저 탕감(蕩減)받은 하느님의 자비(慈悲)를 마음에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 결국, 삶의 목적이었던 자신과 아내, 자식이 용서 못하는 자신의 고집(固執), 아집(我執) 때문에 자신과 아내, 자식까지 불행(不幸)을 겪게 했다. 자신과 온 가족을 비탄(悲歎)에 빠지게 한 것이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동료의 빚(죄)을 탕감해 주지 않아서 악(惡)한 종이라 하신 것이기 보다, 여전히 그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용서,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느님의 자비(慈悲)가 없음을 악(惡)하다” 하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의 뜻을 팔지 않은, 부인하지 않은 자신의 독단적 생각으로 판단하는,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은, 하느님과 분리(分離)된 그 악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聖經)은 이혼(離婚)이라 말씀한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 하느님과 분리된, 그 이혼의 상태인 유다 지방에서 다시 가르침을 주신다.
<사랑과 용서>
6.25전쟁 당시 1.4후퇴 때 미군이 강원도에서 후퇴하던 중, 산속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따라가 보니 눈 속에서 소리가 나더란다. 그래서 눈 더미를 치워보니 그 눈 속에서 발가벗은 여인은 죽어 있었고, 그 여인의 옷으로 꼭 감싸진 아기가 울고 있었단다. 엄마는 아기를 살리려고 자신의 옷을 몽땅 벗어 그 옷으로 아기를 감쌌고, 자신의 체온(體溫)으로 보호하여 아이를 살리려 했던 것이다.
미군은 여인을 그 자리에 묻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아기는 입양(入養)하여 데리고 와서 키웠단다. 그 아기가 20세 되던 해 그 청년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그 엄마의 무덤에서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청년은 자신의 옷을 벗어 엄마의 무덤을 덮어주며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하며 오열(嗚咽)했단다. 청년은 그 엄마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늘 그 사랑을 마음에 지키며 그 사랑의 힘으로 감사(感謝)로 살았단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우리) 죄(罪)를 덮어 살리시려 옷이 아닌 ‘당신의 살과 피를 흘리는 가죽’으로 덮어 주셨다.(창세3,21) 그런데 내(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용서(容恕)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느님께만 있다.’
그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에 지키고, 그 하느님의 용서로 나에게 잘못한 이를 보는 것, 우리의 용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용서를 알려 주는 것, 또한 우리의 용서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주는 것이다.(예레31,31-34 히브10,16-17)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 그 새 계약으로 이미 없어진 죄를 깨닫게 하소서. 이미 받은 용서를 찾고 나누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자비)가 아버지의 뜻(탕감)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