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토요일] 祈禱 (루카18,9-14)

2022. 3. 26. 오전 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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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26일 토요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祈禱 (루카18,9-14)

   

 

제1독서<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信義다.>(호세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화답송 시편 51(50),3-4.18-19.20-21ㄱ(◎ 호세 6,6 참조)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 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

 

복음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9-14)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호세6,1-6)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1-2)

 

여기서 '자' 또는 '오라'로 번역될 수 있는 '레쿠'(leku; come)은 어원상 걸어가는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 '얄라크'(y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서 '너희는 걸어가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죄악과 범죄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웨나슈바'(wenashubah; and let us return)의 원형 '슈브'(shub)는 호세아서 5장 13절에서 주님께서 당신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호세아서 2장 7절에서 이 단어는 간음을 행한 여인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이 본 남편인 주님께로 돌아감을 지적하는 데 사용되었고, 호세아서 3장 5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스라엘이 오래동안 하느님을 떠난 상태로 살아가다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갈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원래 하느님의 품에 있으면서 평화를 누리던 자들이었는데 주님을 떠나버렸다. 마치 고메르가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떠나 바알을 중심으로 해서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오래 동안 섬겼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해 주님께 이미 심판을 당했든, 아니면 아직 심판을 당하지 않았든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들의 영적 고향인 주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이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를 통해 당하게 될 극한 고난, 즉 멸망과 포로 생활을 상징하고, 그 후에 주님의 회복하심의 은혜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구절이다.

 

원문에는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사하는 문장으로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비록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은 불가피하지만, 그후에 주님의 회복의 은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에 해당하는 '타라프'(taraph; has torn us to pieces)의 기본형은 호세아서 5장 14절에서 '잡아 찢어가고'로 번역된 '에트로프'(etroph)의 원형과 동일하다.

이러한 일치는 비록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사자(a lion)처럼 이스라엘을 움켜쥐고 갈기갈기 찢어버리셨지만, 이후(以後) 정한 시기에 이르면 고쳐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베푸실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에 해당하는 '웨이르파에누'(weirphaenu; but he will heal us)의 원형 '라파'(rapha)는 어원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레위13,18; 신명32,39).

특히 신명기 32장 3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선언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찢으신 것을 고쳐줄 다른 세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찢으신 상처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상처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징계를 당할 때,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 회복의 은총을 누리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분께 대해 더욱더 적대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대항하다가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하고 만다.

 

호세아서 6장 1절 후반부터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에 해당하는 '야크 웨야흐뻬셰누'(yak weyahbeshenu;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호세아서 6장 1절 전반부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같은 내용의 병행 대구 문장으로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에게 회복의 은총이 보장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2)

 

호세아서 6장 2절의 예언은 주님께서 고난 중의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시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그들에게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할 것을 강조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라는 표현에서 '둘', 혹은 '셋'이라는 숫자는 구약 성경에서 수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욥기5,19; 잠언30,15).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속한 시일 내에, 그리고 확실히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자면,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묻혀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를 지내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시간은 날짜로 보면 사흘이요, 시간으로 보면 이틀이다.

그리고 '우리를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예키메누'(yeqimenu; he will restore us; he will raise us up)의 원형 '쿰'(qum)은 어원상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19,1; 24,54).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으며, 앞의 '우리를 살려 주시고'라는 표현과 같은 뜻의 병행 대구를 형성하는 단어로 쓰였다.

즉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멸망과 죽음의 형편에 놓인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결과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을 나타내는 예언이다. 

'우리가 ~살게 되리라'에 해당하는 '웨니흐예'(wenihyeh; and we shall live)의 원형은 문두에 나오는 '우리를 살려 주시고' ('예하이예누'; yehaiyenu; he will relive us)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동일한 '하야'(haya)이다.

 

이것은 어원상 목숨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사역의 의미, 누군가가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역사(役事)로 인해 생명이 영위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미완료 1인칭 복수로 쓰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회복과 소생의 역사(役事)하심으로 살아나서 하느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그들이 하느님 앞에 살게 되리라는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더 이상 우상을 쫓지 않고, 하느님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들은 외적 상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영적 상태까지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20220326일 토요일


[] 사순 제3주간 토요일[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비유를 들어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먼저, 제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루카 18,1-8 참조).

이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

곧 바리사이들(16,15 참조)을 대상으로

또 다른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기도의 올바른 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유다인을 대표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유다인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간음하는 이들의 범주에 몰아넣고 죄인 취급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단식과 십일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자랑합니다(18,11-12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성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18,13 참조).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리가 의로운 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신앙 행위에 바탕을 둔 자기 확신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신분을 자랑하였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의로움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오는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넘어서 그리스도인 전체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사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리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하느님께 받을 상도 클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1년 3월 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자신의 잘못된 罪(病)를 스스로 고치겠다는 어리석은 者가 많다.

(루카18,9-14)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 스스로의 열심,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자기 자랑과 다른 이를 판단하게 된다. 그것이 죄(병)를 잉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善, 義는 개짐(쓰레기)일 뿐이라 하신 것이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ㄱ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 하느님의 뜻, 말씀에 의한 기도가 아닌 자신의 뜻, 말에 의한 교만(驕慢)의 모습이다.

 

11ㄴ‘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이다.

 

(갈라3,10-11.24)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갈라5,4)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ㄱ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기에 의로움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으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사53,11) 11 그는(예수)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5,9.15)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은혜)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은혜)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14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평지를 이루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높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높게~그렇게 하느님 당신 백성을 자비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루가1,52-55)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끌어 내리시고 빈손으로 내치시는 것, 시련이며 고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셔서 우리를 살리신다. 자기 의로움이 컷던 욥과, 완전한 바리사이였던 사도 바오로를 그렇게 살리 시었쟌은가!

 

오늘독서(호세6,1-3)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부활)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 이틀뒤, 사흘째, 모두 3이다. 사흗날에 씨의 희생, 하늘의 대속,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의롭게 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 敎會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배우는 곳이다. 그분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한다.

 

(마르10,34) 34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로마4,25) 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 우리는 온갖 질병(암)으로 고통 받을 때, 의사에게 돈을 줘가며 나를 맡긴다.그리고 아픈 수술을 자청해서 받는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다. 그런데 영적 질병(암, 죄)들을 거저, 아니 대속의 죽음으로 고치시어 의로움과 구원을 주시겠다는 그 주님께는 청하지도, 감사할 주도 모른다. 어리석음이다.

하느님의 얼(뜻)과 인간의 얼(뜻)이 섞인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어리석음을 죄라고 하신다.(마르7,21~) 오늘 바리사이가 자신의 질병, 곧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하겠다는 어리석은 죄인이다. 그가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우리 이야기다)

 

(마르2,17)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義人이 아니라 罪人을 부르러 왔다.”

 

(요한12,47)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救援하러 왔기 때문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칼)으로 영의 수술을 잘 받도록 하소서.~아멘!!!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9-14)

 

루카 복음 18장 1~8절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절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항상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면, 루카 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에 해당하는 '에프 헤아우토이스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eph' heautois hoti eisin dikaioi; in themselves that they were righteous)에서 '에프 헤아우토이스'는 직역하면 '그들 자신들'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위선적인 의(義)를 행하는 자들이었다(마태6,1).

 

고전 희랍어 문헌에 보면, '의로운 자'란 그 행위가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 신들과 이웃들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했다. 그러한 의무 이행은 그 사람을 불의한 자들과 구별해 주는 기준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정당한 의무도, 그리고 이웃에게 행해야 할 진정한 사랑과 공의도 완벽하게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불렀다(루카20,20).

 

아마도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비록 위선일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열성적인 율법 이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저버림으로써,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껍데기 외형적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신들의 고정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높여 세우는 위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는데, '업신여기는'으로 번역된 '엑수테눈타스'(eksouthenountas; despised; looked down on)는 '경시하다', '얕보다'는 뜻을 지닌 동사 '엑수테네오'(eksoutheneo)의 현재 분사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로이포이 톤 안트로폰'(hoi loipoi ton anthropon; other men)는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 집단 외에는 모두 의롭지 못한 부정한 자들로 여기는 극히 독선적이고 편협한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루카 복음 18장 10절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도시의 건물들 위에 높은 지대인 모리야 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대한 외경심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보통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현재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며, 유대의 시간법으로는 각각 제3시, 제6시, 제9시였다. (삼종기도)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성소가 아니라 성전의 뜰로서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워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리는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을 볼 때, '여인의 뜰'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중 하나는 '바리사이'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 (pharisaios; a pharisee)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확연히 구분되는 '세리'에 해당하는 '텔로네스'(telones; a publican; a tax collector)이다.

 

바리사이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를 중요시하던 당파로 자신들 스스로에 대하여 의롭다고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언 자로서, 사람들에게는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리사이는 의(義)를 대표하는 자처럼, 세리는 마치 부정과 불의의 대표처럼 여겨졌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1절에 나오는 '서서'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자세였다. 여기 '서서'에 해당하는 '스타테이스'(statheis; stood)는 '서다', '두다', '위치하다'는 뜻을 가진 '히스테미'(hystemi)의 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세리가 서서 기도했다는 표현이 능동형으로 쓰인 것과 달리, 바리사이의 경우에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바리사이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즉 자신을 드러내고자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한 것으로 나오는데, 원문에는 '꼿꼿이'가 '프로스 헤아우톤'(pros heauton)이다. 여기서 '프로스'(pros)는 '~에게로 향하여'(towards)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헤아우톤'(heauton)은 '그 자신'(himself)이라는 뜻의 재귀 대명사이므로, '그 자신에게로'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기도했다는 의미도 있고, 문맥상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무리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신의 자랑거리만을 늘어놓으며 하느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것으로도 보며, 혹자는 바리사이가 하느님께 아닌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이제 바리사이는 세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강도 짓'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robbers)는 형용사로,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게걸스럽게 먹는'이라는 뜻이며, 명사로는 '강도', '사기꾼'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에 고용되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으며, 그래서 세리는 지배자들인 로마보다 더 악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졌고, 동족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더군다나 단순히 로마에서 원하는 세금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세금 외의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리사이도 너무나 잘 알기에 세리의 죄를 간접적으로 들추어내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리는 '강도짓' 뿐만 아니라 '불의'를 저질렀다고 지적받는다.

'불의'에 해당하는 '아디코이'(adikoi; unjust; evildoers)는 정의를 해치거나 범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속임수로 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간음'에 해당하는 '모이코이'(moichoi; adulterrers)도 '강도짓'과 '불의'와 다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에 여기서 나열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강도짓을 일삼았고(마태23,14),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불의한 자들'이었고(마태23,28),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다(요한8,7~9; 마태5,28).

 

루카 복음 18장 11절에서 바리사이는 세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이들과 구별되는 자로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회개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구할 것도 없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 18장 12절에서 말한다.

 

구약에서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단식(레위16,29~30; 민수29,7)하도록 되어 있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규정에 없는 경건의 습관으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다고 자랑한다.

바리사이들은 시나이 산에 계약을 맺으러 올라간 날로 여겨지는 목요일과 내려온 날이라고 여겨지는 월요일에 단식했던 것이다.

 

사실 모든 재산과 소득의 십일조를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의 규정을 능가하는 봉헌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단식'하다에 해당하는 '네스튜오'(nesteuo; I fast)와 '십일조를 바치다'에 해당하는 '아포테카토'(apodekato; I give tithes ;I give a theuth of)가 바리사이들의 자랑거리인데,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기보다는 자신만이 의롭다는 교만과 자신이 정작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는 죄인과 같이 취급당하여 거룩한 성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사이 옆에 서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일반적인 자세인데, 세리는 눈을 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치도 않았다.

 

세리는 자신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으며, 겸손함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했으며,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힐라스테티' (hylastheti)는 '힐라스코마이'(hylaskomai)의 수동태 명령형이다. 이 단어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만들다', '자신과 화해시키다'는 뜻인데, 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참회와 겸손의 극치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호의를 가지소서'라는 말이다.

 

 

 

 

2022년 3월 26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희미한 예감(豫感)이 아닌 지금 현실(現實)이다.

 

독서(호세6,1-6)

주님께 돌아가자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못된 짓만 하는 자식(子息)을 매()로 다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다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시다하느님은 자녀의 구원(救援)을 위해 육()의 욕망(慾望)을 죽이셔야 한다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의(), 사랑이시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이틀 뒤사흘째 되는 날같은 사흗날이다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사흗날의 죽음과 부활(復活), 그 새 계약으로 살리신다는 말씀이다()의 욕망(慾望)이 죽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세상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인(宗敎人)들도 다 하는 것이다.

코헬렛(전도서)에서 말씀 하셨듯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헛된 것’ 이기 때문에 자신을 다스려서 새롭게새 것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새로운새 것이 된다.’는 것이다.(2코린5,17)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救援)이 있다는 말이다(요한14,6)

 

(1요한5,19-20)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거짓헛된 것)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진리있음)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정말로 아는가정말 믿어지는가?

 

그러니 주님을 *알자주님을 알도록 힘쓰자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구원의 약속(約束), 그 하느님의 말씀은 비처럼 내리는 어김없는 현실(現實)이다.

 

(이사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죄인(罪人)들의 구원(救援)을 당신의 말씀이 이루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이다곧 말씀이 우리의 현실(現實)에서 활동(活動)하심으로(1데살2,13) 의지(意志)를 일으키시고 실천하게 하심으로다.(필리2,13 1코린12,56)

 

에프라임아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유다야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이스라엘(유다곧 모든 율법자(律法者)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아는믿는 신의(信義)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율법자(律法者)들의 욕망(慾望), 그들의 죄를 드러내심으로(로마3,20) 그 죄의 삯인 죽음으로 넘어뜨리신 것이다.(창세2,17 3.6)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 이었고 심판(審判)의 정의(正義), 공의(公義).

빛이신 하느님 앞에 어둠인 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그래서 그 죄인(罪人)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값으로 외아들(獨生子예수님을 속죄(贖罪)제물곧 희생(犧牲)제물번제(燔祭)물로 보내셔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이신 것이다그렇게 제사(祭祀)가 온전히 다 이루어졌다’ 그것을 믿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신의(信義)며 하느님을 아는 예지(叡智).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信義)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叡智).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그 지혜롭다’ 하는 이들은 절대(絶對지킬 수 없는 신의(信義)며 알 수 없는 예지(叡智).

 

복음(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제가 다른 사람들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율법(律法)의 제사(祭祀)와 계명(誡命)을 열심히 지킨 의로운 사람이다곧 교회(敎會안에 성실한 종교인의 모습이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용서(容恕), 구원(救援)은 죄()에서부터 시작된다곧 자신이 죄인(짐승)일 뿐임을 아는그 낮은 자리에서 받는다.(코헬3,18 마태9,13 참조)

 

(마태15,25-28) 25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마귀(魔鬼)들린 아픈 딸을 둔 이방(異邦여자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그렇습니다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자신이 개(짐승)임을 인정(認定)하는 여자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짐승들의 집에, ‘짐승의 먹이통에 누워 짐승들의 양식으로 오신 구원자이다.(루가2,12)  예수님께서 죄인(罪人)들의 죄()로 죽으시고희생(犧牲제사를 완성(完成)하시고당신의 생명(生命)을 주시는 그리스도시다제사(祭祀)를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구원자시다그러니 현세(現世)의 열심한 제사(祭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사(祭祀)의 의미(意味),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 자비(慈悲), 사랑을 생명(生命)의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으로 먹고마시고입는 것그것이 의()로움 이다.(로마3,20-25 참조)

 

(로마3,25)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율법자)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사랑)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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