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토요일
[파스카 성야]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마르16,1-7)
제3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탈출14,15-15,1ㄱ)
그 무렵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16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17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너희를 뒤따라 들어가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9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서서 나아가던 하느님의 천사가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갔다. 구름 기둥도 그들 앞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가 섰다.
20 그리하여 그것은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구름이 한쪽은 어둡게 하고, 다른 쪽은 밤을 밝혀 주었다. 그래서 밤새도록 아무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22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23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쫓아왔다.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24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
25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집트 병거들의 바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어, 병거를 몰기 어렵게 만드셨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피해 달아나자. 주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집트와 싸우신다.” 하고 말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여라.”
27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날이 새자 물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도망치던 이집트인들이 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 되었다.
31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15,1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이 노래를 불렀다.
화답송 탈출 15,1ㄷㄹㅁ-2.3-4.5-6.17-18(◎ 1ㄷㄹ)
◎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주님은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찬미하리라. 내 조상의 하느님, 나 그분을 높이 기리리라. ◎
○ 주님은 전쟁의 용사, 그 이름 주님이시다. 파라오의 군대와 병거를 바다에 내던지시니, 뛰어난 장수들이 갈대 바다에 빠졌네. ◎
○ 바닷물이 그들을 덮치니, 돌처럼 깊이 가라앉았네. 주님, 당신 오른손이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시니, 주님, 당신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셨나이다. ◎
○ 당신은 그들을 데려오시어, 당신 소유의 산에 심으셨나이다. 주님, 그 산은 당신 거처로 삼으신 곳, 주님 손수 세우신 성소이옵니다.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시나이다. ◎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로마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시편 118(117),1-2.16-17.22-23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
복음<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마르16,1-7)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파스카 성야 제1독서 (창세1,1-2,2)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1~2)
'한 처음에'로 번역된 '뻬레쉬트'(bereshith)는 천지 창조의 시점, 곧 하느님께서 우주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無)에서 유(有)로 동시에 섬광처럼 생겨나게 하신 원천적 창조 사건이 일어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뻬레쉬트'(bereshith)는 '뻬'(be)와 '레쉬트'(reshith)의 합성어이다. 먼저 '뻬'(be)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reshith)는 '근원'(창세2,10), '머리'(창세3,15), '꼭대기' (1열왕18,42)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rosh)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창세10,10), '근본'(시편111,10), '으뜸', '우두머리'(욥기40,19)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뻬'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뻬레쉬트'는 직역하면 매우 단순하게 '시초에', '한 처음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뻬레쉬트'가 말하는 '시초'(처음)는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원점, 곧 시간(時間; the time)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결국 '뻬레쉬트'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바로 그때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즉 인간 역사(歷史)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처럼 천지 창조는 다름아닌 모든 우주 만물의 존재와 그들 사이에 발생할 모든 사건의 기원을 이루는 원초적 사건이다.
이런 천지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뻬레쉬트'는 천지 창조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시간 자체도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기원', 곧 '시간의 원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실로 천지 창조는 시간 자체도 이제 막 시작한 때에 바로 그와 동시에 섬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유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리고 만유를 뛰어넘어 계시는 유일한 절대 자존자(自存者)요, 초월자(超越者)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께서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초월하여 계신다(시편90,4). 반면에, 우리 인생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오직 공간(空間; the space)안에서 시간(時間; the time)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시공에 얽매인 차원(dimension)에 존재하지만, 이 우주 만물 각각은 물론 이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인 시간과 공간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곳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얽매여 있는 인생을 포함한 피조물과의 관계만 아니라면 하느님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하느님 자신의 실존에만 국한해서 볼 때에는 천지 창조 이전과 이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시간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계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천지 만물은 오직 시간의 시작과 함께, 곧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역으로 말해도, 시간도 오직 그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만 그 존재 양상이 전개되어 가는 만물들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無)로부터 유(有)로의 천지 창조(creatio ex nihilo)는 시간의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 또한 천지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함께 창조되었고, 또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우리는 '한 처음에'로 번역된 창세기 1장 1절의 '뻬레쉬트'를 새 성경에서 그 역시 '한 처음에'로 번역된 요한 복음 1장 1절의 '엔 아르케'(en arche)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뻬레쉬트'는 하느님의 천지 창조로 이제 막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던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키고, 반면에 '엔 아르케'는 시간이 아예 흐르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뻬레쉬트'가 무로부터 유가 시작되어 시간이 출발했던 영원과 시간의 접촉점만을 가리킨다면, '엔 아르케'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차원 전반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 구절은 앞서 '한 처음에'란 창조 시점에 제시된 것에 이어서 이제 천지 창조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앞서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데 이어서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힌다.
여기 '하느님'에 해당하는 원어 '엘로힘'(ellohim)은 제1위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다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권세있다', '힘세다'라는 뜻을 가진 '울'(ul)에서 유래한 것 (2열왕24,13; 시편73,4)으로서 '권세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elloah)의 복수형이다(탈출12,12; 신명32,15).
하느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복수형으로 표기함으로써, 그 대상의 권위와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고대 근동 전반의 수사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천지 창조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의 존재 자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얽혀서 빚어내는 모든 역사의 유일한 원초적 기원이다. 따라서 결국 천지 창조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궁극적 기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기원이시다.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욥기1,21; 시편90,3; 코헬렛12,7; 로마11,36).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우리 인생의 궁극적 관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천지 창조 기사 전체가 오직 하느님만이 온 천지를 모두 다 직접 창조하셨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전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 우주의, 특히 전 우주의 대리 통치자인 우리 인간들(창세1,26)의 하느님께 대한 복종과 경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 주체가 어떤 사물을 만들거나 사거나 이를 소유함에 있어서 그 주체 자신이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게 되는 완전하고도 정당한 법적 근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 창조 기사는 거듭해서 전 우주가 스스로 생겨났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엘로힘 하느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임을 그토록 강조한다.
즉 이것은 전 우주와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소유권(탈출18,5; 신명10,14; 에제18,4)과 통치권 (탈출15,18; 시편72,8; 다니엘5,21) 사상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본문은 창조의 시점, 곧 언제 천지 창조가 있었는지를 밝힌 '한 처음에'와 창조의 주체, 곧 누가 천지를 창조하였는지를 밝힌 '하느님께서'에 이어서 이제 창조의 대상(對象), 곧 무엇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는 구절이다.
원문은 '에트 핫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eth hashamaim weeth haarets; the heaven and the earth)이다.
우리말의 '~을'(를)에 해당하는 것으로 직접 목적어임을 표시하는 대격 전치사 '에트'(eth)와 '그 하늘을'이란 뜻의 '핫샤마임'(hashamaim), 또 '그리고'(과)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we)와 '에트'(eth)가 결합된 '웨에트'(weeth), 끝으로 '그 땅'이란 의미의 '하아레츠'(haarets)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현대 천문학이 말하는 지구의 대기권 및 그 너머에 무한히 팽창하는 공간으로서의 우주에 대해 과학적 개념이 없었다.
그 대신에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거대한 금속판인 소위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머물고 있는 셋째 하늘 등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420여회 나오는 하늘은 모두 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 '땅'을 말하는 '아레츠'(arets)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를 가리킬 뿐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성경에는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시편113,3),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2사무17,11) 등과 같이 양극단을 함께 말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다 포함됨을 강조하는 용례가 많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그 하늘들과 그리고 그 땅을'이라는 원어의 표현은 비단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가없는 양자 사이의 공간 자체는 물론 그 안의 모든 물질들, 곧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창조의 대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셨다'
'창조하셨다'의 원어는 '빠라'(bara)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이 단어는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끝으로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빠라'(bara)가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느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느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명4,32; 시편89,12; 이사43,1; 예레31,22).
한마디로 '빠라'(bara)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롭게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이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오직 만물을 초월(超越)하여 자존(自存)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오직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여, 즉 과거와의 연속 안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빠라'(bara)는 실제로 '만들다', '지어내다'의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등장하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셨다', 곧 '빠라'(bara)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섬광처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부활 성야 제3독서 (탈출기14,15-15,1ㄱ)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15)
'앞으로 나아가라고'에 해당하는 '웨잇싸우'(weissau)의 기본형 '나싸'(nassa)는 장막의 말뚝을 뽑아 내어 여행을 출발하거나 진행 중임을 뜻하는 단어이다. 즉 장막을 걷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하느님께서 출발 명령을 하시는 이러한 모습은 전쟁에서의 지휘관의 명령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군대로서, 하느님의 명령과 함께, 이제 하느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의 세력과의 전쟁을 수행하시는 총사령관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인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16)
'가르고서는'에 해당하는 '우베카에후'(ubeqaehu)는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것을 쪼개라'는 뜻이다. '베카에후'의 기본형인 '빠카'(baqa)는 '(하나로 된 것을)쪼개다', '(닫힌 것을)열다', '(알을)깨다'등의 의미가 있다. 본문은 홍해 바다를 둘로 완전하 갈라지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가 단순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모세가 단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을 가르는 행위까지 그에게 속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강한 바람을 사용하여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다.(14,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쪼개는'일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임무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모세에게 속한 것임을 이러한 표현을 시사하고 있다.
'빠얍바샤'(bayabbasha)는 '마른 땅'으로 번역되었다. '마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야베쉬'(yabesh)에서 유래한 명사 '얍바샤'(yabbasha)에, '~안에(안으로)'란 뜻의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런데 '야베쉬'나 '얍바샤'의 어근은 기본적으로 '수분을 지닌 물체가 수분이 없어서 마르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려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있다.
바다나 강에 물이 빠지고 나면, 원래 물에 깊이 잠겼던 부분은 갯벌이나 진흙 수렁과 같이 사람이 걷기에도 힘든 땅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금 그것이 마른 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과 짐을 실은 수레들이 안전하고 쉽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느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役事)하실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다. 더군다나 '마른 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얍바샤'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창세기 1장 9절,10절에 창조사에 물과 분리된 '마른 땅'을 기리키는데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물 가운데서 땅을 분리하여 그곳엔 온갖 생명이 자라게 하셨다. 또한 노아의 홍수 후에 물이 걷히고 땅이 마른(창세8,14) 다음에, 그 땅위에서 생명체들이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 속에서도, 바다가 갈라지고 그곳에 드러나는 마른 땅은 또 다른, 하느님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로우신 의지가 개입된 특별한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바다 가운데 새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한 재창조의 역사(役事)가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이 드러나는 현상 가운데서도,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 이 일이 24절에 '새벽에'(habboqer)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예의 주시해야 한다.
부활성야 복음(마르16,1~7)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1~2)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시신이 썩기 전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일 정도는 시신을 돌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파스카절(유월절; 해방절; 과월절)과 안식일이 임박해 예수님의 시신을 충분하게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도 서둘러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기 위해 무덤을 찾은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동사의 과거형을 쓰고 있는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빈무덤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주기 위해 동사들의 시제를 모두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형).
요한 복음 20장 1절의 '가서'(에르케타이; erchetai), '보니'(블레페이; bllepei), 20장 2절의 '달려'(트레케이; trechei),'가서'(에르케타이)가 그렇다.
요한 복음 20장 1절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에서 '치워져 있었다'에 해당하는 '에르메논'(ermenon)은 분사의 완료 수동태로서 돌이 스스로 움직여진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옮겨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완료형으로 쓰여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무덤 입구 전체를 막으려면, 아무리 작아도 일반 성인의 키보다는 더 큰 바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을 보면, 무덤을 막기 위해 입구에 세워 놓은 돌이 쉽게 움직이지 않도록 일반적으로 무덤 입구의 바닥에 홈을 파 놓았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서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무덤 입구에 세워 놓은 돌을 옮겨 놓았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6장 3절에는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러 간 여인들의 대화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마태오 28장 2절에는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사이래 인류 고금을 통해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들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무덤 뿐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성모님은 부르심을 입어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에 빈무덤 사화를 첫 복음으로 선포하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은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현존하시며,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람들의 주님으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21년 4월 3일 [파스카 성야]
죽어야 사는 사람, 그리스도인.
파스카 성야 독서(로마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 하느님의 뜻,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가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선악과로 따 먹고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 앉아 우리의 뜻, 영광을 위해 살아왔던 그 잘못, 죄로 영원히 땅(지옥)에 갇혀야 했던 우리다.
그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대속의 십자가, 그 죽음의 세례를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것이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세상의 돈, 명예, 그 힘의 원리를 사랑했던 그 마음, 삶을 끊어 버리는 죽음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 때 - 마귀(뱀)와 마귀의 모든 행실을 거룩한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하느님의 뜻, 말씀) 다짐한 세례 서약을 새롭게 합시다. 하고 (사제) “여러분은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신자) “예 끊어 버립니다.” (사제) “마귀의 모든 *행실을 끊어버립니까?” (신자) “예 끊어 버립니다.”(사제)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버립니까?”(신자) “예 끊어 버립니다.”
우리 모두는 그 뱀의 말, 행실,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세 번, 하느님 앞에서 맹세(서원)한 사람들이다. 세상(뱀)적인 나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 말씀을 따르겠다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마태4,8-9)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 뱀의 뜻(이름)을 위한 영원한 죽음의 유혹이다.
(요한5,43-44)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뜻)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7.17-18) 17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18 스스로 나서서 (자기)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찾는 이는 참되고, 또 그 사람 안에는 불의가 없다.
(요한12,43) 43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세례에 하나가 되기 위해 세상에 대하여 죽는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로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선악의 원리로 받아 지키면 그 선악의 심판이 죄로 우리를 지배한다.
(로마5,15)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구원)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 그래서 세상의 원리가 그릇된 것이다.
(요한16,8)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 예수님께서 그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십자가로 부수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시(3)에 돌아가신 이유다. 유대인(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으로 받아 그분의 계명을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만들어 자신(사람)들의 뜻을 위해 열심히 지켰던, 그리고 기도했던 그 시간, 그들(사람)의 모든 것을 부수신 것이다.
부서져야 한다. 세상의 영광, 힘의 원리로 살았던 그 惡한 내가 善 이신 예수님과 *함께 부서져야(죽어야)한다. 그러면 산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이다.
(로마5,19) 19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예수)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우리에게도 죽음(죄)이 군림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피, 대속으로 모든 죄가 다 씻겨 없어 졌기 때문이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히브10,14)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 하느님을 위해 산다는 것-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다. 죽어 영원히 땅(지옥)에 갇혀야 할 죄인들을 당신 아드님을 대속의 제물로 내주셔서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해 주시니 어찌 감사의 영광 드림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에페1,4-6)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善)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흙(없음)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자기부인의 삶으로 하늘을 얻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