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마태18,21─19,1)

제1독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에제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화답송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복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제12,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11)
여기서 3인칭 복수형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어원상 '유배를 당해'(포로로)로 번역된 '밧셰비'(bashebi)는 '벌거벗은 상태로'라는 의미이고, '끌려'(사로잡혀)로 번역된 '빡골라'(baggolla)는 '포로의 상태로'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둘 중 한 단어만을 가지고도 포로로 끌려간다는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이 본문에서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b.c.586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보다 생생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옷이 다 벗겨진 채로 손과 발이 결박을 당해 약속의 땅 밖으로 이방인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주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끝까지 범죄할 경우,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2)
본절에서는 치드키야 임금이 도주하는 광경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가 처한 절박한 상황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임금은 '짐을 어깨에 메고' 피난길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팔을 늘어뜨려 운반하지 못하고, 어깨에 지고 운반한다는 것은 그 짐이 매우 무거움을 암시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피난가는 것도 치욕스럽지만,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쫓겨 무거운 짐까지 져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이것은 짐을 질만한 신하가 없거나 혹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으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평생 힘든 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피난을 가야 했던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주는 '어두울 때에' 이루어졌다. 원문에 '빠알라타'(baallatah)인데, 이것은 어스름한 상태가 아닌 '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
즉 이동하기에 매우 불편한 시간에 체면을 버리고 도주하였음을 나타내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깊은 밤에 비겁함과 나약함으로 도주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남부 유다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통하여 나갔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는 치드키야 휘하의 가신과 군사들일 수도 있으며, 혹은 바빌론 군사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본문에서 언급하는 벽은 가신들이 치드키야를 도망시키기 위해 일부를 파쇄한 성벽일 수도 있고, 혹은 바빌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가 훼손된 성벽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일개의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동물과 같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도망간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구멍을 뚫음을 나타내는 동사 '야흐테루'(yahtheru)의 원형 '하타르'(hatar)는 도둑질을 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것(욥기24,16)과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요나3,2)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이런 용례는 치드키야의 비참함을 묵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치드키야 임금이 취하게 될 이러한 행위 역시 에제키엘이 취하였던 상징적 행위와 동일하다(에제12,7).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크나큰 슬픔과 비통한 마음 때문에 치드키야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땅을 애써 외면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치드키야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으나 바빌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두 눈이 뽑힌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 후,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었다(2열왕25,1~7; 예레52,11).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치드키야가 도망치면서 땅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두 눈이 뽑힐 것에 대한 예표라기 보다는, 그후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통치했던 그 땅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에제12,13참조).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8,21~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2020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용서란 인간의 노력과 무한한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럴 용서의 힘,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용서란 영원한 약속인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로 받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 그것이 일흔일곱-칠(7)ⅹ 칠(7) = 사십구(49.) 곧 희년의 정신으로 용서를 받고 주는 것이다. 속죄의 나팔이 불면, 곧 십자가의 대속 그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해방과 자유가 있는 희년의 정신이다.(레위25,8-10) 인간은 창세전 그리스도(십작사의 대속)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십자가로)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 만달란트는 당시 이스라이 로마에 바쳐야할 年稅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으로 개인이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갚을 수 없는 돈을 자신이 갚겠다고?~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허언장담하는 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음을 잘 아시는 주인, 주님이시기에~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애가 끊어지는 사랑, 그 주님의 마음이 그냥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신 아버지의 마음, 자비 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는 희년의 용서, 곧 속죄의 나팔 어린양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받는 용서인 것입니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 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자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작은 백 데나리온을 용서 못한다. 그것이 인간의 욕심, 고집에 약한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한사람에게 그 악한 고집의 마음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 악한 마음이 내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은 나는 왜 작은 잘못을 용서 못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탕감, 그분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십자가의 죽음,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 모르기에 잘못한 형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어떻게 갚아야 하나?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죄 뿐만 아니라 형제와 이웃의 잘못까지 다 대속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오늘 다시 돌아가, 마음으로부터 다시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요엘4,16) 그러면~16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
(나흠1,7) 7 주님은 선하신 분 환난의 날에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을 알아주시는 분이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