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4일 목요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계명 (마르 12,28ㄱㄷ-34)
제1독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화답송 시편 25(24),4-5ㄱㄴ.8-9.10과 14(◎ 4ㄱ)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2티모2,8-15)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8-9)
티모테오 후서 2장 8절부터 13절까지는 말씀의 봉사자가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 및 인내한 말씀 봉사자가 누릴 장래의 영광에 대해 제시한다. 원문에는 '기억하시오'에 해당하는 '므네모뉴에'(mnemoneue)가 문장 서두에 등장한다. 이 단어는 원래 '기억'을 뜻하는 명사 '므네메'(mneme)에서 파생하여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라는 뜻을 지닌 '므네모뉴오'(mnemoneuo)의 현재 명령형으로서, 티모테오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오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매우 간결하게 언급한다. 이것은 로마서 1장 3절과 4절에 언급된 것과 매우 유사한데, '초대 교회당시의 신앙 고백문'과 같은 것이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티모테오에게 전해 준 복음이요, 또한 그 요체로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짧은 진술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 및 승천 등이 압축되어 있다.
우선 '다윗의 후손'으로 번역된 '스페르마토스 다위드'(spermatos Dayid ; the son of David)는 '다윗의 씨' 란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진술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성왕으로 칭송되는 위대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란 사실을 함축한다(이사11,10).
나아가, 그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여기서 '되살아 나셨다' 로 번역된 '에게게르메논'(egegermenon)은 '다시 살다' 곧 '부활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에게이로'(egeiro)의 현재 완료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의 결과와 효력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코린토 전서 15장 4절, 12-20절에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에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시고, 현재 계속 살아계심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려지고 확인되셨다(로마1,4). 그러므로 이러한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8절에서 말씀 봉사자가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 바오로는, 이제 9절에서는 그 모범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한다. 즉 바오로는 복음으로 인해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통을 받았다. 여기서 '죄인'으로 번역된 '카쿠르고스'(kakurgos)는 '악'을 뜻하는 명사 '카콘'(kakon)과 '행하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고'(erg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직역하면 '악을 행하는 자', '범죄자'(범인)에 해당된다.
이 단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강도)에 대해서도 쓰였다는 사실은(루카 23,32,33.39) 당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가 중죄인으로 여겨졌으며, 범죄자로 수감된 자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본절에서 '감옥에 갇히는' 으로 번역된 '데스몬'(desmon)은 문자적으로 '족쇄'나 '사슬', 즉 소위 '차꼬'(루카13,16; 사도16,26)를 뜻하는 '데스몬'(desmon)의 복수형(bonds)이다. 여기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여러 차례 있었던 바오로의 수감 생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바오로가 현재 엄중한 수감 생활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조적 표현은 하느님의 사도로서의 영광스러움과 현재의 고난 상태를 극적으로 대조하면서 그 역설을 웅변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but the word of God is not chained(bound)>
여기서 '감옥에 갇혀 있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데데타이'(dedetai)는 원래 '묶다'라는 뜻을 지닌 '데오'(deo)의 현재 완료 수동태로,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사 '우'(u)와 더불어 쓰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에 의해 감옥에 수감될 수 있을지라도, 복음 그 자체는 어떠한 외부 조건에도 불구하고,결코 속박당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바오로 자신이 비록 수감되어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복음의 봉사자(사역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말씀을 전파하신다는 것이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마르12,28ㄱㄷ~34)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3)
원래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 (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 (naphsheka)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bekol naphscheka)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 (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12장 33절에는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가 '생각을 다하고'로 대치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쉬네시스'(synesis; understanding)는 '지혜', '총명', '깨달은 것', '이해' 등으로 번역된다.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with all your strength(might)>,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절대적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십계명의 첫 부분인 1~3계명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연적 결과로서의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은 십계명의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은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모두 포함한다(루카10,25~37).
이제 이 두 가지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번제물'에 해단하는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 whole burnt offerings)는 '전부 불태우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홀로카우토오'(holokautoo)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그리고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튀시온'(thysion; sacrifices)의 기본형 '튀시아'(thysia)는 '희생 제물' 또는 '제사'를 뜻한다. 여기서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는 번제를, '튀시아'(thysia)는 번제 이외의 다른 제사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사무엘 1권 15장 22절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교훈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 제사와 제물은 하느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