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예수, 생명의 문-요한복음 묵상)
이 여인과의 대화에는 그 어떤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상징은 장소의 이름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시카르”는 무엇인가 막힌 상태를 뜻한다. 인간은 막혀있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지만 자기 자신조차 잘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여행으로 지친 상태였다.
이것은 우리도 삶에서 무척 지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당시에는 유다인 랍비는 여인과 공공연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제 유다인의 편협한 관습을 깨신다.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수 있는 무엇인가를 달라고 청하신다.
요한이 이런 대화내용을 상세히 전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일들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 자체이다.
인간은 자신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을 갈망한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생명수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생명수 란?
저수통에 담겨 있는 물이 아니라 솟아오르고 있는 샘물을 뜻한다.
여기서 생명수는 실제적 생명,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는 물을 상징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물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인 생명에 대한 갈망, 용솟음치는 생명에 대한 갈망을 채우신다.
그분은 곧,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는 물을 주신다.
하지만 어떻게 그 물을 주시는가? 이물은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 물 자체이시다.
물은 꿈에서 항상 영적의미를 지니고 있다.
피곤하고 지쳐있는, 권태에 빠져있는, 영혼에게 생기를 돋워주는 물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치유하고 생기를 북돋우는 물이 되신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에 물이 솟아 오르게 하신다.
우리가 이런 내적 샘에서 물을 마신다면 우리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허하지 않을 것이고, 지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안에는 생명의 물을 솟아 흐르게 하는 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샘은 신적 샘이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샘에서 솟아 오르른 물을 웅덩이에 고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물을 자꾸 자꾸 퍼 날라야 그 샘에서 새로운 물이 계속 솟구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물을 나눠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살기만 한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을 사는 것이 된다. 마치 물이 고여 있듯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샘에서 물이 솟듯이 새록새록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생각을 담고 새로운 활기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산다면!
그 순간의 삶이 그 순간과 함께 영원히 흘러가기 때문에 바로 그 순간의 삶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의 삶을 거룩하게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갖고 순간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호스피스 교육 중에 눈을 말똥거리고 허리를 고추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봉사자의 눈에 띄었는지 최고 고령자에게 주는 상까지 받았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건강을 허락하시었고 호스피스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순간의 삶을 새롭게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그 사마리아 여인은 여섯 남편과 살았었다.
(예수, 생명의 문 - 요한복음 4장 묵상)
남편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남편을 불러 오시오.”(요한 4,16)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남편이 없다.”니, 옳은 말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은 아니지요, 과연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요한 4, 17-18)
예수와의 만남은 항상 진리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여인은 사마리아 공동체를 상징한다.
여섯 남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행하고 있던 다양한 예배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섯 남자는 우리가 흔히 믿는 우상들, 곧 돈, 권력, 성욕, 명성 등의 우상을 상징한다.
이런 우상들은 우리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시 못한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늘 갈망하던 목적에 이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 평화를 얻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의 진정한 고향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인이 남편으로 두었던 여섯 남자는, 남자와 여자의 불완전한 관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여섯 남자들도 사랑을 갈망하던 여인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여인은 우리 모두처럼 조건 없는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여인은 어떤 배우자에게서도 그런 갈망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체험해야 했다.
우리의 사랑이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 질투, 실망, 괴로움 등과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따라서 여섯 남자들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사랑에 대한 여인의 갈망을 상징한다.
여섯 남자 다음으로 맞게 될 일곱 번째 남자,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가슴을 찔리게 하셨던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여섯 남자들은 여인에게 참된 평화를 주지 못했다.
곧 우리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며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곳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리를 하느님에게서 얻어야한다.
인간은 영적인 순수함과 진지한 자기인식이라는 내적태도를 갖추고 있을 때에만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성이 없다.(sanford1,48)
하느님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다. 따라서 어디서나 그분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되었으며,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의 첫 전령이 된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젤름 그릔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우리들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성신학자들이 조리 있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세상의 일로 바꾸어 보면서,
그 의미와 삶을 비유로 표현한 곳에서 교훈으로 깨닫고 이해하면서 내 삶을 변화시키게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왜 그 사마리아 여인이 여섯 남자와 살았을까?
그리고 나쁘게도 생각하였지만 우리 모두는 내면에 이런 여섯 남자 말고도 더 많은 욕심과 더 많은 이기심을 품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여인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욕심부터 벗어 버려야 하고,
내 마음 속에서 움터오는 내 육신의 어떤 쾌락과 이기적인 집착 그리고 소유와 권위 등 세상의 유혹에서 하나 씩 하나 씩 벗어 버리려는 자기 변신이 있어야겠다.
이런 말씀을 되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여섯 남자들은 여인에게 참된 평화를 주지 못했다.
곧 우리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며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곳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성경, 곧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 안에서 삶의 교훈을 찾고 깨달음을 통해 아집과 욕심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