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어떤 책인가요?
히브리서란 이름은?
히브리서는 서간집에 들어있지만, 서간이라기보다는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간은 보통 누가 누구에게 이 편지를 띄운다는 인삿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개진하는 본문, 그리고 축복과 안부인사를 동반한 맺음말로 구성되는데, 히브리서는 끝맺는 부분에서만 서간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에요. 따라서 서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통적으로 바오로 서간으로 분류되어 왔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이 다시 유다교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생각에서 ‘히브리서’란 이름이 붙게 되었어요.
누가 썼나요?
다른 바오로 서간과는 달리 누가 썼다는 말이 첫머리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저자로 거론되어 왔지요. 바오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문체도 다르고,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크게 차이가 났거든요. 바오로와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르나바, 고린토에서 천막일을 하며 바오로를 도운 브리스킬라, 바오로의 동역자인 에바프라와 실라 등의 인물들이 저자라고 제안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확증이 없어요. 오리게네스의 말대로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겠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95-96년경에 쓰여진 클레멘스 1서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5년경에는 쓰여졌을 거에요. 또한 구원의 말씀이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을 거쳐 전달되었다는 내용(2,3)으로 보아, 60년 이전에 집필되지는 않았을 거에요. 따라서 60-95년의 어느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추정되어요. 12,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년)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아서, 80-9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되기도 해요.
왜 썼나요?
12,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년)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면, 박해로 불안해 하며 배교의 위기를 겪는 이들의 믿음을 북돋워 주기 위해 쓰여졌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연륜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모임에 자주 빠지고 선행과 봉사생활에서 멀어지는 등 나태한 신앙행태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고 있어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귀를 기울여 순종하도록 촉구하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드러난 구원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새로운 약속을 일깨워요. 그럼으로써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신앙을 간직한 채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 나가도록 이끌고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히브리서 저자는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지 말고 더욱 성숙해 지라고 권유합니다. 내 신앙은 어느 면에서 더 성숙해져야 할까요?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히브 1,1-13,25)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히브 1,1-2,18)
예수께서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18)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음을 먼저 선포해요. 그러니 그분에 관해 들은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더욱 더 굳게 간직하라고 당부해요.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예수는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셨으므로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주님께 하나씩 말씀드리면서 헤쳐나가면 든든할 거에요.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히브 3,1-5,10)
신앙인들이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지켜 나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3,14)
성도들은 하느님의 집안 사람들이므로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며 처음의 확신을 잃지 않도록 당부해요. 그렇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사그라들곤 하지요. 그 열정을 꾸준히 지켜나가려면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열려 있어야 해요. 우리가 매주 ‘사막의 성서공부’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메마르고 기쁨이 없어진다 싶을 때에는 더 이상 늦기 전에 성서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주님께서 바로 곁에 살아 계심을 생생하게 느끼실 거에요.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히브 5,11-10,39)
계약의 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9,4)
성숙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실생활에서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해요.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 성서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다 보면, 주님께서 모든 이를 용서해 주는 대사제라는 이야기도 훨씬 생생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지 않겠나 싶어요. 성서를 공부하는 작은 모임을 결성해서 이 체험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누면 더욱더 좋겠지요.
믿음으로(히브 11,1-13,25)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는 누구입니까?(12,2)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고 이야기해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의 신앙상의 위인들도 믿음으로 하느님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을 보면, 오늘 우리 신앙인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에 충실할 수 있을 거에요.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 수 있다면 말이죠.
<새김과 나눔>
맨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와 비교해서, 지금 나의 신앙생활에서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
히브리서를 읽는 현대의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긴 서간을 읽어 가면서, 한쪽으로는 경탄을 금할 수 없으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낯선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여러 차례에 걸쳐 교리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내용이 깊은 말씀 앞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한편으로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표현을 구사해 가며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그분의 “형제들”을 한데 묶는 철저한 연대성을 능숙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행마다 구약성서에 대한 필자의 폭넓은 지식이 여실히 드러나고, 신자들에게 하는 모든 권고는 그의 교회 사랑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나 이 서간이 여러 면에서 독자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구약성서의 여러 경신례(敬神禮)와 제사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아주 유연하게 구약성서의 본문과 사건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지상 현실과 천상 원형 사이의 관계, 또 역사적 사실과 하느님의 영원성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많은 독자들은 당황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가닥을 잡으려고 본문을 더욱 자세히 고찰하는 시도를 해 보지만, 내용을 감추듯이 전개시켜 가는 문체가 이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이 밖에도 히브리서의 유래 자체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가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의혹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데, 종교 개혁 시대에 다시 불이 붙는다. 의혹과 논란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이 작품이 누구에게서 유래하는가? 이 서간을 바오로 사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가, 없는가? 이 서간은 바오로 사도의 대서간들과 왜 공통점이 그리 적은가? 이 서간은 누구에게 보낸 것이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이 히브리서는 실제로 편지인가?
먼저 이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 이 매혹적인 문헌이 담고 있는 풍부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종합해 보기로 한다.
1. 초기의 필자 문제
동방 교회에서는 히브리서를 줄곧 바오로의 서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통이 확고히 자리를 잡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부들은 히브리서와 바오로의 다른 서간들을 구분짓는 차이점을 밝혀 낸다. 또 히브리서의 이러한 특수성을 설명하는 여러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3세기 초) 바오로 사도가 히브리 말로 쓴 서간을 그리스 말로 번안한 것이 히브리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 말의 문체는 루가가 번역하였음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조금 뒤, 오리게네스는(184/185-253/254년) 더욱 명확한 구분을 제시한다. 그는 히브리서의 사상이 바오로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가 이 서간까지 직접 집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는 스승 바오로의 가르침을 충실히, 그러나 자기 방식에 따라 표현해 내는 한 제자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 제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바로 대두되는데, 오리게네스는 자기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당시에는 사도가 저자라는 사실이 경전을 결정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한다.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필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러한 사실이 그가 이 문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 후 동방 교회 주석가들은 이 서간의 문학적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자기들의 교회 전통이 보장하는 대로 이 서간이 바오로의 작품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서방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로마의 클레멘스가(?-101년)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 명백히 이용하는 것으로 보아, 히브리서는 이미 1세기 말에 서방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아무런 이의 없이 경전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 서간이 바오로의 친저라는 점에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에 따라 쓰인 책이라고 주저 없이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부 특정 분파에서 히브리서를 즐겨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의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곧 이 서간의 7장이 멜기세덱에 관한 기이한 추측을 내세우는 데에 근거로 이용된다. 엄격주의자들은 히브 6,4-6과 10,26을 바탕으로, 박해 중에 배교한 신자들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3,2를 논증으로 내세운다. 이는 이탈리아 브레시아 주교 필라스트리우스의 증언에 따른 것으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던 4세기 말엽에 이 서간은 교회 안에서 봉독되지 못한다. 다른 한편, 예로니모에(345-419/420년) 따르면 로마에서는 히브리서를 바오로의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 자신은 필자 문제에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부여한다. 히브리서가 성서의 일부라는 점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증언해 온 동방 교회의 전통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보증이 되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튼 4세기 말에 확정된 ‘성서 경전’ 목록에 이 서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이 문헌에 관하여 주저하던 자세가 사실상 끝났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바오로의 서간들과 함께 배치됨으로써, 이후 그것은 이 서신을 바오로가 직접 썼다는 친저성을 옹호하는 쪽을 두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중세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견해와 비슷한 의견이 주를 이룬다. 곧 히브리서는 바오로의 서간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루가가 그리스 말로 충실히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2. 종교 개혁 시대 이후의 필자 문제
루터는 몇 년 뒤에 신약성서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히브리서에 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곧 이 서간은 바오로의 작품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의 저술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무명 필자가 구약성서를 이용하는 능숙한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서간의 몇몇 구절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서간은 세례를 받은 뒤에 다시 죄에 떨어진 신자들에게 회개의 가망성이 없다고 가르친다(6,4-6; 10,26; 12,17). 그래서 루터는 히브리서가 여러 부분이 합성된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칼뱅은 루터와 달리 히브리서에 관해서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서간이 이론의 여지없이 사도들에게서 내려오는 성서의 일부임을 공언하고, 이전에 이 서간의 권위가 공격을 받은 사실은 사탄의 음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바오로 사도의 작품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개신교 주석에서는 그 뒤로도 다양한 의견이 계속된다. 17세기에는 다시, 히브리서가 바오로의 친저라는 가설에 거의 이구동성으로 찬성한다. 그 다음에는 바오로의 친저가 아니라는 반대 가설이 우세하게 된다.
반면에, 초대 교회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증언을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에서는 이 서간이 바오로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옹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친저성의 문제에 관하여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바오로가 저술한 원작을 그의 제자가 손질하여 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엽 이에 관한 논쟁이 한창일 때,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히브리서가 바오로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편집 자체는 바오로 손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하였다. 최근의 가톨릭 주석가들은 이 서간이 넓은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히브리서의 전문가 가운데 어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에 그의 측근이었던 아폴로가(사도 18,24; 1고린 1,12; 3,4-6; 16,12; 디도 3,13 참조) 이 서간을 저술하였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물론 확실한 근거가 되는 사료는 없다.
3. 친저성의 문제
바오로의 서간에서 그토록 자주 이용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칭호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히브리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에는, (‘성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라든가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처럼) “성서”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늘 (‘이렇게 말씀한다.’처럼)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히브리서 필자는 자주 그리스도의 천상 등극을 말하는데 반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딱 한 번만 언급한다(13,20). 이 때에도 그냥 당시에 통용되던 관용적인 표현을 이용할 따름이다. 그리스도를 사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이 히브리서가 유일한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히브리서의 필자는 바오로 사도와 상당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과 바오로의 사상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명백한 과장이다. 사실 여러 중요한 점에서 바오로의 교리와 히브리서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수난은 필립 2,8과 로마 5,19에서처럼 히브 5,8과 10,9에서도, 그분의 자발적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된다. 둘째, 히브 7,11-19와 10,1-10에서도 옛 율법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 폐기되었다는 사실이 갈라 3,21-25나 로마 4,15; 5,20 못지 않게 강력한 어조로 언명된다. 신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바오로의 이 주제가 히브리서에서처럼 명백히 표현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셋째, 거꾸로 히브리서에서 펼쳐지는 근본 주제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바오로의 서간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갈라 2,20과 에페 5,2.25를 비교해 보면, 바오로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구원의 제사적인 면과 사제적인 면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뚜렷한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잘 알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면이 히브리서에서 완전한 형태로 제시된다. 끝으로, 히브리서의 그리스도론과 바오로계의 옥중 서간(에페소서, 필립비서, 골로사이서, 필레몬서)의 그리스도론 사이에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한다. 곧 하느님의 모상이신 아드님, 천사들 위로 등극하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끝에 받으시는 “이름” 등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들은 히브리서가 바오로에게서 유래한다는 동방 교회 전통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한 마디로, 바오로 사도의 어떤 협력자가 이 서신을 집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
그 필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추정하려면 확실성이 훨씬 뒤떨어지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 교회의 옛 전통에서도 여러 가설 가운데에서 하나로 정착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곧 루가, 로마의 클레멘스, 바르나바 등의 이름이 제시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현대의 학자들은 또 다른 인물들을 찾기도 한다. 그 가운데에서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아폴로라는 이름을 제시한 루터의 가설이다. 유다인 출신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의 교육을 받고 성서에 능통하며 화술이 능란함은(사도 18,24-28; 1고린 3,6),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유다인 저술가 필로의 언어와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히브리서 필자의 모습에 완전히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옛 사료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폴로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문헌이 하나도 없어서 히브리서와 비교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다른 것들과 함께 확증할 수 없는 가설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필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
4. 문학 양식: 서신과 설교
5. 수신인
최근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서간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다인, 더 정확하게는 유다교 쿰란 종파의 신도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가설도 가능성이 없다. 이 서간에 개종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꾸준히 믿고 그 믿음을 키워 나아가라고 권고할 따름이기 때문이다(3,6; 5,12; 6,9-12 등). 물론 히브리서는 사해 곁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부정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유다교와 매우 명백한 관련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 밖에 영지주의의 영향까지 발견된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영지주의에 관해서는 요한 복음서 입문 20-22쪽 참조). 히브리서를 다른 여러 가지 문헌과 비교해 보면, 사상적으로 매우 비옥한 토양에서 양분을 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문헌이 집필된 곳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하게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서간의 수신인은 설립된 지 한참 된 공동체들이지만(5,12; 13,7), 그렇다고 그 설립 시기가 팔레스티나에서 시작된 최초의 교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2,3 참조). 이들은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지만(6,10; 10,32-34), 그 뒤로는 일종의 권태에 빠진다(5,11; 10,25; 12,3). 그런데 이제 새로운 어려움이 일어나리라고 예상됨에 따라, 신자들이 기가 꺾이고 낙담할 위험에 처한다(10,35-36; 12,4.7).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다소간 유다교화하려는 경향을 지닌, 교리상의 탈선의 위험마저 있었음에 틀림없다(13,9). 아무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 이 공동체들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6. 집필 동기와 연대
집필 연대도 매우 다양하게 추정된다. 예스러운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는 학자들은 그 시기를 매우 일찍, 곧 바오로 사도의 대서간 이전으로 잡는다. 다른 학자들은 1세기 말엽, 때로는 그 뒤로 추정한다. 그러나 로마의 클레멘스가 95년경에 히브리서를 이용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너무 늦게 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특히 히브리서에 나오는 성전 예식에 관한 서술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던 전례를 반영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 몇 년을 집필 연대로 지목한다. 반대로, 그 서술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만남의 천막 예식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학자들은, 이 서간이 80-90년 사이에 집필되었다고 주장한다.
7. 구 성
옛날에는 히브리서를 바오로의 다른 서간들처럼 두 단락으로, 곧 교리 부분(1,1-10,18)과 도덕 부분(10,19-13,25)으로 나누곤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애쓰는 필자는 처음부터 교리에 관한 설명과 삶에 관한 권고를 번갈아 제시한다(2,1-4; 3,7-4,16; 5,11-6,12 참조).
근래에는 더러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한다. ㄱ. 하느님의 말씀(1,1-4,13); ㄴ. 그리스도의 사제직(4,14-10,18); ㄷ. 그리스도인의 삶(10,19-13,25). 이러한 구분이 특정 사항들을 돋보이게는 하지만, 이 서간의 전체적인 모습에는 잘 부합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히브리서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확고한 구성 기술이 드러난다. 이 기술은 구체적으로 앞뒤 단락을 같은 낱말로 연결하기, 앞뒤로 같은 낱말이나 구를 되풀이하기, 하나하나 여러 단락을 대칭으로 구성하기 등, 성서의 문학 전통과 연계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따라가 보면, 서두와 결론 사이에 필자가 직접 예고하는 대로(1,4 각주; 2,17 둘째 각주; 5,10 각주; 10, 36.39 각주; 12,13 각주 참조) 다섯 단락이 연이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1) 첫 단락(1,5-2,18)에서 필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정의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서(1,5-14), 또 인간과의 관계에서(2,5-18) 그리스도의 위치를 확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 매김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하여 천사들의 위치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17).
(2) 둘째 단락(3,1-5,10)에서는 모든 사제직의 두 가지 근본적인 특성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지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느님께 신임을 받은 사제이시며(3,1-6) 모든 사람들과 굳게 결속된 사제이시다(4,15-5,10). 이러한 그리스도의 위치는 모세와 동시에(3,2) 아론의 위치에 비길 수 있다(5,4). 이 두 가지 비교 사이에, 필자는 충실한 신앙에 관하여 길게 권면한다(3,7-4,14).
(3) 셋째 단락(5,11-10,39)에서 필자는 자기의 기본 교리를 완전히 펼쳐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지니는 여러 특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부류의 대사제이시다(7,1-28).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것은 예전의 제의(祭儀)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러한 희생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참 성소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여셨다(8,1-9,28). 그리고 우리에게 실제로 죄의 용서를 얻어다 주셨다(10,1-18). 그리스도의 이 희생으로 옛 사제직과 옛 율법과 옛 계약이 종말을 고한다. 이 셋째 부분이 다른 단락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서론(5,11-6,20)과 결론(10,19-39)이 갖추어져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4)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열린 길로 신자들을 이끌어 가려고 필자는 넷째 단락(11,1-12,13)에서 영성 생활의 두 가지 근본적인 면을 강조한다. 선조들의 모범에 따른 믿음과(11,1-40) 그에 따른 인내이다(12,1-13).
(5) 다섯째 단락(12,14-13,18)에서는 끝으로, 거룩함과 평화의 길로 정진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8. 그리스도의 사제직
언뜻 보기에,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은 경신례라는 종교의 외형적 표현 방식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사제 계층에 속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제의 무슨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나서신 적도 전혀 없다. 골고타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에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경신례의 특성을 볼 수가 없다. 구약성서의 제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과 그분의 백성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의식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은 법적인 형벌의 결과이다. 십자가는 그 벌에 해당되는 사람을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치욕스럽게 잘라 내는 사법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희생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려면 이중의 ‘도약’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경신례 거행과 결부된 전통적 개념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겉으로 벌어지는 모습 너머의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예언서와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고(이사 53,10; 1고린 11,25)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과월절과 일치하는 것과 같은 몇몇 정황에서 착상을 얻은 초대 교회에서, 바로 그러한 쪽으로 이해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로마 3,25; 1고린 5,7; 에페 5,2; 1베드 1,19 참조).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가장 명료하게 밝혀진다. 이러한 결론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여러 경신례와 면밀히 비교한 끝에야 비로소 얻어진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이른바 ‘옛 것들’을 읽어 가려면 현대의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신자들을 새로운 것으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새 것’으로 올라가려면 ‘옛 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필자는 수난 끝에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사제직이 완벽히 실현되었음을 깨닫는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동시에 사람들의 맏이로서, 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대사제이심이 분명해진다. 그분께서는 아론의 사제직을 이어받으시기는 하지만(5,4-5), 그분의 사제직은 아론의 것을 뛰어넘는다. 시편 110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뒤를 잇는’ 새로운 부류의 사제를 세우기를 원하셨다(7,1-28).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은 진정한 희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희생이야말로 구약의 모든 제사를 대체하는 유일한 참 제사이다. 사실 구약의 제사는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관습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근본적으로 정화할 수도 없었고(9,9; 10,1-4), 사람을 하느님께까지 들어올려 줄 수도 없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치는 완벽한 희생이다(9,14).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 전체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만든다(5,8; 10,9-10). 그와 동시에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고 하느님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천상 사제가 되시고(9,24) 죄를 없애는 정화를 실현하셨으며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세우셨다(9,15; 13,20). 그분의 피는 우리가 하느님께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10,19).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로,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에게 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셨기 때문이다(2,10).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말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그들의 소명이(3,1)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계속 지상 세계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이 곳은 그들이 영구히 살 곳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에 영원히 살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13,14). 그러면서 자기들의 구원자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시기를 고대한다(9,28). 그들은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10,25.37). 그러나 아직은 그 날의 광명을 완전히 누리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맺은 것은 실제적이며 긴밀한 관계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믿음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들은 벌써 지금부터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데(4,3), 그것은 신앙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신이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3,14와 3,12; 10,38)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10,39). 필자는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두 가지 매우 다른 관점을 통합시킨다. 하나는 지성적인 것으로 믿음의 내용을 밝힌다(11,1ㄴ.3.6). 다른 하나는 실존적인 것으로, 믿음의 역동성을 보여 주면서 믿음을 희망과 접근시킨다(11,1ㄱ.8-10 등). 이렇게 그리스적인 사고 방식과 유다적인 사고 방식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의 다른 설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옛 경신례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정의된다. 구약의 종교 의식은 곧 변하지 않는 천상 실재를 반영하기도 하고(8,5; 9,24), 아울러 ‘앞으로 일어날’ 사건 곧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기도 한다(9,7-12). 이렇게 히브리서의 예표론(豫表論)은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한편으로, 역사를 뛰어넘는 것들 곧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을 고대하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 한 번”(7, 27; 9,12.26.28; 10,10) 일어난 역사적 사실의 결정적 효력을 강조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서로 융화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두 전망의 역설적 결합은 필자의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깊은 신앙을 명백히 보여 준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과 율법 준수에만 얽매인 유다인들을 상대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것이 행동과 대립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히브리서의 필자는 그와 같은 대립을 포기하고 자기의 서간에서 그러한 것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믿음이야말로 풍부한 행동을 내포하고, 또 구약성서에서 유효하게 실현된 모든 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필자는 이 밖에도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항구함을 배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6,12; 10,36; 12,1-13).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시어, 당신 영광의 길과 함께(2,9) 우리 구원의 길도 열어 주셨다(5,8-9). 그렇다고 우리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희망에 찬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12,2-3).
필자는 단 한 번 거행된 제사 곧 그리스도의 희생이 지니는 완전한 효력을 부각시킨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주저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시한다(13,16: 여기에서 “제물”은 복수로 쓰인다. 곧 우리로서는 제물을 단 한 번 바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찬양제물”을 하느님께 올리도록 이끌어 간다(13,15).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들을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 역시 제물의 가치를 지닌다고 단언한다(13,16).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물을 본보기로 삼아, 그리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경신례를 자기의 삶과 별개의 것으로 자리잡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신례와 삶이 하나 되는 자기의 실체적 실존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지상 생활에 빠져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13,12-14 참조).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체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의 단결의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곧 서로간의 배려(3,12; 4,1.11; 10,24; 12,15), 신자들의 모임에 대한 열성(10,25), 지도자들에 대한 순종으로(13,17) 실현되는 단결이다. 필자는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기가 설교와 그리스도교 전례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2,1.3; 4,2; 5,11; 13,7과 6,4; 10,19-22.29; 13,10). 사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고서 또 형제들과 하나 되지 않고서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고 상당히 균형 잡힌 생각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 구약과 신약의 변증법적 관계
이 예가 유일한 경우는 결코 아니다. 필자는 서간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약속과 실현, 옛 예표와 성취를 대조시키면서, 하느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특징짓는 다양한 인과 관계들을 계속 부각시킨다. 필자는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키는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의 연속성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계시의 새로움과 최종적 성격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 결 론
~~~~~~~~~~~~~~~~~~~~~~~~~~~~~~~~~~~~~~~~~~~~~~~~
히브리서 서론
이 중요한 서신을 연구해 나가기 전에 먼저 이 강해서의 저자와 독자는, 이 서신을 영감하신 성신께 머리를 숙이며, 인격과 직무들과 영광들을 이처럼 고상하게 드러내고 있는 분과 교제하기에 합당한 마음이 되도록 열심히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복된 성령의 도움을 명백히 구하도록 하자. 성령은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밝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 받았다. 우리는 누가복음 24:45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총명을 열어 “성경을 이해하도록”하셨음을 배우게 된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이 은혜로우시다면, 그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추어 깨닫게 할 것이고(시119:130), 우리는 “그의 광명 속에서 광명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강해서의 초두에서는 서론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려 한다. 상세한 부분들을 다루기 전에 그것들을 고려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이 서론에서 이 서신의 수신자들, 서신을 쓴 목적, 이 서신의 테마, 이 서신의 내용 분해, 히브리서의 특징들, 히브리서의 가치, 그리고 히브리서를 쓴 저자 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러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가능한 다른 강해자들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할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저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길고 먼 여행을 하느라고 장서를 다섯 번이나 매각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본인은 히브리서에 대한 30내지 40권의 주석서를 읽었다(그 주석서들을 거의 소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그 주석들의 요점들을 성경 속에 표해 놓았다가 이 서신을 강해하는 동안 도움을 받았다. 그 주석들 중 거의 모두가 매각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죤 오웬, 죤 길, 모세스 스튜아트, 앤드류 보나, 그리피스 토마스, 메소스 프리디암, 리다우트, 터커등에 의해서 쓰여진 주석서들 중에서 받았던 도움을 밝히는 일밖에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서론적인 요점들을 생각해 보자.
1. 수신자들
영어 성경에 보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라고 되어 있어 수신자들을 히브리인들로 말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에는, 성경의 다른 책들 머리에 쓰여 있는 제목이 신적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내용과는 달리 성경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제목들은 초기 필사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것들이다. 원본을 베끼는 과정에서 곧 사본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제목의 모든 흔적들이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 제목들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한 일은 거의 없겠지만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라 할 수 있다. 그 제목은 “하나님의 사람 사도 요한의 계시”이다. 그러나 그 책 자체의 첫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성경의 각 책제목을 일반적으로 취급하여 말한다면,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서신들마다 첫 구절에 수신자들이 언급되어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서신의 내용들이 가장 처음 그 서신을 받았던 그 지역 수신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부연하여 말할 수도 있다. 믿은 지 오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은 이점을 확고히 붙잡아 극단적이 세대주의적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그 점은 중요하다. 오늘날 성도들 중 크게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서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사람들이 얼마간 존재하고 있다. 그 서신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주장이다. 같은 주장으로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는 그 빌립보나 골로새의 성도들에게만 보내진 것이니 우리는 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마가복음 13:37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전체 성경에 잘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거기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다 필요하다(딤후3:16.17), 모든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디도서 초두에서 디도 혼자만 그 편지를 받는 사람처럼 말한 다음(1:4) 서신의 끝에서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3;15)라고 분명히 말했음을 유의 깊게 주목하라!
우리는 히브리서 초두에서 사람이 붙여 놓은 제목은 무시하지만, 그 서신의 처음 몇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 그 편지를 처음 받도록 지정하신 수신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대번에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첫 문장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이 서신을 처음 받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내게’ 한다. 히브리서 1:1,2를 보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역시 그들이다. 3:1에서 우리는 원래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이 작은 부류의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말을 발견한다. 이 서신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중에서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만”보내졌던 것이다. 베드로 시선들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증해 주고 있다. 베드로전서 지역적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주어졌다9헬라어로는 ‘에클레크 토이스 파레피데노이스 디아스포라스)’. 베드로후서(3;1참조) 역시 같은 수신자들에게 국한되어 전해졌었다. 베드로후서 3:15에서 사도 베드로는 특별하게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처음 누구에게 보내졌느냐는 데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진 셈이다.
히브리서 자체가, 수신자들이 누구인가를 밝혀줄 더욱 상세한 요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히브리서가 믿음을 가진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에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5:12로 명백해지고, 또한 이 서신이 격렬한 핍박을 받았던 성도들에게 보내졌다(행8:1참조)는 것이 10:32에서 명백해진다. 히브리서가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사회에 전해졌다는 것이 13;24로부터 명백해진다. 바로 13:24에 언급된 바를 기초하여 이 서신이 처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졌고(행11:22), 그렇지 않으면 유대에 있는 교회들에게 전해졌는데(행9:31), 그 여러 사본들이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송달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처음에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구주 메시야를 믿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2. 기록한 목적
한 마디로 히브리서는 유대의 신자들에게 기독교로 인해서 유대교가 폐해졌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던 첫 회심자들 중 상당수가 혈통상으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적인 선입관들 때문에 고통당해 왔다. 사도는 그의 초기 서신에서 이 점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했었다. 그리고 부당하고 때에 맞지 않게, 그리고 모세의 의식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그들을 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온전하고 조직적으로 다룬 것은 히브리서뿐이다.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 주 예수를 믿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과거 오랜 세기 동안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가지지 못하여 우상을 섬겨왔던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처소를 두고 있었다. 천여 년 동안 자기 조상들이 숭상하던 것들을 ‘버리라’고 촉구 받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도 어릴 때부터 지켜 왔던 형식과 의식들을 그대로 전수시켰으면 하고 바란 자들이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전은 여전히 존재하고, 레위의 제사제도가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를 묶으려는 열심 있는 시도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21:20은,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의식법에 열심인’ 사람들이 수천이나 되었다고 말해 준다. 사도행전 21:20이하의 여러 구절들은,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의식법’에 대하여 열심을 부리는 자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일의 새로운 경륜 아래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 없다는 것을 지각하는 대신, 외적인 차이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이제 거룩한 공회 속에서 가장 긴밀한 영적 결속의 띠로 함께 매어져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유대 교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꿈꾸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외면적인 경륜이 세상 끝까지 바뀌지 않고 남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혈통적인 선입관 이외에, 믿는 유대인들의 ‘잠정적 환경’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아니, 그 어려운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신앙고백을 버리도록 시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8:1에서 언급된 핍박 다음에 일어난 일을, 탁월한 유대인 학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아돌프 사피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다음에 또 다른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 특별히 사도 바울을 대적하여 그 어려운 핍박이 일어났던 것이다. 베드로는 63세쯤 죽었다. 사두개인들 편에 섰던 대제사장 아나니아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라고 지목되어 핍박받았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산헤드린 공회가 이러한 극형을 자주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들로 고통과 여러 힐책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이 믿는 자들의 물건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거룩한 곳에서 추방했다. 이제까지 그들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을 누려 왔다. 그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부정하고 배도한 사람들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않는 한, 그들에겐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단과 희생제사와 대제사장과 여호와의 집 등 모든 특권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처참한 아픔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에게 찰싹 달라붙음으로써 메시야의 백성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실로 크고 복잡미묘한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된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했고,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된 곳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곳은 여러 상징들과 규례들로 자기 조상들의 기쁨과 힘을 주었던 곳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언약의 자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방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바깥뜰에도 서 있지 못하고 이스라엘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일은 실로 지독하고 신비로운 시험이었다. 조상들에게 하나님의 맺으신 약속들을 고수하고 자기들의 나라가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부단하게 기도하며 소망을 키우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 겪어내야 하는 가장 격렬한 시금석이었으니 말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에 대해서 진실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권위있고 명료하고 조직적으로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매우 ‘긴박한’ 과제였다. 사단은 이 히브리 사람들을 설득하여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이 실수요 환각이요 죄라고 생각하게 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다. 육체를 따라 너희의 형제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와 제사장직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데, 너희가 옳다면 그들이 잘못된 것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따르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번성케’하던가? 그리고 너희의 외적인 환경이 하나님께서 정말 너희를 향해 얼마나 불쾌해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내지 않는가? 더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그리스도가 재빨리 지상에 돌아오시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다. 그 히브리인들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킬 것이 긴박하게 필요했다. 곧 그들의 총명을 밝혀 주고 구약에 비추어 기독교를 더욱 온전하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긴박성에 부응하여 인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감동케 하사 이 편지를 써 그들에게 보내게 했던 것이다.
3. 테마
히브리서의 테마는, 유대교에 비하여 기독교가 지극히 탁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요약과 본질과 중심과 구심점과 빛과 생명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중심적인 테마를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성령께서 이 서신에서 사용하신 방식은, 그리스도가 전에 있었던 모든 이보다 말할 수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여러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거론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초자연적인 영광으로 데리고 간다. 그때 그 인물들은 그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앞에서 무색하게 된다.
1:1-3에서는 그리스도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맨 먼저 밝히고 있다. 둘째로, 1:4-2:18에서는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3:1-19절까지는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넷째로 4:1-13에서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다섯째로 5:14-7:18에서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여섯째로 7:19-39에서는 전체 유대교의 의식(儀式)보다 우월(優越)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유대의식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시다는 것은 옛언약에 대하여 새 언약이 지극히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러써 논리(論理)가 전개된다. 일곱째, 구약(舊約) 성도 각(各) 개인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신 것을 11:1-12:3에서 밝히고 있다. 유대교가 그림자와 모형으로 밖에 갖지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갖게 된다.
만일 주께서 우리로 이 서신을 다 연구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앞서 가소서-히브리서의 테마를 규정해 나가기 위해 많은 예화와 예증이 사용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 낫다’는 비교급의 어휘가 굉장히 많이 쓰여짐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약의 성도(聖徒)들이 유대교 안에서 누렸던 것보다 우리들이 기독교 안에서 누리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히브리서 1: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낫다.는 언급이 7:19에서는 ‘더 나은 소망’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7:22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는 말이 언급(言及)되고, 8:6에서는 ‘더 좋은 언약’, 9:23에서는 ‘더 좋은 제물’, 10:34에서는 ‘더 나은 산업’ 11:16절에서는 ‘더 나은 본향’, 11:35에서는 ‘더 좋은 부활’, 그리고 11:40에서는 ‘더 좋은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와 같이 역시 우리는 히브리서에 언급된 일고가지 ‘큰’ 것들을 주목할 것이다. 큰 구원(2:3), 큰 대제사장(4:14), 큰 장막(9:11), 큰 싸움(10:32), 큰 상(償)(10:35), 큰 (허다한) 증인들(12:1), 양의 큰 목자(牧者)(13:20).
다시 히브리인들이 포기해야만 되는 것과, 그들이 얻는 것과는 대조하여 생각하게 하는 일이 나타난다. ‘우리의 가진 바’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주목하라. 곧 우리에겐 대제사장이 있으며(4:14; 8:1), 영혼의 닻(6:19),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 제단(13:10)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좇아 나아가라는 권면을 얼마나 자주 받는지 주목할 수 있다. 이 서신 전체에 ‘앞을 바라보라’는 말이 뛰어나게 돋보인다. 1:6과 2:5에서 ‘장차 오는 세상(또는 거처)등이 언급되어 있다.6:5절에서는 ’내세‘가, 1:10에서는 ’새언약‘이 언급되어있으며, 그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맺어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9:11과 10:1에서 장차 올 ’좋은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9:28에서는 나타낸바 된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0:38에서는 오시는 구속주에 대하여, 11:14과 13:14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도성(본향)이 언급되어 있다.
이 서신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유대교의 중심은 그 성전과 제사장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하여,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유대교의 성전과 제사제도가 그림자만 보여주고 있는 것의 실체를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2:17; 3:1; 1:14,15; 5:6,10; 7:26; 8:1; 9:11; 10:21. “사도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점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성전과 제사제도와 제단과 제물을 박탈당했지만, 우리는 참되고 진실된 성전과 큰대제사장과 참된 제단과 단 하나의 제사와 모든 제물들과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참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A Saphir)
4.히브리서의 내용 분해
브라운(J. Brown) 박사가 히브리서의 내용을 어찌나 간명하게 주해해 놓았던지 그의 것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교리적인 부분이요, 둘째는 실천적인 부분이다. 물론 그 부분이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지만(저자도 거의 그와 방불하게 본다), 교리적인 부분에서 어떤 것을 명령하거나 어떤 의무를 행하라고 권면하는 적이 없다. 도 실천적인 부분에서 교리를 진술하는 적이 없다. 교리적인 부분이 훨씬 더 많아서 서신 추도에서부터 10:18까지 계속된다.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사도(使徒)가 가르치는 위대한 교리(敎理)이다. 그러한 종교를 부단히 고백하는 것은 그 종교가 요구하는 큰 의무이다.”
5.히브리서의 특징
여러 가지 면에서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서들과 다르다. 히브리서는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서신서에는 문안인사도 없고, 이 서신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인지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구약의 모형적인 교훈들이 다른 서신들에서보다 이 서신에서 더욱 상세하게 강해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이 서신에서만 온전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배도(背道)에 대한 경고(警告)들이 신약의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자주 나타나고, 더 숙연하다. 그리고 신약의 다른 책에서보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요청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의 육체적(肉體的), 민족적(民族的) 혈통(血統)을 따라서, 또 그 당시 그들이 처해 있던 환경(環境)을 기초(基礎)로 생각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몇 가지 사실들을 의중에 계속 간직하지 않는 한, 이 서신 중 적지 아니한 부분이 이해되지 못한 채 남게 될 것이 틀림없다. 사용된 언어나 모형어, 또는 인용된 말들이 유대교가 기초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聖經)의 빛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구약을 근거로 생각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면, ‘죄를 정결케 한다’(1:3),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6:1,2)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10:22),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13:10)등의 표현들은 이해되지 못한 채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