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라신느의 찬가 - 가브리엘 포레 작곡
악보자료실에 악보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희망
하늘과 땅의 영원하신 그빛 그말씀 전하리
오...구주여 우리 도우소서
성령의 불길을 우리에게 내리사 어둠에서 구하여 주소서
주님 말씀 따라 살게 하소서
주여 늘 깨어있게 하소서
그리스도 예수여 이 모인 백성을 사랑하사 축복해 주소서
찬양을 받으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찬양을 받으소서
오 구주여 찬양받으소서
Gabriel-Urbain Faure
포레 / 프랑스의 작곡가.오르가니스트.파미에 출생
Gabriel-Urbain Faure (1845 ~1924)
포레 [Gabriel-Urbain Faure 1845 ~1924]
파미에 출생. 어려서부터 교회 오르간으로 즉흥연주를 하여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1854년 파리로 나와 교회음악의 진흥을 위해 세운 니델메이에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세 르네상스의 종교음악과 바흐, 하이든의 작품을 공부하였다. 또한 생상스에 사사하여 피아노 외에 H.베를리오즈, F.리스트, W.C.바그너 등의 낭만파음악을 배웠다. 그는 이 학교교육을 통해서 음악적 재능을 계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을 지배한 가톨릭정신과 내성적(內省的) 예술의 특성을 함양하였다.
1865년 그는 작곡과 오르간으로 수석 졸업한 후 몇몇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일하다가 보불전쟁(普佛戰爭:1870∼1871)이 일어나자 조국 프랑스를 위해 종군하였다. 그 후 작곡가로서도 착실하게 성장하여 1876년의 바이올린소나타로 인정을 받고 1877년에는 생상스의 소개로 마드렌대성당의 합창대장이 되었다. 1888년 부모의 죽음에 의해 걸작 《진혼곡 Requiem》을 작곡하였으며 1880년부터 1905년에 이르는 그의 중기는 작곡가로서 뛰어난 가곡과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해 낸 시기였다.
1896년 마드렌대성당의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고, 1905년부터 1920년 교직을 떠날 때까지 파리음악원의 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 사이 점차 청력(聽力)을 잃어갔지만 그는 조금도 창작의욕을 잃지 않고 관현악곡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1920)를 작곡하였다. 그 밖에 주요작품으로는 피아노4중주곡 2곡(1879, 1886), 피아노5중주곡 2곡(1906, 21), 피아노연탄곡 《돌리》(1896) 그리고 많은 교회음악, 피아노독주곡 및 가곡이 있다.
Gabriel-Urbain Faure (1845 ~1924)
몽고지 푸아 사범학교의 교사이자 교장이었던 T. 포레의 아들인 그가 최초로 음악에 감동한 것은 아버지의 학교 부속 예배당에서 하르모늄에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9세 때 니데르메이에르 고전 종교음악 학교의 학생이 되기 위해 파리로 가고부터는 집에서 떨어져 아무런 격려도 받을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의 음악 공부, 또 다른 일반 교과의 공부도 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불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태는 그가 젊고 뛰어난 피아노 교사 생상을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상은 그에게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 그는 그의 최초의 작품인, 빅토르 위고의 시에 의한 가곡 나비와 꽃(1861)을 작곡하고 그 후 잇달아 몇 개의 가곡, 로망스,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로망스(1863), 장 라신느에 대한 찬가(1865)를 작곡했다. 20세 때 포레는 화성법에서 2등상, 작곡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에서 우등상을 타면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렌에 있는 성 소뵈르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1866). 렌 거리는 지금도 포레가 그곳에 살았었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포레로서는 시골에서 보낸 수년간의 생활이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보불 전쟁이 선포되어 포레는 1870년 7월, 군에 지원했다. 이 혼란된 시기의 포레에게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은 코뮌의 시기에 스위스에서 만난 메사제와의 우정이다. 파리로 돌아가 생상의 조력으로 파리에서 오르간 주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 포레는 이리하여 생 토노레 델로의 오르간 주자, 생 쉴피스 교회 합창단의 오르간 주자,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 대리, 그리고 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 역시 마들렌 교회의 합창장이 되었다(1877). 또한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음악계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 당시 포레는 까무잡잡하고 로맨틱한 얼굴을 한 젊은이었다.
그의 피아노 주자, 반주자로서의 자질은 높게 평가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앞다투어 초대했다. 그는 특히 비아르도의 살롱에 출입했는데 폴린 비아르도의 딸 마리안 Marianne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1877) 포레는 매우 실의에 빠지고 만다. 또한 이와 병행해서 그는 프랑스 음악 발전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 국민음악협회의 창설에 참가했으며, 1874년부터는 이 협회의 비서를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 흥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생상을 따라 뮌헨과 쾰른을 여행했는데, 뮌헨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접할 수 있었다. 바그너는 포레를 매우 복잡한 형태로 매혹시켰는데, 그의 관현악법(프로메테)과, 몇 곡의 가곡(눈물, 무덤에서)의 서사시적 경향에서 그 영향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갖가지 풍성한 경험을 갖는 시기가 다음의 창조력에 풍성한 개화기를 준비한다.
두 개의 피아노 4중주곡(1876~86), 6개의 녹턴(1875~94), 6개의 뱃노래(1881~94), 레퀴엠(1887~88), 발라드(1877~79), 그리고 제1 및 제2 가곡집, 우아한 노래(1892~94) 등 수많은 가곡이 그것이다. 또한 가정적인 일이 그의 창작에 영향을 주게 된다. 조각가 프르미에 Emmanuel Fremiet의 딸 마리 Marie와 결혼(1883)할 때 그는 고양(高揚)된 작품을 남겼으며, 양친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을 때(1886, 1888)는 비통한 아픔을 표현했다. 이 마음의 아픔을 우리는 레퀴엠 속에서 볼 수 있다.
1892년 음악교육 시찰관으로 임명된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그의 명성은 확립되었고 마들렌 교회의 수석 오르간 주자, 나아가서는 마스네의 후임으로서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1896). 그가 기른 제자 중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샤를르 쾨클랭, 플로랑 슈미트, 루이 오베르, 나디아 불랑제, 모리스 라벨 등). 그러나 포레를 모방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인 요소의 독창적인 사용으로 이루어진 포레의 스타일은 그것을 배우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었다.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결과 그는 마침내 파리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테오도르 뒤부아의 후임으로서). 그러나 그는 이 학원에서 공부한 일도 없고 그곳에서 아무런 상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당시의 신문은 읽어보면 그가 군대에 있을 때의 공적이 이 임명에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포레는 원장이 되자마자 독재자가 되었다. 즉, 그는 학교의 교과 방안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교육방법을 쇄신시켰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이 엄격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03년경부터 거의 청각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그에게 직접적인 장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성공과 명예가 그를 따랐다. 베지에의 야외극장에서 상연된 비극적인 오페라 프로메테는 호평을 얻었으며(1900),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피선되었고(1909), 몬테 카를로에서는 오페라 페넬로프 Pénélope가 초연되었다(1913).
그러나 청각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고립되게 된 그는 주로 내성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하여 실내악, 가곡, 피아노곡 분야를 좋아하게 되었다. 1920년 그는 여러 가지 명예(수많은 서훈, 1922년 소르본느에서의 연주회에서 그에게 행해진 국민적 칭찬)에 싸여 있던 모든 공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미완성 작품을 소각한 후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포레는 무엇보다도 낭만주의로부터 길러졌고, 항상 표현적이고 내성적인 음악을 위하여 싸운, 19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종종 그의 이름과 결부되어 이야기되는 드뷔시, 라벨 등과는 달랐던 그는 20세기를 이끌어 가는 음악상의 각종 투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작곡가들로부터 받은 최후의 충격은 1902년의 펠레아스와 멜리상드의 초연이었다. 그 후에 만들어진 포레의 성악 작품에는 드뷔시의 이 작품에서 받은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는 침묵의 영역(청각의 상실)으로 들어가서, 작곡법도 종종 금욕적이라고 평해지는, 매우 관념적인 제3기의 경향을 띠게 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은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80년까지로, 여전히 매우 낭만파적이고 살롱의 유행, 사교계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제2기(1881~1902)는 작곡가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다채로운 눈부심을 가진 화성(우아한 노래), 오케스트라의 폭발하는 듯한 색채(프로메테) 같은 특징을 발전시킴으로써 관능적이고 열기를 띤 그의 예술이 태어났던 것이다.
청각을 상실한 제3기로 들어서면, 그는 이제까지의 방법을 모두 팽개쳐 버린다. 만약 그가 청각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제2기적 경향을 계속 밀고 나갔을 것이다. 포레는 본질적으로는, 그가 만년에 그러했던 것 같은 내성적, 금욕적인 작곡가는 아니다. 따라서 제3기의 그를 보고 그의 힘참, 그의 낭만주의를 부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로 조용한 매혹과 정묘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지중해인이었으며, 피아노4중주곡이 말해주듯이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