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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영광
2012.1.12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사무 상4,1ㄴ-11 마르1,40-45
하느님의 영광
어제 사무엘 상 1독서에서
사무엘이 부르심을 받는 분위기가 빛이라면
오늘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들에 의한 참혹한 패배의 분위기는 어둠입니다.
빛이든 어둠이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빛을,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내는 이들이
진정 신앙인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라는 분도회의 모토였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모는 것을 주셨다 모든 것을 가져가신 주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드렸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암 투병 중인 소설가 최인호(베드로) 형제의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죄의식에 시달리던 중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9,3)’
예수님의 말씀을 떠 올리며 죄의식에서 해방되고 안정을 찾았습니다.”
바로 이게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죄 탓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영광을 찾아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치열한 노력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시련과 고난의 현실에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현실의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인호 형제는 그 병고의 삶 중에
사도 바오로 다음 말씀에서 역설의 진리를 깨달았다 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
어렵고 힘들수록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위의 말씀입니다.
하여 저도 역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고백성사 보속 시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립니다.
어둠 속에 무너지지 않고 샛별처럼 믿음의 별로 떠오르는 데는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은 없습니다.
하여 이 말씀이 담겨있는 제 성경의 페이지는
하도 많이 닿아서 누렇게 바랬습니다.
“과거를 걱정하거나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위의 신앙고백으로 고통의 어둠 중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최인호 베드로 형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의미도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나병환자는 천형인 나병에 좌절하지 않고 빛과 생명의 주님을 찾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엾은 마음에 그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연민의 마음, 따뜻한 스킨십, 능력의 말씀이 삼위일체가 되어
나병환자의 믿음에 닿았을 때 발생한 기적입니다.
치유 받은 나병 환자는 주님의 침묵하라는 엄중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림으로
주님의 영광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로 돌변합니다.
주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저주의 나병은 축복의 나병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무엘 상권의 말씀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하느님의 궤까지 지닌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하느님의 궤까지 빼앗겼는지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이 어둠의 현장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을 것입니다.
바로 안전 보장은 하느님의 궤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때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을 깨끗이 치유해주시어 당신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십니다.
아멘.
항상 교만함을 경계하며
2012년 나해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회는 싱싱한 무채와 함께
오늘 성당 한 봉사자 단체와 옻 오리 요리를 먹으러 갔었습니다. 벽에는 옻 오리의 효능에 대한 설명이 커다랗게 붙어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충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끝까지 다 안 읽으셔도 될 듯합니다.
[여성들의 생리불순 및 생리통에 탁월한 효과, 허리 통증, 근육통, 어깨 결림, 멍들었을 때 어혈(나쁜 피)제거, 항암 효과에 뛰어난 우루시올 50% 함유, 숙취해소, 위장보호 효과, 원기 회복과 정력 증진의 효과, 속이 냉하거나 손발이 찬데 효과, 장이 부실하여 설사가 잦은데 효과, 위장에는 소화제가 되고, 간에서는 어혈약이 되어 염증을 다스림, 어혈과 적취를 풀고 혈액과 체액의 순환을 돕는 효과, 만성질환의 치료와 기력을 활성화하는 효과, 폐암, 위암세포, 생장억제기능 항암제보다 더 뛰어나 면역력이 강해져 탈모, 구토 같은 부작용을 적게 하는 효과, 뼈의 부러짐, 소화기관과 만성위장병(위염, 위궤양, 위무력증, 위하수증), 골수염 및 골수암 오장의 안정, 가래 및 기침 , 월경불순과 여성 냉대하, 묵은 응혈과 적체의 해소, 자궁암 및 부인병, 만성류마치스, 중풍 , 구충제 , 당뇨병 , 신장병 , 발기부전, 피로회복 주독(술독) 관절염, 신경통 피부병, 암의 예방 및 수술 후 전이방지, 당뇨병 지방간에 효과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만병통치약입니다. 그런데 옻에는 독성이 있어 체질에 따라 많은 차이로 반응을 하는데 심장이 약하면 그 발열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겁을 집어먹고 식당에서 주는 약을 미리 받아먹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옻나무에 스치기만 해도 반응을 하시는데, 저도 그 피부를 물려받았기에 살짝 겁이 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고는 옻 오리요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이후로 드러내놓고 다니실 수가 없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당신의 적들이고 방해꾼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까지도 불러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방해하던 사람들입니다.
나병까지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었지만, 그 치유의 은혜와 함께 교만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거나, 높아지거나, 성공하거나, 은혜를 입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치유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더 커져서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교만입니다.
어떤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이 새로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거울에 계급장을 비춰보다가, 한 사병이 들어오자 잘난 척 하느라고 장성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사병에게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대령님 사무실에 전화선을 연결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계급장을 달았으면 그것과 함께 들어오는 교만을 해결해야 이런 창피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치유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던 사람이 나중에는 사탄에게까지 그 신비한 힘을 청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그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서 더 이상 도움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 교만의 독을 그때그때 없애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자신을 죽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선회는 성인병을 예방하는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DHA 등이 함유돼 있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산소와 궁합이 잘 맞아 육류지방에 비해 산화가 무척 빠르고, 일단 산화하면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DHA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 있고 합니다. 사람이 산화된 음식을 섭취하면 몸도 역시 산화가 됩니다. 산화는 곧 노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를 쓸어 ‘싱싱한 무채’ 위에 놓고 또 무채와 함께 먹으면 그 무채에 듬뿍 함유된 비타민 C가 이들의 영양소의 산화를 막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경우 약을 복용할 때 식후에 소화제와 함께 먹는 것처럼, 그 뒤처리도 확실히 해 주어야 위를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새로 배우던, 기도한 것이 이루어졌던, 무엇에 성공을 했던, 오로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더 겸손해지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은혜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터치를 가져오는 겸손함과 강렬함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혹독한 시련이 내게 다가왔는지요? 너무나 끔찍한 병, 한번 걸리면 인생 종치는 병, 그래서 나와는 전혀 무관한 병이라고 생각했던 나병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그간 그럭저럭 잘 나가던 인생이었는데, 그리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천벌 받을 일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나병이 나를 찾아왔는지...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나병을 숨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은 순식간에 내 영혼과 육체를 공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내 모습이 달라져만 가는데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나병으로 인해 드러나게 달라진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관할 나를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나는 그날로 인간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친지, 친구들조차 나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정상인들이 사는 성안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인기척이 나면 큰 목소리로 “나는 부정 탄 사람이요?”라고 외쳐 사람들의 접촉을 막았습니다.
자연히 내 거처는 따뜻하고 편안했던 성안에서 성 밖 토굴로 옮겨졌습니다. 밤이 오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시달렸습니다. 길고도 긴 밤이 지나가면 제일 먼저 습관처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혹시나 간밤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내 병을 고쳐주시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몸을 만져보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병세가 완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개울가로 달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이 지옥 같은 세상살이 하느님께서 간밤에 끝내시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새날은 밝아오고 병세는 어제보다 더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또 다른 하루를 견뎌야만 하는 절망감에 나는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렇게 성 밖 무덤가를 떠돌았습니다. 긴
하루하루 무너져 내리는 내 삶을 바라보며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냐며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내게 이런 비참함을 허락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나는 이렇게 들짐승처럼 산천을 헤매 다니는데, 세상을 어제와 별 다름 없이 돌아가고, 친구들은 내 불행에 상관없이 저리도 깔깔대며 웃고 즐기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나병환자는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몸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나병환자에게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다가갑니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나병환자였기에 목숨을 건 마지막 모험을 감행합니다. 율법을 어기고 인간 세상 안으로 달려 들어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간절히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그 가련함, 그 비참함, 그 절박함, 그 간절함에 예수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의 몸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느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이 썩어가는 나병환자의 육신에 닿는 너무나 특별한 순간입니다. 어찌 보면 이 순간은 무죄한 예수님의 신성과 죄 투성이인 우리 인간의 인성이 합일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하느님 손길이 인간에게 직접 닿는 그 강렬한 은총의 순간, 나병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그 끔찍했던 나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한 가지 노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터치(touch)를 가져오는 간절함이요 절박함입니다. 겸손함과 강렬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혹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때로 더 이상 나아갈 의미를 못 찾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단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비참하고 절박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조금 늦을 뿐이지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반 라파엘 신부님의 강론
환자방문을 하였습니다. 위암으로 고통을 받는 분과 허리를 다치신 분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주님을 새롭게 찾게 되신 것이 은총이지만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며 “신부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며 애원하시는 어머니를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에 여기저기 철심을 박고 침대에는 성경을 가지런히 펼쳐놓으신 형제님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기워 갚고 주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더 당신께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십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세례축일 묵상글
복음 마르코 1,7-11
제가 어렸을 때,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싶었습니다. 제가 6남매 중에서 막내였기 때문에 귀여움도 많이 받았지만, 할 수 없다는 제약이 너무 많아 불만이었거든요.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마음껏 사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한 살 더 먹는 설날은 늘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보너스로 세뱃돈도 받으니까 얼마나 설렜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어렸을 때 가졌던 나이 먹어감에 따르는 그 설렘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젊은 나이지만, 얼굴의 주름이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이제 나이 먹는 것 그만”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 설날은 설레는 날이 아니라, 서러운 날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많은 어른들이 저와 비슷한 심정을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다 싶습니다. 즉, 하루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서럽다는 생각이 들 시간 없이, 대신 매 순간을 늘 설렘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렘과 서러움의 감정 중에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늘 설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 최고의 사랑을 주시는 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신 분. 이러한 주님을 떠올리고 이분의 삶을 본받아 따르려고 할 때, 설렘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설렘이 고통과 시련처럼 견디기 힘든 순간 역시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직접 받으심으로 인해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공적으로 세상에 알리시는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인 예수님께서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세례자 요한에게 굳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과 사랑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이 길을 선택하시지요.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고통과 시련에 좌절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 속에 빠져서, 지금의 삶이 너무나도 서럽다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서러움보다는 또 다른 설렘으로 기쁘게 나의 삶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설레는 하루는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면서 오늘을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먼 훗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면, ‘최선을 다해 남겨진 시간을 즐겁고 활기차게 살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위지안)
그런데 제가 계속해서 넘어지는 것이 딱해 보였는지 어떤 선배님께서 이상한 쇳덩어리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아이젠’이라는 것으로, 발에 부착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발바닥에 부착했다고 해서 넘어질 것을 넘어지지 않을까 싶었지요. 이렇게 허접한 것을 발바닥에 부치는 것보다는 그냥 미끄러지면서 내려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젠을 발에 부착하자 눈길, 얼음길에도 전혀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젠 하나로 이렇게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아마 주님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만 내 마음 안에 모시면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주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 뜻만을 내세우는 이기심,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끝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이 이기심과 욕심이 나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듭니다.
나의 삶을 편하게 해주실 주님을 어디에 모시고 있나요? 주님 한 분만으로 편해질 수 있습니다.
욕심에 대하여
투명한 액체가 얼굴에 닿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도 좋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얼굴피부가 땅겨오는 느낌도 신기했고, 웃으면 안 된다면서도 쉴 새 없이 옆구리를 찔러대는 엄마나 누나들의 장난도 꽤나 즐거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얼굴 팩의 재미는 마치 티비 드라마에서 악당이 가면을 벗는 것처럼 천천히 하얀 꺼풀을 벗겨내는 것이 압권이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얼굴 팩을 즐겨온 탓인지 나는 요즘도 가끔씩 팩을 한다. 요즘에는 황토 팩이니, 한방 팩이니, 마스크 팩이니, 뭐니, 뭐니 해서 종류도 많지만 나는 맨 마지막의 그 가면을 벗는 듯한 재미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줄기차게 ‘PEEL-OFF’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얼굴 팩을 하면 피지皮脂와 피부 각질 등이 제거되고 보습, 미백 효과를 주는 등 피부의 노화를 방지하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런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다.
“신부님, 피부‘는’ 좋으시네요. 호호호.”
그런데 신부新婦에게라면 모를까, 신부神父에게 피부 좋다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사실 피부가 좋다는 말보다는 마음이 ‘좋다’, ‘선하다’, ‘순수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들 마음은 존재의 저 깊고 깊은 곳 어딘가에 담겨져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영적 불순물이 축적되어서 원래의 보들보들하고 착하고 순수한 성질이 감춰지기가 십상이다. 마치 우리들의 피부에 ‘때’가 끼면 그렇듯이 말이다.
이렇게 내 마음에 축적되는 영적 불순물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기를 그 스스로 죄이면서 다른 여타 죄들을 낳게 하는 근원이라고 하는 칠죄종七罪宗, 즉 교만驕慢, 인색吝嗇, 음욕淫慾, 분노忿怒, 탐욕貪慾, 질투嫉妬, 그리고 나태懶怠라는 것들이다. 나는 이러한 죄의 근원들 중의 근원은 결국하나, ‘욕심慾心’이라고 생각한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남에게 과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욕심이고,
인색은 정당한 이유나 목적 없는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이요,
음욕은 사람과 사랑에 대한 빗나간 욕심이다.
분노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욕심이고,
탐욕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이상으로 쌓으려는 욕심이고,
질투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욕심이요,
나태는 이 세상을 나 혼자 편하게만 살려는 욕심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환절기라고 벌써 하얗게 뭔가가 일어나고 윤기가 없이 건조하고 까칠하다. 팩 할 때가 됐나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니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그리고 나태, 이런 저런 욕심으로 가득하다. 욕심 때문에 양심이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이제 막 시작된 사순기간 동안 날마다 복음서를 봉독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내 마음의 팩을 좀 해야겠다. 한 꺼플 벗겨내고 나면 다시 촉촉하고 부드럽고 상쾌해 지겠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4-15)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스테파노 신부님의 강론중 "지금 그리고 여기"
새벽에 집 근처에 있는 양로원에 미사를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두문불출하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유서를 쓰기 위함이었다. 한국외방선교회 회원 모두는 2년에 한 번씩 유언장을 갱신, 본부에 보관하고 있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을시 총장신부님께서 그 유언장의 내용대로 처리토록 해야 한다.
사실은 이미 지난 여름에 작성을 마쳤어야 했었던 일인데 내게는 유서를 작성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라서 차일피일 미룰 때까지 미루다가 사무처장님의 독촉장을 받고서야 겨우 다시 꺼내 놓았다.
쓸 말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다. 나는 유서를 쓴다고 하얀 종이를 놓고 앉아 있으면 딱 할 말이 없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잘 놀다 갑니다’라는 짧은 글 하나 남기고 가면 그만이겠는데 그것은 이래저래 회원으로서 해야 하는 마지막 의무를 소홀히 하는 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리 하지도 못하고......
며칠을 백지 상태로 놓고 있다가 겨우 작성을 마치고 우체통 앞에 섰는데 바로 그 순간 처음 쓸 때부터 고개를 연신 저었던 유서의 한 부분이 마음에 걸려 다시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발송하고 2년 뒤 다음 유서를 쓸 때 정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유혹이 솟구쳤지만 2년 뒤까지 틀림없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보장을 한 단 말인가.
다시 방에 돌아와 다른 백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다.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 이렇게 내 죽은 다음에 일까지도 이러쿵저러쿵 다시 쓸 수 있지만 막상 내가 죽은 다음이면 살아생전 내가 했던 일 눈곱만큼이라도 어찌할 수 있을까. 아직 고칠 수 있다는 것, 즉 다시 살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는 쉬운 일이구나!
그릇된 생각이 있으면 바로 ‘지금’ 바꾸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바로 ‘여기’가 돌아서야 할 곳이다. 죽고 나서는 생각을 바꿀 수도 길을 돌아설 수도 없다. 말로는 쉬운 이 단순한 것을 ‘지금 그리고 여기’서 몸으로는 행하지 않고 우리는 항상 나에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내일만을 말하며 막상 삶의 본질적인 부분은 놓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는 ‘하느님나라’는 또 무엇이겠는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요한3,5-7)
조마태오신부님의 글중에서
이렇게 자신의 결심과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루는 성격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내일부터 하지 뭐.’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내일, 내일로 미뤄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심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러한 마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까지만 하지 뭐.’
오늘까지만 한다는 생각으로 금연, 금주, 그리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하루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 바라보는 문구는 ‘오늘까지만 하지 뭐.’라는 것이지요. 즉, 다음 날을 맞이하는 그 순간 역시 오늘입니다.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세웠던 모든 결심과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님의 글을 보며..... 2012년 종합선물세트
요즘도 종합선물세트가 있나요?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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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묵상
2011년 나해 12월 29일 -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다면
철학자, 강신주 교수의 장자에 대한 TV특강에서, 그는 먼저 장자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모자를 팔던 송나라 상인은 조금 더 개방적인 나라인 월나라로 모자를 팔러 갑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 곳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다녀서 모자를 쓰지 않는 풍습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송나라 상인은 그 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아니면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입니다. 장자는 모든 사람이 이 송나라 상인의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송나라 상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면, 송나라 상인은 더 이상 월나라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은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장자가 쓴 또 다른 예화가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인데, 관계를 넓혀가지 않는다면 이런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켜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세계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학교 후배이고 이름과 나이까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음식이라도 먹으러 가서 그 사람이 좋아하겠거니 하고 시켰는데, 그것을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을 보면 송나라 상인과 같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진전시켜야 할지,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끝까지 남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여자가 됩니다. 결혼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은 관계 맺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 수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나 자신은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로 온전히 실현됩니다.
따라서 우물 안 개구리로 남지 않고 세상을 알고 자신도 알기 위해서는 내가 접하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거부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내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처럼 나와 가장 상반되는 것을 지닌 상대와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남성성을 실현했다고 해서 참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실현한 것일까요?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간 전체를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한 일부분인 것입니다.
혹은 모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인간관계들로 내 온전한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입니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하게 된다면 인간은 이 세상 저 편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 누구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사는 참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참 인간으로서 살 수도 없게 됩니다.
인간은 인간과 상반되는, 즉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 존재와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 이것이 종교입니다.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영원성 앞에서 겸손해지고 돌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되고 죽음이란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참다운 자아를 실현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와 전혀 다른 월나라에 와 있습니다. 이 월나라에 대해 알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내가 살던 송나라로 돌아가야 할까요? 장자는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임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러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왜 다른 아기와 다를 바 없는 그 한 아기를 보고 그 분이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시라는 것을 그렇게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공항에 한 한국 자매님이 나와 계시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우리는 이름표도 없이 어렵지 않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한 정보, 즉 성별, 나이, 외모 등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마치 왕처럼 대단하게 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시메온은 메시아가 가난하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많은 고통을 당하셔야 하고 또 그 어머니 또한 그런 고통을 당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을 종합해 본 결과 메시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미리 알고 있지 않다면 상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아는 것도 눈이 정보를 수집하여 뇌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보이는 것이고, 보이면 참다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미 알아가면서 관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알려고 하는 만큼 그 분은 자신에 대해 더 털어놓을 것이고, 그만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 그만큼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질문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아는 정보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지의 차이입니다. 상대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를 그만 둘 때, 관계도 거기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게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에 대해 조금 더 알려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려 하고, 그래서 더 참다운 인간으로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기에 좋은 묵상글 입니다^^(매일미사)
“모든 것은 지나간다!” 마음속에 이런 말 한마디 간직하고 살면 어떨지요. 이 말은 다윗 임금이 세공사를 시켜 자신의 반지에 새기고 다닌 글귀라고 합니다.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기쁨에 도취하여 자만하지 않도록, 반대로 큰 절망에 빠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낙담하여 좌절하지 않도록 다윗 임금은 이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하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성녀의 말씀을 노랫말로 만들어 아름다운 곡을 붙였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팔에 안아 든 시메온의 모습을 묵상하면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이런 아름다운 글귀가 생각납니다. 시메온은 한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도 인생의 끝자락에 서면 한평생이 하룻저녁 꿈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영원한 진리이신 분, 구원의 주님을 품에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은 모두 사라졌지만 주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이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쁘다고 기쁨에 매이지도 말고 슬프다고 슬픔에 잠겨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하고 외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이 보입니다. 시메온이 품에 안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주님이 보입니다.
착한 목자 (묵상글)
그 분은 호주 출신으로 삼십년 이상을 파푸아 뉴기니의 정글 속에서 원주민 형제들과 함께 사셨던 분이셨다. 어느 날 그 분과 함께 정글 속에 있는 공소를 방문하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다. 신부님은 기다란 ‘정글도Bush knife’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좁은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툭툭 자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가끔씩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편안한 길에서도 그런 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내게는 조금 의아해 보였다.
그 의문은 정글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곧바로 풀렸다. 길을 잃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나뭇가지들을 툭툭 쳐가면서 남겼던 흔적을 따라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정글에서의 강자는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 길을 잃었을 때 재빨리 되돌아 나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우리들의 신앙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왜 믿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믿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우리는 위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시기를 겪게 되기도 한다. 나는 바로 그때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첫마음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회개’의 은총이 강하게 우리에게 내리는 때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로 다시 되돌아오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우리들 삶에 있어서의 죄와 상처의 흔적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에서 죄와 상처의 순간들, 그 흔적들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회개도 어렵다. 진정한 신앙인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죄와 그 흔적들을 잘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바로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한 해의 화두가 다시 ‘회개’이다. 내게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바로 ‘겸손’과 ‘선함’이다. 그 어떤 화려한 능력을 가진 사제도 겸손하고 착한 사제보다 더 신자들을 감동시키며 회개의 은총으로 초대할 수는 없다.
겸손하고 착하신 목자, 우리 주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가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기꺼이 길을 떠나고 그를 살려낼 수 있다. 착하신 목자를 많이 닮은 착한 사제로 올 한 해를 살아가고 싶다. 진정으로 내가 먼저 회개의 삶을 살아가면서 내게 맡겨주시는 착한 영혼들과 더불어 착하게 살아가고 싶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10,1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무죄한 어린이들 순교축일 묵상글
복음 마태오 2,13-18
한국에 도래하는 오리류 중 가장 흔한 대표적인 겨울 철새로 청둥오리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이지요. 북쪽 시베리아 지역에서 번식하다가 우리나라까지 날아오니 얼마나 먼 거리를 날아서 오는 것입니까? 이 모습만 봐도 청둥오리들이 얼마나 날개의 힘이 좋은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청둥오리 농장을 가면 울타리에 가두어져 있는 수 천 마리의 청둥오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철새이지만 이 야생의 청둥오리를 이렇게 농장에서 사육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농장에는 울타리만 있을 뿐,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청둥오리는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까지 날아갈 정도로 튼튼한 날개를 가지고 있기에 하늘이 그냥 열려 있으면 도망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농장의 주인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영양가 높은 사료에 길들여진 청둥오리들은 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기 때문이지요. 영양이 높은 사료를 먹다보면 살이 쪄서 날기가 쉽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즉, 먹을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먼 곳을 비행하지 않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좋겠지요. 편하겠지요. 그러나 살이 점점 찌면서 청둥오리는 죽어 사람의 식탁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삶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다 소유하게 되고,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행복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던 사람은 헤로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의 정적들을 살해했던 잔인한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동방박사로부터 들은 소식에 근거해 죄 없는 아기들을 모두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자신의 권력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잔인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렇게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권력을 지금 현재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그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권력은 기껏 해봐야 몇 십 년 밖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아주 못된 사람으로 평가될 뿐입니다.
이 헤로데의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보다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 그래서 때로는 남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역시 괜찮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그 옛날 헤로데의 길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헤로데의 길을 쫓고 있을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길을 쫓고 있을까요?
2. 즐겁게 행동하라. - 행복한 표정을 짓고 낙천주의자가 되어라.
3. 가장 좋은 친구는 바로 자신이다. - 자책하지 말라.
4. 자신에게 작은 보상이나 선물을 하라. -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5. 친구와 가족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라.
6. 현재를 즐기라. - 문제를 과장하여 키우지 말고 냉정하게 보라.
7.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라. - 즐거운 순간을 많이 만들어 기억 속에 새겨 두어라.
8. 시간을 잘 관리하라. - 상위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작은 목표를 여러 개로 쪼개어 세우고 실천하는 기쁨을 맛보라.
9. 스트레스와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준비하라.
10. 음악을 들으라. - 휴식과 자극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며 두뇌회전도 빨라진다.
11. 활동적인 취미를 가지라. - 정원을 가꾸거나 영화를 보면 집에서 TV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12. 자투리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라.
BBC 행복위원회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여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예로 들면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고 말합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의 그 크심 앞에 의심을 풀고, 천사가 전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의심’과 ‘믿음’은 서로 다른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의심은 “왜?” 하고 묻게 하지만, 믿음은 “예!” 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의심은 다가올 미래를 두렵게 하지만, 믿음은 미래를 희망차게 합니다. 의심은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믿음은 관계를 열어 줍니다. 마리아는 인간적인 의심을 넘어 믿음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과 관계가 열리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을 넘어서 믿음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의심은 우리 이성의 작용을 도울 수는 있지만 하느님과 관계를 열어 주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뀔 때, 마리아에게 작용했던 구원의 역사가 우리 삶에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