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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나2012. 4. 16. 오전 12:57:23

주님자비주일

오늘은 주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발걸음이 절두산 성지로 향하였는데 아마도 신부님 한테 혼나고 오라는 것 같습니다.

예비신자들이 성지순례라고 들러 미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우리 가정에게 평화를, 사업이 잘되라고, 좋은 대학에 가게 해 달라고, 시집 잘 가게 해 달라고등등...바라는 마음에 신앙을 가지려고 한다면 세례받지 말고 여태 지낸 생활방식대로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는 너무도 깊고 넓어 우리는 모든 삶을 주님이 뜻하는데로 , 하느님의 모상을 닮도록 해야하는 것.

악은 끝이 있지만 주님의 자비는 끝이 없어라.

한 주간 주님의 자비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자녀로 지내시길 바랍니다

유미나2012. 4. 13. 오후 10:20:56

성모님안에서

김두용베드로님!
 
여러 레지오분들이 한번 레지오를 떠나면 다시 오기 힘들다고들 하십니다.
정말 그럴까요?.
베드로님을 통해 아니라는 것을 보고싶습니다.
지금 여건상 행동단원으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쁘레시디움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는 베드로님과 기도안에서 항상 함께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님, 이사 잘 하시구요 언제든지 클럽안에서 저희와 함께 해 주세요.
깊은 밤 주님의 은총속에 편안한 밤 되세요~
김두용2012. 4. 13. 오후 1:17:21

오랫만에 정말 반가웠습니다.

 
 
 안녕하세요 ?
 
 자비로우신 마리아 Pr.  전임 서기 김두용 베드로 입니다.
 먼저 전민원 바오로 형제님  Cu. 단장되심을 축하 드립니다.
 
 바오로 형제님께서 레지오의 큰 역할을 해 주실줄 알았습니다. 
 자비의 성모 Cu. 가 앞으로 더 크게 발전되리라 믿습니다.
 
 어제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정말 오랫만에 형제 자매님들 뵙고 나니 참 반가웠습니다.
 
 저는 28일날 당산동 으로 이사를 가지만, 방배동은 저한테 고향같은 곳이라 자주 들르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생각 입니다.  제가 어렸을때 부터 다녔던 방배동 성당과  5년 동안 몸 담았던 레지오.. 항상 잊지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협조단원으로써 여러분들을 위해 꾸준이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자비로우신 마리아 Pr. 화이팅 ~~
   
 
완죤이쁜호박2012. 4. 11. 오후 1:46:26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우리 하느님안에서 사랑하며 삽시다.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우리 그러자구요
 
 
유미나2012. 4. 11. 오후 12:56:26

부활을 축하합니다~^^*

 
 
 우리에게 파스카의 은총을 허락하신 천주여!
 
 당신백성에게 천상 선물을 내려주시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며,
지금 이 세상에서도 그날을 기다리며 즐거워 하게 하소서!!!
 
 
                                                                                          *이정록예로니모
전민원2012. 2. 19. 오전 6:44:37

서기님 환영합니다.^^

방자네 식구가 되심을 진심으로 축하^^

환영합니다.

!@#$%^&*()

전민원2012. 2. 19. 오전 6:39:10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길

2012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such as no fuller on earth could bleach them.
Then Elijah appeared to them along with Moses,
and they were conversing with Jesus.
(Mk.9,3-4)



제1독서 야고보 3,1-10
복음 마르코 9,2-13

지난 1월에 인천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해의 사제서품식을 준비하는데 걱정이 하나 있었지요. 이는 성가를 부를 신학생 숫자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입생 합격 발표가 늦어져서, 신입생을 제외한 성가대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합격 발표 후 서품식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음악부장에게 일주일 동안이라도 신입생을 데리고 성가 연습을 하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음악부장은 난색을 표하는 것입니다. 아직 라틴어 성가도 모르고 또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성가대의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렵다는 이유였지요.

사람만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없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협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지요. 그러면서 문득 내 자신은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만나는 이웃들과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협조자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이웃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 방해자는 아니었는가를 말입니다.

만약 시속 100Km로 달려야 하는 도로에서 한 대의 자동차가 30Km로 가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 자동차는 분명 운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따라오는 모든 차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협조자의 모습이 아닌 방해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협조자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행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타볼산이라고 불리는 높은 산에 오르시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제자들은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엘리야, 모세를 본 것뿐만 아니라, 스승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보게 된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너무나 힘들었던 전교여행. 그런데 거룩한 변모 장면을 목격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을 받는 엘리야, 모세를 만났으니 이곳에서 눌러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한 제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협조자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늘에서 이러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 이 사실을 기억하는 진정한 주님의 협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의 말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조지 W.크레인).


예비신학생 지도자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올해의 예신모임 준비를 위해 모였습니다.
열심히 잘 준비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간판은?
 

속된 표현으로 ‘간판’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벌, 지위, 가정, 출신 등등.... 소위 간판이 좋을 때 사람들은 이러한 반등을 보이곤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인 사람이 10개 중에서 9개를 잘못하고 하나라도 잘하면 “역시 달라. 달라도 뭐가 다르지.”라며 칭찬합니다. 그러나 간판이 별로인 사람이 10개 중에서 9개를 잘하고 단 하나 잘못하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비난을 쏟아 붓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간판을 가꾸는데 참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정말로 중요할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판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미나2012. 2. 18. 오후 7:51:21

환영합니다!*^^*

 
 
 매일 매일 빼빼로 데이처럼 성모님께 아름다운 기도다발과 열성적인 활동으로 사랑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안혜숙2012. 2. 18. 오후 5:36:43

초대 감사 드립니다.: *)

 
 
유미나 미카엘라 단장님,
 
안녕 하세요!
 
오늘 새로운 안내 말씀 전해 듣고 가입 하였습니다.
 
1개월동안 긴장의 연속이네요,,히~
 
제 곁에 성모님께서 계시다는걸 잊고 지냈었습니다,,
 
요즘은 평안한 마음이 다가와요,,
 
나눔을 주셔서 정말 감사 드리며 
 
저에게 형제 자매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안혜숙안젤라^^
 
 
 
 
 
 
전민원2012. 2. 13. 오전 5:54:19

외로움/기도

나 혼자만을 위한 밥상을 차리는 일이란 썩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부터 아침은 커피에 적셔 먹는 식빵으로 때우고, 저녁은 어떻게든 집근처 식당에서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집에서는 점심 한 끼를 먹게 되는데 메뉴는 그 날, 그 날 영감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으로 결정을 하는 편이다. 며칠 전에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에서 좀 떨어진 슈퍼마켓까지 가서 김치를 사왔다. 이제는 이곳 스자좡에 사는 중국 분들에게까지 김치가 알려진 탓인지 빨간 색깔만큼은 영락없이 한국에서 먹는 것과 똑같은 김치를 그 슈퍼마켓에 가면 살 수 있다. 물론 매운 맛보다는 달짝지근한 맛이 너무 강한 이 곳 김치는 김치찌개 재료로나 적합할까 흰 쌀밥에 그냥 반찬으로 먹기에는 힘이 든다. 그래도 이곳에서 김치를 살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땀을 비 오듯이 쏟아가며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얼마나 배고픔이 느껴지던지 바퀴벌레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휘파람을 불면서 입 안으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땀을 식힐 틈도 없이 냄비에 김치를 길쭉하게 찢어 넣고, 대파와 마늘도 송송송 썰어 넣고, 껍질까지 붙어 있는 돼지고기도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가 팔팔 끓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혼을 담아 빗은 도자기를 가마에 넣고 일주일을 굽고 앉아있는 장인의 마음도 그리 조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최강표 김치찌개’가 완성이 됐고 나는 밥을 담기 위해 주걱을 들고 밥통을 열었다. 그런데 아뿔싸! 밥통에 밥이 없다! 쌀통에 쌀이 없다!

쌀이 떨어진지가 벌써 며칠이 지났을 텐데 도대체 이놈의 주부가 살림을 어떻게 하기에 쌀통 채우는 일도 안하고 며칠을 보내고 있었을꼬.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 바로 옆에 놓여 있는 빈 밥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서 있을 때 드는 감정이 의외였다. 시장기는 다 어디로 도망가고 갑자기 파도처럼 내 가슴을 적시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 그 동안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하는 감정을 주제로 글도 몇 편 써 봤고, 강론도 몇 차례 해 봤지만 그 빈 밥통 앞에 서서 느낀 외로움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인간 감정을 사진 찍듯 정확히 찍어놓은 광경 앞에서 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모든 재료가 다 들어가서 맛있게 끓고 있는 김치찌개 옆의 빈 밥통! 밥이 없는 김치찌개! 이게 외로움이구나! 일견 다 있어서 풍요로운 듯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없어서 모든 것의 의미가 그 빈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리는 것, 그래서 내 존재의 의미마저 희미해져 가는 것, 이것이 외로움이었구나!

그 날 밤, 조용히 남의 말을 들어주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한 선배 신부님의 전화번호를 힘들게 알아내서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다. 그 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익숙한 선교지를 떠나서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을 받고 이제 막 새로운 선교지에서의 삶을 시작한 분이었다. 다시 물설고 낯선 새로운 환경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되어 그곳 사람들과 그곳 교회에 적응해 가야하는 쉽지 않은 상황에 본인이 서 있음에도 그 분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는 옛말이 틀림이 없다.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그 분의 깊은 침묵 속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울림으로 내 마음을 채웠다. “최 신부! 나도 요즘 몹시 외롭다.” 생전에 그런 표현은 단 한 번도 안 할 것만 같았던 그 선배 신부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척 외롭다’는 고백 한 마디에 나는 목이 메어왔다. 그래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나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같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고 앉아 있다는 것은 놀랍도록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 커다란 위로 안에서 나는 다시 나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맛있게 끓고 있는 김치찌개 옆의 빈 밥통! 주식이 빠진 밥상! 주님이 멀어진 선교지에서의 삶! 그것이 나의 외로움의 시작이었다. 밥이 없이 반찬만으로 포만감을 느낄 수 없듯이 주님이 없이 활동만으로 한 선교사의 삶이 어찌 풍요로울 수 있을까. 하느님과의 대화 없이 어찌 친구들과의 수다만으로 한 구도자의 기도가 완성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선교지에서의 외로운 삶은 주님과의 풍요로운 관계 안에서만 매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활동과 사람만 그리워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은 외로움의 골짜기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 깊은 골짜기가 주님으로 채워짐이 없이 활동과 사람만으로 얕아질 수 있을까? 활동과 사람만으로 그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다시 풍요로운 땅을 걸을 수 있을까? 함께 미사를 드릴 신자 한 분이 없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빈 방에서도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온 피부로 섬세하게 느끼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시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거룩한 미사를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다. 김치찌개 옆의 빈 밥통을 본 그 날 이후, 그 선배 신부님의 짧은 고백을 들은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모든 희망을 주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모든 주권을 주님에게 되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주님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님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돛단배,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외롭지만 행복한 나그네! 나는 다시 오랜만에 주님께 편지를 쓴다.

“스승 예수님!
고백합니다. 그 동안 너무 외로웠습니다. 함께 미사를 드릴 신자 한 분이 없는 이곳에 살면서 ‘선교사제로 평생을 살겠다’고 당신께 드린 약속을 한 수만 물러달라고 때를 쓰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뜨는 달이 그렇게 외로워보여서 홀로 남겨두지 못하고 밤새 바라보며 창문 옆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태양도, 바람도 외로웠습니다. 행여 일이 생기거나 친구가 생기면 좀 덜할까 싶어서 일에 빠져보기도, 친구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미사를 드리는 시간은 점점 힘든 시간으로 변해갔습니다. 정성은 눈곱만큼도 없이 그냥 빨리 ‘해치우는’ 식으로 바쳐졌습니다. 기도는 점점 저만의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조차 외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빈 밥통을 보여주신 바로 그 날, 한 선배 사제의 낯선 고백을 들은 그 날, 스승께서 제게 빈 밥통과 낯은 음성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었고, 지금도 그 놀라움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제 외로움의 시작과 끝을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제 외로움은 당신의 부재不在입니다. 당신의 부재는 제 외로움의 시작이고 제 생명의 끝입니다. 제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알고 계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스승님이십니다. 저는 다시 당신께로 돌아가서 당신과 함께 길을 걷습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다시 웃을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은 다시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스테파노에게!
나도 몹시 외로웠단다. 광야를 걸을 때, 바라빠를 놓아주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를 때,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그리고 특별히 네가 외로워할 때도 나는 몹시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바로 뒤따르는 것이 깨달음이란다. 나는 외로움 속에도 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파이팅!”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전민원2012. 2. 9. 오전 4:49:43

마음

밥을 태우긴 했는데
 

서로 다른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불화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며느리가 밥을 하다가 그만 밥을 태웠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도 못하느냐”고 구박하니 며느리는 “일부러 그랬느냐”고 대들었지요. 시아버지가 “너는 어디서 말대꾸하느냐”고 야단치니 이것을 지켜보던 남편이 색시에게 손찌검을 합니다. 그러자 새댁은 “그래 죽여라 죽여!”라고 소리치며 대들었습니다. 이 순간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화목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갓 시집 온 며느리가 너무 긴장해서 그만 밥을 태웠습니다. 시어머니가 “내가 너무 물을 적게 부어서 태우게 되었다”며 미안해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내가 나무를 너무 많이 태워서 밥이 탔다”며 며느리를 감쌌습니다. 그 옆에 있던 신랑은 “내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니 밥 태운 일로 가정이 오히려 더 화목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요? 내 안에서 나오는 마음을 통해 우리 가정도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나오는 나쁜 마음을 통해 우리 가정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Mk.7,14-15)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0,1-10
복음 마르코 7,14-23


지난주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아주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하나 있었습니다. 진행이 너무나도 재미가 있어서 가슴을 졸이며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면서 다음 주 예고편이 나옵니다. 즉, 이 뒷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방송을 이 드라마를 보게 되면 마지막 회가 아니기 때문에 또 다시 다음 주까지 기다리라는 예고편을 또 다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결말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드라마의 원작인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했지요. 그리고 어제 비록 피정 중이지만 짬짬이 시간을 내서 다 읽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굳이 드라마를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책을 다 읽음으로 인해 결과를 아는 이상, 가슴 졸이면서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드라마가 끝났다며 화를 낼 필요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드라마가 어떤 현장감을 주기는 하지만, 책에서 주는 그 깊이와 감동에는 쫓아오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책을 읽게 되어서 더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성격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지만, 또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을 느낄 수는 있지만, 성경을 통해 오히려 더 빨리 주님을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빨리 주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배려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의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쉽게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어렵고 힘들게 전해주실 때가 많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이지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거룩한데, 당신의 창조물인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역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성경도 전해주시고, 그밖에 여러 당신의 창조물을 통해 당신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라 사람을 더럽히지 않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 즉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지요.

거룩한 창조물답게 우리의 마음 역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거룩해질 때, 세상 전체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위해 갖은 방법을 쓰고 계시는데, 우리들은 어떤 노력을 과연 하고 있습니까? 내 자신의 마음부터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전민원2012. 2. 9. 오전 4:47:02

행복은? 오늘 or 내일

며칠 전부터 다시 뒷목 부위가 무겁고 뻐근하게 느껴져서 불편을 겪고 있다. 로마에서 공부를 할 때 마지막 일 년 동안은 활동 시간의 대부분을 논문 준비한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낸 탓이었는지 뒷목의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런데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함과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서 그 동안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예전처럼 책상에 죽치고 앉아서 ‘열공’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도 어느 지상의 황제가 안 부러울 만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도 다시 뒷목이 뻣뻣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허베이성 체육국에서 운영하는 성省대표 운동선수들을 위한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하다가 자주 다치게 되는 관절 부위나 디스크, 혹은 골절 등의 치료에 대해서는 가장 뛰어난 의술을 자랑한다는 곳이었다. 금요일 오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그 병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외관상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낡고 어두운 분위기의 병원이었다. 게다가 병원 곳곳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운동원 우선’이라는 문귀, 얼마나 매트에 짓이겨졌는지 귓바퀴가 다 달아서 밋밋한 귀를 가진 파란색 유도복의 건장한 사내들, 그리고 아직 이른 봄인데도 이미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여성 ‘운동원’들의 풍경은 나와 같은 일반 환자를 상대적으로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참동안 운동원들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에는 아직 두 명의 운동원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둘 다 무릎에 쇠꼬챙이같이 길고 굵은 대침을 꽂은 채 누워있었는데 조그만 기계에 의해서 대침이 연달아 전기적 자극을 받고 있던 탓에 그 통나무 같은 허벅지들이 박자를 맞춰서 들썩들썩 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중국의 병원들은 양의洋醫과 중의中醫의 구분 없이 완벽한 협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단발머리를 한 여의사 선생님이 상냥하게 내 상태를 물었고 나는 최대한 자세하게 내 목의 상태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 말을 그리 성의 있게 듣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의사 선생님은 내 말을 중간에 딱 자르고는 몇몇 질문을 더 던진 뒤에 권위 있는 목소리로 처방을 내렸다. 한참을 설명해 주셨는데 뭐 대충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평소 좋지 않은 자세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목과 어깨 주위의 근육이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경추의 변형까지 올 수도 있으니 서둘러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일단 안마를 통해서 치료를 시도해 볼 것이고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저기 저 운동원들처럼 침술로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 좀 나을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온 나에게 ‘침술’이라는 단어는 두 귀가 번쩍 뚫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전기적 자극이 가해지는 젓가락 같은 대침 서너 개를 무르팍에 사정없이 쑤셔 박아 놓은 탓에 한쪽 허벅지가 연신 들썩거리는 채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운동원들을 내가 만약 보지 못했다면 혹시 모를까 저렇게 굵고 긴 침을 맞는다는 것은 내 용기의 한계를 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침술이라는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과거의 경험이 있었다.

내가 동료들과 함께 수련기를 보낼 때 인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동양의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때 일어난 일이다. 매 주 두 시간 정도 한의원을 운영하시는 선생님이 오셔서 기, 혈, 경락과 같은 한의학의 기본 개념 등을 설명해 주시고 가끔씩은 우리끼리 서로 짝을 지어서 사관四關, 족삼리(足三里), 인중(人中), 백회(百會) 등과 같은 기본 혈에 침을 놓는 실습을 하게 하셨다. 침을 놓아보기는커녕 맞아본 경험도 많지 않았던 내게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는 수련생들끼리의 침술 실습은 그다지 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씁쓸한 기분으로 동양의학 과정을 거의 다 끝내가는 무렵에 선생님은 너무나 충격적인 마지막 숙제를 내주셨다. 우리 수련생들끼리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파트너끼리 번갈아 가며 장강(長强)에 침을 놓으라는 주문이었다. 장강은 꼬리뼈와 항문 사이에 있는 혈로서 거기에 침을 맞으려면 바짝 엎드린 상태로 침을 놓는 사람에게 가장 추한 꼴을 보여야만 했다. 게다가 우리 동료들 중 하나를 ‘마루타’ 삼아서 선생님이 시범을 보일 때 10센티는 족히 될 것 같은 침이 그 민감한 곳에 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기겁을 한 상태였다. 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끝까지 버텼지만 선생님이 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결국은 마지못해 엉덩이를 하늘로 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던 동료의 덜덜덜 떨리는 손에 의해 차가운 침이 장강혈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공포와 수치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혼절은 안 했지만 아무튼 그 경험이후로 나는 ‘침’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침부터 꼴깍 삼키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중국인 여의사가 다시 침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연히 초긴장을 할 수 밖에...... 다른 안마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의사 선생님이 직접 나를 눕히더니 목을 늘여 빼고, 주무르고, 돌리기를 한참동안 되풀이 한 뒤 내게 물었다.

“좀 어떠세요?”
“아주 좋은데요. 아주 좋아요. 어쩌면 이렇게 금방 좋아질 수가 있지요?”
“삼일 분 진료비를 미리 끊어드릴 테니 며칠 더 나오세요. 호호호.”

용수철이 튕겨지듯 재빠른 내 답변에 선생님은 만족스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물론 내가 거짓말로 괜찮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병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질수록 점점 목이 다시 뻣뻣해 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씻은 듯 나아 보였던 목이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얼마 안돼서 원 상태로 돌아가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 목이 나를 속였을까? 안마를 해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침술로 다스린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내 목이 나를 속였을까? 내가 나를?

세상 사람들은 참 많이들 속고, 속이면서 살아간다. 크게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명분을 찾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니 ‘중동의 민주화’니 떠들면서 세상을 속이는 것부터, 작게는 눈깔사탕 하나를 사기 위해 연필이며 지우개를 사야한다고 엄마를 속이려는 어린 아이의 귀여운 속임수까지 우리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때로는 발각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히 묻혀버리기도 한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분노의 칼을 갈면서 상대방에게 되갚아 줄 방법을 찾느라 고심한다. 만약 나를 속인 상대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면 배신의 아픔이 더해져서 그 분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다.

하지만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 속은 것보다도 더 나를 아프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나 자신이고, 내 인생이다. 내가 어떻게 나에게 속을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너무나 감쪽같이 속고 속이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조금만 더 참고 부지런히 돈을 벌자. 머지않아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는 돈이 나의 행복을 당연히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일이란 너무나 시시하다. 다시 젊어지기 위해 그 동안 벌어놓은 돈을 쓰는 일이 고작이다. 젊은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불행했었는데 돈을 벌고 나니 이제는 젊음을 잃어서 불행하다. 돈이 아니고도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를 속이는 환상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한다면,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면, 내가 조금만 더 예뻐진다면...... 이런 외적인 조건의 변화는 우리에게 육신의 안락함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의 존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육신의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만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을까? 애초에 행복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진 내가, 그러니까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불행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내가 평생을 두고 내 인생을 속여 온 탓이다. 하지만 불행한 오늘을 마치 희생하듯 흘러 보내면서 보장되는 내일의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부터 환상 속의 나는 현실 속의 나를 교묘하게 속이려 들 것이고, 나는 오늘이라는 현실의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 채 내일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좇으면서 인생을 낭비해야만 할 것이다.

행복은 항상 지금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다. 우리의 인생을 바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꽃을 발견하고, 지키고, 마침내는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일 뿐이다. 만약 그 불꽃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행여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은 행복한 고통이고, 고통스러운 행복이다. 그 오늘은 결코 불행한 오늘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내 안의 불꽃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신 당신 숨결을 따라 살아갈 때 최고의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으로 살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전민원2012. 2. 3. 오전 5:44:04

주님 봉헌축일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드릴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봉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개인의 욕심과 인간적인 생??버리고 날마다 살아가는 거룩한 삶, 사랑의 삶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참된 봉헌물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수도자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며 사는 수도자들과 함께 고 최민순 신부님의 시 ‘받으시옵소서’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받으시옵소서 /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라도 /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 본시 없던 나 손수 지어 있게 하시고 / 죽었던 나 몸소 살려 주셨으니 / 받으시옵소서 /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 어리석던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 님이 주신 목숨이야 늙을 줄이 있으리까 / 심어 주신 사랑이야 금갈 줄이 있으리까 /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 당신의 것을 도로 받으시옵소서 // 가난한 채 더러운 채 / 이대로 나를 바쳐드리옴은 / 오로지 님을 굳게 믿음이오라 /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 주홍 같은 나의 죄 눈같이 희어지리이다 / 진흙 같은 이 마음이 수정궁처럼 빛나리이다.
전민원2012. 2. 1. 오전 7:47:18

청춘이란

 사무엘 울만 (Samuel Ulman)의 청춘 (Youth)라는 글을 함께 나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인생이란 깊은 샘의 신선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리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되어버린다

6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무선 우체국''을 통해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격려,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으로 덮이며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전민원2012. 2. 1. 오전 7:35:43

<한 송이 연꽃처럼>

“저 사람이 어디서 더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한 송이 연꽃처럼>

 

‘봉헌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웃어른께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선물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선물을 드릴 때는 아무것이나 드리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니 드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의미 있는 것, 가장 흠 없는 것을 골라 드립니다.

 

선물한다는 것은 그냥 물건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지요. 내 정성을 담아, 내 마음을 담아, 내 영혼을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제게 과분한 정도로 많은 선물들을 주셨는데, 제게 그분께 돌려드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당신 전체를 주셨는데, 제가 드리는 것은 너무나 부분적인 것이어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담한 호수 수면 위로 탐스런 연꽃들이 몇 송이 활짝 피어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활짝 피어난 꽃봉오리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어여쁜 연꽃의 자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수면 밑에 잠겨 있는 연뿌리를 생각합니다. 연뿌리 삶아먹으면 어디에 좋다던데, 저 정도면 시장에 내다팔 수 있을 텐데...

 

보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서 우리네 삶은 천지차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말씀이 어떻게나 청산유수인지, 내용은 또 얼마나 알찬지, 그 가르침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지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 끝에 이제 예수님의 삶은 어여쁜 한 송이 연꽃처럼 활짝 만개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는 지혜가 번뜩였습니다. 그의 언변은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 탁월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열어주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에 어떤 사람들은 함께 기뻐해줬습니다. 진심어린 축하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고향 마을 사람들, 활짝 핀 연꽃 같은 현재 예수님의 모습은 보지 않습니다. 양부 요셉을 도와 하루 온종일 묵묵히 일하던 나자렛 청년 예수님만 기억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놀라운 변신에 축하는커녕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고 속상해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더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핵심 교리, 꽤나 복잡해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취를 발견하는 일, 그분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내 삶의 방향키로 삼는 일,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런 간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 모두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