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동]내가 잊어버린 몇가지 말들...

2000. 11. 15. 오후 1:32:55

글자

저희 회사 선배가 보내준 글입니다.

 

 

음...예전에 읽었던 글인데...갑자기 요즘 들어서 이 글이 자꾸 머리속에서 맴도네요..

 

나는 어떤 말들을 잊어버리고 사는 건지...

 

 

 

 

   

 내가 잊어버린 몇 가지 말들

 

 

우리 나라 남자들은 애정표현에 참 약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지식한 관습들은 과묵하고 무게있게 행동해야 남자답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직접적인 애정표현을 하는 것조차 어렵고 힘들어 합니다.

 

물론 요즘 젊은 친구들이야 자기 표현에 솔직하고 자기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신세대들이니, 이 말은 최소한 저와 같은 386정도 이상의 세대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저 역시 결혼 전 연애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럴 듯하게 분위기를 잡고 사랑한다는 말도 곧잘 속삭였고, 연애편지 속에 유치찬란한 표현으로 사랑의 느낌을 적어 보내곤 했으니까요.  

 

이제 결혼 생활이 8년째 넘어갑니다.

 

지금은 사랑한다.. 좋아한다..라는 말들을 거의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흡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걷는 듯한 결혼 생활 속에서 애틋한 연애감정이라는 건  애들 소꼽장난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살아가면서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애들때문에 웃어 버리고, 주말이면 아이들 손잡고 갈비집에나 가는 그저 그런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 미혼인 여자 후배가 "결혼하면 어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냥 사는거지 뭐"

 

이런 대답을 하는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측은함이 배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젊고, 결혼에 대한 이쁜 꿈을 간직하고 있을 그런 나이니까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솔직한 답변인 것을..

 

설령 그녀가 가진 결혼에 대한 환상을 한마디로 뭉개버렸다 한들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거짓말을 말입니다..

 

 

 

오랜만에 후배녀석과 퇴근 후 술한잔을 했습니다.

술집으로 향하기 전 습관처럼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먼저 식사해, 나 저녁 먹고 들어갈께"

 

1차,2차를 거치면서 기분좋게 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음악도 멈추고 후배가 화장실을 간 그 짧은 공백의 시간에  무심코 손을 넣은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만져졌습니다.

 

그 순간 왜 갑자기 전화가 하고 싶어졌을까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냥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에게 그 시간에 전화를 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아내가 받았습니다.

 

"아직도 술마시는 중이셔? 왜.. 또 외박하시게?"

 

 회사에서 집이 비교적 멀고 차가 일찌감치 끊어지는 까닭에, 이런 시간에 하는 아내와 통화라는 게  외박승인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택시타고 들어가니까 택시비 준비하고 있어" 따위의 말들이었으니 아내가 선수를 치는 거였습니다.

 

"아니..."

 

"그럼 왜 전화했어요? 빨리 빨리 들어오지 않구.."

 

"..............."

 

"왜 그래요? 왜 전화 했냐니까?"

 

.

 

.

 

.

 

"보고 싶어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술마시면서 단 한번도 아내를 생각한 적도 없었고,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말이죠.

 

살다보면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엉뚱하게 튀어나온 말들은 이내 내 지배권을 벗어나 저만치에서 저 혼자 춤추고 있고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황당해 하고 있었습니다.

 

쪽팔리고 겸연쩍기도 하고 하여간 무척 어색한 순간이었습니다. 전화기 저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분명히 주책떨지 말고 빨랑 들어오라고 무안을 줄 것입니다. 아니면 깔깔 비웃음을 흘리면서 ’취했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후 전화기 저쪽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

 

.

 

.

 

"나두..."

 

 

 

 

 

어쩌면 아내는 그동안 ’보고싶어’, ’사랑해’ 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혹은 먼저 꺼내고 싶었으면서도 매일 피곤해 지친 얼굴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 남편에게 차마 말 못 꺼내고 입 안에서 맴맴도는 이 말을 혼자 삭히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생각해보면 그때 불쑥 튀어나왔던 ’보고싶다’ 라는 말은 내가 꽁꽁 묶어놓고 숨도 못 쉬게 만들었을 뿐, 나의 가슴 속 깊히 자리잡은 진심에서 퍼져 나온 그런 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의식 속에서 나온  잠꼬대 속의 진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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