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두고 볼 일

2000. 8. 23. 오후 5:25:06

글자

사무실에 제 파트너격인 동갑내기 친구가 있는데요, 아주(정말) 예쁘게 생긴데다가 다소 공주틱해서 언제나 저와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이를테면, 연수가서, 야외 식사를 하는데 반주로 나온 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술이 오른다며 개울에 발을 담가 열을 식힌다든가-저는 이 때 석 잔 째를 채우고 있었죠. 제가 반바지에 운동화 신고 용감하게 사무실 문을 열면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다든가..) 그런데 이 친구, 가끔 황당한 질문이나 행동으로 저를 놀라게 하지요.

 

오늘은 점심 먹는 자리에서 10년 근속자 표창에 관한 얘기가 오고갔는데, 불쑥 이러는 거 있죠.

 

"10년 근속이면, 10년 동안 결석을 단 한 번도 안 했다는 거예요?"

 

이 질문에 모두 침묵......그러자 동의를 구하려는 건지 저를 바라보며 또 한 마디 덧붙이는 겁니다.

 

"지각도 안 했을까?"

 

어허......그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얘기까지 나올지 몰라서 제가 황급히 말을 막았지요.

 

"그랬으면 ’개근상’을 주겠지."

 

"아아~ 그런가?"

 

그런데 이 친구가 저한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우리가 편집하고 디자인한 첫 책이 나온 기념으로 술 한 잔 하려다가 분명 저 혼자 마시게 될 것 같아서 그냥 차를 마시는 자리였는데요,

묻지도 않은 자기 첫사랑의 상처에 대해 얘기하다 말고 그러더군요.

 

"나는, 내 남자친구는 걔, 걔 여자친구는 나, 이렇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나는 겨우겨우 살고 있는데 걔가 여자친구를 새로 사귀었다는 거야. 그 소식 전해듣는 자리에서는 아, 그래? 잘 됐네. 하고 말았지만....."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과 쓸쓸함이 주제로 떠오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씩씩거리면서 집에 왔지. 어우 열받어, 어우. 분하고 기가 막혀서 내, 참. 뭐 이래? 그 날 얼마나 화가 나는지 잠도 안 오더라니까. 그래, 이 자식아. 어디 얼마나 가나 보자. 어우.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그래놓고 저하고 마주보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허, 참... 그럴 수도 있더군요.

그렇게 차라리 화를 내는 것도 괜찮다 싶었어요. 그렇게 마음먹으면 좀 가벼워지기도 하고 어쩌면 좀 재미있기도 하구요. 공주라고 좀 놀리기는 했는데, 이런 면이 있다니. 참, 사람, 오래 두고 볼 일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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