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선물, 그리고

2000. 5. 2. 오후 5:45:04

글자

  아침마다 제가 물을 주는 화분이 몇 개 있습니다.

  저희 출판사 주간으로 계시는 정채봉 선생님께서 팬들에게 선물받으신 화분들이지요.

 

  "소영이 니가 물좀 줘라잉. 그라문 나가 밥 사줄팅게."

  "넵!"

 

  "화분이 하나 더 들와부렀어. 소오영이 밥 한 번 더 사줘야겠구만잉."

  "^^"

 

  그렇게 인연을 맺은 화분이 이제는 제법 여러 개가 됩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화분도 꽃들도 다 키가 작아서, 언젠가는 물을 주면서 "얘들아, 너희는 주인을 닮아 키가 작은 거니? 키킥"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정성껏 물을 주고 가끔은 노래도 불러줬어요. (사람이 아니니까 제 노래를 들어줬겠죠..^^)

 

  그런데 하루는 정말 낯선 화분이 하나 들어왔어요. 다른 화분들과는 달리 화분도 홀쭉하고, 꽃 줄기도 제법 길어서 눈에 얼른 들어왔지요. 창가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는데 저 혼자만 키가 커서 그런지, 어째 어색해 보이고, 어쩌면 슬퍼보이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말을 보내고, 화분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사흘만에 주간님 방 문을 열었을 때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그새 꽃이 시들어 있는 거예요. 워낙에 키가 작아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다른 화분들은 잘 버티고 있는데, 불안불안했던 예의 키 큰 꽃은 눈에 띄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저는 황급히 그 화분에 물을 주었습니다. 화분 받침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렸다가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을 한 번 더 주기까지 했지요. 그러고는 한 두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하고 제 자리로 돌아왔어요.

  그날 주간님이 퇴근하시자마자 다시 화분을 찾아가보니,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어요. 다른 화분들은 다 이미 생기를 되찾았는데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다, 하고 생각하며 화분이 놓인 그 창가에 잠깐 서 있다가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화분은 시든 게 아니라, 빛을 향해 몸을 숙인 것이라는 사실을요. 자연시간에 배운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목을 늘인 꽃을 보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아픈지요. 제 주인이나, 물 주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미련하게 창밖으로만 목을 내어 놓고 있는 모습에 저는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한 사람만, 한 가지만 사랑하는 처절함이라니....화가 났습니다. 그날 퇴근하는 길에 저는 화분을 정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지금 그 꽃은 힘겹게 일어나고 있어요. 다 일어나고 나면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숙이겠지요.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화분을 바라보면서, 주간님은 참 고약한 선물도 다 받으셨군. 하고 속상해하는 요즘이었습니다. 이제는 별 게 다 마음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던 요즘이었습니다.

 

  어제는 그런 제가 뜻밖의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어젯밤에는 잠을 설치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고 시를 읽었습니다. 자려고 누워다가도 시와 음악이 자꾸 머리에 올라와서 도로 일어나 앉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어렵지 않더군요. 잠에서 깨자마자 어제 듣다 잠든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찬물로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어제 읽다 잠든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면서, 저는 그 시를 꽃에게 읽어주었습니다. 다시 바보같은 짓을 해도 좋으니 우선은 일어나라고, 너에게 모질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고 사과도 했습니다. 물을 다 주고 창밖을 보니 나뭇잎에서 햇살이 뚝뚝 떨어지는 오월 아침입니다. 오월이 이렇게 찬란했었군요. 그것이 정말로 제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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