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도 간척을 했다는데...

2008. 5. 14. 오후 3: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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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다시피 고려시대에도 간척이 행해졌습니다.
1231년 몽고 침입 다음해, 고려 정부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게 되는데요.
당시까지의 강화현이었던 지역이 강화군이 되고, 이후 환도하기까지 40여년 간
'강도(江都)'라고 불리며 수도로써 기능하였는데요.
그 이유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수전에 약한 몽고군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지역을 지속적으로 방어해 내려면 방어에 유리한 자연조건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방어군대를 먹일 수 있는 병참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데요. 당시 개경의 인구를 10만 명으로 추산(이병도, 『한국사』, 을유문화사, 1977, p. 563)한다면 강화도에는 인근 지역까지 비롯해서 10만명 이상의 인구가 피난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1차적으로 가능했습니다.

  여기에 강화도 원주민들과의 협조, 그리고 고려 조정은 일찍이 남송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중국 강남지방의 관개기술, 토지이용법, 시비법 등 선진농업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이호철, 『조선전기농업경제사』, 한길사, 1996, p.32)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한동안 간척이 중지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떠돌아다니던 농민들을 모아 강화도 지방을 다시 한번 방어의 요새지로 구축하기 위해 저습지를 간척하는 사업에 착수하게 됩니다.(이경식, 「17세기 농지개간과 지주제의 전개」, 『한국사연구 9』, 1973, p.93.) 이때의 간척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는데요. 정약용도 간척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나무기둥을 세운다던가, 큰 돌로 막는다던가, 공사 중 암반이나 단단한 모래층이 나타나면 긴 철 막대기를 이용해 파내기도 하는 등의 기술진전을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강화도의 농경지는 130평방킬로미터에 달하고, 이는 강화도 총면적의 1/3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이러한 간척사업은 8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요.

 

출처 : 본문에 인용문을 표시 -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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