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중재자이신 마리아(광주)세나뚜스에서 퍼온내용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 공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참된 공경의 바탕과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전한 정통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도들의 기질과 품성에 따라 교회가 인준한 성모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66항〉
“신학자들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성모의 고유한 품위를 존중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과 마찬가지로 온갖 과장도 힘써 피하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교도권의 가르침을 따라 성서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과 교회의 전례를 연구함으로써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특권을 올바로 밝혀줄 것이니, 그것은 언제나 진리와 성덕과 신심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한 것이다.
또한 말이나 행동으로 갈라진 형제나 그 누구도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하여 오해를 품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힘써 피할 것이다. 참된 신심은 결실 없이 지나가는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신앙에 있다는 것을 신도들은 알아야 하겠다.
참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가 성모의 탁월성을 인정할 수 있고 우리 어머니신 성모께 자녀다운 사랑을 드리며 그의 덕행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67항〉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 1,1-2), 히브리서의 이 말씀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계시가 ‘아들’ 안에서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아들’ 안에서 하느님은 성부의 참된 얼굴과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의 계획을 드러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요한 복음의 말씀 (20.30-31)처럼, 신약성서는 이를 구성하는 모든 책들의 중심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나자렛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밝히고 있다.
그 안에 쓰여진 모든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진술할 때에도 성서는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의 맥락 안에 그녀를 위치시킨다. 마리아를 언급하는 성서 본문은 매우 적다 하더라도 그 ‘조금’ 밖에 말하지 않는 것이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1. 마리아.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여인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았으며 보아즈는 롯에게서 오벳을 낳았고…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마태오 1,1-16).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에는 언제나 남성이 주인공인 히브리인의 족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열되어 있는 명단 안에 여러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인 바쎄바라는 네 여인이 들어 있으며 명단은 마리아의 이름으로 끝난다.
이스라엘 백성의 옛 역사, 남성 위주의 족보가 마리아 안에서 결정을 이루며, 그녀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새 창조가 시작된다. 마리아 이전의 구약의 여인들 안에서 마리아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다.
1) 다말: 창세기 38, 6-30
다말은 이 족보에 등장하는 첫 번째 여인으로 유다의 아들들인 에르와 오난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은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여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다말은 때가 되면 그녀에게 그의 작은 아들 셀라를 주겠다는 시아버지 유다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딤나에게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셀라가 성장했음에도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그의 아내가 죽었다. 유다는 상을 벗자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갔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했고 유다는 담보물을 맡기고 그녀와 한 자리에 들었다.
석 달쯤 지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그는 그녀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24절). 그러자 다말은 그가 준 물건을 내보이며 잉태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밝힌다. 유다는 분명한 그 사실 앞에서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 내가 아들 셀라에게 그 애를 아내로 맞게 하지 않았으니…” 하고 다시느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26절). 다말은 그에게 쌍둥이를 낳아주었는데. 이름은 베레스와 제라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법을 중히 여기는, 유다의 아들들의 아내인 다말이다. 믿음이 부족한 족장 유다로 인해 메시아적인 후손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손도 권리도 없는 과부인 다말은 주도권을 쥐고 유다에게 다가간다. 유다는 며느리의 무죄함과 위대함 그리고 자신의 비겁함과 결속력의 부족을 인정해야 했다.
다말 덕분에 다윗과 예수의 조상인 베레스가 태어남으로써 족장들의 합법적인 혈통, 메시아의 혈통이 이어졌다. 그녀는 하느님이 족장인 유다를 위해 준비를 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자유를 볼 수 있다. 히브리서 7장 14절에서「우리 주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것은 명백하다」고 한다.
2) 라합: 여호수아 2,1-24
라합은 가나안 사람으로 예리고의 창녀였다. 그녀는 사막에서 유다 백성을 인도해 주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원들을 정중하게 맞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리고의 왕이 그녀에게 전갈을 보내어 정탐꾼들을 내놓으라 명하나 왕이 보낸 사람들을 목숨을 걸고 따돌렸다.
그리고 하느님께 신뢰를 두었다. 야훼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음을 믿으며 (2,9), 그들의 하느님 야훼야말로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을 내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한다(2,11). 그리고 그녀가 그들을 돌봐준 것처럼 그들도 그녀의 가문 사람들을 돌봐 주겠다고 “야훼를 두고 맹세해 달라” 고 요청한다 (2,12).
정탐원들이 맹세하자 라합은 몇 세기가 지난 후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한 응답처럼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합시다” (2,21) 라고 응답한다. 예리고의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살아 남았다 (6,17).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살고” 있었다 (6,25).
이 이야기의 중심은 라합이 한 신앙 고백이며 땅을 소유하는 것은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라합은 그녀의 믿음 때문에 약속된 땅에 안전하게 머물게 되었다. “솔로몬은 ‘라합’ 에게서 보아즈를 낳았다” . 성서는 “창녀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자기 편처럼 도와주어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당하는 멸망을 같이 당하지 않았으며” (히브 7,31), “창녀 라합도 유다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 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 받은 것이 아닙니까?” (야고 2,25)라는 말로 그녀의 믿음과 그녀가 한 행동을 칭송하고 있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은 첫 번째 이방 여인이었다.
3) 룻
룻은 유다인이 아닌 모압 여인으로, 유다 베들레헴에 살다가 기근으로 인해 모압 땅으로 이주한 유다 여인 나오미의 두 아들 중 하나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후 유다 지방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며느리들은 친정으로 돌려 보내려 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곁을 떠나려 하지 않고,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룻 1,16) 라며 우정의 조약을 맺는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다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처럼 매일 밀이삭을 주우러 나갔다. 거기서 그녀는 너그러운 친척 보아즈를 만나 그의 눈에 들고, 그와 결혼하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인다(룻 3,19).
온정 있는 보아즈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룻 3,11-13) 그녀에게서 오벳을 낳았는데 그가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따라서 룻은 다윗의 할아버지의 어머니이다.
과부들의 상황, 특히 나오미의 경우처럼, 맏아들이 없는 과부들의 상황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비록 부모의 집으로 돌아 가거나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법’ (신명 25,5-10)에 따라 남편의 가족에 붙어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의 자선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나오미의 말 (룻 1,13)을 듣고 시어머니의 행운에 자신의 행운도 맡기면서 외국 땅으로 함께 가겠다는 룻의 대답은 (룻 1,16-17) 충실함과 결속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외국 땅으로 이주해 간다는 것은 새로운 나라의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룻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베들레헴에서 어머니가 되었다.
다말과 라합과 룻, 이 여인들은 혼란스럽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잃지 않는다. 하느님은 대담하고, 덕이 있고, 믿음 있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었다.
4)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
이 족보의 정점인 우대한 왕 다윗은 그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가로챘다. 우리야는 부하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직하고 충실한 사람이며 의로운 사람으로 다윗이 자신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해 ‘하느님의 법궤와 온 이스라엘군과 유다군이 전쟁터에서 야영 중에 있을 때’ 그의 집에 들어가 쉬며 아내와 함께 지내라 하는 명을 거부했다 (사무엘하 11,1 1).
이 네 번째 여인은 그녀의 고유 이름이 아닌 ‘우리야의 아내’ 로 지칭한다. 이것은 다윗의 아내로서보다는 그런 우리야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애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명예를 짓밟힌 그녀의 남편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게 만든 다윗의 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그의 왕조를 이어갈 아들을 낳아준 여인은 바쎄바였다.
우리야의 아내에 대한 다윗의 태도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요셉의 태도는 매우 대조적이다. 다윗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지만 요셉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비밀리에 파혼하려 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솔로몬은 다윗과 밧쎄바 사이에서 난 첫 아들, 곧 ‘죄의 씨앗’ 은 죽고 다윗이 속죄를 한 후 태어났다(사무엘하 12,24).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다뒷은 우리야를 죽이라고 명하지만 요셉은 마리아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했으나 요셉은 의롭고 하느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었다.
5) 요셉의 아내 마리아
마리아는 다윗의 마지막 자손,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여인이다. 다른 여인들은 언급할 때에는 남자를 중심으로 하여 “…는 …에게서 …를 낳았다” 라고 하는 공식을 마리아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그 아들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에게서” 라는 표현은 그 아들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 접사가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여인이라는 점은 특별한 방법으로 마리아의 특성과 역사의 주인공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은 유다나 다윗의 경우와 달리 마리아와 약혼을 했고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 부른다” (1,16)라고 함으로써 구세사 안에서 처음으로 남성이 배제되고 여성이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리아가 비록 요셉의 아내이기는 하나 그와는 무관하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서에서 ‘낳는다’ 는 것은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 모두를 물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像)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요셉이 예수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법적인 아버지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예수는 그 이전의 모든 전통에 속해 있지만 요셉의 상은 아니다. 그의 유일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그의 존재와 행위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행위를 반영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구약의 여인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중 하나 사람도 유다 가문을 잇길 예정된 여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신분과 처한 상황으로 인해 그 대열에서 제외되어 있는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그들의 자주적인 태도로 인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 여인들은 이스라엘이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중요한 순간에 위치해서 시대의 갈림길을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말은 에집트의 종살이 시대를 열고 있고, 라합은 탈출 시기를 마감하고, 룻은 왕정 직전 시기를 열고 있으며, 바쎄바는 왕정 시기를 연다. 이처럼 네 여인은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한 때를 열고 닫고 하지만 마리아 안에서는 이스라엘의 묵은 역사가 새 역사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리아 이전의 네 여인들은 마리아라는 한 ‘여인’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가고, 그 여인들의 후손들은 이 ‘마지막 여인’ 의 후손을 준비한다. 마리아의 아들을 임마누엘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라 부르는 것은 마리아가 참된 여인이며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완성된 하느님의 때를 여는 여인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다.
마태오이 족보에 나오는 이 여인들 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미리 볼 수가 있다. 가문을 잇게 할 아들은 원했던 다말은 화형에 처해 질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하느님이 하신 약속을 상속자임에도(창세 49,8-12) 불구하고 믿음이 약한 유다를 속여 ‘거룩한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마리아 역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법에 따라 부정한 임신으로 인해 죽음에 처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예’ 라고 응답했다. 라합의 믿음과 정탐꾼들의 말에 대한 충실함,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신뢰 안에서도 마리아를 볼 수 있다. “창녀 라합도 유다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야고 2,25) 는 말로 동방박사들을 맞아들였다가 다른 길로 돌려보낸 마리아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마리아는 지조있고 정숙하며 신앙인인 모압 여인 룻처럼 베들레헴에서 아들을 낳았다. 룻이 보아즈에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마리아도 요셉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해서 유다 가문이 이어졌다. 그 여인들은 모두 생명의 위험까지도 마다 않는 용기 있고, 믿음이 강한 여인들, 성령을 받은 여인들이었다.
우리야의 아내를 볼 때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일어 날 혼란도 미리 볼 수 있다.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과는 달리 요셉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령을 받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으려 하지 않았다. 마리아의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목은 역사가 마리아 안에서 새 역사의 장으로 열린다.
2. 마리아,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믿음의 여인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은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이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다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ꡓ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루가 1,26-38)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다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 인류 구원의 약속이 현실이 되도록 하느님의 천사가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의 한 처녀를 찾아간다. 이름은 마리아였다. 결혼과 자녀 출산, 교육…등 외형적인 마리아의 삶은 단순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삶이 그녀가 들은 말과 그녀 앞에 펼쳐지는 사건으로 인해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인 구세주 예수가 태어난다.
1) 나자렛의 마리아
천사 가브리엘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반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공식 예배를 드리고 있는 노사제 즈가리야를 찾아갔었다. 바로 그 천사가 이번에는 마리아라는 처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배경은 완전히 다르다. 성전과 기도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그녀가 살고 있는 일상의 장소로 고독 외에는 아무 동반자도 없는 그녀를 찾아간다.
신분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며, 어떤 가문에 속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회적 종교적으로 특출한 점도 없다. 다만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처녀로,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엘리사벳의 사촌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하느님은 이런 이름없는 여인 안에서 그 이전에 행한 모든 놀라운 사건들보다 더 놀라운 일을 시작한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아이가 없었으며 마리아도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기 때문이었으며 마리아는 쳐녀였기 때문이었다. 노부부는 하느님께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간구했으나 (루가 1,13) 마리아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갖게 될 아기는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께 간구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사가 전한 약속은 한 예언자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이라 불릴 아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2) 마리아,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는 마리아의 새 이름이다. 그리고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는 하느님께서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 위에 흘러 넘치게 하기로 정하신 당신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혜들로 가득 채워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옛 계약” 이라고 부르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낡은 방식으로 낡은 것을 살던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사는 것, 새 계약으로 들어간다. 성전과 예배와 율법은 은총과 성령으로 넘어간다. 마리아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 새 계약을 개시하고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에페소서 1,3-7절의 말씀에 비추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란 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숙고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알림이라는 이 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들어오셨다. 이 사건은 처음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안에, 나자렛에서 일어났다. 하느님의 사자(使者)는 동정녀에게 인사한다. ꡒ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루가 1,28).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가 1,29). 이 놀라운 말, 특히 「은총이 가득하신」(Kecharitom ne)이라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이 말, 특별히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표현에 대해 묵상하고자 한다면 앞서 에페소에서 인용한 바로 그 대목에서 의미있는 비교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조. 에페소1,4-7).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의 알림 후에 나자렛 동정녀께서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루가 1,42)이라고 불리신다면,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채우신 그 축복 때문이다.
이 축복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충만성과 보편성 (모든 축복)을 지니는 영적 축복이다. 이 축복은 성령 안에서 동등한 본성을 지니신 아들을 아버지와 결합시키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안에서 끝까지 모든 백성들에게 내려질 축복이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으로 인사한 대로 이 축복은 특별히 그리고 예외적으로 마리아께 해당되는 것이다.
이 이중의 인사는 어느 의미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바로 그 「은총의 영광」이 이 「시온의 딸」의 영혼 안에서 밝혀 드러난 사실에 기인한다. 사자는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인사한다. 마치 그것이 마리아의 진짜 이름인 것처럼. 사자는 마리아를 지상의 이름인 미리암 (마리아)이 아니라 「은총이 가득하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가? 왜 대천사가 나자렛의 동정녀를 이렇게 부르는가?
성서의 언어에서 「은총」은 특별한 선물을 뜻하는데 이 특별한 선물은 신약성서에 의하면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요한 4,8 참조). 이 사랑의 열매가 에페소서가 말하는 「선택」이다. 하느님 편에 있어서 이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당신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구원하시려는 영원한 원의 (2베드 1,4참조), 곧 초자연적 생명에서 참여를 통한 구원인 것이다.
이 영원한 선물.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신 이 은총의 효과는 거룩함의 씨앗과 같은 것이며 또한 은총을 통하여 선택된 사람들에게 생명과 거룩함을 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선물로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샘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영적인 축복을 지닌 축복」,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되는 일」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사자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읽고서, 계시와 옛 약속들을 한데 모아놓고 있는 복음서의 문맥을 살펴볼 때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축복」중에서도 이것은 특별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는 이미 「세상 창조 이전부터」아버지께서 강생 안에서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뽑으신」분으로 현존하신다. 나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아들도 마리아를 뽑으시어 그를 영원으로부터 거룩하신 성령께 의탁하셨다. 마리아는 온전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며 모든 「은총의 영광」을 소유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드님」안에서 영원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계신다. 동시에 마리아는 이 「위로부터 오는 선물」(야고 1,17 참조)에 자신을 완전히 여셨고 또한 영 상태로 머물러 계신다.
3)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천사는 즈카리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한 첫말. 그리고 유대인 사이에서 통상적인 인사였던 “샬롬(평화)” 과는 전혀 다른 말로 마리아에게 인사를 한다. 그 기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오는 기쁨으로 당신 백성의 주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주님과 마리아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판관기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야훼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힘센 장사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고 전할 때(6,12) 하느님과 기드온과의 관계는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할 그의 사명을 전제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에 대한 이 인사도 하느님이 그녀에게 맡길 사명을 전제하고 있다. 하느님은 기드온에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6,16)고 말한다.
사제 즈가리야가 찬사의 모습을 보고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과는 달리 (루가 1,12 참조)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당황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는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루가1,30)고 말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분은 한 여인을 선택하여 그 여인에게서 당신 백성에게 종말론적인 기쁨을 갖다 줄 새 생명이 잉태되게 했다.
4) 마리아의 사명,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맡기는 사명을 알려준다. 그 사명은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예수라 붙여줌으로써 어머니가 되는 것,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요한의 출생 예고에서 엘리사벳이 가진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녀의 남편 즈가리야였으나 여기서는 아버지가 아닌 마리아에게 그 책임을 맡긴다.
그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만의 아들이 되리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기는 “위대한 분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고,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 이다.
‘마리아의 아들’ 은 다윗의 후손이며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으로 인해 합법적인 「다윗의 후손」(메시아)이 된다. 그리고 그 백성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메시아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잉태할 능력이 있는 여인이지만 그녀의 신분은 아직 동정임을 의미한다. 그 물음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리라”고 대답한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 으로 소개하며, 자신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은총으로 인해 자신 안에 일어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는 믿음의 응답을 한다.
즈가리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말해 줄 외적인 증거를 청했지만 마리아는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 천사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사제인 즈가리야, 아론의 딸인 엘리사벳, 다윗의 후손인 요셉은 어떤 사회적 종교적 지위도 없는 마리아보다 훨씬 위대한 인물들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구약에서 행하신 놀라운 모든 일을 능가하는 일을 그녀 안에서 시작한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 불신을 드러내며 기쁜 소식을 거부하고 낡은 제도 안에 머무는 사제 즈가리야와는 달리 마리아는 ‘말씀’을 능동적으로 믿으며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미지의 일에 자신을 투신한다. 그 사제는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실망시키거나 마리아는 백성에게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을 전해 주며,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임으로써 해방에 대한 백성의 열망을 온 존재로 대변했다.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행한 결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게 된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행하는 우리를 통해 계속 세상 안에 육화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는 마리아의 새 이름이다. 마리아의 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모든 신앙인들의 새 이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성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기” (요한 1,16) 때문이다.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하는 기쁨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 세상으로의 변화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성소는 그 기쁨에로의 부름이다. 우리도 예수, 주님,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남녀를 불문한 많은 사람들과 연대하여 낡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희망을 주기 위해 부름 받았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다(마태 28,18-20참조). 기쁨에로 초대받은 마리아의 성소는 홀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성소는 곧 우리의 성소이며 우리의 성소는 곧 마리아의 성소이다.
천사의 말을 들으며 당황하고, 의문하고, 찾고, 묻는 대화 과정에서 마리아가 하는 말은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결정적인 대답으로 정점에 달한다. 마리아의 응답은 믿음과 기쁨과 자유와 책임의 응답이었다.
사제 즈가리야는 당신 백성에 대한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리는 천사의 말을 의심했으나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사제 앞에서는 불안해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큰 기쁨을 가져온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믿음(로마 16,26; 참조: 로마 1,5; 2고린 10,5-6)이 요구된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이 의탁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마리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영보이며, ꡒ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하는 엘리사벳의 인사는 근본적으로 이 결정적인 순간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영보 때 마리아는 당신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드러내면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셨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전 인간적, 여성적 “자아”로 응답하였으며, 이 신앙의 응답은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과의 완전한 협력, 그리고 “끊임없이 당신의 선물로 신앙을 완성시키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13항).
그런 응답을 통해 마리아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순례에 자신을 던진다. 마리아는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에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해야 하는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모범이다. 곧 자신의 존재와 행위로 우리가 세례 때부터 살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옛 하느님의 백성의 삶과 다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동반과 기도가 필요했으며 하느님이 예외적인 당신의 권능으로 개입해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인류 가운데 들어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은총과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3. 마리아, 예수의 제자이며 중재자, 동반자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갈릴래아의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그리고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도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마침 포도주가 모자라서 예수의 어머니가 그분에게 말하였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머니에게 “부인, 부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어머니는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유대인들의 정결례를 위해 돌로 만든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 물독들은 각각 두세 동이씩 담을 만하였다. 예수께서는 시중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시오”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그들이 독마다 가득히 채웠다. 이윽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제는 떠서 잔치 주관자에게 가져가시오” 하고 이르셨다. 곧 그들은 가져갔다. 잔치 주관자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았다. 그는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물을 떠 온 시중꾼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 주관자는 신랑을 불러 말하였다.
“누구나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취하면 그만 못할 것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있었군요.” 이렇게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가나에서 처음으로 표정을 행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다. 그 후에 그분은 당신어머니와 [당신]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서 여러 날 머무시지는 않았다 (요한 2,1-12).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예수의 어머니가 있었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초대를 받고 와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혼인잔치 이야기이므로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 축하객들, 잔치 분위기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오히려 마리아와 예수의 대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일화에는 분리할 수 없는 세 가지 요소, 즉 예수, 마리아 ,제자들(교회)이 들어있다.
하느님은 예수가 행한 이 첫 번째 기적을 통해 당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셨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는 사건 발생의 원인, 호세아 예언자 때부터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부분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혼인예식,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에 쓰일 물을 담아두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와 메시아의 시대와 풍요로움의 상징인 넘치는 포도주, 오직 성부의 뜻만을 따라 행하기 위해 당신의 때가 이를 때까지 마리아를 당신의 삶에서 일시적으로 멀리하는 듯한 어머니께 대한 예수의 응답, 어머니를 ‘여인’ 으로 부르는 것 등이다.
1) 사흘 째 되던 날… 혼인 잔치가 있었다.
“사흘째 날” 은 항상 예수와 그의 신비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날로, 마리아의 역할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흘째 날은 먼저 창조와 관계과 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서부터 날수를 따지면, 이 사흘째 날은 실제로는 제 칠일째가 되며,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주간」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는 상징적인 주간이다. 창조의 일곱째 날은 주님이 당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휴식한 날이다. 요한 복음에서의 “사흘째 되던 날” 은 새로운 창조의 날로, 그것을 혼인 잔치로 기념한다. 마리아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이 날에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흘째 날” 은 시나이산에서의 계약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 땅을 떠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 에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출애급 19,1). 그리고 하느님은 모세에게 “셋째 날 야훼께서 온 백성이 보는 가운데 시나이산에 내리리라” 는 것을 백성에게 알리라고 명한다 (출애급 19,10-11,16).
하느님은 셋째 날에 시나이산에 나타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며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며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었다. 시나이산과 가나 혼인잔치, 두 사건 모두 하느님이 역사 안에 당신을 계시한 것이다.
마리아는 이런 내용 안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한 증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애쓰고 앞당기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신다. 물이 술로 변한 후에 제자들은 예수를 믿었다.
“사흘째 날” 은 빠스카와도 관계가 있다. 예수는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당신을 완전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마리아는 그 ‘시간’ 에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 가나 잔치에 그녀가 있는 것은 그 계시에 미리 참여하는 것이다.
2)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포도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포도주가 잔치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포도주가 처늠부터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잔치는 과장이 되고 기쁨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하객들, 시중꾼들, 그 잔치의 주인공들인 신랑 신부조차도 자신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제자들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 많은 사라들 가운데서 포도주가 동난 것 그리고 포도주가 지닌 풍요로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뿐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충만함의 의미를 알고 있고, 사람들의 현실 안에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 도중에 아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고 알려준다. 마리아의 이 염려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난 타인에 대한 섬세한 관심과 배려를 드러낸다.
성대한 잔치(축제)에서 진수성찬과 좋은 포도주(술)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기쁨과 활기의 상징이다. 성서에서 포도주는 메시아적인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하늘나라의 잔치를 상기시키는 이 혼인 잔치의 포도주는 메시아의 나라 재건, 새롭고 영원한 계약, 성체성사 안에서의 성혈의 표징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 안에서, 포도주는 예수가 인류와 맺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흘리는 피의 상징이다.
3) 부인 (여인), 부인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머니를 ꡐ여인ꡑ이라 부르는 예수의 이 대답은 언뜻 어머니를 멀리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가 누군가를 그 사람과 고유 이름이 아닌 ꡐ여인ꡑ으로 부를 때, 그것은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여자에게 ꡒ부인(여인), 나를 믿으시오 (요한 4,21)ꡓ라고 말하고, 부활한 후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ꡒ부인(여인), 왜 울고 있습니까?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ꡓ라고 묻듯이 예수는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요청할 때나 또는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을 ꡐ여인ꡑ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어머니를 ꡐ여인ꡑ으로 부르는 것도 어머니-아들의 관계를 벗어나 ꡐ믿음 안에서의 관계ꡑ, 제자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처럼 들리는 아들 예수의 물음에 마리아는 시중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하라” 는 말로 대답한다.
그들에게도 그분을 믿고 따르라는 것, 곧 그분의 제자가 되라는 명이다.
요한 복음에서, ‘때’ 는 하느님의 아들이 영원으로부터 지니고 있는 영광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하느님이 선택하신 순간을 의미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는 예수의 말은 수난과 죽음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시간은 예수가 영광에 들어 높여지는 순간으로 그분의 영광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드러나게 되는데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행하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머니를 여인이라 부름으로써 요한 19,27을 앞당긴다.
그 시간이 되면, 마리아느 예수의 어머니로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 절정에 이르게 될, 지금 시작하는 메시아와 사명에 어머니를 이끌어 들이고 있다.
4) 무엇이든지 그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하시오
아들 예수에게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한 말이 요한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첫 말이라면 이 말은 마리아의 마지막 말로,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초대이며,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의 가족에 속하게 된다는 예수의 말에 해당된다. 십자가의 순간에도 마리아는 아들과 함께 있지만 그녀는 침묵하고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할 뿐이다.
마리아의 이 말은 우리에게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을 때 모세가 하느님이 분부한 말씀들을 백성에게 알리자 그들이 일제히 외쳤던 ꡒ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ꡓ라느 말이 생각나게 한다. 계약에서는 언제나 하느님, 백성, 그리고 중재자라는 세 행위자가 있다.
중재자는 백성을 하느님에게 연결해 주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마리아가 예수와 잔치 시중을 들고 있던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ꡐ포도주ꡑ가 없는 것을 알고 그 문제를 예수 앞으로 들고 가고 시중꾼들에게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라고 초대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예수가 그들에게 이르는 대로하라고 권고하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 그녀 사이의 중재자였던 천사가 전해 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ꡒ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ꡓ라는 대답을 했었다. 첫 번째 표징은 마리아의 말인 ꡒ…하시오ꡓ와 예수의 두 말씀인 ꡒ채우시오ꡓꡒ가져가시오ꡓ로 시작되었다.
잔치 시중꾼들은 예수가 시키는 대로했다. 채우라 하자 채웠고, 가져가라 하자 가져갔다. 이런 완전한 실행은 마리아가 그들을 초대한 결과였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사라졌던 기쁨이 되돌아 왔다. 예수에게 순종하는 이 시중꾼들은 하느님의 새 백성, 충실하게 스승을 따르고, 그분에게 봉사하며 그분 곁에 머무느 예수의 제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이 기적을 행한 후에 제자들은 ꡒ그분을 믿게 되었다ꡓ, ꡒ후에 그분은 당신 어머니와 당신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갔다ꡓ(2,12). 마리아와 잔치에 초대받고 와있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 마리아, 그 모든 사람들이 한 그룹이 되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마리아는 처음부터 예수를 믿고 있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마지막에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성부께서 택하신 시간에 드러날 예수의 영광을 지금 여기서 미리 드러내도록 이끈 동시에 새 공동체-친교 안에서 그들의 동반자가 되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ꡒ무엇이든지 그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하시오ꡓ라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도록 우리를 초대한 후 십자가의 순간까지 침묵 속에 사라진다.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이미 복음적으로 말해 모두 형제 자매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시중들던 사람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라’ 는 마리아의 말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퍼서 갖다 주라’ 는 예수의 사명에 함께 하는 자매이자 동반자이다.
그녀는 즉시 예수를 믿게 된 제자들을 한 형제가 되게 하는 책임을 맡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재산인 형제들, 제자들, 동반자들, 사이에서 마리아는 제자, 자매, 동반자임을 밝혀줄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볼 수 있는 마리아는 매우 섬세한 여인이다. ‘그들에게’ 종말론적인 계시의 상징이자 계약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가 없음을 예수에게 알리며, “무엇이든지 그가 이른는 대로하라” 는 말로 시중꾼들에게 유발시킨 믿음과 그들의 순종으로 인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가능했고 그들은 그 기적의 증인으로 변했다.
주님은 ‘결핍’을 ‘충만’ 으로 바꾸는 분이다. 믿음과 순종은 신앙과 인정으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혼인잔치 이야기는 “이렇게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가나에서 처음으로 표징을 행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다” 라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예수의 어머니는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 믿음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느님 안에서 한 공동체로 모았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형제 자매” 라는 예수의 말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듣고 행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가족” 에 속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가 십자가 아래서 교회의 어머니,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라는 예수가 맡기는 사명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마리아 자신이 예수 탄생 예고의 순간부터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시중꾼들에게 이른 마리아의 말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따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라는 초대이며 권고이다.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 자매가 될 것이며 그들에게는 하늘나라 잔치의 포도주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돌 항아리-구약의 계약인 율법이 포도주-신약의 계약인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되었다.
4. 마리아, 복음선포자
그들은 성안에 들어와서 다락방으로 올라가 묵고 있었는데, 곧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부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사도 1,13-14)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인 가나 잔치와 마지막인 십자가의 순간에 함께 있는 것은 그 순간부터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 의 어머니‘ 가 되는 그녀의 역할을 말해준다.
이 모성이 바로 그 ꡐ여인ꡑ을 정의해 주는 특성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그녀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마리아는 생명을 낳아주는 여인으로, 해산하고 난 뒤에는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고 외치는 여인이다.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비열함의 극치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 구원의 극치를 볼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믿었다. 성서는 그것을 “그 어머니와 … 서 있었다” 는 말로 표현한다.
참된 믿음은 고통의 신비 앞에서 살아있는 희망으로 바뀐다. 십자가 곁에서 땅에 쓰러지지 않고 “서 있게” 한 힘은 바로 그 믿음과 희망이었다. 그 견고한 믿음과 항구한 희망으로 이제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창립되는 순간인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교회는 그 순간부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를 따름과 제자가 되는 것은 부활사건이후에는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 ‘따름’ 은 ‘믿음’ 으로, ‘제자가 되는 것’ 은 ‘믿는 것’ 으로 변한다.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 이 된다. 교회의 복음선포와 그 증거로 인해 믿는 남녀의 무리가 더욱 늘어나 주님께로 인도된다 (사도2,47).
십자가 곁에서의 마리아는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 다시 말해 폭력과 거부의 역사, 부정의 역사, 파괴와 권력의 역사를 몸소 사는 여인이다. 그 결과로 인한 비극적인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인류의 미래를 희망하고 긍정의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믿음과 순종의 응답을 한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제자들도 보여주지 못했던 용기와 충실함으로 예수의 뒤를 따랐던 마리아는 교회와 인류의 어머니로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부활한 예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 (마태 28,19)고 명하며 교회에 맡겨준 사명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 뒤에 사람들에게 성령을 전해주며 (사도 2,37-41 참조) 하느님을 찬미하는 예식을 거행한다 (2,26-47 참조).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었고 그 중심에 마리아가 있다. 교회의 그 삼중적인 행위-성령을 받고, 그것을 전하며, 찬미의 예식을 행하는 것- 는 마리아의 삶 안에서 먼저 행해졌다.
마리아는 ‘잉태 예고’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 성령을 받고, ‘방문’에서 태중의 아기를 모시고 사촌을 만나러 가 그녀의 인사로 성령을 전하고, 마니피깟에서 하느님이 그녀 안에 한 위대한 일을 찬미하는 여인으로 나타난다. 마리아의 이 행위들은 사도행전에서 보듯 나중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교회가 살게 될 것을 미리 산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참된 생명으로 사람들을 이 우주적인 형제애에 초대해야 한다. 선교사, 곧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와 그분의 말씀들이 내 안에 스며들어 있다는 표시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 선포자가 되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예수를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기쁜 소식을 안고 달려온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믿으셨으니 복된 여인” (루가 1,45)이라고 칭송했다. 마리아는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아들 예수의 살아있는 이콘으로 그 공동체 한가운데서 새로운 형태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살 줄 알았다.
시공적으로는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마리아는 예수를 마음으로 따랐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 각 신앙인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모습이다. 그녀는 생전에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존경을 받지도 못했으나 새 인류의 싹인 그녀 안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모든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맺는 말
마리아는 기적의 여인도 신도 아니다. 마리아 또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는 분명히 그녀가 신적인 존재이거나 동정녀이며 원죄 없이 태어나고 승천하였기 때문도 아니며, 하늘의 여왕이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닌 문제들의 해결사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예수 안에서 모든 결핍이 채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들고 예수에게로 갔으며 그들에게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촉구했다. 동정마리아가 공경받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우리의 영적 어머니, 다시 말해 교회의 어머니로 구세사 안에서 한 그녀의 역할 때문이다.
성부와 함께 예수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 우리에게 “너는 나의 영적 자녀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마리아뿐이다.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맡긴 사명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 아들로 인해 우리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첫 번째 신앙인이자 십자가 밑에까지 예수를 따라간 충실한 제자이며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분, 영적인 길에서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이며 자매이자 동반자이며 친구이다.
만일 우리가 그 어머니의 삶을 본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 마리아의 자녀들, 마리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적 어머니’ 는 우리 믿음의 삶의 모범으로 제시된 분이고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한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흘러 넘쳤던 그 은총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평범한 삶, 희로애락의 삶 안에서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우리의 희망이며 위로자가 된다. 마리아는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평신도, 한 자녀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 일하는 시골 여인이었다.
하느님께 모든 희망과 신뢰를 둔 그녀의 견고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예” 라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이며 책임감 있는 응답을 함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의 새장을 여는 여인,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신앙을 촉발시키고 기쁨과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여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한 후 자신은 침묵 속에 예수 뒤로 사라지는 여인,
십자가 밑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제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인간적인 절망의 순간에서조차도 희망을 잃지 않는 여인,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교회와 믿는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그들 가운데 살아있는 여인, 복음 선포자이자 복음선포 활동의 동반자인 여인 마리아는 각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지닌 신분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수행할 때,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신앙인이 걸어야 할 삶의 완전한 모델이 아닌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마리아와 맺는 친교, 사랑, 우정과 대화의 관계이다. 마리아와 친구가 되는 사람은 마리아가 살았던 매 순간 안으로 들어가 그녀와 함께 다시 살며 그녀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배운다. 마리아와 맺는 그런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활력을 받을 것이다.
마리아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와 인류의 마음 안에 살아있다. 교회는 그녀에게 당신의 영적 자녀들의 어머니, 예수와의 일치의 모범, 완덕을 향한 길잡이, 복음적 가치들의 수호자, 보호자, 사도직의 동반자이며 위로자, 우리의 도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의 교육자…란 명칭을 부여했다.
세기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리아께 그녀의 모성적 보호와 도움, 병의 치유와 영혼의 위로를 위한 중재를 청하며 그 품안으로 달려들었고,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마리아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적인 투신에 영감을 주는 분이고, 성덕과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의 섭리에 대한 충실성, 가정과 교회에 대한 봉사, 환대와 자비, 용기와 굳셈의 모범이다.
만일 성모 마리아께 대한 공경이 그로 인해 하느님이 가려지고 그녀만 드러난다면 그것은 성모 마리아 공경을 ‘우상숭배’ 라 하는 개신교도들의 비난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 된다. 교회는 분명히 “갈라진 형제들이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해 오해를 품게 할 수 있는 언행” 은 모두 피하라고 명한다.
만일 성모신심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대한 더욱 강한 믿음으로 이끌어 가고 마리아가 그분의 첫 번째 제자이자 그분을 본받음과 따름의 완전한 모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신심이 참된 신심이라는 증거이다. 성모께 드리는 가장 큰 공경은 바로 그분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많은 이유로 인해 교회 안에서 뒷전에 밀려나 있을 수 없다. 마리아는 이 세상의 삶을 떠난 후에도 공적 사적으로 많은 발현을 통해 자신을 나타냈다. 마리아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발현, 현시, 암시를 통해 그녀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그녀를 기억하게 했다.
모든 종족과 문화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의 삶 안에 살아있는 마리아는 비지상적인 인물도 순수한 천상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녀는 그녀였던 그대로의 그녀이다. 하늘나라를 향한 신앙의 순례의 길에서 하느님이 마리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모범은 그녀를 본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깝게 닮기 위한 우리 삶의 규범이다.
동정 마리아를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게 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장 훌륭한 마리아적인 삶이다. 그러므로 동정 마리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분명하고 충분한 이해와 지식을 갖추는 것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럴 때 각 신앙인들은 동정 마리아를 올바로 공경할 수 있고 빗나간 신심과 참된 신심을 구분하며, “종교적 신심 감흥” 이나 발현 또는 기적, 사적 계시와 같은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이끌리지 않고 교의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신심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동정녀의 삶과 신비와의 만남은 우리를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구원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삶을 살게 한다. 그러므로 성모 공경과 신심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더욱 잘 알게 하고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에 더욱 가까이 있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