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인 유지인씨 |
탤런트 유지인
"방송중”이라는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설레는 마음 한편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싶어 조심조심 라디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신기한 기자재들을 둘러보느라 구석구석 눈길이 갔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어서 피디며 작가와도 눈인사만 가볍게 나눴다. 통유리 너머를 보니 가벼운 어깨춤과 함께 고개를 까딱이며 노래의 리듬을 타던 이가 기자 일행을 보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탤런트 유지인(50·안젤라 메리치) 씨다.
그는 올해로 3년째 KBS 제3라디오 ‘유지인의 음악편지’를 진행하고 있다.
구성작가가 권하는 따끈한 녹차 한 잔을 손에 들고 통유리 너머로 그가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연신 싱글벙글, 때론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한 웃음까지. 매일 아침마다 출근길을 밝게 열어 주는 그의 따뜻하고도 톡톡 튀는 음성이 그의 얼굴에도 가득 담겨 있다.
그를 다시 방송에서 만나게 된 것이 꼭 17년 만이다.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70-80년대 ‘트로이카’라 불리며 대표적인 여배우로 사랑받던 그는 정상의 자리에서 돌연히 결혼발표를 하고 동시에 모든 연예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어느새 두 딸의 어머니로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방송인으로 팬들 곁에 돌아온 유 씨. 그가 지난 2003년 활동을 재개한 것은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이었다.
“다시 방송할 생각은 없었어요. 몇 해 전부터 기도모임을 함께하는 분들이 자꾸 다시 방송일을 해 보라고 권유하시니까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그때 마침 라디오 진행을 맡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제3라디오는 장애인과 독거노인처럼 소외계층을 위해 열려 있는 방송인데 마치 기도 중에 인연이 닿은 듯해서 망설이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간간이 드라마도 하게 되고 여러 가지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죠.”
그는 ‘유지인의 음악편지’와 인연을 맺은 덕분에 지난 9월 소중한 인생체험을 했단다. KBS 제3라디오와 NGO단체인 굿네이버스가 공동 진행한 방글라데시 빈민농촌지역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전국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동전 모으기’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유 씨는 주로 빈민 지역 가정을 방문해 어머니가 일터에 나간 사이 아이들을 돌봐 주는 일과 의료 서비스 보조를 했단다.
“다카라는 도시는 온통 자동차 경적 소리뿐이에요. 버스 위에까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타고 가요. 버스 운행 중에 짐이 떨어지면 서지만 사람이 떨어지면 그냥 간대요. 어떤 집엘 갔는데 부인이 아이 넷을 키우고 있었어요. 일부다처제 사회라 마약 중독 남편은 딴 살림을 차려 나가 살고 없었어요. 이슬람 국가라서 여자들이 일할 곳도 마땅치 않아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며 우리 돈으로 하루 천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끼니만 겨우 때우고 살고 있었어요.”
다녀온 얘기를 좀 더 묻자 일주일의 아주 짧은 기간이라서 부끄럽다며 그는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희망을 봤어요. 가난과 무지로 버려지고 상처 입은 이들이 많았지만 하나같이 눈빛만은 참 행복해 보였거든요.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했죠. 다름 아닌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신뢰였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돌봐주실 거라는 희망,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비관하지 않는대요.”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삶의 큰 위안을 얻고 돌아왔단다. 지금까지 풍족하게 누려온 삶을 돌아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그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 강단에도 선다.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후배들과 만나는데 늘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는 제가 그동안 선배들한테 배우고 직접 체험한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같이 나눠요. 배우는 연기에 앞서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기본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 함께 나누고 연기로도 표현해 보는 시간을 가져요.”
다가오는 3월, 그는 KBS 시트콤 ‘솔져 패밀리’를 통해 처음으로 코믹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부하를 남편으로 둔 직업군인 역할이다. 어떤 이는 유 씨에게 오랜만에 하는 방송인데 배역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해 보라고 조언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도 아버지가 대령으로 퇴역한 직업군인이라서 이번 배역은 연기가 아니라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이 될 것이라고 좋아했다.
도시적이면서도 차갑지 않은, 청순해 보이면서도 이지적인, 그래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여배우.
어쩌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옛 기억 속의 인형 같은 배우 유지인 씨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7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깊어진 그는 이제 좀 더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고, 이러한 삶을 연기로 보여줄 수 있는 관록 있는 중견배우로 팬들에게 다가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