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2011. 10. 27. 오전 7: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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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 루카 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신부님께서 교도소 수감자들과 함께 미사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미사 중 강론 시간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네요.

“여러분! 저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들킨 죄인이고, 저는 안 들킨 죄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안 들킨 죄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단순히 들키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예전에 여성을 공에 비유하는 유머를 본 적이 있습니다. 10대에는 축구공처럼 많은 남자들이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20대에는 농구공처럼 따라다니는 남자가 축구공에 비해 조금 줄어든다고 합니다. 30~40대에는 골프공처럼 이제 따라 다니는 남자가 한 명 정도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50대에는 피구공처럼 서로 피하려 하며, 60대 이상은 탁구공처럼 서로 남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유머였지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항상 축구공, 농구공이 될 수 없지요. 나이가 들면서 내 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많아져도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 판단하고 단죄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을 간직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가치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세속적인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와 몸의 가치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나는 아닐까요? 아니면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 인해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 나인가요?

예수님께는 많은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 보이듯이 헤로데를 비롯한 헤로데 당원들도 예수님의 반대자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가치가 더욱 더 높아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도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요? 예수님을 반대함으로 인해 그들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은 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깎아 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의 가치는 주님을 통해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할 것, 초라하고 불쌍한 인간도 사랑할 것,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지 말 것.(생텍쥐페리)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한 희생

청각장애인을 위한 국내 유일의 청언성당. 어제 방문했었습니다.

칠레의 늪지대에 ‘리노데르마르’라는 개구리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개구리는 몸집은 작지만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기에 생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수컷의 처절한 헌신 때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암컷은 알을 젤리 같은 물질에 담아 넣습니다. 그러면 수컷이 알을 삼켜 식도의 소리 주머니에 보관하기 시작합니다. 이날부터 수컷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수컷은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지요. 새 생명을 위해 먹이를 먹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모두 포기합니다. 알이 부화하면 수컷은 하품을 하듯 입에서 올챙이들을 쏟아 내고 탈진해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고 하네요.

이 개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수컷 개구리의 희생을 통해서 소중한 생명이 창조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만큼 희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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