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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3일 페이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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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하까이 1,15ㄴㅡ2,9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2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3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6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7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9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 루카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묘지를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져 있던 묘비들을 읽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묘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었지요. 그 글은 단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답니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묘비의 글을 썼을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것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사실 우리들은 모두는 매일같이 죽는 연습을 합니다. 즉, 누군가가 말했듯이 밤마다 자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 지금 금방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매일의 삶을 가치 있게 살고 있습니까? 그보다는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시간의 빠름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매일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갈 때, 더 이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죽을 준비를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군중들이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거의 슈퍼스타의 평을 받고 계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이 수난과 죽음을 당한다는 것,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난과 죽음은 패배자의 몫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로 잘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과 시련에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 역시 분명 영광의 순간이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이 내게 찾아와도 포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장 큰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소포클래스).
죽음에 대한 명상들
소화 데레사 성녀. 우리는 과연 성인처럼 살고 있나요?
죽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네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가 세네카는 “너 성인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순간순간마다 나는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라.”라고 말했으며, 고대 그리스 철학가인 플라톤은 “훌륭한 죽음을 위해 연습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산 사람은 그날의 침상이 평화롭듯이 일생을 거룩하게 산 사람도 임종의 자리가 참으로 평화스럽다.”라고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지요.
“오 하느님! 당신은 인간을 당신께로 향하도록 본질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제가 당신 안에 쉬게 되기까지는 항상 무섭고 고독하나이다.”
성경을 보면 성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1)이라고 하셨으며,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 역시 항상 죽음을 연습하며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죽음에 대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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