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9주 강론

2005. 10. 16. 오후 2:29:14

글자

함께 나누려는 자세  

본명이 토머스 아퀴나스라고 살아왔었는데 우동성당으로 전입하면서 토마스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일에 대해 의심이 많은 것을 보면 제 본명이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토마스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겨자씨보다도 못한 믿음.... 토마스가 제 본명으로 더 맞는 것 같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연중 29주일 노영찬 신부님의 강론을 요약해 올립니다.

(노영찬 신부님, 강론 시에는 분명했었는데 마지막 부분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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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9주일 우동성당 노영찬 신부님 강론

해군 출동 시에는 3가지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종교, 정치, 이성에 관한 금기사항들입니다.
적 교전을 앞두고 일사불란한 작전을 해야 하는 함상근무자들에게
종교, 정치, 이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각자 처한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문제는 삶 가치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성, 정치에 대한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주 성서에서는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라고 종교적인 것은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고 아주 교활하게 예수님께 정치적인 문제를 물어옵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올바르게 행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현실적인 정치문제를 물어온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세금의 납부문제로
로마황제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현행체제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종주국에 반역하고 도전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서
어떤 답을 해도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그런 바리세이파의 음모, 트집잡으려는 의도가 있는 질문입니다.

이런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있는 질문에 대해,
질문의 속셈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직접 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성서 전체를 통해 그렇게 나타납니다.

결코 질문한 자가 제 3자인 관객의 입장에 서지 않고
질문한 자가 직접 답을 찾도록, 주체적인 생각을 하도록 답변하도록 하십니다.

동전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초상은 실제, 실세의 상징이요.
우리가 추구하는 열망, 권력, 품위, 힘, 권력,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숨어있는 존재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허약한 존재이십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실제로 존재하는 탐욕 상징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우린 모습, 존재인 각자 모양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으로 초월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즉, 현실 상징 욕망 존재는 허망한 것이고 찰라적인 것을 알게 합니다.
마치 불나비가 뛰어드는 것처럼 현실적 최고목표를 향해 비참한 종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주위의 고통, 슬픔을 없애기보다는 함께 나누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슬픔, 존재가 느껴지지 않지만 나로부터 들어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내 모습에서 카이사르의 모습이 아닌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날 수 있도록...
현재 정치문제화 되고있는 강 교수 구속문제에 대해서도...
참사람의 길을 걸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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