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교황 베네딕토 16세

2005. 5. 20. 오전 9:03:10

글자

+찬미예수님

 

승철이의 질문이 혹시

현재 교황님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원하는 건 아닌지 해서

이것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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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81년부터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엄격한 교리해석으로 가톨릭 정통성을 수호해온 바티칸의 핵심인물이다. 20년 넘게 전임 요한 바오로 2세를 보좌하는 동안 '하느님의 충복(忠僕)', '요한 바오로 3세' 같은 별명을 얻은 것도 세기말(20세기)적 사상 문화의 혼돈 속에서 가톨릭 정통성을 지키려 한 노력에 기인한다.

 그는 해방신학, 종교다원주의, 여성사제 서품, 사제독신제, 동성애, 인간복제, 낙태 등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등 신학, 윤리적 면에서 보수적 시각을 견지해왔다. 이로 인해 서방 언론은 그가 새 교황에 선출되자 "하느님은 강한 교회를 원하셨다"는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어린 시절
 며칠 전까지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라고 불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27년 4월16일, 부활절 전야에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 인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라칭거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경찰 경감이었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정직했으며, 주일이 돌아오면 새벽미사ㆍ오전 9시 교중미사ㆍ오후 미사 등 하루 3차례 미사에 참례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 따뜻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가 딱딱한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편이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학교 일정이 겹치지 않으면 매일 미사에 참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사다준 미사경본(Missale) 속에서 라틴말로 된 미사전례의 신비를 느꼈다. 그는 훗날 "음악뿐만 아니라 장식과 그림이 들어가 있는 미사전례가 나를 매혹시켰다. 이성적 관심이었겠지만 종교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수시로 변했다. 언젠가 벽을 예쁘게 칠해나가는 페인트공에게 감동을 받아 그런 직업을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하면 마을을 방문한 파울하버 추기경의 자주색 수단이 너무 멋있어 추기경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하느님 부르심을 듣고 사제직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를 '기나긴 성숙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뮌헨대학교에서 6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수많은 인간적 번민과 물음에 봉착했다. 내성적인데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조직관리 능력도 부족한 자신이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1950년 부제품을 받으면서 "예"라고 대답한 이후에 사라졌다. 그는 신학생 시절, 신학의 드넓은 세계에 흠뻑 빠졌다. 무엇보다도 신학이 사상과 신앙의 지평을 넓혀주고,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매료됐다.  

 ** 전쟁에 대한 기억
 콘클라베 직전, 라칭거 추기경이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 나치청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한 경력이 불거져 교황 자질을 둘러싼 시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유겐트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겐트 가입은 저항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고 신학생들은 훈련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또 전쟁 말기에 트라운스타인 신학생들은 모조리 뮌헨의 고사포 부대로 징집됐는데 16살이던 그는 측량소대에 배치돼 1943년부터 44년 9월까지 1년 남짓 복무했다. 비행기 위치를 추적해 그 정보를 포대원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4년 가을 제대한 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2달 동안 노역의무에 동원됐다. 전쟁 말기에 미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45년 6월19일 풀려났다.  

 ** 진보적 젊은 신학자
 전쟁이 끝나고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신학ㆍ철학ㆍ문학에 깊이 빠져 지냈다. 특히 전쟁 속에서 맞닥뜨린 물음의 해답을 찾고, 그동안 참았던 지적 허기를 채우는 데는 신학만한 학문이 없었다.  사제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섰을 때는 젊은이들 말에 귀를 가장 잘 기울이는 젊은 신부로 정평이 났다. 그는 교과서를 정리해서 간결하게 전달만 하는 교수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많은 강의 소재들을 현실 관계 속에서 질문으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던져 주었다. 1953년 성 아우구스티노, 1957년 성 보나벤뚜라의 계시개념에 관한 학위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본, 뮌스터, 튀빙겐, 레겐스부르크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로 통했다. 교의신학과 기초신학을 주로 강의했는데 강의실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솔직성과 관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바티칸 책임자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무명의 젊은 신학자였던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매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쾰른 요제프 프링즈 추기경의 신학자문역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 독어권을 대표해서 개혁과 쇄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공의회가 쇄신의 씨앗을 뿌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훗날 이에 대해 "그 방향으로 가고자 생각하는 동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교님들 사이에서도 이제껏 길들여진 교과서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시도를 감행해 보자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고했다.  

 ** 교회 정통 신앙의 파수꾼
 그러나 1960년대 독일 대학가를 휩쓴 네오 마르크시즘 열풍, 즉 극렬 좌파 학생운동은 그의 진보적 성향을 보수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진보적 인물로 찬사받던 신학교수들까지 학생들에게 강의 마이크를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던 시절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파고드는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그때 목격했다. 그런 정신적 풍조가 거짓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아챘다. 공의회 개혁정신이 분산되고 있는 것을, 신앙과 교회가 전혀 다른 생각과 이념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일들이 벌어지는 수년간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서서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1977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뮌헨 대주교로 임명됐다. 그리고 얼마 후 추기경에 올랐다. 그는 주교 승품 당시 '진리의 협조자(Mitarbeiter der Wahrheit)'라는 모토를 택했다. 사목경험이 일천한 대신 신학자로서 가톨릭 교회의 진리 수호에 몸바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4년 뒤인 81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그때부터 그는 가톨릭 전통과 정통성을 흔드는 시도에 대해서는 한치도 타협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줬다.  40여명의 보좌관(신학자) 도움을 받아가면서 전통과 정통성을 수호하는 그를 두고 일부에서는 '철갑 추기경(Panzer kardinal)'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형 게오르그 라칭거 몬시뇰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강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서 강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한다. 그러나 만일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경우에는 양심에 근거해서 싸움을 한다. 천상 학자풍의 성격이어서 전임자처럼 사람들과 금방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매료시키는 재능은 없다."  그의 숙소는 바티칸 성 안나의 문 바로 밖에 있는 한 아파트다. 성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출퇴근을 하는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외모가 수수하다.  하지만 대중적 지지도는 높다. 인터넷 공간에는 그의 팬클럽이 많다. 대표적 사이트가 영어로 된 'www.ratzingerfanclub.com'이다.

약력

 △1927년 4월16일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인 출생. 생후 4시간 만에 세례받음
 △1929년 가족 오스트리아 국경 부근 티토모닝으로 이사
 △1939년 아버지 정년퇴직 무렵 트라운스타인 근처 슐락으로 이사, 트라운스타인 소신학교 입학
 △1943년 뮌헨 방공포 부대 징집, 막스 김나지움에서 주3회 신학공부
 △1945년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트라운스타인으로 돌아옴
 △1947년 뮌헨대학 부속 헤르초글리헤스 게오르기아눔 신학교 재입학
 △1951년 프라이징에서 사제수품, 뮌헨-모자크 성 마르틴 본당 보좌신부
 △1953년 뮌헨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 취득
 △1954-57년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에서 교의신학ㆍ기초신학 교수
 △1959년 본 대학에서 기초신학과 정교수, 부친 사망
 △1962-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독일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 자문역(전문위원) 활약
 △1963년 뮌스터대학에서 강의, 모친 사망
 △1966년 튀빙겐대학 교의신학ㆍ 교의사학 정교수, 한스 큉과 학문적 교류
 △1969년 레겐스부르크대학 교의신학ㆍ교의사학 정교수
 △1976-77년 레겐스부르크대학 부총장
 △1977년 3월24일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
 △1977년 5월28일 대주교 수품
 △1977년 6월27일 추기경 서임
 △1980년 교황청 평신도에 관한 특별시노드 의장에 임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가톨릭교육성 장관직 제의했으나 뮌헨대교구장 복귀 희망하며 고사
 △1981년 11월25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
 △2002년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으로 임명
 △2005년 4월19일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

           

 평화신문(916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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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2005년 5월 25일 오전 11:43

    사제독신제를 반대하는게 아니라 그 폐지를 반대하는 것이지요.. 다 알아듣겠지만 ^^

1+2지구 예비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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