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

2010. 6. 12. 오전 11: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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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열
전광진
가톨릭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도 빠르게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어 마침내 313년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었지만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켰다.
변질은 첫째, 외적으로 교회가 정치와 혼합되면서 '권위주의'에 빠지고 둘째, 내적으로 신앙생활이 '형식주의'로 빠진 것이 교회변질의 핵심이었다. 변질된 가톨릭교회에 점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는 거듭 스스로를 성찰하고 회개와 쇄신이 필요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뛰어난 개혁가들이 나타나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많은 경우 교회전체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인 개혁으로 그쳤다.
이러한 변질의 극단적인 결과 중의 하나가 교회분열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분열을 종교개혁이라고 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 '교회분열'이라는 말이 더 객관적인 용어라고 생각된다. 사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분열이 있다.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다투고 마침내는 갈라서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분열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2천년 역사 안에서 두 번에 걸쳐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분열은 교회의 가장 뼈아픈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분열(1054년)
첫 번째로 가톨릭교회는 정교회와 분열되었다. 분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313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380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되면서 교회도 동서방교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로마, 동로마제국 수도는 콘스탄티노플, 양제국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국 교회의 수장들도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교회를 통제하는 최고의 권한인 '수위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했던 '정교회'는 교황이 전체교회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고, 양 교회는 서로 동등하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맞섰다.
로마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종속을 요구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교황의 독주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불화 속에 500년이 흘렀다. 이 불화의 골이 깊어지면서 점차 동서방 교회의 거리가 멀어지다가 1054년 드디어 양교회대표가 만나 서로 결별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감정적인 대립은 서로를 파문하면서 파국으로 끝이 났다.
이후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끝내면서 양 교회는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였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정교회에 가했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두 교회가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나라 정교회는 현재 서울 마포구 아현동을 비롯, 부산, 인천, 전주, 양구, 춘천 등에 성당이 있고, 신자 2500여명과 성직자 10여명 수도자 약간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4년에 대주교구로 승격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1521년)
500년-1500년, 중세시기에 변질된 가톨릭교회의 폐해가 교회를 황폐화시켰다. 교회지도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무능했다. 곳곳에서 교회지도부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바야흐로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 교회는 변화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권위주의와 권력정신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필요했다. 불행하게도 시급한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교회가 노쇠한 공룡과 같이 너무나 무기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다행히 많은 개혁가들이 꾸준히 교회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안젤라 메리치, 아빌라의 성녀 大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필립보 네리, 가밀로, 샹탈의 요안나, 빈첸시오, 이냐시오 로욜라와 같은 분들이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자선사업, 교육사업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톨릭교회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틴 루터(1483-1546)도 개혁을 간절히 바랐던 신부였다. 하지만 루터는 급진적이었다. 불행하게도 루터는 다른 개혁가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교회를 뛰쳐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교회가 분열되기에 이른다.
 
1)마르틴 루터(1483-1546)와 루터교
마르틴 루터는 독일북부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 아오스딩 수도회의 수사신부가 되었다. 공부를 계속한 루터는 성서신학박사가 되어 뷔텐베르그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많은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터는 가톨릭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루터교이고 이때가 1521년이었다. 루터교는 독일 북부지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한국기독교 루터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루터가 세운 루터교를 보고 가톨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루터교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저마다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불행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자신의 교회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반면, 상대교회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니 한 나라 안에서 종파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2) 요한 칼빈(1509-1564)과 장로교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평신도 요한 칼빈도 가톨릭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독일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운 루터의 본을 본 칼빈은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와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장로교였고 그 때가 1536년이었다.
 
3) 헨리8세(1509-1547)와 성공회
가톨릭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의 왕 헨리8세도 1533년, 독일의 루터를 본받아 영국에 독창적인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성공회다. 헨리8세는 그의 처사에 저항하던 토마스 모어 총리대신과 같은 당시의 공직자 200여명을 처형했다. 성공회에서 침례교, 감리교가 갈라져 나왔다.
그 후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수많은 종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평가
교회분열은 인류역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뼈아픈 실패다. 가톨릭교회지도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중세의 낡은 시스템을 고집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독일북부에서 일어난 조그만 불씨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인류를 갈라놓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무능하고 개혁을 외면했던 가톨릭교회의 지도부가 원망스럽다. 또 젊은 혈기에 너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분열시킨 루터도 원망스럽다. 루터의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고 해도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개혁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그때마다 교회를 새로 세운다면 수많은 교회가 난립하게 되지 않겠나?
가톨릭교회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오는 정통 그리스도교이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변질되지 않도록 개혁정신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사람의 본성은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가만두면 어느새 늘어지고 무디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교회나 개신교신자들을 갈라진 형제자매로 보고 세상 구원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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