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기 예수와 함께 옥좌에 앉으신 성모님 (1505년)
작가 : 죠반니 벨리니 (Giovanni Berlini :1430-1516)
크기 : 유채 목판화 402 X 273 cm
소재지: 이태리 베네치아 성 즈가리야 성당
"바다의 도시"라 불리는 베네치아는 오늘날에는 이태리의 한 관광도시에 불과하지만, 중세기엔 개펄이라는 천혜의 악조건과 싸우면서 도시를 건설한 후 상업과 무역으로 성공한 도시국가였다. 이런 성공에서 축적된 에너지를 신앙과 예술에 투자함으로써 르네상스의 도시인 피렌체와, 교황청이 있는 로마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독창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베네치아의 특징적인 화풍은 사람들의 마음을 경쾌하고 즐겁게 하는 화려한 색채 처리였다. 화가들은 아드리아 해변의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 시간마다 변하는 화려한 색채를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작가는 베네치아의 대표 작가로서 아버지 야고보 벨리니Jacopo Berlini, 형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rlini, 누이의 남편 안드레아Andrea Mantegna 등 모두 베네치아에서 명성을 떨치는 쟁쟁한 가문에서 태어나 이들 가족 중에서 가장 출중히 재능을 발휘하면서 베네치아에 르네상스 예술의 황금기를 가져오게 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의뢰받았을 때는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은 때였으나, 작가는 대단한 의욕을 발휘해서 지금까지 제작된 어떤 작품보다 더 성모님을 친근하면서도 아름답게 전달해야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이 작품이 전시된 장소는 베네치아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베네치아가 무역을 통해 유럽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많은 남자들이 무역이나 다른 업무로 해외여행을 떠나야 했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자연히 오랫동안 가정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남편이 송금해주는 넉넉한 생활비로 누린 당시 베네치아 여자들의 사치가 어떠했는지,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전시된 풍속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베네치아 여성들의 교육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이 풍요는 곧 탈선과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이런 환경에서 현대적 의미의 여성 사목을 한 곳이 바로 이 작품이 있는 즈가리야 수녀원이었다.
오늘날은 성당만 남았지만 이 수녀원은 당시 베네치아 귀족 가문의 딸들이 입회하던 수녀원이었고, 이 수녀원의 원장은 대단한 교양과 성덕을 갖춘 분이어서 남편 없이 지내는 여성들에게 있을 수 있는 사고예방과 함께 바람직한 베네치아 여성문화를 창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많은 상류 여성들이 이 수녀원을 드나들면서 지도를 받아 그들 일상의 고독을 신앙 안에서 승화시키면서 풍요가 낳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고 기품있는 삶을 꾸릴 수 있었다. 이 수녀원의 영적 지도를 받아 신앙 안에서 삶의 행복과 보람을 찾은 부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당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봉헌한 까닭에 이 성당에는 유명한 작품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신앙으로 다듬어진 우아한 귀족문화의 산실에 어울리게 세련된 작품이기에 전형적인 베네치아 르네상스 전성기 작품의 화려함을 드러낸다. 작가는 르네상스 예술의 선두 주자였던 피렌체풍의 웅장함을 시적詩的 친근감과 조화시켜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표현했다.
이 작품은 15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거룩한 친교Sacra Conversazione"라는 작풍의 대표작이다. 서기 413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로 정의되면서 성모 공경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면서 성모님의 위상을 좀더 깊고 넓게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작품, 곧 과거와 달리 성모자와 천사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특별히 공경 받는 성인들도 함께 등장시켰던 것이다.
아기 예수와 성모님
중앙 약간 높은 곳에 흰색과 붉은 색이 어우러진 기품 있는 옥좌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님이 앉아 계신다. 성모님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은 오른손으로 관람자들을 축복하고 계신다. 여인으로서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순간은 어머니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얼굴 표정 역시 더없이 밝고 흐뭇한 게 보통이다. 그러나 장엄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성모님은 약간 슬픈 표정으로 계신다. 이것은 성모님은 하늘의 여왕이시보다 어린 아들 예수가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어머니의 모습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지만 여느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면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들의 구속사업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어려움에 동참하셨기에 여느 어머니 못지않은 고통을 받으셨다. 작가는 사랑하는 아들이 받아야 할 고통을 예견하는 성모님의 슬픈 모습에서 인간 모성의 아름다움과 함께 어머니로서 받아야 할 많은 고통을 지니고 살아가는 관람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도록 배려하고 있다. 성모님은 슬픈 표정을 통해 누구나 피하고 싶고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는 슬픔이라는 정서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고귀한 표현이니, 당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이 성모자상은 후에 유명한 성모자상을 많이 남긴 라파엘로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천국 열쇠를 쥔 사도 베드로와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
작가는 성모자의 좌우 안쪽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와 베네치아의 주보 인 성녀 루치아를 배치하고 그 밖으로 사도 성 베드로와 성 예로니모를 배치하고 있다. 사도 성 베드로는 전통적인 표현대로 천국 열쇠를 쥐고 계시는데, 다른 손에는 두꺼운 책을 들고 깊은 명상에 잠겨 계신다. 사도 베드로가 책을 들고 계시는 것은 좀 예외적인 표현인데, 이것은 교회에 대한 그분의 직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자의 책임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옆에 열린 부분이 정원으로 들어오면서 막힌 제단 공간이 줄 수 있는 답답함에서 관객들을 해방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천재적 표현력의 성공이다. 작가는 인물화 뿐 아니라 풍경화에도 역량이 있었는데, 인물들을 한 번에 등장시킴으로써 답답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이 그림에 숨통을 틔우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시원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안쪽의 성녀들은 둘 다 팔마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순교자임을 표시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우리들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세에는 대단히 공경받는 성녀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귀족 집안에 태어나서 열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당시 이교도인 로마 황제의 영향을 받은 측근으로부터 배교를 강요하는 유혹이나 협박이 많았으나 끝까지 굴복치 않았다. 급기야 성녀를 살해하기 위해 톱이 달린 바퀴를 준비했으나 성녀의 기도로 천사가 바퀴를 박살내자, 목을 쳐서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의 유해는 천사들에 의해 시내 산으로 옮겨져 오늘날 희랍정교회 소속인 가타리나 수도원에 묻히게 되었다. 성녀의 곁에 놓인 부서진 바퀴는 바로 천사의 도움으로 부서진 바퀴이며 성녀의 순교를 상기시킨다.
성 예로니모와 성녀 루치아
팔마가지를 들고 있는 성녀는 루치아이며, 원래 시칠리아의 시라큐사 출신이나 순교 후 유해를 베네치아로 옮기면서 베네치아의 주보성녀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녀는 시칠리아 귀족 가문에 태어나 혼자 신자가 되었다. 외교인과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 반대하며 동정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자, 성녀의 동정성을 파괴하기 위해 사창가에 팔아버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성녀는 이런 유혹을 피하기 위해 자기 눈알을 뽑아 내어놓고 순교했다는 내용이다. 팔마가지와 함께 성녀가 들고 있는 그릇은 바로 성녀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눈알까지 뽑으면서 저항했던 고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옆에 붉은 옷을 입은 분은 예로니모 성인으로 라틴어 성서를 번역하신 분이시다. 다른 쪽에 있는 사도 베드로와 함께 장중한 옷을 입고 성모님도 관람객도 보지 않고 깊은 묵상에 빠져 계신다. 성모님 곁에 두 성녀가 성모님을 바로보고 서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두 성인은 깊은 명상에 빠진 자세로 하느님께 몰입되어 계신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교회에 걸리던 제단화에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과거에는 신앙의 단일성과 거룩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공간과 등장인물의 위계적 구성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답답한 분위기가 되었고, 이것이 성화가 주는 기본 인상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대담하게 이런 것들에서 탈피해서 베네치아의 화려한 생동감을 과감히 도입하고 양쪽 열린 곳에 나무가 보이는 정원을 도입함으로써 성화가 주는 거룩함과 함께 시원하고 상쾌함을 끌어들여 관람객들을 즐겁게 했다.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천사
네 명의 성인 성녀들이 자기들만의 몸짓으로 성모님을 향하거나 깊은 묵상에 빠진 것과 반대로 천사 혼자 바이얼린을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는 원래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닫힌 정원"이며, 이것은 원래 성모님의 상징이었는데 이 정원에서 성모님의 시중을 들던 천사가 이제 제단으로 나와 성모자와 성인들을 관람객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천사는 관람자들과 시선을 마주하면서 그가 하는 찬양으로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 천사는 거룩함의 극치 앞에 선 인간들이 느낄 수 있는 감동으로 긴장이나 경직된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면서 크리스천 신앙의 거룩함은 거북함이 아니라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음악처럼 부드럽고 푸근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영국의 석학이며 미학의 귀재인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이 작품을 평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극찬을 했는데, 개펄이란 열악한 환경에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최선을 다해 이룬 아름다운 삶의 터전에서 이루어진, 규방문화의 산실과 같았던 이 성당에서 보는 작품은 모든 관람객들에게 어떤 처지에서도 신앙의 가치 속에서 고귀한 삶을 살고픈 열망에 휩싸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