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오늘의 성인♡
==============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축일 1월 2일
이탈리아 로마(Rome) 태생인 성 가스파르는
요리사의 아들이었으나,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교육받고 1808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교황 비오 8세(Pius VIII)의 추방 이후
나폴레옹
보나팔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5년 동안
코르시카(Corsica)로 유배당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에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회를 설립하여
1815년에 교황 비오 7세로부터
보혈선교회로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 가스파르는 스폴레토(Spoleto) 부근
지아노(Giano)와 알바노(Albano)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었기에
이런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선교회는 날로 발전하였다. 그는 또
자선사업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임하였으며,
세상의 복음화가 자기
선교사들의 목표임을
늘 주지시켰다.
그는 알바노에서 콜레라에 희생되어 운명하였다.
그는 1904년 복자품에 올랐고,
1954년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
성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 1월 2일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
(Caesare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대 바실리우스
(Basilius)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우스(Basilius)와 미래의 황제
율리아누스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우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돕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우스(Arius)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교회학자’로 불린다.
===============================
성 나르치소(Narcissus)
성 아르게우스(Argeus)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
축일 1월 2일
성
나르키수스(또는 나르치소)와
성 아르게우스(Argeus)는 리키니우스 황제의
군인으로 형제간이다. 그들은 흑해 연안
폰투스(Pontus)의 토미(Tomi)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는
군복무 이행을 거부한 소년으로서, 잔인하게
매를 맞고 오랫동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
성
마르티니아노(Martinian)
축일 1월 2일
성 마르티니아누스
(Martinianus, 또는
마르티니아노)는423년부터
죽을 때까지 밀라노의 주교로서, 에페소
공의회에 참여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저술하였다.
===============================
성 마카리오(Macarius)
축일 1월 2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인
성 마카리우스(또는 마카리오)는 과자장수를
하다가 하느님께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세상을
멀리하고, 6년 동안 사막에서 고행과 관상으로
지냈다. 그의 첫 은수처는 테베(Thebes,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근방)이다. 그리고
373년에는 이집트 남부로 가서 스케테(Scete)와
니트리아(Nitria)
사막에 움막을 지었다.
그 당시의 은수자들은 각각 자기 움막에서
독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극도로 엄격한
규율을 지켰으며 기적도
수없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그는 성 마카리우스(1월 15일)와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아리우스파
(Arianism) 총대주교인 루키우스에 의하여
나일 강의 한 섬으로 추방된 적도 있으나
결국은 귀향이
허가되어 돌아왔다.
그는 니트리아에 있는 수도원을 위하여
회헌을 집필하였는데, 이 중의 여러 규칙이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인용하고 자신의 회칙에 삽입하여 그 맥이
지금도 이어온다.
===============================
성 문킨(Munchin)
축일
1월 2일
아일랜드의 리머릭(Limerick)의 수호성인인
성 문킨은 ‘현인’으로도 불린다.
그는 카운티
클레르에서 리머릭으로 왔으며
그곳의 주교였다. 그 외의 자세한 내력은
알려진 것이 없다.
===============================
성 바실리오(대)(Basil the
Great)
축일 1월 2일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아테네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Caesarea)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
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
성
벤티보글리오(Bentivoglio)
축일 1월 2일
이탈리아 마르카의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태생인 벤티보글리오는 설립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희박하지만,
그의 표양에 감탄한 온 가족과 친척들이
그를 훌륭한 수도자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초기 작은 형제회 회원들
중에서도
청빈과 단순의 덕에서 뛰어난 인물이다.
그 당시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본당신부도
숲 속에서 기도하는
벤티보글리오가 탈혼에
빠졌다가 오랜 시간동안 공중에 떠있음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이외에도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에는 그에 대한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성탄절을 기하여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5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
성 빈첸시아노(Vincentian)
축일 1월 2일
성 빈첸시아누스(또는 빈첸시아노)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서 프랑스 남서부
카오르(Cahors)의 주교인 성 데시데리우스
(Desiderius, 11월 15일)의 요청을
받아들인
아키텐(Aquitaine)의 공작 베락드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베락드 공작은 곧 선종했고,
그의 아들은 그를
쫒아내 버렸다.
그 후 그는 자기 옷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렸으며, 약혼자도 포기함으로써 심한
고통을 당했다. 이윽고
그는 은수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오베르뉴(Auvergne) 교구의
어느 숲 속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그의 성덕은 더욱 높아만
갔다.
===============================
성 스테파나 드
퀸차니(Stephana de Quinzani)
축일 1월 2일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 교외에서
출생한 스테파나 드 퀸차니는 15세 때에
손치노(Soncino)에 있던 도미니코회 3회에
입회한 후부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후 그녀는 손치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는 자주 탈혼하였는데, 특히
예수 수난의 각 단계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치유의 은사로 자신의 신심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스테파니 드
퀸차니
(Stephanie de Quinzani)로도 불리며,
1740년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
성 시리디온(Siridion)
축일 1월 2일
연대미상의 성 시리디온은 아마도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언급한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 이시도루스
(Isidorus)나 성
이시리디온(Isiridion)의
필기 오류로 여겨진다.
===============================
성 아달하르도(Adalhard)
축일 1월 2일
성 아달하르두스(Adalhardus,
또는 아달하르도)는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손자이자 피핀 왕의
동생인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아들로
아델라드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알퀴누스(Alcuinus)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773년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y)의
코르비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비록 그가
수도원 생활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의 사촌인
샤를대제(Charlemagne)에 의하여 자주 궁중으로
불려갔으며, 끝내는 왕의 고문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샤를대제의 큰 아들
피핀의 전속사제였고, 피핀이 810년에 사망하자
다시 피핀의 아들 베르나르두스의 개인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루이 황제에 대한 반역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아키텐(Aquitaine) 연안의 한 섬으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5년을
살았으나, 루이 황제는
그의 무죄를 믿었으며 821년에 궁중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다시
추방되었는데,
이번에는 성덕과 엄격함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관심이 나쁜 평판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코르비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독일과 프랑스 언어뿐만 아니라
라틴어까지 가르치는 배움의 전당이
되었다.
그는 코르비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
성 아벨(Abel)
축일 1월 2일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창세 4,2)로 밭을
가는
농부인 형 카인(Cain)과는 달리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다. 아담의 가족은 하느님께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우발적인
사건으로 아벨은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하여
인류 최초로 살해당한 인물이 되었다.
기르던 양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잡아 기름기를
봉헌한 아벨의 예물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으나
카인이 드린 곡식 예물은 반기시지 않자,
시기심에 사로잡힌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나가자고 꼬여 죽였던 것이다(창세 4,3-8).
창세기에서는 아벨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지만, 복음서에서는 아벨은
무죄하다고 평가되었다(마태 23,35; 루가 11,51).
복음서는 아벨의 죽음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원인이 되어 빚어진 예언자 내지
순교자의 죽음과 유사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산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을 꼽았다(히브
11,4).
아벨의 예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믿음으로 형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풀이함으로써
아벨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살해된 인물로 평가하였다.
===============================
성 아이랄도(Ayraldus)
축일 1월 2일
성 아이랄두스(또는 아이랄도)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백작
빌리암 2세(William II)의 아들인데, 그의 다른
세 형제 중의 하나는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로
교황좌에 올랐고, 다른 형은 카스티야(Castilla)의
왕인 라이문두스(Raymundus)이며, 세
번째는
포르투갈의 백작 헨리쿠스(Henricus)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랄두스는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었다.
모리엔느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 귀족 출신이며 포르테스의 수도자인
아이랄두스가 교회의 빛이며
성좌의 영광을
높이다가 누워있다. 그의 성덕은 빛나고
그의 기적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성 이시도로(Isidore)
축일 1월 2일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아리우스파에 의해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한
동방교회의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에 소개되어 있는 그에 대한
증언은 모호한 편이다.
===============================
성 이시도로(Isidore)
축일 1월 2일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의해
신앙심이 두텁고 존경할 만한 주교로서
언급되었다. 그는 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이집트에 왔을 때 그를 환대해
주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펠루시움(Pelusium)의
성 이시도루스(2월 4일)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
성 제라르도 코뇰리(Gerard
Cognoli)
축일 1월 2일
게라르두스 코뇰리
(Gerardus Cognoli, 또는 제라르도)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어느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10살 때에 부친을 여의였고
그 얼마 후에는 모친마저 잃었다.
친척들은 결혼하기를 강요하였으나 그는 모든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40세 때까지 순례와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황량한 시칠리아(Sicilia)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그는 프랑스 앙주(Anjou)의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8월 19일)의 성덕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평수사로서 놀라운 단순 덕과 겸손을
보였다.
가끔씩 부엌일을 하던 중에 기도에 몰두하여
물의를 일으킨 때도 있었다. 한 마디로
그의 성덕은 아주 높은 단계였다.
그의 식사는 빵과 물이 전부였고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다. 그는 너무나 자주
탈혼에 빠졌는데 그 때에는 그의 주변에
광채가 빛났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
성 시그프리드(sigfrid)
축일 : 1월 2일
노스움브리아 출신인 성 시그프리드는 요크에서
사제가 되었고, 선교 주교로 축성된 이후,
그림켈과 요한 주교와 함께 노르웨이 선교길에
올랐다. 이것은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트리그바손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1008년에 스웨덴으로 가서 올라프라는
왕을 개종시킴으로서, 스웨덴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의 선교는 크게 성공하였다.
성 시그프리드는
교황 아드리아노 4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아직껏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1월 2일 오늘의 성인♡
2016. 1. 2. 오전 7:55:23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