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욥 1, 21)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착하고 경건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욥의 이야기는 이런 물음으 로 시작된다.
욥은 의롭고 경건한 부자요, 축복받은 명망가였다.
자신은 물론 자식들이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이유없이 재산을 빼앗기고 자식들은 죽고 몸뚱이 하나만 남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그 많은 재산을 잃은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었으니 가슴이 무너지고 피가 마르고 살과 뼈가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1, 1).
욥이 왜 이 런 고난을 겪어야 했을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왜 이런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렇게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쳐서 삶의 나락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느님을 저주 하고 삶을 포기해야 할까?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저주하는 것이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억울하게 당한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살 길이 있다.
삶은 살만해서만 사는 게 아니다. 생명(生命)은 살라는 명령이 아닌가!
내일 죽더라도 오늘을 살겠다는 믿음과 뜻이 있으면 삶에는 길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지독한 고난을 오래 겪은 민족도 없다.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 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쓴 민족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그들처럼 바른 신앙과 삶을 위해 노력한 백성이 또 있었을까?
이집트와 다른 강대국 틈에 끼여 천 년 이상 외세의 침탈과 지배를 받고 지독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새롭게 일어선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야말로
세계사의 수수께끼요, 역사의 기적이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힘있게 다시 일어섰으며, 고난을 통해서 깊고 순수한 믿음을 닦아냈다.
욥기는 기원전 6세기와 4세기 사이에 씌었는데 욥의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은,
기원 전 6세기에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고 그 후에도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침탈과
지배를 받았던 유다인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이처럼 억울한 고난을 끊임없이 겪어야 하는 걸까?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성서의 말씀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삶의 밑바닥에서 온몸으로 고난을 겪고 깨달은 진리를
기록한 책이다. 역사의 가혹한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하느님과 인간 역사에 대해서,
메시아와 구원에 대해서 깨달은 십자가의 진리가 성서의 구원사를 꿰뚫고 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 특히 갈릴래아는 세상의 온갖 고난이 다 모여 있는듯한
곳이었다. 로마의 지배, 헤로데 왕가의 지배와 착취, 대사제들과 부재 지주인
예루살렘 부자들의 착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종교적 억압으로 민중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예수는 이런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열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기쁨이 솟구치는 하느님 나라가 삶의 밑바닥, 절망과 죽음의
나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절망과 시련의 진흙탕 속에 핀 생명의 꽃이며, 좌절과 고통의 땅에
묻힌 하늘이다.
생명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가나?
예수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다.
회개하는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회개하는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은 '모든 것을 떨쳐버린 있는 그대로의 삶'을 뜻한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니다.
다 버리고 몸만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다.그래서 창녀나 세리처럼 내세울 것 없고,
몸뚱이 밖에 없는 이들이 경건한 바리사이파 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
왜 그럴까? 알몸(맘)으로만 하느님과 사귈 수 있고, 친구와 사귈 수 있다.
다른 것은 다 버려야 한다. 내 몸, 내 맘 하나만 있으면 절망도 없고 근심 걱정도 없다.
내 몸 속에 생명의 순수한 의지만 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지. 하느님께 맡겨진 생명이니까 죽어도 좋다.
아니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 생긴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그 순간 에 비로소 활짝 열렸다.
인간의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그 순간에,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난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내게 남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삶과 희망과
믿음이 시작 된다.
그게 성서의 역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완전히 패배했다' 고 생각한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꽃이
피지 않았던가!
욥의 이야기도 절망적인 고난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의로운 부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부자 욥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 의로운 부자가 있던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사는 것 자체가 죄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어야 한다.
욥은 하루 아침에 벌거벗은 존재가 되었다.
벌거벗은 존재로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다.
벌거벗은 삶에서 참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생긴다.
유 영모는 '우리가 아는 예수' 라는 시에서 "예수는 믿은 이 높낮(높고 낮고).
잘못(잘하고 못하고) , 살죽(살고 죽고) 가온데(한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라고 노래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꽉 막혀서 살길이라곤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믿음만 있으면
솟아오를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알몸인 사람은 돈도 권세도 명예도 못 믿고 하느님만
믿을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은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를 넘어서서
살아날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지식, 재물, 지위, 명예, 직장 등 온갖 세상살이의 근심을 털고 알몸으로
섰을 때만 살 수 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날도 걱정하지 않고 오늘 주어진 삶만을 사는 것이다.
아, 들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렇게 자유롭고 기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준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하느님 자녀의 길로 나서지 않았던가!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는 욥의 말은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첫 마음' 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악마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 늘 푸르게 사는 이다.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박 재순 지음/ 바오로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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