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화 - 레지오마리애 '06.2월호

2006. 2. 2. 오후 11:07:50

글자
 

가난한 과부의 헌금 - 김광태 야고보 신부


  봉헌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얼른 머리에 떠오른 장면은 역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야기(마르 12,41~44)입니다.

  바친 것이라고는 렙톤 두 개, 겨우 빵 한 조각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바쳤다고 칭찬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넉넉한 가운데 얼마를 할애해서 바쳤지만, 그 과부는 있는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바쳤다고 해서 부자들이 결코 적게 바쳤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놓아두고 예수님께서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직 기대에 못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욕심쟁이가 아닐까요? 사실 IMF 사태 이후 전 국민이 먹고 사는 일에 찌들어 살다보니, 예수님만이 아니라 헌금에 대해서 강론하는 사제들 역시 신자들의 형편을 너무도 몰라주는,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으로 몰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십분의 구는 다른 쪽에 썼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삼십분의 일을 봉헌할 경우, 삼십분의 이십구는 다른 쪽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께 낯 뜨겁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할 터인데, 이런 정도로 충분할까요?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고정시켜 놓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고 있는 재물을 하느님께 돌려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진 것을 많이 바칠수록 좀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업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차원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 내용은 보다 근본적인 태도를 요구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내일이나 일주일, 또는 한 달, 일 년, 평생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은 내일 또 주실 것이니 오늘 필요한 부분만 청하면 됩니다. 그리고 문맥을 좀더 확대해서 보면 ‘오늘 먹을 양식으로 충분하니 내일 먹을 양식이 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겠다.’는 자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내용(탈출 16,13~31)과 직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고 남은 것을 그 다음날을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말을 듣지 않고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겨둔 것에서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데도 무엇을 자꾸 쌓아 놓는다는 일은 결국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일이므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들은 썩어 냄새를 피우며 우리의 영혼과 삶을 오염시킵니다.

  과부는 가진 것을 모두 바칠 수 있었지만, 부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과부는 쌓아 놓지 않고 그날 그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다보니 호주머니가 가벼워 가진 것을 모두 바치는 일이 쉬웠지만, 부자들은 쌓아 놓은 것이 많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TV 홈쇼핑에서도 보험 판매를 흔히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보험도 하늘에 든 보험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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