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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4,13-21 오병이어 기적을 읽으세요
최소 투자로 최대 이윤을 거두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입니다. 경제학 원론 맨 첫장에 그렇게 써있더군요. 그러나 불황이 닥치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만 해도 그럭저럭 만족하게 됩니다. 최대 이윤은커녕 원금 보존만도 감지덕지인 것이죠. 심은 대로 거둔다, 심은 것보다 더 거둔다, 심은 것만 못하다-이렇게 상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상황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풍이 쓸고 갔다거나 가뭄이 들면 수확은 형편없습니다. 상황이 문제죠. 그러나 상황이 똑같아도 무엇이 심겨졌는가에 따라 결과는 현저히 다르기도 합니다. 상황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심는가를 결정하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 기적에는 열두 광주리로 상징되는 풍요함이 있습니다. 모두가 먹고도 남는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먼저 백성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식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녁 때가 될 때 까지 최소 여섯 일곱 시간 이상을 주님 말씀을 들었던 것이죠. 생명의 말씀에 집중하는 백성들을 그 들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유를 추구하는 이에게는 남는 것이 오히려 없는데 생명을 추구할 때 열두 광주리가 남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기 전에 굶주림을 먼저 체험하게 하십니다. 포만한 상태에서는 그 아무 것도 은혜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배부르니 산해진미도 맛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도적인 굶주림이 필요하기도 하죠. 그러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 먼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봉사하고,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누군가에게 희생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굶주림을 일으킵니다. 주게되니 비게 되고 그 빈 상태를 채우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모유 수유, 젖을 주면 살이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전적인 헌신과 수여가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투리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두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죠. 다 드렸는데 오히려 열두 광주리 남을 만큼 얻게 하시는 것이죠. 엘리야 시대 사렙타의 과부는 예언자 엘리야가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 남은 것을 다 주고나서 죽음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는 환난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인가 드리고 바칠 때, 해야할 때 지나친 계산은 필요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돌려 받을 생각도 없었건만 손에 무엇인가 남게하시는 것, 기적은 그렇게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되더라는 것이죠. 그 들판에 얼마가 남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대로 죄다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넘쳤습니다. 분명히 시작은 오병이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남은 부스러기를 모아서 기적을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인생 속에서 별것 아닌 것이라 여기면서 그냥 내버려두면 지나갈 것을 다시 모으면 기적이 된다는 것이죠. 아주 작은 것들도 모아 두면 기적이 됩니다. 눈사태도 작은 눈송이가 모여 만들어 지고, 거센 폭우도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인 결과일 따름입니다.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은 반응의 차이인 것이, 자꾸 그것을 모으면 그것이 쌓여서 기적임을 알게 됩니다. 별빛에 감사하는 자는 달빛에 감사하고 달빛에 감사하면 햇빛에 감사하고 그러면 영원한 빛을 얻게 된다고 할까요. 그렇게 일상과 기적이 연결되게 하는 것, 오병이어는 기적의 방법을 슬쩍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요.… 더보기
주님은 생명의 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요한 6,33).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우리가 경험하는 굶주림은 두 가지입니다. 정말 절대 빈곤 속에서 굶주림이 하나입니다. 이 풍요의 세상에 하루 한끼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요?’ 라고 묻는 우리에게 주님은 당신의 꿈에 동참한 우리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 곁에 서는 것은 교회의 자선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입니다.
또 다른 굶주림이 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과 의미와 가치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경쟁으로 내모는 세상에서 허둥거리느라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삽니다. 허위단심으로 욕망의 언덕을 오르다 문득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마음에 휑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우리 얼굴에 빛이 사라진 것은 먹어야 할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람과 의미, 가치 말입니다. 보람과 의미, 가치는 우리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가 누군가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누구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이는 다 당신께 올 것이고, 당신께 오는 이를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곧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하셨지요.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불쾌감을 자아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상처와 아픔까지 부둥켜 안습니다. 그 사랑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 뜻을 이루려 하늘에서 오시지 않고 당신을 보낸 분의 뜻을 이루려 오셨다는(요한 6,38)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삶은 모호하고 복잡하기에 모든 순간에 적합한 인생의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참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기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내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한 6,39)이야말로 당신의 사명이라 하셨지요. 이런 마음을 품고 산다면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 그래서 그가 하느님의 은총의 신비를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길이고 또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구절입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기운을 잃은 개똥지빠귀 한 마리를/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나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세상이 온통 난장판인데 한 사람을 돕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인류입니다. 주님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애태우며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억을 안고 고단한 세상을 통과합니다. 그런 기억은 어두운 우리 내면을 밝히는 빛이고 그런 빛이 조금씩 쌓여갈 때 우리는 마침내 빛의 사람이 됩니다. 그 빛이 어둠의 시기에 우리를 지켜줍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지만, 우리 주변의 어둠은 조금씩 밝힐 수 있습니다. 여전히 강력하고 사악한 힘이 우리를 현혹하고, 공포심을 자극하여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려는 이들이 많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 마음도 머물고, 주님의 눈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눈길도 닿고, 주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발길이 닿기를 빕니다.… 더보기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마태 14,1-12)
갓 태어난 세례자 요한을 안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루카 1,76-77) 이 말은 요한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성장하여 온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리라는 진리를 전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외치던 그가 헤로데에게 직언을 한 이유로 갖히고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헤로데는 군중들의 믿음과 희망을 꺾으면서까지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수의 이익과 행복과 자신의 체면 따위가 더 소중했던 것이죠.
이제 진리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 많은 이가 다시 좌절과 어둠을 맛보게 됩니다. 끝일까요? 아닙니다. 진리를 선포하던 세례자 요한은 죽었지만, 즈카르야가의 예언대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제 그가 닦아 놓은 길로 그보다 더 위대하신 구원자가 오시는 것이죠. 거짓으로 진리를 이기고, 권력으로 힘없는 자를 짓누르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다른 이의 행복을 앗아가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닦은 길로 오십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그렇게 목놓아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진리를 덮을 수는 있어도 진리를 죽일 수도 없앨 수도 없습니다. 잠시 이기는 듯 보입니다. 그 ‘잠시’에 현혹될 때 판단은 흐려지고 결정은 왜곡되며 삶은 부패합니다. 그저 잠시 뿐입니다. 결국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결국’을 신뢰할 때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인내하고 진리와 선으로 무장하여 투쟁하게 됩니다. ‘잠시’ 십자가와 죽음을 맛보셨지만 ‘결국’ 여명의 빛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진리와 거짓이 어떻게 판가름되는지를 압니다.
프랑스의 엠마우스 운동을 일으킨 아베 피에르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둘은 서로를 부인하고 우롱하지 않고서는 함께 갈 수 없다. 홀로 만족하는 자는 사랑을 모독한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를, 너무 늦기 전에,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너무 늦기 전에, ‘잠시’의 거짓이 주는 단 맛에 길들여져 ‘결국’ 오게 될 기쁨을 놓치지 않는 것,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할 수 있었으나 그가 외친 광야의 선포는 사라지지 않음을 통해 우리는 확인합니다.… 더보기
마태 13,54-58를 읽어주세요.
믿음에 걸림돌이 되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잘믿고 싶은데, 제대로 믿고 싶은데 자꾸만 끼어드는 불순물이 있다는 것이죠. 그중의 하나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잘 믿고 있다는 자기 확신입니다. 자기 믿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믿음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오랫동안 믿어 왔기 때문에. 철썩같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알고 지낸 햇수와 비례해서 깊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의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신학을 배우면서 신앙을 잃게 된다’는 격언이 그것을 웅변해줍니다. 물론 이말이 모든 신학적인 탐구가 무용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골치 아픈 신학공부 때려치워’-그런 언사가 아닙니다. 다만 방향을 잃은 신학도 있을 수 있거니와, 얼치기 앎, 본질로 나아가지 않는 신학의 경우 신앙인을 옭아매 부자유하게 만들고, 궁극의 실재이신 하느님을 가리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하여간 한해 더 믿었으니 그만큼 더 굳센 믿음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한해 더 믿어온 만큼 믿음이 덜어지기도 합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 그들은 예수를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 떠나기 전, 복음을 전하기 전의 예수를 자기네가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지금의 예수도 여전히 잘 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목수의 아들인 예수, 그 성장 과정을 훤히 다 지켜본 예수, 별로 눈에 뜨이지 않던 예수, 코 찔찔 흘리던, 마리아에게 야단 맞던 예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는 옆집 아이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옆집 아이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하는 모든 얘기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얘기와 전혀 달랐습니다. 달라졌으면 달라진 대로 좀 넓게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고착된 앎이 그것을 방해합니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로움을 받아들일 개방성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과거 앎이 우리의 새 앎을 방해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믿음이 오늘의 새 믿음을 가로막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는 제한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미 다 이해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신자가 제일 열정적입니다. 백지 상태 같아서 여백이 많고 그러니 흡수가 잘됩니다. 영혼의 투명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한 몇 년 교회 생활에 익숙해진다 싶으면 반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 새로운 것이 없어집니다. ‘어, 나 그거 알아. 아, 나 거기 가봤어. 어, 그것 말이지 이렇게 하는 거야. 그 소리가 다 그 소리야.’ 이런 식의 단정짓기가 빨라지고 요령은 곱절로 늘어납니다. 신앙이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러니 나자렛 사람들이 기존의 앎으로 인해 새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우리는 습관된 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습관이 되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태도를 벗어버리는 탈습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고정관념을 두드려 깨는 것이 필요합니다. 선입관을 비워야 합니다. ‘주어진 설명에 대해서 그것이 전부입니까?’ 하는 태도로 계속해서 더 높은 차원의 안목을 위해 물어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참으로 믿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버려야하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전통이니, 관습이니, 상식이니, 원칙이니, 그런 법이라느니 뭐니하면서 움직일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숙명처럼 믿어 오던 것, 떠받들여오던 것을 이제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음미해보는 그런 마음, 그런 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기존의 것들로 윤색되고 답습된 예수님만을 끊임없이 섬기고 있을 때 이웃집 총각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예수 그분을 만나고 따르고 살기 위해서 옛 예수님을 버리고 새 예수님을 채울 수 있습니다.…더보기
마태 13,47-53을 먼저 읽으세요
지난 월요일부터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 비유의 결론입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이 비유 등을 통해 우리가 고대하는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지를 설명하시고 이제 최종적으로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지 듣고 알게 되었으니 그 다음결단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죠.
하느님 나라, 마태오 식 표현으로 하늘 나라의 완성인 종말에는 마치 어부가 가득 찬 그물을 해변가에 건져 올린 다음, 좋은 것은 골라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리듯이, 세상 끝날에도 하느님의 천사들이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는 분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는 선악, 미추, 진위가 뒤범벅되어 혼재되어 있으나 종국에는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혼재되어 있으니 현재는 답답하고 모호하지만 종말에는 선명하고 명쾌해지게 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어 완성된다는 것,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유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한 말을 다 알아듣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결코 단순히 그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이해가 아닙니다. 납득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의 머리를 거쳐 우리의 마음 속 깊은 데까지 가 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 실제로 적용되고 현실화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압니다. 듣는 것과 사는 것이 얼마나 괴리가 있으며 들은 대로 아는 대로 깨달은 대로 사는 것이 전혀 만만치 않음을 말이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다 알아들었다며 ‘예’라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치러야할 댓가는 아직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예’라는 한순간의 대답과 그 ‘예’를 살아가는 매일의 삶은 동일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삶은 종말까지 계속됩니다. 한국 불교에서 제일 첨예한 논쟁은 깨달음을 두고 이루어진 소위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입니다. 뭐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깨닫고 나서 수행이 필요하냐 아니냐를 두고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깨달았습니다. 수행이 필요할까요? 수행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입니다. 깨달았지만 계속 수행해야한다는 것이 돈오점수이고, 완전히 깨달았다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없고 만일 수행이 필요한 깨달음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 돈오돈수입니다. 어떤 쪽이신가요? 그리스도교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성화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완성되었나요? 삶이 남아 있는한 계속 은총 안에서 애쓰고 구원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이미 구원되었고 구원은 취소 번복되지 않는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말이죠. 어떤 것이 옳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다 알아들었다고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들의 길에는 여전히 실패와 시행착오가 넘쳐났습니다. ‘돈오’했지만 ‘점수’는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요. 구원이 확정되었지만 그 구원을 입증하는 삶은 가변적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알아들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가?…더보기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마태 13,45-46)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입니다. 그러나 선택이란 다양한 가능성을 앞에 두고 이루어지기에 쉽지 않다. 결국 선택은 자유인 동시에 책임이고 자유의 결과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선택은 비교적 한순간이지만 선택의 결과는 인생에 두고두고 남습니다. 삶의 묘미가 여기에 있고 삶의 어려움이 또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상인'을 소재로 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비유는 쉽고 간결하지만 깊은 의미를 가진 비유입니다. 상인은 '좋은 진주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닙니다. 한곳에 머물러 좋은 진주를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어디든지 좋은 진주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사꾼은 남들이 좋다고 감탄하는 웬만한 진주들은 다 만났을 것이고 보석 장사인 만큼 돌아다니느라 몸은 고달파도 꽤 많은 돈을 모았을 터이지요.
그러나 그는 '이만하면 됐다'고 주저앉지 않습니다. 장사꾼으로서의 프로 의식을 갖고 소문 따라 길 따라 자신의 피곤한 몸을 재촉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고집스럽게 좀 더 좋은 진주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그는 눈이 확 뜨이는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났을 때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장사꾼으로서의 자신의 일생을 그 진주 하나와 맞바꾸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제 이 '값진 진주 하나'는 단순히 이 세상의 많은 진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생의 모든 것이 됩니다. 오랜 세월의 수고와 땀방울이 이 진주 하나에 응결됩니다. 그는 '있는 것을 다 팔아' 무일푼이 되었지만, 이 진주 하나만 있으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죠.
이 상인이 누구인가요? 바로 우리를 찾아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니고 마침내 나를 발견하자 가장 값진 진주로 여기며 사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나를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처분하여 당신의 것으로 삼아 주신 것을 진주 상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당신은 주님의 눈에 가장 값진 진주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당신 것으로 삼으려고 하신 진주같은 사람, 그게 나이고 너이고 우리입니다. 그래서 진주 상인의 비유는 내가 누구인지를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려주는 그야말로 진주같은 비유입니다.…더보기
마태 13,36-43을 읽어 주세요.
복음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의 설명입니다. 밀밭에 뿌려진 가라지-선과 악의 공존하고 흑과 백이 교차하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이죠. 일견 하느님의 정의에 위배되는 듯한 이 세상이 마지막 때,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결국 선과 악은 분리될 것이고 의인과 죄인은 자기 삶의 댓가를 치루리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구덩이에 들어갈 자들의 유형을 두 가지로 말씀하시죠. 남을 죄짓게 하는 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에 위배되는 행동과 삶을 스스로 행하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곧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을 때 심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함을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이 죄가 얼마나 엄중한가는 다음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마태 18,6-7)
그렇다면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를테면 내가 사업주로 누군가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돈을 벌고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업주가 고용인들을 박대하고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고용인들은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기에 가정 경제가 어려워집니다. 경제적 문제로 집안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죄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있습니다. 그의 불의함이 죄를 확산시켜 한 가정을 파괴하거나 어려운 처지로 만들 수 있죠. 게다가 그 사업주가 고용인들의 휴일을 방해합니다. 고용인들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인 것이죠.
소비자가 무조건 저렴한 상품만 원합니다. 그 가격에 맞추기 위해 생산자는 제3국의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여 물건을 생산합니다. 공정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죠. 남을 죄짓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죄가 확산되어 간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죄의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공범을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자신만 먹은 것이 아니라 아담을 꼬드겨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그래서 자신이 언제든지 알게 모르게 죄를 조장하고 죄의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예민하게 알아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1요한 2, 9-10)
‘형제를 사랑하는 이는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다.’ 곧 다른 이들을, 형제들을 살피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길이란 것이죠.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다른 이들이 죄의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나의 삶을 살피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통해 다른 이들이 죄를 짓는 상황을 이겨내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은 세상과 주변을 향해서 우리의 시선을 열어야 한다는 것, 곧 나의 구원은 내 문제에만 달려있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심판하실 때 내가 개입하고 연루된 모든 것을 다 포괄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로 인해 죄짓게 되는 이들, 더운 여름날 내 짜증을 받아내느라 참아 주는 이들, 내 무모한 행동으로 마음 속 화가 쌓여가는 이들 주변에 혹시 없을까요?…더보기
요한 11,19-27을 먼저 읽고 묵상합니다.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의 아주 가까운 친구입니다.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이 여정중 휴식이 필요할 때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이 만남은 우정의 친밀함과 친교로 가득차있었습니다.
하여 마르타, 마리아는 라자로가 아플 때 예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는데 예수님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든지 하느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르타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즉시 오지 않았다고 나무랍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후에도 마르타는 예수에게 라자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냄새가 날 것이라고 주의를 줍니다. 마르타에게 예수님과의 친밀한 우정관계는 때때로 구세주라는 별다른 실재와 갈등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이 더 일찍 오지 않았다고 불평을 합니다. 마리아의 눈물은 예수님을 괴롭혔고 그래서 라자로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 마르타, 마리아 사이의 친밀한 감정과 자연스러운 교류는 예수님이 그들의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알려줍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구세주이신 예수께 대한 신앙은 그들이 예수님과 맺은 친구관계의 우정에서 나옵니다.
라자로의 소생사화는 자매의 병든 오빠에 대한 걱정과 잇따른 죽음에 대한 슬픔을 그리고 있는데 자매는 예수님이 친구이기에 그들 가정사에 참여하고 싶어하심을 알았던 것이죠.
2020년까지는 오늘은 마르타 성녀 기념일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베타니아의 세 남매를 함께 기리는 날로 지냅니다. 예수님과 이 남매들과의 관계-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와 성별과 지역을 떠나 친구로 맺어져 있는 것이죠. 실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요한 15,15)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것은 그냥 말뿐, 우리는 별로 예수님을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같은 것이 예수님의 친구라고, 감히! 이런 것이죠.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 마르타는 예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그분께 때로는 응석부리기도하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 곁에 찰싹 붙어서 턱받히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장면이 나오죠. 예수님은 이들 남매의 소소한 일들에도 함께 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의 친구 예수님, 그렇게 되면 믿음의 삶이 훨씬 더 가벼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억지로 하거나 눈치보고 하는 것은 친구끼리 어울리지 않으니 말입니다.
친구 사이는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상을 나눕니다. 같이 의기투합해서 뭔가를 도모하기도 하지만 마음 울적할 때 그저 함께 하며 시간을 나누기도 하지요. 어쩌면 예수님도 주님이라고 성자 하느님이라고 우리의 구세주라고 불러드리는 것보다 ‘친구 예수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것을 더 바라실지도 모르죠. 그분이 그렇게 해달라고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하셨으니 말입니다.
친구 예수님과 한가로이 두런거리며 지내는 괘찮은 시간, 오늘 마련하면 찌는 듯한 더위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요.…더보기
요한 6,1-15을 읽고 묵상하세요
할머니 돌아가신지 이십 년 넘었는데 생각납니다. 가끔 뒷동산 쑥을 뜯어 버무리를 만들어 주셨죠. 어머니 여읜지 몇 년 되었는데 오월 꽃게가 제일이라며 끓여내오신 달디달았던 꽃게탕 맛은 이렇게 선명합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소울 푸드가 팍팍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죠. 십대까지 먹은 음식을 평생 그리워하고 이십대까지 들은 음악을 평생 듣고 산다고 하죠. 입에 들어오는 것은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열량과 영양분만은 아니고 귀에 담기는 것은 리듬과 가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그 사랑이 어린 추억의 힘이기도 하고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지금을 만들었다는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죠.
오병이어와 열 두 광주리, 그 들판에서 많은 이들이 맛본 것은 무엇일까요?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던 한 접시의 음식만은 아니겠지요. 물론 복음은 허기를 면하게 된 그 군중이 예수님의 능력에 열광하여 급기야 임금으로 모시려 한다는 정치적 문제가 야기된 것으로 마감되긴 합니다. 허겁지겁 주린 속을 채우고 나니 이내 든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을 법 합니다. 저분과 함께라면 다시는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겠다는 기대. 그런 기대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알게 되겠죠.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봄향기 가득한 쑥버무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맛보고 싶은 꽃게탕이야 이름난 맛집 가면 언제라도 사먹을 수 있는데 진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그 시절 할머니, 어머니가 그리운 것이라는 것을, 입맛은 그 사랑을 환기시키는 그저 하나의 매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들판에서 함께 다투지 않고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먹을 수 있었떤 빵과 물고기로 차려진 그 음식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이루어내신 분을 백성들도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밖에요.
빵으로 오신 주님, 성체를 모시지 못함이 아쉽고 아프고 그래서 그립고 간절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주 본당 어린이들이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여러달 교리 공부도 하고 여러 활동도 하면서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해왔었지요. 그런데 지난 주일 첫영성체 후 한 친구의 반응, ‘음, 별맛이 아니네요’. 아마도 그 녀석은 궁금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저 얇은 빵도 아닌 것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어른들이 저 작은 것을 먹고 눈감고 기도하던데 무슨 기도를 바칠까? 빵도 과자도 아닌 저것이 과연 예수님일 수 있을까?
아마 시간이 흐르고 살아가면서 온갖 일을 겪고 난 후에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먹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시다는 하느님이 도대체 어떻게 그리하실 수 있는지.
이미 볼 수 없는 할미가 그립고 어미가 보고 싶은 것이 없는 살림에도 내 새끼만은 배불리 맛있게 먹이고 싶은 그 절절한 마음이 수시로 생각나는 사람은 주님이 그립고 보고 싶고 모시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주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겠지요. 그 그리움이 우리를 오병이어의 들판으로 아니 주님 계신 집으로 향하게 합니다.…더보기
밀밭의 가라지 비유는 혼돈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는 말은 우리가, 또 세상이 본래는 선하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지음받은 그 모습은 ‘보시기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살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죄의 어두운 유혹을 받아들였습니다. 죄는 늘 매혹적인 달콤함으로 다가오기에 단호히 저항을 하지 않으면 죄에게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본래적 선함을 믿습니다. 매연에 찌든 하늘을 보고 살다가, 어느 날 환하게 개인 하늘을 보면 괜히 마음이 싱그러워집니다. "아, 하늘이 본래 푸른 것이지." 푸른 하늘을 보면 우리 마음조차 맑게 갭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하늘처럼 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 입은 마음의 상처들과 고통 때문에 우리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고, 짙은 구름이 깨끗한 마음을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 착하게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 마음이 절로 야박해집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넋을 놓고 있다가는 악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은 농부들이 '잠든 틈'을 타서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합니다. 잠들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들이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속삭임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가 또 주의해야 할 것은 가라지가 밀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다 자라기까지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가라지는 사이비(似而非)입니다. 비슷하지만 아니니까요. 사이비들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곧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맑음과 착함, 그리고 소명을 소홀히 여길 때 슬쩍 우리 곁에 다가섭니다. 물론 우리 영혼을 노략질하기 위해서지요. 사이비들이 주로 기생하는 곳은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욕망'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그들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재산까지도 도둑질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지요.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 욕망을 채우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려는 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배권 아래 두려는 것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한 말이 그러니 이해가 됩니다. "가라지를 뽑아낼까요?" 하지만 주인은 그냥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가라지의 존재를 몰라서도 아니고, 그것을 귀히 여겨서도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때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들을 보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사실 이런 욕구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맘에 맞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시원하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서로를 밀쳐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서 솟아 나온 어둠과 미움이 결국에는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절대적인 선이 어디 있으며, 절대적인 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라지를 뽑아내겠다고 무모한 용기를 보이다가 곡식까지 뽑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을 놓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비판도 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쉽게 지치게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질 않습니다. 가라지는 추수 때에 주인께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 했습니다. 알곡이 힘을 못쓰면 가라지가 기승을 부립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다워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열리는 세계입니다.…더보기
세계 역사는 몇 개의 사과와 함께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선악의 열매(대개 사과로 묘사되죠), 과학적 세계관을 만들어낸 뉴튼의 사과, 또 정보의 세계와 인간을 연결하는 아이폰의 사과, 동화와 전설의 산물이나 로빈훗과 백설공주의 사과까지. 아오모리의 유명한 기적의 사과도 있습니다. 기무라 아키노리란 농부가 재배한 사과인데, 그 사과는 예약 필수 사과입니다. 기적의 사과란 이름 붙은 것은 엄청난 저장성을 가져서랍니다. 심지어 잘려진 채 냉장고 위에 올려진 사과가 2년이 지났는데도 조금 마르긴 했어도 달콤한 향을 여전히 간직하더라는 데서 유래한 명칭, 기적의 사과 불멸의 사과랍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방부제에 담가서가 아니랍니다.
현대 농법이 농약으로 화학비료로 유지되는 것에 회의를 느낀 농부는 생각합니다.
내 농사는 사과의 생명력을 죽이고 있구나. 농약은 벌레도 죽이지만 대신 사과의 생명력 저항력 영양분 맛을 잃게 만들기에 효율성은 높지만 그 부작용도 많만치 않음을 느낀 농부는 무농약 사과 재배를 시도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파산에 직면한 그는 죽으려고 산에 올랐갑니다. 가을을 맞은 도토리 나무, 거기는 농약도 비료도 없는데 어째서 산에 도토리는 왜 저렇게 토실토실 도토리 맺을까? 아, 땅이 다르구나- 흙이 다르구나! 흙을 파보니 땅은 좋은 냄새에 온갖 미생물이며 지렁이가 꿈틀, 두더지굴이 사방에 있는 그야말로 생물의 낙원임을 발견하죠. 엄청난 상태계가 흙 속에 있음을. 그래서 건강한 도토리 나무의 비결은 좋은 종자가 아니라 건강한 땅에 있다는데 착안합니다. 흙이 생명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기 과수원의 흙의 상태를 바꾸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쏟아붓죠. 그리고 기어이 기적의 사과를 만들어 냅니다.
말씀의 씨가 동일하게 떨어졌는데 결과가 다르다-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씨는 그만 말라비틀어지고 어떤 씨는 나오다 말고. 그런데 어떤 씨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결실을 맺는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뿌려진 것은 똑같은 씨, 들려진 것은 같은 말씀. 그런데 뭐가 달랐나요. 뿌려진 땅이 다르고 들려진 사람이 달랐던 것이죠.
농부 기무라는 이렇게 했답니다. 그는 밭을 그냥 내버려 두었어요. 3년 지나니까 지렁이 메뚜기가 나오더랍니다. 사과는 아직 신통치 않았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9년 만에 사과에 제대로 꽃이 피어났답니다. 1991년 커다란 태풍이 강타합니다. 피해가 막심하죠. 다른 과수원의 사과는 다 떨어졌는데 기무라 과수원 사과는 떨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가지에 달려 있더랍니다. 합격사과, 기적의 사과의 신화가 시작되었다죠. 그 사과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그 땅의 자양분을 다 흡수했더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기무라의 사과 나무 뿌리는 다른 과수원 사과에 몇배 더 깊게 넓게 퍼져 있더라는 것이죠.
돌밭은 무엇이 없나요. 깊이가 없어요. 그만큼 흙이 중요합니다. 풍화와 침식, 부식의 결과로 생겨난 흙.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식토 1cm 만들어지려면 100년 넘는 세월이 필요하답니다. 옥토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기나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하죠. 기도와 눈물과 고난과 인내와 아픔이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 인생에서 농약치듯 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유혹입니다. 짧은 기간 중 무엇을 이루려는 얄팍한 마음 가지지 말라는 것이죠. 땅을 살리는 것은 시간의 순리가 있어야 합니다. 한술 밥에 배부르면 안됩니다. 긴 호흡, 먼 계획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순간 반짝하면 뭔가 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좋은 땅은 썩고 으깨어짐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우리 삶에서 그렇게 썩고 으깨어지는 시간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옥토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때 태풍을 이기고 병충해를 이기고 가뭄도 버텨내는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음을 안다면 힘겨움은 벅참의 다른 말이라는 것으로 위안삼아야 하지 않을까요.…더보기
마태 20,20-28을 먼저 읽으세요.
처음부터 그랬을 리 없죠. 누구나 다 주님을 따르고자 분연히 나서는 그 순간에는 결연했죠. 오직 주님만을 따르고 오직 교회에서 봉사하고 하느님 백성이 내게 주신 나의 몫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죠. 따지고 보면 불순한 의도는 별로 없었어요.
마태오도 돈을 거머쥘 수 있는 세리라는 자리를 떠났어요. 오늘 예수님의 곤란거리가 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도 생계수단이던 배와 그물을 던져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만, 그 마음으로 따랐겠죠.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간사해요. 슬금슬금 딴 마음이 첫마음을 밀어낸다는 것이죠.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예수님의 세력이 대단해져가요. 사람들이 따라와요. 명성을 얻어요. 인기가 치솟아요. 제자인 우리도 대단해지는 것 같아요. 곁에 있으니까 점점 으쓱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버린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얻게될 미래가 먼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 욕심이 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라니까요. 누구나 처음은 얼마나 순수하고 그랬는지 몰라요. 재물과 명예와 자존심 다 내려놓고 헌신하는 그 마음으로 주님께 나왔죠. 그런데 그 순수가 불순으로 변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요. 다 지난 줄 알았는데 악한 옛 모습이 언제든 고개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보좌 양쪽에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앉아야겠습니다- 했던 제베대오의 그 아들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윤리적 낙차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는 두 집단이 적어도 5% 정도는 차이가 나야한다는 사회학의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더 자선을 많이한다고 세상이 느끼려면 비그리스도인보다 5%는 더 기부해야한데요. 가톨릭 신자들이 더 가정생활이 탁월하다 할 수 있으려면 이혼율이 5%는 더 낮아야 한데요. 5% 별것 아닌 것 같쟎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느냐?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죠. 윤리적 격차가 있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되는 경우 혹은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단지 5%인데 그것이 그리도 어렵습니다
지독한 명예욕의 표출을 오늘 볼 수 있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사실은 신앙을 빙자한 입신 출세주의를 계속해서 경고하시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변방 아르헨티나에서 바티칸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세속적 시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성좌에 앉은 교황님은 계속해서 경고하십니다. 교회 안에 만연한 교회 정치가 교회를 더욱 세속적 탐욕으로 물들이고 있으니 우리는 관료가 아니라 사목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끊임없이 깨우치시는 것이죠. 자리다툼의 꼴사나운 모습이 펼쳐지면서 복음은 훼손되고 십자가는 밀려나게 된다는 것을 절감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야고보 사도 축일에 그분을 공경하는 날에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이 합당한가 싶어요. 이거 축하하고 기리자는 것인지 꼬집자는 것인지 좀 헷갈립니다. 그러나 진정 합당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야고보 사도가 주님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던지는 것이었거든요. 그것은 정말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일이었죠.
예수그리스도의 핵심 멤버들 사이에도 다툼이 일어나는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될 수 있습니다. ‘first in, last out’, 이것이 화염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의 격언이랍니다. 먼저 뛰어들고 맨 마지막에 화재현장에서 나오라! 그 위험한 장소에 가장 먼저, 그리고 다른 이들 다 구출되고 맨 나중에 나오는 것, 이것이 소방관들의 사명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도 그것입니다. 제일 먼저 돌격 앞으로 선봉에 예수님 당신이 서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맨 마지막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고 끝까지 남아 있겠다는 그 마음, 모두가 품은 첫마음이 끝마음까지 가기를.…더보기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1-9)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씨앗이 여러 군데 뿌려짐을 전제로 합니다. 씨가 내려지는 파종될 땅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죠. 씨앗은 하느님이 건네시는 말씀이라고 했으니 말씀을 듣는 이들, 인간 군상의 다양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듣지만 그 배경이 각각 다릅니다. 다른 인간들은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어도 전혀 다른 결과를 산출합니다. 동일한 원천의 상이한 결과인 것이죠.
그런데 이 비유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하구나, 그런데 다양한 와중에도 좋은 결실을 맺는구나. 풍성한 결실을 맺는 옥토 신앙인이 되어야겠구나-라는 교훈적 차원에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관한 내용의 일환이기 때문이죠.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오시는가, 그 과정이 그냥 수월하지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뿌려진 씨앗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기도 합니다. 뿌려진 씨앗은 새들에게 쪼아먹히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그뿐입니까? 척박한 돌밭에서 메마름을 겪기도 합니다. 깊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는 것이죠. 가시덤불의 날카로운 공격도 있습니다. 그렇게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세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고독하고 암담하고 헝클어진 상황 안에 힘겹게 자라나는 것이죠.
저항이 없으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대적하는 힘에 맞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쉽지 않은 것이죠. 하느님 마저도 당신 나라를 이땅에 세우기 위해 그런 힘겨움과 고단함 위험을 감수하고 계십니다. 물론 쉬운 길 더러는 있겠습니다. 뿌려진 땅 전체가 옥토라고 한다면 그 땅의 기름짐이 씨앗을 품고 넉넉히 자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술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펼쳐가시면서 너무 힘겨운 순간을 겪으셨기에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배척을 겪으셨죠. 주님께 대한 오해도 넘쳐났죠. 지근거리에 있는 이의 음모와 배신도 있었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로 시작하셨는데 곳곳이 장벽이고 처처가 함정인 것이죠. 그러나 어딘가 있을 좋은 땅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백성을 찾아오셨는데, 그들에게 저항을 받으십니다. 이미 불의하게 변해 버린 사람들과 사회 구조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정착되는 것을 가로막으려 합니다. 이미 씨앗이 뿌려져 움이 튼 싹마저 잘라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점점 더 번성하여 온 세상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더러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숨 막히게 하고,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라 버리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수확 철이 되면 어김없이 뿌린 씨를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복수방식이죠. 엄청난 결실을 맺어서 이 씨앗이 뿌려진 땅이 좋은 땅임을 입증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가해지는 저항에 대한 찬란한 복수. 예수님의 복수였죠.…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6-50)
난해하기 그지없는 복음이어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봐야 합니다. 기껏 걱정 되서 찾아온 어머님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모님을 비롯한 예수님의 친척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처음에는 이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해 한동안 난감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예수님 말씀의 이면에는 작은 시냇가에서의 평화로움을 떨치고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넓은 바다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비장함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한 곳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 나자렛은 너무나 좁은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양에 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만왕의 왕, 온 세상의 주인,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이시셨기에 언젠가 한번 세속적 인연의 끈을 끊는 아픔이 필요했습니다. 탈바꿈이 필요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때문에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아쉽고, 정말 송구스럽고, 정말 안타깝지만,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을 뛰어넘으실 때가 온 것입니다. 세상 만물,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서서히 혈육의 정을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배경의 표현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인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습, 둘 다 ‘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꽤 슬픈 복음을 묵상하면서, 혈육의 정을 단호히 끊고 먼 길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도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의 인생길, 신앙생활, 그야말로 나그네길입니다. 늘 떠나야 합니다. 보다 향상된 삶을 향해, 보다 본질적인 삶을 향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떠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이 정체되어 있으면 썩기 마련이니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한번 실천하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보다 자주 떠나는 것입니다. 나를 묶어놓는 악습, 과거의 틀,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거듭 성찰해봐야 할 것이며, 거듭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 죽음보다 싫은 것이 떠남이나 떠나보면 기적 같은 일이 거기서 생깁니다.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시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혜안이 열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하느님을 만나 뵙기도 합니다.
철저하게도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 그토록 정겨웠던 인연마저도 훌훌 털어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묶인 대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하느님입니다. 비록 모순투성이고, 갖은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여전히 높아야 하겠지요.…더보기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20,15)
올해부터 마리아 막달레나를 공경하는 날은 전례 등급이 몇년 전 높아졌습니다. 그전에는 기념일이었는데 20717년부터 축일로 격상되었습니다. 2016년 6월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는 교령 ‘사도들의 사도’를 통해 전 세계 교회가 이날을 축일로 장엄하게 지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아니 부활하신 분이 당신을 알아보도록 부르신 첫 번째 인물, 좌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도록 명을 받은 첫 번째 인물인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녀를 ‘사도들의 사도’라고 부르셨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명칭을 다시 언급하면서 확인하였습니다. 남성 중심의 교계 제도가 성립되면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억압되면서 ‘사도들의 사도’라는 이 명칭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을 격상하면서 이 명칭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는 성녀의 증거자로서의 소명과 위치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였지만 대통령도 여성이었고 각계에서 여성들이 거둔 놀라운 도전과 성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완고한 가부장적 시스템과 성차별적 관행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점증합니다. 근본적으로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 자체가 불경스럽고 교도권에 반하는 것으로 논의 자체를 금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심지어 전에 사목하던 본당에서 어린이 복사단에 소녀들이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며 못마땅해 하던 분들도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교회 안에서 모성적 돌봄에 국한하면서 주변화 시키는 편견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사도들의 사도’로 예수님의 부활의 첫 번째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이런 저런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오래 걸리더라도 더 많은 논의를 통해, 분명 갈등도 있겠지만 피하지 않으며 맞설 때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부활의 첫번째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큰 특은을 입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충실한 믿음의 사람, 새벽을 가르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갈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있고 없음의 문제였던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여자이기에 특혜가 있어서도 안되나 여자이기에 불이익이 있어서도 안됨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사람의 문제를 왜 성별의 문제로 보는지 참 모를 일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재발견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모든 여인들, 자매들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믿음 안에서 주님께 더 많이 헌신했던 이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냅니다.…더보기
영국 BBC 예수님의 삶을 조명한 다큐를 만들면서 유다인들의 유골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복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푸른 눈, 긴 머리 지닌 멋진 백인 꽃미남 청년과는 달리 그 얼굴은 사뭇 충격적이었습니다. 중동의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에 뭉툭한 코, 부릅뜬 눈매, 곱슬머리로 거칠고 투박한 그러나 친근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 우리는 주님을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으로 고백하지만 후자, 곧 그분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잊어 버리곤 합니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거룩함 일색인 주님으로 높여드리면서 실은 우리들과의 차이만을 극대화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웃으시더라도 미소정도 지으실 뿐, 너무 진지하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모티브가 예수님이 웃으셨을까를 두고 벌어지는 음모일 정도이죠. 웃음은 그분의 위엄에 걸맞지 않는다 여기지만 그러나 상상해볼 수 있죠. 제자들과 장난도 치고 깔깔거리시고 천진난만하기도 하시고 엉뚱한 일도 가끔 하시고, 우리처럼 꾸벅 졸기도 하시는 예수님.
주님은 함께 호흡하고 웃고 울며 고통당하신 너무나 우리를 잘 아시는 분, 하여 우리 연약함도 아시는 분이시죠. 우리의 한계를 당신도 경험하셨기에 쓰러지고 일어섬을 반복하는 인간 존재를 아십니다. 인간의 눈물, 피조물의 감정을 하느님이 알고 계심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시기에 모르실 거야! 아니요. 알고 계십니다.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지친 마음, 연약함, 그 눈물과 삶의 그 피곤함을 다 아십니다.
이 땅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다 경험하고 다 부딪쳤기 때문이죠. 인간의 한계의 끝인 십자가의 죽음과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셨기 때문이죠.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피곤에 지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던 그들이었음을 아신 것이죠. 제자들이 보고해더니 그러셨다는 것이죠. 그들도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열심을 다하고 온 뒤였습니다. ‘너희들 밥못먹었지. 힘들었지. 고생많았어. 잠깐 여기 앉아. 좀 쉬어라. 한숨 푹 자.’ 엄마가 아들딸에게 안타까워하면 그러시듯 그들을 맞아주신 것이죠.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신 것이죠. 우리 삶이 얼마나 무겁고 수고스러운 것인지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누구든지 상관없다는 것이죠. 그 짐을 들고 주님께 온다면 쉬게 해주시겠다.
학교 때 수업시간마다 자는 친구들, 쉬는 시간에는 날아다녀요. 공부할 때는 죽은 듯 주무셔요. 그런데 미동없이 자는 그분들이 일년 지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나요. 훅 자라서 책상이 작아서 힘들데요. 신앙도 죽을 듯 기도하고 활동할 때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멍하니 있는데 밀려오는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을 때 있죠. 하느님께서 건드리시는 것은 기도하고 주님의 일에 몰입할 때만은 아니기에 일할 때와 쉴 때를 잘 구분해야죠. 기도하는데 온통 마음은 일 걱정, 일하면서는 기도해야하는데 그런 걱정-결국 분간못하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라 하셨지만 잠들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사도행전 12장에 헤로데 감옥에 갇힙니다. 내일이면 처형될 날입니다. 처형 전날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는 자고 있었데요. 심지어는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할 정도로.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깊이 잠들었어요. 둔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자신감이 있는 겁니다. 까짓것,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죽으면 살리라-는 믿음. 죽음의 절망가운데 편히 쉴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 것이죠. 믿음이 없으니 기도해야할 때도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가 믿음으로 가득차니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잠이 듭니다.
쉼없이 뛰어가는 세상일지라도 믿음 안에서 주님 안에서 쉼을 잘 누릴 줄 아는 것, 잘 쉬는 것도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더보기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2,14-21)
바리사이들이 이제 본격적인 예수 타도에 나서려고 모의를 꾸민다고 복음은 기록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회의하여 생각을 바꿔 우리와 한편이 되라 종용해도 예수께서 꿈쩍도 안하시고,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해도 좀체 걸리지 않으니까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지요. 한편이 되려고 하지 않는 예수, 굴복하려고 하지 않은 예수, 눈에 가시같은 예수, 이 예수라는 자를 없애야만 하겠다고 적대자들이 결집하였습니다. 곧은 것은 꺽이는 것인가요?
보통의 경우, 이 정도의 반대가 닥치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이 저 정도까지 나오는데 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강력한 반대 앞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약해집니다. 물러나고 싶습니다.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그만 포기하고 싶습니다. 쉬운 길을 찾아서 모두가 환영하는 자리에 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것이 유혹입니다. 모두가 찬성하는 쪽에 나도 서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도 어떠셨을까. 집요한 반대자들이 저렇게까지 음모를 꾸미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이 길로 가야하나 어쩌나, 바리사이들 의견에 그냥 동조해버려. 한꺼번에 그길로 가는 것은 어찌보면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포기란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 다 이루었다-하시기까지 계속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끝까지 믿어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울 때 포기하고 싶지만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면 안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덕분인 것이죠. 나는 실망할 지언정 하느님께서는 내게 실망하지 않으신다면 아직 포기가 너무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포기하시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시는데 내가 먼저 포기한다면, 내가 지레 실망한다면 그것은 너무 앞질러가는 불신의 태도와 행위인 것이죠.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앞질러서야 되겠습니까? 하느님만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 틀렸어, 다 끝났어, 길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꺾지 않으셨는데 꺾였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끄지 않으셨는데 물을 부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전히 내게 희망을 걸고 계시는 한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근심하십니까?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아직 더 남아 있다는, 아직 그 때가 아니라는 호소를 못들은체…더보기
견진 준비 9일 기도 여덟째 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오늘 미션이 늦어졌습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내일이면 우리는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특별한 날이기보다는 감사의 날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과 내일은 9일 기도 이외의
특별한 미션이 없으니
이 글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열심히 하신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돌아다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고백이
또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돌아보면 은총의 시간 아닌 것이 없었음을
그리고 가능하면 이제는 돌아보기 전에 은총의 시간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여러분의 견진성사를 미리 축하드립니다.
부디 주님과 동반하시기만을 기도합니다.
힘겹거나 아플 때
특별히 부르시기 전에 이미 곁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시기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빛과 소금이었음을 알아 채시기를
부족한 기도 안에 지향으로 바칩니다.…더보기
마태 12,1-8을 읽고 묵상합니다.
안식일 논쟁을 다룬 말씀입니다.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 바리사이들이 이를 두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선언하십니다. 이 다음에는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바리사이 원래 얼마나 순수하고 엄격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 말기쯤 이들은 종교쇄신을 부르짖으면서 좋은 의미에서 구별된 자, 바리사이파를 형성합니다. 다른 이들과 구별된 조금 다른 열심을 보여야겠다! 그래서 단식 몇 번 해야 하나, 주에 한 번이로군, 그러나 그것 가지고 되겠니, 세 번은 해야지. 기도 얼마나 해야지. 얼만큼 해야지? 그것가지고 되겠니. 더해야지! 이런 식으로 엄중한 규칙을 자꾸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열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다 더 나아가 숨이 끊어지는 사람 두고도 죽었니 살았니, 먼저 붕대 감아주지도 않고 최소한 지혈만 하고 하기전에 그것 따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그정도로 구별되기를 바랬던 것이죠.
예수님은 일부러 이들과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물론 세밀한 규칙이 좋은 점이 있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지면 안되지만 형식 자체는 꽤나 필요하고 요긴하기도 합니다. 일곱째 날 안식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일정한 형식에 담아서 신앙을 보존하는 것, 안식일은 규정 자체로는 아주 좋은 일입니다. 안식은 하느님의 창조가 완전했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날을 인간에게 축복의 날로 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식일은 무엇인가 안하는 날로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이제부터 나만 쳐다봐’. 그러면 이십사 시간 밥도 안먹고 그 사람만 오로지 바라보라는 말인가요. 아니요. 문자적으로 이해하니까 해괴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저차 짓누르는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짐 이들 내게 오라’ 이 말씀은 그래서 그 율법에 짓눌린 이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고 사랑의 멍에, 십자가의 짐을 지라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새롭게 하셔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기쁘게 살도록 축복받은 자인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안식일로 주일을 지킵니다. 그런데 자꾸만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날은 하느님 앞에 모여서 그분의 창조의 엄위하심을 찬양하고 우리에게 내리신 구원을 기억하면서 그 사랑 앞에 모이는 날임에도, 거꾸로 우리는 뭔가 하느님께 해드려야만 하는 날이 되어 버렸다. 주일을 다시 회복해야 교회가 살아납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아니 금요일까지인가요 그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만 하루만큼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을 이웃들을 위한 시간을 그러니까 사랑과 나눔의 시간, 예배의 시간을 마련하라는 것이죠. 주일까지 자기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잊은 자의 삶입니다. 누가 주인이십니까? 사람의 아들,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주일에서 주일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일 지나면 다음 주일까지를 사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주일 지키는 것 아니라 기쁨으로 설레면서 주일을 지낼 때 내가 드린 주일이 나를 지켜줍니다. 모든 날이 주님이 주인이시지만 왜 특별히 주일이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 하셨는지, 우리 다시 주일의 기쁨을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어느 카드회사의 광고 카피였습니다. 한 해 내내 직장에서 일에 치어 있던 이들에게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의 환상을 자극하는 그래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문구가 되었죠. 고생 끝에는 낙(樂)이 온다는 기대가 있어야 팍팍한 인생을 걸어갈 힘이 생깁니다. 합당하고 만족스러운 보상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현재는 더욱 견디기 힘든 부담이 되고 말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붙들고 기진한 삶을 버텨 나갑니다. 그래서 어차피 안 될 줄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은 탓에 ‘희망 고문’이란 말까지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조차 없으며 너무 힘들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떠날 자격이 충분합니다.
사실 고생스럽게 무거운 짐을 지며 허덕이는 이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안식을 약속하시는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 안에서의 쉼, 평화롭고 안온한 안식을 원합니다. ‘과로 자살’(과로사가 아니라)이라는 신조어가 괜히 생기는 것은 아니죠. 우리는 숨 가쁜 질주에 지쳐갑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안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최종 목적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안식은 지친 삶의 회복, 단지 휴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 업적을 관조하며 감탄하고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힌 일한 당신, 안식하라-인 것입니다.
덴마크의 칼 하인리히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1834-1890)가 그린 ‘무거운 짐 진 자 모두 나에게 오라’를 감상하시면서 두 팔 벌린 주님의 초대를 수락하는 하루가 되셨으면 싶 습니다…더보기
견진 준비 9일 기도 일곱째 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밤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아침에 오가는 길 편안하시길 빕니다.
오늘 저녁은 견진 성사 마지막 강의날입니다.
어느새 마지막이 왔습니다.
그동안 매일 조금씩 아침 미션을 해보려 하신 분들도 있고
아마 무심히 그냥 지나치신 분들도 있겠지요.
아무튼 좋습니다.
이 한달의 여정이 지금 당장 열매를 맺지 않는다해도
결국은 좋으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어주실“(로마 8,28)것입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이루는 선함이기에 그 모든 것 안에는
우리의 거절, 외면, 불성실, 무관심 등등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그냥 하나의 과정으로 견진성사를 받아들인다해도
막상 시작하긴 했지만 별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해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대충 심드렁하게 생각한다해도
그래도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을 착실하게 만들어 가고 계실 것이죠.
그러한 하느님의 주도하심을 조금이나마 느끼는 하루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견진 준비 9일기도 성령 송가와 묵주기도를 바치시고
빗소리 들으시며 이 비가 나의 허물과 죄를 씻는 비라고 여기며
하루를 지내시길 바랍니다.
생활성가 모음 링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qP9Ia4pQH0&t=56s…더보기
마태 11,25-27를 먼저 읽으세요.
두 신부님이 같이 살았어요. 한 양반은 일명 똑 신부님, 일도 어찌나 야무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바지런하기까지 합니다. 신자들 모두에게 아기부터 할머니들에게까지 싹싹하고 다정합니다. 생긴건 또 얼마나 희멀건한게 꽃총각입니다. 성격도 아쌀하여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합니다. 강론도 똑똑 뿌러지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합니다. 그야말로 완벽한거죠. 아, 신부만 아니었더라면 사위 삼고 싶다고 저마다 다 탐을 내는 그런 신부. 세상에 다시 없는.
다른 한 친구는 뭔가 핀이 빠진 것 같아. 늘 바보처럼 웃고만 다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마냥 허허실실하고 일도 대충대충합니다. 누군가 늘 뒤치다꺼리해야하고, 말주변은 또 그리 어찌 없는지. 강론도 느릿느릿 두어 마디 하고 끝입니다. 어째 뭐가 모자라도 단단히 모질라보입니다. 보기에도 답답한 지경. 본당 구역장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참 장가 안간게 다행이라고. 어느 여자 고생시킬 뻔했다고. 그래서 그 신부 없는데서는 멍 신부님, 멍 신부님 그렇게 부릅니다. ‘우리 멍신부가 오늘 또 사고 쳤다면서. 우리 멍신부가 말이야. 수단 자락 밟고 넘어졌다면서.’
그런데 말이죠. 사람의 진면목은 있을때보다는 없을 때, 떠난 빈자리가 말해주는 겁니다.
똑신부님 자리는 다른 똑똑이가 다시 와서 채우면 되거든요, 그런데 멍신부님 떠난 자리는 그렇게 그립습니다. ‘날이 날이 갈수록 생각이 나네요.’ 그야말로 편한 친정 오빠같았던 멍 신부님. 그 속도 없고 철도 없던 웃음이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겁니다. 철부지 같은 그 모습이 주었던 그 따스함이 떠나고 나니 새록새록 떠오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 이 똑똑이들의 특징은 뭡니까? 하도 대단히 지혜로운 나머지 주로 뭐해요. 남들한테 주로 하는 것이 뭡니까? 뭐든지 지시하고 가르치고 시키고 평가 판단하고 그런게 주업무이죠. 그것까지는 좋다쳐요. 나중에는 머리끝까지 똑똑해서 하느님도 막 가르치고 지시하려고 합니다. ‘하느님 말이죠. 요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야 하고 저 사람은 한번 기를 팍 꺽으셔야 하고’ 매사가 그런 식이죠. 이러쿵 저러쿵, 하도 하느님께 이래랴 저래랴 하니까 하느님이 속으로 그러셨다쟎아요. ‘니가 하느님해라.’ 하느님도 똑 신자 앞에만 서면 왜 자꾸 작아지시는가? 하느님도 그런 신자만 가뜩 있는데는 피곤해서 잘 안가시려고 하지 않을까요.
잔뜩 조이면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느슨하게 풀어놓을 줄 알아야 오래갑니다. 긴장의 강도가 높으면 사람도 상하고 물건도 상하기 마련이죠. 철부지들은 조이지 않고 풀어놓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일등 엄마가 있는 집안 어떻습니까? 집안이 무슨 훈련소 같아요. 제시간 딱딱 맞춰서 밥먹어야 해요. 옷하나 벗어놓는데도 신경써야 해요. 뭐든지 반듯반듯하고 일사불란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그냥 되면 좋은데 그렇게 안되거든요. 엄마가 그렇게 만들려고 만날 신경질내요, 스트레스 팍팍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잘되나 어쩌나 감시가 일상화되어 있어요. 그냥 흐뜨러 놓는 것이 훨씬 편한 법인데. 집안 공기가 그러니까 슬금슬금 애들은 바깥으로 돌게 되는 됩니다. 남편도 언제부턴가 일만한다고 야근하고 출장가고, 어째 좀 느낌이 이상합니다. 집에 돌아오기 싫어하는 그 마음을 알아줘야죠. 훈련소는 싫은 것입니다. 외갓집이 좋은 것이죠. 느슨하게 풀어줘서 숨쉴 공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왜 지혜롭다는 이들, 슬기롭다는 이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우선권을 받습니까? 철부지들은 하느님 앞에서 힘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철부지들 앞이 편하고 좋으신 것이죠. 철부지의 영성, 그것이 주님 나라를 앞당기는 촉매가 됩니다. 철부지처럼. 철모르는 사람으로 살아도 큰일나지 않죠. 예수님이 철부지 때문에 이 기쁨의 기도를 벅차게 바치셨음을 기억합니다.…더보기
견진 준비 9일 기도 여섯째 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궂은 장마비가 많이 내린다 합니다.
마음만은 보송보송하면 줗겠네요.
내가 좋은 것을 가지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생겨납니다.
믿음도 그러하니
이제 구원된 삶을 살게된 이는
반드시 그 믿음을 전하고픈 충동과 소명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선교는 광고가 아닙니다.
선교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한 하느님 당신 자신이 선교이십니다.
오늘의 미션은 이 선교적 교회, 신앙인의 선교를 알아봅니다.
영상 강의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강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를
보고 일상의 선교를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AMAVjn0Ocw…더보기
마태 11,20-24를 먼저 읽습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예수님의 독설과 저주, 한탄과 분노가 쏟아졌는가? 왜 그 고을들은 불행하다고 하셨을까요. 오히려 티로와 시돈, 이방인들의 도시였는데 그곳이 오히려 심판 날에 더 견디기 쉬울 것이고 악행의 대명사 소돔이 오히려 더 낫다라고 하는 평가를 들었던 것일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들입니다. 벳사이다는 베드로 안드레아 형제 필립보의 고향이고 카파르나움 예수님의 활동 근거지 되는 마을들이에요. 티로 시돈에는 전해지지 않은 예수님 복음이 일차적으로 전해진 마을들이죠. 결과는 어떠했느냐. 그 마을들에 전해진 복음 선포가 실패해버렸다는 것이죠. 기적이 베풀어진 곳임에도 기적만 맛보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더란 것이에요.
예수님이 전력을 쏟아 당신의 기적들을 보여주신 까닭은 그 기적에 취해서 놀라워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대하셨던 것일까요. 기적을 목격한 이들의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기대하셨어요. 그런 기대에 이 마을들이 전혀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망스럽게도.
루카 복음 12,48의 충실한 종 불충실한 종의 비유의 결론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그렇다면 누가 더 많이 받았냔 말이에요. 우리 교회 이천년동안 하느님의 은헤를 더 많이 받아온 것이죠. 살아온 세월 만큼 각자가 각 공동체는 주님이 내려주신 그 은혜가 세월만큼 쌓여있는 것이죠. 그런데 받았는데 입 딱 씻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더란 말이죠.
예수님이 보답을 바라시기 때문이 아니죠. 은혜를 체험한 이에게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쏟아져 나와야 하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고백이 절실하다면 반드시 어떤 변화 회개의 열매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완고하고 너무 무감각하면 이것이 주님의 은혜로구나하는 것을 망각합니다. 내가 이 은혜를 받은 것은 다 받을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은혜가 없다고 여겨지쟎아요. 그러면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 안주시느냔 거에요.
하느님께 적용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요 누구한테 선물 주고 싶냐면 반응이 좋은 사람에게 주고 싶어요. 별것 아닌 것 받고도 너무 감사해서 오히려 준 것이 미안할 지경이 사람, 다음번에는 더 좋은 것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뭔가 우리로부터 되돌려 받기를 원하시는 것 아니죠.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일종의 투자죠. 다시 받기위한.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회개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가끔 그런 친구들 있쟎아요. 마치 공부하는 것이 부모를 위해서 부모가 자식들 자랑스럽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말해요. 내가 열심히 해서 이런 성적 거두고 뭔가 대단한 것 성취하면 부모님의 자랑이 되는 것이니까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죠. 아니요. 결국 자기 위한 것이란 말이죠. 받았습니다. 그럼 자격도 없는 감히 바랄 수 없는 내게 주셨기에 너무 외람되고 죄송하기도 하고....그래서 무엇인가 자꾸 하고 싶은 마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주님 앞에 머물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바라보고 싶고 찬양드리고 싶고....그런데 그 마음이 전혀 없어진다. 그러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저주들은 도시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가 내렸음에도 메마른 땅처럼 그런 무감각한 영혼이 된 것이죠.…더보기
견진 전 9일 기도 다섯째 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성령송가와 묵주기도로 견진 전 9일 기도를 바치세요.
화살기도를 숨쉬듯 자주 올려 드리세요.
성경 말씀을 자주 자주 떠올리세요.
감사의 마음으로 일상을 받아들이세요.
나만의 기도 방법을 찾아 보세요.
미사를 드리러 올 때 지향을 가지고 오세요.
뭐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견진을 준비하면서 연습한 것들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몸에 배일 정도가 아니라 건성건성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공경하는 성인들은 위대한 영혼으로 받들어 지는 분들이지만
실은 엄청난 공을 세운 것으로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성인품에 오릅니다.
거룩한 삶은 하느님과 일치한 삶이죠.
세상은 거룩을 버리게 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 마저 거룩함에 부담을 느끼죠.
그러나 거룩함은 하느님의 품성이고
우리가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성화(聖化)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잃어버린 거룩함의 길을
믿음의 작은 연습으로 계속해나가길 기도합니다.
파리 나무십자가의 찬양, 거룩하도다-미사곡 링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UZkMEvMsTY…더보기
마태 10,34─11,1 : 복음을 먼저 읽고 잠시 멈추어 말씀을 들으세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곧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말씀인데 충격적입니다. 어중간한 타협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말씀, 누가 이 제자됨의 길을 과연 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예수님은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버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자식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다.’ 자신 있으신가요?
이 앞에서 그럼 ‘나 제자 될 수 있겠네. 나 예수님께 합당한네’ 혹시 그럴 분 계실 수 있을까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정사는 등한시하고 걸핏하면 바람 피운 아버지. 그보다는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 같습니다. 애초에 아버지란 사람은 나한테 상처만 줬으니까 말이죠. 집안 살림 안하고 형제들을 나보다 더 편애했던 어머니보다 예수님 사랑하는 것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습니다. 속썩이는 애물단지 저걸 왜 낳았나 싶고, 제 앞가림도 못하고 인생의 부담 자체인 자식들보다 예수님 더 사랑하라. 그거 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나는 제자 되는 것인가요. 아니요. 예수님이 모든 사랑을 독점하시려는 것 아닙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효성과 존경, 그거 야 네가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나에게 돌려라. 이런 말씀은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한없이 쏟아부은 사랑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이냐, 차라리 나를 더 사랑하라. 이런 말씀일리도 없습니다. 그럼 무슨 뜻에서 이렇게 쎄게 말씀하신단 말인가요.
예수님이 나를 더 사랑하라하신 말씀은 가족들이 원수니까 사랑하지 말고 사랑할 수도 없다- 이런 말 아니에요. 원수를 사랑하라-하셨고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하셨으니 이를 연결해보면 가족이 원수니까 사랑해야 한다고 해야 마땅합니다. 사랑하긴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이죠.
어떻게요. 사랑하되 그냥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죠. 내가 사랑하는 그 마음, 인간적 계산적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우리가 알쟎아요. 그 사랑 얼마 못가요. 이내 식어요. 변질되요. 우리 사랑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가장 먼저 사랑하는 그 기반 위에서 우리 사랑이 조화롭게 되는 것이죠. 사랑에도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사랑해서 사랑에 혼선이 생깁니다. 더구나 제자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뒷전이면 결국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요 이 말씀 병행 구절은 루카 복음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 26)
‘더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지 않는’ 것이 동의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사랑한다’는 것은 ‘미워하지 않는’ 혹은 ‘덜 사랑하지 않는’ 이런 뜻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더 사랑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구분하여야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선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이 명백해야 합니다.
참 구분이 어렵습니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저 가족이고 친구이고 나이이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배워가는 것이 제자의 길, 주님께 합당한 이가 되는 길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에 대한 응답은 그런 것입니다.…더보기
견진 전 9일 기도 넷째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월요일 아침,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를 지낸 월요일이라 보통 때보다 조금 더 피곤합니다.
저는 월요일에는 웬만하면 다른 약속이나 일정은 잡지 않습니다.
농담처럼 ‘교황님이 만나러 오신다해도 월요일이면 나는 거절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지요.
물론 교황님이 미관말직 사제를 만나러 오실리 만무이긴 하지만.
아침 미사를 마치고 월요일은 밀린 일을 하며 지나치게 쉬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월요일은 그야말로 본당 신부들의 끔쪽같은 안식일이라고나 할까요.
한가함과 여유가 없으면 새로운 창작이 어렵다고들 하지요.
모든 걸작품은 게으름의 산물이라고도 하더군요.
실은 이러한 쉼은 그냥 헛되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원칙적으로 ‘잠시 멈춤’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멈출 줄 모르는 이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잠시 멈춤은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 향하게 만듭니다.
숨가쁘게 달려가면 하느님을 잃어버리도록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미션
당연히 9일 기도를 바치시고
견진교리 여섯 번 째 강의를 들으세요.
주제는 ‘기도는 신앙을 자라게 합니다’입니다.
잠시 멈춤,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한 소중한 시간임을 잊지 마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hq3OfLRDHlo…더보기
1독서인 아모스 7,12∼15를 묵상합니다.
타락한 종교인, 현실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는 종교인은 개혁이나 변화를 싫어하며 또한 시대의 예언자들을 강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편안함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권에서나 그에 아부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생기게 마련이며 또한 썩은 정치가들은 그러한 종교인들의 아첨에 함께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북쪽의 사제인 아마지야와 남쪽의 예언자인 아모스와의 대결이 나옵니다. 종교인이 종교인과 강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아마지야는 타락된 왕의 체제하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도 아닌 남쪽 유다의 이름없는 촌놈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모스가 전한 내용은 그렇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망한다. 왕은 칼에 맞아 죽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 가서 고생한다.' 그러니 아마지야가 가만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쪽 지역은 아마지야 몫인데 남쪽 나라 놈이 자기 국경을 넘어 월권 행위를 하고 있으니 비위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가 전하는 내용이 또한 듣기 거북했기 때문에 아마지야가 아모스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종교인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지야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현세적인 이익과 편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아모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 같지만 그러나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됩니다.
아모스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뜻의 성취를 위해 하느님의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 습니다. 권력에 굽신거리고 재물에 타협하며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만 가능하다면 가차없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세상에서 기세를 올리고 큰소리치며 떵떵거리게 됩니다. 마치 아마지야처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길은 결코 쉬운 직책이 아닙니다. 아모스도 본래는 자기가 원해서 예언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 직책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모스뿐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아무도 그 고달픈 박해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가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용기있게 전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고 순탄치 않은 소명의 길이요 예언자의 길을 가면서 예언자들은 고집 센 인간들을 향하여 목이 터지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남들이 보기에 가히 기행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가시적인 몸짓을 통해서도 온몸으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삼 년 동안 수치스러운 알몸과 맨발로 다녔다.”(이사 20,2-3)
에제키엘 예언자의 경우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으니 “왼쪽 옆구리로만 삼백구십일 동안 누웠다가, 오른쪽 옆구리로 사십 일 동안 누워있기도 했고”, “밧줄에 묶여 갇혀 있는 기한이 다 찰 때까지 옆구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리지 못한 채 살기도 했으며”, “쇠똥으로 구운 역겨운 빵을 먹기도 하였으니” 이는 예언의 삶이 얼마나 극단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기에 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합니다. 인간의 말이라면 전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맡은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면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압박이 오더라도, 주변의 비난과 힐난이 오더라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뿐, 그리고 그 말씀이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러 내게 뻔히 피해가 올 것이 보이더라도 예언자는 그 길을 갑니다.
참된 예언자라면 누구나 걸어야했던 그 길, 고난과 죽음이 올지라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길, 교회도 우리 신앙인들도 이 길을 걸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만나게 됩니다.…더보기
견진 전 9일 기도 셋째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9일 기도 놓치지 않고 바치시나요.
예전에는 묵주 기도 횟수를 세는 단위로 꿰미라는 말이 썼습니다.
사전을 보면 노끈 따위로 엮은 물건을 세는 단위라고 되어 있네요.
내가 바치는 묵주 기도 한꿰미가 성모님과 함께 드려지고
차곡차곡 쌓이게 될 때
그 갸륵하고 애틋한 지향이 하느님께 더욱 강력하게 연결되고 있겠지요.
매만진 묵주알은 닳아버리고
묵주알을 엮은 끈은 헐거워지는 만큼
기도는 더욱 향기롭고 여물게 되는 셈입니다.
오늘의 미션도 9일 기도 바치기입니다.
숨가쁘게 하지 마시고 차분차분하게
그냥 한 구절에 머물러 있어도 더없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에 머물러보고
성모송을 바치며 ‘기뻐하소서’에 감격하면서
우리의 묵주 기도 한 꿰미 한 꿰미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전래동화의 동앗줄마냥
주님께로 끝없이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들어보실 성가는 ‘구원자 예수 너의 사랑’입니다.
최현숙 아가다 자매의 삶이 묻어있는 노래입니다.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으나 영혼의 눈이 열린 사람의 노래입니다.
인터뷰 영상 두편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x7vT8cBOIA
https://www.youtube.com/watch?v=Yv-Bkq933kg
묵상이 엮어진 노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J3ZvFUIcuk…더보기
마태 10,24-33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출산율이 떨어져서 국가 소멸론까지 나올 지경이니 골목에서 노는 꼬마들이 노는 모습만 보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결혼도 늦어지는 추세에 결혼해도 아이를 낳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도 강하죠. 아이들이 귀해지다보니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더 대단해지는 것을 보비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대여섯 명 낳아 키우던 시절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이가 적으니 자연히 사랑과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여전히 불황을 모르는 사업이 육아 관련 사업일 수도 있답니다.
젊은 엄마 아빠는 경쟁적으로 아이를 위해 뭔가를 다 남기고 싶어합니다. 풋 프린트로 액자를 만듭니다. 내 소중한 아이의 발자국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한답니다. 어릴 적 유치가 빠질때마다 지붕에 휙 던지곤 했었죠. 새 이빨다오-하며 부르는 노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애들 많은 집 지붕에는 아이 치아가 수십 개 널려 있었겠지요. 그런데 아이 치아를 보관해주는 앨범도 판매되더군요. 배냇 머리카락은 머리숱 검고 풍성하게 자라라고 싹 밀어주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을 그냥 버리지 않고, 태모필이라고 그걸로 붓을 만들어준답니다. 공부잘하라는 소망을 담아서. 그 쓰이는 소재도 굉장히 고급으로 나무로는 흑단, 그 좋다는 벼락맞은 대추나무 붓대를 만들고 상아나 값나가는 보석으로 장식도 하더군요. 지나치다 싶은 이런 아이 키우는 요란함이 왜 있을까 싶지만 이유는 단 한가지, 사랑이 지극한 것이죠. 엄마는 아빠는 내 아이에 대한 별걸 다 기억하고 남기고 싶어합니다.
사랑은 기억력을 향상시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은 매일을 기념일 삼습니다. 만난지 며칠 째 되는 날을 기억하고 서로의 사랑이 깊어가는 순간을 기념합니다.
복음은 오늘 이렇게 말하는 듯 싶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람이다.’ 얼마나 내가 사랑스러운지 하느님께서는 머리카락을 다 세실 지경이란 말씀은 그 점을 확인하는 것이죠. 아이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어하는 부모처럼, 연인의 전부를 다 알고 살피고 싶어하는 사랑에 빠진 이처럼 하느님께서 그렇게 나를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계신다는 것이죠. 그런 자기 존중감과 확신이 있을 때 세상에 주신 정답이 ‘나’라는 점에서 자신있게 세상의 거친 위험에도 맞서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네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잊지 말라.
어떻게 살더라도 내 삶 전체가, 심지어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인생의 곤란함과 실패도 오묘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깊은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돌보심 안에 살아가는 이는 지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는 헛된 약속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맞서야 하는 상대는 전혀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 숨거나 피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랍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처방은 두려워말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나설 것이고 밝은 데서 외치고 선포하며 앞장서서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분명 강한 이들이지만 나의 보잘 것 없음만 바라보면 싸우기도 전에 지는, 해보나마나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대개 어찌 될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에 겁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미래가 어떨지 나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고 강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실 정도로 하느님은 세심하게 안배하심을 믿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고 미지의 힘에 맡겨진 존재들이 아님을 아느냐고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펼쳐가실 미래를 확신할 때 두려움의 자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매일을 기념일로 만드시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지 못한 좋은 것들로 채우시고 들여 높여 주심을 알면 모든 날이 모든 일이 모든 만남이 다 썩 괜찮습니다. 괜찮은 하루입니다.…더보기
견진 전 9일 기도 둘째날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오늘부터는 9일 기도 바치시는 것으로 미션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틀은 강의 듣는 것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매일 새로운 미션을 드리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신심과 풍성한 영성을 전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제 9일 기도를 통해 받을 은총을 미리 쌓아 두시기 바랍니다.
저도 매일 미사 중에 견진 받을 여러분을 지향으로 올리며
함께 9일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생활 성가를 하나 링크로 걸어 둡니다.
들을 때마다 코끝이 왜인지 시큰해지는 성가입니다.
성인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기도가 마음에 그득해 지시길 바랍니다.
아무 것도 너를 (대 데레사의 기도)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어뇨 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오-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rMdVsw6E0…더보기
마태 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16)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내십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곧바로 죽습니다. 어떤 목자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겠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선을 향한 갈망도 있지만 악으로 기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성으로는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악에 빠지기 쉬운 존재가 사람입니다. 하느님 창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신에 따르는 악한 것이 항상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순한 양의 모습과 공격적인 이리의 모습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잔잔한 물가에 앉아 하느님 말씀을 순히 받드는 순한 양의 모습, 깊은 곳에 내재된 타인을 향한 공격성과 폭력성이 드러나는 이리의 모습.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쪽으로는 하느님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는 하느님을 무시한 채, 내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합니다.
사람 마음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도 우리는 목자의 목소리를 잘 찾아서 따라가야만 합니다. 이리의 공격성은 하느님 말씀이 자리 잡고 자라기 전에 그것을 모두 먹어 치워 버립니다. 깨어서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언제나 이리에게 지는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라는 밭에 하느님 말씀을 뿌리려면 일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세상에 뿌리는 일꾼입니다. 사람 마음 밭에 씨를 뿌리려는 일꾼은 사람을 직접 만나야 하는데, 주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의 앞날이 그리 평탄하게 보이지는 않았나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마태 10,17) 라고 까지 이야기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 사람들에게 당할 수많은 공격까지 미리 예상을 하신 것이죠.
하지만 제자들에겐 이리 떼에게 당하는 공격보다도 훨씬 강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양 떼를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이 아니라 양들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이셨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리가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첫 번째로, 목자이신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양과 이리의 모습을 알아채고, 순한 양에게 하느님 말씀을 먹이고 살찌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맛을 깊이 깨닫고 나서, 하느님 맛을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인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이제 견진성사 받는 날 포함하여 9일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9일 기도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
9일 기도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특별한 은총을 얻기 위해,
또는 어떤 축일을 잘 준비하기 위해 9일동안 계속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9라는 숫자의 기원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성령강림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러(루카 24,49; 사도 1,4) 9일 동안 기도한 후
10일 만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진 것에서 유래합니다.
9일 기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바칠 수 있는데
특히 묵주기도로 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모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도에 열중한 것에서 본떠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9일 동안 성모님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성령강림 전 다락방에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9일 기도 신심은 아름다운 것이며 은총을 얻기 위해 언제나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뜻을 품고
기도와 희생을 9일 동안 계속하면 교회에서는 특별한 은사까지 허락한다고 명시합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전대사를 베풀며 9일 기도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미션은
성령 송가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9일 기도를 시작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미션은 견진 성사 받는 날까지 계속되는 미션입니다.
묵주기도는 5단을 바치시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너무 너무 없는 경우 ^^
1단이라도 바치시면 되겠지요.
그럼 9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이 내게 하실 일을 설레이며 기대하시길 바랍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 10,7-15)
휴가철에 복음대로 여행 떠나시면 낭패입니다.
물론 낭만이 넘치던 시대, 무전여행이 청춘의 호기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신 여장(旅裝) 규칙은 상식에는 위배됩니다.
몰락한 수도원의 수사들이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여행하며 겪는 에피소드를 그린 영화 ‘신과 함께 가라. Vaya Con Dios’가 그 비슷하게 그려지긴 했었지요.
그러나 준비성 없는 여행은 고생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번 휴가에도 캐리어 세 개를 가득 채우시고도
막상 여행지에서는 ‘아차 충전 단자 안 가져왔네’하며 난감해할 것입니다만.
말씀인 즉,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가 축적의 욕망과 논리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쌓아두어 안전한 삶이 아니라 비워놓아 자유로운 삶을 찾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받는 이유의 거반은 무엇인가요?
구원을 위한 교리가 부족해서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이어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부패로 인한 추문들이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단단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죠.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한 지난 수십 년간 (개신교를 포함해서) 교회가 했던 일을
단 세 마디로 정리한 누군가의 비판이 생각납니다.
‘모여라, 돈 내라, 집짓자’ 이 구호가 교회가 한 일의 얼개라는 비판입니다.
과도한 부분도 있지만 이 아침 다시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인 나조차 ‘채움’의 욕망에 끄달리며 ‘비움’의 믿음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어느새 오늘 저녁 네 번째 견진 강의가 있는 날이네요.
견진성사가 열흘 남았습니다.
이제 한달의 시간의 완성을 향해 또 굳게 달려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다음, 더욱 굳세진 믿음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믿음은 나 자신을 성화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지어내신 세상과 이웃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하셨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깰 수 없는 계약으로 우리와 이어져 있으며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사랑하시며, 평생 사랑해주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는 이는 아낌없이 우리 이웃을 돕고, 끝없는 용서를 추구하며
일치와 형제애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주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미션은 견진교리 다섯 번 째 강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를
들으시고 구체적인 사랑의 계획을 세워 보는 것입니다.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사랑은 사랑이긴 하지만
아직 한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출발선에만 서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fhNcAT-5sI…더보기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신학생 초짜 시절에 여러 개념들을 배우면서 ‘어 이것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사뭇 다른데’하는 순간이 좋았습니다. 뭔가 아는 척하기 좋은 것이죠.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라는 말도 그랬습니다. 영어로는 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天國/神國)이니 무슨 왕국 비슷하게 그렇게 이해되겠고 우리 번역으로도 나라[國]이니 그야말로 미국, 영국, 대한민국 뭐 그런 나라의 일종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죠.
그런데 ‘하늘 나라’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초 신학 시간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 없다.’고 교수 신부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떡하지? 열심히 하느님 믿고 충실하게 살아내어 꼭 하느님 나라에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그리고 설명하시길, 우리가 ‘나라’라고 부르는 이 말은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라는 그리스어의 번역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영토를 가진 공간적인 차원의 나라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그리고 현재 자라나고 있는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질서를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멋지게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그느르심이라고 표현한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보다는 하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유다인들이 대다수였기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된다는 구약적 관점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곡하게 하느님 대신에 하늘이라고 대체해서 불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생겨난 오해, 하늘 곧 저 푸른 창공에 하느님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나라는 죽어서 심판을 거쳐 가는 나라라고 여겨졌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떳떳이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제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아니니 하느님 나라는 그러니까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의 어떤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숨어있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하느님의 다스림, 그분의 통치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이 더 생생하게 이해되었습니다.
나라는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에 갈 수 있지만 나라는 다가올 수 없는 것이지요. 일본은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권 들고 비행기 타고 그 나라에 가는 것이 맞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다스림은 가까이 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바로 예수님 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자기 선언입니다. 그분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자비롭고 충만한 다스림이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감싸게 되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 나라를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좋은 것이지만 더 좋은 것은 내가 오늘 하느님의 그 자비롭고 충만한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가능하면 소리내서 또박또박 읽어보세요.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사도행전 8,5-8. 14-17)
이 장면을 견진 성사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사마리아 고을에 세례받은 이들, 곧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리포스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그들에게 가서 안수하였을 때 비로소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습니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인간으로 지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성령 안에 머물고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하신 약속,
너희에게 파라클리토스 곧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이 떠나셨다가 다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왔다 갔다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잊고 있을 뿐이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안수는 우리가 잊고 있던 성령을 다시 기억하는,
활성화시키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죠.
안수는 교회 안에서 권위와 직무를 내려줄 때 시행됩니다.
성품 성사, 곧 사제나 부제품을 받을 때 핵심은 안수입니다.
주교님과 선배 사제들이 수품자들에게 안수를 통해 직무를 수여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도 견진 성사를 통해 안수를 받게 됩니다. 주교님이 살짝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죠.
너무 짧은 순간이라 그냥 휙 지나가기 십상입니다만
그 안수를 통해 우리는 약속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오늘의 미션-내 가족이나 친구 혹은 그 누구에게 안수 기도해주기!!
사랑하는 마음으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주세요.
그냥 손잡고 할 수도 있고 눈감고 할 수도 있지만 안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더 가까워지고 무엇보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기도를 대신하시며
기도해주는 상대에게 큰 은혜를 분명 내려주실 것입니다.
손을 얹어 사랑을 전해 주세요.
손을 얹어 치유와 위로를 내려주시기를 간청해 주세요.
손을 얹어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세요.
손을 얹어 하느님이 너를 몹시 사랑하신다는 전달해주세요.
그럼 오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준 당신에게도 하느님을 당신의 손을 얹어
‘수고했다, 애썼다,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2-38)
예수님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말 못하는 이를 사람들이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극에 무감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비라 부르고 장애라 부릅니다. 청각 기능이 마비된 것이고 듣는 능력에 장애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비를 풀어주시고 장애를 없애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에게 반응이 나옵니다. 이제 내 귓전에 울리는 그 소리가 무의미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이 들리고 감각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목격한 청중들의 반응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한 부류는 놀라워하는 반응입니다. 구원 사건에 대해 감탄합니다. 좋은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좋은 반응은 마음을 열게 만들죠.
반면에 바리사이로 지칭되는 이들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저 짓꺼리를 하는군. 마귀와 한통속이군.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똑같은 자극을 받고도 상반됩니다.
그러니까 제일 나쁜 것은 아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경 안쓰는 것이죠. 세상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교회가 어디로 가건 말건,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건 말건 나몰라라 하는 것,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완전한 단절이 일어나고 있고 생명이 식어버릴 때 그렇습니다.
그 다음 나쁜 것은 제멋대로 반응하는 것, 꼭 엇박자를 내는 반응이죠. 아프라고 꼬집었는데 키득거리는 것이다. 생각을 고치라고 하느님께서 인생길에서 나를 넘어뜨리셨는데 그러면 그 아픔을 느끼고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안아픈체 하는 것-잘못된 반응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주셨어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하는 것도 문제적 반응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있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가 꺽여 있었기에 가엾어 하셨습니다. 자극-반응 도식으로 보자면 백성들은 위축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굳어가고, 삶이 팍팍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그것은 가엾어 하시고 안타까와 하시고 가엾어 하시고 그리고 돌보면서 치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시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시죠. 어떤 일꾼들입니까?
반응이 빠른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게을러 빠져서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이들이 아니라, 타인의 처지를 잘 살피고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일상의 자극에 신속하고 풍성하게 반응한다면, 그저 그런 어는 날의 하루가 아니라 만사를 풍요롭게 허락하신 날이 될 테지요.…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견진성사 예식의 핵심은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기름부음(도유: 塗油)은 우리 문화권에서는 낯선 예식이지만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종교적, 문화적인 의미를 가지고 행해진 예식입니다.
일상적으로는 손님을 환대하거나 몸을 치장하거나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큰 연회 시에는 향료의 기름을 손님의 머리에 올려놓아
그 체온으로 녹여 향기와 신선함을 느끼도록 해서 손님을 기쁘게 했다고 하네요.
덥고 건조한 사막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에선 피부 건강과 악취 죽이기를 목적으로도
향유를 몸에 발랐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별된 이들, 곧 왕과 사제와 예언자들을 정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도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시작된 이후 도유는 성령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물건과 사람에 기름을 부어 그 물건이 거룩하게 구별, 성별되어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보호와 돌보심, 완전하게 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세 가지 종류의 기름이 사용됩니다.
크리스마, 예비신자 성유, 병자 성유의 세가지입니다.
이 성유는 성주간 성목요일 주교좌 성당에서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하는 중에 축성되어
전 교구에서 일년간 사용되게 됩니다.
견진성사에서는 크리스마 (축성 성유, oleum sanctum, Chrisma)가 사용됩니다.
크리스마라는 말에서 피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크림’이라는 말이 나왔답니다.
크리스마에는 다른 성유와 달리 발삼을 넣어 향이 나도록 만든답니다.
기름은 예식을 통해 사람을 온유하게 하거나 굳세게 만드는 데 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기름(자동차 연료 말고)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따져 보면
기름이 우리 삶에 주는 유익함을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쳤을 때 상처 부위에 바르는 연고처럼 말입니다.
축성된 기름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향하게 하고, 악
의 유혹에 대항할 힘을 주며,
성령이 주시는 치유의 힘을 통해 건강을 청하는 행위에 사용되는 은총의 상징적 요소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견진성사 때 바를 크리스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른 채 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겠지요.
그럼 오늘의 미션은 올해 성유 축성 미사 중에 언제 크리스마 성유가 축성 되는지 찾아보기입니다.
세가지 성유가 축성되는 시점이 각각 다른 이유는 다음 링크를 보세요.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30
올해의 성유 축성 미사는 다음 링크입니다.
내가 바를 성유가 언제 축성되었는지 찾아보세요.
성유 축성 미사는 거의 참례하실 일이 없으니
성삼일을 시작하는 이 미사를 한번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Wpilre69UU…더보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태 9,20-21)
미숙아 치료에 활용되는 캥거루 요법이 있습니다. 인큐베이터가 상황에서 일찍 태어난 아기를 엄마가 최대한 피부를 접촉한 상태로 감싸 안고 돌보게 합니다. 아기의 체온이 유지되고 엄마의 체취와 감촉을 느끼면서 낯선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편안함을 느끼면서 아기에게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면서 통증이 줄고 면역력이 놓아지는 효과가 있답니다. 접촉은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여러 모습을 묘사하면서 말씀하시거나 이끄시거나 몸소 나타나신다는 것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장면은 만지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상처를 싸매시고 감싸시는 분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하느님이 초월하신 분이라는 것은 세상을 넘어선 분이라는 뜻이건만 초월을 포기하시고 가까이 오신다는 증거가 그분의 매만지심입니다. 이렇게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는 느낌과 감각보다 누군가가 나를 만진다는 것은 더 직접적이고(촉각은 가장 직접적인 인간의 체내로 들어오는 감각인 것이죠) 그만큼 선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매만지심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상징인 것이죠. 피를 쏟는 병은 유다 전통에서는 부정한 질병으로 여겨졌기에 모두가 꺼리고 더구나 그 환자를 만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여인이 주님께 손을 댄다는 것, 만진다는 것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긴 세월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으로 분리는 극복되고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만지시는 분, 상처를 감싸 안으시는 분, 더없이 가까운 분으로 나의 주님을 만나려 하는지요.…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전례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바치는 공적인 예배-아마 교리서에서 이렇게 정의해놓았을 겁니다.
좀 딱딱하죠.
전례란 용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라이투르기아(Leitourgia, λειτουργια)’인데 이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적인 일을 지칭합니다. 종교적인 일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봉사를 뜻하기도 했죠.
초대 교회와 교부, 곧 그리스도교의 초창기에 모든 이를 위하여(대신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를 ‘라이투르기아’ 곧 전례라고 불렀던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모두를 위해 바친 사제로서의 일을 교회가 계속해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 역사, 곧 하느님이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는 구원 업적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전례 행위들은 단순히 역사의 사건, 지나간 무엇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우리 안에서 그대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지금 우리 앞에서 다시 현재로 되살아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전례의 내용과 의미를 풍부하게 알게 될수록 내가 드리는 예배가 더욱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미션은 견진 교리 네번째 강의, 전례와 성사 생활을 알아봅니다.
지루한 전례가 아니라 살아있는 전례의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4hGs_PZ1D0…더보기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라고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나자렛에 가셨다 해도 되련만 굳이 ‘고향’이란 말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고향이란 단어는 'fatrida'인데 아버지를 뜻하는 'fater'에서 온말로, '아버지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사는 사람에게 '아버지의 땅'은 늘 그리움의 장소입니다.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났던 탕자도 인생의 막장에서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 냅니다. 기술 문명으로 분주해지고,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황을 철학자 하이데거는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놓이는 곳을 잃어버린 세계란 것이죠.
고향 사람들도 예수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갈릴래아에서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내쫓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소문은 널리 전해집니다. 고향에 돌아온 주님은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의 깨달음을 나누셨는데,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전하지 않고 다만 사람들의 반응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디에서나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권위 있는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마귀에게 명하면 마귀가 물러가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병자가 낫는 말씀입니다. 힘찬 그 말씀은 변화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거의 그 문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인정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를 존경하거나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익숙함의 함정입니다. 익숙한 데만 머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는 적극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기들의 진부한 삶을 유지하려 합니다. 어쩌면 그게 예수님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한 바,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분 아니라 그분을 위험한 인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전하는 복음은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 질서를 그분은 토대부터 뒤흔들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질서를 그분은 부정했습니다. 주님은 강자들의 폭력 앞에서 숨죽인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참 사람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폭력에 굴하지 않는 삶, 사랑으로 미움을 넘어서는 삶,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이들에게 굽신거리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리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다웠지만, 오랜 식민지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공포가 새겨져 있었기에 그런 꿈에 선뜻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죠. 자칫하면 예수로 인해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고향에서는 별다른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외로우십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 이르셨지만 우리는 주님을 경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일어나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께 등을 돌린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십자가의 길, 바로 그 길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세상의 인력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걸음씩 십자가가 가리켜 보이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과감히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험입니다.…더보기
새하루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날, 한주간의 삶을 제대 앞에 봉헌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니 주일이라고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일 미사는 특별한 지향으로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본당은 주일 미사로 여섯 대를 봉헌합니다.
토요일 어린이 미사부터 주일 저녁 청년 미사까지 하나하나가 같은 전례이면서도
조금씩 차이가 나기 마련이죠.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저녁까지 여섯 대 미사를 집전하다보면
자칫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미사를 드리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한 대 한 대마다 개인적 지향을 담아 봉헌합니다.
어린이 미사는 교회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위해, 토요일 저녁 미사는 청소년들과 수도자들을 위해,
주일 새벽은 어르신들과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주일 9시는 본당 공동체의 봉사자들과 성소자들을 위해, 교중 미사는 물론 본당 모든 신자들과 특별히 쉬는 신자들을 위해, 주일 저녁 미사는 청년들과 세상을 떠난 교우들을 위해 봉헌하는 것이죠.
이런 지향이 있으면 자칫 무감각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신앙 고백, 신경에 관한 강의 들으면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는 교리의 의미를 배우셨겠지요.
모든 성인의 통공-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자리는 바로 미사 성제입니다.
주일 미사 드리면서 저마다 각자의 지향을 품고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것, 오늘의 미션입니다.
오늘 미사는 그동안 잊고 있는 옛친구를 위해서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바치셔도 좋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고마웠던 이들을 위해 미사 참례를 하시거나
미워하고 있는 이, 불편한 누군가를 위한 지향으로 드리면 더욱 뜻깊겠지요.
그 지향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합해지고 모든 성인의 통공-연결과 일치로 엮어질 때
주님께서 받으실 갸륵한 봉헌이 될 것입니다.
미사에 그냥 오지 마세요.
주님께 드리고 구할 지향을 가지고 제대 앞에 나오세요.…더보기
마태 9,14-17
우리 시대를 후대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요. 아마도 디지털 시대, 모든 정보과 지식을 0과 1로 환원시키는 디지털 양식이 지식과 정보를 규정하게 된 시대라고 하지 않을까요. 정보 축적의 가속도는 그야말로 기록적입니다. 기원 후 인류 전체가 지닌 지식이 배가 되기까지 대충 1000년쯤 걸렸답니다. 그러더니 점차 가속도가 붙어 우리 시대에는 정보의 축적량이 매년 두 배쯤 많아지고 빨라진다지요. 그러니 작년에 알았던 최신 지식이 이미 올해는 별로 쓸모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쉼 없이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아주 쉽게 뒤쳐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아찔하게 변합니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도 불변합니다. 삶의 정말 중요한 것들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은 변합니다. 오죽하면 세상에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뿐이라 할까요?
마음도 변합니다. 세월이 가면 얼굴도, 체형도 변합니다. 내가 만나는 이들도 변합니다. 문제는 변할 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과거를 꼭 붙들고 있기도 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이들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단식’을 무슨 금과옥조로 여겨 불변하는 철칙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변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구태의연이야말로 멸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그런 점에서는 수구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거칠게 이야기하면 한편으로는 급진적 개혁을 외치는 이들이 있고 무슨 소리냐, 기존의 시스템을 고쳐가면서 사는 것이 맞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예수님은 적당히 땜질해가면서 감추어 가면서 사는 삶을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빚으셨고, 새 부대를 마련하여 담으시려 하셨습니다. 그분은 기득권을 어떻게든 보존하려는 백성의 지도층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분은 과거 율법의 유산을 상속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다르셨습니다. 그분은 일점일획도 더 첨가할 수도, 덜어낼 수도 없었던 사두가이들의 경직된 자세를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자꾸만 현실적인 것으로 제한하려는 일부 제자들의 태도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셨고 새로움을 갈망하신 것이죠. 그래서 온고지신은 맞지만, 옛 우물에서 새 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그 우물은 고여있음으로 인해 부패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변화에 대해 저항적이 됩니다.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가정에 충돌이 있어납니다. 시어머니는 살림살이 기존 방식을 고수하려 하는데 새 며느리는 뭔가 변화를 일으키려 합니다. 시어머니는 주장합니다. ‘우리 집은 가풍이 이렇고. 저렇고, 여지껏 아침은 이렇게 먹어왔고.’ 며느리도 가만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 누가 요새 아침을 그렇게 먹어요. 편하게 사다 먹을래요.’ ‘무슨 말이냐 해 먹어야지. 너는 어떻게 편할려고만 하니.’ 이런 식으로 건건이 다툼이 일어납니다. 집구석만 그런가요. 세상은 변화를 두고 밀당을 합니다. 그냥 이대로 가자파와 바꾸는 것이 옳다파 사이의 긴장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마다 ‘이것만은’이라면 정해놓은 나만의 금지구역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만은 말할 수 없어. 이것만은 할 수 없어. 이것만은 누구도 건드리면 안 돼. 이것만은 절대로! 그런데 바로 ‘이것만은’하는 ‘그것만은’ 변해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삶도 늘 새로운 도전이 있을 때 생명력을 얻습니다. 변화는 낯설지만 그래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죠…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비 예보가 내려지 토요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매월 첫 토요일을 성모 신심을 위한 날로 지내 왔습니다.
또 한국 교회는 특별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왔습니다.
성모신심 중에서 오늘은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신심은 리옹의 성 이레네오(130/140?~202년경)에 의해 처음 생겨났습니다.
성인의 대표적 저서 「이단논박」에서 ‘하와의 불순종으로 생긴 매듭이 성모님의 순명으로 풀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은 여기서 영감을 받아 생겨났습니다.
17세기 초 오스트리아 출신 야콥 렘 신부(예수회)님이 이 신심을 전파하고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베드로 암 페를라흐성당에 요한 슈미트너가 그린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성화를
봉헌하면서 이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 신심을 새롭게 우리에게 소개하여
더욱 많은 이들이 이 신심으로 성모님을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의 기도를 가장 잘 중재해 주시는 성모님께
우리는 탄원의 기도를 드리며 얽혀 있는 삶의 매듭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한다”며
“그분께서는 사랑이 충만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의 탄원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모님께서 매듭을 푸시는 장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매듭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를 갖고 기도한다면 성모님의 전구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누구나 있는 삶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자애로움을 느끼시기를 빕니다.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께 드리는 9일 기도를 한번 바쳐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CBmm7T_ps6Q&list=PLUu8PwGwKTfhuLtzYPbBWGBgzRgc5osk3…더보기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 2독서 중에서
수선탁덕, 이땅의 첫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모든 한국 사제들의 선배님, 그러나 너무 젊은 나이에 가신 젊은 대선배님이시죠.
그런데 선배님이 너무 훌륭하신 나머지, 그 뒤를 따른다고 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몰라요. 사제들의 오복(五福)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본당 총회장님, 사무장님, 함께 사는 수녀님, 주임 신부님 경우에는 보좌/보좌 신부의 경우에는 주임 그리고 살림살이 해주는 식복사- 다섯 명을 잘 만나면 대충 행복하다고 하자-한 마디로 사람 잘 만나야 사제 생활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것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엔 추가해서 여섯 번째 복이 있습니다. 바로 전임자 복이지요. 전임자 신부님이 성인 뺨치게 거룩하고 훌륭하신 분이며 후임 입장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여간해서 칭찬듣기 쉽지 않습니다. 반면 전임 신부님이 헐렁하였으면 후임 입장에서는 꽤 괜찮죠. 기본만 해도 존경과 칭찬이 쏟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제들은 공통적으로 전임자 복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은 치명하셔서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셨고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님은 팔백리 길을 날마다 걸으시며 사목하시다 과로사하셨으니 신발 벗고 따라가도 턱도 없을 지경이죠.
잘 살려고 해보아야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인가 하고자하는 노력마저도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과도한 자기 욕심일 수도 있고 되지도 않을 일에 대한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부어졌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숨 막히게 하는 햇볕이나 쏟아져 내리는 폭우만은 아닌 것이죠.
첫사제 그분의 꿈과 희망을 생각해봅니다. 너무 젊었기에 그만큼 뜨거웠던 그 삶.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길 청합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금요일, 하루만 지나면 그래도 주말입니다.
어제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아주 잘 짜여진 수련의 방법으로 신앙인의 삶을 전반적으로
쇄신하는 새출발에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오늘은 향심기도입니다.
향심기도는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의 방법입니다.
향심기도도 일단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미션, 향심기도 알아보기 입니다.
평화방송에서 10번의 기도 강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를 보시고 괜찮다 싶으면 하나하나 살펴보시면 정말 좋겠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PkzIqWj72WY&list=PLpB9z9SOeZQcAjioAA_7X0rT0uKcjQU3j
아무리 멋진 옷도 내 스타일이 아닐 수 있듯이
나만의 기도 방법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9,1-8)
중풍으로 온 몸이 마비된 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물론 제 힘으로는 못하고 선량한 마음을 품은 누군가에 의해서죠. 옴짝달싹할 수 없는 비루한 몸으로 누워 있던 시간이 얼마였을까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무기력함이 얼마나 절절한지 겪어본 이는 알게 됩니다. 건강을 해치게 되면, 역부족인 상황에 놓이게 되면, 풀리지 않는 관계로 속앓이 하다 보면 마음이 먼저 짓눌리고 약해지기 마련이죠. 도저히 달라질 수 없다는 무게감이 엄습합니다. 세상이 무섭고 사람들의 시선도 버겁습니다. 몸만 마비되지 않고 마음도 마비됩니다. 다들 빛나는데 나만 이 괴로움을 감당하는 것 같죠.
‘일어나라’는 명령에 앞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래서 ‘용기를 내고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았음을 알아라’였습니다. 마음의 마비가 풀리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 걸을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죠. 내가 이 처지에 놓은 것은, 이 문제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해결할 수 없다고 자책하고 포기하는 것은 이것을 일으킨 어떤 죄, 때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죄로 인한 것이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마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제일 하기 쉬운 말이 ‘힘내세요’입니다. 힘내라 한다고 힘이 나진 않죠. 달리 할 말이 없으니 ‘힘 빠지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말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라고 한다면 그분은 단지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힘이 되신다는 것을 안다면 여리고 다친 우리 마음이 여물고 단단해지지 않을까요.…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지난 달 연피정을 하면서 이번 견진성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했습니다.
실은 견진성사가 성령의 성사이고 신앙이 성숙하였음을 공인받는 성사이니
‘영신수련’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마침 기간도 한달 남짓이니 영신수련에 적합한 날짜가 나왔습니다.
영신수련은 성 이냐시오가 창안한 그리스도인의 수련 방법입니다.
그런게 있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기도의 전통, 수련의 방법이 있습니다.
실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막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기도는 그냥 그리스도인이면 자연스레 하는 것처럼 간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기도도 또한 배워야 하는 것이죠.
그 중에 가장 탁월한 기도의 방법이 ‘영신수련’입니다.
하여간 이번 견진성사에서 한번 시도해볼까 했던 ‘영신수련’은 포기했습니다.
영신수련을 위해서는 기초가 좀 필요한데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쉬움을 이번 미션에 담아봅니다.
‘영신수련 맛보기’입니다.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영신수련 소개 강의 시청입니다.
무려 스물 몇 번의 강의가 있지만 일단 첫째 소개 강의만 들여다 보시고 괜찮다 싶으시면
계속하시면 좋겠네요.
물론 영신수련은 실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니, 소개 강의를 보시고
살짝 영신수련에 발을 디디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puVvudUZo&list=PLpB9z9SOeZQc9kKZJx4RaWP6jYfDzNM2Y&index=26
또다른 강의입니다.
https://youtu.be/I8lI0bBMxyA?list=PLHe1H2TjWgZq7ExUuP4NTHFxNL-6LPjio
잊지 마세요. 기도도 배워야 한답니다.…더보기
다른 제자들이 그(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 20,25)
믿고 살고 있고 믿음을 키워가고 있고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참 곤란하고 말문이 막힙니다. 그러게요. 대답이 참 궁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선명했고 하느님께 대해 설명할 때 자신만만했으며 나는 정말 ‘잘’ 믿고 있노라 자부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아닙니다. 실컷 떠들고 나서 내가 믿지도 않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지 겁이 날 때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동료들과 달리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그것은 가능성의 영역일 뿐, 현실의 실상일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럴 수 있지(부활할 것이다)’와 실제로 ‘그렇다(부활하셨다)’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습니다. 토마스가 믿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유독 불신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정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다른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불가능한 사태를 믿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남달리 탁월한 이들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그들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믿음이 그들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물로 주어진 것이죠.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표현도 엄밀하게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셨다’ 정도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남들에게 억지로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에게도 ‘난 왜 이리 믿음이 약할까?’ 한탄할 일도 아닙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저 다른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을 만나주시기를 갈망했습니다. 확신 속에서가 아니라 불신 속에서! 아니, 갈망은 불신자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망합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이제는 성령 송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틈틈이 자주 화살기도를 바치고
하루의 작은 일상 속에 하느님의 현존을 떠올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힘을 길어내는데 익숙해지셨겠지요.
만일 ‘그렇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셈입니다.
‘아직 멀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정직하게 인정한 셈입니다.
악습은 그렇게도 쉽게 들어오지만
좋은 습관은 그다지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견진 성사를 준비하면서
그동안의 신앙의 모습을 한번 체크하고
영적인 성장과 도약을 위해 한달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우리가 시작한 시간의 절반쯤 지내왔습니다.
오늘의 미션은 중간 점검.
여지까지의 미션 중 흐지부지, 유야무야된 것들을 다시 돌아봅니다.
그리고 충실했던 것들과 무심했던 것들을 돌아보세요.
습관적 믿음은 이겨내야 할 것이지만 믿음의 습관은 유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라, 어느 틈에 내가 기도하고 있네.
어라, 나도 모르게 성당으로 향하고 있네.
어라, 내 손이 자연스레 성호를 긋고 있네.
뭐 이런 것들입니다. 믿음이 습관화된다는 것은 이미 내게 깊으 스며든 것이 된 셈입니다.
중간 점검, 잊지 마세요.…더보기
마태 8,23-27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이었죠. 예수님은 지금 가다라, 이방인 지역으로 가고 계신 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니 제자들이 따라가는 중입니다. ‘나를 따르라.’ 제자들은 그분을 따라서 호수를 작은 배에 의지해서 건너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을 따라서 배에 올라 저어 가는데 풍랑이 일었습니다. 따라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풍랑입니다. 파도입니다. 바람입니다. 예수님 믿었더니만 결과가 무엇입니까?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평화이고 위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주셨나요? 아닙니다. 풍랑도 일어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풍랑을 일부러 일으키시진 않았을지라도 주님이 가자셔서 따랐더니만 풍랑같은 일이 우리한테 벌어지는 그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 믿었더니 힘든 일 생기는 것, 그게 맞습니다. 예수님 따랐더니 고요하고 잔잔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예상치 않은 일이 나를 괴롭힙니다. 제자들도 타고 가는 이 작은 배는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십 일동안 하늘이 열려서 끝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그 순간 저주와 멸망의 그 징벌이 다가오던 노아 시대의 홍수가 있을 때, 그 속에 가라앉지 않고 노아 일가와 피조물들을 태우고 있던 그 방주. 그 방주가 교회의 예표 상징입니다. 그 방주는 제자들이 타고 있던 그 배는 교회 전체가 우리 신앙인들이 타고 가는 그 배이며 우리가 거기 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 문제가 없진 않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파도가 집어삼킬 듯 덮쳐옵니다. 곧 빠져 침몰해버릴 것처럼. 그게 실제입니다. 그런데 침몰했나요? 사십 일 대홍수 속에서 방주에 탄 이들은 살아남습니다. 제자들은 결국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왜요? 그 배에 예수님 타고 계셨습니다. 그 방주는 하느님께서 지으라고 명하신 방주였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침묵하실 때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마 물 퍼내고 돛을 붙잡고 노를 있는 힘 다해 저어보고 다 했겠지요. 아주 힘들게 힘들게. 그래도 아무래도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일어나 꾸짖으시니 개입하시니 호수가 잠잠해지고 풍랑은 멎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고요해집니다. 그 때는 분명히 옵니다.
제자들이 왜 믿음의 위기가 생겼을까요. 풍랑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바람,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믿음도 흔들립니다. 분명 주님이 함께 하실텐데 왜 이런 일 생기지. 아니 혹시 여기 안계실지 몰라. 계시더라도 이 문제에는 관심이 혹시 없으신 것 아닐까 등등. 실제 겪는 것보다 더 문제가 무겁고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풍랑이 불면 나의 믿음보다 그 문제가 더 커져 버려요. 내 믿음이 더 크면 난 이 물에 빠지지 않아- 대담해집니다. 내가 그 풍랑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난 못하죠. 그런데 주님이 이 배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재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주무셨을 뿐입니다. 나를 태우고 가는 배는 나만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타신 배입니다. 같이 이 문제를 겪고 계시니 주님이 모른척 하신 것 아닙니다.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왜 떠났나요. 예수님이 가자 하셔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책을 세우시고 궁극적 책임 지시겠단 것이죠.
바람 불고 있나요. 멎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예수님 동승하시니 괜찮습니다. 이 파도도 잦아들 것입니다. 깨어나시어 꾸짖으시고 잠잠해져라 명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아’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셨습니다. 우리 믿음을 더욱 굳게 하여 풍랑에 맞서야 합니다. 내가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맞서면서 잘 버티는 것입니다. 난 빠지지 않아. 이 배에 예수님 계시니, 그런 믿음으로 풍랑 속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내가 타고 가는 배에 같이 가시는 주님과 함께.…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변화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질서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영적 질서는 그야말로 혼돈 자체입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왜곡된 믿음이 난무합니다.
스스로가 하느님이라고 메시아라고 성령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가련한 영혼들이 그 유혹에 넘어가
멸망의 길인지 모르고 따라갑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창궐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 질서의 왜곡 속에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장하지 않으면 빼앗기기 마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에페소의 말씀을 새기며 견진 강의 세 번째 동영상을 시청하세요. 오늘의 미션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에페 6,10-18)
https://www.youtube.com/watch?v=ZIKtYlbXGkM…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마태 8,18-22)
지난해 7월 2일 연중 13주일부터 우리 본당 이 채널이 열렸습니다.
매일 아침 그날 그날의 복음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취지였습니다.
90년대 말, 열혈 신학생이던 시절,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심포지움 열렸습니다.
그 심포지움의 결과가 두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며 희망과 비관이 교차되던 시절이었죠.
그 책을 탐독하며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
이대로 좋다면 굳이 열릴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래도 지금 돌아보면 이대로 좋은지, 아닌지를 논의하던 시절만 해도 그야말로 호시절.
교회는 활력과 생기를 잃어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이들이 이젠 없는 지경입니다.
성당 마당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시끌하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미사 시작 전에 우렁차게 성가 연습하던 그 목소리는 다 어디 갔나요.
상이 나면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삼삼오오, 우리 교우니까 연도하러 가야지 나서던 그 발길이
청년들이 열심히 모여 성경 말씀을 살아보고자 했던 그 열정이 사그라든 교회.
자기 안으로만 움츠려든 신앙인들의 모습, 자녀들의 신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부모들,
사제들의 탓이 제일 큽니다.
신자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오래했음에도
그렇게 아는 것이라곤 정말 예비자 교리 때 띄엄띄엄 들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도록 내버려둔,
그래서 ‘성모님이 원죄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라든가
‘십자가로 구원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같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질문에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이들이 양산되어 버렸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믿어, 그냥 성당이나 왔다갔다 하면 되지-하는 무기력이 팽배하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야 세례받고 기본은 하니까 문제없다고 여기고 있다면
기도는 그냥 주어진 기도문이나 바치면 그만이지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내 삶을 어떻게 내어드리는지
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따분한 옛이야기나 그저 좋은 말씀이겠거니 여기고 있다면
우리는 믿긴하되 그저 나 편하고 익숙한 것만 믿는 착각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아마 이런 고민이 지난 일년간의 말씀 한모금의 주제였을 것입니다.
다시 배우고 새로 익히고 거듭 기도하고
입으로만, 필요할 때만 ‘주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애를 동반하시는 주님이심을, 그분의 현존하심과 역사하심을 담고 느끼는
떳떳하고 품위있고 열정적이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제발 조금이라도 그리 되도록 다시 시작하는 일년을 기념합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뜨거운 칠월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성령 강림의 강력한 상징은 불꽃, 그것은 죄를 태워 정화시키는
불꽃입니다.
뜨거운 용광로를 통과하면 불순물이 타버리고 순수한 금속이 만들어지듯
성령의 불꽃은 우리의 과거와 영혼을 정화합니다.
또한 성령의 불꽃은 우리를 다시 세상을 밝히는 존재로 만드는 깨달음의 불꽃입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눈먼자되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불혀모양으로 그들에게 내려오시자
그들은 하늘 나라로 백성을 이끄는 참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진성사는 성령의 성사입니다.
정화를 통해 과거의 어둠과 단절하고
깨달음을 통해 새 삶을 받아들이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성령 송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성령 하느님의 은사와 열매를 갈망하면서
견진 성사를 받기를 기다립니다.
오늘의 미션은 성령께서 내게 주시기를 바라는 은사와 열매를 정해봅니다.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에 성령 카드 뽑기를 하신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무엇인지는
소상히 아시는 분은 드물더군요.
성령의 일곱 은사와 아홉 열매를 찬찬히 들여다보시면서
구할 은사와 맺을 열매를 골라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s://cafe.daum.net/hgsamog/Qtr2/145?listURI=%2Fhgsamog%2FQtr2…더보기
마르 5,21-43
이번 주일 우리가 듣는 복음에는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소생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 이야기의 부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났습니다. 찾아다닌 의사들도, 가졌던 재물도 아무 소용이 없이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 그분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하자 과연 병은 나았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로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혹은 가진 재물에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해서 얻는 구원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많은 군중이 있어 예수님에게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나아갔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 와 닿았습니다.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두 번째 기적은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끌어 모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접근하는 약자에게 시선을 주고,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기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하면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기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 기적에 호소하지도 않고, 죽은 이를 하느님이 기적으로 살려낸다고 믿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인간의 노력 뒤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자기 능력에 따라 실천합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 혹은 기적에 놀라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연법의 질서 안에 일어나는 일이라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웃을 돌보아 주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우리의 헌신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은혜로운 기적입니다.
재물에 목숨을 걸고, 더 갖기 위해 이웃을 속이고, 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얻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고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어 제 한 몸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일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에게서도 은혜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복음의 기적 이야기들은 우리도 그 놀라움과 은혜로움을 실천하라고 초대합니다.…더보기
주님의 날, 하루를 축복합니다.
빗길에 성당 오시는 길이 평화롭기를 빕니다.
오늘은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다음날로 교황 주일로 지냅니다.
흔히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직무가 교황직이라고 합니다.
2쳔여년을 흔들림없이 교회를 떠받치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시적으로
보증해주는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연감은 교황직의 호칭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로마의 주교(Bishop of Rome),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Jesus Christ),
사도들의 으뜸 후계자(Successor of the Prince of the Apostles),
보편교회의 최고 대사제(Supreme Pontiff of the Universal Church),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Primate of Italy),
로마관구의 관구장 대주교(Archbishop and Metropolitan of the Roman Province),
바티칸시국의 원수(Sovereign of the Vatican City State)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ant of the servants of God)
앞의 7가지 호칭은 권한과 영예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마지막 호칭, 하느님의 종들의 종-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을 섬기는 직무, 교황직은 종의 직무입니다.
오늘 가톨릭 교회(보편 교회)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종인 우리가, 종들의 종인 교황 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 어깨에 놓인 짐이 조금은 가볍기를, 혼란의 시대 교회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노구의 몸으로 교황직을 수행할 건강을 허락하시기를.
미션으로 교황 선출을 다룬 다큐멘타리 시청을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Xdxzv4ayz8…더보기
마태 16,13-19
사제 양성 과정 중인 신학생에게는 세가지 기준이랄까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합니다. 전통적으로 3‘S 라고 불리는 그것은 학문(혹은 지혜, 智, Scientia), 곧 뭘 좀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건강(體, sanitas), 건강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성덕(거룩함, 열심 聖 sanctitas)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자기 삶을 이끌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지덕체(智德體)가 조화로워야 좋은 사제될 수 있다는 교회의 기준입니다. 실은 그런 조화로운 사제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해박하고 열심하고 건강하기까지한 완벽한 사람이 흔하지 않을뿐더러 교회 안에 리더가 된다는 것이 좋기만 할까? 저는 그래서 교회에서 헌신할 사람의 조건을 새롭게 규정합니다. 너무 똑똑하지 말 것, 너무 건강하지 말 것, 너무 열심하지도 말 것! 전통적 3‘S 에는 완전히 위배되는 그런 조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벽해서 남을 제압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풍부한 사람, 남의 사정도 고려할 줄 아는 넉넉한 품새 지닌 사람, 약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감수성이 있는 사람-필요하다는 겁니다. 교회에는 완벽한 이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벼라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고 그러니 별별일 다 겪습니다. 그때마다 엄격한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쳐내고 잘라내고 도려내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아무도 못견딥니다. 자기의 강함이 자기의 능력이 자기의 완벽함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그렇게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죠. 좀 못본척도 해야할 때 있고, 알지만 침묵해야할 때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똑똑하고 너무 건강하고 너무 열심하면 자기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 두 분을 교회의 두 기둥-이라 부릅니다. 반석같은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의 바오로. 교회를 세우고 버텨나가게 한 두 분을 한 날 기념합니다. 그런데 실은 베드로는 결함 투성이입니다. 바오로, 그의 과거 엄청난 흑역사가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면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극찬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말씀하시니까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망언을 하고 주님으로부터 졸지에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습니다. 그뿐아니라 너무 자주 예수님을 오해하고 엉뚱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의심을 품어서 물에 빠지기도 하고 초막 셋 지어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게쎄마니에서는 죽음을 앞둔 당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 받고도 쿨쿨 잠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는 예수님 체포되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겁니다. ‘나는 그분을 모른다고’ 이것이 으뜸 제자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온갖 결함으로 가득찬 모습입니다.
바오로는 개명하기 전에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청년 사울은 완전 반 그리스도교, 반복음적 과거를 살았던 지독한 박해자입니다. 열성적으로 교회를 파괴하고 신앙을 말살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죠. 그는 불순한 과거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베스트를 뽑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심사숙고하며 선발한 이들이건만, 사도들은 베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사람을 원하신 것입니다. 좀 모라자면 어떻고 좀 흠결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좀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완벽해서 남들 상처나 후벼파고 철저해서 옆사람 사정따위 아랑곳 않는다면 그게 무슨 완벽함입니까?
주님은 경력도 능력도 글쎄인 자들로 사도단을 꾸리셨습니다. 그저 그런 이들,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하는 이들이었죠. 그러나 이들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자기의 과거를 보니 이해 못할 사람 없다는 것이죠. 그런 자신을 받아들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맛보니 도대체 못받아들일 사람 어디 있겠냐는 것이죠. 나를 선택해 쓰시는 분이신데 내가 누군들 내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니 모자람도 주님의 은혜입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한주간의 속도가 왜 이리 빠른지 절감하시죠.
벌써 주말이 되었네-절로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래도 토요일은 한숨 돌리는 날, 조금은 느긋해져도 괜찮을 듯 싶네요.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큰비가 온다합니다. 비로 인해 바깥일 하시는 분들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오늘의 미션: 성가는 두배의 기도라고 흔히 말합니다. 선율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국인들은 노래를 참 좋아하는 민족성을 지녔다고 하지요. 지금은 조금 덜한 것 같은데 그야말로 골목마다 노래방이 성황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자리에 가면 빼지 않고 부를 노래 한두 곡쯤은 준비되어 있어야 세상살이가 편안하죠. 나의 애창곡 리스트 몇 곡쯤은 있으시겠지요.
그런데 성가는 어떠신가요? 전곡을 외우고 흥얼거릴 곡이 있으신가요? 언젠가 성가책을 전체에서 모르는 노래가 얼마나 될까 살펴보았더니 저도 꽤 여러 곡을 모르는 노래가 있더라구요. 물론 힘을 주는 몇 곡, 사랑하는 찬양이 얼마는 있습니다만.
내가 지니고 갈 말씀을 정하셨다면 내가 평생 찬미할 성가 몇 곡쯤 골라보시고 들어보시는 미션입니다.
내 영혼이 지쳐있을 때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릴’ 노래 정하기, 토요일에 딱 어울리는 미션이 아닌가요.
링크는 굿뉴스의 성가 게시판입니다.
https://maria.catholic.or.kr/sungga/…더보기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마태 8,1-4)
‘전인적인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구현’하는 것, 가톨릭 병원의 이념을 담은 모토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목적은 그냥 육체적인 질병을 낫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첨단의 좋은 의료시설과 정예화된 의료진의 의료기법만 가지고 환자에게 기능적으로 가는 것만으로는 뭔가 2% 부족한 것이라는 거죠. 왜? 예수께서는 불치병, 난치병을 고치심으로써 단지 몸의 온전함이라는 선물만을 주시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병은 사람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태입니다. 그런데 병고로부터의 회복을 통해서 건강해지고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아픔의 제거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것이죠.
나병환자의 부스럼과 종기가 사라지고, 절단되었던 신체 부위에 새살이 돋아난다는 것은 몸의 회복을 포함해서 그동안 비정상적이었던 모든 관계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만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온전해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사제들에게 가서 정해진 예물을 바쳐 확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섞여서 살 수 있습니다. 얼크러졌던 관계가 이제 다 풀렸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이런 지긋지긋한 병이 생기는 줄 알던 이들에게 이 사람의 죄의 댓가가 다 치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치유는 온전한 삶으로 그 환자를 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지긋지긋한 고통을 겪고 난 다음의 나병 환자의 삶은 이제 예전과 똑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변화시킵니다. 그 만남이 이제 그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가끔 병문안을 위해 병원에 갑니다. 가벼운 병이야 위로할 말이라도 있지만 중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위로하는 이나 위로받는 이나 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짐작합니다. 그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손을 얹어 기도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지만, 묵주가 돌고 돌아 끊어지도록 기도하지만, 이번만 살려주십사고 기도하지만 허망하게 끝나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기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하느님께서 냉정하신 것일까, 주님의 권능은 왜 이리 제한적인가, 우리가 뭐 그리 잘못한 결과란 말인가? 질문은 끝없으나 답도 없는 질문, 허공에 대고 허우적이는 질문일 뿐입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앞에 우리는 그렇게 허무를 절감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낡아버려 사라진다는 엄혹한 진실 앞에 놓이게 됩니다.
‘주님, 하고자만 하시면’, 단지 그렇게 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일어날 것이고 주님이 아니라시면 아닐 밖에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렵습니다. 왜 ‘하고자 하시지 않으시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더 철저하게 낮아짐을 배우라시면서 우리가 처한 끔찍한 상황 속에서 다가가고 부르짖으며 청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죠. 나의 기도가 다 들어지니 좋으신 하느님이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절되고 외면받는 듯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여전히 참 좋으신 하느님이심을 아는 것, 이 어려운 일을 해내고 이 힘겨운 기도를 바치라고 나병환자의 입을 통해 당신 앞에 서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하고자 하시면, 제발 그렇게!’
오늘도 병상에서 병마와 싸우는 이들에게 당신 치유가 얼마나 온전한지를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더보기
당신의 하루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나는 무엇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지
‘신경’을 고백할 때 입으로만 웅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2천년 동안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만났는지를 담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는 어제의 강의 잘 들으셨겠지요.
날은 덥고 배는 고프고 졸음은 쏟아지는 가운데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모든 견진 신자들이 봉헌한 시간을 통해
믿음이 한뼘쯤 더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묵상하는 미션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니까 뭐 그런가보다-하고 지나치기 쉽지만
우리 신앙은 우주와 자연이야말로 하느님 계시의 책이라고 바라보았습니다.
위대한 작품에는 작가의 숨결이 묻어 있습니다. 작가의 분신입니다.
세상 만물에는 창조하신 하느님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된 세상을 바라보시며 ‘좋더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접하는 세상 속에 하느님 창조의 흔적을 찾아보세요.
오늘의 미션: 무심히 지나쳤던 그 무엇 안에 담겨진 하느님 창조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쪽지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 놓으시면 더 좋습니다.
유난히 드높아 보이는 하늘, 늘 거기 있었는데 유심히 바라보니 참 좋더라-도 괜찮습니다.
쪼글쪼글해진 우리 할머니의 깊은 주름 속에 한 인생이 겪어온 고귀한 삶이 담겨있었네-하느님께서 그 주름마저 빚어내셨네-그것도 좋습니다.
어김없이 도착하는 지하철의 운행과 나를 위해 차려진 한끼 평범한 식사와 아무리 모질더라도 그런대로 괜찮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 이 평범한 일상 속에 담겨진 하느님 창조의 손길.
창조의 흔적을 발견하면 감탄과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은 이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의 새로운 피조물, 창조주의 걸작품임을 느끼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더보기
마태 7,21-29
실천이 있는 믿음과 실천이 없는 믿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에 자고로 행함이 따라야지-하고 오늘 비유를 알아듣는다면 틀리진 않지만 꼭 맞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 실행한다는 것을 집을 짓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집을 짓는다! 그런데 그 집은 반석 위에도 지어져 있고 모래 위에도 지어진답니다. 똑같이 지어졌기에 겉보기에는 몰라요. 이 사람도 기도하고 저 사람도 기도해요. 베로니카씨도 선행하고 세실리아씨도 선행을 한단 말이죠. 똑같이 집을 짓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초!
이 비유에 앞서 예수님은 열심히 행한 이들이 자신이 행한 일의 목록을 주님 앞에 제시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죠. ‘제가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다 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분명히 행함이 있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행했던 것이쟎아요. 그런데 주님 앞에서 그들의 모든 실천, 행함은 부정당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아니, 예수님 이름으로 예언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 쫓아내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 잘못된 것입니까? 아주 잘한 일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불법이라고 그러시네요. 왜? 그들이 말씀도 안 전하고 마귀와 섞여서 잘 지내고 기적 일으키지 않아야 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들의 행함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실천한 그 기초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잘 행했는데 그 밑바닥에 무엇이 있느냐?
그래서 집을 짓고 안짓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을 짓긴 짓는데 관건은 어느 기초 위에 짓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엉터리 기초위에 집을 지은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너지는 것이라쟎아요. 분명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선교했어요. 그런데 어떤 것이 모래 위에 지은 것이죠. 자기를 기초로 해서 지은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자기 인기,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 자랑을 위해서 이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근사하고 굉장하죠. 으리으리하죠. 굉장히 착해 보이고 아주 성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뭐죠. 자기 드러내려고 겉으로 보이는 그 행함을 열심히 더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하기도 해요. 자기 안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자기의 죄성을 감추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윤리적으로 더 철저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내 영광 위해 남 의식하면서 자기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일뿐이고, 그것이 불법을 행함입니다. 홍수나면 다 휩쓸려 가고 말 것이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그럼 뭡니까? 이들도 하긴 하죠. 집을 짓습니다. 선행 하고 자선 베풀고 기도하고 봉헌하고 다 합니다. 그런데 왜 하느냐? ‘내가 이만큼 선행했으니까 하느님 기뻐하시겠지. 요만큼은 상쇄해주시겠지. 봉사했으니까 주님은 알아주시겠지.’ 이러면서 자신을 뿌듯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봉사하면서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을까.’ 오히려 부끄러워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서 이 모든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영광 드러나면 주님 영광 가려집니다. 내 이름 드높아진다면 그럼 주님은 어디 계시나요. 내가 다 해버렸쟎아요 그러면 예수님 은혜가 어디 있어요? 다 내가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하셨구나.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자격 하나도 없는데 감사하게도 그래서 부끄럽게도 나를 통해서 이런 열매들, 기도를 하게 하시고 기적도 행하게 하시고 사람을 용서하게 하시고 말씀을 알아듣게 하시고 심지어는 전하게도 하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너무 놀라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것이 내가 한 것이라고 자랑이 되고 명예가 될 수 있냔 말이에요. 절대 안되죠.
어디에 지어야 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았더니 시키지 않아도 내가 무엇인가 하게 됩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하고 있어요. 그것이 반석의 집입니다.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직 주님의 은혜 위에만!!…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오늘 저녁 두 번째 강의가 있습니다.
목요일이면 한주간의 피로가 절정에 이른다고 합니다.
금요일은 이제 쉬는 날이 다가오니 피로도가 오히려 덜하다네요.
아무튼 하루 일과 잘 마치시고 저녁 강의에서 만나뵙지요.
오늘은 강의도 있고 하니 가벼운 미션을 드립니다.
나의 성경 구절 정하기 미션입니다.
사제들은 서품 받을 때 서품 성구를 정합니다.
흔히 ‘지고갈 말씀’이라고 합니다.
뭐 늘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품 성구를 마음에 새기며
내가 말씀을 지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지켜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요.
그래서 견진 받으며 내가 평생 품고 갈 말씀 하나쯤 정하면 어떨까요?
이미 성경에서 감명과 은혜받은 구절이 있는 분이라면 바로 그 구절로 하시면 되고
없으신 분들은 평화방송에서 이런 좋은 프로그램이 있네요.
한번 이용해서 정해보시지요.
https://simte.xyz/newyear1verse
시대가 시대니만큼 이런 것도 다 생기네요.
그럼 정하신 분들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더운 날 시원한 바람 한 자락 불기를 기도합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20)
행실이야말로 믿음을 분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고 나쁜지, 얕고 깊은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어떻게 드러났는가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표현은 믿음 자체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순수하고 바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언제나 열매 맺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행위는 결국 내적 믿음의 외적 표현이 되기 마련입니다. 믿음이 뿌리가 되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줄기가 되고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응답이 잎이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내적인 상태, 영혼의 상태를 구성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상태가 온전한가 불순한가에 열매는 달려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 우리의 삶, 우리의 표현은 좋은 나무가 맺는 좋은 열매, 나쁜 나무에서 나타나는 나쁜 열매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보지 않습니다. 아니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보여집니다. 느끼고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죠. 가시와 엉겅퀴인지 포도와 무화과인지, 확인됩니다. 거칠고 찔리고 쓸모없는, 그뿐 아니라 해가 되는지 유익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은 안다는 것이에요.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봉사와 헌신과 희생과 배려의 사람들인지 위선과 무절제와 이기적 자아로 똘똘 뭉친 이들인지 우리의 행실, 맺은 열매의 수준을 보고 우리의 믿음이 평가되는 것이죠. ‘당신들은 왜 그렇게 믿어’-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살아.’ 그렇게 말하곤 하죠.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언어가 거룩하고 정결하고 아름답고 순수하다면 우리의 열매, 곧 우리의 일상과 언어도 거룩하고 정결하고 아름답고 순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기도의 거룩함은 기도 자체의 거룩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순수함은 믿음 자체의 순수함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거룩할 지라도 믿음은 순수할지라도 일상의 언어와 사고와 대인관계와 태도,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그가 무엇을 기도하고 어떻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지가 보여집니다.
마트에 가서 보면 웬만한 식품에는 실명제가 많더군요. 재배자, 생산자 이력추적이 됩니다. 김천에서 박 아무개 농부님이 키워낸 사과, 홍성에서 민 아무개 농부님이 키워낸 한우. 그렇게 어느 고장, 어느 농장에서 어떤 농부가 키워낸 것인지 라벨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내가 키워낸 것은 믿을 만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내가 생산해서 출하한 것은 믿을만하니 안심하고 드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일코너에서 사와서 먹게 되는 것은 참외, 수박, 사과, 포도 열매인 것이지만, 그 농부의 이름을 걸고 있는 만큼 안전하고 품질좋은 것임을 확인하고 소비자들이 과일을 구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그런 존재라는 것. ‘너희의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라.’ 내 행동방식, 태도 나의 삶은 내 것만이 아니라 늘 사람들은 하느님과 연결하여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저 사람의 삶을 보니 그가 믿는 하느님도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저 사람의 말에 가시가 돋힌 것을 보니 그가 기도하는 하느님도 그렇게 까칠한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맺는 삶의 열매는 하느님께 드려질 만한 것인가요, 아니면 하느님께서도 버리시고 싶은 것인가요?…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감싸안으심으로!
매일 신앙의 작은 습관 잘 들이고 계신가요?
눈을 뜨면 기도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말씀 한구절에 기대어 살아보도록 노력하고
마음이 흩어질 때마다 화살기도로 하느님의 현존을 떠올리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하루를 믿음으로 가꾸어줍니다.
지지난 주일 복음 ‘겨자씨의 비유’ 기억하시나요?
아주 작은 겨자씨, 훅 불면 날아가는 그 씨앗이 땅에 심겨지면
저절로 자라나고 가지뻗고 열매를 맺는 큰 나무가 된다는 말씀,
이 말씀은 작은 것이 실은 작은 것 아니었음을 알려줍니다.
실은 인생사는 대부분은 사소한 것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작은 기도가 쌓이고, 작은 귀기울임이 모이고, 작은 미소가 전해지고
아주 작은 나의 선한 마음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그렇게 위대한 작은 것들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습관의 힘을 믿으세요.
믿음은 어떤 거창한 무엇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작기에 소중한 것들로 엮어져 하느님께 가닿게 합니다.
오늘의 미션, 견진 성사를 준비하며 드린 작은 약속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세요.
놓치신 것이 있을 수 있겠지요. 괜찮아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절정은 ‘다시’에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시 마음 먹으면 됩니다.
다시 다독이면 됩니다.
하느님은 ‘끝’이라 하시지 않고 ‘다시’를 허락하시는 너그러운 분이니까요.…더보기
마태 18,19ㄴ-22
몇 년 전 통일 전망대를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고성의 통일 전망대에서는 금강산 끝자락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북녘 땅을 바라보는 성모님 상 앞에서 바치며 단절의 시간 동안 쌓인 불신과 적대의 시선이 하루아침에 거두어 질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손에 잡힐 것 같은 저 북녘의 산하를 오고갈 수 있는 때가 우리의 간절함과 지혜로운 선택으로 앞당겨지리라는 지향으로.
전쟁으로 치루어야 하는 댓가는 이 민족에게 너무 가공할 만한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소멸의 공포는 우리에게 상시적입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분단 모순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가 속박된 삶을 강요받으면서 산다는 것조차 일상화되고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되는 것이겠지요. 분단된 삶의 불편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분단 고착화를 수용하면서 통일이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와 부담을 지레짐작하며 현상 유지를 바라기도 합니다. 통일에 따르는 비용을 계산하면서 통일이 오히려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남북 분단의 역사를 겪은 바 있습니다. 다윗-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은 나누어져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적개심을 키웠습니다. 한 분 하느님을 섬기는 하나의 백성이어야 함에도 갈라진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의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남겼습니다. 분열은 극복되지 못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결국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새로운 영적 백성의 태동으로 하나되는 길을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이 분열이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 예수님도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평소에 기도안하기로 유명한 ^^ 동기 신부와 있을 때 알람이 울리더군요. 알고보니 민족 화해를 위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랍니다. 주모경을 바치고 잠시 통일을 주십사 청했습니다. 다른 기도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 기도만큼은 알람을 맞춰놓고 빼놓지 않고 바친다는, 별로 거룩해보이지 않던 그 동기가 갑자기 대단해 보였습니다. 이 친구한테 이런 면이 있었네 다시 보게되었죠. 그 친구는 자기가 유일하게 빼놓지 않는 기도라고 이 기도의 힘이 어떠한지 곧 보게 될거라고 했지요. 저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믿은 적이 없는데 그 믿음이 부러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새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불리워지는 남북 양쪽의 모순들이 실타래 풀리듯 해결되는 날이 오긴 올까요? 서로를 전멸시킬 수 있음을 호언장담하면서 끊임없이 군비를 증강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무력의 시대가 끝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용기와 결단을 우리는 준비하고 있을까요? 그런 시대와 역사를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이 겨레의 간절함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시도록 우리의 기도가 먼저 더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신 주님,
저희가 모두 주님을 닮게 하소서.
● 사랑으로 하나 되신 주님처럼
저희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 평화를 바라시는 주님,
이 나라 이땅에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게 하소서.
●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웠던
저희 잘못을 깨우쳐주소서.
○ 분단의 깊은 상처를 낫게 하시고
서로 용서하는 화해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 인류의 일치를 바라시는 주님,
갈라져 사는 저희 겨레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소서
○ 저희의 무관심을 깨닫게 하시어
겨레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시고
가진 바를 나누게 하소서.
●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평화 통일을 이룩하게 하소서.
○ 온 겨레가 주님을 믿어
이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평화의 모후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과 함께!
아침마다 성령 송가로 시작하고 계신가요?
하루에 자주 정한 화살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계신가요?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날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떠올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대화 파트너로 삼으셨다는 것이죠.
‘너하고는 말이 안통해’. ‘너랑 더 이상 말하지 않을래’ 그것은 너를 거부하는 것이죠.
그러니 하느님과 대화하려면 성경을 펴들어야 합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단어, 한 구절, 한 문단을 천천히 읽어가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한 단어도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 머물 때 빛을 발견합니다.
그럼 오늘의 미션은
다음 링크의 강의를 듣고 나의 성경을 펴보는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며 ‘어라 성경 안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네’ 감탄해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J8HK82JNr8…더보기
루카 1,57-66.80
신약의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관계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나이가 들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아이 낳으리라는 말씀 앞에서 믿지 않았습니다. 어찌 내게 그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부부가 아이 가지기엔 이미 늦었기에 의심합니다. 마흔둥이 쉰둥이도 아닌 완전 끝둥이죠.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지 못한 것이니 어찌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말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셨고 이는 불신에 대한 하느님의 작은 채찍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즈카리야는 믿음이 없었으나 하느님은 믿음없는 그를 통해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
믿지 않던 즈카리야를 통해서도 정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셨으니 이는 아브라함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살, 아흔살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잉태하지는 않았지만 이사악을 주신다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고 복이었기에 그들을 믿음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에 반응하시지만 불신에도 반응하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불신상황을 바꾸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십니다. 믿지 않고 주저하는 이, 믿음을 잃고 방황하는 이를 다시 믿게끔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믿을 때까지 시간이 지연될 때가 많다는 것이죠. 즈카르야 부부도 온갖 노력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셨습니다.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이 들려도 오히려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런 극적인 반전의 상황을 맞아야 고백하게 됩니다.
곧 나는 급한데 주님은 급하지 않은 것이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내가 급하고 주님도 같이 급하면 제일 좋겠죠. 내가 원하시는 때에 주님이 해결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하느님은 내가 급하다고 하는 순간에 해결하신 적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믿음의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이 대를 잇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25년을 기다린 후 이사악이라는 생명을 잉태하게 만드시죠. 요셉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권력을 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대로 안되고 13년의 좌절이 그를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해방하고 싶었기에 주먹으로 이집트인을 죽여버렸죠. 그러면 백성들이 자기를 따를 줄 알았으나 돌아온 것은 광야의 방황이죠. 40년간에 걸친 방황. 다윗은 기름부음 받고 바로 왕이 되지 않고 20년간 사울의 질투로 방황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 뜻대로 안된다는 것이죠!!
믿음은 나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의 불일치에서 발휘됩니다. 하느님도 급하고 나도 급하다면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어요. 그러나 그 시간이 불일치합니다. 그렇게 응답이 지체되면 믿음의 크기가 작아집니다. 즈카리야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입니다. 갖은 애를 썼건만 대를 이을 자식이 생기지 않는 불신의 조건을 그는 견디어 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시간을 살겠다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문제의 경중이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불치병이나 감기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살면서 응답이 지체되고 우리 믿음이 작아지게 될 때 내가 누구인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창피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되나.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루어질 수 있는 지향만 기도합니다. 이 정도는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이 있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이 안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상식과 노력으로 해결한다면 뭐하러 기도하나요. 우리의 지향은 항상 초 상식이어야 합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만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능성, 나의 현실을 넘어서는 지향을 품고 기도할 때 그렇게 하느님이 일하시는 분임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가능함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불가능을 이루시는 분, 그분이 주님이십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힘차게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 하느님 안에서!!
박경리(소화 데레사) 선생의 시 한편으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 -박경리 소화 데레사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게
천수(天水)를 주시던 당신
삶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삶은 고역이기도 하지만 소풍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은 날도 있지만 설레는 날도 있습니다. 하루의 삶, 그 수고를 통해 갖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삶은 너무 신비롭고 장엄하고 애틋하고 통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션은
내가 살아온 삶을 고요히 들여다 보세요. 지난 견진 강의 때 말씀드린 대로 틈나는 대로 삶을 관조해보세요. 시간은 30분 이상이면 좋습니다. 주님과 나를 위한 시간으로 투자해보세요. 한해 한해, 한계절 한계절, 순간 순간 꼼꼼하게 들여다 볼수록 내 삶 안에서 일어난 그야말로 놀라운 일들이 다시 되살아 납니다.
시간을 마련하시고 기도할 수 있도록 적당한 분위기도 만드시면 좋습니다. 촛불도 좋고 커튼을 슬쩍 가리는 것도 좋습니다. 고요한 시간 속에 호흡을 충분히 느끼세요. 들고 나는 숨결의 흐름을 느끼시고 되돌아가고 싶은 어느 때를 정하세요. 나는 아주 옛날, 국민(초등)학교 오학년 때로 가야지. 좋습니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길을 걸어보세요. 학교 창밖의 풍경도 떠올려 보세요. 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껴보세요. 까무룩하며 떠들던 어릴 적 친구들도 만나보세요. 엄마가 지어주신 완두콩 넣은 도시락도 맛보세요. 그때 내 주위를 채우던 거리와 풍경과 사람과, 겪었던 이런 저런 일들 속으로 들어가세요.
중요한 것은 무엇이 떠오르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주님과 손 잡고 철모르던 나를 다시 보듬어 안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삶을 들여다보는 그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일으켜 주십니다. 어떤 일이냐구요? 글쎄요.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과 함께 쓰는 나의 자서전 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 곁에 계셨던 주님을 더욱 친밀하게 만나게 됩니다.
바쁜 월요일, 이런 시간 꼭 내시길 바랍니다.…더보기
마르 4,36-41
주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은 이방 지역입니다. 주님이 그곳으로 가자고 하신 까닭은 그들에게도 말씀이 선포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센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치고,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뱃전을 친 파도가 삼킬 듯 덮칠 때 누군들 공포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온몸으로 바람에 저항하면서 키를 놓치지 않으려고, 또 돛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근육은 터질듯 팽팽하게 부풀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가 저녁입니다. 어둠은 공포심을 부풀립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이런 야단법석과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시죠. 상상이 안 되는 광경입니다. 사실 이 대목은 흉흉하게 일렁이는 호수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주님의 고요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입니다. 어느 순간 제자들은 잠드신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들의 목소리에 깃든 노여움과 서운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사건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기적으로 읽지만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이 본문이 복음을 기록할 당시의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망해 나그네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야말로 ‘거센 바람’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배의 상황과 같습니다. 신앙조차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마르코는 그 상황을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 어쩔 줄 몰라 했던 제자들의 모습에 비추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듯 보일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초월이라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지혜와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의 극한에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마르코는 ‘일어나다’, ‘꾸짖다’, ‘말하다’라는 세 개의 동사에 담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다’라는 단어는 부활을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마르코는 이 단어를 통해 주님께서 죽음의 너울을 벗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 가운데 현존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거센 바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실업에 대한 공포, 자녀 교육에 대한 공포,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는 이들이 경험하는 공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현실을 꾸짖고 계십니다. 누가 꾸짖을 수 있습니까? 꾸짖음은 자기 욕심을 여읜 사람, 그래서 맑아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 아니고는 사악함과 더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세태를 꾸짖을 수 있는 맑은 정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교회조차 영적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가난해지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는 교회가 이 시대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버려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과 교회만이 이 시대의 공포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호수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호수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말씀, 그 말씀이 들려올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하느님 성품의 씨앗을 보게 해줍니다. 그 빛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우리가 훨씬 큰 존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말씀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울화로 속이 타지도 않고,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불뚝거리지도 않고, 절망과 낙심의 물결에 휩쓸리지도 않습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폭풍을 잠재우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은 주일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주일(主日)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이다.
주일이 일요일인 까닭은 빛을 주신 해의 날(SUNDAY)이기 때문이다.
주일은 죄로 어둠 속을 헤매는 인간에게 빛을 주신 날이다. 이 빛은 곧 그리스도의 승리인 부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일은 한 주간이 첫째 날이다. 창조주께서 빛을 창조하신 첫날이 주일이다. 빛을 창조하신 빛의 날에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래서 옛날부터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을 거룩히 지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주일을 「작은 부활 주일」이라고도 했었다.
구약에서의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 창조 사업을 하시고 쉬신 날이다. 그래서 야훼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출애급기 20ㆍ80)고 하시면서 구약의 계명을 주셨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정점이 되고 또한 교회가 출범한 성령 강림 축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날을 제자들은 「주님의 날」로 전했다.
주일은 처음부터 쉬는 날은 아니었다. 다만 주님의 부활은 기념하고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었다.
「안식일 다음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고 한자리에 모였다. (사도행전 20ㆍ7)」그러므로 초대 신자들에게는 주일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서 쉬는 날로 정한 것이다.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는 의무가 지워지기 시작한 것은 6세기부터였다. 그러나 교법 상으로 주일에 미사에 참례하고 쉬어야 하는 규정은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의 칙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도 이렇게 말했다.
『주일을 종교적 의식을 갖추어 지내기를 신도들과 사도 시대의 사람들이 제정했다. 그 이유는 그날에 우리 구세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라고 부른다.』(Sermon 251 De Temd)
미션: 주일 미사를 잘 드리는 것은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일 미사를 잘 드릴 수 있을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위해 몸단장하고 거울도 한번 더 보듯,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위해 미리 독서 복음 읽고 마음에 한구절 담아가시고, 내가 드릴 기도 지향도 하나 마련하시고, 무엇보다 한주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잠시라도 돌아보면서 ‘내가 이 이야기는 주님께 꼭 드리고 와야지!’ 이런 마음이라면 최고의 예배를 봉헌할 수 있겠지요.…더보기
마태 6,24-34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이 잘 풀릴테니 다독이거나 위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는 제자로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걱정하지 마라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걱정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 보시기에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숨의 문제, 몸의 문제 때문에 걱정합니다. 우리 걱정의 대부분은 거기서 생겨납니다. 생존이 우리의 걱정을 발생시키고 가중시킵니다. 살아있는 한 걱정에서 벗어날 길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목숨의 문제로 인한 염려와 걱정은 우리 상황을 호전시킬 힘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걱정없이 사람 볼 때 ‘저 사람 참 믿음이 좋네’ 보다는 솔직히 ‘생각없이 대책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걱정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하는 그런 이상한 기류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은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기에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걱정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시간, 내일이라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걱정은 사람이 가질 필요가 없고 무용한 것이지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우리의 마음을 깨어있지 못하는 악 세 가지를 루카 복음에서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언급합니다. 곧 삶의 염려는 하느님을 내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음에서 시작됩니다. 하여 방탕과 만취와 동급인 악이 일상의 근심인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는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의 새들, 들의 나리꽃보다 더 귀하게 나를 여기신다는,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나이기에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나를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자녀이기에 책임지시고 먹이시고 살리신다는 믿음이 걱정을 묶습니다.
또 나보다 더 나를 아신다는 믿음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소상히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 나의 식사 메뉴에도 나의 패션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믿기시나요 하느님께서 나의 쉐프이시고 코디네이터라는 사실이. 주님이 우리의 아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상황을 알아주신다는 것이죠. 그때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감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순간, 내 것으로 살아가게 되고 나의 유한한 자원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돌보심으로 산다는 믿음이 붕괴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알고 계심을 인정하는 이에게는 걱정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삶에 나타나면 아버지의 풍성함과 내가 연결됩니다. 우리는 굶지 않고 헐벗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님은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워주시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현실이 각박하고 잔인하더라도 그분을 바라보는 이에게 마음은 물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우심’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최우선적인 것이고 유일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곁들여 받게 될 것에만 집착하기도 합니다. 왜곡된 걱정인 것이죠. 진짜 걱정할 것은 따로 있고 내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우심에 마음두고 있는가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걱정할 것, 찾을 것은 적어도 목숨과 몸은 아니라는 것, 불신의 세상에서 그런 정도의 믿음이 나를 지켜나가고 있을까요?…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성령 송가에 이 대목이 정말 간절한 날들입니다. ‘무더위에 시원함을’.
영으로 오신 하느님, 성령은 불꽃으로도 상징되는데 시원함이라니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더위에는 선풍기, 에어컨을 틀어야 마땅합니다. 부채도 유용합니다.
그런데 마음 속이 들끓어서 소위 열받아서 생기는 경우라면 좀 다르겠지요.
그런 열기라면 성령을 청하는 것이 특효입니다.
마음이 가라앉고 선선해지면 무더위도 조금 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성령 하느님을 청하고 동반하여 시원한 바람결 같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미션: 견진 성사 첫째 강의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들’ 동영상을 편안히 보시면서 믿음을 살찌우는 시간을 가지세요.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HVQbnc12q7M…더보기
마태 6,19-23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라! -하늘에 어떻게 보물을 쌓을 수 있나요? 사제들이 이렇게 본문을 악용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다 쌓으라는 말은 교회에다 헌금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무금 넉넉히 책정하고 주일 헌금 이왕이면 한 장 더 내십시오. 하늘이 통장 계좌에 차곡차곡 잔고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당이나 기관 운영으로 골머리를 앓는 사제들을 위해 이 본문을 마련해 두신 것일까요.
실제로 본문은 교회의 재정을 늘리기위해 신자들의 봉헌을 독려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땅에다가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도둑도 염려가 되고 좀먹고 녹슬 염려가 되지만 그 재물을 교회에 헌금으로 내게 되면 그 즉시 그 재물은 하늘 위에 그 사람의 사유재산으로 쌓이게 되고, 그가 천국에 갔을 때 그가 쌓은 만큼의 하늘보화를 상급으로 받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그러나 그건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상급과 더 많은 보화를 쟁취하여 하늘에서조차 승자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인간들의 못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됩니다. 정말 그렇다면 먹거리조차 마련하기가 힘들어서 헌금은 생각도 못하다 죽은 가난한 사람들은 극빈자들은 천국에 가서도 똑같이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건가요? 뭐 쌓은 게 없잖아요? 하늘에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천국에서도 자기가 땅에서 획득하고 성취하고 쌓은 것을 근거로 해서 부자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땅의 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한 심보로 교회에 헌금을 열심히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이 아니라 지옥의 노자돈을 열심히 저축한 겁니다.
이 보물의 이야기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의로움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그 대주제 속에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표피적 지상적 이해를 가지고 진리를 전하는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조심하여라. 주의하여라.’ 곧 우리가 사랑으로 완성된 계명을 전할 때에 그 내용이 아닌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것으로 전하게 되면 큰일난다는 경고가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어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문제로 설명하셨고 오늘은 보물의 문제로 다시 한번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죠. 따라서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은 그 말씀의 지상적 이해와 천상적 이해의 대조로 보아야 됩니다. 땅에다가 보물을 쌓아 놓은 사람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다- 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란 말입니다.
‘지혜와 지식은 풍성한 구원이 되고 주님을 경외함은 시온의 보화가 되리라.’(이사 33,6)
이것이 보물입니다. 히브리어로 ‘오짜르’, 보물은 주님의 구원, 지혜, 지식, 경외의 풍성, 주님을 경외함 등을 말합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게 돼서 그 주님을 내가 경외하게 되었다면 그 안에 보물이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결국 그 보물을 담고 있으면 하늘이 된다는 것이죠. 그 진리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깨닫게 되면 그는 이미 하늘이 된 것이고 하늘 안에 보물을 쌓는 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유치하게 ‘너희들 말이야, 땅에서 너희들만 잘 먹고 잘살고 그러면 절대 안 된다. 교회에 헌금 많이 해야 해.’ 이런 말 하셨을까요? 그 유한의 실존에 사로잡힌 그 지상적 존재가 무한의 보물을 선물 받아서 하느님의 천사적 생명에 참여하는 그런 어떤 강렬한 생명의 몰입, 그것이 바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들이 본당 운영에 마음 쓰고 고민하게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헌금 봉헌할 때마다 조금 더 내야하나 하고 쓰잘데 없는 생각은 아예 던져 버리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과 내가 교회 유지를 위해 뭔가 봉헌하는 것은 놀랍게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뜯어내지 못해 안달하시지 않습니다.…더보기
새 하루를 축복합니다.
오늘 하루 ‘성령송가’로 시작하셨나요. 가능하면 천천히 말 마디를 음미하며 바쳐보세요.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 빛, 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 칠은 베푸소서.
덕행 공로 쌓게 하고,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 복락 주옵소서.
화살기도 - 나 태 주 시인
아직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아직도 만나야 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주소서
아멘이라고 말할 때
네 얼굴이 떠올랐다
퍼뜩 놀라 그만 나는
눈을 뜨고 말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화살기도에 관한 말씀
화살기도가 뭘까요? 주님과 “일치”하며 머물기 위해 하루 종일, 다양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주 반복할 수 있도록 암송하기 쉽고 매우 짤막한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짧은 기도입니다. 그런 다음 활동에 앞서 “오소서, 성령님” 하고 반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짤막하지만 주님과 계속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지요! 우리 마음이 주님과 계속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께도 그걸 보냅시다. 그리고 그분의 답장을 건너뛰지 말고 읽도록 합시다. 주님께서는 항상 답장하십니다.
오늘의 미션: ‘화살기도’ 자주 바치기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마치면서, 두렵거나 지겨운 순간에 그 외에 수시로 화살기도를 통해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려 드리세요.
저는 ‘견진성사를 받는 형제자매를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화살기도를 바치겠습니다.…더보기
‘이렇게 기도하여라’-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문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 나라 운동의 헌장과 같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가득 들어있는 기도 되겠죠.
기도에 대한 대전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언부언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아람어로 ’파타파타‘라고 하는데 의미없이 무엇인가 채우려고 내는 소리입니다. 아이들이 말 배울 때 어버버버 하는 그런 것이죠. 그런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된다, 곧 주문외우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는데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압바’(abba-아람어) 하느님은 압바, 아빠이십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말과 발음이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유다인들 중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들이 예수님 말고도 분명 있었기에 예수님이 아빠라고 부른 것은 유별난 것은 아니라고 평가절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빠는 하느님과의 약속, 언약을 내포하는 호칭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애초에 창조주와 피조물 -> 왕과 백성 -> 목자와 양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엄위하신 하느님이 목자 되신다는 것은 친밀감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이르러 아버지와 아들 -> 그것도 성에 안차니까 신랑과 신부 -> 그보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갑니다. 내안에 너, 네 안에 너 이런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하느님과 히브리인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목자와 양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나의 목자시니’ 였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신 것은 획기적 전환입니다. 우리는 이제 양떼가 아니라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 8,15-16) 우리가 눈을 열어 하느님이 아버지 되심을 볼 수 없으니까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기도하라는 것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지 않고는 우리가 아들 딸 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르라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걸고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죽어서 하느님의 약속을 이루어내어 너희를 반드시 아버지의 아들 딸로 만들어 내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한마디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이 사랑을 묵상하면서 그렇다면 따라야할 삶의 과제가 있는데 하느님께 더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모든 필요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사고도 그분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가르치시고 나서 6장 끝에 그러신단 말이죠. ‘얘들아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아라’, ‘그리고 들에 핀 나리꽃들을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 보아라. 농사 안짓고 길쌈 안해도 다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다 먹이시고 기르지 않냐. 하물며 너희는 어떻겠니.’ 그리고 결론이 뭐에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 끝의 결론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사랑, 완전한 의존 이것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고백하고 부르는 우리 모두의 즐거운 삶의 숙제입니다.…더보기
마태 6,1-6.16-18)
조금 일하고 많이 인정받는 것이 성공의 비결아닌가요. 열심히 최선을 다했건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기도 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힘들게 했던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공정한 보상 체계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력에 따르는 정당한 댓가,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인정받는 것이든 꼭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그렇습니다. 기도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도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봉사와 봉헌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널리 확산되지 않는다면 멈추게 됩니다. 무엇인가 변화될 미래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기도하고 봉사하고 봉헌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헛되게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아무런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으로부터 오는 보상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죠. 핵심은 ‘숨은 일’에 있습니다. 숨은 일을 바쳐라, 그러면 숨어 계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보상이 있다. 하느님의 인정하심, 하느님의 알아주심이 관건이다-이런 말씀이죠. 우리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숨은 일을 바쳐서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번듯하게 알아주는 일이, 알려지는 일에 마음이 끌리는 법이라서 그렇지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젊은 날 이땅에 오셔서 평생을 복음을 선포하는데 헌신하신 성재덕(Pierre Singer) 신부님은 성가 소비녀회를 창설하셨습니다. 그 수도회에는 제가 누님처럼, 이모처럼 여기는 많은 수녀님들이 계십니다. 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제직을 꿈꾸게 한 성가 복지 병원을 운영하는 수도회입니다. 어릴 적에 그 수도회 회지에서 읽은 글이 저한테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창설자 성재덕 신부님이 수녀님들에게 남겨준 수도회의 모토 같은 글입니다.
'기뻐하라 소비녀'
기뻐하라 소비녀!
만일 너를 몰라주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도 기뻐하라
만일 네 정신과 육신이 못 생겨도 기뻐하라
만일 다른 사람들이 네 뜻을 반대해도 기뻐하라
만일 네게 천한 일을 시켜도 기뻐하라
만일 너를 쓰지 않아도 기뻐하라
만일 네 뜻을 청하지 않아도 기뻐하라
만일 너를 믿어주지 않아도 기뻐하라
만일 너를 말째로 두어도 기뻐하라
만일 너를 한번도 찬양하지 않아도 기뻐하라
만일 너를 모든 사람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아니하여도 기뻐하라
너를 몰라주어도 기뻐하라,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의 작은 여종(소비녀), 그 말씀을 지니고 평생을 수도자로 자신을 닦아 나갑니다.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알아주시면 그것만큼 황홀하고 든든한 일이 없을 테지요. 그 마음을 다시 지니도록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드러난 일에 관심 없으시고 감추어진 숨은 일을 주의깊게 보고 계십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3-48)
오늘 복음처럼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같이 사는데 서로 마음이 불편한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으니 과거형만은 아닙니다. 소임이 옮겨질 때마다 늘 긴장하게 되는 것은 이번에는 또 누구와 살게 될까, 별탈없이 살 수 있을까-사제 생활의 주된 스트레스입니다. 유난히 나와 맞지 않는 신부님과 살 때, 솔직히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냉담하지 왜 자꾸 성당에 나와 내 속을 긁어놓을까 싶은 신자도 왜 없었겠습니까? 그야말로 ‘내가 이러려고 신부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 지경’이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신출내기 신부라고 잔소리가 심했던 신부님, 당신을 무시한다고 오해의 눈길을 거두지 않던 수녀님, 왜 더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채근하는 신자들, 사연도 참 가지가지였습니다.
불편한 관계를 극도로 싫어하건만 어떻게 해야 풀릴 수 있는지 길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엉성하게 그 소임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간 적이 대부분입니다.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를 사랑하라’는 너무한 말씀 앞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너무 심한 요구이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내게 도움이 되고 나를 존중해주고 나를 알뜰히 챙겨주고 죽이 맞는 이들을 사랑하고 감싸고 함께하기에도 역부족인 판에 ‘원수같은 그’를 사랑하라니요. 그를 사랑하고 받아들였어야 한다니요. 그저 무관심해지는 것만도 벅찬데 사랑까지는 결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해야만 하느님의 자녀이고 완전한 사람이 된다니. 문제가 너무 어려워 풀 가능성이 하나도 없기만 합니다.
그런 극단적 사랑은 내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완전한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옵니다. 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노상 배신하고 기회만 있으면 하느님을 멀리하려 하고 말씀과 가르침은 등한히 하고 주님을 못박고 난도질하고 모독하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우린 그렇습니다. 얼굴 들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와 화해하시고자 당신은 온갖 고초를 죽음까지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로마 5,10)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이해하려면 원수 사랑이라는 이 극단적 사랑을 살아보려고 몸부림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것인지를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고 커다란지를 간신히 알게 되지 않을까요?…더보기
마태 5,38-42
형제들만 있는 집이다 보니 어릴 적에 심심찮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잔뜩 부어터진 우리를 앉혀놓고 말씀하곤 하셨죠. ‘지는게 이기는 거다.’ 속으로 화가 올라있던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지 어떻게 이기는 거야.’
경쟁이 이다지도 치열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월드컵도 이제 막 시작되는 이 마당에 지는 것, 패배는 수치이고 조롱거리이며 악몽입니다. 이겨야 합니다. 상대를 거꾸러 뜨리고 짓밟고 때로는 온갖 비열하고 추악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승자 독식의 세상이니까요. 내가 물러나면 나를 밀어낼 것이니까요. 지는 것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겨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져줄 것을 요구하시죠. 몇 번이나 말씀 드린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는 힘이 없어서 지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므로 져주셨습니다.’ 오른 뺨을 친다는 것은 극도의 모욕을 담고 있습니다. 대개 오른손 잡이일 터이므로 오른 손으로 누군가의 뺨을 치게 되면 상대편의 왼 뺨을 타격하게 됩니다. 손바닥으로 칠 경우에 그렇죠. 그래서 왼 뺨을 친다는 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치는 것입니다. 강도는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 더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상대의 인격 마저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모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른 뺨을 맞으면 아프지는 않더라도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이죠. ‘너를 인간으로 보지 않아’, 뭐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참으라니요. 게다가 왼 뺨마저 내밀라니요. ‘네 속이 풀릴 수만 있다면 난 괜찮으니, 이쪽도 때려라.’ 이거 인간적으로 너무 한 것 아닌가요. 복음은 때로는 아주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태 복수법은 법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내가 피해를 당한 그대로만 보복 내지는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이상은 안됩니다. 인간은 내가 당한 것 이상을 상대가 겪어야 직성이 풀리는 보복 감정이 작동하지 않도록 제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대로 갚아 주는 것까지는 허용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였던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실은 동태 복수란 불가능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그 문제를 슬쩍 비꼬아 소재로 삼았습니다. 샤일록은 살 한덩어리를 가질 수 있지만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되었습니다. 애초에 내가 겪은 딱 고만큼 상대도 겪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꼭 복수해야겠니’하고 물으시는 것이죠. 그래야만 직성이 불리고 분이 좀 삭혀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복수했건만 여전히 찜찜하고 너도 당하라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했는데 오히려 내 마음도 불안하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죠.
당해주는 것이 정답이다-‘다른 뺨도 내밀어라’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심지어 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서서 그를 섬기고 아껴주고 사랑하라고 하실 때는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관대하고 넉넉한 사람이 아닌 것이죠.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해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채찍질을, 가시관을, 못박음을 거침없이 당신의 몸에 가하는 이들을 향해 그렇게 하라고 내어 주신 것이죠. 너희의 분노가 잠재워질 수 있다면, 너희의 화가 가라앉을 수 있다면, 너희의 미움이 해소될 수 있다면 그렇게. 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만 스쳐도 억울해서 절절매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사랑은 이렇게 당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것이라고, 사랑은 절대로 기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사랑은 처절하게 자신을 지워 버릴 때만 완성된다고- 그러니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겠느냐고. 저는 쉽게 답할 수 없음에 마음이 천근같습니다.…더보기
마르 4,26-34
‘조급한 것은 마귀적’ 작가 C.S 루이스의 말입니다. 각종 범죄 타락은 조급에서 비롯됩니다. 빨리 승진하려는 욕망은 뇌물로라도 이루려 합니다. 빨리 가겠다는 마음은 과속하게 되고 사고로 연결됩니다. 역대 대통령은 자기 시대라는 함정에 쉽게 빠집니다. 재임 중 국가의 틀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의욕이 지나치니 무리수 쓰게 합니다. 그래서 순간은 해결될지 몰라도 부작용을 야기하죠. 조급함의 폐해이죠.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가 뿌려지니 저절로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이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하시죠. 하느님 나라는 노력의 열매가 아닙니다. 복음에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서’, 곧 열심히 일했단 거죠. 그런데 이 농부는 그 씨가 어떻게 자랐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 큰일이 이루어졌나요?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다보니까 이렇게 큰일이 되었습니다. 다 하느님의 은혜죠 뭐.’ 노력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단 것이죠.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지만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는, 설명불가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은혜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주님이 부어주시지 않으면 노력은 노력으로 끝날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합니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 (1코린 3,6-7) 나는 씨를 심었다-노력했다는 것이죠. 아폴로는 물을 주었다-노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지막에 뭐라 그러나요.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노력과 애씀에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그 모든 심음과 가꿈이 헛수고일 뿐입니다. 자라게 하는 것,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을 가치있게 하고 생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항복이 있을 때,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조급해한다고 문제가 바뀌지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급합니다. 경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 처리 할려고 애쓰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빈손입니다’ 고백하는 순간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아등바등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은혜는 맡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맡김은 시간의 기다림을 전제합니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곡식이 영글었는데 여름에 영근 것 아니고 수확 때 되니까 영글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안익지-조급해 하지 마세요. 아직 가을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 인생에 아직 수확의 가을 아니기 때문에 설익은 것입니다. 봄이고 여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과일, 멍요. 설익은 과일이에요. 설익은 것은 아무리 달콤한 종자라도 제 맛이 떫어서 시어서 못먹습니다. 하느니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빨리 받으려고 하면,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설익은 것 먹게 됩니다. 가장 맛있는 밥은 뜸들인 밥, 삶에서 이런 여유가 필요하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 시간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내 스케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는 몇 살에 뭐하고 뭐하고.’ 좋습니다. ‘몇 살에 결혼하고 몇 살에 몇 평짜리 아파트사고.’ 그러나 그대로 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것은 나의 계획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계획이 좌절되면 하느님의 계획도 좌절되었다고 착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때를 알고 계십니다. 추수의 때를 가장 잘 알고 계시죠. 그래서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마음의 여유 가져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은혜의 반대쪽에 있죠. 내 뜻이 좌절되고 무너진다면 아직 추수 때가 아닌 것이죠. 지금 뜸들이는 시간이구나- 이런 마음이 하느님의 열매맺음으로 귀결됩니다. 저는 그래서 기다릴 작정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맹세하지 마라, 맹세를 금지하신 말씀은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맹세, 약속, 서원, 다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맹세를 중하게 여기라가 아니라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새끼 손가락 걸며 영원하자던 그대는 지금 어디에’(김현식 ‘추억 만들기’)라는 노래도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약속 자체가 무효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느님께 드린 맹세와 하느님께서 수락하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진 인연 조차 영속적이지는 않다는 것일까요?
그러고 보면 숱하게 맹세하고 어마어마하게 약속하고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서원하고 스스로에게 참 많이도 다짐하긴 했습니다. 돌아보면 지킨 것보다는 어긴 것이 더 많습니다.
성 목요일 주교좌에 모여 사제들은 사제 서품 갱신 예식을 갖습니다. 서품 받으면서 하느님과 신자들 앞에서 발한 서약을 상기하면서 하느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약속하지요. 그때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지난 일년 간 서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약속의 내용조차도 까맣게 잊고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차, 내가 이런 약속을 했었지. 무엇을 약속했는지도 기억하지 않으니 지킬리는 만무입니다. 땅에 엎드려 모든 성인들의 전구하심을 청하며 때로는 눈물콧물 흘리면서 서품 받던 그 순간은 분명 진실하였을 것이나 기억은 흐려지고 마음은 물러져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밥 한 번 먹자’.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인사치레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락할게’, 그렇게 연락 안하고 멀어진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을 할 때도 실은 대충 하자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해 드릴께요.’ 불발된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야말로 헛된 맹세와 가벼운 약속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맹세에 충실하고, 그 약속에 항구하였다면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는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맹세를 금하신 것이 이해됩니다. ‘너희는 절대로 그 맹세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희의 의지는 그렇게 굳건하고 한결같지 않아. 만일 그 맹세와 약속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희 자신을 과도하게 믿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제넘게 무엇인가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 성경은 통상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옛 약속과 새 약속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약속의 말씀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만이 취소되지 않고 변경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약속입니다. 불변의 약속입니다.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언하신 당신의 맹세입니다. 끝까지 건져 내겠다는 맹세이고 기어이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며 기필코 다가오시겠다는 서약입니다. 하느님의 맹세와 약속과 서약. 그것만이 남아 있을 것이죠.
그래서 약속 파기를 밥먹듯이 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다시금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죠. 주님, 그리하여도 저도 약속의 무게를 조금 더 느끼면서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민망한 기도를 바치면서 말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 5,27-32)
실제적인 간음만이 간음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간음도 단속하도록 예수님은 요구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정결’이라는 덕목으로 설명합니다. 남녀 사이에는 갈림없는 사랑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죠.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몰입하여 모든 이를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는 그 길을 제시합니다. 사랑이 욕망으로 변질되면 두 마음, 세 마음이 되어 버리고 남용되고 부패하게 된다는 것이죠.
정결은 성적인 에너지를 우리가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 시대 인간의 성에 대한 이해는 더이상 전통적 규범을 수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성은 상품이 되고 무한 추구의 대상이 되어 갑니다. 그 속에서 정결하게 산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혹은 인간을 억압하는 혹은 너무나 구닥다리의 무엇으로 치부됩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적 방종과 스캔들이 파문을 일으키고 교회에 치명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정말 세속, 마귀, 육신이 결합하여 공세를 퍼붓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많습니다. 정결은 이제 존재감이 없는 덕목으로 전락해버린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느 원로 신부님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기자는 평생 교회에 헌신하고 신자들을 사랑해왔다고 인정받는 존경받는 신부님께 질문합니다. ‘신부님, 어떻게 사제 생활 60년 이상을 그렇게 오롯하게 기쁘게 살아오실 수 있었는지요?’ 아마 이런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이럴 것입니다. ‘매일 같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던가 ‘하느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청했다’던가 그도 아니면 ‘인내를 가지고 하루를 충실히 살려고 했다’ 뭐 그런 대답이 기대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노신부님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그러게 말이오.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그러다 보니 어느새 60년이 넘게 흘렀네요.’ 저는 그 대목에서 공감할 밖에 없었습니다. 유혹이 왜 없겠습니까? 힘든 순간 얼마나 많을까요? 보람된 일만 넘쳐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때로는 신자들과의 충돌로 인해, 기도 조차 할 수 없는 어두운 시간도 지났을 터이고 힘에 부치는 날들도 적지 않았겠지요. 그럴 때마다 오늘 그만 두어야 하나, 내일 때려쳐야 하나 고민하고 속상해하기도 하면서 지내는 세월이 쌓여 60년이 훌쩍 지나지 않았을까요. 안전한 길이 아니라 어렵고 고단하지만 하루 하루를 더 뜻안에 살아 보려는 애씀이 얼마나 고귀한가요.…더보기
마태 5,20ㄴ-26
본래 유다교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속죄를 위한 제물드림을 예배의 기본 시스템으로 합니다. 그러니 예물을 드리는 것은 나와 하느님사이에 틀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실컷 싸우고 성질부리고 온갖 욕설 퍼붓고 죽도록 미워하고 나서 그저 예물 드리면 해결됩니다. 여전히 그 사람과는 적대적인 관계여도 됩니다. 예물 드려서 하느님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니까요. 쉬운 용서로 마음의 부담을 덜면 그만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너무 좋아질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여전히 그대로이거나 더 악화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대당명제는 무엇인가요? 형제와의 관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와의 화해가 수반되지 않는 모든 예물봉헌은 다 헛것이 된다는 일침입니다. 형제와의 회개, 관계의 회복이 없는 예배의 무용성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죠. 아무리 많은 예물을 바치더라도 아무리 많은 봉헌이 따르더라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동안의 통념에 대한 반격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예물은 소나 양이나 곡식 제물 같은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의 증오를 멈추고 공격을 거두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외 다른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느님을 너무 오해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참된 회개와 화해 위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얄팍함은 하느님과의 화해와 인간 관계의 화해를 분리합니다. 하느님과는 잘 지내지만 사람과는 그저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라나 명백히 진정한 화해에는 대신적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인적 차원이 있죠. 그리고 대인적 차원이 대신적 차원보다 더 우선합니다. 사람과 먼저 화해하여야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성당에서는 천사처럼 기도하는 주부가 집에만 가면 패악을 피우고 잔소리 잔소리 그런 잔소리 없고, 집안은 난장판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정돈되어야 할 것은 집안 청소하고 밥 잘차리고 모두가 돌아와서 편안하게 쉬도록 준비하는 것이죠. 그것이 먼저에요. 성당에서는 썩 괜찮아 보이는 봉사자가 직장에서는 갑질을 하고 아랫 사람을 수하처럼 부리고 심기를 살피게 만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실제적 불신입니다. 먼저 정리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의 변화인 것이죠.
회개의 징표는 구체적이어야만 합니다. 제대에서 강한 사제가 있습니다. 제대 위에서는 사랑을 입에 달고 삽니다. 용서와 회개를 목소리 높여 선포합니다. 그런데 제대 위에서 내려오면 완전 달라집니다. 싸늘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변변치 않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룩한 미사는 전례의 거룩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거룩함에서 비롯되지 않는 거룩함은 위선일 뿐입니다. 너무 너무 강론도 잘하고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기도하건만,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있다면. 선교는 물건너 간것입니다.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지들끼리도 저렇게 불화하며 사는데 무슨 사랑 나부랭이 타령이냐.’ 대번에 그런 반응이 나옵니다. 제대에서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내 자리에서 강한 사람이 진짜배기입니다. 어디서 우리의 승부가 갈리는지 분명합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7-19)
율법과 예언서 곧 구약 성경을 완전히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완성하지 않으시면 구약의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미완성, 미완료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 들어가셔야 구약이 완성되고 본문은 꽉 채워진다-그런 뜻입니다. 퍼즐 맞출 때 마지막 한 조각이 채워져야 완성되듯 예수님이 그 마지막 퍼즐이 되셔서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하셨다-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결론나지 않으면 구약은 그저 헛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말씀의 일점일획을 다 이루신다는 뜻은 율법서 예언서의 가르침, 계명과 율법을 예수님이 남김없이 지키셨다는 뜻은 분명 아닙니다. 왜냐면 만일 그렇다면 안식일도 잘 지시키고 부정한 죄인들과 친구삼아 돌아다시니시고 이러면 안된단 말이죠. 그것은 다 율법에서 금한 것이고 그렇다면 꽉 채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완성이 도대체 뭐냔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 완성일까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세목을 다 지키셔서 그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심판과 저주를 다 받아내심으로 말미암아 그 율법이 더 이상 당신 백성을 짓누르지 못하게 만드신 것-그것이 완성입니다. 어김없이 다 지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으로 고소당해서 죽으러 오신 것, 이것이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준수하시지 않고 율법에 의해 심판 처형되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으니 우리도 ‘잘 지키자’- 이렇게 되면 이건 그리스도교 가 아니에요. 우리 지킬래야 지킬 수도 없고 이미 안 지키고 있지 않나요. 구약의 율법 뭔지도 모르지 않나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판을 받아 죽으심으로 율법서와 예언서, 구약 전체를 은혜로 완성해 내시는 분이 되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완성자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구약의 계명과 법규와 규정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의 백성이 아니라 은혜의 자녀로 만들어내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그 율법을 실상은 폐지하셨는데 그것을 완성이라고 하신 것이죠. 정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만일 예수님 빼버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겠다-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무거운 짐 불편한 멍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신앙에 생명력은 다 빠져 나가고 의무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자꾸 만들어 놓고 잘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넌 아직도 예수님 믿는다면서 그 모양이니 이러면서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고 더 봉헌하고 이러면서 자꾸 괴롭히면 안된단 말입니다. 저는 주변에 그런 신앙인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소위 ‘열심’하다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의 완성인 예수님을 오늘 더 알아가면 그것이 우리의 성숙입니다. 자꾸 외적인 행동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자연스레 촉발되는 것이지 그것이 주된 것 아니에요. 예수님을 더 알아가서 내가 그분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런 고백과 체험이 흘러나오는 하루 되기를 빕니다.…더보기
사도 11,21ㄴ-26; 13,1-3
사도행전은 바르나바에 대해 ‘착한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성품은 착함이었다는 것이죠. 물건 품질이 좋은데 가격이 싸면, 그럽니다. ‘가격 참 착하다.’ 심지어는 착한 몸매라고 그렇게도 이야기합디다(함부로 그렇게 이야기하면 큰일납니다). 왜 착하다고 그럴까요? 접근하기 좋고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바르나바가 착하다 는 것은 인간관계가 좋고 믿음도 있는, 이런 많은 점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실은 그는 유다인들 중에 골수 보수이기 쉬운 레위 지파 출신입니다. 사람들 단죄 잘하고 인간관계 딱딱 끊어질 것 같은 자인데 오히려 사람들을 품어줍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위로의 아들’, 바르나바란 별칭이 붙었고 이것이 요셉이라는 본명 대신에 쓰일 정도였던 것이죠. 바르나바와 사울, 바오로 사도는 짝지였습니다. 동반자였죠. 사울이 얼마나 교회를 박해 핍박했던 인물인가요. 그래서 복음 전하려 할 때 난관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전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 볼 면목이 없는 것이죠. 과거의 박해자였기에.
그래서 타르수스로 가서 얼마간 사목 현장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오로에게 찾아가서 안티오키아 교회로 초빙하여 온 사람, 그가 바르나바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일할 수 있도록 물고를 터준 것이죠. 또 선교 여행 중에 마르코 요한이 도망간 적 있었습니다.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친척이었습니다. 그때 바오로는 불같은 성정 지닌 사람이었기에 마르코를 배척합니다. ‘그 친구랑 일 못해.’ 그때도 바르나바는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는 인간 관계나 기질을 보면 굉장히 내면이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 누구를 반대하는 것은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싫어서일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나바가 이토록 인간 관계가 좋았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성령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성품까지도 성령께서 주관하시고 만져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행전에 일곱 부제 봉사자 선발할 때도 스펙 따라 뽑지 않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이를 선발했다-고 전합니다. 성령을 통해 인간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회심하고 나서 바르나바가 그를 사도단에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 필요한 사람입니다.’ 친절하게 사도들을 설득합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그 별명처럼 ‘우리들의 위로자’가 된 것입니다. 좀 친절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화를 낼 수 있지만 친철하게 화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점에서 좀 불리한 것입니다. 공손하게 화를 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의 분노에 다 맞설려면 끝이 없습니다. 내 안에 친절한 마음 가지고 먼저 굽히고 배려하면 그 분노는 사라집니다. 같이 댓거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대적하고 불손해서 풀리는 경우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가 사목하던 안티오키아 교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정말 예수님 닮은 공동체임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알려진 것입니다. 바르나바의 믿음이 그의 친절함 착한 성품으로 드러나니 결국 열매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믿음은 좋은데 관계가 형편없다? 그것은 아직 믿음이 설익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 안바뀐다, 사람 안 변한다 그럽니다. 아닙니다. 아니요. 바뀝니다. 믿음은 반드시 성품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착한 사람이라 불린 바르나바! 그 사도의 착함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힘이었기에 참 착하다는 것은 별다른 특징없는 사람을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 닮고자하는 우리가 들어야할 칭찬입니다…더보기
마태 5,1-12ㄴ
산상설교, 산상수훈 마태 5장부터 7장까지 우리가 삼 주 정도에 걸쳐서 듣습니다. 진복팔단, 팔복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스도인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는 산상설교가 시작됩니다. 우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십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인 군중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보셨다’는 표현, 희랍어 ‘에이도’는 눈으로 슬쩍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경험적 바탕을 기초로 한 표현입니다. 곧 군중에게서 주님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보신 것입니다. 산상 수훈 바로 직전, 4장 끝에서 주님께 다가온 이들 곧 병자, 허약한 자들 그분이 보신 군중입니다. 그들은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 마귀들린이, 간질병자 중풍병자.....이들이 군중 무리의 정황 형편입니다. 그분은 이 군중 속의 사람들, 고통 슬픔, 분노에 묶여있는 이들을 보신 것입니다. 거기에 그분의 시선이 머무셨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보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외면하고 회피하는 고름 냄새나는 고통의 현장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이 흔히 쓰는 관용적 표현이죠. 공적인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공포할 때 그런 의미로 자리에 앉는다는 표현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착좌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죠.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 하느님 나라를 공적으로 전하신 것이죠. 나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세상의 경향과 시대의 조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행복하다, 가난한 자.’ 이렇게 시작됩니다. 힘을 추구하고 부를 갈망하는 세상의 관심사와 가치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입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관심입니다. 힘에서 밀린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진복팔단은 주님이 주목하시는 바로 그들이 행복하다는 선언이죠. 이 행복, 희랍어 ‘마카리우스’는 하느님만이 주시는 그분에게만 받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추구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절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할 수 있는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좋겠다. 마음이 가난해져서. 좋겠다.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알아서. 너희를 보니 참 좋다…’- 그런 의미이고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여야 행복을 얻는다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 행복은 선언적인 것이죠. 우리가 이미 행복한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행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의 산은 그분의 등에 업혀서만 올라갈 수 있는 산입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 십자가를 통해서만 등정이 가능한 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향해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그 보상으로 이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가난해진 행복하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그분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시고 입을 여시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기 전에 지쳐서 당신께 온 이들, 병고에 시달리고 중심에서 밀려나고 외면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들을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주목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너희를 버렸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여전히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이 있는 한 행복한 사람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산에 오르셔서 우리를 주목하실 그분의 시선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불평이 나오기도 하고 자기 한계와 나약함으로 실망할 때도 있겠지만 그 때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한순간도 다른 데를 보시지 않고 계십니다.…더보기
코린토 2서 4,13─5,1
오늘은 둘째 독서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를 발견한 이의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외적 인간(겉 사람)은 쇠퇴하지만 내적 인간(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귀한 신비를 발견하니 보이는 것, 잡히는 것, 다른 이들의 눈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갈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음을 사도는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기력이 딸린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직은 이만하면 괜찮지 하다가도 아침 기도 바칠 때 성무일도가 아른거르면서 올게 왔구나 싶습니다. 전날에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영락없이 다음 날 맥을 못추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산책 조금 했을 뿐인데 발목이 시큰거립니다. 성글어져가는 머리카락은 덧없음을 상기시킵니다.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인데 이름도 신상도 생각나지 않아 난감한 경우가 늘어납니다. 낡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그렇게 쇠퇴합니다. 나름 반짝이던 눈이 흐릿해지고 무엇인가에 계속 허둥거리게 되고 쇠퇴하는 스스로에 서글픔과 아쉬움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죠.
속 사람은 어떨까요? 사도의 고백과 달리 속 사람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세상 만사가 다 심드렁해집니다. 복잡한 인간 관계는 딱 질색이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부담스러운 일은 맡겨지지 않았으면 바라게 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도 별로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기껏 이만큼 살려고 그 애를 썼나-불만스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속 사람마저도 쇠퇴하고 낡아지고 늙어가고 있습니다. 다들 뭐 비슷하지 않을까-이것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겠지요. 좌충우돌이긴 했지만 서품 받고 한 몇 년은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었어도 매일이 분주했고 그저 그 분주함만으로도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사목은 초짜이기에 부담스러웠지만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서툴렀어도 자신감이 넘쳐났지요. 시간이 흐르고 경험도 쌓여가고 일처리하는 방법도 익숙해져가면서 훨씬 더 수월하게 되었건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야말로 낡아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 까다롭고 날카로움이 불쑥 솟아나는 기질이 더해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겉 사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속 사람도 별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전형적 증상과 결과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들에만 시선을 두고, 드러나는 것들에만 주목하며 일하고 움직이고 살아가는 동기가 오직 보이는 것 뿐일 때 우리는 이 낡아짐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고갱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낡지 않을 것, 언제나 변함없는 것-보이지 않기에 보려하지 않고 유한한 삶을 살기에 영원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 만사는 비루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저 그 흐름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한에서 낡아짐의 굴레는 우리를 압도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낡지도 않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아직은 손에 딱 잡히지 않아도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바로 그 무엇만이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무엇은 실은 하느님이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 그리고 그 절정인 부활은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죠. 낡아가는 겉 사람 안에서도 끊임없이 약동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느끼라고! 낡아지다 못해 죽어버린 바로 그 안에서도 힘차게 일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받아들이라고!
쇠퇴하는 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낡아지는 것을 다듬어보고 분장해보아야 임시 방편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찾고자 하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우리를 먼저 찾아 오시는 하느님 당신을 바라볼 때 낡아가는 겉 사람 속에서 속 사람은 더 새로워질 것이겠지요.…더보기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지냅니다. 아들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를 드러내기 위함이겠습니다. 자식을 품은 엄마의 마음만큼 간절한 것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모든 곳에 계시기 위해 세상에 엄마를 만드셨다는 말이 생각나는 축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엄마 마리아의 일생은 어쩌면 이 한 마디로 집약됩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간직한 마음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침묵으로 들어가는 마음입니다. 울음마저 삼키는 그 마음입니다. 항변하지 않고 스며드는 그 마음입니다. 고통도 기쁨이 되게끔 하는 그 마음입니다. 절대로 소리높이지 않고 바보같이 품는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교회는 티없이 깨끗하다고 표현합니다. 실은 상처로 범벅이고 아픔이 한결같건만 그것이 티없음이라고 절대적 깨끗함이라고 공경합니다.
살면서 겪게되는 불가해한 삶의 깊이 앞에서도 그 마음을 간직하고 지켜나가기를 청합니다. 그저 오늘은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바치는 이 기도로 하루를 가름하고 싶습니다. 심장에 칼이 찔린 성모님의 마음을 나누어 받은 이들이 위로받기를 원하는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성모 성심께 바치는 봉헌기도
○ 어지신 어머니, 든든한 힘이신 동정녀,
하늘의 모후요 죄인의 피신처이신 성모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저희를 봉헌하나이다.
● 저희 자신과 가진 것을 모두 바치며
온전한 사랑으로
저희 가정과 조국을 성심께 봉헌하나이다.
○ 저희 몸과 마음을 바치오니
저희 안에 있는 것, 저희 주위에 있는 것
모두 성모님의 것이 되게 하시고
저희에게는 오로지
성모님 사랑의 한몫을 나누어 주소서.
● 성모님,
이 봉헌대로 살고자
저희는 세례 때와 첫영성체 때에 한 서약을
오늘 다시 새롭게 하나이다.
○ 저희는 신앙의 진리를 언제나 용감히 고백하며
교황과 그와 결합되어 있는 주교들에게
온전히 순종하며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법규를 충실히 지키며
특별히 주일을 거룩히 지내고
열심히 살아가며
자주 영성체할 것을 약속하나이다.
● 하느님의 영광 지극하신 어머니,
인류의 어지신 어머니,
온 마음을 바쳐 어머니를 공경하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저희와 모든 사람의 마음과
저희 조국과 온 세계에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의 나라를
하루바삐 세우도록
충실히 노력할 것을 약속하나이다.
◎ 아멘.…더보기
요한 19,31-37
인체 내에 마음이 있다는 생을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5) 이때 마음과 심장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9)에서 마음은 심장입니다. 나의 심장은 부드럽고 한없이 낮아져 있다-이렇게 의역할 수 있겠지요. 한자에서 마음 심(心)자는 심장의 상형자입니다. 내 마음이 어디 있나-마음의 위치를 묻는다면 사람들은 머리보다는 두근두근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뛰는 심장을 연상합니다. 현대 뇌과학은 인간의 마음은 살면서 겪은 온갖 체험과 자극이 두뇌 회백질에 축적된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과학적 결론과 달리 여전히 마음은 가슴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의 심장, 혹은 요한적 표현으로는 옆구리에서 구원이 흘러나왔음을 보존하면서 예수 성심 신심을 키워왔습니다. 예수님의 심장, 바로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어온 것입니다.
중세 신비주의에 이르게 되면 ‘심장에 입맞춘다,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심장을 바친다, 심장 안으로 들어간다’ 등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형상화하며 그분의 고통과 사랑을 영성의 중심으로 삼아 왔던 것입니다. 심장, 온 몸에 피를 공급하는 기관이기에 생명을 바쳐서 이룬 구원의 업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지 않았을까요. 상처받은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고통과 고뇌는 그분의 심장으로 집약되었고 그 상처를 위로하기위해 성시간, 첫 금요일을 지켰습니다.
그분의 상처받은 성심, 그 심장을 위로하기 위한 신앙이 근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여 16세기 이래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수많은 수도회와 기도 단체가 번성하게 됩니다.
성경과 교부가 이야기하는 예수 성심의 핵심은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톨릭 신앙은 모든 진리들 중 가장 감미롭고 가장 빛나고 가장 뜨겁고 가장 은혜로운 진리, 곧 예수 성심을 가르친다. 예수는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의 마음이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했다. 이 마음은 우리 삶의 여정에 가장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불태운다. 이 마음은 빛과 같이 순수하고, 그 안에는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모든 아름다움과 온전함이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제도 사랑하셨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일도 사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지상생활의 모든 순간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거부만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다. 이것이 인간 마음을 밝히고 불태우기 위해 계시된 예수 성심의 진리이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가장 탁월한 대상이라는 그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겪는 그 고통을 떠맡으시고 짊어지셨음을 다시 기억하는 힘이 예수 성심 안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에 그것을 우리가 기워 갚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예수 성심은 우리 죄가 주님께 어떻게 상처가 되는가, 그래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처참하게 주님을 난도질 했는지를 깨닫는 참회와 성찰이 중요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성심을 죄와 고통의 측면만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측면에서 다시 바라봅니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를 낫게 하기 위한 상처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스스로를 십자가의 죽음에 이루도록 크신 사랑을 베푸셨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실로 모든 사랑은 상처를 동반합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가장 큰 상처는 가장 큰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받은 심장, 그 성심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가를 상기시켜 주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 이땅의 사제들이 예수 성심의 상처 속으로 그러니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더보기
마르 12,28ㄱㄷ-34
우리가 단순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은 수수께끼가 됩니다. 주님은 쉽게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그다지 복잡한 것 없습니다. 평이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꼬아서 생각하고 내 식대로 들으면 그 단순한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들립니다. 너무 복잡하게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분들을 만납니다. 아직 정리가 안되어 그럴 수도 있지만 신앙의 토대가 건강하지 못한 상황이 반영되어 그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하셨으면 ‘아, 하면 안되겠네’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너무 복잡하게 분석하면서 ‘왜 그래요? 어떻게요?’ 그러면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다른 해석이 없나 두리번거리면 쉬운 말씀이 세상 더없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인간의 태도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알아듣고 순종하는 사람, 둘째 알아듣고도 순종치 않는 사람. 세 번째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못 알아듣는 사람은 자기 고집과 주관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하느님 말씀이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말씀이고 내 삶은 또 별도가 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타협과 핑계가 늘어납니다. 이러면 사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주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따를 수 없습니다. 도와 주세요’- 그래야 하는데 솔직하지가 않은 것이지요. 따를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들이댑니다.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러면서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정당화합니다. 순종해야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을 줍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지만 지금 주님처럼 완전해져야해 이렇게 요구하시진 않습니다.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그 완성을 만들어가시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시작하기만을 원하시는 것이죠. 한발을 떼면 그러면 가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미워하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죠. 죄짓지 말라가 아니라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죠. 그런데 ‘하지 말라’에 매이면 이 ‘하지 말라’라는 것을 다 해결할 때까지 ‘하라’는 것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고 엄두도 못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사랑‘하라’로 정리되고 요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첫째 계명이 무엇이었나요?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였습니다.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웃을’. 이것이 둘째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하고 살 수 있을까 이것이 관심이고 고민에 들어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그러면 살아야 합니다. 뛰어야 합니다.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뜬구름 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로구나!’ 그러면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말씀을 이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복잡하지 않습니다. 계속 교회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도 듣고 주님 앞에 머무르는 것 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른 것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그것에서 시작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더 사랑하는 길이 보여집니다. 그러면 또 그리로 가는 것이죠. 그런데 머리 속으로 ‘하느님 사랑하는 것 뭐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니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매번 답보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 순종으로 시작하면 일단 됩니다. 내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고 관심 가져주고 전화 한통 걸어주고 이렇게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요. 일단 제도를 고치고 복지 시스템을 만들고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등등. 그것도 좋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 아닙니다. 바로 시작하면 됩니다. 그 즉각적 순종이 우리로 하여금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는 법입니다.…더보기
마르 12,18-27
사두가이의 부활에 대한 불신, 즉 천국에 대한 불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고 이땅에서의 일만 믿는 이들입니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모세 오경에는 부활신앙의 흔적이 없습니다. 주로 땅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선적으로 땅을 선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너희가 땅을 차지하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증표로 땅을 약속하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믿음, 오직 현세뿐이라는 이 믿음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순점을 하나 들고 나오는 것이죠. 소위 ‘형사취수제’ 혹은 ‘수혼법’이라는 율법의 내용 말입니다. 이 제도, 형이 죽어 형수만 남아있게 되었을 때, 계보를 잊기 위해 혹은 미비한 복지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였던 형사취수제 말입니다. 게다가 예로 드는 것은 일곱 형제를 차례로 남편으로 둘 수 밖에 없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였습니다. 부활의 허점을 지적하려는 모습입니다.
나름 똑똑한 척 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걸작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생각하는 것 아니냐?’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도리어 당신 보시기엔 무식이 흘러 넘친다고 힐난하시는 것이죠. ‘너희 성경도 모르는구나, 하느님 능력도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모세오경에 기초해서 대답하시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너희가 알고 있는 모세오경, 창세기 탈출기에 나와 있는 그 대목 읽어보기난 한 것이냐. 너희가 아는 거기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니. 그 성경에서 하느님은 죽은 일들의 하느님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부활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시집장가 가는 일 없어서 이런 땅에서의 모순이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무슨 뜻인가요. ‘너희가 하느님 나라를 몰라도 한참 모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구조와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 보려 하니 그 눈에는 안보이는거야’ 하면서 그들이 헛똑똑 하고 무식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찍소리 못했습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하다는 자처가 오히려 부끄러움 되게 하는 이 역공법.
그 많은 대중 앞에서 이 성경 모르는 무식한 이들, 잘난척 하다가 망신당하고 깊이 성경을 안다는 자부심으로 다가서다가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 카운터 펀치 맞은 셈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 대목입니다. 그게 세상의 지식의 전부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읽은 것이 한 권밖에 안되는 줄 모를 때 얼마나 안하무인이 되나요. 아는 것이 병인 것이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제발 ‘너는 그것도 모르니’하지 말라는 것이죠. 나는 이런 것도 안다고 자랑하는 순간, 망신이 시작되고 맙니다.
자기만의 세계 필요하지만, 또한 다른 세계를 넘나들 수 있을 때 그런 개방성이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세오경에 갇힌 나머지 예언서도 성문서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는 그 한계에 놓여 있는 사두가이, 잘난 것 같았지만 끝내는 무식한 이로 드러나고 만 이 사건을 통해 보여지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영민함이 오히려 믿음에 치명적 장애가 되어 버립니다. 자고로 장점 때문에 망치는 전형적 경우입니다. 그래서 더 똑똑해지고자 애 쓸것이 아니라 더 거룩하고자 애를 써야겠다 싶습니다. 지혜이신 주님 앞에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겸허함으로 인해 진리가 우리 것이 되고 진리가 나를 살리고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너무 똑똑해도 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똑똑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식 그 한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중을 읽어 내는 거기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요? 하여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그렇게 찬탄하신 것이겠지요.…더보기
마르 12,13-17
천원권에는 퇴계 이황, 오천원권에는 율곡 이이, 만원권에는 세종 대왕, 오만원권에는 신사임당. 그러면 다 누구의 것인가요? 세금 논쟁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돈에 새겨진 사람에게 돌려주라-였습니다. 돌아가신 분들, 그 후손들에게 드려야하나요. 지폐는 그렇다 쳐도 주화는 또 어떡하죠. 십원은 다보탑, 불국사에 시주해야 하나요. 오십원은 벼이삭, 백원은 이순신 장군. 오백원은 두루미, 환경단체에 보내야 할까요. 주님의 답변의 요지는 무엇인가요? 단순히 말하자면 세금 정당하게 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걸어 넘어지기 위해 온 이들 중 열혈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로마 황제 숭배를 인정하는 세금을 내지 말아야한다는 기치로 불복종 운동이라도 벌일 기세였습니다. ‘단 한푼도 저 식민 지배 세력, 우상 숭배 세력에게 낼 수 없어!’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했을까요? 로마 당국과 결탁한 이들은 바로 그자들이었습니다. 권력에 기생해서 백성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죠. 예수님 수난 이야기에서 그들과 로마 당국이 얼마나 한통속이었는지 알려집니다. 빌라도하고 짬짜미 의기투합하여 십자가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정교 분리는 근대적 사회구성의 원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와 정치 영역이 과도하게 중첩되었을 때의 폐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교 분리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와 무관하다는 면피성 원칙인 것은 아닙니다. 실은 종교의 정치 개입 방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앙의 자유를 정치로부터 지키기 위한 원칙이었던 측면이 더 우선합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상관하지 말자.’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이야기했듯 우리는 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정치란 원래 지저분하고 온갖 이전투구가 난무하는 곳이니 가능하면 거리를 멀리하는 것이 본분에 맞는다고 치부하고, 가장 신실한양, 주님의 계명과 규율의 수호자인양 하는 것- 그것은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이것은 실은 하느님의 것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황제에게 돌리는 것도 실은 하느님의 것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인 즉, 이런 정도의 뉘앙스입니다. ‘그들에게 줄 것 주고 요구하면 까짓것 줘 버려라!’
로마에 세금 안내고 그 반대 급부로 너희가 어떤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께, 마음놓고 하고픈 대로 해-이것은 정말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이 난감한 그 질문 앞에서 황제의 것, 황제에게 돌려 세금 내라는 것은 그렇다고 그 식민체제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동조하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을 폭력으로 전복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또 그리스도교 교회는 제국을 넘어선 것이죠. 신앙은 제국과 맞섰고 이겨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앞잡이를 세웠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을 보낸 것입니다. 치사한 것이죠. 궁금하면 직접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슬쩍 발빼고 누군가 시킨다는 것이죠. 비열한 행위입니다. 비열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해야할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여기면 스스로 나서야지, 뭔가 꿀리니까 남을 시킵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남의 뒤에 숨지 말자!’ 실은 이것 하나도 쉽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발언합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버젓이 말하면서 이땅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구체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세를 지향하는 이들이 아니라 역사를 만드시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하느님의 것 아닌 것 없으니 정치도 경제도 인간세의 모든 것도 다 복음에 터하여 이야기해야하고 더 크게 떠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리는 일입니다.…더보기
마르 12,1-1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이 비극적 비유는 결국 탐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으로 여기는 못된 심뽀가 원인이 되어 소작인들만 아니라 주인의 아들과 종들, 급기야 주인마저 파괴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잃은 주인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주인조차 이 비극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탐욕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불가에서도 탐진치,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를 만악의 근원으로 봅니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이를 삼독(三毒)이라 부릅니다.
예수회의 판토하(Pantoja, D., 龐迪我) 신부님이 지은 가톨릭 수덕서 ‘칠극대전(七克大全)에서도 죄악의 일곱 뿌리를 거론합니다. 탐욕ㆍ오만ㆍ음탕ㆍ나태ㆍ질투ㆍ분노ㆍ색욕이라는 죄의 근원들 말입니다. 그 제일 첫 자리에 모두 탐욕이 있습니다. 만악의 근원인 욕심, 주지하다시피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탐하는 그 마음이 원죄를 짓게 했다는 것이죠.
주인이 포도원을 맡겨주셨습니다. 소작인들에게 사실 과분한 포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는 마음은 더 요구하고 더 바라게 합니다. 탐스럽게 가꾸어진 포도밭을 보니 포도밭을 아예 차지하고 싶다는 그 마음.
교회 전통은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덕행을 예찬합니다. 가지지 말고 누리지 말고 주장하지 말라는 참 어려운 덕행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소유욕에서 해방될 것을 복음적 권고에서 요구할까요? 갈릴래아 예수님의 인간성을 본받아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의 정신(자유, 기쁨, 투신-예수살이 공동체의 지향)으로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욕심이라는 문제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신앙인이 아니라도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는 아직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주 유의미하고 귀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고 지지합니다. 공정 무역을 확산시키고자 하고, 스튜어드십을 통해 인간을 고려한 투자를 우선적으로 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려는 흐름은 분명 탐욕이 지어내는 약탈을 성찰하는 영적인 자세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책무와 선한 지향이 있는 사람들인 것이죠.
공유 경제란 개념은 가톨릭 평신도 영성 운동인 포콜라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일반 사회에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재화를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고 교환하고 임대 해서 사용하자는 이 연대와 협력에 기초한 경제 분야의 운동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진일보임에 분명합니다. 더 큰 집, 좋은 차를 사려고 혈안되있던 이들이 소유 욕구를 내려놓고, 이미 생산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훨씬 더 생태적이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절제하려는 이런 움직임은 신앙과 무관하게 복음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시대 교회가 이런 절대적 공유사회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지막지한 탐욕으로 잔인해진 이들을 보면서,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탐욕에 저항하는 대안적 삶을 밝힐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수덕이 개인적 차원의 탐욕을 제어하는데 집중했다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탐욕을 사회적, 공동체적으로 정화하는 지혜를 더 모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분리된 섬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더보기
마르 14,12-16.22-26
마지막 파스카를 위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접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파스카를 지내려는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주님이 성안에 가서 물동이 메고 가는 이 하나 만나 ‘자리 만들어라 하면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허황된 것입니다. 돈도 주지 않으면서 ‘알아서 해봐’하시는 셈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원망 불평하지 않고 나가서 그리하니 선뜻 그 사람이 끌고 갔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어려워서 시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았기에 어려운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보지 않고 또 해볼 마음이 없기에 변명하며 ‘참 어려운 일이야,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면 할수 있게끔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라 제자들은 무능력했지만, 예수님과 파스카 지내고자 하는 그 마음보시고 마음을 이루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이죠. 할 수 있는 일인가 묻기 전에 해야하는 일인가 물어야 합니다. 이 일은 주님이 맡기신 일인가 내게 주신 소명인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인가- 물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런 마음으로 나섰더니 파스카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성찬 전례 예물 준비기도에서 우리는 성체성혈을 이룰 기초에 대해서 기억합니다.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그런데 실은 일군 적도 가꾼적도 없습니다. 사실 좀 찔립니다. 하여 나중에 기회되면 밀 한 평, 포도나무 한그루라도 키워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나의 무엇이 들어간 성찬례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결국 주님의 파스카는 주님이 하신, 성령께서 축성하신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일이지만 사실은 그 장소를 구하려는 제자들의 간절함, 뭔가 먹을거리를 찾고자 하는 그 마음이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과 정성과 일상의 고단함이 묻어있어야 진짜 성찬입니다. 성찬의 예표라고 하는 오병이어의 기적, 아이의 오병이어 도시락의 봉헌이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려는 사명에 집중할 때 주님의 몸과 피를 현존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사랑은 언제나 일방통행, 제자들이 준비한 파스카 음식을 예수님은 다시 내어주시죠. ‘이 빵은 나의 몸, 이 술은 나의 피’로 아낌없이 다시 내어주시죠. 주님의 죽음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죽음만이 아닌 것이 유다도 거기 있었고 다 도망친 제자들이었죠. 그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한 이들은 아니었죠. 예수님은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일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인가 하는 것, 어렵지 않죠. 아무라도 하죠. 믿지 않아도 하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반응하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많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계약의 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 영원한 짝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모실 뿐만 아니라 먹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섭취한 음식으로부터 영양분과 에너지를 공급받아 우리는 살아갑니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모르나 여하튼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특히 성체 성혈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인 것이죠.
주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말씀하신 뜻은 우리의 심정과 영혼과 정신을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란 뜻입니다. 새롭게 살도록 하고자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달라지신 이 사랑의 사건을 미사 때마다 기념하면서, 그 사랑의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받아 먹고 받아 마셔서 삶의 허기와 갈증을 해결하고 같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신 모든 이들과 하나 되어 한솥밥 형제 되게하신 신비를 오늘도 봉헌합니다…더보기
마르 11,27-33
수석 자제와 율법학자들이 성전정화로 인해 분노하면서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기득권의 상징이고 제도권의 대표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예수님께 그런 권한 부여하지 않았다고 유세를 떨며 정당성에 흠결을 내고자 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자격을 따집니다. 철저한 멤버십의 사회입니다. 제도가 요구하는 일정 자격과 과정을 갖춘 이에게만 문을 열어줍니다.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부동의 직업 1위는 언제부터인가 연예인입니다. BTS, 저도 좋아합니다만(그렇게 구닥다리 취햐은 아니란 얘기죠) 정말 환상적이죠. 방송 연예계는 파격이 허용되는 대표적 분야이기에 꽉막힌 미래에 희망의 분야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나 진입할 수 없음도 현실입니다. 높은 진입장벽, 재능 외에도 외모도 받쳐주어야 합니다. 눈트임, 지방흡입, 코 높이기는 기본이고 턱도 깍는답니다. 얼굴이 과일인가요?
지구의 기적 중 하나는 순환에 있다고 합니다.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끊임없이 열을 교환하면서 순환하기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이죠. 차고 더운 대기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섞이면서 살만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 시대 기득권층은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위협하고 제어할만한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긴장하게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의 말과 행동은 감동과 감화력이 넘쳤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요한과 예수님이 행사한 이 권한의 특징은 독특했습니다. 그들이 다 주변부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종교지도자가 되기 위한 기존의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적막한 광야에서 예수님은 변두리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는 무명의 유다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요한도 예수님도 이력서에 기록할 사항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텅빈 이력서가 제도와 기득권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텅빈 이력서는 인생의 어떤 제약조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주님은 이력서 보고 뽑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은 무엇이냐? 너는 어디까지 마쳤냐고 질문합니다. 너는 무엇을 갖추었냐고 캐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알게 모르게 거기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외부 압력, 성공, 인정, 칭찬에 민감하고 세상의 성취를 위해 모든 여력을 다 쏟아 붓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반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목적에 귀를 기울이는데는 소홀하기 십상입니다. 이것이 압력에 쫓기는 자와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의 차이가 아닐까요?
잠수정은 엄청난 수압을 이겨낼 수 있음은 내부압력이 높아서라고 합니다. 우리 삶이 하느님으로 충만하면 그 압력이 세상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삶을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제도가 가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 앞에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있게 맞설 수 있으셨습니다. 내면의 압력이 높아지면 당당해지는 것이죠. 수석사제에게 되려 물으시면서 , ‘그래 좋아. 그렇지만 너희에게 하나 묻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거 젊은 갈릴래아 출신의 무명의 인물에게서 나온 말로는 참 어이없다고 느껴지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오히려 흠잡으려하는 이들에게 망신을 주십니다. 텅빈 이력서가 꽉찬 이력서를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코린토 1서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자들, 약한 자들,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선택하셔서 지혜로운 자, 강한 자, 있는 자들을 무력하고 부끄럽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텅빈 나의 이력서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꽉 차지 못한 나의 내면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더보기
루카 1,39-56
성모 성월을 마치며 지내는 성모 마리아 방문 축일은 좀 의미가 소박할 수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면 좋으련만 고작 나자렛의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엘리사벳을 찾아갔다는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성모 성월을 마무리하다니요. 일가 언니 찾아갔다는 것이 뭐 그리 대대로 기억할 만한 일이 될까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습니다. 루카 복음이 기록하는 이 방문, 이 만남은 그리 만만하고 심상치 않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처지인가요? 자기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덜컥 아이가 생겼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자신을 받아 주었으니 망정이지 언제라도 들통나면 율법에 의해 처형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감수하고 이 아기를 받아들였던 것이죠. 결정하고 순종하기로 했으나 그 마음은 온전히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 그 앞에 놓여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또 어떤 처지인가요? 대를 잇는 아들을 낳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여인의 의무였던 시절, 야속하게도 아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 포기하고 간신히 연명하던 그때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는 아이가 들어섭니다. 뛸 듯이 기뻤을 것이나 이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그런 답답함이 엘리사벳을 사로잡고 있던 것입니다. 두 여인 모두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지만은 않은 그런 상태일 때, 이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은 뛰놀아 이땅에 오신 예수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을 보입니다. 엘리사벳은 복중 아이의 태동이 여느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죠.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 찬송의 인사는 우리가 바치는 성모송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이 인사를 받은 마리아의 찬가는 또 어떻습니까? 여리고 순수하기만 할 것이라 통상 생각되는 나자렛의 소녀에게서 나왔으리라고는 상상되지 않은 웅대하고 강력한 승전가입니다.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힘차게 노래합니다. 마리아의 찬가, 마니피캇은 성무일도 저녁 기도에 자리잡고 레지오 마리애의 까떼나에 삽입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일하심이 어떻게 역사 안에 펼쳐지는가를 웅변하는 노래로 바쳐집니다.
두 여인의 만남, 아이를 가지면 안되는 처녀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여인의 강력한 연대를 통해 구원의 서장이 열리고 있음을 복음은 증언하는 것이죠. 처음에 생각했듯 뭐 그렇게 기념할 일인가 싶은 그런 만만한 만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생명을 품은 두 여인이 역사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두 여인의 장차의 운명도 비슷하게 전개됩니다.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은 세례 운동을 통해 쇄신을 부르짖고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다 정치 권력에 의해 희생됩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복음을 전하다 비참한 사형수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에게서 자식을 역사의 제물로 바친 수많은 어머니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나라 민주화를 위한 가족 협의회의 어머니 투사들, 독재정권의 희생제물이 되었던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들 또 수많은 어머니들이 겹쳐집니다. 민주화를 부르짖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떠난 아들 딸들을 가슴에만 묻어 둘 수 없어 거리로 현장으로 가장 힘겹고 고통스러운 곳을 마다하지 않던 그 어머니들. 가장 끈질기게 투쟁하고 절대 물러나지 않던 그 뜨겁고 가슴 먹먹한 사랑이 결국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농담처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더 농담처럼 어머니는 강하지만 여자는 독하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하느님 안에 결합된 두 믿음의 여인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강함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통찰하고 자신의 삶을 주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만들어가는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만남은 5월을 마감하면서 기리기에 충분한 그런 만남이었던 것이죠.…더보기
“누군가 이런 하루를 산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새벽 미사에 나왔는데, 신부님이 평소와 달리 1시간 동안 강론을 합니다.
투덜대며 나왔는데, 직장 가는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린 끝에 버스가 오긴 왔지만, 막히는 시간이라 버스는 거북이처럼 더디 이동합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회의를 하려고 회의실로 갔는데, 정해진 시간이 한 참 지나도록
팀장님이 오시지 않아서, 회의는 시작도 못 하고, 직원들은 발만 동동 구릅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 시간이라 동기와 함께, 거리가 먼 맛집을 찾아갔는데,
제때에 회사에 돌아오지 못할까봐, 소화도 제대로 못 시키고 허겁지겁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주문한 물건이 도착할 예정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물건이 오지 않아서,
전화와 인터넷으로 계속 배송상태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칼 퇴근을 하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려고 했는데,
일의 양을 보니 칼 퇴근은 꿈도 못 꾸게 생겼습니다.
그 누군가가 했을 법한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그 누군가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시계 시간’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누군가는 바쁜 하루를 보내며 끊임없이 시계를 보았을 겁니다.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서 계속 시계를 쳐다보았을 거고,
직장에 갈 때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또 어딘 가에 갔다 올 때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이동하려고 했을 겁니다.
'시계 시간’은 우리에게 몇 시간 몇 초가 남아 있는 지를 말해 주고,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말하고 듣고 먹고 노래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잠자고
놀고 머무를 수 있는지를 결정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시계 시간’에 지배 받고 있습니다.
‘시계 시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서두르란 말이야. 서둘러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빨리 외국 여행을 하고,
어서 책을 읽고 학위를 따란 말이야.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빨리 모든 걸 얻어내야지. ...”(헨리 나웬의 ’긍휼’ 중에서)
이렇게 시계 시간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연민의 감정이 생길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계 시간에 압박을 받고 지배를 받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 먼 거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못 본척, 못 들은 척’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이루어야 할 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바삐 움직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 먼 거지의 두 번째 외침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 하십니다.
예수님도 짧은 시간 동안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으셨을 겁니다.
어떤 날은 밤을 새고 나서, 또 다른 마을로 이동할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눈 먼 거지의 외침이 있었을 때,
예수님의 머리에도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들이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걸음을 멈추고 눈 먼 거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계처럼 바삐 움직이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더디 가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이루어야 할 많은 일들에 벅차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따뜻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더보기
마르 10,32-45
동상이몽(同床異夢)-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꾼다.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 그런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 예루살렘에서 능욕의 죽음 당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짐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느닷없이 야고보 요한 형제가 찾아와 주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곧 권력의 자리를 요구합니다. 동상이몽입니다.
주님이 3년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주님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사랑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같은 것을 보게 되고 같은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있으면 그 안의 속마음 본뜻을 이해하게 되죠. 사랑 없으면 아무리 설명, 설득해도 오해만 가중됩니다. 그래서 똑같은 질타인데 어떤 이는 헤헤거리고 똑같은 질타인데 누구는 상처받습니다. 오해하고 상처받는 것은 말하는 이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사랑하면 그 심한 말, 날카로운 반응도 네가 나를 미워해서 그런거 아닌 것 알아,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속마음 알아-하면서 신뢰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그래서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것을 봄으로써 같은 마음을 지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서로 안에 오해가 없는 인생으로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래서 시각을 교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보시는 것을 나도 보는 것-그만큼 좋은 신앙이 없습니다. 내가 여기를 보고 있으니 하느님도 여기를 보라고 억지부리는 것 아니라 아버지가 보시는 그 곳을 바라보는 동일한 시선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버지의 시선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섬김의 반사이익을 죽여야 합니다. 제자들은 직위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결정적 순간 얼마나 거기에 관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영광의 자리 주십시오’하니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희생하고 죽고 섬겨야 하는데.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자 제자들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라 나섭니다. 그야말로 말씀하신 대로 할테니 보장해 달라는 기세입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그 자리 달라고, 거래하고 있는 것이죠. 섬김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자리를 탐하는 마음으로 그 고통마저 견딜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과 희생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역설적 진리입니다. 그 반사이익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오히려 얻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얻으려는 순간 오히려 잃게 됩니다. 버림으로 얻게 되고 낮아짐으로 높아짐을 체험할 때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법칙에 경악하게 되는 것이죠. 반면 세상의 썩을 것을 얻기 위해 섬기는 척 할 때 썩어질 것과 함께 우리도 부패합니다.
또 하나 자기 판단을 줄여야 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고 그러나 ‘내 오른쪽에 앉는 것’은 고통의 잔을 받아 마실지라도 네 생각대로 결정되는 것 아니라는 말씀, 그러니 ‘관심 꺼라’하셨습니다. 자기 생각에 초점이 주어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이런 자세가 요구됩니다. 결정권은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함은 결국 내 판단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비례합니다. 자기 생각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생각 속으로 상승하고, 내 판단에 묶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 안으로 높이 올라가는 것이죠.
그러니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면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라 섬김으로 나를 완성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행이고 감사합니다.…더보기
마르 10,28-31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많다고? 순위가 등수가 바뀌는 경우가 인간사에는 비일비재하긴 하죠. 시즌 처음에는 어느 팀이 우승을 향해 달리는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결국 예상치 않은 팀이 시즌 우승을 거머쥐기도 합니다. 인생 초반에는 뭐가 되려나 싶은 이가 짜릿한 역전의 삶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먼저 된 이가 결국은 뒷전이 되고 나중 된 이가 오히려 앞서게 되는 경우, 있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많다고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타고나고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속에 타고난 것과 관련없이 달라지는 삶의 변화가 있고 새로워질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변화를 긍정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말씀인즉 우리의 배경이 삶에 어떤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타고난 어떤 배경이 내 삶의 지속적 영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역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하자면 역전당하지 않으려는 영적 질투심도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왜 내가 저이보다 더 신앙이 약하지, 왜 내가 더 봉사하지 못하는가. 왜 내가 뒤쳐져야해’ 하는 건강한 질투심이죠. 주님도 다른 우상에게 당신의 영광을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듯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나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것에 대해서는 질투하고, 더 돈많은 것은 부러워하며 더 많이 가지려하면서 세속적 가치에 대해서는 열정을 불태우며 뒤처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일에서는 욕심이 없다는 것, 그것이 난점인 것이죠. 이것은 어쩌면 거룩한 것에 대한 가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는 것, 그것이 안타까움이고 부끄러움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첫째 된 이는 계속 그것을 유지하려 하고, 꼴지된자는 역전시키려 애쓰는 모습이 우리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고 탄력있게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뒤쳐져있다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는 이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몰입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죠. 무사안일하게 지내면 대충지내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뒤쳐질 수 밖에 없다는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첫째가 꼴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결정력 부족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 이야기 다음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구도자세가 있었고, 진리에 대한 갈망 도 있었죠. 영생에 대한 질문, 곧 영적 관심도 있었죠.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도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나누어 버리고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갑에 남은 돈 한푼까지 다 버리고 나누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 그에게 진정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는지 테스트하신 것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인생 최우선 순위라면 돈쯤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 돈만 버렸더라면 인생이 달라졌겠죠. 위대한 성인, 사도 될 수도 있을지 몰라요. 그저 부자 청년이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아는 아무개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 하나 때문에 그는 결국 떠나는 인생이 됩니다. 결정력이 없는 것이죠.
우리가 모든 것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고작 한 가지 그것뿐인데 그것이 장애가 되어서 실패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돈, 어떤 이에게는 명예, 어떤 이에게는 권력, 자존심, 인간관계 뭐 다양하게 있습니다.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망해버립니다. 설마 꼴찌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꼴찌가 좋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 혹은 변명이기 십상입니다. 주님은 첫째 되는 이로서의 특권을 우리가 놓치지 않기를 원하시고 우리 역시 첫째 자리를 그리워합니다. 그 첫째이고자 하면 자꾸 뒤처지게 만드는 그 하나를 돌파해야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뒤처지게 하는 그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 봅니다.…더보기
마르10,17-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달려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묻는 어떤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계명들을 잘 지켰는데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기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그에게 영원한 생명에 장애가 되는 걸림돌인지 정확히 집어 내시고 처방을 내리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복음의 어떤 부자는 계명을 잘 준수하는 착실한 모범신자임은 분명했으나 결정적인 것이 하나 빠졌으니 ‘버리고 따름’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으니, 많은 재물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걸림돌에 좌초한 부자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어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참으로 어렵다!’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한마디로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서로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시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재물의 걸림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디딤돌로 변화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많아 슬퍼하며 떠난 부자는 계명 준수의 착실한 신자였지만 그에겐 보이는 현실이 전부였고 많은 재물 소유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에는 그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비전을 회복할 때, 참 보물인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세상의 걸림돌의 장애물은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부자는 많은 재물은 지녔지만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못했습니다. 찬미도 감사도 없었고, 희망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바로 복음의 부자에 대한 구체적 답은 희망과 기쁨이 충만한 분위기의 제1독서에 있습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그리스도가 답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이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이 한셋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믿을 때, 만날 때, 활짝 열리는 영적시야에 저절로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이요 샘솟는 희망과 기쁨입니다. 모든 것을 지녔어도 희망과 기쁨이 없다면 그 소유는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진정 행복한 부자는 참 보물인 그리스도를 지님으로 샘솟는 희망과 기쁨을 지닌 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시야를 활짝 열어주시어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보게 하시고, 샘솟는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이로 살게 하십니다.…더보기
그러자니 이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유일하신 하느님, 한분이셔야 하느님이신데 하느님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자꾸 변신해서 나타나셨던 것처럼 여겨진단 말이죠. 언제는 아버지로 창조주로 언제는 구원자 해방자로 언제는 권능을 지닌 순수한 영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죠. 자칫하면 이방의 다신교처럼 될 공산이 너무 컸던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도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는 신구약 단절론, 소위 마르키오니즘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니신데 너무 특출나고 훌륭하게 하느님 뜻을 살아냈기에 ‘그래 너 인정해줄게, 너 내 아들이야’ 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하느님이심,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이단도 나타나고 성령을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무슨 힘이나 기운 정도로 여기는 이단들도 나오고. 이런 상황들이 수세기 동안 계속 된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 하느님은 한분이시라는 절대적 신앙 명제를 지켜내고 또 다신교로 전락하는 위험을 막아내면서 역사 안에서 체험된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성령 하느님 이 생생한 체험들을 보존해내기 위해서 찾아낸 개념이 삼위일체입니다. 하느님은 구별되시지만 한분이시다. 하느님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면서 삼위이시다. 인간의 언어로는 모순됩니다. 우리의 상식에는 위배됩니다. 우리의 이해로는 도저히 닿을 길이 없습니다. 분명 세분이신데 여전히 한분이신 하느님.
이렇게 먼저 하느님 체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런 분이시로구나 체험했죠. 체험은 깨달은 것과는 다릅니다. 체험은 주어진 것이니까요. 내가 그 상황과 사건을 겪어내면서 체험했어요. 그런데 그 체험이 이제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만난 그분이 바로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로구나. 하느님이시기에 한분이시구나.’ 하느님은 분리되지 않으시는데 우리에게는 구별된 분으로 한분의 하느님이시다. 거기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그러니까 뭐가 먼저입니까? 체험. 하느님 체험이 먼저란 말이죠. 삼위일체 개념을 알고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니까. 만나고 보니 그분이 하느님이신데 그 내적 본질을 삼위일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알게 된단 말이죠.
사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네요. 그래서 저는 나중에 하느님 나라 가면 여쭤볼라구요. ‘하느님! 삼위일체에 대해서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좀 브리핑해주세요.’ 제 질문 목록에 있어요. ‘동정 잉태 어떻게 된 건가요’ 물어볼렵니다. ‘성체 안에 어떻게 계신가요’, 그것도 물어볼려구요. ‘부활한 삶은 그렇게 좋은 건가요.’ 그것도 여쭤볼 겁니다. 그러니까 꼭 하느님 나라 천국 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물어볼 수 있으니까. 반드시 가서 여쭤볼 것입니다.
희미하게만 알지만 그래도 굳세게 믿을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할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자비를 빌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이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강복을 청할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엄위한 그 이름으로 이 모진 세상에서 내가 믿음을 지키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전진할 것이니까요.…더보기
삼위일체 대축일, 인간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있음을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본질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간 언어의 제한성, 우리 언어가 하느님의 본질을 충분히 담아 낼 수 있는가의 문제가 결부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씀하시길,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Si comprehendis, non est Deus)’라 하고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받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어마어마한 저작을 쓰고 나서 맨 끝에 항상 이 말,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책을 맺습니다. 또 다른 하느님이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언어 안에 그 하느님을 다 담아낼 방법이 도저히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하느님은 절대로 인간의 지성의 영역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분이 맞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불가피하게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삼위일체론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의 기나긴 논쟁을 보면 볼수록 느끼게 되는 것은 ‘볼수록 모르겠다’입니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셋이면서 하나이신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고 경험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정말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론 시험도 보았고 아마 잘보았을 것^^ 분명한데 뭘 답안지에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표준 교리서 253항은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성자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곧 본성으로 한 하느님이시다.” “삼위의 각 위는 이러한 실재, 곧 하느님의 실체, 본질 또는 본성이시다.”
너무 간결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이해되시죠. 그럴리가요. 위격, 본체, 본성, 실체, 본질 이런 말 일상에서는 잘 안쓰고 철학책에서나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이것으로 하느님의 내적 본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왜 이런 용어들이 하느님께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등장할까요. 성경에는 없는 표현들인데 말이죠.
사정은 이렇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 하느님은 세상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권능의 하느님이셨죠.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이들을 당신 것으로 삼으셨음과 지긋지긋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과 계약을 맺으시어 인간에게 다가오셨음과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당신 말씀을 전하게 하심을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들이 만난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셨죠.
새계약의 시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삶으로도 행동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 자유케 하시고 질병을 치유하여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이심을 드디어 믿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교회의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홀로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습니다. 교회 안에 믿는 자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는 영의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역사가 우연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하느님의 영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기 내면 안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계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분은 내재하시는 하느님 성령이셨습니다.…더보기
마르 10,13-16
어제 복음, 혼인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 독신이셔서 그런 얘기 하신 것 아닐까-추측했는데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이야기 역시 애를 안키워보셨구나- 싶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 어린이 미사 한번 하신 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요-묻고 싶습니다. 전 어린이들 귀여워하는 편이라고 자부하고 수단 자락으로 파고드는 꼬마들을 마다한 적 없지만 딱 거기까지. 한명 한명은 귀엽고 천사같으나 둘셋만 되어도 사정은 다릅니다. 말안듣는 것은 고사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앞가림 못하는 이 녀석들, 일일이 먹을 것 챙기고 씻기고 돌봐주느라 반나절이면 기진맥진입니다. 이쁜 것은 잠시뿐 귀찮은 것은 영원합니다.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소임을 평생하신 수녀님들, 존경스럽습니다. 아이 셋쯤 거뜬히 건사하는 부모님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주님이 어린이와 하느님 나라를 연결하실 때 순수함,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셨던 것은 분명합니다. 순수함과 절대 의존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이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일순위로 어린이를 거론하신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이기만 할까요?
복음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언짢아 하시며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고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회장님 비서처럼 그렇게 처신하였던 것이죠. ‘이 녀석아, 예수님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니. 저리 가!’ 예수님 주변의 인의 장막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죠.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벌써 권력화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날지를 자신들이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힘과 명망있는 누군가가 주님 찾아왔다면 번호표 뽑지 않고 우선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주선했을 것이죠. 그러나 어린이, 그들은 아무 영향력도 없는 무력한 존재의 표상입니다. 만나 주셔봐야 그 아이들에게 뭐 나올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같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마태 21,31 말씀과 동일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힘의 질서가 관철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 같은 무력함, 세리와 창녀라는 자격없음-세상은 그것을 무시하고 억압하며 경멸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 결국 무슨 말씀입니까? ‘난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그래서 다가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구나.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렇게.’
어린이의 무력함 속에 하느님의 권능에 찬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힘의 논리에 물들어있는 그들의 세상 논리를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 나라는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너희가 누구를 입장시키고 아니고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한이 아닐뿐더러 그런 알량한 권한을 남용할 때 하느님 나라는 멀어집니다.
교회는 구원을 독점할 수도 중재할 수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직자들이, 교회의 책무를 맡았다고 하는 이들이 권력화되고 하느님의 권위를 마치 제것인양 자랑하고 행사하기도 합니다. 힘의 논리가 교회 안에 횡행할 때, 그래서 어린이의 자리, 아무 힘도 없는 이들의 자리가 사라질 때 교회는 거기 있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힘을 쓰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치워 버리기 때문이지요.
하여 하느님 앞에 나의 나약함, 무력함, 가능성 없음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기쁜 일이 됩니다. 자랑할 것이 없음이 자랑이 되는 묘한 자리가 하느님 앞에 있는 나의 진짜 머물 곳입니다. ‘주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왜 이 모양일까요?’ 바로 그 고백이 나를 어린이 되게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 말입니다.…더보기
마르 10,1-12
예수님께서 독신이셨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빈치 코드’같은 류의 호기심들이지요. 그러나 극단적인 이들이 아니고 중도적인 학자들 중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당대의 유다 풍속상 예수님께서 그 나이에 이르도록 혼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공생활 중에만 독신으로 사셨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명확한 증거는 실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관계 기록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구적인 결합,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저는 확신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혼인의 약속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이 확고한 단언, 이것은 실은 혼인했던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안해보셨으니까 자신있게 아니 너무도 무모하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가정해 보면, 만일 예수님같은 이가 남편이면 그 아내는 어떨까요? 매일같이 이 사람하고 살아야 하나 후회투성이이겠지요. 집안 사정은 나몰라라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지 관심없고 그래서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무슨 걱정이냐고, 하늘 아버지께서 꽃들도 다 입히시고 새들도 다 먹이지 않냐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니 말입니다.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홀시어머니 마리아는 자기한테 맡겨놓고 어린애들은 축복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 이런 어린이들 같아야 들어간다 뭐 그러고 다니면서 지내니 말입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도장 찍고 싶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알아서 척척 집안 건사하는 현모양처도 많건만 우리 집 여자는 어떻게 매일 눈 동그랗게 치켜뜨고 잔소리를 입에 달고 남자가 큰일 좀 하려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기죽이는 소리만 하고, 내가 왜 이 여자랑 사는가-깊은 묵상을 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살아본 사람은 ‘둘이 한 몸이다’이런 말 함부로 못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영화도 있었을까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면 다 미쳤다는 것인가요. 교회 안에 사제, 수도자 그리고 비혼주의자들 빼고 다 제정신 아닌가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라로 인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 면담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듣다보면 그 남자하고 살아온 그 얘기 구구절절 같이 속상하고 그 여자하고 살아온 그 얘기 하나같이 짠하기 그지 없습니다. 진저리나게 만드는 이들, 성격파탄자인가 싶은 이들, 걸핏하면 바람피우는 이들 부지기수입니다. 무능력해서 평생 고생길이 훤한 이들, 가정을 꾸릴 준비나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이들 한둘이 아닙니다. 마음 같아서는 도저히 그렇게 사느니, 참고 덮어가면서 살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저는 해야 합니다. 바보같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하지 못합니다. 볼장 다 보았으니 혼인 무효를 신청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고,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고, 젊어 속썩인 남편이 늘그막에는 그렇게 할머니들만 위하더라고 하고, 하여간 온갖 감언이설로 위로할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꼭 그런 표정입니다. 얼굴에 써있습니다. ‘신부님은 안 살아봐서 모르는군요.’ 맞습니다. 저는 안 살아봐서 모릅니다. 그런데 왜 안 살아본 저한테 물으러 오셨나요?
살아보고 안 살아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봤으니 정답을 알고 있고 안 살아보았으니 오답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편법의 유혹을 받습니다. 스스로 정당화하고플 때가 있습니다. 보통 때는 편법의 유혹 이겨낼 수 있으나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유혹은 달콤하고 그럴싸해 보입니다. 갈라는 것이 차라리 더 낫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칙을 말씀하십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사는 것,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도록 살아내는 것이죠. 너무 어리석게 여겨지고 너무 무의미해 보이는 회의가 밀려올 때, 그래도 원칙을 생각하고 그래도 정답을 살아보려하고 편법을 쓰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견디어 내는 것, 살아보지 않은 입장에서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밖에요.…더보기
마르 9,41-50
마실 물 한잔, 인심쓸 수 있지 않나요. 더운 날 지나가다 ‘물 한잔 주세요’, 그럼 선뜻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을 돈 주고 사먹은지 우리 얼마 안되었쟎아요. 물을 사먹는다? 제 기억에는 90년대 중반에 가서야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천차만별입니다. 정말 물값인 것도 있지만, 이를테면 에비앙 노르데나우어 휘슬러 이런 생수는 가격이 엄청납니다. 물 한 잔 주기도 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왕 물 주실라면 코나딥같은 심층해양수로 줄래요.’ 이러면 아마 마실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없을 겁니다. 이 물도 무지 비싸답니다.
팔레스타나같이 건조한 지역에서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거기는 물 한 잔이 너무 소중할 밖에요. 비록 그야말로 물 한 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선행, 다른 이의 갈증을 해갈하는 물을 주는 행위를 하느님이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것은 상받을 만한 일이라고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어 전합니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이들, 죄로 몰아넣는 이들은 그 죄상을 하느님이 갚으신다는 것이죠.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진다-무슨 뜻일까요. 그 시신마저 다시는 보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경고죠. 절대로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조처하는 징계입니다.
물 한 잔이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은 다른 이에게 유익과 도움이 되지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파괴와 타락이기에 그렇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놀라우신 기억력입니다. 물 한 잔도 범죄케함도 죄다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억하시나요?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엇을 주는가? 더운 날 그의 목마름을 해결할 물을 주는가, 그를 죄중에 빠뜨리는 음모와 불의함을 주는가? 인간관계에서 내가 주는 것이 무엇인지가 하느님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처음에 언급하셨다면 다음 부분은 개인적 삶,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맺고 있는 관계에서 죄의 심대함을 다루시죠. 스스로에게 손이 죄를 짓게 하고, 발이 죄를 짓게 하고 눈이 죄를 짓게하는 일이 생겼을 때, 잘라버리고, 빼 던져 버리라. 생명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죄의 부분을 제거할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손과 발과 눈이 죄로 물들어, 곧 우리 지체의 한부분이 죄를 지었을 때 그 부분을 도려내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 지옥으로 향하느니 그 부분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손만 죄를 지었을 뿐일 수 있죠. 발만 타락했을 수 있죠. 눈이 문제의 원인일 수 있죠. 처음에는 그렇게 한 부분으로 작은 구석에서 시작하는 것, 그런데 작은 부분의 부패는 작은 부분에 국한되지 않아요. 이내 퍼져나갑니다. 사과 박스에서 사과 하나가 썩으면 다른 사과도 온전하지 않죠. 같이 썩어 나갑니다.
주님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타인을 향해서는 생수를 주는 삶으로 스스로에 대해서는 엄격한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요지입니다. 타락은, 바깥을 향해서는 죄를 조장하고 스스로에게는 느슨해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요새 용어를 빌자면 내로남불에서 죄는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니 신부로 살면서 끝없이 신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는데 정작 자기를 살펴보는데는 얼마나 소홀했는지. 이제껏 손도 발도 눈도 다 온전한 것을 보니 복음 대로 살지 못했음을 자백합니다.…더보기
그때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8-40)
가톨릭 교회에 정통성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이 반드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교회는 가톨릭 교회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우리가 믿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고 하나이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교회는 갈라짐없이 하나여야 합니다. 이것은 당위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교회‘들’이었습니다. 현실은 가톨릭 교회만 있지 않습니다. 갈라지고 분열된 교회들이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라 부르는 큰 덩치의 교회가 있고 그 분파를 헤아리기 힘든 개신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디는 장로교라 부르고 어디는 감리교라 부르고 심지어 이단 교회라고 정죄받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이기는커녕 교회는 세포분열을 거듭하여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나’인 교회는 분명 제도적으로 단일하고 일사분란한 교회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서로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는 서로를 파문하며 저주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무참한 전쟁과 공격, 살육의 비참함은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깥으로는 ‘사랑’을, 그것도 무한한 ‘사랑’을 천명하면서도 안으로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처참하게 분열된 교회의 죄과를 우리는 인정합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될 수 있을까요?
하나이던 이들이 갈라지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서로는 박멸과 타도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일치의 성령이 불어오시어 과거 서로를 밀어내던 상흔들이 치유되고 우리가 진정 하나인 교회임을 노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까요? 우리는 한분이신 하느님 안에 하나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요한은 의심스러운 이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구마를 행한다고 고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월요일 보셨듯 제자들 자신도 마귀를 쫓아내는데 실패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낯모르는 이들이 그런 일을 한다니?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는 부당하고 금지되어야한다고 예수님께 현황을 보고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라고, 그들이 하는 일을 제지하지 않겠노라고, 반대하지 않는 한 그들도 당신의 이름으로 일할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그들을 몰아내고 척결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 아니라 그 다른 이들을 끌어 안고 확장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고 주님의 원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죠. 패를 가르고 진영을 나누어서 끊임없이 적개심을 키우고 배타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어서 더디더라도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 그렇게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교회는 물론 우리 각자에게도 특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적이라고 여기는 나라와 민족 사이에도 그 하나됨의 여정이 시작되기를 청합니다…더보기
마르 9,30-37
타볼산의 변모, 그리고 어제 기도를 통해 구마 사건을 보여주신 예수님, 이 정도라면 제자들이 주님의 길을 이해하리라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곧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에 긴장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엿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서열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지도자가 느끼는 답답함은 대충 비슷합니다. 추종자의 핵심 파악 능력이 떨어질 때, 많이 답답합니다. 남들이 다 웃을 때 영문을 모르다가 나중에 설명 듣고서야 웃습니다. 생각할수록 웃기다는 듯 혼자서 크게. 그런데 이미 웃는 분위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의력이 결핍되거나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의 경우 그렇습니다. 자기 생각에만 골똘하게 할 때 핵심 파악이 안됩니다. 강론의 주제가 있죠. 그런데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예화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론하는 신부님이 더듬는 대목만 세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엉뚱한 것에만 시선이 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쟁론이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를 이야기하시는데 엉뚱한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의 유혹,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강렬한 유혹입니다. 인간의 모든 다툼의 본질에는 권력 싸움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주도권 싸움, 고부갈등- 힘을 누가 행사할 것인가 그런 싸움이죠. 배우자에 대한 나의 권리, 아들에 대한 남편에 대한 권리-그것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섭섭함에는 내 뜻대로 하지 않느냐는 그런 욕구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문화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힘에 대한 왜곡된 숭배가 끈질지게 있습니다. 그래서 모이면 이야기합니다. 우리 집안에 영의정이 몇이었는지 얼마나 대대로 대단한 집안인지. 서열의식이 무의식중에 있습니죠. 만나면 나이 먼저 확인하고 ‘민증까봐’ 그러죠. 네가 나이 어리니 나한테 숙여-그런 것이죠. 내게 유리한 기준이 나이니까 ‘너 몇 살이야’, ‘그럽니다.’ ‘너 몇학번이야. 나 전설의 90학번이야.’ 집안에서는 촌수 따지고 항렬 헤아립니다. ‘내가 삼촌뻘이야.’ 심지어 ‘너 키 얼마나 되니.’ 키 크면 우쭐합니다. 기린이 제일 크긴 큽니다. 이렇듯 나름의 서열기준을 가지는데 그것은 나에게 유리한 것을 사용합니다. 한국인에게는 상석과 하석의 기준이 너무 명확하게 유전자에 각인된 것 같기도 합니다. 헤드테이블이 있고 명패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을 깨뜨리자고 촉구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한번 총회장하면 그것이 무슨 명예로운 자리인양 죽을 때까지 호칭은 회장님입니다. 자동적으로 종신 회장이 되어 버리죠. 이렇게 교회마저 그렇다면 희망이 없는 것이죠. 교회의 계급화가 얼마나 공고한지 살수록 느낍니다. 하느님께 대한 무게감으로 움직이지 않고 명예로운 자리에 대한 추구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멸망의 전조가 아닌가요.
그래서 주님은 권력추구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자리낮춤이 섬기는 자의 출발이라는 일침을 놓으신 것이죠. 일꾼이 되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고, 열심히 했던 노력의 결과로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과분하기 짝이 없는데 ‘한번 일해 볼래’하고 주신 것이기 때문이죠.
진정한 섬김은 메아리 없는 섬김입니다. 이를 보여주시려고 어린이를 불러 그를 안고 받아주면서 말씀하시죠. 이 아이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곧 티가 나지 않는 섬김이죠. 누가 했는지 아무도 모르도록 그렇게.
그런데 현실 안에서 티가 나고 있다면? 그 일은 아무개가 했어. 그 아무개는 이미 자기에 대한 보상과 대접을 다 받았 버린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이에게 하는 것이 당신께 하는 것인데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있다면 기껏 열심히 하고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25-34)
성모님의 구원사 안에서의 위치를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면서 2018년에 제정된 신생 기념일로 오늘을 지냅니다. 성령 강림으로 태동된 교회가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모셨고 신앙인의 모범으로 삼았으며 그분의 탁월한 전구를 믿으며 걸어왔고 성모님이 도달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여정을 걸어 가기에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 선포합니다.
교회에 붙는 수식어 중 제일 빈번한 것이 ‘거룩한’ 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자모인 교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는 어머니, 자비로운 그러니까 마냥 품어주고 만져주고 먹이고 살리는 어머니의 모성을 가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즉 교회의 머리이고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기른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이심은 자연스럽습니다. 마리아를 유난스레 공경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상에 예수님을 전할 때 그러니 예수님을 낳아드릴 때 교회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를 모시는 이유가 마치 또다른 중개자가 필요해서가 아님을 분명히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를 낳아 기른 그 일을 교회가 계속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하느님 닮은 가장 비슷한 일입니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 역할을 잘 해내고 엄마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요? 혹여 엄마는 엄마이나 잔소리 끊임없고 자기 치장에 골몰하는 별스런 엄마가 되지는 않은지. 사제들이 권위적 가부장의 사목자로는 군림하지만 헌신하는 모성을 살아내기에는 연습이 너무 안되었지 않은지. 아들 예수의 십가가 곁을 떠날 수 없던 어미의 심정으로 주님 곁에 머무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엄마가 되고 싶고 반드시 되어야합니다. 남자이기에 불가능하다고 하면 안되죠. 누구나 생명을 돌보면 엄마이기에 하다못해 풀 한포기라도 키우면서 엄마로 사는 법을 배워야지요. 그렇게 생명을 돌보다 보면 알게 됩니다. 내 생각 대로는 되지 않음을. 내가 낳고 키웠다고 내 것이라 할 수 없음을. 때로는 십자가의 고통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비통함을 감당해야 함을. 이래저래 이 기념일은 우리에게 숱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참 잘 제정된 날인듯 하네요.…더보기
하느님 성령의 내리심을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오늘로 부활시기는 끝나고 매일 매일의 삶 일상의 삶, 연중 시기가 이어집니다. 또 성령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탄생, 교회의 생일이라고 하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는 이들에게 남겨주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계속하기 위해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사명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령강림은 그래서 교회가 일상을 복음에 의해 살아내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믿는 이들 안에 거처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면서 구원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승천 이후 열흘 동안 기도하고 있던 제자들 위에 임하신 성령께서 제자들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God in us,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거든요.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 존재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 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이죠.
이렇게 오로지 살아 숨시는 존재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신과 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신접이 가능한 인간이죠. 영적으로 신과 접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접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물론 무당님(?)들도 신접하십니다. 그런데 신령들과 신접하는 무당님들은 신을 불러들여요. 춤추고 꽹과리 치고 빙빙 돌고 그래서 완전히 자기가 빠져나가고 접신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접신의 순간에는 무당님은 그냥 껍데기일 뿐이에요. 모시고 있는 몸주신이 쑤욱 들어와서 그 인간을 차지한단 말이죠. 그리고 무당에게서 일 다 보고나면 빠져나가요. 그러니까 신이 들락날락 합니다. 그리고 이 신이 들어왔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이 없어요. 무당들이 신내림받을 때 전부 울더라구요. 앞으로 자기가 모실 신 때문에 아니 자기를 이용할 신 때문에 죄다 웁니다. 아니 무슨 그런 신이 있단 말입니까. 인간을 껍데기처럼 부리고 자기를 안받는다고 신병에 걸리게하고 견디다 못해 죽지 못해서 신을 받는단 말이죠. 사탄 마귀 악신은 인간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려오셔서 사시는 것은 들락날락이 아닙니다. ‘살다보니 너 마음에 안든다’ 이러고 방뺀다고 안하신단 말이죠.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인호가 박힌다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인호, 곧 도장 찍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취소가 안된단 말이죠. 좋으나 싫으나 우리가 잘하나 못하나에 관련없이 성령께서 계속 머무시면서 당신이 거처하시는 성전인 우리를 완성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재료로 삼으시면서 말이죠. 무당이 접신하듯이 인간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껍데기만 남겨놓고.
우리 자신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성령 하느님은 우리를 덮으시고 감싸버리시는 것이죠. 우리 안에 침투하셔서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에 스며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령강림으로 우리는 변화되어 갑니다. 다락방의 제자들. 겁에 질려 스스로를 가두었던 제자들이란 말이죠. 발각될까봐 잡힐까봐 숨어 있어요. 그들이 변화됩니다. 놀랍게 변화되죠. 겁쟁이들이 그렇게 담대해져서 광장 한복판에서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제 남겨진 우리들에게도 변화의 영이 내리십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안에 머무시어 세상을 변화시키소서.…더보기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 21,20-25)
부활 시기가 끝나갑니다. 더불어 부활 시기 동안 듣던 요한 복음도 끝나갑니다. 요한은 이 복음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가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주제로 그는 복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전하기 위해 그는 성령의 통로가 되어 이 복음을 써내려갔습니다. 그 마지막 대목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차마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신을 언급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던 자신이 예수님 가슴에 기대었던 최후 만찬의 순간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보셨던 기억이 있으시겠지요.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엄마의 가슴에 안겨 젖을 먹고 곤하게 잠든 우리였겠지요. 오랜만에 만난 눈물나게 그리운 사람을 와락 끌어안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던 재회의 시간도 있었겠지요.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며 토닥이던 친구의 숨결도 선명하겠지요. 그 따뜻함이 거친 삶을 견디는 힘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품에 안겼던 그 최후의 만찬의 순간이 살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건만 막내 동생같던(보통 전승에서는 요한이 제자단에서 가장 어린 사도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한 성화에서 다른 제자들은 수염이 있는 성인들로 그리는 데 반해 요한만은 매끈한 얼굴의 소년으로 묘사됩니다.) 요한을 안아 주셨던 주님이신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가장 충격을 받을 소년 요한이 주님의 마음에는 너무 짠했던 것 아닐까요. 저 아이를 어쩌나-눈에 밟히셔서 그냥 보낼 수는 없었을 테지요.
우리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은연 중에 배웁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얕잡아 보일 것 같아서 꿋꿋한 척 합니다. 그러자니 감정의 찌꺼기들이 계속 쌓여갑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디다 하소연해야할 마땅한 출구도 모릅니다. 그렇게 굳어진 채로 아무렇지 않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태연한 듯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그런 식이죠.
괜찮아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가장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적어도 우리 주님 앞에서는 그렇죠. 우리의 약함을, 우리의 흔들림을, 우리의 불안함을, 우리의 어쩌지 못함을 주님께 보여드리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이미, 드러내기에 앞서서 먼저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사랑을 흠뻑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음을 확신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안겼던 예수님의 가슴에서 뛰던 그 심장 소리를 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죠. 그 사랑의 맥박을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전해야만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는 제자의 복음을 통해 다시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더보기
요한 21,15-19
면목이 얼마나 없었을까? 베드로가 처한 상황을 보면 얼굴 들 수조차 없는 그런 순간일 밖에요. 주님이 잡혀 여기저기 끌려 다니시던 그 밤, 대사제 카야파의 집 뜨락에서 주님이 심문당하실 때 예수님과 나는 아무 관계도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어도 그저 기쁘다고 하기에는 꺼림하고 낯뜨거울 수 밖에 없는 그런 베드로의 처지.
그런 베드로에게 던져진 예수님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에는 그래도 양심이 찔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이 장면을 상상하면 좀 민망하달까요. 누가 내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당황 혹은 황당 할 것 같습니다. ‘너, 나 사랑하니?’ 더구나 한국 남자들에게는 특히 더 그렇겠지요. 게다가 남자인 예수님이 남자인 베드로에게 ‘나 사랑하냐?’고 질문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약간의 닭살이랄까, 하여간 좀 그렇죠. 여지껏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자기야, 나 사랑하지?’ ‘그럼, 사랑하고 말고. 말이라고해.’ 선뜻 그렇게 대답하기보다는 ‘쓸데없는 소리’라거나 좀 나은 경우라면 ‘꼭 말해야만 하냐’라 하고 넘기려 하겠지요.
그러나 대답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이라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고백되지 않은 사랑은 아직 많이 부족하고 허약합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9-10) 마음만으로는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고 입으로 고백하기까지 나가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확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대답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대답해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 말에는 다 ‘사랑한다’로 동일하게 쓰였지만 알다시피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고백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 ‘사랑하느냐’는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 신적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그 사랑입니다. 베드로의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의 사랑은 필레오(φιλέω)가 사용됩니다. 친밀한 사랑, 우정과 신뢰 그리고 호의의 사랑 필로스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결국 예수님도 세 번째는 필레오 동사를 사용하셔서 그래 그 정도 사랑하는구나-라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생명을 줄만큼 그렇게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 대놓고 사랑한다고 안하고 그나마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느냐’고 에둘러 말한 것이 십분 이해됩니다. 그만큼 사랑한다기에는 참 면목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그치시려고 질문하신 것 아닙니다.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아직은 당신께 대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니 맡겨진 양들을 돌보고 이제 생의 마지막에는 순교로 사랑을 완성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죠. 그때가 되면 베드로의 필로스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이 될 것이기에. 사랑을 재촉하고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그 분량만큼 지금 고백하면 기어이 그 사랑은 채워지고 더해져서 완전케 하실 것이죠. 그래서 그냥 지금 어쩡쩡하다 해도 베드로 마냥 우리도 ‘사랑하시는 줄 알고 계시죠’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더보기
요한 17,20-26
대사제의 기도 마지막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해 바쳐집니다. 바로 교회를 위한 기도이고 뽑힌 이들을 위한 기도이고 당연히 우리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뭘 기도하셨을까요. 무엇을 이루어주시려 기도하셨는가. 우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죠.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느냐면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이죠.
영광 받는다니까 그 영광 주신다니까 너무 좋겠죠. 그런데요 아시다시피 그 영광은 무엇인가요. 잘먹고 잘 살고 명성과 지위를 얻는 것-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해 못하면 예수님의 기도를 완전히 내 식대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영광으로 주신 것이에요.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는데 그 뜻을 완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의 뜻 안에 죽음을 겪으시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보았지, 아들 예수님 절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내 뜻안에서 죽기까지 순종했어.’ 이것이 아들이 아버지께 드린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믿는 이들이 이제 계속하기를 바라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제 복음을 믿게된 이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알게 된 이들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린 그 순종을 그러니까 그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 그것을 지고 가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해 가야한단 말이죠. 세상은 그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관심을 온통 쏟아 붓는 것이 전부로 여기면서 살아 갑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과 다르게 하느님 뜻에 순종하면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면서 가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생겨난단 말이죠. 교회 안에서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그것은 영광은 결코 아니죠. 그게 무슨 영광이에요. 힘들기 짝이 없고 수고해도 보상도 없쟎아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절대 영광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끌고 가시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 영광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슨 영광이야, 너무 힘들기만 한데.’ 세상은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믿게 된 이들은 오히려 ‘바로 이것이 영광이지. 그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나를 당신 뜻으로 당신 사랑 안에 부르면서 완성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지’하고 알아 듣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구원의지를 깨닫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수긍하고 이렇게 나를 만들어 가고 계시는구나를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내 삶 안에 감추어두신 십자가의 신비를 거부하지 않고 잘 참아내면서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계심을 잘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쁘게 감격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더보기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장 대사제의 기도 중)
대사제의 기도는 제자들의 하나됨, 제자들과 예수님의 하나됨,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됨에 대하여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재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중입니다. 그 제자들은 세상에 남겨지게 될터인데 세상 속에서 겪어야 할 일에 대해 주님은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을 지켜달라 청하시는데 세상에서 이 제자들을 보존하는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냐면 하나됨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의 전제는 ‘우리와 하나인 것처럼’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영광을 주셨는데 그 영광은 제자들에게 건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영광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의 하느님되심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그런 철저한 순종 속에서 하느님이 하느님 대접을 받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그것이 영광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이 찬란히 나타난 것임과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께 영광이 돌려지는 위대한 영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이죠. 그 말인즉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한순간도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에 분리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치열하게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그분을 보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누구나 성부 하느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런 주님의 삶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사는 그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시고 아버지와 당신과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 기도하신 의미는 분명합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내려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좇아 아버지를 드러내어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임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잘 담당해 내어 아버지의 뜻이 그들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잘 살아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제자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제자들의 삶에 일어날 십자가의 삶과 자기 부인과 고난의 삶이 필연성과 확정성을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고난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이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것입니다. 제자는 아버지 하느님의 지켜주시는 도우심의 은혜로 그 삶을 넉넉히 이겨내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세상의 미움 세상의 악의 공격을 함께 받는 것이에요.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이 이제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게 되면 온갖 박해 고통 다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삶이 제자가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아신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버지와 하나 되셔서 지실 수 있듯 이 제자들도 당신과 하나 되고, 그리고 서로 하나 되어야만 이겨내고 극복하고 기꺼이 지고 갈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하나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더보기
요한 15,9-17
요한 복음 15장이 지난 주에 계속 반복되었는데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도 같은 복음입니다. 외울 정도가 되었으면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반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귀에 인이 박히게 들으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지 아세요. 주님은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속으로 그럴 때 있습니다. ‘아, 듣기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그렇게 뾰족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듣기는 듣지만, 사실 안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안들리는 그 순간, 영혼은 굳어지고 딴생각에 나를 빼앗기고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 들리니 듣기 싫으니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니 지루함이 몰려옵니다. 망하는 인생은 그런 전조 증상을 보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안들리는 순간, 파멸하는 것이죠.
시편 1편이 말하는 바가 그것이죠.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첫 번째 시편은 시편 150편의 도입으로 이제 이 시편을 가지고 하느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게 될 것인데 그에 앞선 준비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주야로 되새기는 자’, 그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오분 십분이 아니라 그 가르침 마음에 품고 밤낮으로 돼새기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을 즐기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학습은 반복이죠. 그리고 반복에는 시간이 드는 것입니다. 오래 걸리는 것이죠. 몸에 익어서 내 한부분이 되어서 자동반사적으로 반응이 나올 때 우리는 진짜 변화한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서 변화된다는 것은 한두 번 묵상으로, 한두 번 피정으로 절대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루할 정도로 끝도 없이 때로는 지겹게 여겨질 정도로 무릎꿇고 되새기고 다시 듣는 과정으로 간신히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개 믿음의 연륜이 오랠수록 더해지게 되는 유혹이 그것입니다. ‘난 이 말씀을 여러번 들었어.’ 그래서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하니까 그게 다 제 것인줄 압니다. 그렇지만 아니거든요. 그냥 들은 것 뿐입니다. 아직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마티아 사도의 원래 자리였던 유다 이스카리옷, 주님의 말씀 안들었겠습니까? 수도 없이 들었겠죠. 아마 똑똑했으니까 더 잘알아들었겠죠. 그러나 그야말로 듣기만 했던 것이죠. 귀는 고급이 되었을지 몰라도, 마음과 삶은 따라가지 못한 겁니다. 별도로 살게 되었고 급기야 배신의 길로 간 것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머물러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머무는 것 반대가 뭘까요? ‘떠도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생각이 떠돌고 발걸음이 떠돌고 의식이 떠돌고. 바로 그것이 열매 못맺는 이유죠.
주님 안에, 그분 계명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잘 머무를 때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머무를 때 뭐가 되도 됩니다. ‘오래’는 무엇입니까? 시간의 길이입니다. 그 기도를 그 미사를 어떻게 어떤 자세로 봉헌하는가 중요합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합니다. 질적으로 괜찮고 좋아야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질도 중요하지만 양이에요. 양질 전환의 법칙이 통하는 것이죠. 양이 풍성해야 질적 수준의 고양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양으로 승부하는 것입니다. 오래 기도하고 오래 찬양하고 오래 무릎꿇고 오래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렇게 오래 오래 시간을 내어드리는 나무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
복음은 14장부터 계속된 고별담화의 결론입니다. 당혹스러운 것 그 제자들의 삶 속에 ‘고난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고난 속으로 밀어넣을 것이지만 내가 함께 하여 다 막아줄테니 아무 걱정말고 담대해야 해’라는 식으로 위로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 ‘용기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평화를 누리라고도 하시죠. 그러니까 주님은 평화와 고난, 이 이율배반적인 것을 동시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또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립니다. 이중적 현실을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고난, 고통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살기에 여전히 힘들고 무기력하기도 하고 문제투성이죠.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평화, 샬롬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평화가 삶에 아무런 잡음도 분쟁도 해로움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상태,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고 주님의 백성들은 온전한 순종을 드리며 사는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세상 속에서 완전한 순종에 의한 완전한 사랑을 받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 아니 아예 불가능한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분명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완성시켜내겠다고 하셨기에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평화는 고난과 근심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필연적 완성에 대한 확신 에서 오는 평안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평화와 기쁨은 언제나 내 안에서 얻는 평화, 내가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의 평화와 기쁨을 추구하며 살지 말고 나의 평화와 기쁨을 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 환경, 상태 등에서 얻고자 하는 그 평화와 기쁨을 모두 기각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이 초대는 모든 사건과 상황 앞에서 겁내지 않고 고통도 무관하게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그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고 아프고 힘이 드는 상태지만 그런 고통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어렵게, 정말 어렵게 한발 한발 내딛는 것입니다.
복음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흩어짐을 예고하신 후에 당신의 외로움과 배신당함이 전제된 상태에서 평화와 용기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 어떤 외로움과 배신감과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평화로울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용기를 가져왔습니다.
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불안한가? 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자주 흔들리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내 완성의 자리에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지금껏 이끌어 온 것처럼 우리의 결국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이 용기이고, 그것이 평화이고, 그것이 기쁨입니다.…더보기
주님 승천 대축일은 부활하신 주님이 사십 일간 지상에 머무시다가 아버지의 영광 안으로 다시 들어가시는 구원사건을 기념합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주님은 지상에 계시지 않는 것이죠. 다음 주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어서야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시죠. 그러니까 주님 승천부터 성령 강림까지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냐? 그럼요. 안계신 시간입니다. 부재의 시간! 예수님도 성령님도! 너무 좋지 않으세요. 맘대로 해도 좋습니다.^^ 간섭하실 분 안계시니.
승천의 의미가 뭐냐? 합리적 사고로 무장한 우리에게 승천이라니! 너무 마술적이고 허황한 동화 속 사건 같습니다. 예수님이 로켓같은 것 타고 슈웅 날라가셨을리는 없고. 이거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 위도 걸으셨다니까 못하실리도 없겠지만 뭔가 켕기는, 뭔가 미심쩍은, 승천은 좀 그렇습니다.
이럴 때 오늘 본기도가 승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본기도의 의미인 즉, 오늘은 인간의 품위가 격상된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심으로 우리도 높아졌습니다. 어릴 적에 놀이 중에 꼬리잡기 해보셨죠. 골목길에서, 운동장에서. 상대편 맨 뒷사람을 우리 팀 맨 앞사람이 붙잡으면 진 팀이 이긴 팀 뒤에 붙어서 줄이 점점 길어지죠. 그런데 우르르 뛰다가 줄이 끊어지면 집니다. 그러니 끊어지지 않기 위해 뒷사람이 특히 발빠르게 움직여야죠. 끊어지면 죽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래서 앞사람 허리춤을 꽉 부여잡고 움직여야죠. 인간의 품위, 인간의 격이 어디 달려 있는가. 승천하신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 주님은 머리이시고 우리가 지체이기에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죠. 앞사람 따라 줄줄이 움직이듯 머리이신 주님 따라 우리도 줄줄이 꼭 붙들고 하느님께 가 닿는 것, 그 길이 열렸음을 오늘 선포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땅의 비루한 삶을 살지만 결국 가야할 곳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 먼저 가신 주님 뒤를 이어 그곳에 도달할 때 비로소 내 삶이 완성됩니다. 여기서 완결되지 않아요. 목표가 지상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십억 모으기야, 유일한 목표는 김연아 뺨치는 여자 김수현 저리가라하는 남자와 만나는 거야, 남들 다 부러워하는 그런 자리 차지하는 것이야, 이제 갓 서품 받은 새신부라면 얼른 본당 주임신부 나가는 것이야, 이왕이면 주교 정도 해야 되지 않겠어- 그런 것 아닙니다. 고작 그것에 만족하지 말라-시시하게 아니 너무 겸손하게 말이죠. 나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겠다, 영적 자신감과 목적이 있는가.
성찬 전례 시작하면서 감사송을 바칩니다. 시기별로 전례에 따라 감사송 내용이 바뀌지만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 혹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 이것이죠. 마음을 드높게 하여, 그러니까 땅에 매어있지 않고 주님께 봉헌합니다.
사제 생활, 신자 생활도 마찬가지겠지만 힘든 것은 마음이 갈수록 드높아 져야 하는데 갈수록 깔린다는 겁니다. 자꾸 가라앉아요. 바닥을 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때로 들뜰 때 있어요 하지만 웬만해서는 드높아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힘들게 합니다. 거짓으로 인해 가라앉습니다. 의기소침으로 인해 붕괴됩니다. 실패가 주는 아픔이 바닥을 치게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린 그런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동반자가 되셔서 머리이신 당신의 승천에 동참하도록 이끄십니다. 마음이 드높아 지면 다른 것들은 상대적으로 아래 있단 말이죠. 그 힘들고 어렵고 아프고 속상하고 지루하게 한 모든 것이 내 마음 드높아지면 견딜만하고 이겨낼 수 있고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승천, 참 근사하고 두근거리는 말입니다. 내 갈곳이 어엿하게 있음이 얼마나 괜찮은지요.…더보기
요한 16,23ㄴ-28
어제 복음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날에는 제자들 누구도 아무것도 주님께 청하고 구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어지는 복음은 ‘아버지께 당신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신다’이기 때문입니다. 묻지는 않게 될 것인데 또 한 편으로는 청하기도 한다? ‘묻다’에 사용된 희랍어 에로타오와 ‘청하다’에 해당하는 아이타오 동사는 혼용되어 쓰이는 경우다 많답니다. 그렇게 보면 ‘너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말은 ‘너희는 그날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데 또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다 주신다?-앞뒤가 맞지 않는 알쏭달쏭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23절의 말씀은 기도하는 신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2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면 제자들 우리 신앙인들은 청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청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중적 존재들이란 것이죠. 기도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나 또 계속 기도하는 이들이기도 한 것이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는 걱정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필요를 위해서는 아무 기도도 하지 말라신 주님이 바로 그다음에서는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우심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 그러니까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청할 것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여전히 청하고 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를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육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만을 구하는 그릇된 태도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당면한 문제 해결을 구하는 기도에 앞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더 선명하게 알게 되기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는 이가 바치는 기도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말일까요. 제자들은 기도했지만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분명 제자들에게 기도라는 행위는 있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쳐질 수 있는 그런 기도는 아직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부지런히 기도했는데 정작 너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말을 얼마든지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느라고 했음에도 ‘너 기도 하나도 안한 거야’ 꾸중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내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내 열심을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믿음에 있어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육신에 대해서는 점점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이들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청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자연히 기도는 달라집니다. 구할 필요가 없는 이로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이로 살아가게 됩니다.…더보기
요한 16,20-23ㄱ
하느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섭리란 이 세계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실 뿐 아니라 개입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계와 우리 삶에 대해서 하느님의 선택하심이 있음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예비하심, 곧 내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심을 확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상으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걱정과 근심이 내 몫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서 가지는 걱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진 않다! 섭리의 주님은 걱정을 몰아내시어 우리 마음을 바꾸시기에 믿음과 걱정은 반비례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날에 다가올 것에 대한 걱정은 부질없습니다. 사실 대책없이 사는 것이 진짜 믿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대책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없는 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도 점술이나 사주 이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 때 충청도 논산쪽으로 며칠 농활을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머무는 집에 농민 잡지가 여기저기 있어, 잠시 쉬면서 뒤적이는데 잡지 끄트머리에 띠별 운세가 나와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안볼려고 시선을 피하는데(?) 사탄이 제 눈길을 그때 휙 잡아 끌었던 것일까요. 갑자기 내 운세는 어떨까 궁금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쩍, 그야말로 슬쩍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뭐야. 그게 제 운세랍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고생스럽게 살거나 죽기까지는 청춘이 아까우니 그냥 참아야하는가.
그것은 반복음적입니다. 복으은 기쁘게 살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대체 나쁜 것이 없는 것이죠. 섭리의 하느님 안에 내가 머물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제자들이 걱정 근심하는 모습, 예수님이 보시기에 두드러졌던 것일까요. 그들이 서로 웅성거리면서 그 표정 안에 걱정이 묻어났고 분위기가 완전 침울했던 모양입니다. ‘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냐?’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예수님 말씀 들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걱정을 나누는데 그 걱정이 사라지기는커녕 내 걱정에 너의 걱정까지 더해져서 주체 못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죠.
이것을 눈치 채신 예수님은 우울한 이 분위기를 단박에 파악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이죠. 다가올 미래는 기쁨 가득하게 되리라는 약속. 그러면서 해산하는 여인의 예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은 두렵지만 실은 그것을 겪기까지가 더 두려울 수 있습니다. 출산의 진통은 겪기 전에 이미 두렵습니다. 그리고 아이 낳을 때 다시는 안낳겠노라 느낍니다. 너무 아프고 진통이 보통 아닌지라, 내 인생에 둘째는 없다고 다시는 안낳겠다고 너 때문에 이 고통을 내가 겪는다고 애먼 신랑 머리를 쥐어뜯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또 아이를 가집니다. 세상에는 첫째만 있지 않쟎아요. 힘들지만 아이 낳고 보면 꼬물꼬물 이쁜 것이 이것이 내 속에서 나왔나-분만의 고통을 잊어 버리는 것인가요. 그러니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근본적으로는 더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어느 아빠도 그렇게까지 고통을 겪을 리 없으니 말이죠. 겪은 아픔에 비례해 기쁨도 그렇게 커진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에서 그냥 얻어진 것은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법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지금 기쁨없는 상태이지만 지금 미리 걱정하며 걱정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어떡하지, 큰일났네, 내가 견딜수 있을까’하며 심리적 붕괴를 미리 겪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어차피 겪을 것이라면 걱정 근심 한들 안겪을 도리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미리 걱정하는 것은 미련한 일임을 알면서도 우리도 아주 자주 그렇게 하곤 합니다. 앞당겨 하는 근심은 일종의 질병입니다. 섭리를 믿는 우리라면 더욱 그렇습니다.…더보기
요한 16,16-20
아이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밝혀낸 사실은 우리 체험에 부합합니다. 그 이론을 낱낱이는 모르지만 하여간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시간은 사람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흘러가고 체험됩니다. 소풍을 기다리는 시간 더디 흘러갑니다. 시험을 기다리는 시간은 촉박하게 흘러갑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어린이에게는 시간이 더디답니다. 어른들에게는 빛의 속도입니다. 어른은 인생은 짧다고 정의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인생은 무지 길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이 길게 느껴질 때는 특히 고통의 시간에 그렇습니다. 평안한 이와 고난당하는 이는 시간의 흐름은 사뭇 다릅니다. 군 복무 중인 친구들한테 금기어, ‘벌써’입니다. ‘벌써’ 말년휴가야! 우리에겐 벌써이지만, 군인에게는 아직도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또 나온 휴가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아닙니다. 인생 최대의 힘겨운 시간을 지내고 있으니.
그런데 제대하고 나면 후배들에게 ‘국방부시계는 거꾸로 두어도 흘러가’, 그러고 삽니다. 겪어보니까 순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것이죠. 복음에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려 일곱 번 나옵니다. 조금 있으면 못보겠고 조금 있으면 다시 보리라. 십자가의 고통을 말씀하시면서 굳이 조금이라 표현하시는 것이죠. 주님은 당신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확장하지 않으시는데, 그것이 조금만 더, 그러니까 잠깐이라고 하시는 것이죠.
고통은 말로 커지고 말로 작아지기도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옆사람에게 말한다고 해서 고통이 감해지지 않습니다. 말해도 수습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푸념한 만큼 지속됩니다. 고통은 묵상할수록 강도가 쎄집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힘겨운 학교 생활에 대해 이웃에게 자식들에게 말해보아야 해결되기는커녕 여전히 진흙같은 삶일 뿐입니다. 고난의 표현과 과장이 우리 고통을 축소하거나 짧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간사해서 아픔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아프다고 하면 관심을 끌게 되죠.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고통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관심은 얻었지만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목적은 관심받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지 않나요. 주님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근본원인 없애시고자 합니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조금 지나면 된다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실상 현실적으로 고통은 조금이라는 것이죠.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1베드 5, 10) 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잠깐’이랍니다.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고난의 강도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오히려 너희를 온전하게 굳게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인생 시스템 아닐까요. 인생 전체가 짐이라고 고난이라고 떠벌리지 말고 그저 잠깐일 뿐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힘들어도 어려워도 답답해도 속상해도 억울해도, 마음으로 되뇝니다. ‘그래, 그저 잠깐일 뿐이야’. 그러니 힘겨움과 어려움과 답답함과 소상함과 억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꽤 견딜만 하네요.…더보기
요한 16,12-15
말세적 징후, 미혹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 날 선택된 제자들이 분별하도록, 미혹되지 않도록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이 거듭됩니다. 성령 하느님의 인도함을 받을 때 그 어려운 시대에도 제자들은 하느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미혹의 시대에는 옳고 그름을 두고 논쟁, 시비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 시대에는 뭐가 옳고 그른지도 판단하기 힘든데다 나중에는 무엇 가지고 싸우는지도 모호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미혹의 시대에는 분명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고 그야말로 가는귀 가진 이들은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불확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만 했습니다다. 진리-곧 참되게 하시는 성령이 우리의 불확실한 삶에 기준을 세워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이 참되신 성령이 주님이 되셔서 모순과 부조리 없게 만들신다는 것, 그것이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내용입니다.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고 다가올 일을 지속적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느님은 진리의 성령이시고 그 진리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여 확신의 삶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죠. 사도 베드로 하나만 놓고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 부인하고 좌절한 인생의 대표주자 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더니만 회복시켜 주시고 목자로서의 사명을 받습니다. 드디어 성령 강림 이후 그가 거리로 뛰쳐나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했더니 단번에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평생 구걸하며 살던 이에게 ‘나자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고 그를 일으키니 그는 온전하게 치유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복음 선포의 과정에서 체포되어 두들겨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하느님의 해방을 맛보게 합니다.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인생이 베드로에게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베드로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일일이 다 설명해준다면 아직 불확실성 속에 있던 예전의 베드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들어도 이해 못하고, 기억도 못하고 앞으로 내가 두들겨 맞는다니 계속 예수님 따라다녀야 하나 어쩌나, 그런 것이죠. 그래서 자고로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순간 순간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는 그 순간 의미와 가치와 방향을 밝혀주실 때 진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그 순간 아는 것이 힘이 됩니다. 미리 알면 오히려 걱정만 늘어납니다. 결혼 앞둔 아가씨에게 성령께서 앞날을 미리 밝혀 주신다고 칩시다. ‘너 앞으로 이런 사람 만날 거다. 결혼 상대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데 나중에 너 속썩인다. 아이 낳으면 걔가 중학교때 가출한다.’ 미리 이런 것 알면 우리 삶이 어떻게 되어 버릴까요. 오히려 알고 나면 혼란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 일어날지 모르지만 매순간 주님 따라가는 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드라마가 흥미진진할려면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뻔하면 안되죠. ‘아, 이다음은 저 남자가 다시 옛애인 만날 꺼야.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진행될 거야.’ 꼭 초치는 사람이 있죠. ‘이번에 복면가왕 나온 저 사람은 실은 아무개야. 점수는 몇점이야.’ 그거 보고 앉아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이를 우리는 스포일러라고 그럽니다. spoiler, 썩게 만드는 사람 원래 그런 뜻 아닌가요. 손상시키는 망쳐놓는 사람, 미리 아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의 앞날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주님이 진리 안으로 여전히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가지고 알려주심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더보기
사도 16,22-34
오늘은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동료 실라스와 함께 마케도니아 필리피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원래 아시아(지금 터키 지역 정도죠)가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가로 막으시고 필리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 중에 모함을 받고 급기야 선동된 군중들에 의해 투옥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행전에 행정관이라는 명칭은 원래 곤봉을 여럿 찬 사람이란 뜻이랍니다. 로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질서 유지였습니다.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지요. 그러니 국법 질서 어기는 자, 여겨지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진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서 차꼬차고 있는 바오로와 실라스. 그들에게는 깊은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오면 어떻게 될까요?
남의 고난은 쉬워 보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한 사람은 마음의 문제가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육체적 고통 사람은 저것들은 배불러서 불평한다고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비난합니다.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모든 고통은 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신 것입니다. 매맞고 투옥되는 고통에 앞날에 대한 불안함과 흔들리는 믿음의 유혹까지. 이렇게 코너에 몰린 바오로 그리고 실라스는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나요?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합니다. 보통 즐거울 때 기쁠 때 찬미하게 되고, 힘겨울 때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야고 5,13) 그런데 고통중에는 기도, 즐거울 때는 찬양-이것이 통상적인데 바오로는 기도도 하고 찬미가도 불렀다는 것입니다. 지금 평탄한 것입니까? 험난한 것입니까? 왜 이 둘이 섞여있느냐는 것이죠.
그들 안에 하느님 마음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갇혀 있으니 ‘풀어달라’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 풀리는 것 있습니까?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닫힌 문을 여십니다. 이런 해석은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요. 바오로는 옥문이 열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옥문 열렸는데 도망치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사도 16,28) 그러니 그가 바친 기도는 무슨 기도였을까요? 사도는 약간 딜레마에 빠진 것 같아요. 자기가 원래 가고 싶어하던 아시아가 아니라 필리피에 온 것입니다. 성령에 인도하시므로! 그런데 하느님의 인도하심인데 고난이 있습니다. 순종했는데 예상과 달리 힘든 일이 생긴 것이죠. 그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죠. 처음에는 자기 문제 가지고 기도했으나 기도에는 수정 기능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하느님 마음 이해해서 찬미가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렸음에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수에게도 복음을 증거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간수와 그 가족, 이방인들이 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그의 사명을 감옥에서마저 이루는 것이죠. 감옥마저도 그 목적을 이루는 일터가 되었습니다. 그에겐 그 감옥이 나쁜 것 아니었어요. 하느님의 마음을 깨우치니까 그렇게 기도와 찬미가가 함께 나온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신다는 얘기 듣고 술렁거리고 근심에 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찼으나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다 밝혀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 생각하던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래요. 감옥 안에서 바오로도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이방인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에 승복한 것입니다. 오늘 땅을 뒤흔드시어 감옥문을 여시듯 우리 마음의 닫힌 문도 열게 하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찬미가 뒤섞인 하루가 되기를 청합니다.…더보기
요한 15,26─16,4ㄱ
상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살 때 세상은 교회를, 신앙인들을 비난하죠. 믿는다는 것들이 고작 그 모양이냐고, 도대체 다른 것이 뭐냐고 너희의 믿음을 삶으로 증거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 비난은 아주 정당합니다. 우리가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옛삶을 유지할 때,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할 때 가해지는 비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비난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수없이 유대 사회를 진동시켰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면 할수록 충돌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급기야는 십자가로 마감되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복음에 불충실할 때 세상은 예수 공동체를 미워합니다. 복음에 충실할 때도 세상은 여전히 예수 공동체를 미워합니다. 전자의 미움은 우리의 부족함이 초래하는 미움이지만 후자의 미움은 더욱 근본적인 미움이어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미움인 것이죠.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들인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 주신다는 말씀 바로 뒤에 그래서 이런 근본적 미움받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이들로 영글어가면 갈수록 그만큼 세상의 미움이 가중되게 되어 있다는 역설을 전해 주신 이유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다른 삶의 원리로, 다른 삶을 추구하는 예수 공동체를 뜨악해 하며 불편하게 여기고, 급기야 미워하고, 축출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예수 공동체는 온화하게 지낼 수 없고 복음을 살아가고자 마음 먹고 열심을 다할수록 못마땅한 이들로 간주되고 미운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공식인 것이죠. 요한은 복음 첫대목부터 그래서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고 선언합니다. 세상과 불화하는 그리스도교, 우리가 가야할 자리는 그것인 것이죠.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자세와 가치를 가질 때 가해지는 이런 미움, 배척, 갈등은 어쩌면 우리가 복음을 살아가고 있다는 진정한 증거가 됩니다. 세상과 섞이지 않았기에 받아야 하는 미움입니다.
그러니 우리 시대 교회의 문제는 아주 성급하게 세상과 타협한 결과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제대로 살지 않으니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1요한 3,13) 요한은 진리를 지키는 삶에서 미움받음은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바오로는 예수의 사람들이 환대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훈장이라고 아예 못박습니다. 이미 예수님도 진복팔단에서 확인하신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1-12)
우리가 복음에 대해 입다물면 세상과 적당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지만, 따라간다고 하지만 그러나 너무 사이좋게 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아무런 분쟁도 없고 미움 받을 일 없고 그저 다른 이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똑같이 살아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세상의 주장에 편승하지 않고 역행할수록 그래서 불편하게 만들수록 미움과 배척, 갈등은 가중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죠. ‘똑같이 살지 말고 좀 다르게 살아, 그래서 미움도 좀 받아보면 안되겠니.’ 하느님의 은혜는 선불이 아니라 후불이라고 합니다. 제자가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격이 하나도 없는 이들에게 그렇게 하셨죠. 그러면 이제 제자된 이는 자기의 온 삶으로 살아야 할 그 몫이 남아있습니다. 무상적인 구원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값싼 것은 아닙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고 더 정확히는 ‘복음을 지킬 투지’가 우리 몫입니다.…더보기
요한 15,9-17
친구가 있을 때 신앙생활을 더 쉽게 할 수 있고 괴로울 때 도움을 줍니다. 위기에서 건져줍니다. 친구가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죠. 복음을 통해 친구가 있음으로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나의 친구가 되십니다. 요한 15장에서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표현됩니다. 나무와 가지의 밀접한 관계처럼 딱 붙어있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공급받을 때 제자들이 열매맺을 수 있음에 대한 강조하고 그 부연으로 여러 이야기를 하시죠. 지금까지는 주종의 관계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종이라고 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는 친구야-제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 친구야. 목숨바쳐서 맺어진 내 친구야.
종에서 친구로의 관계변화가 생긴 것이죠. 더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이죠. 특별히 어떤 변화냐면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변화가 생긴 것이죠. 종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긴 합니다. 친구가 된 제자들도 여전히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당위가 있죠. 그런데 어떤 변화입니까? 예전에는 종으로서의 순종, 그런데 이제 소통방법이 달라졌죠. 종은 맹목적으로 따라야죠. 친구는 그렇지 않죠. 가슴 터놓는 것이죠. 가슴의 언어로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이죠. 이전에는 순종해야하기에 당위이기에 따르지만, 이제는 가슴이 떨려서 순종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게 된 것이죠. 종과 친구의 차이죠.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 그분 이름에 의지하여 누구나 주님께 나가게 되듯, 이제 그 변화, 그 개혁이 오늘 복음이죠. 순종해야하기에 왕이신 그분이 말씀하셨으니 따라야한다. 그렇게 당위적인 것이 더 이상 아니죠. 주님이 이제는 친구의 마음을 두드리며 하시는 말씀이로구나 그래서 따르고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 정도 되어야 아브라함 정도 되어야 하느님과 친구로 대우해주셨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함, 그것이 아브라함 모세의 영광이고 그들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된 제자라면 이제 달라지는 것이고 특권이 주어집니다. 바로 주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특권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친구가 되면 믿음의 친구들도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주님의 명을 행하여 나는 주님의 친구가 되죠. 이것을 확장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주님의 친구죠. 그러면 그들도 나의 친구가 되죠. 직간접적으로요. 친구의 친구는 내 친구이기도 하죠.
말씀을 믿고 지키는 이는 내 친구가 되어 내게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그 고민을 나눌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좋은 친구 네트워크를 가진 이는 심지어 건강에도 좋답니다. 수명도 확 늘어난데요. 친구가 없는 것은 비만이나 운동 전혀 않는 것과 같은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더라구요. 친구가 많으신가요? 없으신가요? 빨리 만드세요. 누구보다 내 친구 예수님을 만나세요. 그러면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됩니다.…더보기
요한 15,18-21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을 때 필연적으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주장과 자기보호, 자기관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렇게 누추하고 미덥지 못한 자기를 향한 사랑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에게 작용할 때 사랑이 영글어 갑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점차 포도나무의 영향으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가? 의외의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죠. 오히려 사랑의 열매를 맺은 우리를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고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 오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총력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이것이 포도나무가 가지에 하는 일, 은혜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붙어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열심히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영글어 가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하느님 백성을 향한 세상의 미움은 가중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겨주고, 먼저 바르게 살면 세상도 우리를 본받아 바르고 청렴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변할 것을 기대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바르게 살아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모토는 너무나 비복음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신자가 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바르게 살게 하시는 것이 더 옳겠죠.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신자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신자가 사랑하며 살려고 애를 쓰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그가 예수께 속해있기에 그리 살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가 세상 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이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다른 삶의 원리로, 다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뜨악해하며, 급기야 미워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세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오염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과정에서도 고민하고 싸우며 괴로워합니다. ‘나’를 섬기라는 오염의 외침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 안의 성령의 외침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는 일을 수시로 경험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믿는 이를 향한 세상의 미움을 경험합니다.
세상은 때때로 착하고, 정직하고, 바른 사람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찬양과 존경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 비판과 배척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반드시 손해 보는 자리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뇌와 번민 속에서, 때로는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데, 그 사람의 그런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실수와 넘어짐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사람의 고민과 고뇌의 모습 속에서도 세상은 그로 하여금 편치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거슬러 사는 한 세상은 우릴 불편해하고 거북해합니다. 그리고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 미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반드시 수반되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더보기
요한 14,6-14
저는 길치입니다. 길을 못찾아서 자주 헤매입니다. 좋은 지도 앱이 많아서 요즈음은 그래도 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지하철역 나와서 한동안 멍할 때가 많습니다. 동서남북 방향이 가늠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멘붕입니다. 이미 가보았던 길도 새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번 익숙해진 길이면 그 길을 고수합니다. 새로운 길, 지름길이 생겼어도 그래도 예전에 다니던 길로. 길갈 때는 평소와 달리 극보수가 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아는 길, 하나 있습니다. 헛갈리지 않고 잊어버려서도 안되는 길,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토마스의 질문이 먼저 있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단 하나의 길밖에 아버지께 가는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우회로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무수히 다른 길을 찾아 갔던 사도 베드로는 부활과 성령강림 이후 드디어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예수님은 여러 길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길, 절대적인 진리, 그 길과 진리에 의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단 한분, 예수님임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길을 열심히 찾아보려고 했을 때 그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야말로 불시에 그 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찾던 우리에게 찾아온 예수님이라는 길은 그렇게 녹록한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길을 오해하면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면 좋은 일, 행복한 일, 괜찮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예수님의 길, 예수님께 이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길입니다. 그래서 길이신 당신을 따르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이라는 길에 접어들어, 예수님이라는 길을 가는 삶은 좁고 힘겹고 고단한 자기 부인의 삶이고 십자가의 삶인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너무 넓고 편안하고 화려한 길이 많아집니다. 너무 많은 다른 길이 교회 안에 우리 삶 안에 들어와 버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길 아닌 길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고 있지 않은지.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 예수님을 믿으면 문제 해결, 예수님을 믿으면 승승 장구-그런 길은 길 아닌 길입니다. 길인 것 같으나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길입니다.
오늘도 길을 묻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그 길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길을 찾았음에도(찾도록 하셨음에도) 우리는 혹시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은지 묻습니다. 필립보 사도에게 하신 말씀 안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길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발걸음을 걸어 가면 그만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9-11)
예수님 사랑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히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랑 말입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디서 유래하느냐 곧 사랑을 받아서 전하는 것,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나도 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방식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랑하신 것처럼’-이 말이 자칫 오해를 일으켜서 사랑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직역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다’-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흘러 나온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사랑을 독점하지 않고 우리에게 흘려 보내신다는 것이죠. 고인 물만 썩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고이면 썩게 됩니다. 어떻게 썩습니까? 내가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선한 결과로 작용합니다. 내가 그렇게 존귀한 존재라는 자부심, 삶을 힘차게 살아갈 의지가 사랑받은 이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 뿐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서 전달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랑받기만 할 줄 아는, 아주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 유아적 존재가 되기 십상인 것이죠. 사랑받음으로 시작해서 자기만 아는 괴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흘러가고 전달되고 확산될 때만 내가 받은 사랑의 가치가 실현됩니다. 하여 예수님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초대하시면서 동시에 계명을 지켜야 사랑 안에 머문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명이 뭐에요. 12절 바로 오늘 복음 다음 구절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몸둘 바 모를 정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건져지고 구원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머물러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너희는 충분히 알고 느끼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야. 너희가 어떤 존재로 사랑받고 있는지. 목숨까지 바쳐서 구할 만큼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끝끝내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건져 올리신다는 것을. 그런데 그렇게 충분히 머물고 나면 내 안에 젖어든 그 사랑으로 다른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야.’ 그 말씀인 즉 무엇입니까? 내가 하는 사랑은 내 사랑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자꾸만 계산하는 사랑입니다. 주었으니 받기를 원하고 받았는데 주지 못하면 미안한 사랑이고 그렇단 말이죠. 우리가 할 사랑은 받은 사랑인데 자꾸만 내 사랑을 하다보니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오히려 분쟁이 일기도 하고 집착이 되기도 하게 됩니다. 주님 사랑하심이 어떠한지 어떻게 나같은 것을 이리 사랑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충분히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고 감격하고 묵상하면서 그렇구나 그 사랑으로만 내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그래서 내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 그대로 사랑하겠다-거기까지 갈 때 우리는 비로서 사랑 비슷한 것을 하게 됩니다.…더보기
요한 15,1-8
포도나무 중에서도 참포도나무로 예수님은 당신을 소개합니다. 참 포도나무? 그러고 보면 거짓 포도나무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시대적으로 보자면 예수님과 대칭점에 있던 고루한 유대사회, 거짓 포도나무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의 참된 정신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적 형식에 얽매인 이들 거짓 포도나무입니다. 이 말씀의 시점은 잡히시기 전날, 최후만찬 석상입니다. 이제는 헤어질 시점, 스승을 잃게 될 제자들이 혹여 거짓 포도나무에 넘어갈까하는 우려와 걱정이 있으셨습니다. 하여 옛 삶으로 돌아가지 말고 당신의 가르침에 머물 것을 권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떨어져 있어서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붙어있음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 가지가 상처를 크게 입거나 벌레 먹었을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나마 상처 입었을 경우 자신만 상처입은 것으로 그치지만 벌레 먹었을 경우는 그 가지에만 머물지 않고 확산되기에 더 문제입니다. 옆의 가지, 옆의 나무까지 퍼져나갑니다. 소나무 병충해 중에 재선충이 있습니다. 소나무에 기생하면서 나무를 말려죽이는데 크기가 1mm도 채 안됩니다. 암수 한 쌍이 나무에 붙으면 일주일만에 20 만마리 이상으로 불어나 소나무의 영양분 수분을 다 차단하는 치사율 백퍼센트의 해충입니다. 붙어있지만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그렇게 참된 포도나무에 겉으로는 붙어있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영적 해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붙어있음에도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주님으로부터의 양분을 차단하는 것들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고서는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 대충 붙여 놓는 듯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접착제로 혹은 못으로 붙여놓긴 할 수 있지만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붙여놓은 것처럼 그렇게만 보일뿐입니다. 원 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붙어있는 것을 머물러 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주님께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네 안에 너희가 내 안에’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일치해야만 하느님께서 영광받으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가지인 우리가 열매 맺는 목적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임이 밝혀집니다. 열매 맺음은 그 나무를 심은 이의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어서 가지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취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열매를 다만 맺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열매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독서로 읽는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목숨 바쳐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삶의 형편이 좋아지지는 않고 점점 안좋은 상황으로만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는 이에게는 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직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모든 열매를 다 가져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로 살지 않고 주시는 은혜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삶을 버리고 참포도나무에 접붙여져서 그분께서 내어주시는 것으로 힘을 내어 열매를 열심히 맺어가고 그 열매를 제 것으로 돌리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서 취하셔도 하나도 섭섭하지 않은 그런 삶, 주님만을 위한 열매로 충분하다면 꽤나 괜찮지 않을까요?…더보기
요한 14,27-31ㄱ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 평화.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행복하다하신 말씀도 떠올립니다.
그런데 선물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다른 평화이니 그 평화를 누리는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꼭 붙들고 겁내지 말고 담대해라 당부하셨습니다. 그 평화를 누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미사 때마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내가 지키는 평화입니다. 기를 쓰고 무엇인가 해야 간신히 유지되는 평화죠.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내가 지키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평화, 본질이 다른 것이죠. 그래서 주님의 평화는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켜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 평화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평범한 어떤 일상을 차분하게 그린 이 글을 읽고 아침의 평화를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때는 봄, 봄은 아침, 아침은 일곱 시, 달팽이가 가시나무에 있고, 하느님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모두 평온하여라.’ 평화 하면 떠오르는 ‘피파의 노래’다.
그런데 요즘 우리집 아침 일곱 시는 달팽이가 가시나무에 있는지,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신지 음미할 짬이 없다. 어머니는 골방에서 평화방송 뉴스 듣고 남편은 큰방 한가운데 가로누워 텔레비전보고 아이들은 학교 갈 차비하느라 화장실로 부엌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일보고 세수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이 닦고 하느라 바쁘다. 나는 이 지하 부엌에서 저 지하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며 찌개 끓여, 이 방으로 김치 꺼내러 저 방으로 도시락 싸서 고등학생 주러, 대학생 용돈 주러 저 방으로, 대학원생 허리띠 찾아주러 작은방으로 뱅뱅 도느라 해가 떴는지 날이 흐렸는지 하늘을 쳐다볼 겨를이 없다.
내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는 일곱 시 넘도록 자고, 남편은 작은방에서 책보고, 아이들은 아침밥 생략하고, 나는 음악 들으며 글쓰고 했으면 피파처럼 평온한 세상을 노래하련만 왜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남편은 아이들이 왔다갔다하는 방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쾅쾅 켜놓고, 아이들은 시차를 두지 않고 똑같은 시간에 학교 가느라 동시상영을 해서 이 북새통을 치러야 하는가. 설마 정말 몰라서 물으랴.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이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주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마음의 평화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사랑의 봉사를 기꺼이 하는 데 있지 않은가. 달팽이가 저 있을 가시나무에 있고 하느님께서 하느님 계실 하늘에 계시듯 나도 나 있을 부엌이 있어야 세상이 모두 평온하리라. 어머니가 치매라도 걸려 내가 끓이는 된장찌개에 흙을 집어넣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며, 남편이 아침까지 어느 술집에서 고주망태로 있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기특하며, 아이들이 짜증내지 않고 학교 갈 차비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또 나는 이 나이에도 팔다리머리가 성해 거뜬히 아침 일과를 끝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하느님, 하늘에서 웃는 얼굴로 저희를 내려다보시고 기뻐하시며 참 평화를 주소서.”
그냥 우리집 아침 풍경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근심걱정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란 것이죠. 우린 가끔 그런 착각을 합니다. 더 상황이 나아지면 이 문제가 해결되면 고민거리가 싹 다 사라지게 되면 그럼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는 단 한번도 내 인생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평화는 그냥 주님 주신 지금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힘들게 만드는 이 문제 속에서 주님이 안계실까요? ‘아니네, 여기에도 계시는구나!!’ 그것을 알게 되면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결국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입니다.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오늘도 치루어야 하는 삶이 많이 흔들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평화롭지 않을 까닭은 없는 것입니다.…더보기
요한 14,21-26
제자들과 삼년을 함께 하신 후 떠나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헤어짐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떠나지만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이율배반적입니다. 함께 있을 곳을 마련해 놓았다고도 하시고, 함께 하기 위해 아버지께 가신다고 하시고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있게 될 것이고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신다고 계속 반복해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점과 관심은 무엇일까요? 결국 함께 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좀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토마스는 예수님 가시는 곳 어딘지 모른다고 길을 알려달라고 궁금해했죠. 필립보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곧 자신이 알아야 하고 보아야겠다면서 예수님을 알아야할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계속 제자에게 함께 함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한낱 대상이 되는 것이죠. 대상이 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거든요.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삽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현실은 서로가 대상이 됩니다. 돈을 잘 버는가 아닌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매력적인 외모가 지속되는가 아닌가 등등. 같이 살면서 이런 것을 문제 삼습니다. 왜요? 상대가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실험을 하나 했답니다. 1997년도 겨울에 명 연주자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로 하여금 워싱턴 번화에서 연주하게 합니다. 아주 허름한 옷차림에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죠수아 벨이 바흐의 대표곡 6곡을 45분간 연주했습니다.
그가 연주하는 동안 그의 앞을 지나간 사람은 1097명이 지나갔어요, 그중 잠깐이라도 서 그의 음악에 귀기울이며 감상한 사람은 달랑 6명. 약 20명의 사람이 그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 주었죠. 걸인인줄 안거죠. 그리고 대부분은 전혀 관심 쏟지 않고 갈 길만 재촉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32달러. 그런데 그가 길거리 연주를 하기 3일전 연주했던 보스턴 심포니홀에서의 공연의 평균 티켓 가격은 150달러였고 전석 매진되는 기립박수 받는 공연이었죠.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는 500만불 넘는 명기였죠. 그러나 뭐였어요. 단지 그가 연주한 장소가 열악하고 허름한 옷차림이 사람들로 하여금 별 것아닌 연주처럼 여기게 만든 것이죠. 이 실험의 결론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감상하는 자기를 즐기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야 하면서 으쓱해했다는 것이죠. 그 음악이 그 선율이 사실은 뭐였어요. 나의 품위를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여겨졌을 뿐이란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잘 믿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어느 틈엔가 하느님이 나의 대상으로 전락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머리에 집어 놓고 그 지식을 더해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전혀 다르죠.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는 자신을 즐기는 것은 너무 다른 것이죠.
함께 함으로 인해 예수님 자신이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것이고 함께 함으로 하느님을 보고 알아가기를 원하셨는데 우리는 하느님을 또 스스로 만든 틀에 가두어 놓고 ‘꼼짝마’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더보기
요한 15,1-8
여기저기서 땅이 꺼졌다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봅니다. 자기 땅이 함몰되어 생기는 이런 구덩이와 현상을 싱크 홀 혹은 블루 홀이라고 부른다지요. 작은 규모이면 괜찮겠는데 엄청난 구덩이가 순식간에 생기기도 합니다. 큰 피해를 부릅니다.
멀쩡하던 지표가 붕괴되는 이런 현상은 오랜 가뭄이나 아니면 지하수를 고갈될 정도로 지나치게 퍼올린 결과 지하수 수면이 내려가서 생기는 공동화나 광산 채굴이나 공사로 인해 지하에 빈공간이 생겨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면 지반의 무게와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내려앉게 된다지요. 텅 비게 되면 힘을 받지 못합니다. 땅위에 건물이 무거워서 구덩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표 아래가 약해져서 무너집니다. 우리 삶도, 신앙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내면이 고갈된 경우가 많습니다. 직함도 괜찮고 사는 모습은 좋아보입니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내면의 영성이 고갈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내려앉기 직전의 지면처럼 말입니다.
하여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가? 묻게 됩니다. 충만한가 고갈되어 있는가? 내면이 고갈되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외적 환경에 크게 반응합니다. 사회적으로 잘나가던 이들 중에서 여러 압박이 닥치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압박을 견딜 내적 힘이 없으니 그렇게 됩니다. 지탱할 만하지 않으니까 회피의 방법으로 잠수를 타기도 하고 엉뚱한 짓을 벌입니다.
결국 외적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 싱크홀을 만든 내면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적 건강성을 지켜야 환경에 저항할 수 있는, 지표면의 무게를 떠받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죠.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십니다. 공간적으로 생각하면 주님이 바깥에 계시고 나는 안에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주님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채우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경우 내가 바깥이고 주님이 안쪽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으로 채워져야만 청하는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그 공허함은 열매맺지 못함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내 안에 머물러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선적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바깥을 보호하기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활력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친밀성을 공동체의 전례와 기도를 통해 상승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외적 공급이 단절되면 내면은 고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하수는 원래 지하수가 아니라 빗물이나 강물 여하튼 바깥의 물이 스며들고 흘러든 것입니다. 그래야 안이 채워집니다.
그런데 동시에 주님이 내 안에 머무르셔서 채우십니다. 시카르 여인에게 그러셨습니다. 네 안에서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이 솟게 하겠다. 우리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상태를 감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움직임이기도 하고, 나의 고유한 심리, 정서도 살펴야 하는 것이죠. 아픈지 슬픈지 기쁜지 흥분되었는지 뭐 알아야 대처합니다. 안에 너무 신경을 안쓰면 비어있는데도 공허감을 못느끼는 마비상태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죠. 심각한지 모르는 진짜 심각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채워지기 위해 안팎을 다 신경써야합니다. 그래야 여러 자극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는 나로 견고하게 됩니다. 메마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속적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공급되어 채워져야 합니다.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잘 붙어있는 것도 재주라고 하지요. 떨어지지 않고 껌딱지마냥 붙어있으면 절로 이루어지는 일을 체험하게 되겠지요.…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요한 14,7-14)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정도면 꽤나 오래 주님과 함께했다 싶은데도 잘 모른다 할 밖에요. 학생 때 신학 과목을 그리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 했음에도 막상 답안지에 쓰고 리포트를 작성하고 나면 답안지와 리포트에 문자로 설명한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에 대한 모든 것들이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내가 정말 그분을 잘 안다고 그래서 괜찮게 믿는다고 더구나 사랑하기까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마 자신있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게도 하시는 말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시간에 비례해서 앎과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걱정거리가 얼마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도무지 모르는 채 그저 한 집에서만 살기도 합니다. 도통 그 사람 모르겠어 그러면서 말입니다. 좀 알 것 같다가도 또 전혀 모르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동기 신부들과 학생 때 동거동락할 시절에는 그래도 좀 아는가 싶었는데 각자 소임지에서 살다가 얼마만에 다시 만나면 그 친구들도 그렇게 낯설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도 이리 어려우니 하느님을 안다고 감히 말할 자 누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에 대한 우리의 솔직한 대답은 ‘어떻게 제가 알 도리가 있겠습니까?’일 밖에요.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실은 그저 아주 부분적으로, 아주 거칠게 조금 알뿐입니다.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섭리를 잘 안다고, 확실히 안다고 자처하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무슨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환하게 다 파악하고 심지어 소유할 수도 있다면 그분이 하느님이실리 없습니다. 무한하신 분을 알 방도는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은혜로운 일은 원래 알길 없는 하느님을 알도록, 느끼도록, 믿도록 그리고 사랑하도록 게다가 따르기까지 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는 알 길이 없었는데 그분이 만들어가신 덕분에 딱 그만큼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따르기도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는 그 더 큰 일이 아닐까요.…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복음은 주님이 떠나실 상황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날지 딱 봐도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어떡하지.’ 어두운 미래, 무겁고 참담한 심경이 저절로 듭니다. 그때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말이 그렇지 이게 절대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나.’ 걱정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시간은 없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슬그머니 밀려오는 것,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마태 634) 그러니까 걱정이 있답니까 없답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요? 걱정할 수 있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시험이 내일 닥쳐왔습니다. 공부는 물론 안했죠. 준비 부실입니다. 영어는 대충 될 것 같은데 이번엔 수학이 문제입니다. 뭐 이런 경우죠. 이럴 때 걱정 안되는 것이 이상하죠. 완전 망치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다 못해서 전전긍긍입니다. 별생각 다 들어요. 시험이 좀 미뤄지는 일이 혹시 일어나지 않을까? 내가 아는 대목에서만 시험문제가 나오는 일 나오지 않을까? 당치 않은 기대도 가지죠.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더라도 혹시 그런 일 일어나지 않을까? 백에 하나 천에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하는 것은 걱정이 너무 많으니까, 어떡하든 그 걱정을 덜어내려고 하는 것이죠.
제자들 얼마나 걱정 많은 때인지 모릅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너무 위험하고 안타깝고, 그래서 제자들은 미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떠난다, 너희는 남겨진다, 앞으로 무슨 일 생길 거다’ 이러시니 이거 어떡합니까?
그런데 대책이 있답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데 걱정이 넘치는데 대책을 마련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 자리를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자리랍니다. 비록 우리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결코 어둡거나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죠. 이걸 당신이 직접 하시겠다고 담대하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 그곳을 마련하셔서 부르신다는 약속.
그래서 미래가 불투명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없을 때 두렵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의 근본원인입니다. 실은 언제나 미래는 모릅니다. 잘 나갈 때도 모릅니다. 못나갈 때, 물론 모르죠. 어떤 일 생길지 누군들 어떻게 확신합니까. 미래가 궁금하고 답답해서 사람들은 점술에도 의존하기도 하죠. 그런데 미래를 안다고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죠. 몰라서 걱정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앞날은 모르지만 어디로 이끄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이 이끄신다는 그 믿음으로 충만하면 두려울 이유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책이 되어 주신다. 하느님이 이미 마련해두셨다.’ 든든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대책이시다. 이런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주님이 대책이실 뿐 아니라 그분이 오늘 말씀하시길, 당신은 길, 진리, 생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지금 어려움 있지만 오늘도 문제가 생길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세공할 것이라는 담대함이 있을 때 오늘 하루도 괜찮을 것입니다.…더보기
마르 16,15-20ㄴ
우리 시대는 믿음은 점점 사변화, 추상화되는 시대죠. 신앙을 지닌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막연해 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면 그저 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 구체적인 현실 안에 펼쳐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를테면 ‘두려워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이들은 생각합니다. ‘아, 주님은 내 마음도 잘 아시지. 오늘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는데 친절하게 주님 이런 말씀을 주시네.’ 그러면서 어디 적어놓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까지는 그래도 합니다.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괜찮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가 가진 사변적 신앙의 대표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두려워말라’ 말씀하실 때 이것을 들은 이는 감사와 기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뛰고 선포하면서 두려움이 실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 감당할 일이 너무 버겁고 힘들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 ‘두려워말라’는 말씀 듣고서 그 일을 행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두려움을 주는 실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체험해야 하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격적, 전인적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마음 속으로 ‘하느님’하고 불러도 아무 느낌이 없었건만 이제는 ‘하느님’하고 부를 때, 그렇게 갑자기 주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고 떨리는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분명 그런 순간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고 값싼 경험이라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 삶 한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까지 가지 않으면 그저 감정의 요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는 연습이고 훈련입니다. 연습문제 풀다가 안풀린다고 절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봐,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놈이-그러지 않습니다. 정말 별 수 없어-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저 연습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기말고사나 수능시험 보다가 안풀리면 점수 못받고 낭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습은 그저 연습일 뿐이죠.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연습은 좀 틀려도 괜찮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 선포는 연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상상하고 주신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연습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맡겨진, 믿는 이들에게 따르게 될 놀라운 표징이 있습니다. 마귀들이 쫓아내진답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한답니다.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해가 없답니다. 병자에게 안수하니 낫는답니다. 대단한 은사와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감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아 이렇게 이루어주시는구나 연습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물으신다면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압니다. 주님의 약속이기에 되는 것이죠. 불가능한 것인데,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인데 복음 선포자에게 그런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 생명,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허락하시는 것이죠. 초점은 뭐냐. 그런 놀라운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을 품는 자, 그에게 필요하다면 구마도 신령한 언어도 강건함도 치유도 주시겠단 약속입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마음, 내가 전하지 않으면 그 누군가가 구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멀어진다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이에게 주시는 놀라운 능력, 그것을 연습해봅니다.…더보기
요한 12,44-50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이 정작 당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것이며, 당신을 보는 것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은 어두움에 머물지 않는다 하시죠. 그렇다면 예수를 보고, 예수를 믿어,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당연히 하느님은 형체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보았다, 만났다는 것은 많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을 보았다고도 만났다고도 하지요. 믿음은 모순적인가요? 그러면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성품과 속성과 능력 등의 ‘하느님의 영광’ 그것을 본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통해서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본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배신과 수난으로 결국 세상의 힘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어떤 하느님이 떠오르나요. 어쩌면 약해 빠지고 무능력한 하느님이 떠오릅니다.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인가? ‘아니, 주님은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셔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능력의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굳이 그리스도교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방 종교에도 기적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7장의 불법을 행하는 자들도 기적을 행했습니다. 마귀도 기적을 사용합니다. 그런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미루어 추측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런 것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당신 아들을 버리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매정한 분,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 이기적인 분 등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려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자 오셨고 예수님의 버려짐은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 3,13)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저주를 몽땅 짊어진 채 하느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이죠. 거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 버릴 만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 하느님은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분이고, 자비와 용서가 충만하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십자가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한 아들의 절규가 묻어나는 처절한 것입니다. 묻어나는 그러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들을 버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버려져야 마땅한 어떤 무리들을 오직 당신의 은혜로 다시 살려내실 것임을 십자가의 버려짐과 안식일 다음 첫날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버려짐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버려짐을 보아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보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자비와 위대하심과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는 자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더보기
요한 10,22-30
복음의 배경은 성전 봉헌 축제(수전절) 때입니다. 유다 종교 축제로 하누카라고 불리는 이 축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정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탄 전후한 12월 즈음에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봉헌 축제 하누카는 인간의 행위를 대표하는 절기입니다. 요한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된다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에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은 홀대받는 극명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지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 21)
결국 예수님은 인간이 세운 성전 봉헌 축제 즉 수전절이라는 절기에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에 확인도장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성전에 눈이 멀어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만들고 하느님께 바쳐진 가시적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날에 진짜 성전이신 예수가 쓸쓸하고 외로이 홀로 서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그런 성전을 절대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일 뿐 입니다. 그런데 참 성전이신 예수가 모형으로서의 성전이 봉헌되어진 그 날에 성전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형국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 축제의 절기에 예수님이 솔로몬 주랑에 거니셨다고 합니다. 솔로몬 주랑은 성전의 맨 끝 마당인 이방인의 뜰에 나 있는 공간입니다. 성전의 뜰은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을 지나야 비로소 유대인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나옵니다. 결국 참 하느님이시며 참 성전이신 주님이 성전의 맨 끝으로 쫓겨나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전 봉헌 축제라는 단어는 이곳에 딱 한 번 쓰였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다른 공관 복음서나 서간에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성전 봉헌 축제라는 절기를 통하여 교회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전 봉헌 절에 참 성전이신 당신 자신의 피로 드려지는, 참 성전 봉헌식을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원수들을 위해서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 메시아라면 밝히라고 사람들은 요구합니다. 실은 그동안 수없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말씀하고 설명하셨단 말이죠. 그런데 여전히 의심하면서 확인해달라고 합니다. 믿음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진리는 가르칠 수는 있어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보면 절대 안믿을 것 같은 사람이 믿고 있고 절대 그럴 것 같은 사람, 사는 것은 천사인데 끝끝내 안믿는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주셔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한 이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것이 넘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신비를 믿도록 하신 주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난 자유를 누리는 것임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빼앗을 자 없다는 자신감과 함께 말입니다.…더보기
요한 10,1-10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 서로 모르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닐까요? 아파트는 단절의 공간입니다. 한편으로는 네트워크 시대라고 하면서도 그 촘촘한 연결에도 분리와 고립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클릭 하나로 세계와 연결되지만 그러나 익명성 속에 우리는 서로를 잘 모릅니다. 본당 신부님들 만나면 예전에 비해 병자 영성체(봉성체)를 신청하는 이들이 급격하게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은 왜 이다지 건강할까요? 그러나 알고보면 건강관리 잘해서만은 아니랍니다. 긴 병을 앓는 환자들을 집에 모시는 경우가 드물고 요양병원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집에 사제들이 드나드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워서라고도 하네요. 자기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익명성은 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것입니다. 닉네임으로 내가 표현되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현실 공간에서는 못할 말도 하고 그것이 심각한 악영향으로도 나타납니다. 악플이 난무하고 온갖 추저분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멀쩡한 사람이 익명성의 공간에서는 괴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감출 수 있다는 이유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요.
교회의 슬픔도 있습니다.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몸짓’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된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줄 때입니다. 창조 이야기에도 피조물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니 비로소 하느님이 만드신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름없는 무엇, 아무개가 아니라 어엿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의 슬픔, 본당 신부님은 나를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아마 길에서 만나더라도 자기 본당 신자인지 모르는채 지나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저 많은 신자들이 하나의 숫자가 되어 버립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되고 맙니다. 사제가 실제적인 목자로 살아가기에는 관심도 부족하고 능력도 모자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서로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을 때가 많아져 버렸다는 것이죠. 때로는 그런 상황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잘 알게 되면 그런 것들이 다 일거리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이죠. 신자들이 각각 어떤 상황인지 무슨 아픔이 있는지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일거리가 늘어 납니다. 그것도 아주 귀찮고 번잡한 그런 일입니다. 사정을 알게 되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뭔가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때로는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다-슬프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친교와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픔들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이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온갖 병자들, 모든 죄인들, 관계 부적응자들, 고립의 삶에 허우적이는 이들, 어디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향한 전진, 예수님의 삶이고 목자들에게 요구하신 삶입니다. 그러자니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서로를 알아가는 이 과정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그래야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냥 찰랑찰랑하게가 아니라 넘치게 하시고자 하는데 그러려면 그 생명으로 인도되는 그 생명을 매개하는 생명의 출입문이신 주님 앞에 우리의 친교가 더욱 깊어져야 하겠습니다.…더보기
나는 착한 목자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얘기하면 정말 이거 재수없는다고나 할까요. ‘난 너무 착해!’ 진짜 착한 사람은 그렇게 안하죠. 난 착한 사람이야-그 말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척 하는 사람일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이 충분히 있으신 것입니다. 착한 척 하시는 것이 아니죠. 양들을 위해서, 아니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셨기에. 그분은 십자가를 지시고 못박히시고 묻히신 것입니다. 이건 착한 척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착한 목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답니다. 당신 목숨 바쳐서 구해내었는데 그 양들이 아직 우리 바깥에 있더라는 거에요. 그게 너무 안타깝더라. 목숨도 내어주신 분이 다른 것들 안 마련해놓으셨겠습니까? 필요한 모든 것들 다 준비해놓으셨죠. 먹일 꼴도 넉넉하게 준비하시고 있을 자리도 이미 다 마련해놓오시고. 그런데 양들이 다른 데가 더 좋다고 우리 안에 안 들어온다는 거에요.
주님 보시기에 거기는 착한 목자의 양이 있을 자리가 아님에도 엉뚱한 곳에 가 있더란 것이죠. 착한 목자의 양이 있을 자리는 그렇다면 어디인가요? 마포대로4길 15-1. 우리 성당 주소입니다.
예수님 그러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예수님이 더 원하시는 겁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이 우리 밖에 있는 것 마음 아파하셨어요. 아 저것도 저기서 헤매이고 있으면 안되는데 이 우리 안이 제 집인데 꼭 딴데가 있네. 예수님 보시기에 양 우리 바깥에 있는 이들은 지금 가출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냉담자, 쉬는 신자란 말고 가출 신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가출한 분들, 어서 이리로 돌아오시라고 기도해야겠지요.
가출한 아이가 해야 할 일이 뭐에요. 얼른 내 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집 나가봐야 고생스럽기만 하고 그때서야 집의 소중함을 아는 겁니다. 가출한 아이들 보세요. 다들 그러죠. 나가서 이틀째부터 집이 그립데요. 왜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것저것 해봐도 채워지지 않고 허망한 생각이 자꾸 듭니까? 가출한 상태일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뭘해도 후회가 남는 거에요.
그런데 고민이 너무 길면 안된다는 겁니다. 가출한 아이가 해야할 일은 속히 돌아가는 것인데, 문제는 너무 오래 집 떠나있으면 이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어색해서 못가고 민망해서 못갑니다. 결심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요. 그래서 결심의 지연은 고통의 연장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부르심에도 그래요. 제자들 부르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너무 간단해요. 그냥 배를 버리고 따랐다는 거에요. 그냥 세관을 박차고 나섰다는 거에요. 세례자 요한 곁을 떠나서 바로 주님께 머물렀다는 거에요. 응답의 즉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즉각적이어야 응답에 생명령이 있다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요 부르실 때 지체하고 자꾸 단서를 다는 이들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이들이라고 하셨죠.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고 하셨죠. 부자 청년 보세요. 유일하게 예수님 못 따른 이로 나오죠. 가진 것을 생각하느라 고민이 너무 많았던 거에요. 응답의 지연은 결국 부르심의 거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고민하면요 뭐가 보이는가 길이 보이는 게 아네요. 안되는 이유가 보여요. 나는 주님 따르기에는 결격사유가 많아. 나는 아직 정리 못한 일이 있어. 복잡한 인간관계가 해결되어야 해. 이것은 합당한 이유 같지만 실은 거절을 자꾸만 정당화하게 만들고 우리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들은 착한 목자 주님께서 해결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걱정의 소관이 아니라는 거에요. 목자가 할 걱정을 대신 하지 말라는 거에요. 양들은 목소리 들었으면 지체없이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ㄴ-69)
육은 쓸모가 없다. 육은 영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그러니 가치가 없는 것이고 궁극으로는 소멸해야할 대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역사의 긴 세월동안 인간을 영육 이원론의 틀에서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육은 위험하고 유혹과 죄로 뒤범벅되어 있으니 영적 완성을 위해서는 육신의 삶은 가능하면 억압하고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고행의 육신을 통제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장려되었습니다. 효과가 있기도 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인간 이해에서 육신의 가치를 재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육을 입고 있는지라 우리가 완성되는 것은 육신의 삶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인간 구원도 세상 속에서 시작되고 세상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에서 보시니 좋았던 것은 영혼만이 아니라 몸을 지닌 인간 전체, 피조계 전체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제는 영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현실과 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몸의 보존만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모든 욕망이 긍정되고 영혼을 돌보는 것 따위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전 시대와는 또다른 영육 이원론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셈인 것이죠.
예수님이 생명의 빵 자체이시고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내어주셨다고 하시자 이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도저히 그 말씀이 거슬려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은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이제 소수가 됩니다. 떠날 수 없던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분이기에 어디로 가겠느냐고 말이죠. 오병이어 기적으로 배불리 먹었던 이들은 다시 먹을 것을 찾아 떠났습니다. 예수에게서는 자신들이 기대한 것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죠. 그들이 기대한 것은 결국 육신의 허기를 채울 무엇이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남은 제자들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빵을 보장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험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물러 있습니다. 육신의 허기를 채울 빵은 예수님 아니라도 구할 수 있지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줄 수 있는 그 빵은 예수님 아니면 구할 길 없다는 절박함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그 질문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더보기
요한 6,52-59
예수님은 성부께서 당신께 보살피고 보호하라고 맡긴 이들을 끝까지 안전하게 보존하게 지키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방법으로 빵과 포도주를 주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내신 이의 뜻은 주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 다 모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이것을 위해 빵과 포도주, 곧 성체성사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기도를 통해서 만납니다. 말씀을 들으며 만납니다. 일상의 일들 속에 그분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만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안에서도 만납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 속에서도 만납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것은 성체로 오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니 성체 없는 가톨릭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체 없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땅의 신앙인들을 죄와 어둠의 세력에서 보호하시며 아버지께로 가도록 세워주신 성체의 힘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완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언제나 우리 자신의 믿음과 인내의 반응을 요구하면서 펼쳐집니다. 착한 목자 이야기에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를 따릅니다. 곧 목자가 양을 보호하는 방법은 난폭한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양에게 들려주시어 친숙하게 하셔서 양들이 분별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그런 보호하심 인도하심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보호는 일방적이고 비인격적이지 않고 양들을 하나하나 아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보호하심이죠. 우리 체질을 아시고 처한 환경을 하시고 생각을 아시고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가시며 인도하시는 인격적 보호하심,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부르심에 반응케하시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곧 주님을 믿은 후 가장 큰 변화는 내재된 잘못, 죄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성체를 모심으로써 이제 주님이 거처하시는 처소,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에 성전이 된 우리가 다른 것으로 오염되고 다른 대상이 차지하는 것을 주님은 혐오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른 우상들과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독점하시는 사랑, 질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후의 영적 변화는 잘못된 길 위에 있음을 알고 자각하여 우리 영혼이 반응하여 돌이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목자의 음성은 우리가 옛 삶에서 돌이키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전함은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붙들고 계시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성체와 성혈’,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주도적으로 보호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구원 여정에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오직 한가지, 잘나서가 아니라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말한대로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죠. 먼저 그분이 내게 찾아와 두드리시기 때문이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그 사실에 대한 놀라움, 오늘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려고 당신은 다시 오늘도 모든 성당의 제대에서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다시 살과 피를 내어주셔서 빵과 포도주로 양식이 되어 오시는 것입니다.…더보기
요한 6,44-51
‘밥은 하늘’이라고 시인 김지하가 말했을 때 그는 평등한 대동세상을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밥은 하늘이고 전부이고 생존이고 눈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밥그릇을 두고 싸운다고 하고 같이 밥먹는 존재가 식구이기도 합니다. 밥은 세상의 문제의 중심에 여전히 있습니다. ‘빵’을 ‘밥’이라고 바꾸어 복음을 읽으면 조금 더 생생하기도 합니다. 빵이 주님이시고 생명이라면 그분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밥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빵이 문제입니다. 한참때에 비하면 조금은 논란이 줄어들긴 했지만 골목 상권까지 침투한 재벌의 탐욕스런 확장이 문제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재벌가에서 빵집, 제과점을 하는 바람에 동네 소규모 영세 자영업 빵집들이 다 망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벌 회장님 따님들이 꽃집에다 떡뽁이 사업이다 다 몰아서 하고보니 프랜차이즈형 빵집이 몽땅 장악하니까 뚜레 어쩌구, 파리 어쩌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이라고도 하고, 골목상권을 다 죽인다고 ‘같이 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빵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죽이는 빵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현실의 빵, 일상의 밥-그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일, 속되다 할 수 없습니다.
빵이 정말 문제죠. 빵의 어원은 포루투칼어인 팡(pao)이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빵이 되었답니다. 프랑스어 pain, 라틴어 panis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영어 company도 원래는 함께 빵을 먹는 사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네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그 빵을 얻을 것인가, 내 생존을 위한 빵을 누가 보장해주는가-결국 빵의 문제는 삶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어떤 빵을 먹어야 하나요? 제과점에 가면 소보로, 단팥빵, 크림빵, 베이글, 페스츄리, 크로와상, 바게뜨, 브라우니-종류도 참 많아 골라먹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먹어야 하는 빵은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이라고 선언하실 때 조금 뜨악합니다. 생존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 필요하다고?
사실 생명의 빵, 성체는 맛 자체로만 보자면 그냥 그렇습니다. 솔직히 맛이 별로 없어요. 무슨 맛이야? 아이들은 너무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어느 본당엔가 미사 부탁받아 갔는데 영성체때 할머니 따라 나온 손주 녀석이 자기도 (성체를) 달라고 보채는 것이었습니다. 슬쩍 보니 할머니가 당신이 받은 성체를 떼어 손주에게 주시려고 하더군요. 아직 첫영성체도 하지 않을 어린 꼬마였기에 저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생명의 빵을 나누고픈 할미의 그 마음,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기도 먹고 싶은 그 아이의 간절한 마음. 우리는 그 간절함으로 성체를 모시고 생명의 빵, 삶의 궁극이신 분임을 자각하는지 묻게 됩니다.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빵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그러시나-가 아니라 먹지 말아야 할 빵은 계속 찾으면서 먹기를 원하시는 빵은 찾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빵, 우리의 빵되신 주님, 성체를 보존하고 성체를 통해서 힘을 얻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교회의 길입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회칙의 제목은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것도 어떻게 사는가? 잠시 허기를 달래고 또 금새 허기지는 그래서 지상의 삶을 위한 양식이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삶을 위한 양식은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요.…더보기
요한 6,35-40
부제 때 위에 탈이 나서 고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필 사순시기에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기에 유난히 힘이 들었습니다. 위가 수시로 꼬이는지 뒤틀리는데 미사 드리다가 뛰쳐나오고 수업하다가도 움켜쥐고 나오고 병원에서는 딱히 진단명이 없는데 하여튼 원인은 음식의 문제라고 하고, 치료법도 최우선으로 ‘음식 조절해라. 자극적 음식은 피해라.’였습니다. 그래서 몇 달을 흰죽만 먹었습니다. 거의 미음에 가까운 멀건 것으로. 거기에 김치라도 얹어서 간장이라도 넣어서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것이 들어가면 어김없이 통증이 오는 까닭에 흰죽만 줄곧!!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였던 때였습니다. 사춘기 이후, 인생 최저 체중을 그때 찍었습니다.
다이어트란 말의 원래 의미는 일상적인 식습관이란 뜻이지만 우리에게는 체중이나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 정도로 사용됩니다. 결국 뭡니까? 먹어야 하는 것 이상 먹고 필요 이상을 먹어서 몸에 비축된 것이 문제를 야기하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못먹어도 죽지만 너무 먹어도 죽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먹는 것을 가리자는 것이 되겠습니다.
신앙의 다이어트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결국 가리는 것이기 때문이죠. 먹지 말 것을 생각하고 안 먹는 것, 먹어서 좋은 것을 가려서 먹는 것. 그 식별의 능력을 우리는 믿음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독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약이 되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믿음으로 분간해내는 것이죠.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식별해주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실 것인가 먹고 나서도 결국 또 허기와 갈증을 결국 겪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빵을 먹을 것인가.
그런데 이 생명의 빵을 먹어 더 이상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될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시간 뒤면 다시 배고플 것을 알지만 밥을 먹어야하죠. 그리고 배고팠던 기억이 너무 절절하면 지금 당장은 배고프지도 않으면서도 미리 먹어두기도 합니다. 다시는 그 배고픔을 겪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과식하게 되고 결국 먹고 나서 또 다음 먹을 것을 찾아 헤메는 인생의 악순환을 겪습니다. 그런덴 그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또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일 수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과연 누가 갈망하고 먹으려고 하느냐는 것이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빵만을 붙들고 행복해할 수 있는 그 삶을 추구하고 그렇게 완성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분께 나올 수 있는가는 37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올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며 선택하신 이들은 반드시 주님께 나온다는 것이죠. 그들만이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고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행복의 근원을 삼는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셔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바로 그들만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생명의 빵을 먹어서 이제 예수님이 그 인생의 최고의 목적, 유일한 목적이 된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이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께서 원하시는 삶, 하느님을 기쁘게 삶을 고민하고 추구하면서 분투 속에 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입니까? 이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사람이고 그래서 주님께 나올 수 있게 된 자고, 주님이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알고 믿고 그리고 생명의 빵을 먹었으면 딴짓하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 생명의 빵이신 분의 뜻대로 밥값하는 인생 되는 것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더보기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생명의 빵인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제 먹고 배부른 이후 다시 찾아온 오늘의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장면입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요한 4장의 시카르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 들었을 때 그녀의 답변은 그 물을 제게 주시면,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는 것이었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영생에 관한 것이었으나 여인이 대답한 것은 물 긷는 수고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현실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현실적 차원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허기와 갈증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요청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기에 먹고 사는 문제 그 이상으로 건너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생은 하늘의 만나, 생명의 빵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탈출기 16장에 이집트에서 떠나 홍해를 막 건넌 백성들이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백성들은 (이집트 종살이하던) 그때가 오히려 좋았다며 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비같이 양식을 허락하시죠. 만나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고민,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만나는 그날 먹고 저장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만나를 보관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 만나는 다 부패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목적과 만나를 연결하지 않고 단지 생존의 양식으로만 여겼을 뿐이었던 것이죠. 우리의 생명의 빵도 하느님 나라, 복음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날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만나는 광야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죠.
광야는 주님의 기적과 이스라엘의 반항의 역사였습니다. 불평과 은총이 계속 교차되는 것이죠. 주님이 내리시고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이 겨냥하는 진짜 목적은 온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향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이 빵을 만나처럼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양식으로만 전락시키고, 배고픔을 달래는 일에 당신 이름을 도용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생명의 빵인 주님은 오늘도 무수하게 모독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더보기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6,22-29)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왕으로 모시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대와 예수님이 가실 길은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여하튼 배불리 먹은 이들이 예수님께 환호하면서 어디로 가셨는지 수색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대단한 열심입니다. 그런데 기껏 찾아온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듣기에 언짢은 말씀을 하시죠.
백성들이 당신을 찾아온 것은 오직 빵 때문이라는 것이죠. 호수 건너편에서 오천 명 장정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겼던 그 빵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배고파지니까 다시 채울 요량으로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빵의 문제, 곧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만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 주님을 찾아 왔는가?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내 힘만으로 안된다고 판단되니까 그제야 기도합니다. 어려움에 봉착해서야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예수님 찾아온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그 실체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침 배불리 먹었건만 몇 시간 지나면 또 배가 고픕니다. 그럼 어떻게야 합니까? 또 밥 먹어야죠. 당장의 이 문제는 어이어이 해결되었어요. 그런데 인생에 문제가 하나뿐인가요. 또 다른 문제 생긴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 인생의 문제 때문에만 하느님을 찾는다? 나의 신앙이 오직 내 인생의 문제와만 결부되어 있다면 큰일난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느님이 사실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실은 하느님이 아니라 문제 해결사가 단지 필요한 것이죠. 사랑할 이유도 없어요. 해결 잘해주면 고맙죠. 안해주면 원망합니다. 배불려주면 반짝 감사할까 그러죠. 그런데 이내 배고프면 또 불평한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태도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수 있는 양식, 우리가 힘써 얻어야 하는 양식 얻어야 한다. 영생의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하시죠.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중심이 어떻게 되야 한다는 것인가요. 내 필요에 의해서만 믿고 찾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필요 내 요구 때문에만 찾으면 결국 썩는 것만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찾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받아 갑니다. 결국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요. 그런데 언제? 용돈 떨어졌을 때만. 사랑하나요? 사랑하겠죠. 그러나 부모보다는 부모로부터 나오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유없이 별 일없이 전화도 하고 만나고 함께 해요. 사랑하는 것이죠. 왜 왔는가 이유를 보면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하느님도 사랑하는지 하느님만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 앞에 와 있는 것일까요?…더보기
루카 24,35-48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안전지대임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벗어난 그 어떤 곳에도 우리의 안전과 평화는 없습니다. 과연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말씀에서 벗어나 혼돈과 공허 속에 살 것인가 선택하라-이 결단이 요구됩니다. 말씀하실 때 그대로 사는 것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뿌리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기에 현실의 벽이 높다는 바로 거기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쓰나미 몰려든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마치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셨듯이 마음이 어지럽고 헝클어져있는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평화를 전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희 죽지 않아. 괜찮아. 내가 있쟎아.’ 이런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차리면 산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마음에 걱정이 가득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제대로 판단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명이 있고 사명을 감당할 힘도 주시기에, 호랑이 굴에도 선뜻 들어가기도 하고 파도와 쓰나미를 향해 오히려 나가기도 합니다.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이야 자연스럽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특권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별일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화로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가라앉히는 것,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안심할 수 있습니까? 결국 한가지뿐이죠. 지금 그 자리 그순간에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한마디로 믿음이 우리 안심케하는 요체입니다. 임마누엘,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피할 길이 없는 자리에도 당할 도리밖에 없는 순간에도 안심이 되어야 피할 길도 보입니다. 당황하면 보일 길도 가려집니다.
그렇게 주님의 현존하심 앞에 주님과의 친교가 많아지고 깊어지면 안정, 곧 평화는 그 친교에 따라오는 선물이 됩니다. 친해지면 선물로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느냐?’며 질책하시면서도 당신 손과 발을 만져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너무 흥분해서 아직도 믿지 못하니 구운 물고기 한토막 달라셔서 그것을 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와 부활, 죄의 용서, 복음 선포를 주욱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일의 증인이다’ 선언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증인, 목격자가 됩니다. 이미 다시 사신 주님을 보았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니 그제야 증인이 된 것입니다. 후에 그들이 순교하기까지 쫒기고 주님 위해 능욕당할 때 그때마다 그것을 지탱해준 기반과 뿌리가 된 것, 그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이죠.
주님의 말씀은 의심에 쌓인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토마스처럼 하느님이시라고 결국 고백하게 하고, 의심하는 이들을 확신하는 이들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말씀이신 당신이 나타나셨음을 보고 증언하고 전하도록 먼저 그 말씀 앞에 순종하게 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고 만져보고 듣고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죠. 때로는 베드로처럼 호통과 질책을 듣기도 하고 한낮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러시듯 먼저 찾아 오시어 만나주시는 주님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도 만나고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다시 대면하는 것이 신앙회복의 시작입니다. 의심들 때, 힘겨울 때 우리가 할 일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의심 속에 있다는 것은 다시 뿌리를 점검하라는 하느님의 영적 사인이기에 말씀의 자리에 잘 머물러 있기를 청합니다.…더보기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16-21)
인생은 새옹지마, 곧 인생의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슷한 내용 이 코헬렛 7, 14의 말씀입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삶은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주권이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신다는 사실을. 복음이 펼쳐지는 시간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하는 승리의 날 다음의 시간입니다. 오랫동안 멸시 천대받던 제자들에게 기쁨에 도취될 수 있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기적을 맛본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배가 물결을 헤치고 가야하는 고난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적을 체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이 밀려왔을 때 얼마나 두렵고 겁났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짠하고 빨리 나타났으면 좋으련만, 스물다섯인지 서른 스타디온 저어갔을 때가 되어서야 어둠 속에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거리단위인 스타디온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데 아티카의 1스타디온은 178m, 올림피아에선 192.27m에 해당합니다. 경기장 주로의 길이, 스타디움의 어원입니다. 그러니 풍랑 속에서 몇 km 갔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는 대부분 전직 어부들입니다. 세차게 바람 불 때 고수는 안나서는 것이 보통입니다. 초보를 불러서 바람 방향에 따라 이리 꺽어보라고 저리 돌려보라고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배가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조타술, 방법, 노하우가 다 쓰였을 때가 그때쯤이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이제 두손두발 다 들었을 즈음인 것이죠. 시간은 자꾸가는데 해결은 안되는 순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런 순간인 것이죠. 그렇게 더 이상 답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예수님이 움직이셨다는 것이죠. 바람과 싸우다가 내 힘이 다 소진되어야 비로소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주님이 언제 다가오시는지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바람에 맡겨서 흘러 갈 때가 되어서야 다가오십니다. 이미 어두어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미 어두어졌으면 주님이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은 아닙니다. 어두움을 넘어 그 바람을 지나 그 물결이 높게 이는 것을 다 맞설 때가 되어야합니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타고 가는 배에 주님을 모시게 되는 것이죠. 그 배에 경험을 태우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능력을 태우는 것이 아니고 신앙경력을 태우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만을 태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 일렁이는 물결도 주님이 오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그때 오시는 것,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더보기
요한 6,1-15
‘아프니까 청춘이다.’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준 책이었습니다. 이 시대 아파하는 청년들을 향해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책입니다. 물론 아픈 것을 너무 정당화하면서 변화를 가로막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화시켰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속으로 집필되는 책인 ‘결리니까 중년이다’라나 뭐라나요.^^ 세상에는 청년의 아픔만이 전부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픕니다. 세대에 상관없이 다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소노 아야꼬의 ‘마흔 이후 나의 가치를 발견하라’, 이의수의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등 중년의 마음을 위로하는 책들도 쏟아져 나옵니다. 왜 이런 책들이 주목받을까를 보면 결국 우리 사회 중년들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년 때는 모든 것 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상이 그렇게 녹록치 않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힘든 것이라면, 반면 중년은 세상에 익숙해지니까 덜컥 겁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패기, 도전이 어려워지는 것이죠. 아이낳고 키우다보니 점점 자신감도 상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고, 그래서 아파도 아픈 내색 못하는 것이 중년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아이 커가는 재미도 있지만 돈나갈 일 많고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덜컥 겁부터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 마음을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것이죠.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감싸줄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보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그외 기타 더 많은 이들이 있었겠지만, 남자들이 오늘 먹히시는 초점입니다. 삶에 지친 무수한 청년들 그리고 중년들, 그렇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요새 식으로는 넥타이 매고 몰려든 이들입니다. 작업복 입고 달려온 이들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동점심은 그들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고 안쓰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들 안의 삶의 지침, 두려움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 깊은 눈물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배고픔은 육신의 허기만이 아니었죠.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그들을 품고 배불리신 것이죠.
우리가 주님의 그 눈길을 품어야 끊임없이 다독이고 품어줄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나쁜 것은 그들 안에 정의는 있지만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이해할만한 가슴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단죄와 판단할 줄 알지만 그것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눈물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그 징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혹은 사회를 향한 원망의 눈물이 아니라 삶의 거친 현실 속에 신음하는 이들을 바라보면, 그 갈망과 아픔을 향해 흘리는 그리스도의 눈물. 그 눈물이 말라가버려 나이 들면서 기어이 사라지고 비판하고 단죄하는 냉냉한 마음으로 변질됨을 안타까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병이어 이 기적의 원인은 오직 하나 몰려든 이들의 배고픔을 헤아리는 그 마음이 출발점입니다. 삶의 변화는 구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그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이 빈들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까닭은 불쌍히 여기셨던 주님의 그 마음이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액수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놓여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빵 둘 다섯 가지고 열두 광주리 차고도 넘치게 하신 하느님의 일하심은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허기로 여기시는 까닭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러니 우리가 각박하다고 하는 이 세상을 향해 손을 붙잡아주고 같이 울어주는 그 마음이 회복되는 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더보기
요한 3,31-36
‘개천에서 용난다.’ 아닐 것 같은 데서,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그 처지를 극복한 결과 비범한 인물이 되고 큰 성과를 거두는 인물이 날 때, 그렇게 말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네. 왜냐하면 개천은 용이 날 만한, 용이 자랄만하지 않은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상상의 동물이지만 일단 용은 덩치가 있으니 개천에서는 나고 자랄 가느성이 없다. 그런거죠. 개천에는 오염 때문에 미꾸라지도 살까 말까인데 용처럼 상서롭고 청정한 존재는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에 구애받지 않는 용의 출현. 그것이 충격이고 감동이 됩니다. 역경을 이겨낸 환경을 극복한 그런 존재.
반면에 생긴 대로 산다라거나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그 말은 아무리 해도 그 출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유전자 조작이 아니고서야 그렇죠. 콩의 가능성을 가진 것에서는 콩 이외의 것이 못나옵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개천에서 용나신 분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콩심은데 콩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상반된 두 가지가 같이 갑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촌구석에서 예루살렘을 사랑과 복음으로 정복하셨습니다. 용도 이런 용이 없을 지경입니다. 여의주 물고 오신 황룡이신 거죠.
또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고 한량없는 성령으로 채워지신 분으로 아버지와 성령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 구현하신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는 분이라는 이 선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정하는 예수님의 신원, 정체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한 인성과 완선한 신성의 합일이라고 교의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와의 유대감, 완전한 일치가 있다는 것. 당신은 위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콩심은 데는 반드시 콩이 나는 것처럼 아버지에게서 오셔서 아버지와의 동일함을 지니셨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현실안에서는 웬만하면 후손들에게 잘 내어주지 않는 것이 현명함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다 내어주었다가 자칫하면 찬밥되기 십상이랍니다. 그런데 아드님을 세상에 내어주신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었다는 것이죠. 세상을 위한 극단적 사랑으로 아들을 내어주셨다고 한다면 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모든 것을 증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자기증여 뭐 그런 말을 쓰더라구요. 아버지께서는 내어주시다 못해 기어이 당신 자신마저 몽땅 다 내주셨다는 것-그것이 하느님의 자기증여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받으셔서 어떻게 하셨는가? 개천도 못되는 3급수 같은 세상에 생명수를 부어 샘솟게 하신 것이죠. 온갖 오염으로 혼탁해져서 악하고 타락하고 험난한 세상일지라도 그것을 더럽다 기피하지 않고 정화시키시고 미꾸라지 피라미 갈겨니 쉬리 다 살만한 곳으로 만드신다는 것. 그 오염된 것을 복개하여 덮어두고 마치 없는 듯 하는 것이 아니죠. 덮어두는 것은 임시방편일뿐입니다. 결국은 새물을 대는 것만이 사는 길이죠.
또한 예수님은 노는 물도 많이 달랐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기에 늘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는 것이죠. 성령의 힘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계시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이죠. ‘채널고정’입니다. 충실하게 한결같이 유일한 생명의 길인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걸어갈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이름말고 다른 이름을 통한 구원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믿음, 구원의 유일한 통로이고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이외에 있을 수 없음을 이 혼란의 시대에 더욱 붙들어야 하겠습니다.…더보기
요한 3,16-21
밤에 홀로 찾아온 니코데모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인 3장 16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구절을 일컬어 ‘축소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 핵심이 다 담겨 있는 말씀이란 뜻이겠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요한은 이것을 선언하기 위해 니코데모를 등장시켜서 열심히 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 넓이와 무게가 어떠한지를 담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랑의 크기가 얼마만하면 그 깊이가 그리 깊으면 아들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너무나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 감동이 되지 않고 때로 식상하기도 하죠. ‘사랑하시는 것 알겠어요. 그런데 어쩌라고...’ 더러 이런 반응도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 하느님께선 나를 사랑하시지. 그런데 나는 여전히 이렇게 힘든 것을 보니 하느님의 내게 대한 사랑이 식어버렸나봐 변하셨나봐.’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부모에게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식일터인데 그런데 하느님에게는 그 소중한 아들, 그것도 외아들을 포기하게 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죠. 내가 뭐라고 예수님과 나를 바꾸실 만큼 너무나 사랑하시냔 말입니까. 이게 이해되시나요.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극단적입니다. 아껴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다른 사랑의 카드는 없습니다. 하느님은요 최후에 쓸만한 카드를 최초의 카드로 써버리신 것이죠. 그러니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믿겨지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보여주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다른 증거를 보여주실 수 없습니다. 최후의 카드. 비장의 카드를 이미 다 쓰셨기 때문이지요.
보통의 사랑은 점진적이거든요. 사랑하는 이에게 꽃 한송이 주고 떠봅니다. 그런데 꿈쩍도 안해요. 그러면 두송이 세송이 보냅니다. 여전히 내 사랑을 몰라주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백송이 담긴 바구니 그런 식으로 조금씩 올려갑니다. 그래도 안통하면 너 아니면 죽겠다고 협박도 한단 말이죠.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다 주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반응을 보면서 사랑을 측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당신은 최선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주실 것이 없는 것이죠. 더 좋은 것을 아직 남겨 놓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방법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도대체. 십자가에서 내 아들을 찢어 내어놓았는데 어떻게야 믿어주니. 너 죽는 꼴 못봐서 내 아들 내어 주었다. 그러니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하느님의 방법이 이랬습니다.
아들과 나를 바꾸신 이 사랑에 대해 누구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최고의 애인, 하느님은 인간을 최고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은 최고의 대상, 모든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는 최고의 수준, 생명을 희생시킨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외아들을’은 최고의 선물, 단 하나 밖에 없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내주시어’는 최고의 행동,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다 주신 행동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은 최고의 단순함,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은 믿음의 기준뿐입니다.
‘누구나’는 최고의 초청,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멸망하지 않고’는 최고의 해방, 죽어야할 죄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석방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최고의 소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영원한 유산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최고의 최선의 최후의 사랑에 새롭게 잠기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더보기
요한 3,7ㄱ.8-15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의 일원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고자 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는 부자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기원 전후를 통해 니코데모 가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입증해줍니다. 역사책에 등장할 정도의 가문 출신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아리마태아 요셉과 함께 몰약과 침향, 아마포를 준비해 장례를 치른 사람이니다. 몰약과 침향 백리트라는 상당한 고가였음을 감안하면 그는 부유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산헤드린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부와 명예, 지성과 고매한 인격까지 다 갖춘 사람-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니코데모를 성경은 어둠 속에 머무는 사람으로 진술합니다. 요한복음은 니코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을 일부러 밝힙니다. 요한은 복음을 기록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메시지 화해서 사용하곤 합니다. 요한 복음의 언어는 상징적인데, ‘밤’, ‘어둠’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있는 이들이나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러 만찬의 자리를 떠날 때도 그래서 ‘밤’이었습니다. 세상의 힘을 소유한 니코데모의 실제 상태는 ‘밤’이었음을 드러내어 그런 것들이 인간의 구원과 상관관계에 있지 않고 기여도 할 수 없음을 복음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 따라 겸손하게 그 앞에 나왔습니다. 신기한 표징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니코데모에게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 너 위로부터 태어났니?’라고 물으십니다. 니코데모는 당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코데모는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이었고 할례를 받았던 사람이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했으며 율법을 목숨 걸고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 못간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신주처럼 붙들고 있던 할례, 제사, 율법, 선한 행위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부터의 태어남, 새로 태어남, 거듭 태어남-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남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구리뱀과 십자가에 달린 분이 대비되어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배신한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음 앞에서 울부짖을 때 모세는 명에 따라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놓았습니다. 불뱀의 독소를 치유하는 것은 단지 그 구리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죄로 죽어야 하는 자녀들이 죽음을 넘어서는 방법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달리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지 않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너무 쉽고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하심이 우리 구원을 일으킨다는 것을 부유하였고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니코데모에게 하심으로서 강조하시는 것이죠. 구원을 주는 자, 위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다시 나게 하는 이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 하느님이심을 말입니다.…더보기
루카 1,26-38
갈리래아는 참 누추하고 어려운 지역, 변방 지역입니다. 그 중에서도 지독히 어려운 지역 나자렛입니다. 거기서 뭐 좋은 것 나오겠냐, 말도 마라. 그런 평가 받던 동네입니다. 거기에 약혼한 처녀가 있습니다. 당시 풍습대로라면 조혼이었기 때문에 열대여섯 정도나 되었을 것입니다. 약혼 시기 정혼자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신부수업하는 기간입니다. 지금 같으면 나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 생각하는 그런 때란 말이죠. 그때 날벼락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가브리엘 천사,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경험적 차원에서 나온 말이죠. 이 소녀는 처녀, 동정녀란 말이죠. 왜 동정녀여야 했는가. 아이 둘셋쯤 나은 아주머니라면 훨씬 잘 키울 수 있을 수도 있쟎아요.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안된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오신단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흠없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동정 마리아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는데 죽기 위해서 태어나셨단 말이죠. 자연사적 죽음이 아니라 대속적 죽음,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돌아가시기 위해서 태어나셨고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흠없이 오셔야 했던 것이죠.
마리아가 그렇게 흠없는 자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지파 사제 집안 출신이어서가 아니란 말이죠.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 것이란 말이에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 이 인사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 가득하다는 은총이 뭡니까? 고통의 길을 이제 걷게 될 것인데 말이죠 기뻐할 것이 무엇가요. 눈물 마를 날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복이 흘러 넘치지 않아요. 비수 찔리듯 아플 일도 있을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상투적 믿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승승장구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리아의 믿음은 문제 한가운데를 이제 걷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이었죠. 모든 문제 다 피해가겠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아무 문제 없는 것은 결국 죽고 나서나 될 것 아니겠어요. 은총의 충만함이신 마리아도 문제의 한가운데를 거치셨단 말이죠. 어쩌면 하느님께서도 쉬운 방법을 택하시진 않았어요.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느님께서 굳이 이런 방법을 쓰시지 않아도 된단 말이죠. 그런데 굳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이런 방법, 단 한번 쓰신 방법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마리아는 이 기별에 곰곰 생각한 끝에 말이죠. 깊이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일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이 내려오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구원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끝없이 펼쳐지게 될 하느님 나라는 무슨 뜻일까? 계속해서 묻고 묻고 그 뜻을 찾아간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말씀,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수용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독서가 전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제물 예물 번제물 속죄제물 다 폐기하시고 새로이 바쳐지는 봉헌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당신의 뜻 어려움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뜻을 안다면 장차 무엇이 일어날지 몰라도 괜찮다는 것, 그 동의와 수용이 주님을 잉태한 마리아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 옵니다…더보기
요한 20,19-31
우리는 흔히 토마스 이야기 읽으며 의심많은 토마스처럼 믿음없는 삶을 살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자-그런 교훈을 얻어 냅니다. 훌륭한 충고 같지만 자칫 맹종을 강요하는 억지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야, 뭐 보고 믿을라고 그래. 무조건 믿어.’ 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의심’은 이 장면을 묘사합니다. 카라바조는 천재였지만 신앙은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사실적이고, 어둡고 암울한 기운을 뿜습니다. 그는 나중에 살인하게 되고 객사합니다. 미치광이의 삶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믿음이 아니라 돈받고 그린 것입니다. 토마스가 검지를 예수님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넣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운 듯, 안타까운 듯 난처한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계시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표정 아닌가요. 복음에는 토마스가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이죠. 토마스는 부활한 주님 만나서 손을 넣어보라는 주님의 말씀 듣자마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상상일 뿐입니다. 복음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불신을 스스로에게 들킨 것입니다. 의심많은 토마스, 이마의 주름을 보십시오. 이 의심많은 토마스가 바로 나다-라는 것을 들킨 것이죠. 아무리 휘저어도 못믿을 그런 존재인 나.
복음은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말합니다. 의심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토마스와 같은 구도자적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믿어 보겠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그런다고 더 잘믿어지나요. ‘믿~~습니다’, 연발한다고 믿어지는 것 아닙니다. ‘무조건 믿어, 왜 의심해 왜 따지고 들어. 그리고 뭘 물어봐 그냥 믿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묻고 찾아야 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은 자기 최면이고 세뇌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무엇입니까? 자기 빼고 예수님 부활 보았다네요.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 숨어서 떨고 있단 말이죠. 자기 생각에는 부활한 주님을 제자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을 때도 그들은 숨어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런 의심이 든겁니다. 정말 제자들이 살아나신 주님 보았다면 ‘왜 너희는 아직도 이 모양이냐’라는 의심! ‘왜 아직 두려워떨고 있을까. 주님 다시 사셨다면.’ 그리고 ‘주님은 왜 아무런 행동 취하지 않고 침묵하실까. 아 정말 알고 싶다.’ 그런 마음에서 토마스가 그분이 살아나셨는지 손가락 넣어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안믿을거야라 말했다면 그것이 의심많은 토마스라고 매도될 일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은 부활한 주님을 만만 이들의 연약한 모습뿐인고, 주님도 안타나나시고 가만계시는 것인데. ‘도대체 주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 난 알고 싶어. 그것이 어떤 영향 미치는지 알고 싶어’는 의미에서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손 넣어볼 거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구도자적 열성입니다.
그러니 그냥 믿어, 이거 아니란 말이죠. 궁금해하고 배우고 더 많이 궁금해하고 더 많이 물어야 합니다. 구도적 열심과 불신은 그래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도적 열심에서 의심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을 향한 것이죠. 그러나 불신으로 향하는 의심은 믿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믿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제된 것이쟎아요. 불신과 의심은 완전히 그래서 다른 개념인 것이죠. 회의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두려워말고 의심하십시오. 그러면 더 커집니다. 더 높아집니다. 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믿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구도적 열정에서 나온 의심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카라바조의 난처한 짜증내는 예수님의 표정은 잘못 그린 것이죠. 주님은 짜증내지 않고 의심을 기쁘게 받아들이신단 말이죠. 진리를 위해 열심히 우리는 묻고 찾고 공부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런 우리의 열정에 하느님께서 반응하십니다.…더보기
마르 16,9-15
부활 사건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세 번에 걸쳐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고 길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 발현 소식을 들은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죠.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그들이 믿지 않는데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명령 당부하셨단 것입니다. 이상하쟎아요. 믿지 않는데 복음을 선포하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부터 부활 현장까지 여자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의리있는 여인들이죠. (그야말로)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실리에 움직여요. 그런데 보편적으로 여자들은 의리, 정이 있죠. 한번 마음 주면 끝까지! 남자들은 이중적이었죠. 예수님의 수난 부활의 현장을 지킨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중동지역에서 여인들은 대접받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여인의 증언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사도의 권위로 전하는 것과 여인들이 전하는 것, 효과면에서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물으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인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그래놓고 이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라 그럽니다.
여기서 슬쩍 끼어있는 사건 하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다른 제자에게 알리니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루카 복음에 자세히 전해진 엠마오 제자들 이야기입니다. 이 둘이 십자가 사건 이후 길 가다가 서로 무엇을 물었을까요? 어떻게 된거냐. 우리 운명 어떻게 된거야. 그런데 이들이 엠마오로 가는 정황을 보면 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예수님과 한패거리로 몰려 잔당 소탕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죠. 그래서 제자들은 집안으로 다 숨어 버리죠. 그리고 이 두 제자는 엠마오 시골로 가고 있습니다. ‘부활, 그것이 진짜래 말도 안돼’ 이러면서요. 믿지 않았으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따랐던 주님은 십자가에 처형되셨어요.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때 주님이 동행하셨단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었죠. 그때 주님이 물어 보셨습니다. 너희가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이들은 깊은 좌절과 낙심으로 시골 엠마오로 가고 있었고. 오히려 예수님께 되묻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클로파스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예수님 십자가 옆에 있던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의 남편 클로파스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 아내 마리아의 부활의 현장에 관해 들었을 것입니다. 분명 이야기했겠죠. 그런데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골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슬픈 얼굴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은 클로파스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럼 누구냐.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의 수난 이야기 보면 한 청년이 벌거벗은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누구냐. 마르코 자신입니다. 줄행랑 친 자신의 이름을 못쓴 것이죠. 그렇다면 클로파스 아닌 다른 사람은 누구냐. 루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명으로 못쓴 것이에요. 부끄러운 나머지. 요한 복음이 자신의 이름을 못 드러내고 사랑받는 제자라고 쓴 것처럼 말이죠. 여하튼 시골로 가는 이 제자들은 여전히 못믿은 채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기대를 걸고 있던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생각했다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곧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이야기해주시고 빵을 떼어 주시자 비로소 눈이 열리고 주님을 알아 봅니다. 그런 것이죠. 어떻게 그들이 믿게 되었나요.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주실 때, 곧 성찬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주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때였습니다.…더보기
요한 21,1-14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면 근사한 마무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나타나시고 여인과 제자들이 예수님 만나고 토마스가 순간 의심했지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아주 그럴 듯 할 것입니다. 멋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요한 21장에 들어오면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기록됩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입니다. 예수님 이미 부활하신 것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옛날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주님 만나고도 옛날처럼 살겠다-이겁니다. 우리가 성경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체험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왜 고기 잡으러 간다고 했을까요. 사랑이 식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면목이 없겠죠. 세 번이나 부인했어요. 그리고 만났어요. 하지만 미안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저주하고 버린 사람이라는 것. 사랑하니까 너무 미안해요. 그래서 사명의 자리가 아니라 옛날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주님께 돌아갈 수 있어. 나같은 인생이 어떻게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어. 나는 자격이 없어. 자책감 미안함. 그것이 과거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죠. 도덕성 살아있고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 중요하죠. 그런데 때로는 양심이 우리의 은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난 하느님의 일을 못하겠다는 사람 있습니다. 연유를 들어보면 난 자격이 없답니다. 나는 이 일을 하기엔 너무 죄송하데요. 난 아직 툭하면 성질내서 난 아직 아는 것이 없어서 난 아직 너무 모자란 사람이어서. 그렇게 양심은 살아있고 도덕적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합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 같은 것이죠. 양심 살아있는 것 좋은데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고 그 도덕성이 주님의 은혜를 떠나게 합니다. 아름다운 태도이나 복음적이진 않아요. 인격적인 것에 앞서 하느님의 은혜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해결하기 위해 사명을 떠나는 것,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하느님은 우리 허물과 부족을 해결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사명을 내려놓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맡기신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허물있니 회개하라 부족함 있니 회개하라. 그런데 많은 경우 부족하니 떠나야겠다. 이런 식으로는 안된단 말이죠. 겉보기에는 멋있을지 모르나 하느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나는 무지하게 죄인이구나 깨달은 이사야는 누가 나를 대신해서 백성에게 가야하나- 하시는 하느님 말씀에 손들면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라 응답했습니다.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손들 수 있습니까? 자기를 어떻게 도구로 써달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데 그걸 깨닫지만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움 있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더욱 예수님 필요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허물 죄 때문에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나는 죄 때문에 못해요. 나는 해결할 때까지 못해요’-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신앙은 뻔뻔해야 해요. 때로는 죄를 지어도 그냥 감당하는 것이죠.
신부만큼 자격없는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삶으로 강론할 수 있다면 매일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자입니다. ‘그만큼 살았니?’ 못살았거든요. 그래서 매일 매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주 서야 합니다. 매일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허물은 십자가 뒤에 가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허물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을 사용하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 믿음, 십자가의 믿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뻔뻔하게 오늘도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허물 때문에 주님을 더 붙들 때 그때 예수님 찾아오십니다. 오늘 복음에 그러시는 듯 합니다. ‘자, 뻔뻔해지자.’ 그런데 주님 앞에서. 뻔뻔함은 우리의 믿음입니다.…더보기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35-48)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쌓이면 무심결에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친하지 않을 때는 그냥 넘겼으나 조금 안다 싶어지면 어김없이 잔소리가 늘어나죠. 안 보아야 하는데 자꾸 눈에 뜨입니다. 왜 저렇게 하고 있지-왜 이렇게밖에 못하지. 전형적인 잔소리 갑질이 불쑥 튀어 나옵니다. 칭찬에 인색하고 지적에 익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정당한 지적이라고 할 때 슬그머니 드는 생각. ‘그러는 저는!’ 그럼요.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인지. 개구리는 모름지기 올챙이적 생각을 다 잊어 버린 것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놀라게 되는 점은 왜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실까-입니다. 위기에 처한 예수님을 내버리고 떠난 이들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저 같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파렴치한 제자들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알아본 것에 어쩌면 그런 민망함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버린 그분이실리 없어’ 예수님이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과거가 고스란히 드러날 터이니 말입니다.
혼내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며 확인시켜 주실 뿐입니다.
혼내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찬찬히 성경을 들어 알려 주십니다.
혼내시지 않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상의 일을 함께 하실 뿐입니다.
이 제자들이 보여줄 변화는 예수님의 잔소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하나 지적하시고 따지셔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실은 알고보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할지 다 알고는 있습니다. 더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탈출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안될 때가 많아서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것이죠. 거기에다 지적한다고 달라질리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안되어 쩔쩔매는 이들을 그냥 지켜봐 주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지켜보셨던 것처럼. ‘너희도 잘 안되어서 힘들지’ 맞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습니다. 그걸 알아주시니 오히려 힘이 납니다.…더보기
루카 24,13-35
엠마오는 실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대개 부활 대축일을 지내면 본당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루 이틀 신부님, 수녀님 또 몇몇 신자들이 짧은 여행 혹은 나들이를 하곤 합니다. 그 나들이를 ‘엠마오 간다’고 표현하지요. 저는 일단 그 관행이 몹시 싫었습니다. 성주간 지내느라 나름대로 신경쓸 일도 많고 복잡했던 판에 하루라도 좀 고요하게 쉬고 싶다는 마음인데 또 짐을 챙겨서 어딘가 간다는 것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나는 죽을 것 같다~!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굳이 어딘가 가야겠다는 여론과 압박, 그리고 관행이기에 할 수 없이 떠났던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간 나들이는 대개 더 지쳐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엠마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긴 들었으나 이 두 제자는 그냥 엠마오, 자신들의 거점지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무슨 일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상황을 파악하려 하지도 않고 옛 삶으로 돌아가다니! 어지간히 예수님께 실망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엠마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가지 말야할 곳을 향해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들어 말씀하시고 빵을 떼어 주신 이 모든 것이 바로 미사의 원형, 곧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보여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가는 그들도 포기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발길을 되돌리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은 최선을 다하시는 것이죠. 그분의 동반하심, 그분의 말씀하심, 그분의 나누어 주심-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엠마오가 그분을 만나는 엠마오가 되도록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엠마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주님 현존은 변함이 없습니다.…더보기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이 많은 인물입니다. 이 여인을 테마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저에게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의 넘버, 윤복희씨가 애끓는 목소리로 불렀던 ‘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강렬함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겹쳐져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아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그분의 죽음을 준비한 여인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창녀였다가 예수님께 감복하여 회개한 여인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붙들려 왔다가 투석형의 위험을 겪었던 그 사람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에 의해 깨끗해졌다는 사실과 십자가를 지키고 빈무덤을 목격하였다는 점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 만으로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예수님을 눈물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장면의 예수님을 상상해보면 조금 짖궂게 여겨집니다. 슬픔에 겨워하는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궁금해서가 아닌 것이지요. 그것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녀의 눈물의 의미는 너무 명확하고 누구를 찾는지 물어볼 일이 아닙니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이 순간, 무덤가에서 짐짓 그렇게 물어보실 때 ‘이렇게 되살아 났음’을 보여주고 싶은 그러니 그렇게 눈물흘릴 일 아니라 하시는 그 마음. 마치 영문도 없이 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던지는 한 마디, ‘이제 그만, 뚝’. 그러면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울음을 멈추곤 했던 것처럼. ‘뚝’-그 한 마디가 이상스럽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필이면 무덤가에서 그분을 만나다니-이런 일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터입니다. 이왕이면 더 나은 날이면 좋았으련만 아직 슬픔에 겨워 어쩔줄 몰라하는 이때라니-이런 일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 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본디 그런 것인가 봅니다. 가장 슬프고 암담할 때, 상처가 깊다 못해 무감해 질 때-그 순간을 열어 젖히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의 말-이제 그만 되었으니 ‘울지 마라’는 그 말씀. 이상스레 마음이 든든해 집니다. 이상하게도 슬그머니 힘이 나기 시작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더보기
마태 28,8-15
열두 제자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눈물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휘장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두려운 순간들까지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 이후 무덤에 안장하기까지 끝까지 머물러 동행하던 이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이들은 어디 갔나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리라 하실 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일은 막겠노라 장담한 베드로는 어디 갔나요? 예수님과 같이 죽으러 가자고 핏대를 올리던 토마스는 어디 갔나요? 오병이어의 찬란한 기적을 맛보고 저분을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요? 모두가 떠난 십자가의 자리, 그분을 홀로 남겨두지 않은 이들은 눈물로 바라보던 여인들과 사도단 안에 들지못했던 아리마태아 요셉, 니코데모 그리고 다른 몇몇 인물들뿐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증거자들입니다. 그 여인들이 첫 번째 부활 증인이 됨은 이런 연유일 터입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답니다. 이름 창창한 이들은 다 도회지로 떠나고 먼지나는 고향땅을 일구는 이는 배우지도 못하고 딱히 주변머리도 없는 자식뿐입니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교회인 듯하지만 그래도 그 교회를 하느님께서 세우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좋으나 싫으나 허름한 성당을 쓸고 닦고 감실 맨 앞에서 무릎으로 기도하는 이는 무지랭이라고 홀대받던 신자들입니다. 잘난 이들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증인들, 주님의 부활하심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이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체험을 가진 이들은 다른 대안이 없는 이들입니다. 세상이 인정하고 선망하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할 마땅한 수단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야할 길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입니까? 세상의 힘에 기댈 것이 없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궁여지책으로 누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리고 누구는 저 좋은 분이 이유없이 죽어가는 것이 너무 한스러워서 누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무력함에 진저리치며 십자가를 지켰을 것이죠. 뭔가 다른 대안이 있었더라면 거기 굳이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기댈 무엇이 없었습니다. 이다지도 부활이 심심한 까닭은 내게 기댈 것이 아직 남아있을뿐더러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활 대축일 지내고서야 얼핏 알게 되었습니다.…더보기
요한 20,1-9
부활 대축일 날짜는 해마다 변합니다. 성탄절과 달리 유다 전통에 따라 태음력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매년 춘분 후 보름이 지난 첫 주일이 부활 대축일입니다. 어둑신한 성당이 환하게 밝혀집니다. 낭창낭창한 부활 찬송이 맥을 뛰게 합니다. 구세사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섭리가 성경 말씀으로 봉독됩니다. 세례의 계약을 새롭게 하는 성수를 곳곳에 흩뿌립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주님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매번 드리는 이 고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저 이천 년 전에 팔레스티나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온갖 천신 만고 끝에 십가가 형을 받고 죽었는데 그가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더라는 그 사실인가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일어났음을 보게 된 이들, 특히 예수와 삶을 함께 하던 이들이 변화되어 이제 예수야 말로 진정한 메시아, 구세주이며 그분은 실은 하느님이시라는 주장을 내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임을 아는 것, 그것이 부활을 믿는 것일까요? 소멸할 육체가 영원한 영혼과 분리되지 않고 다시 결합되어 생명을 얻는 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부활이 믿기 쉬운 것이라면 무슨 문제겠습니까?무덤에 갔을 때 천사가 여인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녀들은 여전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하죠!! 믿겨지지 않는 것이. 이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이 믿겨질 때 믿어지게 될 때 그 가치가 발생합니다. 믿을 수 없는데 믿어지더라.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믿게 하시더라. 그 순간 사랑이 믿음과 결합해서 힘을 발휘합니다. 두려움 속에 무덤에 왔는데 기쁨의 충만함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덤의 봉인을 열어 젖히셨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몸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흩어진 이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부활의 힘이 교회를 일으켰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부인하던 이들이 현현하신 주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항거하던 이들이 그리스도께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거짓에 굴종하던 이들이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무가치가 생명이라는 가치가 되게 하셨습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무력함이 하느님의 강력함이 되었습니다. 한숨이 노래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이고 선물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약속 안에서 우리도 그분 부활에 힘입을 때 가치가 되고 모퉁이 돌이 되고 강력함이 되고 찬미의 노래가 되게 하심을 이 봄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흘 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리라 예고하실 때, 그러시면 안된다고 만류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오히려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셨지만, 그들은 거꾸로 죽음의 자리로 나갑니다. 성령을 받아서 광장으로, 갈릴래아로, 사람들 속으로 땅의 극변까지 나갑니다. 이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니까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더라. 그게 사는 길이구나. 까짓것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하자 그 체험이 그들의 삶 전체를 바꾸는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온갖 연약함으로, 부질없는 열등감으로, 끝모를 무력함으로, 수시로 다가오는 의기소침과 자기비하에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찾고 만나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비굴하게 숨었던 제자들이 위험한 한 복판으로 끌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주님께서 숨지 말고, 앞으로 나가서 맞서 선포하라고 초대하시죠. 그렇게 십자가는 승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당당해졌습니다.…더보기
루카 24,1-12
오늘 밤 부활초를 앞세우고 파스카 성야 미사를 봉헌합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은 소철가지 하나 들고 입당하니 단촐하니 가볍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후손’ 일종의 백뮤직도 부릅니다. 성목요일, 만찬미사 후 수난 감실로 성체를 모실 때도 가볍습니다. 가슴에 품고 가기 때문에 무리가 없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높이 들지만 주님이 높이 달리신 나무에 비하면 가볍습니다.
그러나 부활 성야의 부활초는 무겁습니다. 혹여 꺼지면 난감하니 신경이 쓰입니다. 손목에 가해지는 힘이 어마어마합니다. 부활초를 들고 가는 그 밤은 항상 식은땀이 나곤 했습니다. 농담처럼 십자가의 길보다 부활초의 길의 더 힘들다 했으며 부활초를 촛대에 모시면서 속으로 드는 생각은 ‘어후, 죽다 살았네’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 안에 이미 부활 신앙이 담겨죠. ‘죽다 살았어’. 부활초는 죽다 살아난 강력한 상징입니다. 그러니 타다 꺼지면 안됩니다. 타다 꺼지면 그것은 예수님이 무덤 자리에서 일어나셨는데 무덤 가로막은 돌이 너무 무거워서 못여신 격이 됩니다.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무덤 안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이 돌문을 두들기시면서 ‘사람살려’ 아니 ‘하느님 살려’ 하신다면. ‘그리스도, 우리의 빛.’ 광명이신데 자칫하면 풍전등화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봄날의 바람을 이겨낸 부활초의 불꽃이 오늘 모든 성당마다 힘차게 타오르기를.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도망갔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이른 새벽 묘지 찾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용기를 보이고 사랑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모든 손해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의 주님께 대한 헌신 그것이 사랑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사랑은 사랑으로 끝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신앙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절벽의 꽃을 따다주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믿음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새벽길 달려간 여인들을 통해 알아듣는 것은 바로 그것이니 사랑했으면 이제 그 사랑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어떤 믿음입니까?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릇 믿음에는 목적어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믿는가? 이 믿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대로 믿는 것이니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무덤에서 천사는 주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이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이 믿겨질 때 그 가치가 발생합니다. ‘믿을 수 없는데 믿어지더라.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믿게 하시더라.’ 그 순간 사랑이 믿음과 결합해서 힘을 발휘합니다. 두려워하며 무덤에 왔으나 충만한 기쁨속에 돌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덤의 봉인을 여시고 다시 살아난 그분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흩어진 이들이 다시 모여듭니다. 부활의 힘이 숨죽이던 교회를 일으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부인하던 이들이 살아난 주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 항거하던 이들이 그리스도께 항복합니다. 거짓에 굴종하던 이들이 진리를 발견합니다. 죽음이라는 무가치가 생명이라는 가치가 됩니다. 쓸모없다 버려진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됩니다. 우리의 무력함이 하느님의 강력함이 됩니다. 한숨이 노래가 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패배의 십자가가 승리의 갑옷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이고 선물입니다. 다시금 믿음으로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지낼 밤은 조금은 더 두근거리길. 부디 파스카 부활초가 비추는 곳마다 위로와 희망이 밝혀지길. 부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이 돌무덤을 열고 걸어 나오길. 부디 갈 곳 찾지못한 모든 이들이 한발짝 주님께 나올 수 있길. 파스카를 기다립니다.…더보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25-30; 예수님의 수난기 중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양이셨죠. 스스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양을 만들어가면서 자기 살길을 찾아가는데 반면 어떤 분은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셔서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무고라는 불합리속에 희생되셨지만 그 무고라는 불합리를 십자가의 구원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무고하게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또 죽였습니다. 그러니 사탄의 승리, 악의 승리가 입증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십자가의 억울함을 이용해서 도리어 만백성을 구원하는 사건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억울한 일 있다해도 너무 답답하다 해도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뿐 아니라 이 억울함을 반전시킬 하느님의 섭리 수단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 (요한 19,15)
소리질러 없애버리라고 외칩니다. 이구동성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하나된 유다인들을 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까. 갑자가 모든 이들이 군중심리로 그런 것일까요.아니요 그 원인에는 소수의 선전선동가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유다인들이 농락되어 버린 것이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하수인들이 그렇게 여론을 몰고 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조정하려는 힘이 있습니다. 진실을 알려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이면에 잠복되어있는 의도를 간파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들리는 소리에 굴복했기에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죽이는 오명을 뒤집어 씁니다. 판단능력이 상실되면 스스로를 조작의 희생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각성해야 이 어리석음으로부터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죽인 이 불합리들이 오늘도 넘쳐납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위협한다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는 불합리한 죄가 한데 모인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현재진형형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편에 오늘 서 있습니까?…더보기
요한 13,1-15
마지막 식사로 파스카 축제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을 들여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전심을 다 쏟으신 예수께서 이제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며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이 마지막 수업은 제자직의 지향, 그리스도인의 신원을 주제로 하는데 강의로 하는 수업이 아니었습니다. 몸으로 보여주신 수업이었습니다.
이 실천적 수업을 통해서 당신의 전생에 걸친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고 완결하시는 것입니다. 팔아넘길 자도 닦아주라는 것이죠. 그가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나한테 대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후회없는 사랑, 쏟아붓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받으려면 사랑받을 만한 짓을 하라고.
조건에 얽매인 사랑이 되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받을 만한 일을 실상 하나도 하지 않은 이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상황을 넘어선 최선으로, 감정을 넘어선 최선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섬기는 스승의 모습. 그것은 감동적이죠. 몸둘 바를 모르게 합니다. 그런데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길 때 감동적임은 사실 섬김에 대한 잘못된 신화입니다. 오해하게 되면 너는 높은 지위니까 더 섬겨야해- 특별히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섬김이 높은 자가 낮은 이에게 하는 것이라면 낮은 사람에게는 섬김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 됩니다.
많은 경우에 섬기는 것이 자랑이 되고 이력이 되기도 합니다. 높은 것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이 낮은 곳에 머물 때 존경을 받습니다. 화려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초라하게 사는 삶을 선택할 때 우러름을 받습니다. 어쩌면 발을 씻기는 것 아무나 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사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높은 자, 힘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섬김에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높음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높은 이에게 섬긴다는 것은 영광이며 오히려 자랑이 됩니다. 왜냐면 높은 위치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자랑이 되는 것, 섬긴다는 것은 높은자가 할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은 인격을 발로가 아니라 신분의 표현입니다. 인품 때문에 섬길 수 있다면 섬김은 특권화되고 어려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신분 때문에 섬겨야 한다면 모두의 특권입니다. 낮은 사람은 발을 씻기고 옷을 빠는 것이 그런 것이 일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의 역할이 그런 것이죠. 곧 섬김과 생활이 일치합니다. 낮은 자는 섬길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원래 섬길 뿐이죠. 그 일이 어제 한 일이고 오늘 내가 할 일이기 때문에 저절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수업은 그것이었습니다. 제자됨의 본질인 섬김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신분 개혁이고 의식개혁이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왕의 사제인 하느님과 나 사이의 신분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종이라는 신분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서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 나보다 낮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섬김이 일상입니다. 이벤트도 쇼도 아닙니다.
자존감은 하늘을 향해 높지만 내 신분은 사람을 향해 한껏 낮아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 높음과 낮음의 조화였지요.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느님이셨지만 또한 가장 천한 인간이기를 스스로 원하셨습니다. 성목요일, 한없이 낮아진 그 사랑의 역사를 또다시 기억합니다.…더보기
마태 26,14-25
언젠가 본당 설립 몇십 주년을 맞아 본당의 날을 성대하게 치룬 적 있습니다. 행사 끝에 경품 추첨이 있더군요. 경품 뽑을 때, 입으로는 아니야 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자연스레 생겨나더군요. 그 시절에 갖고 싶은 dvd 플레이어가 경품으로 나왔습니다.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리게 되더라구요. 로또나 복권 할 때, 번호 불리워지는 순간, 그 짧은 순간 첫 번호라도 맞기를 500원짜리라도 맞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압니다 사회자가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난 한번도 그런 것 당첨된 적 없어 하면서도 제발 제발 제발, 자기는 안될 것 알면서도 제발 제발 제발. 그런 법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설마 난 아니겠지. 우리 회사는 아닐 거야. 우리 집은 아닐 거야. 그렇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남들하기 싫은 심부름 시킨다든지 어려운 문제 풀라고 할 때 ‘지난번에 난 걸렸어. 이번에는 난 안시키겠지.’ 그런데 이놈의 가슴은 두근두근 거리고 왠지 뽑힐 것 같은 더럽고 불길한 느낌. 그런데 네, 맞습니다. 항상 내가 걸려요. 항상!! 간식 사는 사다리 뽑기 할 때 액수 많은 것은 내가 걸려요. 엘리베이터 기다려도 내가 있는 층수 지나가고 난 뒤에 버튼 누르죠. 머피의 법칙입니다. 줄의 법칙, 줄을 서면 항상 내 줄이 제일 오래 걸린다는 법칙. 택시의 법칙. 빈 택시는 항상 반대편에서 나타난다. 소스의 법칙. 식빵에 잼이나 버터 바르다 떨어뜨리면 항상 잼이 묻은 쪽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면의 법칙.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이 항상 먼저 잠들더라는 법칙.
어떤 일 할 때 여러 방법 있는데 한 가지 방법이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누군가 꼭 그 방법을 쓴다는 것이죠. 머피의 법칙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나쁜 방향으로 전개될 때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팔아넘길 자 있다.’ 예기치 않은 말씀 때문에 극도의 긴장이 흐릅니다. ‘그들이 몹시 근심하였습니다.’ 왜요? 이전의 자신들의 모습 안에 이미 그런 행동이 담겨있었던 것이죠. 너나할 것 없이. 그러니 ‘저는 아니겠지요.’ 설마 나는 아닐 거야. 떨리는 눈빛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유다만 근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 배은망덕한 것 아닙니다. 배신자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이었던 것이죠. 유다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주님 버리고 도망친 것입니다. 적나라한 자만 유다일 뿐입니다. 따르던 스승을 주님을 다 버렸단 말이죠. 나는 아니라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의 배신이 더 주님을 더 아프게 했을까요. 사실 다 똑같습니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과 의절, 그들은 가리고 가려서 뽑은 제자들인데 말이죠. 동거동락하던 그들인데 말이죠. 그들이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신 자입니다. 유다만 손을 넣은 것 아닙니다. 다른 제자도 다 손을 넣은 것입니다.
다름아니라 주님의 성찬에 날마다 함께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란 것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아니요. 나 자신 맞아요. 욕망으로 죄로 의심으로 미움으로 시기로 교만과 사기로 우상으로 예수님 배신하고 판자는 우리 자신이란 말입니다. ‘저는 아닙니다.’ 주님 저는 그런 사람 절대 아닙니다. 아니요. 우리는 절대 그런 사람입니다. 기회가 아직 없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배신자, 의절자, 부인자, 팔아넘긴 자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나는 아니라는 그 고백이 울려올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느끼셨을까요. 그런데 그 배신자를 오히려 친구라고 부르시고 사랑하는 이로 세워주신 것이죠. 그분은 정죄하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아니요. 바로 저 때문입니다. 제가 주범입니다. 이 고백이 나올 때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더보기
요한 13,21ㄴ-33.36-38
사순시기에 권장되는 십자가의 길을 바쳐보지 않은 신자들 꽤 많더군요. 고해성사 보속으로 십자가의 길 바치십시오-하면 여태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음, 이래서야. 안되겠군.’ 하여 주일 청년 미사 후 십자가의 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순 1주를 기다렸습니다. 공지 사항을 통해 미사 후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고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파견 성가 첫소절 부르고 아직 제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건만 신자석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미사보 챙기고 성가책 집어넣고 소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성당 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이들로 복잡해졌습니다. 저는 그때 씁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죽이라던 예루살렘 사람들과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떠나는 그 뒷모습을 보니 주님을 팔아 넘기려 어둠속으로 가는 유다이스카리옷이 오버랩되었습니다. 결국 몇몇만 남아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 다음 사순시기. 지난 해의 실패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포기할 줄 모르는 사제인 저는 또 도전했습니다. 미사 중에 강론 끝나고 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설마 미사 중에 나가시진 못하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데 이게 뭡니까. 사순 1주부터 주일 저녁 미사 참례자가 급감한 것입니다. 거의 반토막났습니다. 내가 졌다! 인정할 수 밖에요.
십자가가 진 것입니다. 그렇게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원래 그리 어려운 것이었던 것이죠. 고작 그 정도의 시간도 내지 못할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지않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속으로만! 여러분은 신자는 신자인데 배신자라고,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찍히는 법이죠. 손수 뽑으셨던 제자, 사도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수를 팔아넘길 자는 유다인, 적대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죠. 그런데 예수 스승의 총애를 받던 이 중에, 말씀을 듣고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자부하던 이 중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했던 이들, 함께 밥먹으며 속속들이 다 알만한 이들 가운데! 예수님 사도단의 재정 담당 위원장. 돈주머니 맡던 이, 원래 당가(총무, 사무처장 등)는 아무나 못합니다. 심복이 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쓰라린줄 아시죠? 공동체에서도 여러 직책 여러 소임 여러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누가 적합한가 고심합니다. 혹여 그 공동체 그 단체 뒤죽박죽이 되지 않을까? 분란의 원인이 안될까? 신중하게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여겨 맡긴 이가 뒤통수를 칩니다. 사사건건 트집잡고 분란을 일으킵니다. 가신이 난을 일으키고 왕자가 왕위를 위협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유다는 늘 어디나 있지만 유다로 인해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심리상태까지 묘사합니다. ‘마음이 산란하다.’ 심경이 복잡다단하시다는 것입니다. 한껏 무거운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해합니다. 영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왜 그러시지?’ 그럼 무슨 말씀인지는 몰랐다치더라도 이상한 점, 제자들은 유다의 반칙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경험상 하늘도 속이고 윗사람도 속이고 다 속여도 친구는 못속입니다. 다 모르더라도 친구는 알쟎아요. 얘가 어떤 생각인지 친구는 압니다. 그래서 유다의 기민함은 바로 그 점, 친구들마저 속였다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유다를 보고 그가 축제에 필요한 것 사러가겠거니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스승은 낌새를 채셨건만 그런데도 유다에게 빵을 적셔 주십니다. 그것은 유다의 영성체였습니다. 주님이 주신 빵을, 아니 바로 주님을 모시고 나서 배신하러 고발하러 팔아 넘기러 나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배신한 그를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더보기
요한 12,1-11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 입을 빌어 바칩니다. 송구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사제품을 받았으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을 획득한 셈이니 뭐 못할 것도 아닙니다만 ‘받아 먹어라’하시며 당신의 몸을 내어주실 때, ‘받아 마셔라’하시며 당신의 피를 그러니 생명을 턱하니 내어주실 때 그 말씀을 입으로 뇌는 저는 얼마나 죄송스럽고 낯뜨거워야 마땅한지요. 그러나 이제 웬만한 강심장이 되어버려 그런 마음 하나도 없이 뻔뻔하게 미사 경문을 바치곤 합니다. 회심은 무엇보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일입니다.
성주간 월요일, 그야말로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왔습니다.’ 성찬 제정문에서 이 대목도 그 의미 깊음을 헤아릴 길 없는 부분이지만 이 성주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입니다. 누가 억지로 떠민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원한 ‘자원(自願)’한 수난입니다. 그분은 기쁨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살 길을 찾아나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죽을 길인지 번히 아는데 회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꺼이! 떠밀린 죽음이 아니라 준비하신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어찌보면 불의한 판결로 희생된 사형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살되신 것입니다. 넓게는 인간의 죄로 인한 타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자살이기도 합니다. 순교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살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굳이 죽을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원하신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이는 베타니아의 마리아였습니다. 오빠 라자로의 소생으로 들떠 있던 잔치집에서 그녀는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나르드 향유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답니다. 여인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담고 있는 혼수였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미로 부었습니다. 기름부음,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기름부음은 하느님의 선택과 보호를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붓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한 여인이 나자렛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현양합니다. 인간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죽음을 아파하는 이 기름부음의 향기가 이 하루 번져 나가기를 청합니다…더보기
오늘 복음: 마르코 11,1-10- 성대한 입당식 복음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성주간을 시작하게 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오해하시는데 성지(聖地)가 아니라 성지(聖枝) 주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을 환호하는 군중들이 손에 손에 들고 흔들며 열렬하게 그분을 맞았던 그 나뭇가지를 뜻하는 성지입니다. 귀빈 방문 때 그 나라 국기를 게양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까요. 팔레스티나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지라 올리브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할 길이 없으니 측백나무와 소철가지로 대신하곤 합니다. 하여간 그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들, 그들은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던 이들입니다. 그가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고대하던 이들이고 이 압제를 끝장내주리라 가슴뛰던 이들이며 그가 일으킨 기적과 표징이 내 삶에서도 일어나기를 희망하던 이들입니다. 환호하던 백성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들이 아닙니다. 삶의 결핍을 겪고 있으나 해결책은 갖지 못한 우리들이고, 지금과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제자리에 묶여있는 우리들이고 그래서 내게는 이 닫힌 삶을 열 능력의 열쇠가 없으니 누군가가 이 문을 열어줄 것을 희망할 수 밖에 없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여겨진 예수님을 그야말로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호산나’, 그 말은 ‘청하오니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저마다 각자 다른 삶을 꿈꾸며 변화를 기대하며 해결을 찾으며 그렇게 예수에게 미래를 맡겼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합니다.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지도 않고, 그들에게 해방을 주지도 않으며,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백성들보다 더한 결핍 속으로 걸어가고, 해방은커녕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스스로를 내던지며, 무능의 상징인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무슨 하느님의 아들이 이 모양이란 말입니까? 무슨 구세주가 고작 그렇다는 말인가요? 능력과 위엄과는 하나도 관련이 없는 그런 예수라고 한다면 굳이 믿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치와 조롱을 겪는 하느님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굳이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보아라, 너희의 기대를 넘어서는 자, 바로 그가 예수다!-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적 기대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전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분을 믿어도 외로울 수 있습닏. 그분을 믿건만 가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고락이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이 결핍과 허무를 채우지 못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만능의 전가보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호산나’, 자기들의 욕망이 투영된 그 무엇을 청했던 이들은 결국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예수를 버립니다.
그분은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쳐없애지 않고 그냥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성립되지 않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통의 골고타로, 죽음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올라갑니다. 문제의 해결사가 되지 않고 고통의 동반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문제의 해결사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경탄하고 칭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뿐입니다. 우리는 믿고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죠. 그분이 우리 고통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하였기에 우리에게 그제야 주님께 대한 믿음이 그리고 사랑이 솟아 올랐습니다. 하느님이 아프시고 내쳐지고 버림받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너의 고통을 같이 짊어질만큼 그렇게 하신 사랑, 그 사랑의 한 주간을 시작합니다.…더보기
요한 11,45-56
복음은 라자로의 소생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일곱 개의 표징은 죽은 라자로의 소생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권자이심이 만방에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이제 두 부류로 모든 이들이 나뉘어집니다. 믿게 된 이들과 예수의 죽음을 획책하는 이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사제 카야파가 의미 심장한 예언을 합니다.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지닌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이라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을 그는 예기치 않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결국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구원을 부지 중 예언한 셈이 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 명패에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새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빌라도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예수께서 지상 통치권을 위임받은 분임을 드러낸 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수석 사제, 율법학자 등이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태 27,42)라 했던 그 꼬는 조롱도 실은 당신을 버리시고 백성을 구원하는 핵심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성주간이 바짝 다가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분주해집니다. 판공철이라 고해실 마다 회개의 삶을 다짐하면서 많은 이들이 내적인 준비를 합니다. 전례를 준비하느라 성가대는 연습에 매진하고 제의방에서는 다림질이 부쩍 늘어납니다. 어제 오늘은 성지(聖枝)를 가지런하게 마련하여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부활초도 이미 본당마다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드라마를 마치 우리가 꾸며내는 제작진마냥 한 주간을 지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 때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듯 성주간 동안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잦아질 수 있지만 딱 거기서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아니 적어도 그 수난에 동참하지 못한 방관적 성주간을 지내기 십상입니다. 함께 죽지 않고 같이 그 수난 여정을 걷지 않으니 부활도 그저 남 이야기로 전락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 적대적인 이들조차 그분 죽음의 의미를 반어적으로 드러냈지만 믿는다고 자처하면서 그분의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못한 연례 행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사순 시기는 오늘로 마감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시작되는 성주간은 사순과 부활 시기와 분리되는 고유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얼마 안 남은 것이죠. 여전히 별 생각 없이 뻔하게 지내지 않았나하는 반성과 후회가 슬그머니 드는 것도 참 구차한 변명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순의 마무리는 좀 달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맘때 늘 지내는 성주간이기에 새로울 것은 별로 없지만,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내가 더 깊이 알고 싶다고 안달해도 영 잘 와닿지 않을 성 싶어 기운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잠시 멈추어서서 주님 달리실 십자가를 한 번은 더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고통을 겪으신다는 것이 왜 이리 중요한지를 잠시 마음 속에 품어보고 빛나는 봄날, 뭐라도 하면서 성주간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냥 흘려보내면 또 내년까지 꼬박 일 년을 지내야 할 테니 말입니다.…더보기
요한 10,31-42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기만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유다인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초월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과 내재적이고 유한하고 찰나를 살며 무능한 인간에게 공통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그리하여 스스로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 첫 인류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간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주장은 열심하고 경건한 이들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에게 적대적인 유다인들의 입장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셈입니다.
유다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예수님은 시편 82편을 인용합니다.
[시편82. 아삽] 하느님께서 신들의 모임에서 일어서시어 그 신들 가운데에서 심판하신다.
“너희는 언제까지 불의하게 심판하며 악인들의 편을 들려느냐? 셀라
약한 이와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불쌍한 이와 가련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약한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에서 구해 내어라.”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여느 대관들처럼 쓰러지리라.”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고 계십니다.
실은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법을 집행하는 일을 위임하신 유다의 지도층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대리하여 심판했고, 그들의 율법에 동의하여 내린 선고는 하느님의 선고가 되었고, 그들의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이 되었으며, 그들에게 반역하는 자들은 하느님께 반역하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집행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진짜 신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일을 위임받아 하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 ‘신’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뇌물을 받고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밥 먹듯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느님의 뜻을 위임받아 그분의 뜻에 맞게 정의를 행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시편 82편을 들어서 당신 자신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위임받아 철저하고 완벽하게 행하신 ‘참된 신’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당신께서 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징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완성되는 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하러 오신 성자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율법과 행위를 내 놓으면서 주님의 하실 일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을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흔하게 빠지는 착각이 바리사이들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 내면에 바리사이적 믿음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나의 열심, 나의 자격 등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만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 거저 부어진 것을 구원이라 부릅니다. 하여 요한복음 1장에서 10장까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것이고 11장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혜의 실행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열심 앞에서 엎드려 나를 부인하고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여전히 이렇게 불가능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은혜의 복음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생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손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절망과 우리의 어리석음까지도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지 못합니다.…더보기
오늘의 복음: 요한 8,51-59
예수님이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그 길, 좁고 험한 길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13-14) 그 험한 길, 좁은 문을 우리만 가라하지 않고 예수님이 먼저 가셨습니다. 사전 답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표현은 좀 다르지만 십자가의 길, 골고타 올라가시는 그 길을 우리 구원을 위해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슨 길이 있나요?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일 가기 원하시는 길은 ‘너에게 가는 길’이라고 누가 낭만적으로 이야기하더군요. 나에게 오시는 길이죠. 실은 그 길을 제일 가고 싶으시다네요. 다름아닌 바로 네게 가기 위해 그 좁고 험한 길, 십자가의 길, 생명과 부활의 길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내게 오기 위해 애쓰시건만 나 자신이 오시는 그 길 닦아놓지는 못할망정 가로막고 장애물 놓고 빙빙 돌아서 못오시도록 하는 일이 많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은 유다인들을 설득하시려고 갖은 애를 다 쓰시는 예수님이 보입니다. 답답한 노릇이죠.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말씀하시자 ‘단단히 마귀 들렸군.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까짓 것이 뭐라고.’ 그렇게 응대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는 그분이 바로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아버지시다.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리라 기뻐하였다.’ 말씀하시자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쉰 살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 보았다니.’ 말이 안된다며,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이런 식의 반응입니다. 상식적이지 않다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닫힌 인생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맞습니다. 실은 주님의 말씀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산다.’ 이것은 현실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게 상식이죠. 예외없이 모두가 죽습니다. 지금 갓 서른이나 되었을 법한 이가 천년도 더된 아브라함 조상을 보았다. 분명 그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따지고 들자면 예수가 이상스러운 주장을 한다고 아무래도 좀 정신나간 것 같다고 한 유다인들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이죠. 오히려 ‘그렇군요 당신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사는군요. 아, 아브라함 보셨군요. 대단하네요.’ 그랬다면 이것이 비정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 그런 점에서 믿음은 상식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육화되시어 세상에 내려오셨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들과 어울려 사셨다. 게다가 하느님이 죽음을 겪으셨다. 그것도 사형수로 판결받아서. 그리고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다. 이거부터가 상식과는 걸맞지 않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것이 믿겨져요. 그럴법하다가 아니라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이거든요. 내게 오시는 그 길을 찾으시려고 주님께서 그런 온갖 방법을 다 쓰셨다는 것이죠.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을 감수하시면서까지 내게 다다르시고자 하셨다는 것이죠. 주님께 돌던지려한 유다인들과 달리 이것이 믿어집니다. 비록 내 상식에도 여전히 위배되지만,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지만. 어째서인지 그것이 믿어지고 고백하게 됩니다. 은혜로운 사건인 것이죠. 믿어지게 하시는 그 은혜를 다시 주시기를 청하도록 합시다.…더보기
오늘의 복음: 요한 8,31-42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제자는 누구인가? 첫째는 ‘내 말, 곧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자’이고, 둘째는 그리하여 ‘진리를 깨달은 자’이며, 셋째는 마침내 ‘자유롭게 된 자’가 됩니다. 여기서 ‘머물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메노’는 ‘계속하여 살다, 계속하여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믿는 이들과 말씀과의 동고동락, 불가분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듣고 머물고 수용하고 붙드는 자, 그는 제자의 첫걸음을 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을 믿는 이의 표지는 진리를 아는 것이랍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자칫하면 막연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6절의 말씀은 곧 당신 자신이 진리임을 천명하시는 것이죠. 진리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처음부터 반복하여 일관성 있게 말씀해 오신 그 진리의 내용,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니코데모, 사마리아 여인, 오병이어,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 등등 요한 복음의 앞선 모든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없으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에 힘입어 하느님의 은혜 뒤에 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된 자는 필연적 귀결로 자유를 얻는다-이것이 복음의 선명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만큼 자유롭다! 과연 그런가요. 가끔 신앙 생활이 번거롭고 귀찮기도 한 우리들인데 말입니다. 괜히 세례 받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 혹시 하지 않으신가요. 사제로 사는 것이 자유롭지 않고 온갖 눈치 속에, 갖은 압력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 솔직히 저는 있답니다. 무엇인가에 묶여 있다는 느낌이 수시로 든다는 것이죠. 아마도 세상살이 하는 동안에는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여러 제약이 우리를 짓누르고, 복잡한 숱한 일들이 우리를 흔들겠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이 부자유는 아마도 아직 주님을 그리 많이 알지 못하는 탓일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만큼 얻게 되는 그 자유로움, 대자유의 경계를 향해 나가고 싶습니다.…더보기
복음: 마태 1,16.18-21.24ㄱ
성가정의 가장 동정 마리아의 배필, 예수님의 양부이신 요셉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아버지의 위상이 흔들리는 시대, 가장(家長)이란 말은 적당치 않다, 구시대적인 용어라고들 합니다. 가장, 집안의 결정권이 그렇게 누가 주도하고 이러면 안된다. 평등하게 참여하고 결정해야 한다-그럽습니다. 그렇쟎아도 남자들이 약해졌는데 집에서도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아들딸-엄마-강아지 그리고 아빠 순서라던가요. 심지어는 어느 집에서는 냉장고보다 못하데요.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동시,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너무 씁쓸한 것이죠. 아빠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에요. 너무 바빠서 집에 있을 시간이 없는 아빠, 그 존재감을 못느낀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어느 아빠가 답시를 썼대요. ‘아빠는, 그런 엄마를 예뻐해주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워주고 강아지에게 사료를 사서 먹인단다.’
길가다가 갑자기 차가 골목에서 휙 나오면 대번에 뭐라 그럽니까? ‘엄마야.’ 그럽니다. 아빠가 힘이 더 있을터인데도 굳이 엄마를 찾습니다. 동요도 그래서 그러쟎아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그럼 아빠는 어떻게? 따로 산단 말인가. 이게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입니다. 가부장적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남녀의 힘이 적절하게 균형이 잡혀야 한다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리, 그것은 원래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또 많은 경우에는 스스로도 그렇게 만들었어요. 요새는 좀 나아져서 아빠들도 육아휴직을 어떻거나 받을 수 있게 만들어져는 있죠. 물론 실제로 육아휴직 쓰는 사람은 가물에 콩나듯 있지만 일단 제도는 갖추었어요. 집에서도 홀대받고 교회 안에서도 요셉 성인의 자리는 주변이었단 말이죠. 아버지의 자리가 회복되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아버지들도 고민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시대가 바뀌었으니 행동과 사고도 바뀌어야겠죠. 어머니 학교는 없는데 그래서 요새 아버지 학교는 있나 봅니다.
성요셉이 가정을 어떻게 지키셨는가, 약혼한 마리아가 혼전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 이 경악스러운 사태를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복음에서 듣습니다.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상황을 몰랐으니까 상식적으로 반응한 것이죠. 그리고 마리아의 명예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같으면 어떻게 해요. 위자료 청구하고 길길이 화를 내고-그런 것 자연스러운 반응이죠. 그러나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겠다. 이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죠. 감정으로 사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된사람이다 싶죠.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다- 이것은 정말 듬직하다 이런 정도의 의미가 아니에요. 하느님의 뜻하심에 합한다. 그것입니다. 이런 기본적 품성에 이제 믿음의 일이 일어납니다. 천사의 현몽을 겪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되죠.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아내로 마리아를 맞아들여라.’ 자기 뜻마저 다 꺾으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셉의 아픔입니다. 그 아픔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그것이 의로움이래요. 나를 꺾었어요. 그랬더니 주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가정이 왜 지켜졌는지 아시겠죠. 마리아도 ‘주님의 종입니다’, 그렇게 당신 뜻을 접었어요. 요셉도 접었어요. 아들 예수님은요.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접었습니다. 자기 뜻을 다 접고 순종합니다. 왜 시끄럽습니까? 자기 뜻을 내세워요. 내뜻이 이루어져야 한데요. 그러면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어디갔느냔 말이죠. 이 순종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오직 내 계획, 내 비전, 내 목적, 내 선호하는 바만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성 요셉 대축일, 하느님의 일을 이루려면 내 뜻은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 이 어려운 진리를 다시 새깁니다.…더보기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말씀 한모금 “누가 죄인인가?”
복음: 요한 8,1-11
철학자이자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블레지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인, 위인, 성인 이런 말은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인이다.”
잘나봤자 거기서 거기고 못났어도 또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죠. 발버둥쳐 보았자 거기서 거기고 또 뒤쳐져있다해도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꽤 괜찮아 보이는 삶이나 너무 형편없는 삶의 차이가 우리에게는 큰 것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거기서 거기라는, 그 차이라는 것이 본질적 공통성에 비추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대충 살자!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데’ 그러라는게 아니라,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좋은 지향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살고 있다고 해서 쓸데없는 우월감, 나는 그들과 달라! 다른 이들에게 묘한 경멸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고약한 것이 없습니다.
나이가 꽉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친구가 작년부터 여기저기 주선으로 선을 보러 다니는데 매주 한번은 기본이고 겹치기도 하면서 기필코 올해는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나름 다부진 결심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만나면서 맘에 쏙드는 사람이 없더라 합니다. 허우대가 멀쩡하면 알고보니 마마보이고, 직장이 번듯하면 알고보니 술만 먹으면 주사가 있고, 대충 다 괜찮네 그랬더니만 그댁 부모님과 가족관계가 심하게 꼬여 있고 등등. 꼭 한두가지가 걸려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체 누구여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얘기해주었습니다. ‘아무개야,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란다. 그놈이 다 그놈이란다. 옛말에도 있단다. 산도 좋고 물도 좋은 풍경은 없단다. 혹여 그렇게 괜찮은 놈이 만일 있다해도 너는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니?’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고 나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간음하다 붙들린 현행범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붙들려 왔죠. 그 여인을 단죄하러 온 자들은 그렇습니다. 나는 저 여자와 달라. 저 여자의 추악한 과거와 더러운 행실과, 낱낱이 까발려진 죄상들과 나는 너무 너무 달라. 그런 우월감 혹은 근거없는 자부심.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어야 하는 죄를 범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죠.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시던 예수님은 그들의 채근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나이 많은 이들부터 하나씩 떠나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아 있습니다. 텅빈 마을 광장 한가운데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들킨 죄인과 안들킨 죄인! 여인은 들켰습니다. 점잖은 체 거룩한 체 하는 우리는 안들키고 멀쩡하게 살아갑니다.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예수님이 땅에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온갖 설이 많습니다만,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쓰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나는 ‘아직’ 안들켰다고 들킨 이들을 단죄합니다. 그는 이미 들통났다고 경멸합니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 어차피 다 죄인일 따름인데요.
나의 그대들은 어느 쪽인가요? 들키셨나요? 그렇다면 인정하고 새롭게 되시면 됩니다. 아직은 안들켰나요? 그렇다면 조심하십시오. 환하게 드러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저는 아직 안들킨 까닭으로 그럴 듯 하게 살아갑니다.…더보기
복음: 요한 12,20-33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주님께서 무슨 이유로 죽으시는가 무엇을 위해 죽으시는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당신 죽음의 이유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헌신과 희생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희생하여 많은 열매를 맺자’-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치고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희생하라, 헌신하라, 자기를 버리라’-그렇게만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면 나쁜 교훈은 아니지만 핵심은 비켜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파스카 축제 때인데 그리스인 몇 사람이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나옵니다. 하필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인의 출현을 굳이 기록한 것은 선민으로 자처한 이스라엘이 버린 예수님을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찾아왔다는 것, 곧 이제는 구원 역사의 새장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 그것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대표인 그리스인들이 예수님 만나러 왔다-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 민족과 나라 혈통을 통해서 구원될 수 있다는 유다인의 철썩같은 믿음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이 사실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오나요? 내가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아니요.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고 그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은혜로 인해 이루어진단 말이죠. 율법이 아니라 제사가 아니라 인간이 노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의 진의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보고 헌신하라고 강요하는 구절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것과 정반대로 ‘너희들이 너희들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희들의 모든 죄를 품어 안고 죽는 것으로 너희를 구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밀알이 되어 죽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제 한 알의 밀알의 죽음에 의해 열매가 된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 밀알의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은 강요나 억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심겨진 거룩한 씨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용서하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인내하고, 포옹해 주느라 세상 사람들에게 약자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게 죽어가는 밀알입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죽는 밀알로서의 삶을 살게 될 때 그 밀알이 속해 있는 곳을 하느님 나라라고 부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요한 7,40-53)
예수님을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모습을 봅니다.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이런 저런 말, 평가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삼년 동안 그 많은 일을 하시다 보니 얼마나 시간이 없으셨겠어요. 일일이 다 해명하고 다니실 겨를 없었을 것은 자명하죠.
이런 저런 평가에 발끈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설득되지도 않을 것에 마음 쓰느라 힘을 소진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부대끼면서 사는 세상에서 다른 이들의 평판은 중요하지만 그것에 절대적으로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속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을 듣고 온 성전 경비병, 공권력의 집행자들이죠. 그들이 주님 말씀에 감화되고 뭔가 변화가 일어나서 그냥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예수님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평판에 휘둘리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율법 지식에 의하면 메시아는 예수님처럼 처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죠. 그 지식에 어긋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부정확한 지식으로 판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급기야 니코데모가 오류의 경향을 막아보고자 절차적 정당성이 없다고 다시 율법을 들이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마찰이 있으면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요 마찰력보다 더 큰 에너지가 추진력으로 작용하면 앞으로 전진해가는 것이죠. 그리스도교에 대해, 신앙에 대해 세상은 대개 적대적입니다.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반대가 아니라 무관심인 것이죠. 오히려 반대가 일어나고 적대적 분위기가 조성되면 우리 교회는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죠.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개인의 삶도 얼추 비슷한 것 같아요. 반대에 맞서면서 더 지혜롭고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죠. 다만 할 것을 계속 하는 것, 주님이 알려주신 반대 상황 속에서 지켜야할 덕목입니다.…더보기
요한 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 이후의 논란을 다루고 있습니다.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을 구하는 것이 진짜 우리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6장은 마감됩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양식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신임을 명백히 하셨죠.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많은 이들이 반발하며 떠나갑니다. 생명의 빵이 아니라 육신의 빵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 예수님께 대해 반발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적의와 분노가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보시고 유다 지역을 떠납니다. 그리고 초막절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요한 7,3-5) 7장에서 예수님과 형제들의 관계는 이렇게 묘사됩니다. 예수님과 형제들의 관계조차 이렇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형제들도 실은 그분을 믿지 않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에게 유다로 가서 당신의 일을 드러내시라는 요청은 어쩌면 세상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그러던 주님이 남들 모르게 초막절을 지내러 올라가십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형제들의 청에 거절하셨다가 은밀하게 홀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니 말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시자 당신과 상관없다고 짐짓 거절하시는 듯 하다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던 것이 겹쳐져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에는 그렇게 간극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왜 서두르지 않으시냐고 불평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렇게 더디 움직이시는지 참 답답합니다. 당신의 때가 아니라 내 때, 나의 시간과 계획과 원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요구에 반응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내 시간표를 하느님께 강요하고 호소하고 때로는 위협할 때도 하느님의 당신의 시간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부릅니다.
내 시간표가 있습니다.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표가 하느님을 떠난 시간일 때 거기 쌓아진 모든 것은 무너질 밖에요. 하느님의 시간표에 내 시간표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움직이시고 그분이 앞장서시도록 시선을 돌리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더보기
요한 5,31-47
예수님의 섭섭함 나아가 어떤 의미로는 짜증이 느껴지는 복음입니다. 좀 많이 삐치신 듯 합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불신 때문입니다. ‘그렇게 못믿겠니,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도 그렇게도 믿음이 생기지 않니.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하고 있음에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라고 나를 보내셨음이 그렇게 믿겨지지 않니. 아버지께서 바로 나를 증언해 주심에도 그래도 못믿어. 믿겨지지가 않니. 이렇게 이야기해도 내게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니.’ 완전히 마음 상하신 것을 폭포처럼 쏟아붓는 오늘 말씀 안에서 발견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만이 아닙니다. 불신하는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슬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겠다. 오직 하느님께만 바라겠노라.’ 아무리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 된다고 하시고, 당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으니 아버지께만 인정 받으려 한다고 하시고- 알고 보니 이리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속이 넓지는 않으신 듯 하기도 합니다.
당신을 몰라주는 이들에 대해 속상해 하는 이유. 그것은 그냥 몰라주면 상관없지만 그러나 무관심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멸망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뻔히 망하는 것이 보이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기에 좀 알아다오-하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다오. 모른 척 하지 말아다오. 나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을 걸어가다오.’ 그런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부모도 자식들이 마음을 몰라줄 때 섭섭한 내색은 안하더라도 속마음은 속상합니다. 누구도 진심을 몰라줄 때, 진정성을 의심할 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진심! 그래, 너희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어가 아니라,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신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복음은 사뭇 반어적입니다. ‘너무 바빠서 내게 올 시간이 없구나’-그러나 겉으로는 ‘에이, 오지마, 올 필요 없어.’ ‘영광을 사람들에게 받지 않겠다.’-그러나 속마음은 ‘나는 너희가 주는 영광을 받고 싶다.’(다른 데, 세상에서만 영광을 추구하지 말고 내게도 그 영광을 돌려다오.) 겉으로는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속마음은 ‘꼭 믿어야만 한다.’ 겉과 속은 예수님도 좀 다르실 수 있습니다.…더보기
요한 5,17-30
‘소야곡(小夜曲)’이라는 다큐멘터리을 보았습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당시 결혼 7개월 새댁이 인민군에 남편이 끌려가고 평생을 기다리다 65년만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다시 남편을 만나게 된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새댁은 태중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고 아들을 낳고 키우느라 재가는 엄두는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얼굴 한 번 못본 아들은 이제 노년의 얼굴이 되어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납니다. 나이들어 버린 자기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과 같겠거니 하였는데 실제로 아버지와 똑 닮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들은 뒤로 돌아 눈물을 짓습니다. 짧은 상봉을 마치고 언제 만날 기약 없이 돌아온 시간들을 아들은 더욱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매일 떠오르는 달을 바라봅니다. 아들은 남쪽에서 아버지는 북녘에서 그 달을 바라보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던 것이죠.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돌아가신 줄 알고 35년 전부터 제사를 지낸 그 아버지, 납북되었더라도 어떻게든 아내와 복중의 자기를 생각해서 탈출을 감행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원망했던 아버지, 할머니가 네 아비는 이북에 끌려갔다고 예닐곱 살 때 알려준 뒤로 그때부터 한 번도 어디 계시냐고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그 아버지. 환갑을 훌쩍 넘긴 아들은 오늘도 여전히 그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며 저녁 달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무엇보다 아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당신의 일이었고,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아들의 사명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권한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생명의 아들의 생명이 됩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서로 하나가 되기까지 만듭니다. 북녘과 남녘의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워하듯,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아들은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절대 의존적 관계를 이룹니다. 아버지 없이 아들이, 아들 없이 아버지가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죠.
하느님의 자녀들, 우리가 그런 표현을 많이 쓰지만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는 의식없이 그냥 지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만약 우리가 아무개 재벌의 3세쯤 된다면 내가 누구라는 의식이 가득차다 못해 터져나왔을 터입니다. 한시도 잊을 리 없습니다. ‘나는 재벌 3세다. 내 아버지는 누구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하느님의 딸이고 아들이라는 것은 겉치레 수사에 지나지 않은지요. 그것이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고 감격이 되고 우리 품위가 되어야 마땅한데 말입니다. 까짓것 재벌 3세가 대수란 말입니까. 예수님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이기에 완전 특별하고 소중한, 지극히 귀하고 온전한 나일 수 있지 않은가요.…더보기
요한 5,1-16
이 일이 벌어진 그때는 축제의 시간이었고 공간은 자비의 장소, 벳자타 그 뜻이 은혜의 집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쁨도 없고 은혜도 없었습니다. 그저 38년된 병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축제의 시간에 기쁘지 않고 은혜의 집에는 고통 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벳자타 연못에 먼저 들어가야만 치유될 수 있다는 승자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단 한 명만이 치유된다기에 그 단 한 명에 들기위해 모두가 눈이 빨갛게 물이 출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게 38년을 기다린 병자의 마음 속에 서글픔과 한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저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 나를 위하는 사람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오랜 고통을 지나는 좁은 통로는 한 줄로 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8년 아프니 이제 하나 하나 떠나가고 주위에 누구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 하던 이들, 그 친구들이, 그 연인이, 그 가족들마저도 다 떠나버린 상태. 베자타 못가에 누워있는 한 사람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습니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올라오셨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오시지 않았어요. 6절에 ‘그가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곧 병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마음을 알고 보신 것이죠. 8절에는 말씀하셨습니다.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냥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는 치유와 어루만짐이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네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내가 되어줄게. 네가 찾는 이웃이 친구가 되어줄게. 예수님은 그렇게 그를 잊지 않고 38년 동안 버려진 그에게 올라가셨고 보셨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짐이 몇 년 되셨나요. 그럼에도 주님이 내게 올라오시고 보시고 말씀하신다고 하는 신뢰가 있느냐. 이것을 오늘 복음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를 홀로 버려두어도 궁지에 몰린 너를 나만은 찾아가리라. 당신의 자녀이기에 친구이기에 찾아오신다는 것이죠. 내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의 역할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역할-무엇입니까? 병을 꿰뚫어 보는 능력. 너 오래 아팠구나. 아니면 그를 일으키는 능력일까요? 아니요 그분의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능력은 아니란 말이죠.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뭔가 큰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더란 것이죠. 우리가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마음 가짐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사람을 향한 그 작은 마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내가 가지질 원하시는 마음이었죠. 강도만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그 마음 품으라는 것이죠. 가장 큰 계명이 뭐냐. 하느님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역할의 교환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죠. 용서받은 자는 용서해야 용서받습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해야 사랑받습니다 받은 사람은 주어야 또 받습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뭐래요. 나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바치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역할의 교환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죠. 내가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래요.
사람이 없어! 하지만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있쟎아요. 내게 올라오시고 보시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어요. 그래서 나는 자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역할 사랑 받은자가 예수님의 그 마음을 지니고 또 다른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더보기
요한 4,43-54: 왕실 관리 아들의 치유
요한 복음이 전하는 카파르나움에서 일어난 두 번째 표징입니다. 첫 번째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표징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은 가장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으나 돌아오지 못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한 왕실 관리가 찾아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였던 것이죠. 주종의 관계와 질서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추정할 수 있죠. 관리였기에 말 한마디로 사람이 움직이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익숙하였을 터입니다. 그의 아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절박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서 카나까지 쫓아 온 것입니다. 카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처음으로 드러내신 현장입니다.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왕실 관리의 청, 그것은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는 34-5km 정도입니다. 꽤 먼거리이죠. 아마 쉬지 않고 달려와 예수님을 만났겠지요. 외적으로는 청이지만 그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한다면 거의 명령에 가까운 압박이죠. 물론 여기까지만 해도 예수라면 내 아들을 고치겠다는 그 마음이 아비로서 있었을 것이고 그것도 꽤 괜찮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였습니다. ‘너희는’, 곧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왕실 관리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믿음은 그저 절박함 뿐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함이 믿음이라고 동일화합니다. 그러나 간절함, 절실함은 믿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상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아버지 앞에서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믿음은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따지고 일단 갑시다.’ 예수님의 반응에 왕실 관리는 아무 대꾸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왕실 관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들이 죽고 사는 것보다 믿음이 문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충돌이 보여집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죠. 그리고 이 왕실 관리는 이제 그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이제 그에게는 다른 믿음이 생겨난 것이죠. 처음에는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명하듯 청했습니다. 내려가서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이제 예수님이 명령합니다. 가서 아들이 살아난 것을 확인하라고. 그렇게 믿고 가다가 이제 표징을 만납니다. 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나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믿음이 확대됩니다. 그 집안이 이제 믿게 됩니다. 무엇을 믿은 것일까요? 이 기적을 예수님이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신 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이제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이 표징입니다.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누가’하셨는가입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누가’ 하시는가를 알아보면 오늘 하루도 우리는 표징을 체험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더보기
요한 3,14-21
우리가 믿는 복음 중의 복음은 하느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더라도 이것 하나는 언제나 붙들어야 우리가 삽니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뿐만 아니라 골고타 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까닭은 단 하나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비장하고 강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난 너 죽고 망하는 꼴 못 봐’ ‘너를 구원하고 살리는 일이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수단 방법을 다해서 너를 살려내고 말 것이야. 너 죽고 나 하느님 하면 무슨 소용있냐. 그러면 나 하느님 안해.’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난 너 죽고 망하는 꼴 못 봐’, ‘너를 구원하고 살리는 일이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하셔도 만약 예수님이 우리 같이 무능한 존재라면 감사합니다. 그 마음은 참 감사하고 고맙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만 있다고 구원할 수는 없쟎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왜 맨날 그것을 우리가 고백할까요. 심심해서 하는 것 아니쟎아요. 그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심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고 받아만 들인다면 우리는 구원 받은 겁니다. 승리한 것입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십자가 매달리시면서 이것을 이미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있습니다. 역경도 있습니다. 절망스러운 상황도 있습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과 역경과 좌절과 절망스러워 보이는 상황은 여전히 있고 닥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까닭은 그것도 내 생각과 달리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있지만 그 정도는 겪어야지 그 정도는 이겨내야지. 그러시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도와달라할 때 언제나 돕지는 않으시죠. 한번 애써봐 한번 버텨봐. 그런 고난들 있어요. 난 몰라 니일인데 니가 해결해야지 왜 나한테 해달라고 해. 그것은 아니죠. 정 죽게 되면 건져주지. 그런데 처음부터 해주면 너한테 아무 힘이 안생기지.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것 때문에 안죽는다는 판단이 하느님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절망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십가가 바라볼 때마다 생각하세요. 난 너 죽는 꼴 못봐!! 그러면 겨울 숲길도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는 축복은 그렇게 환경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켜서 그 환경을 변화시키게 하시는 것이죠. 그런 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 나옵니다.
예수님이 풍랑이는 호수에서 절망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걷겠다며 바다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베드로도 걸었습니다. 그러나 걱정이 되어 호수를 보는 순간 빠지고 말았습니다.
16절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 넓이와 무게가 어떠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사랑할 사람이 단 한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셨다.’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 것이죠.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이 사랑이 내가 구원된 근원이고 이 사랑이 우리가 생명을 영생을 얻을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더보기
루카 18,9-14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저 인간들, 왜 저렇게 사나. 성당에는 왜 와서 물을 흐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세리를 멸시하고 있는 바리사이가 되는 것이죠. 물론 바리사이처럼 겉으로는 절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합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바리사이보다 더 악질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당신을 인정한다. 당신은 꽤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긴 합니다. 좋은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하니 그렇게 합니다. 바리사이처럼 대놓고는 못합니다. 어찌되었건 바리사이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저 말하는 사람이기라도 합니다. 솔직하기라도 한 것이죠. ‘웃기시네. 지가 기도도 안하는 주제에 어디서 아는 척 하기는’ 혹은 ‘너는 내가 하느님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너 같은 건 정말 안쳐준다’ 그러면서 속내는 ‘바쁘신데 뭐 이렇게까지 하시냐. 정말 감사하다’ 이럽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 당신이랑 이렇게 마주 앉는 것이 나한테는 정말 희생 중의 희생이다. 나나 되니 그나마 너랑 놀아주는 거야. 고마운 줄이나 알아’
그러면서 자기 만족과 위안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난 너처럼은 안 살아. 어떻게 그렇게 사냐’ 돌아보면 특히 저는 고해실에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와, 저 죄인은 어떻게 저러고 감히 고해하러 온 것일까, 과연 반성이라는 걸 아는 인간일까, 칸막이만 없으면 저걸 그냥 확 쥐어박고 싶은데. 지난번 고백을 이번에도 토씨 하나 안바꾸고 또 하고 있네, 예수님 말씀도 불변하지만 당신 고백도 불변하는구만. 하느님은 용서하실지라도 나라면 용서 못해!’ 고해실에 앉아서 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해 하지 마세요. 예전에 그랬답니다. 아직 사제로서 미숙할 때 한 때 그런 적이 있었답니다. ^^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어떨까요. 실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면 얼마나 거룩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닦았다한들 얼마나 깨끗하겠어요. 실은 다 거기서 거기.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그들이 바리사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이 자부시이 지나쳐 분리를 넘어 격리된 이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요. 정반대의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선과 악이 말끔하게 금 긋듯이 잘라져서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나누어진 이원화된 세상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선함이 악함으로 침투되는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선하고 거룩한 것에 악하고 속된 것이 접촉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머무시지 않고 이 땅으로 오셨고 죄인들과의 식사를 그렇게 즐겨 하신 것이죠.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지탄 받으시면서 그들과 함께 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과만 어울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죄의 상승효과가 일어납니다. 초범 재소자가 교도소에서 교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다른 중범죄자들과 어울리면서 범죄의 방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답니다. 그래서 교정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를 양산하는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격리가 아니라 동반을 원하셨습니다. 너나 없이 다 죄인입니다. 이 말은 그래서 죄에 대해 우리는 말할 권리가 없고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에 대해 숙고하면서 결국 덜 약한 사람이 더 약한 사람을 돕고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다 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 그래도 덜 약하다면, 덜 약한 사람이 만약 나라면 그렇다면 더 약한 사람을 돕고 마음을 쓰라-그것입니다. 바리사이처럼 분리하는 전략으로는 동반하는 아름다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ㄴ-34)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전부를 쏟아 붓는다.’ 근사한 말입니다만 그저 근사한 말에 그치곤 합니다. 아침을 일깨우며 기도로 시작합니다. 과연 마음을 다했을까요? 여전히 숱한 분심 속에서 기계적으로 바친 기도이기도 했음을 저는 압니다. 순교자의 후예라고 하면서 마치 교회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 바칠 각오가 되있는 듯 그렇게 떠벌이지만 조금의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근성은 얼마나 질긴지 모릅니다. 내 모든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어떤 시간만 하느님께, 그것도 가능한 적게 드리고 나머지는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니 정신(생각)의 이런 분산으로 감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힘들다, 어렵다, 피곤하다를 연발하면서 지내는 모양새는 하느님을 위해 내 힘을 다했노라기엔 민망한 노릇입니다. 첫째 가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함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하여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여 과연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내가 가상으로 지어낸 하느님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마음의 혼란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노하우는 가졌다는 것이죠. 내가 하느님을 고작 요정도 사랑한다는 것을 신자들이 안다면 아마 아무도 내가 집전하는 미사에는 오지 않을 터인데 신자들이 모르니 참 다행이다-이것이 면피성 위로가 되는 셈이죠.
한때는 마치 하느님을 사랑하고 게다가 하느님만을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이나 착각하던 때도 있었읍니다만 이제는 ‘난 하느님을 사랑하고 말고’ 그렇게 말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음을 압니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한다면 왜 이 모양이지’를 거듭하면서 정직하게 알게 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보여지는 나’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혹은 사랑한다고 보여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은 구분됩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바쳐지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바쳐지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죠.
‘내 몸처럼 이웃(가족, 친구, 신자, 교회 구성원 등)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사랑에서 이탈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면서(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쓰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래서 남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자부심) 그것을 사랑이라고 우기고 있는 격입니다.
전부 다 쏟아붓는 사랑은 애초에 글러 먹은 비관적 사태가 아닐까 의심이 자꾸 듭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내 사랑의 한계가 폭로되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신 주님의 말씀 앞에 선뜻 그렇게 하고 있다고 혹은 그렇게 하겠노라 하지 못하는 못난 모습이 드러납니다.…더보기
루카11,14-23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복음을 보면서 이 노래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동지의 약속’이란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그냥 부르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오른손을 불끈 쥐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독재정권에 맞서서 젊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며 부르는 노래였고 생존을 위해 노동 현장을 사수하는 노동자들이 목청이 쉬도록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죠. 흩어져도 흔들려도 안되고 대동단결할 때만 강력한 상대와 맞설 수 있다는 것을 고무하면서 말입니다.
벙어리 마귀 축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일이 베엘제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일어난 일이라고 예수님을 매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예수 저자는 마귀와 한패가 아니냐는 모함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반박하시죠.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지는 법인데 사탄이 서로 갈라서지 않고서야 이런 일들이 있겠냐고 예수님이 맹공을 퍼부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제압하시는 것으로 이는 하느님 나라가 이리 도래하였다는 표지가 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 전선에서 중립의 자리,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사탄의 편이 되던지 그리스도의 편이 되던지 양단간 결정하라!!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반대하는 이들, 흩어버리는 이들이 된다고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귀신같이 안다’ 그러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이 정말 잘 알고 있다는 것!!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공략해야 하는지 언제가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시간인지, 귀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많은 영혼을 생명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치밀한 작업을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악한 영, 사탄, 어두운 힘, 지옥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관심도 별로 없고 그런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미신적이라고 치부하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사탄과의 영적 전쟁 이런 이야기는 별로 안하는 추세입니다. 또 그 이유는? 신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것은 사탄의 놀라운 계략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탄 마귀를 말씀하시고 대적하셨다면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그런데 마귀와의 대적은 완전히 무장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서로 뺏고 뺏기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지킬 때만 안전하고, 더 힘센 자의 침입이 올 때 무장해제되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더 철저하게 결합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교구 안에 본당 안에 수도 공동체 안에 이런 저런 견해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차이들이 논의되고 수렴된 뒤에는 결정된 바에 대한 완전한 복종, 순명이 필요합니다. 치열하게 싸우고 논쟁하여 이루어진 의견을 다 함께 고수해주는 것, 싸움에는 그렇게 임해야 하죠. ‘흩어져도 흔들려도 죽는다!!’ 그 노래로 그 강력한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듯 주님도 당신 편에 서서 사탄과 흑암의 세력에 대해 맞서는 교회와 신앙의 자녀들이 갈라지지 않도록 하나로 모으시는 것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7-19)
예수님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당시 그 누구와도 다르게 가르쳤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도대체 저 가르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율법과 문자에 갇혀있는 고답적인 신학을 예수님은 걷어냈습니다. 관습과 전통의 굴레에 묶여있는 삶의 실천들도 다 치워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달랐던 것입니다. 기존의 것들이 그분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분은 신선하면서도 위험한 분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율법에 갇혀있던 고루한 이들과 다르셨고 성전 체제에 기생하던 이들과도 다르셨습니다. 주님께는 통념이란 없으셨습니다. 그 강고하던 남자와 여자, 유다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의 엄격한 구분은 예수님께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도, 죄로 간주되는 병에 걸린 이들도, 심지어 마귀들린 이들도 곁에 두셨습니다. 온갖 죄인을 다 품으셨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율밥과 예언서와 옛 계약과 아무 상관없는 돌출적인 분이셨을까요? 실상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없는데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고 그분의 창조는 바로 그러한 것이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그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니다. 예수님은 다른 분이셨지만 모든 과거와 단절하신 분은 아니었고 언제나 과거의 토대하에서 시작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천지가 사라지기 전, 곧 종말 이전에 하느님 말씀이, 율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리라’ 확신하신 것입니다. 온고지신의 자세, 옛것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중, 곳간에서 새 것과 헌 것을 다 꺼내어 쓴다는 비유가 그러합니다.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그냥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더라도 물려받은 것을 통해 일하는 것이고 주신 것을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옷 잘입는 패션 감각이 남다른 이들이라고 매번 철마다 새 옷을 사지는 않겠지요. 진정한 패셔니스타는 코디의 달인입니다. 그저 옷장 안에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던 것들이 그의 감각을 통과하면 멋진 아이템이 됩니다. 있는 것으로 승부하는 것이죠. 본당에 신부님이 새로 부임하면 몇 달동안 있던 것을 다 없애는 것을 종종 봅니다. 전임자 지우기입니다. 세상의 다른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일입니다. 정치권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도, 세상의 실력도 이미 있는 것, 해본 것 가운데서 괜찮은 것과 쓸만한 것과 효과 있던 것을 다시 재점검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새로움이 좋다고 하여 지난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뭉게고 시작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남은 철저한 단절이 필요하지만 나머지 인생 살이는 과거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실은 당신이 걸어온 길이 당신의 미래이기도 하니까요.
집이 낡고 동네가 오래되어 불편이 이만 저만 아닐 때, 싹 다 밀어내고 최신 공법으로 재건축할 수 있지만 더러는 적당히 고쳐가면서 세월을 품어가면서 사는 것도 품위 있는 일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하지 않고 지난 체험 안에 해답이 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살피는 것도 지혜로운 일상일 터이지요.…더보기
마태 18,21-35
많은 사람들이 용서에 대해 ‘내가 이번에는 참는다. 그러나, 다음에 또 같은 잘못을 하면, 용서 못한다.’면서 용서의 한계를 정합니다. 나쁘진 않지만 용서가 아니라 실은 이는 다만 ‘자기 화의 폭발’을 다음으로 연장하거나 유예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또다시 잘못할 것입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죠. 베드로의 일곱 번 용서 뒤에는 여덟 번째 단죄가 있던 것이죠.
어떤 임금에게 일만 탈렌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일 탈렌트만 해도 보통 노동자의 20년 품삯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 정부에서 징수한 조세의 총액이 약 800탈렌트 정도 되었다고 하니 이것의 12배가 넘는 일 만 탈렌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달러로 환산하면, 대충 30억불이 넘는 큰 금액입니다. 일만 탈렌트의 빚은 보통 사람의 경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큰 빚인데 그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엄청난 빚을 전부 탕감하여 줍니다. 해서 그 종은 그 엄청난 빚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기서 ‘빚’이라고 함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죄’입니다. 빚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펠레이 (ὀφειλὴ)는 ‘의무’의 뜻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죄(罪)를 빚이란 말로 표현하셨나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행치 아니하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으며 하느님을 사랑치도 아니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왔습니다. 죄인이 판관을 두려워하듯이, 빚진 자는 빚을 준 자를 무서워하고 피합니다.
또 많은 죄들이 돈과 연루하여 일어납니다. 또한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죄는 채무나 의무의 불이행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하느님에 대한 모든 채무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전부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빚 곧 죄를 탕감하여 주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가 우리의 죄를 탕감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빚 또는 죄를 다 탕감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죄의 빚을 용서하여 주심으로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 빚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이들, 이방인들에게도 갚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갚을 길 없는 빚을 하느님께로부터 탕감 받았는데 일만 탈렌트 빚을 탕감 받은 종과 같이 그저 적은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의 빚 또는 잘못에 대하여 따지일만 탈렌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빚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고,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아내야 하는 부르심 앞에 서게 됩니다.
그 하나는 ‘용서 받은 사람의 삶’이니 용서 받은 사람의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용서 받았으면, 이제 용서를 자꾸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죠. 하느님이 나한테 거저 용서를 주셨는데, 내가 이 세상 사람들하고 원수를 맺으면 되겠느냐 이 말이다. 용서해야 우리가 이미 거저 받은 용서가 유지됩니다. 우리가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 갚을 것을 호통치는 꼴이니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미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더보기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인 카파르나움에 들르셨을 때 사람들은 이적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다른 곳에서 보였다는 치유와 구마의 능력에 대하여 익히 들은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냉담하셨고 오히려 그들의 부아를 돋구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바로 구약의 두 사례, 곧 엘리야 시절에 시돈 지방 사렙타의 한 과부에게만 내린 하느님의 돌보심과 엘리사 예언자 때에 시리아 사람으로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혜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는 닫혀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화가 치밀어 주님을 벼랑끝까지 몰고가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선택된 민족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은혜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유대교적인 신앙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런 배타성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심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보여지지요. 생존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해 안가는게 아니긴 합니다. 또 민족종교로서 출발했기에 곧 민족 전체의 운명을 자신들의 신과 동일시 하였다는 것에서 이런 배타성이 유래하였던 정황일 수 있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부족적이고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선 분이셨던 것이지요. 애초에 그분께는 그런 제한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시공간을 넘어서시는 하느님께서 혈연에 얽매이실 이유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국수주의적 신앙이랄까 배타적 신관이랄까 하는 영향들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아만 이야기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를 일부러 끄집어 내셔서 유대인들의 부아를 돋구시는 것은 바로 그같은 편협함을 뒤흔드시기 위함이지요. 하느님은 편드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거죠. 유대인 편이 아니시죠.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 편이 아니시라는 거죠. 대대손손 하느님을 섬겨왔다는 것이 구원의 자동통로로 연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거죠. 어쩌면 교회의 편만도 아니시라는 거죠. 차별적이지 않은 사랑, 인간적인 배경에 제약받지 않으시는 사랑이 하느님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만의 하느님도 아니시고, 세례받은 이들만의 하느님도 아니시고, 그리스도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이들만의 하느님 아니시고....모든 만물과 생명, 온 우주 천지 만물의 하느님이시다...뭐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독점권의 파기,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드신 예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다름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입니다. 은혜 받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받을 자격이 없으면 됩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없음을 자랑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더보기
요한 2,13-25
성소국에서 일할 때 주일이 고민입니다. 어디서 미사드리나? 사제가 ‘주일 미사 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해 성사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주일에 혼자 미사 지내는 것도 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그렇게 할 수도 없고 혼자 1, 2독서 복음까지 다 봉독하고, 혼자에게 강론하고-어색하죠.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창들 본당에 순회 방문 미사를 가자! 이것들이 본당에서 잘하고 있나, 감시도 하고 잔소리할 겸. 물론 간다고 말하지 않고 불시에 갔습니다. 오늘은 이 본당, 다음 주는 저 본당으로 출몰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소문이 좀 났습니다. ‘남신부가 갑자기 미사오니 주의하고 깨어 있어라’ 뭐 그런 것이죠.
저는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어라, 저것봐라. 미사 준비 안하고 있네’ 미사 전 준비 부족! ‘저것 봐라. 오늘 강론에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구만.’ 강론 내용 부실 낙제! ‘강론은 그렇게 대충하더니 공지 사항은 무지하게 길게 잔소리를 하네.’ 사제적 덕목 C! 뭐 이런 식입니다. 친구라고 봐주는 법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사목하는 본당에 가면 제일 먼저 신속하게 절대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물색합니다. 기둥 뒤나 구석 자리를 잡고 고개를 좀 숙이고 있어야 합니다. 들키면 곤란합니다. 거의 눈치채지 못했는데 딱 한 번, 눈이 마주쳤습니다. 복음을 읽던 모 신부가 하필 저와 눈이 마주친 것이죠. 주춤 하더니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고 허둥거리더군요. 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왕 알아본 김에 빙그레 웃으며 주시했습니다. 동창이 강론 끝무렵에 그러더군요. ‘여러분, 지금 이 미사에 유다가 한 명 숨어 있습니다.’ 그러더니 ‘그 유다가 얼마나 봉헌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졸지에 유다가 된 저는 예물 봉헌하며 삼 만원을 꺼내어 봉헌 바구니 앞에서 그 친구를 향해 펴들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설렁탕이나 먹자는 녀석에게 우겨서 꽃등심을 먹고 싶다 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성전 의식을 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는 예언자적 행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 불충으로 단죄되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성전 예배의 타락상은 하느님께 대한 예배가 사람들의 이권에 의해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사칭한 장사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죠. 순례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성전 앞 마당에서 제물로 드릴 가축을 파는 대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일년에 양만 하더라도 30만 마리가 봉헌되었답니다. 그를 둘러싸고 온갖 로비가 다 벌어집니다. 좋은 몫을 차지하기 위한 상인들의 암투와 거래, 로비. 담당 사제들에게 사과 박스에 담긴 현금이 배달되고 때마다 봉투가 오고 가고 그랬다는 것이죠. 환전상들은 공식 환율보다 턱없는 계산으로 한 몫 두둑하게 챙기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가장한 타락과 부당한 부의 축적,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 이런 것들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분노는 돈벌이 수단이 된 예배를 종식시키고 이제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질 새 성전, 당신의 몸을 새 성전으로 삼아 새로운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제는 당시에도 돈입니다. 사람이 모이니 돈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투명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들은 하느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바치는데 실상 하느님이 아니라 성전을 이권의 장으로 여긴 이들의 주머니를 채우고 말았던 것이죠.
가톨릭 신자들의 여섯 가지 의무 중에 교회 재정을 부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무 못지 않게 중시 되어야 할 것은 교회 재정의 합당한 집행이겠지요. 성전 예배의 타락이 보여주고 중세 교회의 축적된 부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추문이 된 것을 반면 교사 삼아서 말입니다. 봉헌의 순수함도 필요하지만 봉헌된 재물을 사용하는 이들도 순수한 지향을 가져야 합니다. 이래저래 돈으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더욱 깨어 지켜야합니다.…더보기
루카 15,1-3.11ㄴ-32
원래 둘째는 그렇다 칠 수 있죠. 흠이 있긴 하지만, 둘째니까 막내니까 접어 둘 수 있어요.
맏이는 어떻습니까? 집안의 기둥이죠. 부모 마음을 그래도 잘 헤아리는 속깊은 자식이 맏이, 맏딸 맏아들이에요. 동생들도 건사하고 그러는 겁니다. 집안 걱정 제일 많이 하는 겁니다. 맏이의 책임감이 그래서 막중하고 스트레스도 많을 수 있어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보통 둘째가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그리고 그 타락한 삶에서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는데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만, 오늘은 이 복음을 맏아들에 중점을 두어 보기로 하죠.
사실 잃어버린 것은 둘째 아들만이 아니었죠. 집떠나 방황하던 동생이 둘째가 돌아온 것입니다. 냉담자가 회두한 것이죠. 그것도 쉽진 않지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실상 문제는 맏이에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 곁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동반했을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는 오히려 둘째보다 더 멀리 있었던 겁니다.
냉담자 중 다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신앙생활을 쉬고 있지만 언제든 돌아가야지 돌아갈꺼야 내가 갈 곳이 있어- 이렇거든요. 그러니 시간의 문제지 결국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죠.
큰아들은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여러ㅍ해 동안 철들고 나서 계속 열심히 아버지를 섬겼죠 아버지 말씀을 떠받들었겠죠.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노라고, 아버지 당신의 것이 다 큰아들 맏이인데 니 것이 아니냐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큰 녀석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 적이 없던 거죠. 열심히 했지만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억지로 그런거죠. 섭섭함도 있었어요. 염소 새끼 한 마리 안주시는 아버지께 대한 화가 치밀었습니다.
신앙 생활, 사제 생활, 수도 생활 열심히 한 것입니다. 정말 손발이 닳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속마음은 건조하기 이를데 없어요. 그냥 하는거에요. 신나서 하는게 아니라 해야하니까 마지못해 한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니까 돌아갈 곳도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 둘째가 먼 고장에서부터 다시 돌아온 것보다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마음을 읽는 것이 더더 어려운 것이죠.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냉담자가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 있을 터인데 열심하다는 이가 아버지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이 비유의 청중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가까이 하자 탐탁치 않아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잃은 자들을 다시 찾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은 거룩한 자신들이 절대로 상종못할 부류였습니다. 아버지를 섬긴다고 했지만 그 열심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었을 따름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맏아들-변질된 타성에 젖어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서 돌아서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이해도, 동생에 대한 사랑과 포용도 없으면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 사실이 큰아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제일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을 어겨놓고,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놓치면 다 놓친 것이다. 맏아들은 염소 새끼를 바라고 일한 것입니까가? 칭찬과 격려가 없으면 일하려 하지 않고 꼭 남들이 봐야 하고 박수받아야만 일합니까? 그저 묵묵히 이름없이 일하면 안되나요? 우리는 매번 인정받으려 한다. 교회에서 상처입었다? 마음 속에 염소 새끼 바라고 있던 사람들이 상처입습니다.
비유는 32절에 끝납니다. 그러나 33절을 써나가야 합니다. 통회와 반성, 그 마음을 몰라드렸다는 회개-33절에 쓰여져야할 내용입니다.…더보기
마태 21,33-43.45-46
주인이 최고의 포도밭을 만들어 시설을 다 갖추어 놓고 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농사 때가 되어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을 죽였습니다. 누구입니까? 구약의 예언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나중에 보다 못해 상속자가 될 실질적 주인인 아들을 보냅니다. 그 아들마저 포도원 밖에서 죽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이 농부들이 소출 바치기를 거절한 탐욕이 동기인가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소출 바치기를 거절하고 포도원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동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성경의 여러 문헌을 동원해서 이해해보면 이들이 소출 바치기를 거절한 것은 이들이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가졌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은 하느님 나라에 걸맞는 열매를 맺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마다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들포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자기 한계에 갇힌 이들이었습니다. 주인의 기대에 부응할 역량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집짓는 이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의 실권자 포도원의 농부같은 이들이죠. 이들이 버린돌이 있답니다. 바로 예수님이죠. 이돌을 왜 버렸을까요?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달리 머릿돌부터 집을 지어나갑니다. 보통 우리는 공사의 맨 끝에 머릿돌을 두죠.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소서 2,20-21)
유다인들은 머릿돌에서부터 건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돌이 누가 버린 돌이라구요. 집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란 말이죠. 왜 이 돌을 버렸을까요? 이 돌은 자기들이 머릿속에 이해하고 설계한 집과는 안맞는 돌이었던 것이죠. 이 돌은 이 집과는 깔맞춤이 안되는 것이죠. 종교 지도자들이 이해한 신앙과 윤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것과는 너무 달랐던 것이죠.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바로 그 내버린 돌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꾸 현대세계의 조류 흐름과 원리를 흉내낼 때가 있습니다. 효율 합리성, 경쟁, 최신 유행을 어쭙잖게 따라합니다. 그런 것들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누구와도 맞지 않을 수 있는 그 복음, 주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과 그 복음을 가르칠 때만 교회는 교회인 것이죠. 세상을 흉내내는 것은 교회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이죠. 세상보다 더 비교우위에 놓이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갈 때 교회인 것입니다. 집짓는 이들,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짓는 집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버립니다. 죽입니다.
교회가 왜 십자가에서 시작해야 하느냐? 그 십자가가 바로 내버린 돌의 자리입니다. 밀알이 되고 녹아지고 십자가를 질 때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앙을 좋아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은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죄송하지만 주목하지 않는 주변에서 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없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런데 세상이 듣기 싫더라도 교회는 매력없는 소리를 해야 합니다. 비위맞추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매일 축복만 이야기하고 만사가 잘 될것이라고 고무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귀에 달콤하게 들리지만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버린 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가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더보기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읽고 너무 서둘러 부자는 다 지옥가고 가난한 거지는 모두 천국 간다는 유치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인 것은 맞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규정하는 부자와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이 세상의 재화를 많이 쌓아두고 소유한 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여전히 품은 채 그 ‘나’라는 우상의 유익과 발전과 성공을 위해 사는 모든 존재입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그의 소유의 다소에 관계없이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자를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 복음 살짝 위로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루카 6,13-14)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시자 바리사이들이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비웃음의 원인은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이 ‘나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모든 구제와 선행과 율법 준수가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였다는 것이죠. 그것은 전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인기와 명성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이 부자들의 실체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율법주의자인 바리사이들에게 자기 부인은 불가능하고, 자신 행위의 가능성을 굳게 신뢰하는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뽐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사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비유의 부자는 그런 존재의 대표자입니다.
반면 라자로가 천국에 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라자로의 천국행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라는 실명을 쓰셨습니다. 비유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라자로를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그 라자로죠. 곧 라자로,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의미를 가진 이 이름 하나로 거지 라자로가 천국에 갔음을 설명해내는 것이죠. 그가 천국에 간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다!
이 비유는 부자와 가난한 이의 대결을 부추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내세에서는 운명이 역전된다는 것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일임을 알려줍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고 드러내고 그것으로 구원도 얻을 수 있다는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선 믿음, 곧 하느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더보기
오늘의 복음: 마태 20,17-28
앞날에 보이는 것이 조롱,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죽음이라고 제자들을 불러 주님께서 나직하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단에서는 딴생각이 가득하고 음모와 술수가 난무합니다. 철모르는 모습뿐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도 로비가 있었습니다. 제 한 몸 입신하고자 원칙을 어기고, 남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치맛바람까지 동원됩니다.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뜨리고 혼란하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어미의 지극한 모성을 앞세워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나라가 서고, 왕으로 오시게 될 때 제 아들들에게 한자리씩 얻게 해달라는 청탁입니다. 말이 좋아 인사청탁이지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물을 흐렸다 지탄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다른 제자들이라고 하여 그다지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아뿔사, 한 발 늦었구나. 나도 한 자리 얻었어야 하는데’ 그리하여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며 화를 내었다는 것이죠.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이제껏 불러 함께 하며 가르치고 알려주었건만 당신의 가르침이 스며들지 않는 현실 앞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딴청 피우는 제자들의 민망스러운 모습들 말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내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가 안정을 보장해주고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이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은 그래서 제자들의 변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과 속상함입니다. 그 자리는 남을 끝까지 섬기는 자리이고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자리이고 다른 이들을 위해 몸값을 치르는 자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자리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완전히 오해하고 몰라도 단단히 몰랐던 탓에 그 자리를 타했던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계적 구조를 가집니다. 교황님 아래 엄격한 서열과 일종의 기수라고 할까요-그런 질서들이 물샐틈없이 조직되어 유지됩니다. 사람이 모여 살다보니 이런 저런 직책이 생겨나고 일이 분담됩니다. 모임도 많고 행사도 적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방편인 조직과 직책이 어느틈엔가 권력, 그것도 알량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늘 있습니다. 누구나 선호하는 좋은 본당이 있다고 하고 대부분 기피하는 험한 소임이 있다고 합니다. 끝발좋은 사람은 늘 영전하는 자리로 발령받고 그저 수더분한 사람은 좀 아닌 자리를 늘 메꾼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자리 가기 위한 인맥도 중요해지고 듣자하니 불미스러운 일들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이 뼈저립니다.
교회 안의 모든 봉사, 모든 일의 원칙은 결국 ‘섬김’뿐입니다. 일의 효율성보다도, 매끄러운 처리와 괜찮은 결과보다도, 일방적 지시와 일사분란한 집행보다도 아니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원칙은 ‘섬김’입니다. 오로지 하나의 섬김, 오로지 하나의 헌신, 오로지 하나의 봉헌만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당부는 바로 그런 섬김을 우리 안에서 보고 싶어하는 간절함인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져라는 말씀을 되새길 때 ‘높’자를 뒤집어 봅니다. ‘푹’자가 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이는 푹 꺼질 수 있다. 조심해라, 뭐 그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겠지요.…더보기
오늘 복음: 마태 23,1-12
반그리스도교적 모습이 사회에서 비등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게다가 교회 마저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 않는가 의심스럽기도 하니 참 곤란한 상황입니다. 세상이야 원래 그렇다하여도 교회가 그리고 교회를 이루는 신앙인들이, 무엇보다 사제들이 믿음의 본령을 지키고 삶을 통해 그 믿음이 향기를 알려도 될까 말까인데 드러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도 합니다. 죄송스럽고 얼굴 화끈거리고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다시 보고 속된 자신을 단죄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온전한 믿음을 간직할 때는 호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배타적이고 자신을 과시할 때 논란이 일어나고 배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자기 욕망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 종말적 징조라고 할 정도로 성경은 자기를 드높이려는 욕망을 경계합니다. 현대의 우상숭배는 자기예찬과 자기 만족의 교묘한 형태를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우를 범할 수 있고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 세상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다시 본질에 비추어 다시 겸손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하다고 자처한 이들을 향해 공격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시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타인을 조롱하고 얕잡아 보는 바리사이들, 그 모습이 우리 안에 다시 재현되지 않는지 하는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영적이라고 하는 그 순간 가장 교만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열심히 살아간다고 훌륭하게 믿는다고 내가 자부할 때 타인을 우습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내내 열심히 살았다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실은 저는 자부했습니다. . 시간을 쪼개서 헛되이 안보내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때 공부도 대충해 기도도 헐렁하게 해 그런 동기가 눈에 띄입니다. 마음 속에 어떤 비교의식이 슬그머니 생겨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야, 네 녀석이 시간 지나서 신부가 되면 나는 천사가 되겠다.’ 뭐 그런 마음이죠. 세리를 대하던 바리사이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가 자기 우월감 가지고는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적 은총을 바라보지 않고 나라고 하는 새로운 우상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사실 그리스 로마적 문화에 대해서 대항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분리된 자들로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이들이 오히려 율법을 왜곡하는 이들로 변질되었습니다. 율법이 자기 자랑이 되어 버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되어 버렸던 것이죠.
내가 잘 율법으로 잘 준비되어 있다고 자부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은 단지 나의 완벽함을 확인하는 부차적인 무엇으로 전락한 것이죠. 하느님은 일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잘하고 있기에 일하시는 것뿐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거저 주시는 은총이라고 말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해도 그것은 댓가일 뿐이죠. 내 노력을 알아주신 댓가, 내 위치를 인정해주신 그 댓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려하게 말하는 바리사이의 행태, 높은 자리 선호하는 그 모습을 지독하게 싫어하신 것이죠. 누가 스스로 낮출 수 있습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군요-인정하는 자 그가 진짜 겸손한 자의 자격을 얻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6-38)
그야말로 자승자박입니다. 자기 줄로 자기 몸을 옭아맨다는 것이죠.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제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격입니다. 동앗줄이나 체인 같은 것으로 자기를 꽁꽁 묶고서 풀어달라고 한다?- 그렇게 제정신 아닌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있답니다. 자기를 묶습니다. 묶을 때 대충이라도 묶으면 풀기라도 쉬우련만, 매듭을 아주 복잡하게 절대 안풀리게 묶으면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게 됩니다.
열심히 묶었는데 그래놓고 보니 자기 자신이더라는 것입니다 묶을 때는 몰랐습니다. 남인줄 알고 묶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를 묶고 있던 것이라는 이 어리석음.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는 말씀이 그것이죠. ‘너희가 다른 이들을 묶었느냐, 실은 너 자신을 묶은 것이다.’
나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가 심판의 자리로 나가고 있음을, 남들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에 대한 단죄가 바로 그 순간 가중되고 있음을. 용서해 주어라는 말씀은 그래야 너에게도 용서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음을, 주어라는 말씀은 결국은 너도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 의하면 용서라 실은 극히 이기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참된 이기심은 나를 살리고 나를 구원하는 것이라 한다면, 결국 우리가 용서한다 함은 유난히 선한 성품이어서가 타인의 실수와 허물과 죄와 부족함에 대해 관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원래 워낙 선한 나머지 형제 자매의 잘못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공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잘못, 내게 준 상처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저걸 죽여, 살려’ 부글거립니다. 그런데 무섭고 더러워서 혹은 귀찮아서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너그러워졌다면 그것은 자기를 이기는 일이기에 공로가 됩니다.
우리는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승자박이로구나, 아 실은 나를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로구나 절감한다면 심판의 강도가 약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그를 몰아세우다간 안되지, 나도 무결점의 사람은 아닌데 나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때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해 주셔야 할텐데 싶다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오늘의 복음: 마르 9,2-10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거룩한 변모가 일어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대한 때마다 이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특별히 이 셋을 데리고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이 세 제자는 수제자이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오히려 반대죠. 가장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기에 친히 데리시고 예수님이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변하신다는 것이 수동태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변화는 스스로 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변형시켰다고 해야 의미가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 셋은 복음서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언급되고 사건에 개입될 때마다 언제나 선한 쪽으로 개입된 경우가 없어요. 셋만 나왔다하면 항상 문제가 일어나고 시비가 일었어요. 불평불만이 터졌어요. 그 문제적 핵심 인물들이죠. 예수님 입장에서는 제일 안심이 안되는 이들이란 말이죠. 그런 측면에서 특별한 총애를 받은 이를테면 관심제자들이죠. 이 셋이 다른 제자 그룹속에서 제일 먼저 변화가 필요한 대상이었던 것이죠. 이 셋의 공통점은 문제가 많았다는 것 말고도 이 셋은 크기의 논리, 수의 논리, 힘의 논리에 굉장히 찌든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변하지 않고서는 제자단 전체가 변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셋을 데리고 가셔서 변화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높은 산!! 높은 산 가끔 가시쟎아요. 동네 앞산 보다는 더 높은 좀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그런 산. 정상에 올라가면 아래를 보면 아득할 때가 있죠. 저 산 아래 전부 조그마한 점에 불과하죠. 그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고 좀 생긴 이도 있고 덜 생긴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산 위에서 보면 다 점에 불과하죠.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보입니다.
성경에 산이 등장할 때 그것은 높다라는 공간적 개념보다는 사실 하느님과 가깝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초월적 위치에서 보면 아래를 보면 모든 것이 다 점에 불과해요. 롱다리도 점, 숏다리도 점, 잘난 이도 점, 못난 이도 점, 별거 없어요. 드디어 그 높은데 올라가야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미미한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호연지기죠. 그런데 산 아래 풍경은 어떻습니까? 웃기죠. 뭐 좀 가진 것 가지고 대단히 잘난 것 같고 조금 크다고 대단히 위대한 것 같고 또 조금 작다고 굉장히 죽을 것같이 살고. 그러고 삽니다. 서로를 비교하면서 물고 뜯고 젠체하면서 그러고 산단 말이죠. 그것이 산 아래 인간의 풍경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전장이는 가죽을 표백하는 사람이란 말인데요. 옥시크린 엄청 써서 하얗게 선명하게 한 것보다 더 새하얗게 돼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단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마침내 도달해야할 도착지점을 예수님이 미리 보여주시는 계시적 장면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0)
지금 예수님의 옷이 변화되셔서 빛났어요. 이 말은 세 제자, 그리고 장차 이땅에 만들어질 하느님의 공동체 교회, 신앙인들이 무엇을 입으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로 옷입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 13,14)
우리의 옷이 그리스도에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이는 그리스로 옷입으라는 말은 우리 내면의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변화되는 성품과 성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 가치, 우리 기준을 매일 버리고 그리스도 그분으로 매일 옷갈아입듯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복음이 기준이 되고 하느님이 나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오늘의 복음 : 마태 5,43-48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삶에 대해 입을 열어 가르치신 대목을 우리는 산상수훈 혹은 산상설교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5장부터 시작됩니다. 이 산상수훈을 보통 그리스도인의 대헌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하는가의 대강을 묶어 놓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큰 줄기는 구약의 계명과 규정들을 예수님이 풀이하고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옛 계명의 새해석이라고 할까요? 유다인들의 삶을 규율해왔던 계명과 규정, 전통과 관습들을 보다 철저화하고 보다 근본화하며 보다 내면화하는 것, 산상수훈은 그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살아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완전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말인즉 그만큼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안되는 바람에, 쉽지 않은 까닭에 여전히 고민하고 분투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명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종적 완성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원수 사랑이야말로 그 절정인 것이죠. 그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그 말을 내뱉은 자, 나를 휘저어 놓은 자에게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죠. 내 마음이 요동칠 때 그것을 부정적으로 강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죠.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한다는 자연적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적 포용성이 넓어져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실 하느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고 찢어지게 만든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신 분이심을 생각하면 내게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품을 때 우리는 원수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인색함과는 달리 하느님은 넉넉하시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그 넉넉함으로 나를 채우는 것, 그리스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함으로 나를 다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인인 자를 위해 십자가 달리신 분을 우러르면서 자신의 삶도 그렇게 넉넉함 품음을 살도록 부르심 받은 이들인 것이죠.
하느님이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비와 햇볕을 내리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만이 아니라 괴롭히고 박해하고 원수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의 인색함이 나조차도 인색하도록 자꾸 유혹합니다.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너도 잘해. 그것으로 충분해’ 하고 유혹합니다. 그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음씀씀이가 넉넉해지는 것, 그것이 세리와 이방인의 의로움을 넘어서서 완전해지는 길,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넉넉하게 그가 원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상상 그 이상으로 베풀고 다가갈 때 하느님의 완전성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죄인을 품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그 넉넉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오늘 복음: 마태 5,20ㄴ-26
어느 통계를 보니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전에 미디어에서 살인 장면을 평균 8천번 보고 폭력장면을 10만 번 이상 본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폭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하간 때로는 생명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다루는 풍조들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게임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집니다. 그냥 게임 상이니까 큰 문제 없겠지 싶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폭력이 현실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게도 됩니다.
세상 무엇보다도 인간은 비할 데 없이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을 닮은 주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기 때문이죠. 그가 어떻든 무한한 존엄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죠. 이렇게 나도 존귀하지만 다른 이들도 똑같이 존귀하다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살인에 이르지 않는다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죠. 형제에게 성내는 자, 바보라고 하는 자, 욕하는 자는 다 재판에 넘겨지고 심판 앞에 서고 불붙는 지옥에 서게 된다는 말씀. 단순히 과장일까요? 엄포용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윤리적 자세와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내 앞의 상대를 자극해서 격분하게 만드는 것조차도 하느님이 심판의 범주에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라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격모독의 말입니다. 영혼의 살인에 이르는 욕설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기에 그 인격을 모독하는 것은 결국 뭐에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괴롭힙니다. 뒤에서 숙덕거리고 욕합니다. 그가 나의 인격을 모독했으니 말이죠. 나도 똑같이 갚아 주리라. 그런데 똑같은 방식으로는 결국 화해는 너무 요원합니다.
가족 안에 직장 안에 이웃과 함께 공동체 안에 화목과 화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제단에 예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더 먼저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타인과의 온전한 관계 없는 예물은요 그런 기도는 그런 예배는 부적당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화해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완벽한 화해를 이루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어린 녀석들이 싸우면 ‘야, 너 얼른 손 내밀어. 너도 손 내밀어 악수해.’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시킵니다. 물론 아이들은 쭈뼛거리면서 하긴 합니다. 효과가 있을까요? 그럼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사과하려하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꾸 미루다보니 결국은 사과의 타이밍, 화해의 시점을 놓치게 됩니다. 일단 말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하라는 것이에요.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의 제물이 되셨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 그래서 십자가의 화해를 믿는 이의 사명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하는데있어 이유 불문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조건없이도 사랑해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그러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그 사랑을 무제한으로 공급하셔서 부어주셨음을 믿습니다. 내 사랑으로 사랑하면 제한이 있지만 부어주신 사랑으로 사랑하면 할수 없는 그런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오늘의 복음: 마태 16,13-19
언젠가 레지오 단원인 한 청년이 견진 성사를 받는데 세례명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바꿀 수 없다’입니다. 한번 받은 이름이면 그만입니다. 세례를 취소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 ‘바꿀 수 있다’는 대답을 그 친구는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방법이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팁을 알려주었습니다. 바꿀 수는 없지만 더할 수는 있다고. 원래 세례명에 덧붙이는 방법이 있다고. 간혹 어떤 수도회에서는 입회나 서원할 때 수도명을 받기도 합니다. 이 경우는 세례명과 수도명이 구분되기에 대체하거나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회에서는 거의 수도명을 쓰기에 원래 세례명이 요안나이고 받은 수도명이 에우디아라면 요안나 에우디아 수녀님이나 비오 에제키엘 수사님이라고 불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견진 성사나 성품 성사를 받을 때는 새로 이름을 더해 받기도 합니다. 그 경우 라파엘 에녹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게 설명했더니 견진 이름을 받겠답니다. 그리고 꼭 ‘프랜시스’로 하겠다는 겁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니냐 했더니 ‘프랜시스’래요. 그냥 표기상의 차이이니 ‘프란치스코’로 해야 한다고 하니 고집을 피웁니다. ‘프랜시스’가 아니면 의미가 없답니다. 이유인즉, 자기가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너무 감동하며 읽어 거기 나오는 프랜시스 치셤 신부님을 따르고 싶어 그런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교적에는 프란치스코라고 등록하고 우리가 이제부터 프랜시스라고 부르겠다고 타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천국의 열쇠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께서는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베드로, 곧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매고 푸는 권한, 곧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통상 이 대목을 베드로에게 수위권, 곧 교회를 이끄는 권한이 주어지고 매고 푸는 실질적 권한 곧 고해 성사가 제정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베드로 아래 교회는 하나입니다. 지역과 문화와 인종과 성별과 연령과 또 무엇이 있을까요-하여간 사람을 구분하는 모든 차이를 넘어서 교회는 하나이고 하나여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게 잘못한 그를, 내게 상처를 준 그를, 내게 모욕과 수치와 손해를 끼친 그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베드로의 수위권과 교회에 주어진 천국의 열쇠, 곧 사죄의 권한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적이 아니라 하나, 교회가 된다. 말이야 쉽지만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프랜시스를 고집하던 그 친구는 프랜시스 치셤 신부님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중국 땅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외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 마음 속에 복음을 심었던 바로 그 모습, 자신은 초라하게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아무도 그를 대단하게 보지 않지만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그렇게 사라져간 그 모습이 선명했던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 사도좌는 교회의 영광을 이야기하려는 날은 아닙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해야할 일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그리고 그 교회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서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치의 여정을 걷고 있는지를 되새깁니다. 원한을 풀어주고 오해를 풀어주고 미움을 풀어주고 견제를 풀어주고, 풀어줄 일이 하도 많은 세상에서 묶이고 잡힌 것을 풀어주는 사람, 그는 사죄의 권한을 받은 사람입니다. 꼭 고해 성사에서만 풀어줄 필요는 없지 않나요. 昢凉 神父…더보기
루카 11,29-32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가서 외치라.’ 니네베가 너무 죄가 많으니 가서 파멸이 임했다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함이 너무 지독하여 하느님께서 진노하신다고 전하라는 신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니네베는 강대국 아시리아의 수도,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들이 망하는 것은 오히려 요나가 바라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니네베로 가기 싫어 도망칩니다.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후 할 수 없이 니네베로 가긴 갑니다. 당시 니네베는 사흘 걸려야 가로지를 만큼 큰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데요. 요나가 하룻길을 걸은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답니다. 심부름 시키면 금새 갔다 오는 아이들 있지 않나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대충 한것이죠. 요나도 울며 겨자먹기로 니네베로 가긴 갔는데 대충, 하는둥 마는둥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심판을 전한 것입니다. 사흘 걸릴 것을 하루 동안 대충. 이게 요나가 한 일의 전부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긴 갔지만 그러니 겉으로는 순종한 것 같은데 그의 태도 행동을 보면 진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겉치레 형식적인 선포가 있었을 뿐인데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집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니네베의 모두가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제일 놀랬을까요? 아마도 요나가 제일 놀라지 않았을까요. 나는 대충 했는데 하느님께서 하시려 하니 이 놀라운 회개가 일어나더라는 것이죠. 말도 안되는 그 선포를 듣고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게다가 만나지도 않고 그냥 ‘심판이 임박했다더라’는 소문만 들은 왕이 옷을 벗고 잿더미에 앉아서 심지어는 사람뿐만 아이들과 짐승까지 단식하며 재를 지키면서 부르짖어 하느님께 구하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사실 요나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이방인 아시리아의 왕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진심으로도 아니고 그저 저주에 가까운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것도 하루 달랑 억지로 그랬는데 하느님이 전하시고자 했던 그 일이 이방인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이죠.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가 되면 니네베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 할 것이랍니다. 왜요?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그 엉터리 같은 강론, 설교 듣고도 회개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지만 듣더라 안듣더라? 안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 예언서의 메시지는 니네베 사람들이 주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인 것이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유치원생도 말을 듣는다 너희는 대학원생이면서 이거 이해 못하니 말 안듣니. 이런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이 절망스러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이방인 니네베 백성도 단식하면서 심지어는 개도 소도 다 회개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너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더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니네베에 간 요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돌아옴과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 니네베 이방인들이냐? 아니랍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열심하다고 자처하는 신앙인들이 더 고집불통이라는 것이죠. 누가 회개할 대상인가요? 믿음없는 이들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이 아니라 세례 받은 이들,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이들-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할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마태 6,7-15을 읽고 묵상하세요.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 말만 많이 하는 기도는 아무 의미없다-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말을 많이 한다, 곧 중언부언한다는 것을 ‘파타파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기들이 한참 말배울 때 내는 옹알이같은 것입니다. 실은 아무 뜻도 없이 어버버버하며 아무 소리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는 것입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빈기도란 그런 것이랍니다. 누구 들으라고 의식하면서 하는 이렇게 나는 기도 많이 한다고 보여주기 위해 하는 반복의 기도, 빈말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있어 주의할 점을 이렇게 먼저 지적하시고 나서 주님의 기도 가르치셨습니다. 절제되고 명료하고 그러나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주님의 기도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빠, 아버지!
어떤 유다인이든 당시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혹자는 예수님의 기도만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고유하게 부른 것은 아니라고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의 이런 기도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식에 사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은 일반적이진 않았습니다.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왕과 백성, 그리고 나가서 다윗은 하느님은 목자, 우리는 양의으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실은 이것만해도 혁명적인 전환이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더 나가서 신약 시대에 신랑과 신부, 이제는 더 깊어질 수 없을 정도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이렇게 점점 심화 확대 됩니다.
탈출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선택한 아들, 장자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약속이 예수님에 이르러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죠.
로마 8,15-17,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도 사실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을 성령께서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심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이제 우리 아버지, 육신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되게 하신 아버지도 계시는구나 알게끔 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그 안에 바로 그 오랜 하느님의 약속,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 약속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 것은요 예수님은 우리와 하느님을 부자관계로 맺어주신 구원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겪으셔서 우리를 하느님께 아들로 딸로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소개해주신 것이죠.
우리가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할 때 예수님이 받으실 상속을 같이 받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삶의 과제가 던져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얼마나 열심한가에 앞서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것이죠. 주님을 알고 그분을 삶으로 알아가고 있는가? 이 과제가 주어지는 것이죠. 우리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 어떤 분인가 알아가는 것, 그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아들을 내주신 아버지 하느님, 절절한 사랑으로 약해지신 하느님, 그분께 대한 순종이 따를 때 우리는 또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신비가 오늘도 일어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마태 25,31-46을 읽고 묵상합니다.
복음을 듣고서 ‘착하게 살자. 베풀며 살자. 도와주며 살자’ 이렇게 마음 먹었다면 맞기는 한데 절반만 맞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이 움직였는가가 더 중요한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날 심판주로 오셔서 양과 염소 가르듯 의인과 죄인을 갈라 세우실 때 기준이 무엇이냐고 말씀하셨나요?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기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이 형제라고 부르는 작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는가, 곧 타인과의 관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태도와 입장을 취했느냐? 작은 이들을 모른 척했느냐 아니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착하게 도왔는가 살뜰하게 보살폈는가- 과연 이것이 심판의 기준인가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맞지만 그런데 전부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착한 일,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이 기여가 되고 자기 자랑이 되고 자격이 되어서 마침내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셔서 오른 쪽으로 부르시고 창조 때부터 준비된 그 나라를 차지한다? 하느님께서 보상하신다? 마치 입학 자격을 얻은 수험생처!! ‘너 열심히 한 것 이제 알았으니까. 합격이야.’ 그런 것인가요.
그러니 자격을 얻고자 기회 닿는 대로 선행과 자선, 봉사 열심히 하자!-그래야 하느님 나라 들어간다.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여기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행과 자선과 봉사로 심판을 통과할 자격을 얻어 오른쪽 자리, 양 대접 받게 되는 것 아니란 말이죠.
‘나 이만큼 했네, 나 이렇게 도왔네’ 하는 순간 이미 ‘무엇’이 되어 버리고 그 즉시 아웃입니다. 도와주고 베풀었지만 그것으로 오히려 결격사유입니다. 왜 그렇죠. 주님께서 오른쪽에 앉혀준 이들이 하나같이 뭐라고 그러나요. 자기는 도와준 적 없데요. 그 작은 이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되어 도운 적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왼쪽에 앉은 이들은 뭐라 그러죠. 그들도 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인줄 알면 내가 안도왔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돕고 감싸고 베풀죠. 예수님이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언제 거기에 계셨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핵심은 도움을 주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도움이 드러났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양들은 안드러났어요. 기억도 못해요. 왜 그렇습니까?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죠.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요. 어쩌다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도와주고 베풀고 돌보는 것이 일상이란 말이죠. 기억할 필요도 없고 나지도 않아요. 자격얻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죠. 보상을 기대한 것 아니죠. 드러나는 것도 원치 않았죠. 안드러나니까 주님께서는 아신 것이래요. 그래서 생색나고 알려지는 것 두려워해야 합니다. 기껏 해놓고 점수 다 까먹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돌보되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내가 언제 그랬나 이렇게 나조차도 모르게 감춰져 있어야 비로소 양이 되고 오른쪽에 앉습니다. 자격으로 얻는 것이 아니죠. 난 그럴 자격이 없는데요. 그래야 양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형제들의 굶주림과 형제들의 목마름과 형제들의 나그네됨과 형제들의 헐벗음과 형제들의 질병과 형제들의 감옥을 사랑와 긍휼, 은혜로 해결하고 위로하신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하느님의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그 어린양 안에서 양들은 이제 양이 되는 것입니다. 양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양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예수님이라는 양 안에서 우리가 양이 됩니다. 나는 아닌데 예수님 안에서 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도와줄 자격조차 없는 사람인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선한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그 연약한 모습이 나의 모습이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이 그 모습이죠.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고 등등. 그래서 예수께서 희생하셔서 구하셨기에 내가 하게 되었다는 고백. 다 주님이 하신 일이 되도록 하는 고백이 작은 이를 주님의 형제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린 그렇게 착하고 의롭지 않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2-15)
성령께서 광야로 예수님을 내몹니다. 하기 싫은데 등떠밀어서 할수 없이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득차시니 내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 성령께서 가득하게 되면 인생이 그렇게 내몰리듯이 갑니다. 내 맘대로 했나요? 아니요. 내 계획 안에는 그 광야로 가는 것 없었어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인 되셔서 나를 붙잡으면 광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현장입니다. 싸움터, 유혹과 대결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사탄은 만날 상대였단 말이죠. 피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 곳곳에서 앞으로 사탄과 대적해야 하셔야 했습니다. 스스로 들어가셔서 맞서셨습니다. 사탄에 대한 선제공격!! 사탄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피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고 먼저 맞서는 기선제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광야로 내보내지셨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이 모든 동사를 현재로 사용합니다. 시제를 몰라서가 아니죠. 과거 예수님 인생에 벌어진 일인데 시제는 현재시제에요. 엄밀하게 번역하면 ‘예수님이 광야로 보내지셨다’가 아니라 ‘보내지신다’ 정도가 되겠죠. 무슨 의미일까요? 과거 어느 한 순간에 끝난 일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삶 속에 계속되는 일이란 것이죠.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내보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형입니다. 강력한 충동에 의해 주께서 광야로 가셨듯이 나도 하느님의 이끄심에 힘입어 광야로, 현장으로 나가고 있단 말이죠. 광야, 험한 현장이고 싸움터이기에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가고 원치 않으시면 멈출 것을 우리가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표현은 예수님이 성령께 사로잡혀 내보내진 광야, 마르코는 광야라는 말을 형용사로 쓰고 있어요. 명사가 아니에요. ‘광야로 내보내셨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거칠음, 황량함, 문제투성이’ 속으로 내보내진다. 이 정도 번역될 수 있겠죠. 거칠고 황량한 장소로서의 광야가 아니라 그 장소가 갖는 개념과 의미가 거칠고 황량하고 문제투성이의 상황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탈출 이후 가나안을 향해 걸어갔던 광야는 밤낮의 일교차가 엄청나고 먹을 식량도 식수도 부족하고 한마디로 사람이 살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배제된 그런 광야였습니다.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광야입니다. 그래서 매일 출근하는 내 일터도 지지고 볶는 우리의 가정도 광야입니다. 일상 자체가 광야입니다.
성령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내모셔서 광야의 유혹, 시험을 겪게 하셨을까요?
히브리서는 이것을 선명하게 설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 15-16)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지고 똑같이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래요. 우리가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지 이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기 쉬운 존재인지를 그것을 이해하시기 위해 동정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주님이 겪으시고 이겨내셔서 우리의 롤모델 되시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매일 주님처럼 광야로 나가지만 매일 주님과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광야는 우리를 괴롭힐 것이나 우리의 보장된 승리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는 믿음의 승전보를 울리는 영광의 전장이 될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오늘 복음 루카 5,27ㄴ-32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레위의 부르심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곧 자신이 의지하던 것에서 이탈합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채 동시에 예수님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격하하고 다른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이 본문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그리고 당신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도 직업도 소유도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단죄하는데 악용할 수 있지요.
과연 주님은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복잡하게 만드는 모든 관계와 맡겨진 일에서 떠나는 도피를 요구하신 것일까요? 오히려 그 관계와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삶, 하느님 나라의 관계로 전화시키고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교는 버림의 신앙의 아니라 재해석의 신앙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의 신앙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의 진입의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탈속의 주님이 아니라 육화의 주님이십니다. 탈속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느님을 혹은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 자세는 아주 제한적인 몇몇에게만 해당됩니다. 대다수의 삶은 여기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합니다. 우리 모두가 봉쇄 수도자로 부르심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반면 육화의 삶은 주님께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에 기반합니다. 이땅을 하느님 나라로 만드시고자 주님께서는 구체적은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실존의 문제, 그것은 바로 다이어트의 욕구입니다. 영의 욕구와 육의 욕구가 서로 싸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이어트의 욕구와 밥맛의 욕구의 충돌입니다. 밥맛의 욕구가 우리를 야식과 과식의 길로 이끕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팅팅부은 얼굴로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라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성령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절제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죄와 사망의 주권자에게서 구해주시는 것이죠. 그것은 평범함을 뛰어넘어 탁월함을 살고 비범함을 살아야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렸다 함은 하느님의 주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어적 수동적인 것이 버림이 아니라는 것이죠.
디자이너라면 독창적 창의적 작품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작가라면 유려한 문장 통찰력있는 글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정치가라면 시대를 읽는 눈과 소통의 능력을 가져야 하고 교사라면 지혜와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기업가라면 트렌드를 읽는 안목과 사회에 공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진짜 버림의 양상인 것이죠. 아무 것도 안하는 버림이 아니라 전능하신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심을 믿고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수준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 수준의 인생, 하느님의 작품을 창조하고 건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것 같지만, 세리 레위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 그는 과거의 삶과의 결연한 단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저 세관 자리에 앉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단절, 버림을 불러 일으킨 것은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 호소를 듣는다면 우리도 무모하고 불가능하게 보이기도 하는 새 삶을 향한 모험을 시작할 수 있게 되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차례, 월요일 목요일 단식 규정을 지켰습니다. 금욕적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행보가 달랐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광야에서 사탄과 대적하실 때 단식하셨죠. 그러나 공생활 중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예수님을 그렇게 비아냥거릴 만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잔치를 벌이시고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스승님과 궤를 같이했기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신 후 그리스도인들도 단식하기 시작했죠. 100년경 쓰인 디다케에는 그리스도인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 단식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받아서 재의 수요일, 성금요일에 한끼 단식, 곧 대재(大齋)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엄격성은 떨어지죠. ‘한끼는 단식, 한끼는 소식, 한끼는 정상적’으로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단식은 이제 자선행위와 연결될 때 의미를 가집니다.
풍요한 시대에 단식의 의미는 가난하셨던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한때는 육신이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몸을 학대하고 고행을 통해서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대도 있었죠.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단식이 자신의 거룩함, 그것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많은 이들과 대비되는 거룩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 단식은 전부 보여주기 위한 단식,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기 위한 자랑이 되는 행위로서의 단식을 폐지하셨습니다. 오히려 단식의 영적인 차원을 더 강조하셨죠. 이 풍요로운 시대에 먹을 것이 지천인 시대에 단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물으라는 것이죠.
그것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여전히 굶주린 이들이 이땅에 있고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사야서 말씀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양식이 없어서 굶고 정의에 목말라 지쳐있고 억압의 멍에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외면하면서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 단식하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느님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 헛것이고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예언자는 끊임없이 일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빵도 먹어야 하지만 다른 것, 무엇이에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 인간 존재는 그럴 때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것이죠. 결국 왜 단식합니까? 한없이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죠.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에요.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의 말씀, 그분의 정의, 한결같은 충실함, 하느님만의 나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이 사순절 절제와 희생을 바칩니다.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면 형식만 남습니다. 신앙의 모든 행위가 그 진실함, 원래 제정된 그 목적을 잘 헤아리지 않으면 빈껍데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단식했다 희생했다 절제했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무엇을 했다는 성취와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너무도 기초적인 이 사실이 먼저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2-2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질문 이후의 말씀입니다.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관계냐는 것이죠.’ 본적도 없는 분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제가 되면 알게 될까 했고 사제가 되면 대단한 존재가 되는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죠. 사실 어떤 때는 약간 권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단조롭기도 하고 여러 부담도 있습니다. 때로는 밑천이 다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계에 부딪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요. 그런 허한 느낌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실제는 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저주의 십가가에 매달리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자리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바리사이들이 왜 골고타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나요.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저 파멸의 십자가에 달려있다고-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버림받는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도 하실 수 있으련만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받으셨음은 그래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도대체 왜 다른 수월한 방법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야할 버림받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셨을까-이 질문 앞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오늘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르려는 자, 자기를 매일 버리고 십자가 지고 따르라!
자기를 잃어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이 신비를 주님이 먼저 보이시고 우리에게 다시 그 길밖에 없음을 확인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로 오르심을 통해 모든 이름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고 세상에 비길데 없는 기쁨과 영광을 주신 것이죠. 그러면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결코 자신을 잃으려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박수받지 못할 때 나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버려야한다고 하시는데 자꾸 누리려고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람. 사순시기는 그런 사람이 되려는 수련의 시기입니다. ‘극기의 보루로 진을 치고’-사순시기에 자주 쓰는 표현이죠. 극기- 자기를 이긴다. 자기와 싸운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런 전투적인 심리상태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이가 있긴 하더군요. 걸핏하면 우리가 그런다는 것이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그래서 승리했다. 성공 거두었다. 그러면서 왜 자기와 싸우냐. 자기와 잘 지내야지-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진짜 잘 지내야 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지어 보내주신 나 자신.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나와 잘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자기를 버리고 발견한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십자가를 더 많이 선택함을 통해 가짜에 오염된 내가 정화될 수 있기를, 하여 오늘 내게 십자가를 하느님께서 더 지어주시는 까닭은 나를 거짓의 함정에서 건지시는 하느님의 개입하심임을 깨닫기를. 昢凉 神父…더보기
재의 수요일 복음은 자선, 기도, 단식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마태오 복음 6장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라는 표현을 다섯 번 반복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선, 기도 ,단식이 오히려 자기를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살아있어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며 남에게 보이려는 외부적 동기로 움직일 때 그런 자산과 기도와 단식은 헛것이 됩니다.
1965년 프랑스의 앙드레 라프레라는 사람이 기분좋은 계약을 맺었답니다. 프랑스에는 앙티아제라는 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를테면 주택 연금 비슷한 것이라죠. 노인이 소유한 아파트를 담보로 계약을 맺고 매달 그 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간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제도랍니다. 노인의 사망 후 그 아파트는 노인의 생계비를 지원해준 이의 소유가 된다지요. 그런데 라프레는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이 90대 할머니하고 계약을 맺었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60년대 다 지나고 70년대 다 지나가고 80년대도 다 지나가구요. 그런데 안돌아가셨데요. 결국 95년에 라프레가 먼저 죽고 할머니 장 칼망은 무려 123세까지 사셨답니다. 그가 시작한 것은 한 노인을 도와주는 순수한 마음일 수 있겠죠. 그런다가 아파트 하나 가질 수 있겠다 하니까 달라진 것이죠. 어디에 관심을 갖는가가 내 마음의 진실인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이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는다는 것에 그 아버지께서는 숨은 일도 보신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심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이 거기 있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구경거리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연도 볼거리가 되죠. 동물도 구경거리가 됩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상호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구경하고 소비하면 그뿐입니다. 인간의 시선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추방하는 것이고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런 현상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사용하고 있는 표현 ‘미사를 본다’, 그것은 구경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관심은 일방적이고 구경거리고 주님을 소외시키고 내 삶에서 배제된 무엇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에 자선에 단식에 대해 관심 가질 수 있지만 그 형식에 관심 갖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관심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무서운 얘기죠.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 숨은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진실을 아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관심-그것이 우리의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상호시선이 있어서 마주봄이 있어야 하고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램프를 비비면 지니라는 요정인지 거인인지가 나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자죠. 지니는 필요할 때마다 비비면 바로 나옵니다.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시죠. 때로는 숨어계시는 것 같고 버리시는 것도 같죠. 또 지니는 소원을 듣고 바로 접수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소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기도 하죠. 또 요구도 하십니다. 그리고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끝나면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동행하시고 현존하시죠. 그런 것이 좀 거북하다는 것이죠 많은 이들에게는. 이렇게 우리 삶의 한복판에 지니처럼 내가 필요할 때만 그리고 필요없으면 사라지는 소외된 상태가 아니라 그분은 내 삶에서 인격적인 교류하시고 공유하시는 그런 상태를 가지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 안에 있더고 해서 다 괜찮은 거룩한 신앙인인가여? 결국 하느님과의 상호 시선이 마주치고 그분을 내 안에 초대하고 주님과 공유하는 시간이 있고 주님께 관심의 초점이 있지 않으면 다 헛것이고. 은밀한 것을 다 보시는 주님이 더 이상 보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에 골몰하다 주님을 몰라보지 않도록 주님께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의 진심, 나의 진실이 되기를 이 사순시기 시작하며 원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분부하셨다.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14-21)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성과 여성의 간극에 관한 고전적 저술입니다. 뭐 복잡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또 살다보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합니다. 왜 내 생각과 같지 않고 왜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왜 나와 다르냐고 사사건건 충돌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는 사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그와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죠. 원래 그는 그랬습니다. 다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가 원래 그랬다는 것을 잊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원래 그랬습니다. 우리의 건망증이 원래 그가 그랬다는 것을 깜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둔함에 대해, 그들의 건망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오병이어, 칠병땡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 순간은 너무 감격스럽고 경이롭고 대단하고 벅차올랐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불과 얼마 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틈엔가 그 깨달음과 감격과 환희는 사라지더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계하라-입니다. 누룩은 대체로 유다인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옳지 않은 것들, 비신앙적인 것들, 외식주의와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를 주의하라는 말씀을 누룩에 비유해서, 그것들이 누룩처럼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가니 조심하라는 뜻일 것인데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에 엉뚱하게 ‘빵’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두고 시비합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주님께서 약간 어이없고 기막혀 하시는 것이죠. 당신은 빵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작 빵 정도의 문제라면 호수 저편에서 다 해결하실 수 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해도 기억도 하지 않게 되니 다시 빵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은총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나아가 깨닫고 다시 살리는 것은 별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야훼의 권능을 체험했지만 얼마 못가 그 역사를 까맣게 잊고 불평과 원망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은총의 건망증이야말로 치명적 불신앙의 증거인 것이죠.
다시 기억합니다. 다시 간직합니다. 다시 깨닫습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으로 실은 충분하다는 것을, 차고 넘치게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이미 받은 것, 이미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억의 힘이겠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이 일이 마무리됩니다. 이방인의 땅, 겐네사렛에서 수많은 이들 고치셨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더러운 영 들린 딸도 원격 치료됩니다. ‘에파타’, 말씀으로 귀먹고 말 못한 이가 온전해졌습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한량없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기적의 날들이고 흘러넘치는 기적이 있었죠. 그런데 결국 오늘 바리사이와의 논쟁을 통해서 어떤 결론이 났을까요? 기적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그들은 또 요구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 그자체일 수 밖에 없는 노릇. 더 어떻게 보여주나요.
사람은 만족을 모릅니다. 사랑받고 있는데 더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감질난다고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대해 역정을 내시며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처음으로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표징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사용됩니다. 기적은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죠. 하느님이 하셨다고 놀라게 만드는 일이 기적입니다. 불치병에 시달리던 이가 고쳐집니다. 기적입니다. 더러운 영에 인생이 파탄난 이가 회복됩니다. 기적이죠. 말씀하시니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기적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빵으로 백성들이 먹고도 남습니다. 한량없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아직 표징이 아닙니다. 기적은 놀라운 일이죠. 놀라운 반응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냐에 연결될 때 그것은 표징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표징이 되려면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 체험이 거기에만 머물면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 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가 일으키셨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작은 일이지만 ‘주님께서 하셨구나’로 연결될 때 표징입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일이어도 ‘어쩌다 생겼나봐. 우연의 결과네’-그러면 표징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구합니다.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표징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죠. 표징이 될 기적은 이미 있었죠.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 물으시죠. 그들이 표징을 구한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기 위해,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한 가지 더 기적을 보여주지?’하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롭지 못하다’의 반대말은 ‘은혜롭다’가 아니라 ‘식상하다, 지루하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미사가 지루해. 강론이 식상해.’ 무슨 뜻인가요?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니 이미 익숙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신선한 미사, 좋은 강론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을 더 잘 믿고 사랑하기 위해 신선하고 좋은 미사 분위기, 강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고 그저 너의 능력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바리사이가 되는 것이죠.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 지루하다고 답답하죠. 뭐가 답답한 것인가요? 결국은 자기 영혼이 답답한 것이죠. 그 답답함을 푼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바리사이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주의깊게 새겨야죠. 주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습니다. ‘너희에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것을 찾아다니면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적, 이미 주어진 치유와 은혜를 통해 만족함이 먼저입니다. 식상함과 지루함과 싸워야 합니다. 신앙은 그것입니다. 신앙은 반복되는 메시지에 대해, 반복되는 주제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더 더 더! 자극을 추구하는 한 끝없는 반복의 순환에 빠집니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는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 그리고 기적찾는 것에만 몰두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더보기
중국 음식점에서 몇 사람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오다가 입구에서 분무기를 꺼내서 옷에다 서로 뿌려주더군요. 저것 뭐지? 아, 삼겹살 집 같은데 가면 가끔 뿌려주는 곳이 있더라구요. 탈취제 같은 거시죠. 맛은 있는데 먹고 나면 옷에 배인 냄새가 곤욕이죠. 그런데 그곳은 중국 음식점이었습니다. 중화 요리에 냄새가 그다지 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뿌릴까 싶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불콰하더라구요. 짐작에 음주단속 피할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지만 옷 턴다고 완전 제거되나요. 뭐 뿌린다고 해결되나요. 임시방편이죠. 오히려 더 강한 향으로 이미 배어있는 냄새를 없애려고 하다가 더 문제가 됩니다. 방향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빨래를 해야죠. 창을 열어서 환기시켜야죠. 그게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악취가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그런데 익숙해져서 나만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픔과 죄와 더러움이 들어오는데도 자기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르면 정말 없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나병환자는 바로 그런 익숙함에 젖은 것의 상징입니다.
나병의 특징 또 하나는 전염성입니다. 현대에는 전염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그렇죠. 다른 이들에게 퍼지기에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병과 죄가 유사성을 사람들은 추리해내었습니다. 나병도 죄도 둘 다 역겨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둘 다 무감각함을 일으킵니다. 둘 다 전염됩니다. 죄인데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죠.
인터넷 계정이 여러 개다 보니 어떤 메일은 아예 가입해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그 메일함을 열어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어떻게 메일주소를 알았는지(정보 유출의 결과겠지요) 모르지만, ‘오빠. 연희에요’, 그런 식의 제목을 단 메일들이 즐비합니다. 연희가 누구일까요? 내가 아는 그 연희 소피아인가? 보고 그런데 오빠라니, 얘가 돌았나. 이러고 궁금해하면 안되죠. 클릭하는 순간, 어휴! 매일 지워도 매일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래서 메일인가요? ^^
죄의 확산성과 전파성은 더 집요하고 은밀합니다. 남욕할 때 절대 혼자 하지 않죠. 공원벤치에서 혼자 남 욕합니까? 남들을 끌어들이죠. 능력있는 사람은 아파트 한 동 전체를 끌어들여서, 우리 반 전체를 끌어들여서 욕을 합니다. 죄의 전염성이죠. 우리가 2천 년 전 나병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은 이 시대는 이제는 영적 나병, 인생의 나병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원치 않는데 그런 삶을 사는 이가 많다는 것이죠. 가방 대신 죄책감을 들고 다니는 이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오늘 주님께 나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어 그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그가 주님께 나오는 것은 절대 쉬운 일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나올까 말까, 다가갈까 말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죠. 그분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원문은 연민으로 가득차서(filled with compasion)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나올 때만 고쳐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만지셨죠. 터치, 접촉-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늘 들어왔습니다. 엄마 손에 무슨 항생제, 진통제가 분비되나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정말 나았다니까요. 싸르르 하던 배가 가라앉아요. 손을 대심은 다 버려도 주님만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모두에게 버림받았건만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음을 말로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대셔서 알려주신 것이죠. 누구도 만지지 않은 나를 만지셔서 그분은 앞으로 나온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연민의 힘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5-40
앞서가신 조상들을 기억하며 갑진년을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부고를 많이 받게 됩니다. 본당에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잊을만하면 장례가 납니다. 한 사람을 보내드린다는 것은 유족들도 힘들지만 장례 미사 집전하는 것도 꽤나 힘이 듭니다.
동기 신부들 부모님 장례는 그중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내 부모님 네 부모님 따로 있지 않고 다 우리 부모님이라고 여기고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저희 반은 유독 더 그렇습니다.
저희 서품 동기들간에는 암묵적 약속이랄까 철칙이 있습니다. 동기들 부모님 상을 치를 때면 장지까지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장례 일정을 다 마치고 나면 꼭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때 부터인가 인증샷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진말입니다. 그 사진에 내 얼굴이 꼭 있어야 합니다. 거기 얼굴이 나오지 않으면 두고두고 욕먹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 동기 부모님 장례에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나’며 졸지에 패륜아까지는 아니어도 하여간 눈총 깨나 받게 됩니다.
지난 번 장례 때 찍은 그 사진은 동기신부들 단체 sns 메인 사진으로 올려집니다. 다음 번 장례가 날 때가 되면 새로 사진을 찍어 교체합니다. 그 사진을 무심히 보는데 머리 희끗희끗해진 친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이면 여기저기 아프다고 요즘 병원 다니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고 하는 친구들이 속출합니다. 자기는 예수님 덕분에도 살지만 홍삼 먹으면서 간신히 일어난다고 너스레 떠는 녀석도 있습니다. 시간이 속절없다고 한탄하는데 이르면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압니다.
설날이 되었습니다. ‘설’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낯설다’가 기원이라는 설명이 확 와닿습니다. 묵은 시간이 지나고 온 새로운 시간이란 뜻이겠지요. 복음은 ‘깨어 있어라’라며 이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자칫하면 그냥 흘려보내기 십상인 시간인지라 잠들어 있는 무력한 상태로 지내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죠. 낯선 시간은 다시 주신 시간입니다. 그야말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었을 터입니다. 그 정도면 지난 시간은 괜찮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지난 것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 따위가 왜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다행히 또 주어진 시간을 깨어 살아갈 기회가 있으니 더 괜찮습니다.
대림으로 교회는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양력으로 2024년도 탈없이 맞았습니다. 설을 지내면서 우리는 또 새해를 맞았다고 복을 빌어줍니다. 어느 때부터 새해라고 해야 하는지 헛갈리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거듭 시작하고 다시 출발하도록 주시는 기회인 셈 치고 낡은 삶이 아니라 낯선 삶을 향해 조금쯤 설레며 맞이해도 좋은 그런 날 되시길 청합니다.…더보기
못 듣고 말 못하고 그래서 깨닫지 못함을 총칭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도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다에 속한 갈릴래아와 이방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하여 호수 남쪽은 유다, 저쪽은 이방인 지역에 속하는데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입니다. 그 지명이 바로 티로, 시돈, 데카폴리스가 그런 이방 지역 도시죠.
마르코 복음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점점 대상이 좁은 대상에서 넓게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상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제자들에게로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더 광범하게 전해집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 구원의 역사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역적인 배경을 통해 알려줍니다.
오늘 그 가운데 이방 지역 주민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중복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곳곳이 막히고 가리워져 있는 세상, 참된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인간의 고통을 그가 겪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을 독특하게 고치시죠.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시고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모습. 이런 방법은 주님이 사용하시기에는 좀 많이 지저분하다 할 수 있지요. ‘침을 뱉는다.’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성경의 맥락에서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 10,34) 예수님을 극도로 모욕하기 위한 침뱉음입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마르 14,65)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마르 15,19) 수난 이야기에 예수님이 침뱉음을 겪으신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가장 침뱉음 당하고 모욕 겪은 분은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증언합니다. 바로 ‘예수님’ 그분이시다!! 주님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말 못하는 내적 생명이 사라진 영혼을 보면서 당신이 어떻게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겪으셔서 이 어둠의 땅을 밝히시고 살리고 회복할 것인가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린 입이 열 개라도 억울하다는 소리 할 수 없게 됩니다. 살다보며 억울할 때 있지만 주님 앞에서는 못하는 것이죠. 인간이 토해낼 수 있는 모든 악이 다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갑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해서 가까이 갈수록 더욱 서로 찔러댑니다. 인간 세상의 타락한 모습이 그렇단 것이죠.
그런데 죄없는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로부터 침뱉음 당하셔서 살려내고 고쳐내신 것이죠. 오늘 복음은 그 주님 사랑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주님이 침을 바르시고 만지십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게 되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고치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는 것, 이것은 하늘로부터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 탄식하셨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은혜를 구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에파타’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열려져라’, 곧 수동형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는 것이죠. 하느님이 여셔야지 내가 여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문 꼭 닫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갇혀본 적이 있으시면 알죠. 바깥에서 닫혀 못 들어간 적 있지만 안에서 갇혀본 적 있다면 알게 됩니다. 갇혀있는 나를 바깥에서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답답할 때,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곧 열려질 때까지! 그렇게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방인들의 땅에서 귀먼 자의 열림과 혀를 풀어짐을 목격하게 하셔서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열려질 때까지, 에파타의 말씀이 들릴 때까지! 우리가 끝까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더보기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을 떠나 티로, 현재 시리아 지역으로 가십니다. 거쳐온 겐네사렛처럼 잘 사는 지역입니다. 이때 여인이 하나가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입니다. 그냥 마귀가 아니라 더러운 영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데 이 더럽다는 표현이 항상 사람을 괴롭히는 영의 수식어로 쓰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무엇을 더럽다하셨나요? 들어가는 것,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하셨습니다. 씻지 않은 손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빵을 먹고 행동한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손이 더러워지니까(중동 지역은 수저나 포크가 아니라 손으로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빵 부스러기로 손을 닦습니다. 손 닦은 부스러기는 상 아래 마구 버렸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의 새끼’들이 주워 먹습니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굉장히 험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라고 표현한 것은 실은 너무 순한 표현입니다. 정확히는 ‘개의 새끼’입니다.
이 복음에 여인의 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는 자기 딸의 고통을 끌어안고 나옵니다. 티로 지방, 시리아 페니키아출신인 이 여인은 콧대높은 일종의 귀족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적 고민 다 있다는 것이죠. 그녀의 아픔은 딸입니다. 온갖 기대를 다 걸고 키워냈지만 더러운 영에 들려있습니다. 어머니에겐 방법이 없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와서 엎드립니다. ‘엎드린다’ 이것은 예배한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의 냉정한 말씀이죠. 자녀들 곧 유다인들이 먼저 빵을 먹어야 한데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빵 먹다가 생긴 정결 논쟁에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싸늘한 말씀에 응수합니다. 강아지도 부스러기 먹을 자격 있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는 음을 먹고 손을 씻고 버린 그 부스러기란 말이죠. 그리고 여인은 개보다 더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게 되시는 것이죠. 처절한 상황 때문에 이 여인이 이렇게 낮추어진 것일까요. 이 여인은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 병행 대목에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죠.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상대를 주님이라고 인정할 때만 이렇게 자신이 낮아져도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것이죠.
주님이시니 그 앞에 자존심이 어디 있나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딸아이 문제로 인해 나온 이 여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누구의 문제였을까요? 딸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어머니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치유가 유다인의 문제를 고발할 내용이라면 이것은 이방인의 땅의 어두운 상태를 고발합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막힌 담을 허무신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신 것이죠. 손을 씻은 빵부스러기 먹었다면 그 강아지도 더러워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엎드려 바친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럽지 않다. 주님 앞에 엎드리면 다 정결해진다.’ 그래서 정결논쟁 다음에 이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 부분만 딱 떼어놓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게 되면 여인의 믿음, 겸손, 끈질김 정도가 보이지만 전체 맥락 안에서 보면 주님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가 보입니다.
본래 우리는 청정무구한 존재입니다. 비록 온갖 때가 묻고 죄에 물들었어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원래의 그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것을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하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합니다. 존귀한 존재인 나, 인간-그렇게 존귀하게 대하고 있는지요.…더보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3)
입맛 까다로운 사람, 대개 성격도 유난합니다. 가리는 것이 많다는 것은 요새 말로 까칠하다, 도도하다 유난스럽다 그럽니다. 뭐도 안먹고 뭐는 못먹고, 툭하면 간이 안 맞는다 밥에 찰기가 없다는 둥하는 사람은 일처리하거나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변덕스럽고 별나다는 것이 대체로 경험상 맞습니다. 깨작깨작 밥알 세며 먹으면 복달아난다고 타박하셨던 어른들 말씀이 그냥 생긴 것 아니죠. 복스럽게 밥먹는 사람치고 두 마음 가진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편식하지 않는 것이 영양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골고루 감사하면서 먹음으로서 우리는 원만한 삶을 위한 준비를 매일 세 번씩 훈련을 하는 것이죠. 준대로 맛있게 깨끗이 밥 한공기 뚝딱 해치우는 이라면 일단 기본 점수 주고 믿어도 좋지 않을까요.
유다인들은 개인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입맛이 길들여졌습니다. 레위기의 온갖 규정에 정한 음식-섭취 가능한 것, 부정한 음식-피해야 하는 금기 음식에 대한 까다로운 지침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리는 게 많다보니 그들은 까다로운 사람, 같이 있기에 불편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또 저러니 안된다’며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먹을 것이 별로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음식의 정함과 부정함에 자신의 정함과 부정함을 결부시켰습니다. 깨끗한 음식 먹으면 나는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끗하려면 가려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살아도 좋은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관습적 생각과 풍토에 대해 일축하시죠. ‘야, 먹는 것 가지고 까탈부리지 말라.’ 음식은 그저 소화되면 그뿐이라는 것이에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먹고 하는 짓이 문제라는 것이죠. 모든 음식은 깨끗하건만 그런데 그걸 먹고 하는 짓거리,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지적하십니다.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 이 모든 것이 먹고 한 짓이라는 것이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 것은 먹고 하는 짓에서 비롯됩니다.
저주하는 이의 입김은 독성이 엄청나답니다. 엘마 게이츠 박사는 호흡할 때 나뿜는 입김을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내뿜는 입김을 차가운 유리관에 모아 식힌 침전물은 사람의 감정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네요. 마음이 평온할 때의 입김은 무색, 화가 났을 때는 고동색 슬퍼할 때는 회색, 괴로워 할때는 담홍색으로 차이가 난답니다. 그중 화가 났을 때의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만, 쥐는 버둥거리다가 죽어버렸데요.
천년의 보물 석굴암이 훼손되는 원인이 인간이 내뿜는 그 탄산과 거기 섞인 불순물들이 그 단단단 화강암을 부식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담겨 있다가 나온 것이 우리를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은 그냥 경고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암물질, 해되는 먹거리는 피하면서 정작 발암물질, 독성물질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젖소가 물을 먹으면 우유, 살모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그런 말이죠. 같은 물인데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나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반응과 삶이 나옵니다. 아웃풋은 인풋이 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가공되고 수용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나의 반응능력 내적인 가공능력의 수준을 높이면 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벗어나는 것도 우리의 반응에 달려있습니다. 누가 험담해도 허허 그렇구나 웃고 넘기면 그만, 그런데 만일 발끈해서 성질 부리면 벌써 마음에서 독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이 바깥을 향해 그 놈을 상하게 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상하게 합니다. 다 좋게 생각하는 것도 습관 그리고 다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도 버릇입니다.… 더보기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13)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악한 죄인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세리, 윤리적으로 불순한 창녀도 다 품으셨지요. 그러나 한 부류만의 예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들에게만은 냉정하시고 때로는 혹독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 겉꾸미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들이 세리와 창녀와 다른 죄인들보다 더 문제가 큰 것일까요? 겉꾸밈이 뭐 그리 큰 죄일까요? 결론적으로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식하는 것이 겉꾸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허세나 넘길만한 위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속이는 불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겉꾸밈은 신앙의 암초같은 것이어서 하느님을 향한 삶을 전복시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을 본받지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자주 경고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모습, 증세가 나옵니다. 우선 눈치가 늘어납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이의 시선을 중대하게 의식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하느님 앞에 순전한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것이 결국 중요해질 수 밖에 없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왜 손 안닦고 음식을 먹느냐는 항의에 대해 맞서신 주님의 결론은 그래서 ‘너희들 말이야, 손만 닦지 말고 마음도 좀 닦지’ 그런 뉘앙스인 것이죠. 일상에서 손만 잘 닦아도 많은 질병이 예방된다죠. 그런데 마음 닦으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유리창은 한 면만 닦아서는 안됩니다. 양쪽을 다 닦아야죠. 안에만 아니라 바깥도 잘 닦아야 투명함을 유지합니다. 내면과 외면이 다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삶이고 영성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외적으론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대로 십일조,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관리되지 않으니 정당하게 보이는 외적 행동마저 결국 겉꾸밈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되어 갑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내면을 어떻게 동일하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죠. 기도는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아는데 적당한 행동 안나오면 욕먹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는 참 잘해’,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입니다. 한쪽 날개로는 못나는 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요.
바리사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결국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식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를 하느님이 쳐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느님의 현존을 시시때때로 상기할 때 약점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을 보통 현존연습이라고 합니다. coram deo(코람 데오)-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순간순간, 떠올리고 주님이 나의 최고의 관객임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 이것이 신앙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야구선수는 없습니다. 관객없는 배우는 힘이 빠집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 덕분에 홈런이 의미가 있죠. 공연을 보는 이가 있어 그 드라마가 감동을 일으키죠. 그런데 우리 삶의 경기와 우리 삶의 드라마에서 나를 열렬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그 관객이 주님이심을 알 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예민함이 대충 살고 싶은 욕구를 이겨낼 수 있게 만듭니다. 좋고 쉬운 것만 하고픈 적당히 살고싶은 그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완주라는 고단함을 받아들음은 주님이 지켜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관객,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 지켜보심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임을 알 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갈 것이죠.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3-56)
풍랑을 잠재우신 후 예수님은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이 제자들을 예수님이 제자들을 벳사이다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마르 6,45)
벳사이다가 목적지였는데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가고자 했던 벳사이다는 안갔느냐? 가긴 갑니다. 8장, 벳사이다에서의 맹인의 치유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벳사이다 가는 길에 겐네사렛을 들렀던 것이죠. 겐네사렛 지역은 이방인 땅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살인적인 햇볕이 녹아내릴 듯 내리쪼이는 유다 광야 그 가운데 유일하게 풍성한 곳, 겐네사렛입니다. 사계절 과일이 넘치고 물산이 풍부한 그래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이곳에는 이방종교가 넘실거리는 곳이기에, 유다인 입장에서는 이곳은 부정한 땅이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여기에 배를 대도록 하셨을까? 이것이 당시 정황을 알면 참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유다인에게 저주와 경멸의 대상인 이 곳, 죄악으로 해가 뜨고 지는 이곳 사람들이 한눈에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호수 건너편 유다인의 땅에서 보였던 반응과 절묘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알아보아야할 것 같은 이들은 몰라보고 몰라볼 것 같던 사람들은 알아봅니다. 호수를 건너면서 풍랑이 일어나자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쳤던 이들은 다름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상 주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겐네사렛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알아본 겐네사렛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를 데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을 고을 촌락마다 예수님 들어가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문장이지만 이런 문장은 복음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겐네사렛 사람들은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병자들을 데려오고 손을 대달라고 부탁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문장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고치시고 손을 대시고 일으키시고 마귀를 쫓으시는데 여기서는 겐네사렛 주민들이 주체가 됩니다. 그들이 열심히 예수님 앞에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겐네사렛 저것들, 죄인들이야. 저것들 믿을 수 없는 이들이야.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과거에 어떠했는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무시와 폄하를 당하던 겐네사렛 사람들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겐네사렛은 부유했지만 인생의 본질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똑같이 눈물이 있고 똑같이 애끓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곳 겐네사렛을 그냥 피해가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구할 자 구하시고 나서야 그 후에 벳사이다로 가셨습니다. 겐네사렛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직장이 학교가 실은 죄다 겐네사렛입니다. 눈물짓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래서 나의 따스한 손길, 알아주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겐네사렛, 그곳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다면 벳사이다로 가는 길을 늦추어서 거기로 돌아갈 밖에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오늘 복음 속에 담겨진 아프고 눈물짓는 이를 향한 그 마음을 발견하는 이는 그렇게 가던 길을 멈추게 되는 법이겠지요. 昢凉 神父… 더보기
마르코 복음의 1,21-39절까지를 보통 ‘카파르나움의 하루’라고 이름 붙여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지내셨던 어느 하루의 일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이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서자 마자 할 일이 다시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던 집을 찾으시고, 해가 저물자 다시 많은 이들이 몰려 옵니다. 늦게까지 동분서주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쉬신 것이 아니라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복음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강도로 일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지 않았더라도 틀림없이 과로사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분주하게.
어떻게 보면 주님의 생애 전체가 이런 날들의 반복이었을 것입니다. 문전성시를 이룬 사람들, 하셔야 할 많은 일들, 그리고 틈을 내어 기도하시는 시간. 주님께는 빈손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빈손을 채워주시고자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습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자리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분주하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에 지쳐 피곤하기도 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루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날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 무미건조한 날, 매일매일 반복되는 듯 보이는 날,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늘 그것을 기쁘게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가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이고 관건입니다.
영원을 잘 사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아니요.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 뿐입니다. 그저 바로 지금 뿐입니다.
불교의 수행법 중에 ‘다만 할 뿐’의 수행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밥먹을 때는 밥먹을 뿐, 공부할 때는 공부할 뿐, 쉴 때는 쉴 뿐입니다. 일상을 그렇게 차곡차곡 만들어 가는 것이 해탈의 길, 완성의 연습이란 것이죠. 그런데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수행이 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해본 이는 압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곳에 있기도 합니다. 몸만 여기에 있고 생각과 마음과 지향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죠. 온전히 한 순간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니 그런 갈라진 상태는 늘 허전함을 일으키곤 하죠.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바로 지금 하는 일에만, 바로 지금 있는 여기에만 머문다면 예수님이 하루처럼 내 하루도 조금은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다른 곳에 이미 가있는 마음을 다시 붙들어 여기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지금 하는 이 일이 지금 있는 이 곳의 소중함과 의미를 완전히 보듬어 갈 수 있게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
살림하는 사람이 매일 마사지샵 네일샵 갑니다. 피부는 매끈하고 손톱은 아름답지만 집안은 엉망입니다. 애들은 꼬질꼬질 냉장고에 열어보면 상한 음식이 가득합니다. 구석구석 먼지가 굴러다닙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집 아이들 안타깝다며 혀를 찹니다. 또 출근하는 사람이 자기 취미와 여가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업무는 뒷전입니다. 처리할 일은 쌓이고 직장에서의 관계는 틀어집니다. 그런 가장을 둔 집은 걱정이 태산. 사람들은 그 집 살아가는 꼴이 영 아니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는 중심을 잡아야 하죠. 아빠는 그런 것이고 엄마는 그런 것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지키는 위대한 그 일을 위해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때로는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그 일을 해내는 것이죠. 멋진 아빠가 아니라 일하느라고 지친 아빠가 진짜배기이고 손이 고운 엄마가 아니라 거친 손으로 돌보는 엄마가 진짜입니다. 일하느라 터지고 갈라진 손이 섬섬옥수 곱디고운 손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방에서 몰려든 이들, 그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이들을 향한 아픔을 느낍니다.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움직이시죠. 오고가는 이들에 치여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움직이십니다. 식구들 죄다 밥먹이고 치우고 나면 찬밥 한덩이 먹을 시간 없던 그 옛날 어미의 처지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엄마 없는 가족들 같았기에 매만지고 격려하고 손을 얹으시고 쉴틈도 없이 돌보시는 것이죠. 엄마가 필요한 것처럼 목자가, 착한 목자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새신부 때 김수환 추기경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추기경님께서 물으셨었죠. ‘그래, 새 신부들 이제 서품 받았으니 우리 교회에 감사할 것이 많겠지? 뭘 감사하는지 말해보게.’ 동기 신부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신자들 기도하고 복음을 살고자 애쓰는 것에 감사하고, 본당 일에 헌신적 봉사에 감사하고, 신부 수녀들을 그래도 존경해주는 것에도 감사하고....’ 여러 감사할 일이 줄이어 거론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던 추기경님이 ‘그래,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가보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신자들이 너무 열심하지는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해.’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열심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니. 그때는 2000년대 초반이라 우리 교구의 외적 규모가 신자 100만 이상, 본당 200여개 이던 시절. 추기경님이 그러시더군요. ‘평균 한 본당에 신자가 5,000명이라네. 각 본당에 신부는 하나나 둘이 파견되지 않나. 그런데 그 신자들 모두가 빠짐없이 주일 미사에 나온다 생각해보게. 지금 주일 미사 3-4대 드리는 것으론 어림도 없겠지. 두 배로 늘려야 할꺼야. 그 신자들이 꼬박 고해성사 본다면 아마 고해실에서 빠져나올 겨를이 없고 주일학교는 미어터지고 성사 집전 만으로도 신부들은 과로사할 걸세. 그러니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냉담하는 것도 어찌보면 다행아닌가.’ 그렇습니다. 만일 모든 신자들이 그 정도의 열심을 보인다면 저는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장로교로 옮기고 싶을지 모르죠. 일에 치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그 말씀은 아픈 말씀이었습니다. 목자가 돌보지 못한 빈구석이 너무 많은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면서 방치된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새신부들에게 분발하라 말씀하신 것이죠.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니 주님은 더 이상 쉬실 수 없었습니다. 외딴 곳까지 몰려온 이들을 보니 무엇인가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 안타까움은 예수님을 움직인 동력이었습니다.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지금은 ‘목자 없는 양’이 문제가 되지만 언젠가는 ‘양떼 없는 목자’가 되지 않을지. 하느님의 백성을 향해 느끼신 안타까움은 모든 피곤함을 이겨냅니다.…더보기
오늘 지내는 봉헌 축일은 예수님 탄생 후 40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날 일 년간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본당에서는 제대 앞에 초를 가득 대개 상자 째 잔뜩 쌓아두고 축복합니다. 그거 아시나요? 원래 우리가 기도에 사용할 성물을 축복할 때 통상 초는 축복하지 않습니다. 성상이나 묵주, 성경은 축복합니다. 이런 것들은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초는 불을 켜고 사용하는지라 태워 없어지는 것이기에 축복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 모르는 신자분들이 초를 들고 와서 ‘축복해주세요’하면 굳이 설명하기도 그래서 축복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죠.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오늘 축일에는 기도용 초를 공연히 축복함으로써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봉헌이란 하느님께 바쳐서 그분의 뜻대로 사용되고 결국 없어지는 것이다-뭐 그런 의미 말입니다.
또 이날을 기점으로 앞뒤 날에 많은 수도회에서는 수도자들의 서원식이 있습니다. 사제 서품식도 열립니다. 어제는 우리 교구 서품식이 열렸습니다. 저는 신학 과정이 6년 반이던 시절이라 김대건 신부님 대축일인 한 여름에 서품되었죠. 무지하게 덥고 습했습니다. 이후 7년 과정으로 변경되면서 2월에 서품식이 열립니다. 이번에는 춥기가 이를데 없죠. 그래서일까요? 농담처럼 한 여름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다혈질이 많고 한 겨울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냉혈한이 많다는 농담이 있을 지경입니다. 물론 저처럼 ^^ 냉온탕을 오고가는 변덕질도 있습니다만.
서품미사를 드리며 드리면서 늘 그렇지만 어제는 더욱 마음이 벅차고 기쁘면서도 뭔지 모를 안타까움이랄까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신학교에 와서 만났을 때 4학년이던 아직 뽀시래기같던 친구들이 부제가 되어 뭐한다고 신학교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서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솔직히 ‘와 허세 쩐다’였습니다. 사실 부제는 교회 안에 별 권한도 없고 여전히 애송이 취급받곤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그 친구들이 이제는 제대 앞에 엎드려 세상 안에 죽고 주님 안에 살겠다고 하니 솔직히 죽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그 장한 마음과 그동안 겪었을 온갖 일들이 얼마나 스쳐갔을까요? 앞으로 살 날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실 기쁨이 여간하지 않겠지만 또 주님이 지어주실 십자가도 너끈히 지고 가기에는 힘에 부칠 때가 많을 터이니 말입니다. 어느 본당에서는 함께 사는 신부님의 시집살이가 호되어서 눈물 깨나 흘릴 일도 있을 것이고 하느라고 열심히 하는데 열매가 없어서 허탈할 날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쩔쩔매기도 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자 싶다가도 온갖 유혹들이 가만히 나두지 않는 연약한 자신에 절망하기도 하겠지요. 그런 온갖 생각이 서품식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새신부님들, 부디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그대들의 삶을 봉헌하시길, 그리고 주님께서 자비로이 이들을 받아주시기를.
다시 봉헌 축일, 하느님께 바칩니다. 가톨릭 성가 221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다시는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이 축일에 봉헌된 초가 말끔히 다 태워져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든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자기 생을 다 바칠 수 있도록 그렇게. 昢凉 神父…더보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셔서 양성과정을 거칩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았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치유하실 때 사람들의 믿음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기초적인 교육이 끝났고 이제 세상을 향해 뛰어들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셨어요. ‘너희들 할 수 있어. 너희는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야. 지켜 본 것, 배운 것을 가지고 활용하면 된다’고 격려하신 것이죠. 그래서 품안에 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각 고을로 보내시는 것이죠.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규칙이 있습니다. 우선 빈손으로 파견하십니다. 지팡이 달랑 하나, 이것은 일종의 호신 수단이었죠. 허리 아파서 필요한 지팡이가 아니라 거친 길을 가는데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야생동물 달려들면 내치기 위한 지팡이! ‘그래 그것은 필요하지. 그것은 가져가도 좋아.’
그런데 빵, 여행 보따리 그리고 전대에 돈 같은 것은 필요 없답니다. 한솥 도시락 싸들고 샘소나이트 트렁크에 필요한 것 자꾸 챙겨가고 신용한도 무제한 카드 챙겨가고 이런 것은 안된답니다. 신발은 걷는 것이 주로 이동수단이었으니까 괜찮지만 여벌옷 바리바리 싸가는 것은 안됩니다. 왜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단촐해야 하기에. 짐에 눌려서 일을 그르치면 안됩니다. 하여 최대한 간소하게! 지금 왜 파견되는 것인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하러 그러니 복음 받들고 주님 모시고 가야합니다.
준비는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위험한 가능성에 대비해야죠. 그런데 준비하다 정작 일을 시작도 못해요. 위험한 것 없나 살피다가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못할 수 있죠. 진짜 능력은 현지 적응 능력이거든요. 민첩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면 되죠. 선교지 가서 국에 밥에 일식 오찬 차려놓고 먹을 겨를이 어디 있어요. 그곳에 가면 그곳에서 필요한 것 조달해가면서 살아야죠.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때 작은 부족인 몽골이 세계 제패하는 비법은 신속성이었어요. 요새 말로 육포 같은 것 씹으면서 동에 서에 번쩍한 것이죠.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때 그 이전의 부대와 달리 엄청나게 신속하게 부대를 이동시켰다죠. 병조림을 발명해서 이동 중에 식사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둘씩 보내십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것이죠. 외톨이 신앙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귀찮아요.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하느님 섬김은 안됩니다. 주님은 둘씩 혹 셋씩 짝으로 보내서 제자들이 서로를 지지해주기를 원하셨죠. 나를 부축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대비책은 나와 뜻을 같이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이며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 ‘함께’입니다. 외골수는 위험하고 반복음적입니다.
이렇게 단촐하게 떠났더니만 회개의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마귀가 굴복되었고 고통중의 병자들이 치유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같은 결과가 폭발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실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었잖아요. 그럴 만한 결과가 일어나기엔 영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당부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했더니 나약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아가니 엄청 불편했으나 이 불편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불편이었고 이 불편을 감수하니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으로 인해 불편함이 있습니까? 마냥 편안합니까? 주님이 지어주신 불편은 세상 눈으로는 바보짓이지만 하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나의 자아와 세상이 선택하고 유혹하는 안락함은 편안하게 만들지만 결실을 주지 못하죠.믿음은 세상의 안락과 주님의 불편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인가? 답은 분명합니다.…더보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예수님 태를 묻은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생애 대부분은 나자렛에서 자라셨습니다. 나자렛은 주님의 고향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주로 활동하신 곳은 카파르나훔, 위로의 마을이라는 이름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시다가 약 30여분 떨어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허름한 동네인 나자렛, 그 동네 이름은 구약의 나지르인과 같은 어원입니다. 구별된 동네란 뜻입니다.
복음에 보면 전에도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마르 3,20-21에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 전합니다. 곧 1차 방문때 예수님은 재미를 못보셨던 것이죠. 미쳤다고 하고 붙들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차 방문 때는 제자들 거느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환호는커녕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두고 놀라긴 했는데 ‘목수가 아니야’ 이 말인 즉,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어도 뭐라 해야 하나요. ‘요셉의 아들’, 가부장적 사회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앞에 붙일 때는 홀어머니, 과부 아들 곧 애비없는 자식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홀대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목수 아니냐.’ 무시하는 표현이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옛날 찌질이 아냐. 이런 식인 것이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가족의 상황과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예수님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배척과 불신앙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이런 그룹 있을 수 있단 말이죠. 난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나름대로 그분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알고 있나요? 그 안에 불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하느님 섬김다’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안에 불신앙이 도모될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실은 잘 믿고 섬기지 못하고 있구나-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관계적 측면에서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타박합니다. ‘내가 뭘 안해 줘. 월급 꼬박 바치고 술주정 안하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고 이래.’ 그런데 남편 생각과 달리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부란 그것이면 다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럽니다. ‘여보. 오늘 맛있는 피자 먹고 싶다.’ 콧소리를 살짝 섞으면서 그럽니다. 그럼 남자는 얼른 네이버 검색합니다. ‘돈암동 피자 맛집’- 그리고 열심히 찾아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여기가 맛있는 피자집이래. 거기 가서 먹어.’ 그걸 뭐라 그럽니까. ‘천치’라고 그럽니다. 아내가 피자 먹고 싶다는 것일까요? 어디 같이 바람도 쐬고 시간 보내고 싶단 말이지, 피자 쪼가리 먹고 싶어 안달났다는 것 아니거든요.
예수님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으로 가슴으로는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단 말이죠. 이것이 신앙인의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관습적으로 믿고있는 우리 내면의 현실이 과연 우리한테 없나요? 질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를 알고 있었지만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이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고는 있지만 관습적으로만 그분을 아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호수를 건너온 예수님 앞에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엎드립니다. 야이로라는 말뜻이 ‘내가 살리리라 깨우친다, 빛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딸만은 절망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다교가 부딪친 시대적 한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죠. 이름은 ‘살리리라’라는 데 정작 자기 딸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딸도 살리지 못하는 절망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유다 공동체에는 이제 희망이 없다! 율법에는 희망이 없다! 그 시대를 오히려 더 숨막히게 했죠. 하느님에 대한 소식과 가르침이 백성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되어 오히려 더 갑갑하게 하고 있었죠. 이것이 야이로의 딸의 모습이죠.
심지어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부고를 알립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시며 그 집을 향해 나갑니다. 그 집에 도착하니 소란스러운 통곡이 펼쳐집니다. 당시 유다 종교의 정확한 상황이고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마치 열두 해 앓던 여인같았고 죽어가는 야이로딸 같았죠. 울고 통곡할 수 밖에 없는 모습. 그런데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복음에서 ‘잔다’는 이 표현은 전형적 부활의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숨끊어진 물리적 죽음만 보고 울고 통곡하지만 ‘조용히 해라. 자고 있다. 그러니까 곧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니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손대시며 일어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 치를 때 주님께서 그 관에 손을 대시죠. 젊은이여 일어나라.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그 아들을 돌려 줍니다. 주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키시면 일어납니다. 손을 잡고 일으키시면서 탈리타 쿰. 무슨 뜻이라구요. 이것은 아침에 엄마가 조용히 깨우는 소리입니다. ‘아가, 이제 일어나야지.’ 그런데 한국 엄마들은 어떻게 깨우죠? ‘이놈의 새끼. 아직도 누워있어.’ 이불 확 제끼면서‘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자빠져 있어.’ 애들이 더 미치죠. 이제부터는 소년은 탈리니까 ‘탈리 쿰’, 딸이면 ‘탈리타 쿰’ 이러고 깨우시기 바랍니다. .
이 말은 히브리어도 아니고 그리스말도 아니고 아람어입니다. 이 자리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라오게 하신 이유가 있죠. 믿음의 자녀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였던 것입니다. 지금 절망스럽지만 아무 방법 안보이지만 ‘탈리타 쿰.’ 얘야. 일어나라!! 바깥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주님을 오히려 비웃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뭐하려고 불렀어.’ 별별 비난과 악담이 다 나왔어요. 악플 댓글 막 달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소리 다 뒤로 하고 소녀에게. 이미 죽었는데 ‘소녀야, 일어나라.’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가진 자만 이야기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든 일 부딪칠 때마다 ‘라파엘, 탈리 쿰.’ ‘카타리나, 탈리타 쿰.’ 일어나라. 주님이 일으키신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르 5,13)
‘군대’라는 이름의 마귀, 로마 군대 편제로 보면 6,000-10,000명 정도 되는 마귀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 안에 그 뒤에 어마어마한 악이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은 게라사인들이 사는 데카폴리스(열 개의 도시)입니다. 더러운 영의 강력한 힘에 통제되어 있는 한 사람, 그는 무덤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역한 이들의 최종적 결론인 무덤, 곧 그는 이미 죽은 자처럼 살았음에도 쇠사슬도 족쇄도 그를 묶어 둘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파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로마 영토인 데카폴리스의 파멸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비극적 상황에는 군대 마귀, 곧 어마어마한 배후 세력이 있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주하는 이 한 사람의 광기 뒤에 데카폴리스의 죄악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고작 무덤으로 내몰고 격리하고 묶어두는 일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광기에는 세상은 책임은 없나요? 그를 사슬로 묶어놓아도 통제불능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자해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 시대에도 봅니다. 장애가 있다고 질병이 있다고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그 많은 격리의 체계들 말입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영역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광기에 붙잡힌 이의 저항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지 말라고 강변합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마귀의 청도 들어주셨는데 결과는 돼지 떼 속으로 군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온전하게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온전해진 한 사람으로 인한 기쁨은 간데 없고 돼지 이천 마리, 경제적인 손실이 엄청난 것에 마을 사람들은 집중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높아집니다. 한 사람의 삶이 온전해진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경제 논리 앞에는 의미도 가치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을에 들어오는 장애인 학교는 집값을 폭락시킨다고 결사 반대합니다. 신앙인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님비는 그저 현상이 아니라 뿌리깊은 죄악의 표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저 관심의 초점은 내 재산에 손해가 있느냐 아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힘을 숭배하던 이방인 지역, 로마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데카폴리스를 장악하고 있던 군대 마귀가 가진 유혹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유익에만 정신이 팔려 이웃의 누군가가 사슬에 묶여 있어도, 무덤의 비참한 삶을 계속하고 있어도 누구도 눈길 하나 돌리지 않는 냉정한 이기심, 그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도 여전히 겪고 있지 않나요. 昢凉 神父…더보기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마르 1,21ㄴ-28)
공생애를 시작하는 처음 모습, 공생애 초반 모습에 예수님의 지력과 그분 삶의 웅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초라한 끝을 가끔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아무도 남지않은 그 모습. 쓸쓸한 죽음. 그러나 그분의 공생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감없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권력자를 호령하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대개 똑똑하면 감동이 없고 불덩이같은 열정이 있으면 지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다 갖추기 쉽지 않죠. 그러나 그분에게는 불붙은 논리가 있었습니다. 논리만의 차가움 안되고 불덩이의 저돌성만으로는 안됩니다. 불붙은 논리로 사람을 설득하고 감화력을 갖추어야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셨죠.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그 의미와 가치를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무조건 ‘믿으시오’가 아니라 지성이 동반되었다는 것입니다. 느낌을 중시하면서 뭔가 느껴야겠다 그러면 믿겠다-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만으로 신앙하면 이내 식어버립니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적용하는 것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가르치시고’,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말씀하시니 더러운 영이 쫓겨났죠. 그냥 꾸짖으셨습니다. 뭐 대단한 푸닥거리 안하셨습니다. 따귀 때리던지 팥을 던지던지 작두를 타던지-그런 방법은 예수님에게 걸맞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영과 아무 대화도 안나누셨고 입을 막으셨습니다. 더러운 영이 건방지게 이야기 할려고 하니 ‘쓸데없는 소리마, 조용히 해. 나가!’ 그분의 능력에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능력 없을수록 쇼맨쉽이 많지 않나요. 제자들도 후에 이를 본받아 ‘일어나 걸으라’, 단지 그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권위입니다. 잔소리하지 않고 하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기에. 이래 힘들고 저래 힘들고 단서가 많은 이런 사람은 실상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죠. 권위는 해결하는 능력이기에 그렇습니다. 원인을 모르는 사람 어디 있나요. ‘과거 상처로 힘드시군요. 마귀 들렸군요.’ 원인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성적 가르침을 통해 백성의 답답함을 해결해주었죠. 또 능력을 통해 더러운 영을 제압하셨죠.
우리 시대가 겪는 문제의 원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원인 분석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죠.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원인에 대해 파헤치고 분석하고 거기서 끝내는 것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 능력. 주님께서 그것을 주시고 우리가 해결할 것을 원하시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니라 그 입에 권위가 있어서 설득시키고 변화시키고 철과같은 인생을 다 녹이는 용광로같은 그런 삶, 괜찮지 않나요. 해결의 방안을 논리와 권위와 진심으로 내어놓는 제자가 우리의 모습이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 4,35-41)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주님을 깨웁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는 우리들의 인생을 또 교회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생을 함께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으로, 악마와 대적하신 광야로, 세례 받으신 요르단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부르신 티베리아 호수로,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빚으신 기적의 카나로, 눈부시게 변화되신 타볼산으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피땀으로 기도하신 게쎄마니로, 그리고 십자가 세워진 골고타로 향하는 여정은 진이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누구는 주님을 아주 생생하게 누구는 희미하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하나 낱낱이, 기억의 저편을 헤집으며 찾아냈습니다. 살면서 겪은 아픔과 고뇌도, 잊혀질 수 없는 상처와 슬픔 그리고 분노도, 눈부시게 빛났던 환희와 설레임도,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도 제자들 안에 오롯하게 타올랐습니다.
그 호수에서는 풍랑 속에 작은 배가 가라앉을듯 버티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죽을 듯이 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파도와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은요? 태연하게 그 배 고물에 주무시고 계십니다. 견디다 못한 제자들이 원망과 항의로 예수님을 깨웁니다. 풍랑은 이제 고요해집니다. 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파도 속에도 여전히 계셨습니다. 잔잔한 미풍과 찰랑이는 잔물결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럼요.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도 파도가 가라앉지 않아도 우리가 타고 가는 그 배에 주님께서 동승하심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을. 돌아가 다시 살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실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다시 배를 저어 폭풍의 호수를 향해 나아갑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0,1-9)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이스라엘 각지로 파견하실 때 당부의 말씀을 들려주시죠.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부모가 걱정 담긴 마음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아무튼 시댁 가풍에 잘 따라서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지어미 되라고 당부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혼수품을 챙겨서 혹여 시댁에 책이라도 잡히지 않도록 신경을 세세하게 쓰는 것이죠. 잘 준비해서 보내고 싶은 어미 아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 파견사의 핵심이 뭐냐고 한다면 ‘대책없이 가라’ 일 것 같습니다. 이리떼 가운데 양을 보낸다면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도 될까말까이건만. 그런데 예수님은 최소한의 준비도 갖추지 말고 가라는 것이죠. 돈주머니 지니지 말랍니다. 낯선 곳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선교 기금도 없고 카드도 없이 빈털터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행보따리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맛 까다로우니까 소고기 고추장 볶음 한통 넣고 파래섞인 김 한톳 담고 잔뜩 밑반찬 만들어서 짐 꾸리지 말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빈손으로 무방비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죠.
왜냐?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고도 하셨죠. 그러니까 빈손으로 무방비로 갔는데 쫄쫄 굶어가면서 복음을 전하란 것은 아니에요. 당당히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려주는 음식으로 먹는단 말이죠. 내가 주문한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명을 띠고 갔으면 뭘해야 합니까? 현지화가 중요하단 것이죠. 파견된 이들과 같이 호흡하고 함께 뒹굴고 느끼고 말이죠. 이것이 선교죠. 만일 잔뜩 싸들고 바리바리 이고지고 갔다면 그것은 선교를 간 것이 아니라 이주한 것이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하죠. 그곳에 갔으면 그곳에 맞춰 살줄 아는 유연성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이렇게 가볍게 떠나지만 꼭 가져가야할 것은 있습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빌어 줄 평화를 지니고 가야겠죠. 병자들을 고쳐줄 능력도 가지고 가야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해야하는 복음을 가슴에 품고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파견된 이에게 핵심은 그런 것입니다. 지녀야 할 것을 꼭 붙들고 주변적인 것들에는 좀 무심하게 살아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반대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이 지니지 말라는 것에는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수님이 지니라고 하신 것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지닐 것과 버릴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 가야할 방향은 분명해 집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사도 22,6-8)
당대의 상황으로 보자면 가장 탁월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확인합니다. 자신의 미래와 신념을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타르수스에서 예루살렘으로 다마스쿠스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체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미 부르시기 전에 그는 땅끝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는 학력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학벌. 가말리엘 문하에서 전통적 율법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아마 집안환경도 좋았겠지요. 사울에게는 차세대 지도자격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삶의 만족함을 주지 못하는 결핍이 있었습니다.
탁월하다는 이들일수록 그 안에 엄청난 허무감. 결핍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몰아가던 그 스스로가 그때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사울의 옛 삶이 왜 있었을까요? 그의 그 공허감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생은 하느님만이 채우셔야 하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열성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합입니다. 그의 엄격함이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해볼까 하다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결박하고 처벌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죠. 아니 예수님이 만나주신 것입니다. 빛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너무 강렬해서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요. 아마 인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만남이죠.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스러운 자를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는 이를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로운 사실은 바로 그 점입니다. 박해의 주도자를 만나주시고, 칼을 휘두른 자를 만나주셔서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잘해서 만나주시면 누가 만날 자격 있을까요. 찾고자 해서 만났다면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찾으려해 본 적도 없고 만나려 한 적도 없는데 찾아주시고 만나주신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사울은 밑바닥중의 밑바닥이었죠. 잘난 것만 있었나요. 흠있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칠삭둥이였습니다. 성격도 연약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까칠하기도 하고 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도리어 그 약함을 강하게 하신다는 기막힌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자를 들어 높이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이죠. 탁월하지 못하고 뛰어나지 못해도 그를 통해서 하느님이 영광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너무나 큰 절망감과 상처가 있었음에도 그 깨진 마음이 도리어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율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던 사울에서 신앙의 완전한 수호자, 바오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죠. 자격없는 자신도 박해하던 예수님이 만나주셨는데 도대체 누가 주님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 수 있느냐-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 4,3-8)
오늘 본문 읽는 순간 딱 답이 나옵니다. ‘옥토가 되자. 삼십배 육십배 백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전제를 내려 놓고 새로운 말씀으로 들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밭 되자 , 그러기 위해 땅을 갈아없자.’ 과연 그럴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밭은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밭이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밭 될 수 있나요. 오늘부터 밭이 결심해서 좋은 땅 되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밭은 원래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땅 되자, 결실을 맺자, 열매가 풍성해지자-는 결심은 복음이 아닙니다. 밭은 스스로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땅은 제아무리 기를 써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애초에는 불모의 땅이었는데 거기에 씨가 떨어집니다. 씨가 뿌려집니다. 이 씨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초점은 땅이 아니라 씨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씨가 결국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르 4,14) 그 말씀은 그리스도이시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이 절망의 땅, 도저히 열매 맺을 수 없는 이 땅에 예수님이 생명의 씨로 뿌려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한 알의 밀알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원래 그 땅은 저주받은 땅, 사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주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신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신 로고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생명의 씨로 뿌려지셔서 죽음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로 인해 거기서 삼십 배, 백 배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원래는 도무지 생명을 키워낼 수 없는 존재, 가시덤불이나 돌밭이었는데 하느님께서 그저 열매를 피워내시려고 이 거친 땅에 당신 말씀 아들을 씨앗을 보내신 것이셨단 말이죠. 그래서 이 구원의 은총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설레여서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선택될 수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씨앗에 담긴 생명이 이 척박한 내게 조건없이 뿌려졌는가를 기억하는 것, 이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1-35)
예수님이 빼곡하게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바깥에서 친어머니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냥 들으면 바깥에 기다리는 이들이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닌 것이라고 부인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참 냉정하기도하다 그런 느낌 들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출가한 삶이라 하더라도 피붙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패륜아이셨을까요? 복음의 이런 대목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가족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어린 시절 예수님의 성장을 다룬 복음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고 전합니다. 순종하는 아들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다시 등장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공적 직무를 수행합니다. 당연히 가족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요. 회한이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에게도 남겨진 가족들은 아픔이 아니셨을지 모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남겨질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는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에게도 가족은 아픈 가시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51-52)
주님은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겠노라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로 맺어진 가족들은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같은 신앙을 지닌 교우인 것만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족들로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면서 가족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교우, 신자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족입니다. 사제를 파더(father)라 부릅니다. 이호칭에 맞게 살고 있는가 뜨끔합니다. 못난 아버지도 있는 법이니. 하느님의 뜻을 살고자 하는 우리가 가족이기에 그래서 형제 자매라고 불리워집니다. 자식을 낳고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집 떠난 몸으로 떠돌이의 삶을 살지만 제게는 많은 가족이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제직을 수행한다면 정말 저는 아버지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나온 사목지의 내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잊고 있었군요. 목5동에서 어설픈 새신부를 맞아주었던 그분들, 교구가 분할되는 바람에 있는 듯 떠났던 행신1동, 또 공부를 계속하느라 일년 남짓 머물렀던 압구정 1동, 울고 웃으며 떠났던 양재동. 그리고 제일 오래 머물렀던 두 군데의 수도회. 내 가족들은 모두들 평안하신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3,22-30)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속에서 우리는 취사선택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무엇이 가치있는지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가리기가 날로 어려워집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가짜 뉴스’도 얼마나 많은지요. 비난과 험담, 흑색선전을 통해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입장을 공고화하고자 없는 사실도 만들고 그것을 진실인양 호도하는 정보전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파악하지 않고 무엇이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따라서 눈과 귀가 향하게 되면 우리는 균형을 잃고 ‘거짓’의 힘에 끌려갑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거짓의 수하가 될 수 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더욱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거짓이 난무한 당대의 상황을 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출처 모르는 괴소문이 돌더니만 오늘은 급기야 예수가 악령 들렸다고, 마귀들과 한편이라는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렸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짜 뉴스의 단골 희생자이셨던 것입니다. 악의적인 공세 앞에서 예수님의 해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믿고 싶은 이들에게 예수는 제거 대상일 뿐, 그분이 전한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거짓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줄기차게 불리워진 노래. 진실을 가리려는 음해는 노골적이고 강력했습니다. 영화 ‘1987’을 보면서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에 저항했던 시대를 생각했습니다. 거짓에 기생하여 이권을 챙기고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힘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역사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준엄하게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진리를 가리려는 이들은 하느님의 용서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싸우면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 1,14-20)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격적 구원역사에 착수하시는 일성입니다. 제일 먼저 시작하신 일이 제자를 선발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이후 사람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아담을 지으셔서 에덴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 심판을 견디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이라는 신앙의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모세를 불러 이집트 압제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릴 때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살 이유가 있을까?’ 자기 존재를 비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를 실망하여 어려울 때조차도 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언제나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나’밖에 없습니다.
실은 부르심 받은 제자들은 약했고 보잘것없고 무식하고 가난했습니다. 강한자만 쓰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유능함만이 하느님의 길은 아니라는 것이죠. 누구나 쓰임받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일꾼, 제자가 되는가?
우선 따라가는 사람, 그를 하느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준은 어찌보면 간단합니다.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필요한 일꾼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저 주님 따라가는 모방자가 일꾼이 됩니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자 배울 때 그런 교재가 있었어요. 한자를 점선으로 그려놓은 교재. 처음에는 그냥 따라 그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늘 천이 되고 따지가 되고. 따라하다 보면 한자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다 알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점선 따라가듯 주님 따라 한발자국, 한발자국 가다 보면 내 사명이 무엇인지 내 삶이 무엇인지 신앙의 깊이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독립적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의존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하셨죠. 우리 스스로가 열매맺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주님께 붙어있어야만, 의존해야만 결실이 있다는 것이죠. 믿는 자의 능력은 어디에 있느냐? 의존에 있습니다. 세상에 의존하는 이는 손가락질받지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는 영광을 입습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주님께서 앞서가시니 결실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따라가야 하느냐?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만큼만 가고 뜻대로 멈추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갔습니다. 그 앞에 하느님의 계약궤가 제일 먼저 앞서 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간 것이죠. 말씀과 약속,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한 만나가 그치지 않고 생수가 그치지 않고 용솟음 쳤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죠.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이기에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서지 않도록 그렇게 따라가는 제자이기를.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0-21)
너무 무리하지말라. 쉬엄쉬엄하라. 인생은 마라톤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천천히 앞으로 나가면 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 무리하면서 사셨습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양 질주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끼니를 드실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무리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식사도 거르시고 무리하셨습니다.
K2는 해발고도로 제일 높진 않지만 제일 험한 산이라고 합니다. 정상을 보여주는 일년 중 몇 차례, 그 순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등반해야 할 때가 있답니다. 무리하지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없답니다. 그렇게 때로는 자신의 한계 이상 과도하게 전심전력 다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무리하지 말라지만 사실 우리 삶은 무리로 가득 차있기도 합니다. 빚내서라도 집을 삽니다. 무리한 그 댓가를 치르면서 살게 되지요. 자녀교육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무리하지 말라, 하느님을 향해서는 지나치지 말라-는 그 말이 정답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절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할 때 통하지 않습니다.
과부가 봉헌한 두 렙톤은 그녀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다 바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무리한 것이죠. 예수님 그런데 그녀를 말리지 않고 칭찬하셨습니다. 무리한 봉헌인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무리한 추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것은 무리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어찌보면 비정상입니다. 외아들을 바치는 사랑.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죠. 사랑은 그렇게 과도해집니다. 주님께서 무리하신 이유는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다 하신 것이죠. 그래서 미쳤다는 오해까지 받으셨습니다. 누구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듣게 되는 평가인 것입니다. ‘미쳤나봐.’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하다고 하고 믿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것이 믿음의 길인 것이고, 비정상이라는 모욕감을 주고 조롱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평가로 신앙을 적당하게 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적당히 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간계입니다. 스스로가 ‘내가 지나치게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대충하라고 유혹하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무리함이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진짜 봉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라톤은 쉬엄쉬엄해서는 뛰지 못합니다. 남아있는 체력이 있다면 완주하지 못합니다. 마라톤은 무리하지 않고서는 도착할 수 없는 종목입니다. 심장이 터지게 근육이 다 끊어지게 하는 그 무리함이 피니시 라인을 딛게 하는 것입니다. 미친 놈, 정신나간 놈이 참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르 3,13-19)
예수님이 제자 열둘을 사도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홀로 모든 일을 다 감당하실 수 있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신 분이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사도를 세우셨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주님은 제자를 통해서 포스트 지저스, 예수님 이후 시대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떠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셨기에 그것을 준비해나가셨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주님의 일꾼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당대의 일꾼이 있고 세대의 일꾼이 있습니다. 당대의 일꾼은 자기 시대에만 일합니다. 세대의 일꾼은 자기 당대뿐 아니라 후손까지 계속 신앙의 성장과 하느님 나라 확장에 기여한 일꾼입니다. 둘다 쓰여졌지만 꽤 다른 셈입니다. 모세는 이를테면 자기 당대 40년만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후계자를 세워 가나안 정복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는 당대에만 일했어요. 후계자를 세우지 못해서 당대의 일꾼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이 계속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단절되게 할 것인가? 이 기준에 따라 그의 일이 계속되기도 하고 그쳐지기도 합니다. 사목자가 자기 임기에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임기가 다한 후에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에도 그의 사목이 계속될 수 있도록 사람을 세워야 하는 것이죠. 신앙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책무 존재 목적인 것이죠.
조상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이 후손에게 자녀들에게 전승되지 못하면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판관기 시대를 성경에서는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그 원인은 결국 판관이 다스릴 때는 믿음을 지키다가 판관이 물러나면 신앙과 도덕의 온갖 타락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것도 무려 열두 번 씩이나 단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나만 잘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내가 오래 기도하면 내 가족이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며 자녀들을 수수방관합니다. 마치 그것이 믿음있는 모양인양!! 아이들이 교회 안나오던 미사를 밥먹듯이 빼먹든 그냥 내버려 둡니다. ‘언젠가 깨달아서 돌아올 때가 있을 거야. 나도 그런 시절 있었어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아이가 학교 안가겠다 하면 학교 안보낼까요. 물을 끼얹어서라도 매를 들어서라도 깨워서 학교 보내죠. ‘너 커서 뭐가 될려고 학교 안가니.’
신앙의 습관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신앙의 자리도 어릴 적부터 조기 교육 너무 중요합니다. 다 커서 돌아오게 하려니 돌아오지 못합니다. 우리 세대로 기도가 끝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면 세대를 넘어서 계속해서 믿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믿음의 사람을 계속해서 세워야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위해서 사도들을 간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미래 세대를 키우고 가르치고 세워야 하는 것, 가장 중요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하고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사명 중의 사명입니다. 아이들을 깨우고 청소년들을 키우고 청년들을 길러내는 공동체,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됩니다. 가서 잠든 이들을 깨우십시오.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7-12)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목 중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에 관한 여러 신학적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소위 ‘메시아 비밀’에 대한 연구입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려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연구들입니다.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셔서 당신이 누구이신지 감추시려고 했으나 결국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고 맙니다. 그것도 특정 지역이 아니라 온 유다에 퍼져나갑니다.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갈릴래아는 유다의 변방 변두리였죠. 그런데 이방 지역에까지 예수의 소문이 퍼졌나갑니다. 당시 유다 사회 전체가 예수님의 출현과 활동으로 인해 떠들썩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중심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곳을 중심으로 만드셨습니다. 변방의 갈릴래아가 역사의 중심지 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시류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류에 역류하는 배포와 당당함 유행을 거슬러 중심을 내가 선 자리에 만드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역동적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원치 않는 소문이 나셨을까요.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곧 주님 자신이 소문날 수 밖에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본인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소문내는 사목이 있고 소문나는 사목이 있죠. 소문내는 사목은 목적이 소문에 있습니다. 어떻든 자기를 알리려하는 동기가 사목에 있는 것입니다. 명성에 대한 탐닉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하고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소문내는 것을 통해 얻으려는 다른 불순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요즘말로 하면 언론 플레이라고 합니다. 하는 일을 꾸며내고 뻥튀기 하는 것입니다. 소문낼 일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온 여력을 다 동원합니다. 그렇게 소문내는 일에 몰두하면 말로 일을 합니다. 말로 못할 것이 어디 있나요.
그러나 소문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소문내지 않지만 어쩔 수없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숨기려고 해도 알려집니다. 감춰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소문날 수밖에 없는 그런 거룩한 일, 위대한 일, 희생의 그 일을 다 하셨더니만 심겨진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되듯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려지기 위해서 애쓰는 인생이 되면 정말 피곤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선과 멸망의 길입니다. 마이크 안 잡아도 메아리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마이크 인생, 쇼하는 인생, 버하는 인생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메아리처럼 살면 편안합니다. 메아리는 산이 소리를 받아 울려주는 것이니까요.
실력없는 연주자는 자기 반주를 튀게 해서 전체 성가를 망치는 것을 봅니다. 좀 예전 광고이지만 ‘소리없이 강하다’ 그런 광고 카피가 있었죠. 그렇습니다. 요란한 꽹과리는 다 실제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더 크게 울부짖습니다. 소리 없어도 온 땅에 퍼져나가는 그런 우리가 되는 것, 허상의 삶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살면 메아리가 절로 울려 퍼지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마르 3,1-5)
안식일은 사랑하는 날로 세워졌습니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명기에는 그 거룩함을 위해 남종 여종 가축까지 다 쉬게 하라는 법을 내립니다. 노예에게도 혹독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날, 그러니 그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리듬은 나를 지키기 위해 너만 쉬는 것이 아니라 남도 쉬게 합니다. 다른 이를 쉬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날인 것이죠. 자기 중심의 엿새의 삶이 필요하다면 다른 하루는 사랑을 베푸는 날이죠. 사랑은 부메랑 같아서 베풀면 흡수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준만큼 내게 다시 되돌아오게 만듭니다.
노예의 반란이 어느 역사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망이 망소이의 난,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등등.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노예의 반란이 없습니다. 그들이 착한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안식일 법으로 주인이 원치 않아도 하루는 쉴 수 있는 제도가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칠일을 바라보면서 일하고 나면 시스템 상 쉬는 것이 보장됩니다. 사랑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시스템화한 것입니다. 감정에 맡기면 사랑은 자기 가족, 자기 집안 그 정도로만 국한되고 집중되지만 사랑이 시스템화되면 사랑의 폭이 넓어집니다. 칠일의 단 하루라도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 삶으로 할애될 때 도리어 자기의 삶을 지켜 나가는 역설을 알게 만듭니다.
손이 곱은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통해 그를 고쳐주시니 마음속의 불만과 억한 심정이 사라집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해소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공격성이 사회를 향해 폭발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타인 중심으로 살아갔더니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아이 많은 부모에게는 우울증이 없답니다. 다만 정신도 없긴 하답니다. 사랑의 대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계속 사랑해주고 돌보아주어야 하기에 자기 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 하나 둘만 키우니까 다 키우고 자녀가 다 성장하면 사랑이 멈추게 되고 허탈함이 밀려오게 됩니다. 소위 ‘빈 둥지 증후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하루의 시간을 비워놓을 때 우리가 다른 일들을 감당하는 힘을 부어 주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그침입니다. 안식은 그침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쉼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성취를 그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척도는 많이 이루어내는 것으로 평가합니다만, 우리 삶에 그침이 있어야 쉼이 있게 되고 그 그침에는 염려와 근심도 포함됩니다. 염려와 근심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이 주도하심을 알면 그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죠.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느님인 내가 해줄게.’ 내가 모든 것을 하고자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고 그렇게 그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손을 채워주십니다. 부여잡음을 내려놓는 믿음으로 살면 하느님께서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3-28)
안식일 논쟁에 관련된 복음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선명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죠. 내일 복음도 이에 관련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인 주일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지만 사람의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사회적으로, 생래적으로 우리는 7일 주기의 리듬을 살도록 되어있고 인간의 삶에 7일 주기의 흐름이 긍정적입니다. 20세기 유다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J. 헤셸 (Abraham Joshua Heschel)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나치가 막 권력을 잡아가던 1933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헤브루 유니온 대학에서 5년간, 이후 죽을 때까지 뉴욕 유대 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친 인물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도 반대하여 '베트남을 생각하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임' 을 설립했고, 시민권 운동도 적극적으로 이끌었습니다다. 지은 책으로는 <God in Search of Man>, <Sabbath> 등이 있습니다. 그는 유다교의 안식을 개념을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곧 사람이 안식일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우리를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창조는 무질서, 혼돈에서 시작합니다. 그분은 첫째 날에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자연 만물을 다 만드신 후 에덴을 마련하신 이후 엿새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조는 철저하게 사람 중심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위해 창조의 시간표를 구성하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안식일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격려하고 힘을 주시기 위해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면 효율이 떨어지고 생산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더 앞서가는 질서가 생겨납니다.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일하면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안식을 통해 더 채우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쉼이야말로 하느님의 질서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분은 우리가 아등바등한 삶이 아니라 유유자적한 은혜의 삶을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시간이 과거의 안식일, 그리고 안식일을 대체한 주일이라는 것이죠.
이따금 어떤 가게, 업소 앞에 ‘주일은 쉽니다’라는 표지를 보게 됩니다. 이 가게 사장님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려주지만(보통은 개신교 신자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의 시간이 온통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겠다는 고백인 것이죠.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바라보고 찬양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주일은 그야말로 ‘주님의 날’,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음미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분주함을 멈추고 주님의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도 필요하고 ‘주님 앞에 쉬는 시간’은 더욱 필요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1-22)
예수님은 반대자가 많으셨습니다. 딴지, 시비 거는 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사람 고쳤다고, 정결례 안한다고, 단식 안한다고 죄인들과 식사한다고 반대하는 이들. 보통 반대가 많으면 눈치보고 위축되고 조심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변함없으셨고 마치 반대를 즐기듯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를 디딤돌 삼아 진리를 선포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수는 진리에 비례한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과 교회 교의의 역사 대부분은 반대자에 대항하여 답하고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변증론, 호교론이라고 부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반대가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인해 진리가 더 순수해지고 교회가 더 강건해졌습니다. 서로 싸움 때문에 더 정이 깊어지는 격이라고 할까요. 평소에 안하던 말 하게 됩니다. 이해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니까요.
허들은 10개의 장애물이 트랙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허들을 넘어뜨려도 순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답니다. 10개 다 넘어뜨려도 넘어갈려고 애쓰면 우리의 승리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비록 쓰러질 수도 넘어뜨릴 수도 발에 걸릴 수 있다하더라도 그렇답니다. 인생은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가 목적지에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게도 하는 역설이 있지요. 높은 파도를 즐기는 인생이라면 되는 것이죠.
오늘 복음은 방향 맞추는 인생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우선 방향 맞추는 삶은 공격하지 않고 충성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공격을 보면 영성의 획일화를 볼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길만 있다는 주장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베푸는 은혜의 다양한 길을 알려주신다. 기도의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은사의 갈래도 하나가 아닙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체험이 절대화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죠. 자기의 경험치가 남을 단죄하는 것으로 마감할 때 그것은 받은 은혜마저도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향 맞추는 인생은 분위기를 읽을 줄 압니다. 신랑이 있을 때 잔치를 벌이고 빼앗길 때는 단식하라. 곧 단식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그럴 때가 오면 단식하면 됩니다. 그래서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일할 때는 밥먹고 열심히 해야 합니다. 단식하고 일도 못하고 픽픽 쓰러지면 안됩니다. 흐름에 역행해서 의도는 좋았지만 전체를 막히는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죠. 노래할 때 박자는 기본입니다. 합창을 할 때 저 혼자만 튀는 음으로 전체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영성 필요한 것입니다.
또 방향을 마주는 삶은 버림에 빨라야 합니다. 낡은 천을 새 옷에 기우면 안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옷과 새 포도주와 같은 존재인 그리스도인이면서 자기 스타일에 옛것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 스타일만을 고집하는 것은 개성이 아니라 고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타일을 주장하고 그것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틀을 버림으로써 새로워지게 됩니다. 과거의 틀이 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된 새 존재임에도 옛 것에 얽매이면 우리의 삶이 줄줄 새고 터져버린다는 것이죠. 좋은 포도주로 무르익게 되는 삶 그것은 새 부대에 적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대는 포도주 담는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의 스타일이 아니라 이 땅의 스타일을 입으셨습니다. 주님도 하늘의 스타일을 버리시니 사람을 얻고 더 크고 더 넓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요한 1,42)
요한의 증언에 의해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좇아갑니다. 그리고 함께 하루를 지냅니다.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복음은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아와 다른 한 친구에게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요? 여하튼 안드레아에게는 결정적인 하루였던 것이죠. 주님과 함께 지낸 그 날이. 그래서 즉시 형인 시몬을 찾아가 그를 스승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이렇게 증언하면서요. 이스라엘이 그 장구한 세월 고대한 메시아, 그를 만났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지낸 하룻 사이에 그는 랍비로 불렀던 그 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더욱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안드레아에게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 무엇이 안드레아로 하여금 갈릴래아에서 온 낯설은 이 안에서 ‘메시아이심’을 알아채고 확신하게 만들 것일까?
그런데 시몬을 만난 예수님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를 눈여겨 보시고는 대뜸 이름을 지어 주신다는 것이죠. 이 대목은 공관복음과는 상이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시몬이 한참 예수님을 따라다닌 후, 공생활 중간 즈음에 예수님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에 시몬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라 고백하자 그제야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죠. 요한 복음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에 케파, 베드로라 작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실제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을 알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기록에 의하자면 예수님도 참 짖꿎으시다 싶습니다. 아니 사람을 만나자마자 턱하니 이름을 바꾸어주시다니요. 그것도 우리가 케파, 베드로를 바위, 반석이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해서 그렇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돌’ 아닙니까. 그럴 듯한 해석은 케파란 다름아니라 굳고 단단하고 흔들림없는 바위같은 믿음, 그가 사도단의 으뜸으로 장차 교회를 떠받치게될 사명을 받기에 적합한 이름이라고 멋지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돌은 그저 돌일 뿐, 만났는데 ‘너 이제부터 돌멩이야’ 그런다면 처음부터 그런 멋진 해석이 나올리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언제봤다고 나보고 돌멩이라고 한단 말인가?!’ 부아가 날 법 합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돌’이라 부르시면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새겨주시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포천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은 천년이 가도록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까라라 대리석으로 깍아놓은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견고하게 자리를 지킨 인류사의 보물입니다. 돌은 깍기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깍아보면 대충 오래 갑니다. 예수님은 아무리봐돠 미련하고 답답해보이는 시몬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백번 이야기해도 꿈쩍 않을 것 같던 그를 깍아내고 덜어내고 다듬어서 하느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원의, 저놈 참 물건일세-그러듯이 ‘너는 돌이다’-그러니 내가 이제 너를 재료로 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4-17)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정에 선 이가 최후 진술에서 했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어릴 적에 사소한 잘못이 있을 때 주변의 누구도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모두가 죄를 짓기도 하지만 올바른 삶이 있다고, 지금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고 호소하고 애원하고 이끌어주는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지금과는 달랐을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포기하고 방치하였을 때 원래 그렇지 않던 이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되고 맙니다. 원래 그런 사람 없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마태오)를 보고 많은 이들은 눈치 보고 혀를 차며 지나쳤습니다. 같이 하기엔 세리란 기피대상 1호였을 테니 그럴 법도 합니다. 레위 자신도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누구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고립시켜 갑니다. 지나시던 예수님이 레위를 주목하십니다. 그를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급기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 한마디가 레위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공식 죄인인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단에 합류하는 터닝 포인트. 너 거기 있으면 안된다는. 그 자리를 박차고 준비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초대.
회피와 외면이 파괴된 삶을 매만지면서 아직 기회가 끝나지 않았다는 부름을 받았을 때 그제야 레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무수히 많은 이들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신앙을 잃었건만, 그가 제멋대로 살아가건만, 그가 점점 악화되어 가건만 귀찮다는 이유로, 내게 상처를 주었다는 보복으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지레짐작으로 아무런 도움도 조언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 많은 이들. 혹시 용기를 내고 진심을 담아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가 지금 이리 된 것에는 내 탓도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르 2,3-5; 10-12)
복음은 중풍병자에도 초점이 있지만 그를 들고 온 네 사람에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고사성어가 있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서로 의지하고 있어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서로 의지하면서 같은 운명공동체가 된 둘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돌아보면 스스로 잘나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이는 하나도 없죠. 우리 모두는 알고보면 빚진 인생입니다. 잘난 자리에 있으면 홀로 잘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니고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들 것을 들고 온 네 친구는 아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들었겠죠.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 나타났다.’ 중풍병자는 마비된 사람입니다. 이는 당시 율법에 꽉 눌려 신음하며 마비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병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가로막고 있었어요. 사람 때문에 무리들로 인해 정작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이것은 무서운 현실이죠. 교회로 인해 주님께 가는 길이 가려질 때 있어요. 나는 예수님을 좋은데 예수님 믿는다는 자는 싫다. 우리가 이렇게 생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치유되기를 원해 나오는데 가로막는 사람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들어내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데려오죠. 이스라엘의 가옥구조가 그렇습니다. 집안에서 이 장면을 목격할 때 어떻겠어요. 갑자기 천장이 뜯겨지고 그리로 예수님 앞으로 이 환자가 내려옵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누구의 믿음을 보신 것일까요? 환자의 믿음? 친구의 믿음? 친구의 믿음이죠. 구원은 자기 믿음대로 받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때요. 친구의 믿음이란 말이죠. 이상하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때 ‘보시고’는 그 친구들의 믿음을 판단하시고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이면 고치겠다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 마비된 친구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너무 절망적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소문을 따라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라도 한번 가보자. 이것은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이요. 대상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예수님이 그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스라엘이 빠진 영적 도탄의 상태 속박된 상태를 이 마비된 사람이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율법에 묶어놓은 그 상태.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질병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종교적 문제로 바라보신 것이에요.
그런데 논란이 일어납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왜요? 신성모독이라고. 종교적 대표자들이 여기에 왜 앉아 있어요. 수첩들고 예수님 비판하려고 토씨하나 안틀리게 받아 적는 것이에요. 혹시라도 말실수 잘못하는 것 없나. 이들을 보고 예수님이 이제 ‘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죄 용서만 선언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먼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고 그래서 하느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나서 다음에 육신의 치유하셨죠. 영적 질서도 하느님께 속한 것이지만 현실이 질서도 역시 하느님께 속한 것이란 말이죠. 어느 하나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독생자이시지만 이 땅의 자연 질서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상처와 죄를 다 당신 자신이 지불하셨기에 그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니 능력이 뒤따릅니다. 그 마음을 움직이는 그 믿음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 1,40-42)
초대 교회의 특징은 어울림이었습니다. 접근도가 높았습니다. 가난한 이가 부자나 아픈자나 건강한 자나 상관없었어요. 예수님의 삶은 약자에게 둘러싸인 삶이었고 열린 분이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모두 내게로 오너라.’ ‘모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계층이 없었고 공평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길과 환경을 열어 주셨습니다. 누구나 찾아올 수 있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가?
한 나병 환자가 와서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고 있습니다. 약자가 배워야 할 점인 것이죠. 약한 이들은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습니다. ‘나만 불쌍하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힘든 사람 없다. 내가 제일 어렵다.’ 피해의식을 가진 것이 약자들의 심리적 약점이죠. 그래서 막무가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는 존재임을 당연히 여기고 나 왜 안도와 줘.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죠. 도움을 주지 않는 이를 향해 사랑이 없다는 둥, 잘먹고 잘살면서 나를 왜 안도와주고 지 혼자 먹고 산다는둥 하면서 불평합니다. 이것이 약자의 약점이죠. 없음과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파편들이 남아있는 모습을 때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감사도 놓치기도 합니다. 당연히 내게 돌아올 것이라면서 당연시하고 한손으로 받는 경우 많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병환자는 ‘원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약자였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귀한 것이었지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자신도 존귀하게 된 것이죠.
에수님의 치료법은 어루만짐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죠. 그는 육체적 고통, 나병으로 인하여 그리고 내면적 서글픔이죠. 나병은 천형. 격리조치되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유다인들의 풍습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나혼자밖에 없다고 하는 처절한 서글픔, 거부당한자의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를 가엾게 여기시어 손을 대셨어요. 먼저 마음이 움직이셨어요. 가엾게 보시고, 눈물 그렁거리면서 그를 만지신 것이죠. 손을 잡으셨습니다. 살짝 댄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만지신 것이죠. ‘아이고 어떡하니’ 이것이 주님의 치유법입니다. 유다인은 나병환자에게 먹을 것은 주지만 손은 절대 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손을 대셔서 먼저 내면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설사 고침 못받았어도 아마 주님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표면적인 질병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암 고치기 힘들죠. 우리로서는. 부도난 사람. 어떻게 우리가 해결해주나요. 그러나 내면적 아픔은 고쳐줄 수 있어요. 언어와 접촉을 통해서. 주님처럼 그를 불러주고 만져주고 힘들지 어렵지, 등 두들겨주었는데 삶을 용기 얻는 사람,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문드러지는 그런 사람 얼마나 많아요. 그에게 주님처럼 만져 줄 수 있단 말이죠. 그럼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것이죠. 나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 그분의 터치를 누군가가 만나게 되는 것이죠. 대단한 어떤 일이 아니라 그냥 어루만져주고 감싸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살아나고 무너진 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아픔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하는 그 능력, 그 작은 어루만짐이 예수님의 손길과 같을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안식일에 더러운 영 들린 이 고치시고 연이어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그 이후 병든 이,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 옵니다.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간에 이들이 몰려온 것이죠. 안식일 날, 어둠의 세력밑에 있던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일으키는 시간이라 일부러 그 일을 하셨죠. 왜? 많은 이들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일이라는 날 자체에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율법의 날이 되어 버리ㅏ 말았죠. 축제와 생명의 안식일이 아니라 힘들고 지치고 부담되는 날이었죠. 안식일이 끝나자 병자, 마귀들린 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곧 이들이 아직 안식일에 묶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도 손없는 날 골라 이사하는 이들이 많다죠. 그런 날 골라 결혼한다죠. 손없는 날, 음력으로 0자 9자 들어간 날을 말합니다. 소위 손없는 날은 귀신이 방해 장난 못하는 날이란 거죠. 1,2는 귀신이 동쪽, 3,4는 남쪽으로 출동합니다. 또 5,6에는 서쪽, 7,8에는 북쪽으로 돌아다닌다는 거에요. 그래서 음력으로 0과 9 되는 날 골라서 귀신 피해서 이사하고 무슨 일하고 해야 한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귀신의 날에 붙들려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는 대단히 불신앙적인 것이죠.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안식일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해저물 때 드디어 안식일 끝나니까 예수님께 데리고 온다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이 고쳐주시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유와 치유를 주셨지만 아직 이들은 무엇에 붙들려 있나요? 날에 붙들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복음이 주는 자유가 아니라 바로 율법과 인습이 주는, 안식일에 붙들려 있단 말이죠.
34절에 메시아의 정체를 귀신들이 알아 봅니다. 우리도 귀신처럼 주님을 알 수 있어요. 알긴 알죠. 그러나 마르코 복음은 ‘믿는다’라는 말보다는 ‘따른다’는 말을 더 사용합니다. 알긴 하지만 마귀는 따르나요? 아니요. 마귀는 아는데 따르지는 않죠. 우리 신앙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명색만 신앙인이죠. 마귀가 아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어줍쟎게 알고 전하다 오히려 왜곡된다는 것이죠. 이들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일으키는 신앙이 우리를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들을 고치시고 다시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외딴 곳입니다. 아직도 그 동네 사람들이 보여진 문화와 관습을 벗어나 새길을 내시는 기도를 바치신 것입니다. 거기에 물들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길 없는 곳 걸어가 보세요. 게다가 어둡다면, 생고생합니다. 빠지고 난리 납니다. 이 세상은 오프 로드, 길이 없어요. 길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처럼 기도로 매일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담이 막혀요. 그러나 담에는 반드시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뭘로 만들어지는가? 기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도화된 동네를 떠나 깜깜한 광야 외딴 곳에서 길을 내신 것이에요. 우리도 길을 내는 자들인 것이죠. 우리가 길을 내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죠. 로마가 길을 내면 제국이 생겼지만 우리가 길을 내면 하느님 나라가 오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할 때 자녀들에게 길이 열리고 공동체가 기도할 때 가장 힘겨운 이들을 위한 길이 열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뒤를 따라 올 이들을 위해서 길을 내는 것입니다.…더보기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 1,23-24)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구약의 나훔 예언자 있지 않습니까? 나훔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의미로 거기서 첫 사목이 시작됩니다. 가장 거룩한 날,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인 회당에서 첫 선교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시간 공간에 하필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죠. 주일 미사 봉헌하는 그 현장에 더러운 영이 막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카파르나움은 정말 위로가 필요한 곳이었고 주님은 이런 곳에 자유를 해방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나라에도 귀신과 상당히 친화적인 문화였습니다. 처녀 귀신, 몽달 귀신, 심지어 만득이 귀신 이야기, 한때 엄청나게 퍼졌어요. 장래 신랑감 보고 싶으면 열두시 땡 칠 때 화장실 들어가서 칼을 입을 물고 거울 보면 거기에 신랑감 나타난다-그런 별 거지 같은 이야기 다들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렇게 은연 중 이런 생각이 우리 신앙 중에 깔려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혼재되어서 복음의 가치를 비틀기도 합니다.
오늘 회당에서 마귀가 발악하며 마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듯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당시 제우스 신에게 돌려진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죠. 딱하나 예수님 오신 목적만 하나 알았어요. 더러운 영, 악을 멸하러 오신 분이다. 이것만 알았어요. 더러운 영, 마귀, 귀신, 악의 세력 인간 사회 전체에 우리 각자 안에도 그런 영적 전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입닥쳐!!
무당은 신을 달래려 합니다, 살살 구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단을 치셨어요. 풍랑을 향해 꾸짖으셨어요. 세상의 풍조를 향해 편하게 대하지 않고 소리치셨죠. 우리도 그렇죠.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하는데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고 교회가 조용히 한다면, 맞을까요?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이 경련을 일으킵니다. 둘 사이의 세력이 서로 밀고 당길 때 일어나는 경련을 말하는 것이죠. 둘이 양쪽에서 당기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비명이 나오죠. 죄에서 악에서 분리될 때의 겪게 되는 고통이죠. 예수님의 생명과 해방이 필요한 이 마을에 더러운 영을 끊어낼 때 겪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니 더러운 영이 축출되었습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그렇다면 여지껏 회당에서 무슨 일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말씀은 말씀이고 가르치는 교훈은 교훈이고 삶은 삶이고, 다 따로였죠. 율법학자들이 그러고 있었단 말이죠. 예수님의 말씀은 가르치고 선포되고 나오는 순간 힘이 되어 새 생명이 임하고 마귀가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는 해피엔딩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3장에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니까 마귀 쫓아내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오히려 미쳤다는 악평이 퍼져갔습니다. 세상 사람 소문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기대했던 바와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각오를 하는 것이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는 것이죠. 昢凉 神父…더보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늘이 열리고 들려온 그 소리, 하느님의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너는 사랑한다.’ 세례는 예수님이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출발입니다. 요르단 강물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날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명한 의식이 예수님 안에 가득 찼고 바로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장면이 세례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세례를 신자가 되는 첫 출발로 받아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 한 인간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본질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세례를 표현합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이고 물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래의 이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세례는 침례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약식으로 물을 이마에 붓는 형태로 간소화된 세례 역시 죽음과 재생을 의미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모를 때 부모님이 신자셔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아는 누구는 세례 받았지만 장기 냉담 중인데 세례가 아직 유효한가요?’, ‘세례 받았지만 다른 종교로 개종했는데 그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인가요?’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개인적 결단과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다는 하느님의 결단과 선택이 앞서는 것이기에 유아 세례도 동일한 세례입니다. 그가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면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문은 세례로 새로 태어났다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욕심도 여전하고 결함도 여전합니다. 깨끗하게 씻겨졌다건만 때묻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기야 매일 얼굴을 씻건만 하루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니까요. 그래서 세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계속 유지하기 위한 분투가 덧입혀 져야 합니다. 죄와 어둠을 씻어주시고 아픔과 고단함을 씻어주시고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과거를 씻어주신 분께 의탁하면서 이 깨끗함을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라는 믿기지 않는 선언을 받아들인 이의 삶을 증거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늘이 열리고 들려온 그 소리, 하느님의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나를 너는 사랑한다.’ 세례는 예수님이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출발입니다. 요르단 강물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날 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명한 의식이 예수님 안에 가득 찼고 바로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장면이 세례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세례를 신자가 되는 첫 출발로 받아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 한 인간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본질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세례를 표현합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이고 물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 생명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래의 이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세례는 침례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약식으로 물을 이마에 붓는 형태로 간소화된 세례 역시 죽음과 재생을 의미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모를 때 부모님이 신자셔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아는 누구는 세례 받았지만 장기 냉담 중인데 세례가 아직 유효한가요?’, ‘세례 받았지만 다른 종교로 개종했는데 그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인가요?’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개인적 결단과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다는 하느님의 결단과 선택이 앞서는 것이기에 유아 세례도 동일한 세례입니다. 그가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불변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면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문은 세례로 새로 태어났다는데 근본적인 변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욕심도 여전하고 결함도 여전합니다. 깨끗하게 씻겨졌다건만 때묻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기야 매일 얼굴을 씻건만 하루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니까요. 그래서 세례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계속 유지하기 위한 분투가 덧입혀 져야 합니다. 죄와 어둠을 씻어주시고 아픔과 고단함을 씻어주시고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과거를 씻어주신 분께 의탁하면서 이 깨끗함을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라는 믿기지 않는 선언을 받아들인 이의 삶을 증거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마태 2, 9-12)
공현(Epiphany)은 ‘공적으로 드러남’입니다. 성탄으로 시작된 구원의 첫 시작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아기 예수 안에 하느님의 일하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공현에 있어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알아챔’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들판의 목자들은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고 알아챘습니다.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동방 박사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가난한 부부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고 알아챘습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일이다.
동방 박사라고 우리가 통상 부르는 이들은 페르시아 정도의 현인들로 간주됩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지역에서 하늘의 변화에 주목하고 연구하던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이죠. 그들중 몇몇이 별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먼 길을 돌아 낯선 땅 이스라엘, 베들레햄에 당도합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몸을 풀 거처도 마련하지 못해 당황하면서 아기를 낳아야했던 가련한 어떤 부부와 그 사이의 아기. 안타까운 사연이긴 하나 왕의 풍모와 위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그런 일이었을 뿐이겠지요. 그러나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을 무릎 꿇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아무리 뒤져보아도 별 것 아니라고 지나칠 수도 있던 장면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용맹정진, 불퇴전의 자세로 치열하게 진리를 찾고자 수행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오셨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진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찾아 오신 셈입니다.
동박 박사는 하느님을 찾아 먼길을 왔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공력을 들인 것이죠. 그러나 그때 무엇을 발견하나요. 바로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입니다. ‘아 이렇게 작은 아기였구나’ 알아채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고 만나고 그분을 매만지고 그분의 다가오심을 감지하고자 흐트러지려는 마음과 정신을 매섭게 치겨 세우면서, 동시에 내가 무심히 지나온 삶의 갈피갈피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때 겪었던 그 일 속에서, 혼자였던 위기의 순간에서,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을 통해서, 심지어 무관심 속에서, 죄의 한가운데서마저 하느님께서 동반하셨음을 알아채는 것. 우리 안에 이루어진 주님의 공현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기어이 그분 앞에 무릎꿇는 것, 소중한 보물을 내어 드리는 것.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7-11)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내게 세례를 받았지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이라고 요한이 선포합니다. 끝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대중의 선풍적 인기를 얻으며 광야를 개혁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요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서학에서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노선,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고 요한의 사상을 승계하면서도 조금 다른 방향을 설정하고 당신만의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으리라고 분석합니다. 원래는 세례자 요한과 궤를 같이하셨다, 아니 어쩌면 요한의 추종자 중의 하나였으리라는 진단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너무 곤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누구 아래서 그 영향으로 당신 생각을 정립해갔다는 것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라는 곤혹스러움입니다. 세례를 주는 이와 세례를 받는 이의 관계로 보자면 주는 이가 받는 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통념이 이에 가세하여 스승인 예수님이 누구의 제자 내지는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싫었던 것이죠.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두고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그를 치켜세우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노라’며 예수님을 격찬합니다. 아름다운 인정입니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하등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잘나가는 후배에 대해 질투하고 나보다 앞서가는 동료로 인해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요즘말로 ‘인정, 어 인정’입니다. 내게 세례를 받았으니 너는 내게 묶여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앞서가는 것을 기뻐해 줍니다. 못난 질투로 그의 길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요한은 화려했던 자기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예감합니다. 이제 무대의 주인공은 교체될 것입니다. 그래서 쓸쓸한 퇴장을 거부하나요? 아닙니다. ‘이 밤의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고집을 피웠더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게 합니다. 나서야할 시간이 다 지나고 이제 물러나야 한다면 기꺼이 넘겨드리는 것이죠. 요한의 퇴장은 새 시대의 서막입니다. 물러나는 이의 모습도 당당하고 새 시대를 여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욱 당당합니다. 질투하고 자리를 고수하려 하는 세상의 이전투구 속에서 오고 가는 요한과 예수님의 시대 교체는 참 아름답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나타나엘이 예수님께“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8-49)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후 형 시몬에게 아무래도 메시아를 만난 것 같다고 전합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제 바야흐로 입에서 입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함께 첫 번째로 예수님을 만났던 필립보에게 있어 이 복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친구 나타나엘이었습니다. 내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 나만 알기에는 너무 귀한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안드레아에게 그리고 필립보에게 솟구쳤던 것이죠. 복음은 독점을 겨냥하지 않고 확산을 이끌어 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란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필립보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온 나타나엘은 조금은 냉소적이고 의심스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자신을 인도한 필립보에게 예수의 출신지역인 나자렛 변방 출신임으로 미덥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 나타나엘을 보신 주님이 그의 원의를 꿰뚫어 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분투하던 나타나엘을 보고 계셨다는 것이죠. 나를 알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너무 놀라워 터져나온 고백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찬탄입니다. 이분이 누구신데 나를 아신다는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을까요?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어렵습니다. 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죄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시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많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폭로해야만 나는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내게는 더욱 잔인한 ‘죄’의 힘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했던 죄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낱낱이 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야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닫기 위한 과정입니다. 주님은 실로 다 알고 계십니다. 가리려 하는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실상이 폭로되어야 해방을 얻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나타나엘의 이 놀라운 체험을 우리들이 그것을 회피하지 않기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0) 昢凉 神父…더보기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7-39)
트리나 폴러스의 우화 ‘꽃들에게 희망을’은 노랑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찾아낸 삶의 참된 의미, 우정, 초월을 위해 필요한 용기 등을 담은 잠언집입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앞서가는 다른 애벌레를 쫓아 부지런히 앞으로 나갑니다. 애벌레들은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이 길을 따라가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앞을 향해 가고 있으니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맹목이 애벌레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바라볼 겨를 없이 그저 앞을 향해 나갑니다. 노랑 애벌레와 친구인 호랑 애벌레만이 그 대열에서 이탈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애벌레들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짓밟으며 나가는 것이 확실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아.’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제자는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이들입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고 요한을 추종하던 그들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칭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 쪽으로 말을 갈아 탔다는 것이죠. 자기 제자들이 예수께 향하는 것을 선선히 허락한 요한의 넓은 아량도 느껴지거니와 더욱 선명한 것은 이 제자들이 보인 ‘갈망’과 ‘추구’입니다. 요한을 따른다는 것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도 일종의 출가입니다. 광야의 요한의 삶이나 주유천하하는 예수님의 삶이나 매한가지로 고단하고 팍팍한 거친 삶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원하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삶인 것이죠. 애벌레들이 그저 앞으로만 전진하면서 저 구름 뒤편에 무엇인가 있으려니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듯 중단없이 앞으로 직진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가 실은 거짓된 희망임을 자각한 이들에게 요한과 예수님은 불편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는 요한의 삶은 불편한 것입니다. 이리저리 떠돌았던 정착지가 없는 예수님의 삶은 불편한 것입니다. 생각없이 앞으로만 나가면서 ‘과연 이 길이 맞는지’ 질문을 던질 겨를도 의향도 없는 이는 이 불편함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논리와 상식을 초월하는 삶을 살겠노라 고백하고 그 삶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첫 제자 후보생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하신 것이죠. 기특하고 대견한 생각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직접 와서 보고 겪으면서 이 불편한 삶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기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불편함을 통과하지 않고서 얻어진 행복이란 조작된 가상의 것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이 던진 질문과 ‘와서 보아라’는 초대는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갈망한다면 직접 부딪쳐 겪어내어 도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요한 1,29-30)
하느님의 어린양, 무엇이 연상될까요?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어 익숙해진 표현이 많습니다. 섭리니 은총이니 구원이니 하는 개념적 말들이 있습니다. 뭔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으나 우리가 실상 끝까지 그 의미들을 묻고 캐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섭리가 무엇인가요? 무엇을 은총이라 하나요? 질문을 받으면 실은 별로 할 말이 없어 쭈삣거리거나 시선을 피합니다. 이제껏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저 자주 들어와서 아는 것인양 지냈던 것이죠. 우리는 잘 모르면서 그 말들을 듣기도 하고 쓰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큰 적은 그래서 익숙함인지도 모릅니다. 세례받은지 이만큼 되었으니, 교회 안에서 이렇게 봉사하고 있으니, 사목자로서 살아온 경험이 있으니 잘 안다고 여기는 착각이 걸림걸이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무슨 보슬보슬한 귀여운 양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을 떠올리게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고 순결한 티없는 양의 이미지인 것이죠. 그러나 요한이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요르단 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전혀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도살되는 운명을 지닌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다른 이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죽어가는 처절한 미래가 그의 앞에 놓여져 있음을 요한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찬양할 때 그것은 죄를 없애시기 위해, 인간과의 화해를 위해,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당신 아들을 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 비극적 죽음을 겪게 해서라도 나만은, 우리만은, 자녀들만은 자유롭게 해방시키시려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입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외친다면 그 고백의 무게를 우리는 하나도 알지 못하는 셈이 됩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너는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3)
예수님 당대 가장 핫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광야의 예언자를 찾아오는 목마른 이들이 급증했습니다. 세례를 통해 회개의 삶,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을 시작하라는 그의 촉구는 강렬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드높아져 갔습니다. 그는 누구일까?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구세주일까, 우리를 이 참혹한 상황에서 건져줄 그 사람일까? 세례자 요한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순간이 왔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와 선망에 부응하는 그런 대답을 제출할까요?
그런데 그는 중심이 되기를 거절합니다. 그가 머물고 있던 광야는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곳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고적한 곳입니다. 도심의 화려함, 힘의 추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애초에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자신은 길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자라고,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리로 길 찾는 이들이 가도록 촉구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면 그냥 흩어지는 것입니다. 소리는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사라질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역사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의 확신인 것입니다. 나는 사라질 것이고 드러나야할 분은 따로 계시다는 얄궂은 확신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거짓된 내가 소멸되고 참된 나, 아트만에 도달하는 것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천명합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도 ‘자기를 버리는 것’을 추구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초대합니다. 버려야할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집착이 온전함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알아듣기도 어렵고 그렇게 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자기를 채우고 가다듬고 만족하게 하는 일만도 벅찬데 자기 중심성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요한의 광야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중심에 있고 싶은 자신을 벗어나는 곳,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곳,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발견하고자 분투하는 곳. 그렇게 나 아닌 나를 내려놓으면 그제야 나인 나를 찾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작아진 내 안에, 아니 이미 작은 내 안에 크신 주님이 오시도록 중심을 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루카 2,16-20)
시간을 구분하여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굳이 이름 붙여서 옛 것들과 단절시키고 출발하도록 인간은 약속하고 이날을 어제와 구분합니다. 해말간 얼굴로 그리고 단단한 결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습니다.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답답함과 두려움, 걱정과 한숨을 덜어내시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실은 이제는 여간해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지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설레는 일이 드물어져 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선을 자꾸 안으로 돌리려는 고질적 습관을 고쳐볼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빠져나오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찾아내고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면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삶이 얼마나 더 팍팍해질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발견하는 이라면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무료하고 버거운 일상이 아니라 놀랍고 그래서 반가운 선물로 오늘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복음은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본 ‘발견’의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에게는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던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날도 검불이 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치고 도처에 위험이 산재한 그런 날이었겠지요. 그러나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모든 것이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목자들은 돌아가 양을 돌보는 일을 계속했을 터이나 그 이전과 똑같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들은 주님을 만난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달라지지 않았으나 확연히 달라진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발견’한 사람은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올해는 우리가 무엇이 달라지게 될까요?
새해 첫날 듣는 민수기에서 아론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라고 말씀하시죠.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 6,24-26) 더 무슨 축복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이 축복의 동사들만 모아 되새겨 봅니다. ‘내리시고 지켜 주시고 비추시고 베푸신다’ - 아론의 축복으로 가득찬 한 해를 조심스레 우리 모두 시작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루카 2,22-24)
예수 아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꾸려진 가정을 ‘성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용어를 받아 가정의 모범을 지칭할 때 ‘성가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혼인하는 이들이 둘 다 신자일 경우, 성가정을 이루었다고 흔히 이야기하죠. 어떻게 살아가는지 구체적인 모습과 상관없이 그저 세례 받은이들로 이루어졌다고 성가정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적합한가-저는 그런 표현이 조금 거북스럽게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가정을 이루는 것인가가 늘 의문이고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족 해체 시대를 우리는 목격합니다. N포 세대인 청년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독거 노인의 문제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혼과 결별로 뿔뿔이 흩어진 가정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들춰내보면 집집마다 어려움 한두 가지 겪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야하는지도 참 난감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위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가정’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가정은 커녕 그냥 가정을 이룬다는 것조차 평범하지 않은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서로를 지지해주고 하염없이 사랑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나요?
본당 사목을 할 때 제일 행복한 순간의 하나는 유아세례를 줄 때입니다. 품에 안겨온 아기는 실은 아무 것도 모를 것이죠. 그러나 아빠와 엄마는 들뜬 모습입니다. 아기를 제일 예쁜 모습으로 차려 입히고 온 가족이 모여 옵니다. 사진 찍어 주러 온 삼촌, 꽃다발을 들고 온 할머니, 세례명을 고르고 골라온 대부 대모까지. 아기는 이 낯선 상황에 대개 울음을 터뜨리지만 누구하나 타박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하느님의 자녀로 맞이할 미래를 축복하면서 물을 부어 새 탄생의 출발을 알리고 하느님의 보호를 청하며 성유를 발라줍니다. 무엇하나 나무랄 데 없는 따뜻하고 감사한 시간입니다. 성전에 봉헌하기 위해 예수 아기를 안고 찾아온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전혀 딴판이었겠지요. 그들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꺾으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일은 가늠치 못할 것이었습니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감당할 어려움과 힘겨움이 너무 많았을 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조금은 힘을 내야 하고 조금은 마음을 더 모아야 합니다. 비록 알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비록 내 앞에 시련과 압박이 겹겹이 놓여 있더라도, 비록 사랑과 관심이 자꾸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지더라도, 비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예수 아기의 성가정이 이 모든 난관을 뚫고 견디며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면 겪어내야 할 인내와 감사를 품었듯이 말입니다.
마감되는 한 해를 돌아보면서 시간의 갈피갈피 숨겨두신 주님의 안배하심을 찬미합니다. 어렵지만 또 근사하게 살아온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적이 내일부터 또 새로이 시작되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루카 2,36-40)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며 삶의 말년을 지내는 한나 할머니를 복음은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가가 아닙니다. 미래를 예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해주는 인물도 아닙니다.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풍파를 겪어낸 노인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나는 늙어갔습니다. 늙어가는 것은 낡아가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늙음은 대개 새로움이 없어지게 만들지만 기다림이 있는 늙음은 생생하게 만듭니다. 하루 하루는 우리를 늙어가게도 하고 낡아지게도 만듭니다. 늙어가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낡아지는 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한나는 쇠락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새롭게 찾아냅니다. 이제 막 태어나 부모에게 안겨 성전에 봉헌된 아기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녀는 예언자일 수 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우리는 늙어갑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힘 앞에 무력함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그냥 늙어간다면 아쉽고 섭섭하고 때로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는 그다지 한 일도 없는데, 아직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혹은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데 그저 시간에 굴복하고 있다면 낡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묵혀놓은 것들을 다시금 꺼내 건사하면서 한나의 기다림으로 매만져야하겠습니다. 늙어가지만 낡아지지는 않겠다는 다부짐으로 하느님께서 한 해 동안 어떻게 일하셨는지 발견하는 마무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 29-32)
복음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 시메온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기다리던 만남이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안긴 이 연약한 아기가 자신이 기다려온 메시아임을 직감합니다. 자신의 기대에 상응한 아기였을까요, 자신의 기대에서 이탈한 아니 배반한 만남이었을까요?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너무 가난한 부부의 너무 아무 것도 아닌 아기! 이것을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던 것인가? 그런데 이 의외성이 하느님의 일하심임을 수긍하고 시메온은 찬가를 바칩니다. 이 아기가 계시의 빛과 영광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돌이켜보면 올 한해도 내 원의와 지향대로 흘러온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의외의 일들이 불현 듯 일어나 방향을 바꾸게 만들고 새로운 물길을 열어 갔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하심을 조금이나마 감지하게 된다면 비로소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지 않으시고 내게 필요한 대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는 새해 그것을 우리가 알게끔 하시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3-18)
예수님 탄생으로 인한 비극이 펼쳐집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헤로데의 학살에서 살아 남았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됩니다. 교회는 이 아기들을 순교자로 기리며 성탄 축제의 하루를 지냅니다. 마태오가 이 이야기를 전할 때 모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인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죽이라는 명을 내리고 이 광란의 와중에서 천신만고 끝에 모세가 살아남습니다. 장차 하느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영도자로 그는 자라나게 되겠지요. 마태오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모아 구원의 공동체가 되게 할 아기 예수에게 모세와 같은 이미지를 불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는 이런 혼란과 압제를 뚫고 일어날 새 빛이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이 제일 먼저 희생됩니다. 올 한해를 지내며 돌아볼 때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 우리 주변 숨은 도처에 감추어진 희생자들을 봅니다. 처참한 자신의 처지를 해결할 방법을 얻을 수 없는 이들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으로 희망과 위로, 힘을 얻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탐욕으로 꽃처럼 희생된 어린 아기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해못할 비극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숨겨진 이면을 보도록 초대합니다.
성탄의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가 드러난 면이라면 그 이면에 참담한 일들은 여전하다는 것이죠.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어쩌면 더 잔혹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 비극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복음은 자식을 잃고 우는 어미 라헬의 통곡을 탄생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전합니다. 어미의 눈물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올해도 슬픈 죽음이 너무 많았습니다. 직장에 출근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 길가다가 애꿎은 죽음을 맞은 이들, 멀쩡하게 집을 나섰는데 그것이 마지막인 이들. 그래서 그들의 어머니는 눈물로 자식을 추모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마냥 기쁜 일이 아니었음은 세상에 만연한 죄악 앞에 침묵하지 말고 일어나지 않으면 비극은 그 다음 페이지를 열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아기 순교자들의 희생에 예수님이 빚을 졌습니다. 우리 역시 저항할 힘도 없는 이들의 희생에 숨은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희생을 멈추게 하는 일, 연대하고 지지하고 촉구하고 힘을 집중할 때 아기 예수님 머무실만한 세상은 만들어 집니다. 그것이 위험 한가운데 당신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연대하시는 방식이 아닐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3-8)
스테파노가 첫 번째 순교자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증거하였다면, 그에 반하여 사도 요한은 전승에 의하면 상당히 장수하셨답니다. 물론 묵시록에서 그는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마지막 때에 닥칠 일들을 환시를 통해 알게 되고 그 내용을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유일한 비순교자 반열에 오른 사도로 자리매김 됩니다. 어제 오늘 연이어 두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두 분의 삶을 비교해보면, 결국 짧은 생애였다고 해서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았다고 해서 삶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명에 대한 열정에 삶의 무게가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에게 따라붙는 별칭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애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별칭은 공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저술에서만 등장합니다. 사도단의 다른 이들이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의식은 요한 자신에게 충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차별해서 요한을 유독히 아끼시고 배려하셨다기 보다는 요한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스스로를 호칭한 것이 ‘애제자’라는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요한으로서는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당시로서는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사고였고,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어울리는 인간의 개념이나 어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이나 ‘의로움’이나 ‘구원’, ‘전능’ 등이 더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받는다는 체험 속에서 하느님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하고 받아들이며 전달해줍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어떠하신 가를 발견할 때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과 무관하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의 한계 안에서 그 체험의 방향과 결부되어서 이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적이고 경직된 사고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가부장적인 하느님일 공산이 큽니다. 하느님을 논리적 분석으로만 접근하려는 사람은 지성의 추구가 한계에 부딪힐 때 하느님의 생명력을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때로는 감성의 부드러움과 여유로움을 주님을 찬미하고, 때로는 예리한 이성으로 하느님을 관조하고, 때로는 고요한 침묵으로 충만한 주님을 대면하고, 때로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적 희생을 감수하는 등의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누린다면 우리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차원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스테파노의 충성됨은 죽는 것이었죠. 왜 죽었는가? 말하다가 죽었습니다.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서요. 생명에 대한 외침이 순교의 외침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 그 증거에는 능력도 있지만 죽음도 따를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복음 전하는 것이 사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결과는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죠. 그런데요 선교라는 첫째가는 사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복음도 오늘 그렇게 말씀하시죠. 구원을 받는 사람은 누구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성탄 후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을 지냅니다. 첫 순교자.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목숨바친 첫 사람이쟎아요. 그가 끝까지 견딤을 보여주었다 이것이죠.
그런데 이 순교자의 마지막 말은 용서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다음의 60절은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도 용서였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복음을 전하고 말하는 것은 용서죠. 복음은 용서하고 용서받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으로 용서받은 이에게 가능해지는 것이죠. 복음선포자의 입술은 용서의 입술이 되는 것이죠. 내가 전한 그 말이 나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와 사울의 관계, 그 자리에 사울있었죠. 그것이 사울이 바오로 되는 기초가 됩니다. 이 관계맺은은 중요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계맺는 것이다. 현대 입자 물리학은 물질의 최종 단위는 입자가 아니라죠.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기이고 끈이기도 하고 막이기도 하고 하여간 물질은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소립자 쿼크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죠. 나와 너인 것이죠. 배타적 독립적 존재는 불가능하죠.
촛불은 저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심지가 있어야 하고, 파라핀이...무엇보다 산소가 있어야 하죠. 탄산가스가 없어야 하고 바람은 안불어야죠. 그래서 물질은 관계성의 총체적 산물인 것이죠. 스테파노의 순교가 또다른 순교를 낳고 그의 용서가 또다른 용서를 낳게 되는 것이죠. 주님께 충실하기 위해서는요 어떻게야하는가..또다른 충실한 열심한 마음과 접촉하면 됩니다.
침체되어 있을 때 누군가의 뜨거움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난 지금 기도하기 싫은데요 누군가 기도하는 모습과 접촉하면요 나도 기도하게 되구요 나는 별로인데 그가 열심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요 나도 일해야겠구나 땀흘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로구나 알게 되죠.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신 아버지께 대한 충성스러움이 십자가란 말이죠. 그 십자가를 보게 되니까 그 십자가와 접촉하니까 스테파노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순교자 증거자들이요 계속해서 교회를 지켜나간 것이죠.
스테파노는 젊은이로 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영향은 이제 사울에게로 전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바오로가 되구요 누구누구가 되구요. 나를 접촉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자극이 되는 사람이 되야하고 또 나를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극하는 그 사람 곁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 말씀하시듯 우리가 끝까지 견디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요한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떻게 되셨다구요.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
원래 말따라 행동 따로 인 경우가 많쟎아요. 말은 그럴듯하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빠 못믿니? 다른 사람 못믿어도 오빤 믿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오빠 믿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말은 항상 어긋나쟎아요. 그런데 하느님이신 말씀은 우리의 언어와 전혀 다르니, 그 말씀은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니 세상이 창조되었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성취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점을 강조하시죠.
아드님은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히브 1, 3)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자신이신 이다. 그래서 곧 말씀과 하느님 사이에 아무 간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가장 큰 선물이 되어 먼저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느님이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내게 선물이 되셨다. 이거 가능한 일이 아니란 말이죠. 좀 사귀면 호감을 얻으려고 꽃한다발 사줍니다. 괜찮다 싶으면 옷한벌 사줄 수 있습니다. 작고 반짝이는 것도 사주고 새로 론칭된 명품백도 사줍니다. 왜요? 마음을 얻으려고 그러죠. 조금 조금 늘려가며 사주다가 결국 가서는 내가 가진 것 다 니꺼야....뭐 이런 정도 되면 정말 사랑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점진적이나 하느님 사랑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선물을 드린 것이 아니죠. 그렇다고 앞으로 드릴 것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죠. 하느님께서는 전혀 기대할 것 없쟎아요. 그런데도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신 것이에요. 그것도 맨 처음부터.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는 극단적 사랑을 하신 것이죠. 그것이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의미입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하신단 말이죠. 우리 하느님은...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날이기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주 틀린 일은 아니죠. 마음껏 기뻐하고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성탄은 주님의 나심이지만 그 탄생이 나를 향한 탄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지를 알면요 나 자신을 보는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질 수 밖에 없죠.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 이 고백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스러운 인간이 난데없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에요.
나를 위한 구원의 선물, 생명과 빛의 선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라시고 하신 일은 아니지만 강생하신 주님께 우리도 자기자신을 선물로 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분이 사람을 위해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가 사람을 돌보면 선물이 되죠. 효율과 성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됩니다. 그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뒤쳐져있는 사람을 보고 사람을 보면 그 사이에 살고 계신 주님을 보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 그분이 사십니다. 사람을 보면 하느님이 보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몇 년전 신학교에서 일할 때 일입니다. 12월 중순 방학을 한 신학교 동료 신부님들과 오랜만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학기 중에는 누릴 수 없는 여유로운 여행이었죠. 스물 여섯 명의 사제들이 향한 일본 북해도의 설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었죠. 저는 집돌이 체질이라 그다지 신나지 않았고 추위를 싫어하는 체질이라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후의 여유를 매일 매일 누렸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설경 속의 온천을 즐기며 여행이 주는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일은 여행이 끝나는 날 일어났습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인천 공항의 날씨가 심상치 않아 비행기 이착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 우회하는 항공편을 제외하면 모든 항공편은 결항이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24일 오전에 도착하여 대림 4주일 미사를 하고 저는 부탁받은 성탄 밤미사를 해야했었지요.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하늘이 막아버린 것을 어찌할까, 공항 바닥에 자리잡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길은 보이지 않았죠. 이러다가 모두가 냉담 신부가 될 아차한 순간. 평소에 발이 넓기로 유명한 선배 신부님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시더니 항공사 고위인사를 동원하여 간신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일행은 오후 느즈막히 서울에 도착 서둘러 대림 마지막 미사를 지냈고 전 간신히 성탄 밤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죠, 그야말로 조마조마한 순간을 지내며 그날 구유에 모셔진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데 왜 그렇게 은혜로운지요. 해마다 지내는 성탄이건만 유독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성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위해 온갖 위험을 다 감수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하지만 실은 성탄은 하느님께서 무모한 일을 감행하신 덕에 내려진 구원의 은총입니다. 성모님께서 죽을 위험을 감수하셨습니다. 양부 요셉은 성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천신만고를 겪어 내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칼바람 부는 구유를 당신의 탯자리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도 차마 겪을 수 없는 일을 감당하신 결과 우리에게 한 아기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왜 그리 하셨는지 우리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도도하게 지내던 아가씨는 엄마가 되면 불가능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이를 지키고 키우기 위한 사랑의 힘입니다. 자기만 알던 한 남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거두고 혼신의 힘으로 세상과 겨룹니다. 사랑이 지극하니 불가능한 일을 감행합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불가능을 건너 우리에게까지 내리셨는지 묵상하면서 몸둘바 없는 경배로 주님을 모시는 대림의 마지막 시간이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1,57-60)
즈카르야의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만 아니라 이웃까지 많은 이들이 모여 그 아이의 탄생에 대해서 기뻐합니다. 결혼하면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러나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이 아이는 그야말로 기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즈카리야 집안에서 세례 요한의 탄생을 평범한 일로 여겼으면 58절의 고백 큰 자비를 주님께서 베푸신 결과라는 고백은 없었을 것이죠.
우리 삶 속에서도 온갖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 그렇지 않은 일이 내 의도에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을 살다보니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들 아닌가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생명이 태어날 수도 있고 죽음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승진도 있지만 정리 해고도 있죠.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바라볼 줄 아는가의 여부인 것이죠. 이 가정은 이 아이의 탄생을 하느님의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죠.
당연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 하느님과 연결시킬 줄 아는 것-하느님의 개입하심이로구나 하느님의 섭리로구나 하느님의 만지심이로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 믿음은 그런 것이죠.
정말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시고 참새 한 마리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모든 이 땅의 일은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이죠. 하물며 우리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택하시어 쓰시는 백성의 일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하느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죠.
하느님과 모든 일을 연결하는 것, 그것으로 인해 오늘 이 집안의 아기 탄생이 경축할 일이 되고 있습니다. 오래 기다려왔고 그러기에 오래 기도해온 결과가 오늘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철저하고 온전하게 기도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것이 주님과 이 탄생을 연결짓도록 만든 것이죠. 이들이 기쁨은 그러기에 단지 손이 귀한 집안에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에 있는 것이죠. 좋은 일일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결국 끝까지 좋은 일이 아닌 것이죠. 나쁜 일도 있겠죠. 그러나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은 마지막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 얻은 기쁨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쁨. 그래서 이 가정에서 찬미가 나오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부모가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성취되었다는 그 사실 앞에 우리가 서 있을 수 있으려면 이 가정의 연결 능력, 곧 우리에게 일어난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연결짓고 그러니 장차 일어날 일들도 그러하리라는 확신이 녹아 있어야겠지요. 때가 다 차고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9)
연말에 직장이나 여러 모임에서 송년회 회식자리가 굉장히 많을 때지요. 일 년 동안 서로 안에 쌓인 감정의 앙금도 풀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됩니다. 1차는 대개 삼겹살집에서, 2차는 치맥으로 그리고 3차쯤 되면 노래방에 가는 것이 정석인가요. 결국은 음주 후에는 가무가 따르게 된다는데, 그래서인지 노래방이 전국적으로 3만 5000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거리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뿐입니까? 단풍구경하러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일하면서도 부르는 노동요도 있고, 주부 노래교실에서 목청이 찢어져라 불러 제낍니다. 노래부를 자리와 기회도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음치인 이들을 위한 교정 클리닉도 성황이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가와 종교 음악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가 없는 미사는 뭔가 빠진 밋밋한 전례가 되고 맙니다. 신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성당 안을 울릴 때 기도의 분위기는 고양되고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오늘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 울려퍼집니다. 요즘 대중 가요 중에서 많은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가사인지 알 수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후크송이라 해서 무의미한 구음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고, 비문이 난무합니다. 방송에서 자막이 없다면 도대체 한 마디로 알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탄 소년단이 인기라해서 노래 하나를 들어보았습니다. ‘고민보다 Go’라는 노래인데 독해 불가더군요. ‘DOLLAR DOLLAR/하루아침에 전부 탕진/달려 달려 내가 벌어 내가 사치/달려 달려 달려......YOLO YOLO YOLO YO/YOLO YOLO YO/탕진잼 탕진잼 탕진잼...’ 그냥 흥겹게 듣고 즐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때뿐이지요. 그래서인지 요즘 노래는 한두 달만 지나면 더 이상 불려지지 않는 일회용의 노래가 많습니다. 시간을 견디는 힘이 없는 것이지요.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가사, 삶이 묻어나지 않은 표피적인 표현들이 우리를 금새 질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별 수 없는 구세대가 되었나 봅니다.
비교하기도 그렇지만 마니피캇은 그 구절구절마다 어떤 이들의 체험이 깊이 묻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맛본 이의 찬미가 있고, 교만한 이들을 흩으시는 주님의 권능을 목격한 이의 떨림이 있고, 비천한 이로서 들어 높아졌던 이의 절절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이 구체적인 인생사 속에 녹아 들어 터져 나온 노래가 마니피캇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시간을 이겨냅니다. 세상 종말 때까지 끊임없이 불리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산골에서 마리아의 독창으로 불려진 이 노래가 담고 있는 내용들이 나도 겪음직한 또한 겪어왔던 바로 그 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듣는 노래가 아니라 부르는 노래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지요. 어떤 가수의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 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의 심정을 투영하고 있는 노래일 때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르려면 그래서 겪은 것이 있어야 한답니다. 아무 것도 겪지 못했다면 뻔한 노래밖에 나올 것이 없지요. 노래는 목청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음감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바로 숱하게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쌓인 상처를 통해 부르는 것이고, 그 안에서 손을 내밀어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찬미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애창곡에는 그런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 노래에 그런 체험이 스며들어 있으면 길이 울려 퍼질 테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루카 1,39-42)
유안진 교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중고등학교 시절 노트 앞에 단골로 실린 산문시입니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 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로 좋은 관계, 함께 서로 북돋우고 응원하는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죠. 지초와 난초의 향기로운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죠. 지초와 난초같은 한데 피어나는 향기로운 그런 관계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계속 말합니다. 아직 약혼중인데 그러나 덜컥 아이가 생겼습니다. 복음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다-강조합니다. 당연히 처녀는 아이를 못낳죠. 상식을 위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은총을 입었다함의 원뜻은 평화로움을 받았다-입니다. 그런데 은총을 입은 결과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이라면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믿음 안에서 가득히 받은 은총, 그 귀결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이 되었습니다. 지상의 언어와 천상의 언어와의 간격이 아닐까요. 그 누구도 못 믿을 일이 실은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이 나을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이다-이런 약속이 있는 아이죠. 보통 엄마 꼬시기는 정말 쉽습니다. ‘애기가 너무 예뻐요. 앞으로 괜찮을 것 같아요. 장군감이에요.’ 그런 말 한 마디면 엄마는 기대와 관심으로 눈이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푸짐한 아기는 장군감이라 하고 정말 아닌 경우에도 그냥 미스 코리아감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런데 당신이 낳을 아이는 보통이 아니라고, 다윗 왕권을 이을 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마리아에겐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다윗 가문의 회복. 하느님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의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하고 직접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불가능한 일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촌 엘리사벳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강합니다. 누구나 인생의 이야기는 모두 좋아하고 그것에 감동합니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그 참가자의 인생 스토리이고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곤 하는 것이죠.
마리아도 자신과 친분이 있던 엘리사벳 이야기를 통해 확신합니다. 언니 엘리사벳, 나이 늙도록 아이 없던 그 자매에게 아이가 생겼다면 그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에게도 내릴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가능했다면 나에게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처녀의 몸으로 엄청난 일을 받아들이고, 무슨 일이 전개될 것인가는 여전히 해명불가하고 믿음으로 동의했지만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지지하고 용납하고 인정해주는 이에게 달려갑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유다 남부까지 적지않은 거리였습니다. 그리로 달려간 이유는 나의 믿음을 이해해줄 누구를 찾고 자기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싶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나처럼 느끼고 겪었을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바로 그 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확인받고 서로 격려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흔들릴 때 만날 사람은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그 사람, , 지란지교의 그 사람에게 가야합니다.…더보기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카 1,26-29)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공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정치에도 협치가 중요하다고 하고 마음을 얻어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좋은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해 이 땅에 한 여인을 선택하실 때, 아마도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굴복시키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도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동의를 요청하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파견되어 이루어질 일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일에 대하여 숙고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의합니다. 그후에야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내어놓겠다는 전적인 봉헌이 이루어집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종하십니다. 그리고 그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순명이 가능합니다. 순명의 전제는 자유이기 때문이지요. 순명이 가치있는 것은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방도가 통하지 않는다면, 선택이라곤 불가능한 불가항력의 상황이라면 그것은 순명이 아닙니다. 강제이지요. 다른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동의하는 것 그래서 순명이 귀하고 값진 것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동의에 기초합니다. 권력의 행사에 대한 동의, 절차의 정당성에 대한 동의, 한 사회를 꾸려나갈 어떤 방식을 채택할 것인가에 대한 동의가 그것입니다. 동의없이 억지로, 할 수 없이 혹은 독단적으로 행사된 힘은 폭력이고 압제입니다. 하느님은 압제자가 아니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의 마음도 헤아리고 자발적인 ‘예’를 끌어내심으로서 구세사를 펼쳐나가십니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아직 미성숙한 사회가 아닌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일방적인 결정권의 남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순명은 너무 고귀한 가치이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명은 상호순명입니다. 순명이 위에서 아래로만 강요될 때 무리가 따르고, 불만이 급증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의 의견을 들으심으로써 상호순명의 참된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의견을 묻고 생각이 여물기를 기다려주는 것은 우리에게도 하느님께도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 1,13)
복음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식으로라면 군사 정권 시절에, 일제 강점기에 그런 배경입니다. 그 시대가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절 하느님의 말씀이 끊어진지 400년이 넘어가고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던 그런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시대에 거룩한 사람, 준비된 사람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시고자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의인을 하느님께서는 준비하십니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을 준비하시고 노아를 준비하시고 모세를 준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그들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이었던 이들을 준비하십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에게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을 핑계대고 문화를 핑계대고 시대를 핑계되고 그럴 수 없습니다. 여전히 그 어두운 시대에도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후손의 번창은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였기에 불임은 비극일 뿐 아니라 죄로까지 여겼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비극을 겪는 가정을 통해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아픔과 비극과 고난, 모자란 현실 속에 하느님은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 그것은 이 비극을 해결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분향을 할 기회를 사제였던 즈카르야가 얻습니다. 이것은 복권 당첨 보다 어쩌면 어려운 확률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24개조 약 1만 8천명 이상의 사제들이 있었답니다. 그 중에 단 한 명만이 분향하는 사제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가정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육체적으로 불가능해졌을 즈음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도했던 시간마저 다 지나갔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잊을지언정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던 것이죠.
하느님은 기도로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분향하는 동안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거기에 나타납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의 청원이 받아들여졌기에 이제부터 기뻐하고 즐거우리라 말합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기뻐하고 즐거울 일이 이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죠.
즈카르야의 청이 들어졌습니다. 단지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쁨만이 아닙니다. 압제와 타락의 어두운 시대를 끝장내시겠다는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첫 말씀으로 400년의 침묵을 깨시는 것입니다. 응답의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우리 기도에도 즉각 응답하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방이 다 막혀있을 때, 어둠이 짙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 순간, 나의 청원이 하느님 앞에 수용되고 있습니다. 올라가 받아들여집니다.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을 누리게 되는 이가 되겠지요.…더보기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0-23)
함께 하는 것이 무슨 힘이 될까요? 곁에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가면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궁벽한 곳도 아니건만 그때는 왜 그리 멀고도 먼 벽지처럼 여겨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시 변두리의 꼬마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을 그리 좋아했고 여름의 강렬한 햇볕과 겨울의 매서운 바라마저 신나는 마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모깃불 연기가 피워나면 삶아낸 옥수수가 별미였고 화롯불을 뒤적이면 고구마가 반은 타고 반은 익어가고 있었지요. 그리 다 좋았는데 딱 하나, 외갓집에서 화장실 가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지요. 옛날 뒷간은 마당 한 구석에 떨어져있고 밤에는 으스스하기도 했습니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류의 무서운 이야기가 언 듯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칭얼대는 저를 달래놓고 할머니는 문밖에서 서성이셨던 것이죠. 연신 저는 할머니에게 확인했습니다. ‘할머니, 거기 있어.’ ‘응, 여기 있다. 염려마라.’ 몇 번이나 재차 다짐을 받으면서 할머니가 그 바깥에 계심으로 무서운 마음을 달랬던 어린 날의 풍경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든든한 것입니다. 어린 꼬마에게는 그 바깥에 계심만으로 한결 마음이 편안합니다. 함께 함이 가진 강력한 위안과 힘인 것이지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할머니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어린 녀석을 용기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할머니가 하신 일이라곤 그냥 바깥에 계신 것 뿐이었습니다. ‘나 여기 있다. 염려마라.’
예수님의 탄생을 육화/강생이라는 멋진 말로 설명합니다. 육화(肉化)/강생(降生)의 원어는 동일한 라틴어 incarnatio 인데 in+carne 의 합성어이지요. 까르네(carne)는 그냥 '고기'입니다. 푸줏간에 걸려있는 그런 고기 말입니다. 그래서 육화/강생이라 하면 뭔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고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인 것이죠. 그리 말하면 뭔가 불경스러우니 조금 에둘러서 '살을 취하셨다', 이정도로 순화시키곤 합니다만. 애초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최초의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설명하는데 굉장한 곤란을 겪었던 것이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고심 끝에 결국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 전대미문의 사건,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취하신 이 설명 불가능한 구원의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고 직설적인 용어 '육화/강생-incarnatio'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살덩어리 속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부르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육화하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면 찾아낸 것이 '임마누엘'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떨어져 계시지 않은 하느님입니다. 동반의 힘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나 여기 있다. 염려마라’ 다독이시는 하느님입니다. 약속을 잊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를 작정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전례적으로 대림 시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16일까지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림이라면 17일부터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저 아름답고 분위기 좋은 성탄을 지낼 것이 아니라 육화/강생의 임마누엘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함께 함의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
세자 요한야말로 당대의 영적 스타로 요즘 표현을 빌자면 핫한 인물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던 것이죠.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서편에 출현하여 종교 쇄신의 기치를 높이 들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밀려오는 압제와 종교적인 매너리즘으로 인해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이들을 향해 위로하거나,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요한은 이 피폐한 백성을 향해 ‘걱정마라.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긍정의 심리학이 횡행하지 않습니까? 많은 이들이 긍정의 신학의 내걸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너에게 힘을 주신다’, ‘믿고 기다려라’ 그런 류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메시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곧 어찌보면 우리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질책하는 메시지, 가시 돋힌 그 선포가 전해지고 자신들의 죄를 폭로하는 그 말씀이 울려 퍼지자 그 앞에 모두 모여왔다는 것이죠. 위로 앞에 백성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징계와 질책의 메시지 앞에 몰려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죠. 언어적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말 달콤한 말 하면서 ‘ 너는 이겨낼거야. 승리할꺼야 괜찮을 거야’-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이었던 것이죠. 요한은 언어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그들을 위로했던 것이죠. 세례자 요한에게 나가면 그의 메시즈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에게 오면 바리사이 율법학자에게 볼 수 없던 영적인 하늘의 능력을 맛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메시지는 질책이었으나 오히려 하느님과의 만남이 가능했고, 이 메시지가 그들에게 참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언어가 중요하다지만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하게 아무리 유려하게 해도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만 못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도 그것은 사람에게 힘을 주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면 징계의 메시지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질책이나 책망의 메시지도 오히려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이죠.
사실 사람들이 몰려들 이유가 세자 요한에게는 없습니다. 거기는 광야입니다. 험한 곳이고 몫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질책의 언어로 오히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그런데도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었기에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내가 하느님의 사람인가-그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면 그 광야가 중심이 되는 일을 목격하게 되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태 17,10-13)
타볼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의 현현과 함께한 시간 이후 제자들에게는 의문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그렇다 치고 왜 하필 엘리야일까? 다른 많은 예언자들을 제치고 엘리야가 함께 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었던 것이죠. 엘리야는 그리고 예수님이 이 시대의 엘리야라고 생각하신 세례자 요한은 시대의 희생양이었음을 제자들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희생양으로 제물로 바쳐질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유다 풍습에는 유다 달력으로 대속죄일에 온 백성의 죄를 씌워 광야로 양을 내쫓았습니다. 이런 의식은 옛 것을 죽여 새로운 창조, 출발을 이룬다는 희생제의였습니다. 다른 문화권에도 유사한 풍습과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재해나 기근으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구조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몇 사람에게 전가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희생되는 이를 ‘파르마코스’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가장 약한 자를 제거했던 것이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시키는 손쉬운 방식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희생양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피해자’ 정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일반적으로는 특정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엄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대충 연관이 있어 보이는 ‘만만한’ 상대를 찾아 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응징하여 ‘문제가 사라졌다’고 여론을 조작하는 수단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이 이용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요한은 그리고 예수님은 억울하게 몰려 세상의 적개심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희생양이지만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와 불의를 명백히 드러냄을 통해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로하였던 것이죠.
희생양이 죽으면 대체로 문제는 봉합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것이죠. 그러나 희생양 예수는 다릅니다. 오히려 문제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 희생을 통해 이제 새로운 질문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가 죄인인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외면하는 우리가 죄인인가? 광야의 예언자로 회개의 세례를 베푼 요한이 죄인인가? 새로운 삶을 거부하고 옛 삶에 파묻힌 우리가 죄인인가?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스스로를 내어던진 저 나자렛 사람이 죄인인가? 그를 못박아 처형한 우리가 죄인인가? 이런 질문들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희생양을 통해 어떤 사회나 공동체가 원상 회복되고 안정화되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희생양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감추어진 우리의 죄악과 실패, 상처와 아픔을 오히려 더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엘리야가 이스라엘 국가에 만연한 우상 숭배를 질타하였고 요한은 당대 기득권의 부패와 타락을 고발하였다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민낯이 더 철저하게 폭로되어야 새로운 살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닌지? 昢凉 神父… 더보기
아이들이 놀이할 때 배역을 설정합니다. 혼인잔치 놀이에는 신랑 신부가 있고 하객이 있고, 장례 놀이에는 상주가 있고 조문객도 있고 그렇겠죠. 그런데 애들이 노래 부르면 띵까띵까, 박수도 쳐주고 덩실덩실 춤도 추고 슬픔에 잠겨 곡하면 같이 울어주고 아이고 아이고 뭐 이래야 노는 맛이 날텐데-안하더라는 것이죠. 소꿉 장난할 때 아이들은 본 것을 보고 따라합니다. ‘당신 들어왔어요.’ ‘여보 밥 차려’ 뭐 이래야 장단이 맞죠. 그런데 꼭 삐뚤어진 친구들 있어요. 동조 안하는 아이들이죠. 모두 노래방 가자는데 꼭 혼자만 기도하자는 사람, 분위기 너무 못맞추는 것이죠. 복음에 등장하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 놀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그들은 누구입니까?
장터에 노는 아이는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동조하는 않는 아이죠. 춤추지 않고 가슴치지 않는 그 삐딱한 아이는 실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요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문화 전통 가치 관습에 따르지 않았어요. 걸핏하면 율법을 자유롭게 어기실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무시하시기도 하셨죠. 전통을 깨고 전통에 도전하셨습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죠. 요한도 그렇습니다. 불의 심판을 선포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죠. 누가 예수님이 그저 온유하기만 하다고 하나요. 세상이 메시아에 대해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그분은 정면으로 반대하셨습니다. 왕궁에 영광스럽게 입궐하는 메시아가 되려 하지 않으셨고 요한도 그런 삶을 거절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 먹으며 왕궁의 정반대 장소 광야에서 그 시대의 가치를 쫓지 않고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시대의 가치 전통 문화 정반대의 길이 예수님과 요한의 공통점이에요.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만 이 세대가 어떻다는 것인가요. 아이들의 놀이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 예수님과 요한에 대해 온갖 비난을 쏟았습니다.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그들은 마귀가 들렸다, 미친 것 아니야-그런 대접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트렌드, 경향과 대세와 가치를 따라서 살면 좋으련만 왕궁으로 들어가 권력도 잡고 그러면 좋으련만. 요한은 광야로 가서 메뚜기 먹고 가죽옷 입고 주님 오시는 길을 준비하더란 것이죠. 예수님도 어떻게 취급되었나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힐난합니다. 가시는 곳마다 잔치 벌이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자처하신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전통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죠. 창녀들과 어울리고 낮은자, 병든자와 함께하고. 결혼식, 장례식 놀이하던 이들 그 세대, 특히 바리사이 율법학자 정통 유다인들과 달랐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일절 대꾸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무감각함의 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그리스도의 백성인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와 흐름과 대세에 함께 춤추고 함께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오른쪽으로 살아도 하느님이 가라시는 왼쪽 길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같이 널뛰지 말라는 것이에요. 세상이 그렇다고 나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변명하쟎아요. 옆집 애 학원 보내니까 우리애도 학원 보내죠. 뭐 하는줄도 모르고 그냥 학원만 보내면 장땡이에요. 그러나 그때 세상이 그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고 그 때, 모두가 통곡할 때 꿋꿋하게 서서 우리가 가도록 명해진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입니다. 세상이 춤추자고 같이 울자고 요구할 때 거기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거기에 널뛰지않고 거기에 같이 춤추고 같이 통곡하지 않고 주님 가라신 길을 가는 지혜말입니다. 손해보고 억울하고 깎여지고 바보소리 듣고 뒤쳐졌다고 하고 그런 삶을 살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 그러니까 우리가 가야하는 길은 무슨 길인가요. 마이 웨이-나의 길입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주님이 아니라시면 아닌 그 길. 昢凉 神父… 더보기
“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1,15)
세례자 요한, 그의 위대함은 사실 세례자라는 말 안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같은 호가 아닙니다. 요한의 사명과 활동을 요약하는 명칭입니다. 그는 세례를 베푸는 자였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수많은 백성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 몰려 들었죠. 세례가 뭐길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에 열광하였을까요. 우리에게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입문 성사입니다. 세례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재생의 세례다 그럽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일차적으로는 회개의 표시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에 항상 먼저 전제되는 것은 죄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한 교회의 신자가 되었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율법의 전통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율법의 종교인 유다교가 온 사회를 장악하던 시절, 사람들은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너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때였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적 열정이 더 타오르던 때죠. 그런데 죄를 용서받으려면 율법은 너무 요구하는 것이 많고 복잡합니다. 이를테면 절차가 많고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걸리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완수해야 죄의 용서를 받는다-이것이 율법의 요구였죠. 요한은 이것을 뒤짚었습니다. 죄의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느냐? ‘회개를 통해서’,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각 개인의 주관적 결단의 문제가 된 것이죠.
‘너 용서받고 싶으냐? 하느님으로부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새 마음으로 살겠다는 의지, 결심 가지고 과거의 단절하겠다는 단호함 가지고 나오라! -이것이 요한의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절차도 간단합니다. 회개하였다는 표지로 물에 잠겼다고 일어나면 족하다는 것, 비용도 안들고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열광합니다. ‘그렇구나. 하느님은 우리가 새롭게 살기를 원하시는구나. 율법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옭아맬 필요 없구나. 내가 하느님 앞에서 바르게 살겠노라 하면 그것을 받아주시는구나.’ 요한의 세례 운동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큰 인물인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을 요한이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죠. 그런데 이 요한의 세례 운동이 위기에 부딪친 것이에요. 오늘 그 말씀입니다. 폭행을 당하고 있데요. 요한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 시대를 여는 엘리야와 같이 사명을 받아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바꾸어 놓고 있었지만, 권력은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죠. 요한을 제거하기 위한 힘있는 이들, 권력의 행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안에서 새로워지려는 몸부림 안에서 주님이 오신 것이죠. 그 희생이 밑바탕이 되어서 메시아 시대가 열렸습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흘린 수많은 희생의 댓가로, 이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 정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는지. 고통의 과거를 잊으면 현재의 의미를 놓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요한이 놓은 주춧돌. 그 위로 이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란 말이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런데 요한 보다 더 크데요. 요한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면 다가온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의 그 희생, 그 메시지 그것보다 사실은 더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죠. 무임승차 안된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무슨 말씀인가요. ‘너희 각오 되어 있지. 너희 이 모든 것 다 견딜 수 있있지.’ 그런 뜻이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사는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고난이 닥쳐와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욕심이 많아서 지지 않아도 되는 짐까지 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집도 집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문제 다 해결할 수 없고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짊어질 한계를 넘어 질 수도 없는짐 심지어 남의 짐까지 다 떠안고 힘들어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예전에는 아이가 일곱여덟, 열둘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떻게 다 키울 수 있을까요? 일이삼 낳아 어느 정도 자라면 형 누나들이 사오륙 번 동생들 키우더랍니다. 부모라고 모든 것 다 책임지지 않았던 것이죠. 아이가 많으니 하나하나 챙기고 해결하는 것이 역부족이지만, 알아서 자율적으로 크는 것이죠. 그렇게 맡기고 살아냈던 것입니다. 그래도 대개 문제 없이 다 크더라는 것이죠. 요즘은 아이 하나, 둘 대부분입니다. 아이 셋은 부의 척도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니 자식에 대한 애정 강도가 어마어마합니다. 부모로서 할 분량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하려니 부담이 너무 큽니다. 열 명 키울 때보다 오히려 한 명 키울 때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지 말아야 할 짐까지 다 지려다보니 그런 것 아닐까요.
나도 내 인생의 짐을 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다 해결한단 말입니까? 맡겨드려야죠. 그걸 못하니까 짐이 자꾸 무거워집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무슨 말씀인가요?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 건강 문제 이런 저런 무슨 문제든 자꾸 내가 짊어질 수 없는 짐인데 짐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됩니다. 결국 고생하고 짐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가야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그리 가서 맡기고 쉬는 것이 답입니다. 복잡하게 살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우리에게는 한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오로지 주님만! 짐이 왜 무거운가요. ‘오로지 주님만’! 이걸 놓치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려니까 복잡해집니다. 주님만이 나의 약속이다- 이것을 기억해야죠. 나무가 오래 살쟎아요. 4700년된 것도 있데요. 세콰이아란 종류는 밑둥이 수십미터에요. 이스라엘에는 이사야시대 나무도 있다네요. 우리나라는 용문산 은행나무, 신라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그 나무도 있습니다. 크기도 크지만 풍파를 이긴 풍채가 늠름하고 신성해요. 오래 사는 이유는 한군데 오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싸돌아 다니니 다양한 데 노출되고 그만큼 위험하죠. 나무는 대개 한자리에 뿌리 내리고 죽으나 사나 그 자리 오직 하나에 집중하죠. 대부분 한가지 붙들면 이기고 천년 이천년 지나도 이기는 힘이 있다-우리에게 나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거죠. 오직 하나에 뿌리 내리는 그럼 힘. 오직 예수님께 머무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정착지가 되는 것이죠.
곧 다른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짐은 내려놓으니 갈등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가면 멍에를 주시죠. 안식이 있는데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지는 안식이래요.
내짐은 누가 지어주나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짐은 누가 지어주나요. 내가! 그렇게 서로 짐을 대신 바꿔지는 것이죠. 그런데 나의 짐은 어떻다구요 무거운 짐! 예수님의 짐은 어떤 짐? 가벼운 짐! 바꿔지니 한결 수월하다는 것이죠.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래요. 내가 남의 짐을 져주고 다른 이가 내 짐을 져주고 이것이 서로 상승하면서 행복해지는 길이죠. 자기 짐을 지면 무거워요. 그런데 남의 짐을 지면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죠. 교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바로 그것입니다. 아 저 형제 힘든 일 있네...내 내가 좀 덜어 주어야겠네. 세상에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서로 짐져주는 그런 사랑입니다.…더보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2-14)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이 우리 안에, 목자 곁에 있습니다. 말 잘 듣고 순하고 괜찮은 양들입니다. 길을 잃은 양은 어쩌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바깥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하고, 곁에 있는 동료 양들이 지겨워 지기 시작합니다. 먼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납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린 것이 벌써 오래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길을 잃었죠. 사실은 길을 잃은 것은 우연히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죠. 길을 잃은 것이라기보다는 가출한 양이었던 것이죠.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뿐이죠. 한 마리는 숫적으로 작아요. 차라리 다른 아흔아홉 마리에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 필요하죠. 그런데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미아 되었을 때 누구 책임인가요? 아이 책임인가요. 엄마 손 꼭 잡고 다니란 말 죽어라 안듣는 말썽장이 아이 책임인가요?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아이 잃으면 모든 부모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어! 이렇게 못된 부모 없습니다.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어! 이렇게 냉정한 목자 없습니다. 내가 더 주의 깊게 살폈어야 했는데 내가 문제였다며 무한책임을 집니다. 목자이신 하느님은 그 양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애달파하고 다시 찾았을 때 기뻐 어쩔줄 몰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내 책임이야’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내 탓이오 하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탓이라고 책임을 통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포기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다시 찾아야만 합니다. 길 잃고 어느 구덩이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길잃은 양을 찾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신주단지처럼 모셨고, 율법 바깥에 있는 이들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구원에서 배제된 사람은 같은 백성이 아니었죠. 우리 바깥에 있는 이들. 목자의 품을 떠난 이들. 그들에게는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죄인과 어울리셨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고, 모른 척 하지 않고 끝까지 그들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부활 이후 ‘내 양들을 돌보아라’ 당부하셨습니다. 그 양들은 어떤 양들인가요. 처음엔 환호했지만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친 이들, 목자를 외면하고 등진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 양들을 돌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양인 그가 잃은 것은 길이신 주님이었던 것이죠. 주님이 그를 방치한 것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그가 품고 있던 부질없는 의혹이 그렇게 만든 것이죠. 우리에겐 가야할 길이 필요합니다. 길은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엉뚱한 길은 목적지에서 어긋나게 하죠. 당신이 갈 길, 어디입니까? 오늘은 어느 길에서 서성이고 있는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5,24-25)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곳에서 현존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거기에도 아픈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그 자리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곧 예수님과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무슨 이야기 하나 사찰하고 감시하려는 의도도 좀 있었겠지요. 그때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풍병자 한 명을 사람들이 기묘한 방법으로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기와를 걷어내고 지붕에서 그를 내려서 말이죠. 하늘에서 내려 온 병자! 사람들 때문에 주님께로 가는 길이 막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접근 불가능한 길을 그 친구들이 뚫어 줍니다.
마비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 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보행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사용하지만 여기 저기 길마다 턱이 너무 높습니다. 갈 수 없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실제적 보행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노력은 우리 시대에 기와를 뜯고 지붕을 걷어 마비된 이를 예수님께 내리는 역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몸이 낫는 것 보다 죄의 용서가 먼저였습니다. ‘그들의 믿음’, 그것을 보셨습니다. 아픈 이의 믿음은 아직 언급되지 않습니다. 친구의 아픔에 대한 절실한 안타까움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가족 중에 친구 중에 오래 아픈 사람이 있어본 사람은 압니다. 누군가 신통한 치료법이 있다고 한다면 서두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마비된 중풍 병자, 그리고 아직 예수님께 대한 어떤 구체적인 믿음은 아니지만 친구의 아픔에 무엇이라도 하고픈 그러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를 들것에 데리고 와 지붕을 벗겨서라도 예수라는 저 신통하다는 사람 앞에 내려놓을 일 밖에 없는 그들. 모두가 답답하기만한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위시해 모든 이들은 치유를 원했지만 예수님이 먼저 선포하신 것은 용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선포를 두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소위 괜찮은 자들의 항의입니다.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범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항의는 중풍병자의 완전한 치유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선언하셨을 때 아직 중풍병자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의 항의를 거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이 어떤 것인지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고쳐진 이는 마비되었던 그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들고 왔던 이들과 심지어 예수님의 권한 행사에 딴지를 걸던 이들마저도 고쳐졌습니다. 왜나햐면 이 일을 겪은 모든 이들의 반응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였던 것입니다. ‘신기한 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그리스어로 파라독사, 영어로 우리가 패러독스라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보통 ‘역설’이라고 알아듣는 그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에서 패러독스를 보았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일을 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예수라는 저 청년 예언자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기대를 품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 모두가 고쳐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죠. 믿음의 패러독스로 채워지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역사의 주연일 수 있었으나 조연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당시 요한의 추종자는 어마어마했고, 그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분위기 속에서 찬물 끼얹는 소리를 스스로 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르 1,7-8)
난 별것 아니야. 난 대단하지 않아-하고 선언해버린 것이죠.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받으실 스포트라이트를 즐기기 않았습니다. 그요 주님께 향하는 이정표 역할만 했습니다. 이정표는 목적지가 아니죠. 이정표는 목적지를 가르쳐주면 그뿐입니다. 이정표를 보고 주님과의 거리가 얼마 남았구나, 더 가야하는 구나-방향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이정표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 보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죠. 자기는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이가 자기를 지켜보니까 자기가 목적지인양 착각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즐깁니다. 자기의 영광과 자랑이 늘어나서 계속해서 이정표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정표이면서 온갖 것으로 꾸며서 마치 목적지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정표만 바라보면 사고가 납니다. 이정표는요 잠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슬쩍 보고 가는 것이죠.
좋은 지도자는 단순해야 합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단순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정표에 신경쓰지 말고 스쳐 지나가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목적지로 더 갈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더 깊이 주님을 알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이정표로 세워진 이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교회 안의 주교나 사제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은 당시 뜨는 입장이었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성당 옆에 이를테면 예수님 본당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때 요한은 자신이 소개하는 바로 저리로 그리스도께로 가라고 사람들을 재촉합니다. 나를 밟고 올라가서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를 밟고 목적지로 가면 나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사라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없이 물러나고 사라지는 것,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을 했어,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박수받기를 원하죠. 그러나 거기까지에요. 이 일을 했지만 박수받기 원하는 순간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죠. 해야할 일 하고 당연한 일 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가 한 일, 당연한 일인데 자랑하는 사람 있을까요? 세수 하는 것, 자랑하나요. 밥먹는 것 자랑하나요. 당연한 일이쟎아요. 그런데 당연히 해야할 일 자랑해서 오히려 넘어지고 무너진단 말이죠. 요한은 세상의 박수와 갈채가 쏟아지지만 자신은 광야에 외치는 사람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소리는 메시지만 남긴 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뒤안길로 이렇게 사라지려는 요한을 하느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어요. 그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받고 사라지려는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를 높여 주시죠. 내가 작아지니 오히려 높여주시는 역설을 요한을 통해 배웁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알게되면 될수록 느껴지는 것은 난 그렇게는 못살겠다-그런 생각입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예수님은 방랑 설교자셨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아니죠. 집도 본당도 없이 그래야 하나요. 하여간 떠돌이의 삶이었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음식을 드실 겨를도 마땅찮은 극단의 삶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형 겪지 않으셨더라도 제가 보기엔 그런 라이프 스타일로는 어차피 40대 과로사하시기 딱 좋은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요. 누가 그렇게 하라하면 할 수 있었을까요. 점점 편해지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신학교 들어오니 모든 것이 낯설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선배님도 어렵고 신부님도 어렵고 규율도 힘들고 공부도 기도도 영 그렇고 그렇게 실수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 시절만 지나라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학년이 올라가고 방학 때면 본당에서 나름 고생도 하고 복학해서 이제 신학생 태가 좀 나더군요. 그래서 좀 살만해지려나 싶으면 꼭 한두 가지씩 예상 못한 어려움이 돌출하여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어이어이하여 사제가 되어 뭔가 근사해진 것 같은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죠. 실수와 허점으로 허우적이다보니 시간만 자꾸 쌓여가게 되었던 것이죠. 삶은 편해졌을지 모르나 마음은 정체된 채로 남아 있을 때가 많음을 재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뭐 좋은 일이라고 당신도 떠돌이로 이 고을 저 마을 다니시면서 별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일, 잠깐만 호응했다가 이내 자기 유익을 찾는 괘씸한 이들임에도 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신 것일까요? 게다가 제자들마저 불러 모으셔서 당신이 하신 일과 똑같이 그렇게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가서 하늘나라의 현존을 전하라고, 치유하고 세우고 온전하게 하고 정화시키라고 그것도 댓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고 동참을 촉구하시냔 말이죠. 나 혼자서는 힘드니까 거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선가요?
우리 주님이 그런 고단한 삶을 사시고 제자들에게 목자로서의 일을 맡기신 까닭은 딱 한가지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불쌍해서에요. 불쌍한 겁니다. 안된 거에요. 이 백성들이 시달리는 그 모습이 절대 남의 일이 아닌 것이에요. 그 연민이, 그 공감이, 그 사랑이, 그 안타까움이 예수님을 움직인 절대적이고 유일한 동인입니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죠. 어떻게든 해결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죠.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가식 서가숙하고 이해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받는 표적이 되면서까지 가엾은 그 마음,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으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골고타 십자가까지 걸어가신 것이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래서 그 마음입니다. 내가 장차 만나게 될 그 신자들, 그 사람들을 가엾어하는 마음. 세상에서 상처받고 경제적으로 쩔쩔매고 직장에서는 오늘 그만둬야하나 내일 자리를 빼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이들, 학교에서 외면당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는 안된다고 자책하는 친구들. 가정이 붕괴되어 뿔뿔히 살고 있는 많은 우리 시대의 가족들. 수명은 늘어났는데 마땅히 살 길이 없는 노인들. 졸업한지 몇 년인데 최저시급 알바자리를 전전하는 젊은이들. 그래서 누가 물어볼까봐 성당에 나올 수 없는 그런 이들. 한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우리 역시 각자의 느낌안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단한 삶을 이겨내신 그 원동력이 가엾은 이들을 향한 절절한 그 마음 때문이었듯 힘들고 어렵고 불평이 생길 때 그 모두를 이겨내는 우리의 원동력도 목자없이 길잃고 있는 이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되길 원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어떤 일을 맡긴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입니다.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일하느라 피곤할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충만한 일이 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파견됩니다. 그리고 적합한 이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냅니다. 아무나 쓰임받는 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음이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선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를 쓰신다는 것이죠. 기업 수뇌부, 조직의 의사결정자라면 그 회사, 조직의 목적과 이념이 성취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쓸 것입니다. 실력은 있어도 자기 목적만 앞세우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나의 행복과 일치시킬 때 그런 이가 쓰임받습니다. 처녀 잉태라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마리아의 고백은,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하느님 뜻이 담긴 말씀이 정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였습니다. 말씀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이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기복적인 색채가 점점 짙어가는 시대, 우리 신앙 상황도 그에서 자유롭지 않은 그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그 원칙을 더 굳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뜻에 대한 간절함이 우리 발걸음을 채워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온전해 집니다.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주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의 첫 출발은 마리아가 그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뜻에 대해 댓가를 지불하려는 이를 하느님께서 쓰십니다. 마리아는 주님 뜻의 성취를 원했지만, 그런데 그 방법은 상당히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처녀수태, 상상을 초월하는 그러니 부담스럽고 선뜻 ‘예’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니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만 방법은 부담스럽습니다. 치루어야할 댓가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비난, 수군거림, 집안 망신 시켰다는 심각한 문제, 정혼한 이에게 겪을 수 있는 오해, 어쩌면 죽음에까지.
그런데 마리아의 결정은 그 댓가를 치룰 것이며,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대접을 받아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댓가만이 아니라 손해와 고통과 어려움의 댓가 마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외면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뜻에 대한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죠. 그러나 그 뜻을 현실화할 때 따르는 어려움은 부정하게 되는 것이죠. 짊어질 것이 싫은 것이죠.
그러나 은총과 고난은 함께 갑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댓가와 같이 가는 것이죠. 그러니 댓가를 요구하셔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죠. 원래 그렇고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 기꺼이 댓가를 치르고자 할 때 주님 뜻이 완성되어 가는 이 신비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그 삶을 통하여 이끌어가시는 체험을 맛보게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2)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에 대한 말씀을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대조로 알아듣게 됩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른 이면의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의 앞뒤를 함께 보는 것,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이 대목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다음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8-29)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 중심의 가르침을 주는 율법 학자들과 달랐다는 것이죠.
또 하필이면 오늘 복음은 21절하고 두 절을 생략한 후 24절로 이어집니다. 빠진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2-23) 주님께 사람들이 와서 읍소합니다. 예언도 하고 마귀도 일으키고 기적도 일으켰데요. 분명 그들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한다고 행한 사람들입니다. 행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다 한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의 목록이죠. 그런데 그들이 실상 뭘 행하고 있는가하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실천했는데 실은 불법을 행한 이 난감한 상황.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40)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뭘 행하는 것에 앞서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다고 하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선행하고 더 열심히 자선을 베풀고 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을 느낀다는 것이죠. 그것을 예수님은 오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고 훌륭하고 대단하죠. 그런데 왜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은 결국 내 영광을 드높이는 일에 지나지 않고 아들을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특한 모습이지만 하느님의 영광과는 무관합니다. 주님하고 불렀지만 그뿐이죠. 예수님의 공로와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반석 위의 집은 뭡니까? 하느님의 은총 앞에, 그분의 선하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베푼 선행, 희생, 봉사, 봉헌, 헌신, 노력의 결과로 구원되는 것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특하고 착한 행위지만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거나 자기 만족을 향한 것이라면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껏 애를 썼건만 헛수고 모래 위에 열심히 쌓았단 말이죠. 엉터리 행함이었어요.
가톨릭 신자들은 실천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더 잘 했어야 하는데,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자책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며 스스로를 죽은 믿음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더 좋은 행함으로 나가느냐? 경험상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살던 대로 그냥 살아 갑니다. 우리의 행함이 나에게서 나와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저 후회만 합니다, 반석으로부터 선함과 희생과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과 그 모든 것이 나옵니다. 내가 반석일리 없습니다. 반석되신 분은 따로 계심을 인정하고 거기에 터하여 나오는 선함과 희생과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이어야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가야겠지요. 그러나 그 열심이 자칫하면 모래 위의 집이 되어 붕괴하지 않는지를 보는 영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이미 마태오 복음 14장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그 기적 말입니다. 그런데 즉시 15장에는 칠병땡어(?-여기서는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의 기적이 연이어 나옵니다. 먹었다는 사람은 사천 명이고 남았다는 빵 부스러기는 일곱 바구니입니다.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뭐 중요한 이야기이고 복음 사가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인 사건이어서 두 번 반복하였나보다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의미들도 있습니다. 사실 오병이어 이야기가 너무 잘 알려져서 칠병땡어 이야기는 양념처럼 언급되거나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칠병땡어 왕따 현상이라고 할까요.
오병이어 기적은 유다인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칠병땡어의 기적은 이방인들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선택된 이들이 점점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금 더 유심히 보면 오병이어 기적 후에 남은 빵 조각이 담긴 것은 광주리이고 칠병땡어 기적 후에 남은 빵 조각이 담긴 것은 바구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번역자가 고심 끝에 구별해놓고 있습니다. 광주리는 희랍어로 코피노스인데 유다인들이 종교적 율법에 따라 만든 음식을 담는 그릇입니다. 바구니는 스퓌리스인데 그냥 일반적인 그릇입니다. 또 알다시피 열둘이라는 숫자는 유다인들의 지파 숫자이고 일곱은 당대 이방인 지역의 일곱 족속을 지칭하는 숫자입니다. 기적이 유다인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넘어 보편적인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땡어 기적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비유다인인 우리에게는 칠병땡어 기적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오병이어에 첨부된 기적 속편 정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여하간 이 기적의 근본적 동인은 예수님이 당신 곁에 머물던 군중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셨다는데 있습니다. 가엾어 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극치 아닐까요. 처음에야 상대의 매력 때문에 사랑하고, 내게 잘해주는 그 마음에 홀려서 사랑하고, 심지어 뭔가 얻어낼 것이 있어서 사랑할 수 있지만 어디 사랑이란게 그런가요. 결국 오래 지내다 보면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 온갖 약점과 허물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매력도 사라지고 잘해주는 마음도 시들어가고 뭔가 얻어낼 것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실은 가엾고 측은하고 안되 보여서인 것이죠. 그가 불쌍해 보입니다. 그런데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살고 의리로도 살지만 마침내는 가엾어서 삽니다. 괜히 미운 마음 들다가도 쌓인 세월에 늙고 초라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가엾어 보이는 것이죠. 하여 뭐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는 당신 곁의 군중들이 그랬다는 것이죠. 저 가엾은 이들, 혹여 배곯고 힘들까 안쓰러워해주는 마음. 사랑이 뭐 별거인가요. 그저 그런 마음이 불쑥 올라오면 마땅히 사랑인 것이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24)
복음에 직접 기록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표정은 드뭅니다. 그런데 오늘은 터질 듯이 즐거워하셨다는 것이죠.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그래서 그냥 즐거움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터질 듯한 기쁨, 주체할 수 없는 그런 기쁨.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기쁨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안에 드러나는 기쁨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동안은 감추어져있던 것을 철부지같은 제자들을 통해 드러내셨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지혜란 바로 아들을 알고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에게 복 있음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주님이 제자들에게 드러났기 때문에 너희는 행복한 이들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그동안은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입니다. 계시 이전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고 큰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너희에게 그것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수많은 예언자와 왕들이 보기를 원했던 하느님의 최고의 지혜이고 최고의 사랑이고 최고의 섭리인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 그것이 제자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이유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거둔 엄청난 업적에 도취되어서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칠까봐 염려하신 것이죠. 그래서 그들을 불러 따로 이르신 것이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맛보고 경험하는 것, 그것을 이땅에서 누리는 것만이 우리가 이땅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는 것이죠. 업적이 아니고 성과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의 성과가 혹은 우리의 직분이 제자로 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것 그 체험이 우리를 제자로 서게 한 본질적인 이유라는 것이죠. 그들이 지닌 권능, 그것이 대단하다 해도 주님의 사랑에 비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죠. 그들의 거둔 성과 그것이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해도 주님의 신비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은 것이죠.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일 뿐인 권능과 성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가 담고 경험하고 기억할 때 내가 한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게끔 하신 하느님이 드러나신 사실 오늘 그 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능력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더 가까워지는 것뿐이라는 것. 성과를 거두고 온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듯 있어야 할 것은 그것 뿐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 (마태 8,7)
내가 아파서 고쳐달라-기도할 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파서 고쳐달라-부탁할 때도 필요한 것은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해서 자기 믿음을 사용하면 예수님이 놀라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믿음’을 못보았다 극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믿음을 사용해서 타인의 병을 낫게 하고자 청하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그 영향의 범위가 확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을 통해서 믿음의 바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주변에 좋은 믿음 가진 사람 흉내 내고 제대로 따라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방인이지만 본보기가 될만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통해 주변 사람을 자극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을 동경하게 되면 자극이 됩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럴 때 역할 모델이 있으면 뚜렷한 목표가 생깁니다. 극찬을 받은 백인대장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다른 이를 돌아볼 줄 아는 관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자신의 하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주인, 혹여 그 하인이 측근이라서 그럴까요. 루카 복음 병행 대목을 보면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지배민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곧 타인 중심적 사람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마저 인정받고 있는 이방인 이었던 것이죠.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사랑한 일본인, 뭐 그정도였다고 할까요. 이렇게 관계 속에서 그의 믿음은 인격으로 표현됩니다. 그에게는 받은 믿음이 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흐르는 통로여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야 그 믿음은 진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존의 틀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었지만, 그러나 억압과 착취라는 틀을 쓰지 않고 배려와 존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주인과 종의 수직적 상하관계라는 손쉬운 틀 안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틀을 깨드리는 사람이 신선한 새바람을 공급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교회는 세상의 구태에서 벗어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믿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의 주재자 통치자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에 예수님이 감격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렇게 된다고 믿는 그 믿음말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제 상황이 어떤지 아세요’하고 토를 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논리적으로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반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성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그 순전함이 있다면 오늘 주님을 감탄하게 하는 믿음이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로부터, 나로부터.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마르 13,33)
오늘 네 번이나 깨어 있어라- 짧은 복음안에서 반복됩니다.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다시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는 깨어짐입니다. 잠든 상태에서 일어나서 깨어 있음과 깨어짐, 외부 충격에 의해서 산산조각나는 것 두 말은 다르지만 뭔가 연결점이 있습니다. 깨어짐은 기존의 것들을 파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기존의 관습적 삶에서 깨어지지 않으면 깨어있지 못합니다. 하던 대로 계속하게 되면 지루해지고 금방 식상해서 잠이 옵니다. 매력이 없고 새롭지 않으니 지칩니다. 그러니 깨어진 자만이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하느님 앞에 자기 존재가 밑바닥까지 깨어져야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모르는 때와 시를 감추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깨어있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깨지기를 피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구나, 내가 거둔 성과란 것이 실상은 보잘 것 없구나 깨지는 것이죠. 깨진 자로서 서있어야 깨어있는자 됩니다.
예수님은 잠이 보약이다라는 말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1/3이 잠이라는데 잠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구요. 하여간 쾌면은 건강의 보증수표다. 잠못잔 아침 얼굴은 얼마나 푸석푸석한지요. 그래서 불면의 고통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지옥 같답니다. 자야합니다. 그러나 자야할 때만 자야합니다. 아무 때나 자면 수면이 질은 떨어집니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잠들 때와 깨어 있을 때가 명확하지 않거나 뒤죽박죽인 경우라는 것이죠. 보면 눈뜨고도 자고 있다. 실제로도 그렇죠. 눈뜨고 자는 사람 무서워요. 또 눈은 안 감겨있지만 영은 잠들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기만 한 것이죠. 죽은 것이나 진배없죠. 또 왔다갔다 그냥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안자는 체하는 자는 사람인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수면상태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수면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할 때 자고 있는 그런 상태요. 복음과 생명의 빛으로 깨어있지 않고 세상의 네온사인으로 채워진 혼돈과 무의식상태에 있는 것 그것이 깨어있지 못한 이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최대의 적은 충분의식이랍니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하느님 잘 섬기는 것이지. 이만큼하면 참 만족스러운 기도생활이지. 스스로 대견하고 흡족해하는 것 그것이 영적 성장의 결정적 걸림돌입니다. 사실 아무리 기도해도 충분하진 않은 것 같아서 언제나 모자람을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 영성의 갈증이어야 하죠. 충분하지 않아.아직 갈길이 많아. 더 진보할 부분이 있어. 스스로의 부족함과 메마름에 대한 불만이 있어야 합니다. C.S. 루이스는 배고픔은 만족을 느껴본 자만이 겪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배부른 포만감을 느껴본 자라야 배고픔의 허기를 안다는 것이에요. 내가 허전하구나 뭔가 먹어야 겠구나 하는 충동은 배불렀던 기억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항상 목마른 이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과 위로를 깊이 체험해본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다시 채워질 갈망과 기다림이 있죠. 거룩한 만족을 못느껴본 이는 그냥 이대로도 괜찮네 나쁘지 않네. 귀찮게 뭘 깨어 기다려-그렇게 됩니다. 이미 도달했기에 목마름이 있는 것이죠.
이미 만나 주님과 친교를 나누었던 기억. 그분이 나를 만지시고 살리시고 이끄셨던 그 기억이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너무 그 때가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다시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전체에서 딱 한 번뿐은 아니겠지 언젠가는 다시 그 순간이 오겠지 하는 절실함이 있을 때, 그렇게 반드시 다시 만나야겠다는 꼭 만나야겠다는 열정이 자리 잡으면 자리에 누울래야 누울 수 없습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의 결연함으로 대림 첫날 시작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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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마지막 순간 조심해야 할 점, 오늘은 예수님의 포인트 과외 같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유의점은 세가지, 방탕 그리고 만취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근심입니다. 이것들은 위험한 것이죠. 방탕한 삶-제멋대로 질서가 없는 삶입니다. 만취, 육체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일상의 근심. 이것이 방탕과 만취만큼 우리에게 치명적이기에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씀. 그렇게 근심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방탕과 만취는 외적인 삶에 관련되니 그렇다쳐도 근심에 대해 이것으로 망할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방탕과 만취의 수준으로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힘이 근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근심은 우리를 무익하게 만듭니다. 근심은 무익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면서도 근심은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곧 걱정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에요. 염려, 혹은 걱정 근심은 효과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만 끼칩니다. 해결책도 되지 못하고 스트레스가 되고 오히려 병의 원인이 되죠. 너무 긴장하면 어깨도 뭉치고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약해지죠.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쓰러집니다. 근심한다. 곧 마음에 힘이 들어갔다 정도일터인데 마음에 들어간 이 힘이 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되게 만든다는 것이죠.
삶의 염려가 우리를 굳어지고 더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근심의 근본 해결책은 하느님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근심이 침투하지 못합니다. 베타니아 방문하실 때 마르타는 손님 대접에 온통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예수님은 베타니아에 먹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죠. 그냥 대충 먹어도 괜찮단 말이죠. 아무렇게나 해도 크게 문제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일상의 근심이 대수롭지 않은 일에 계속 마음 뺏기게 만드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근심 대신에 기도하라고 초대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기도함에 있데요. 당연하죠. 근심과 기도는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근심에서 기쁨으로 넘어가려면 에수님이 우리를 보셔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만 우리를 바라봐서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만 근심은 끝나게 됩니다. 기도는 근심의 종결자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마음 속에 파고드는 근심이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단단히 경계하고 무장하면서 교회는 대림을 시작합니다. 한 해가 고스란히 다 지났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29-33)
나무들이 신록으로 뒤덮이고 산과 들이 푸르러지는 것을 보면 여름이 오는 것을 알게된다. 자연은 나름의 법칙과 질서를 따르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여름 이야기는 너무 철지난 이야기니까 확 와닿지는 않긴 합니다. 오늘 아침에 창을 여니 바람이 조금은 매섭습니다. 이제 엄동설한의 시절이 바짝 다가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12월이고 겨울입니다.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을 보고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상식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상식입니다. 무슨 비밀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상식은 common sense, 공통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상식은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된 사람 보고 우리는 저 사람 상식이 없네, 저 사람 상식이 안 되었네 낙인 찍습니다. 몰상식, 비상식적인 사람, 그와는 한순간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상식적 판단이 부재하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상식입니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입니다. 해마다 더 다가오고 있고 달마다 가까워지고 있고 매시간 한발씩 당겨지고 있다는 상식이죠. 예수님이 오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하늘과 땅과 역사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살펴보고 느끼고 무엇보다도 천지가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을 생명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담아두면 그런 신앙의 상식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기본이라는 것이죠. 신앙의 상식이니까요. 그러니까 상식적인 신앙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긴장이 있는 신앙이라야 건강한 것입니다. 긴장이 없는 신앙은 그래서 몰상식 비상식적인 것이죠.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영적인 텐션을 가지고 삶을 채우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긴장이 사라지고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둔해지고 어두워집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 무뎌집니다. 반면에 세상의 소리와 유혹에는 세심해집니다. 남들이 이목에는 신경이 곤두섭니다. 예수님이 길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영속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에요. 다 사라지고 무너지고 엎어지고 흩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이 지닌 생명력과 회복력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붙들고 품고 새기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 되어야 하죠. 말씀이 안들리기 시작하면 이미 신앙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안에서부터 냉담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반석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온갖 유혹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을 확보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죠. 천지는 스러진답니다. 말씀은 영원하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고 진단하고 평가하며,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여론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믿는 이의 기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오늘도 그래서 이 차가운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가 한겨울 서릿발처럼 긴장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라를 기다리는 긴장은 고통스럽지 않고 풍성한 약속을 기대하는 긴장이기에 편안한 긴장입니다. 편안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런 상태를 누리는 것 그것이 잎이 다 져버린 초겨울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덕목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 4,19-20)
예수님이 시몬 형제와 야고보 형제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부르심에 배를 버리고 그물을 던지고 아버지를 떠나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는 그들의 새 삶은 생계를 위한 일에 더 이상 종사하지 말라는 요구인가? 그리고 예전의 관계-아버지로 표상되는-와의 절연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인가? -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전파의 일을 통해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천막장이의 생계유지 수단을 가지고 있었죠. 베드로 사도에게서 알 수 있듯 초기 교회에서도 그리도 나중에도 상당 기간 동안 가정을 가지고 교회의 봉사직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권장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직업을 버리라는 요구로 즉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가정도 못돌보면서 교회를 잘 섬긴다는 것은 기본이 안된 것이라 여겼습니다다. 가정의 책무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부르심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배와 그물이라고 하는 생계 수단과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의 기초를 버리는 데서 출발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의 나됨을 형성한 시간이고 사건이고 관계이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영향 안에 우리는 놓여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다. 허공에서 생겨나고 자란 사람은 없는 법이죠. 하지만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게 있어왔고 겪은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 한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고 결정적으로 과거의 시간이 나를 구속하고 있음에 묶여 있어서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절은 필요하죠. 그렇지만 연결도 불가피한 것이죠. 다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정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화의 과정이 무엇인가요? 따르는 것이죠. 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방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원천입니다. 무수한 습작을 통해서 명작은 탄생합니다. 그런데 대개 그 습작은 기존에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전혀 뜻밖의 것은 없습니다. 알고 보면 어디선가 다 보고 듣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재해석 재구성의 방식을 창조라고 부를 뿐이죠.
예수님의 따름이라고 하는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여 부름 받은 제자들이 재해석 과거를 재구성 하기를 원하셨죠. 그래서 그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어부로서의 일이 재해석 재구성되어야하는 궁극목표를 말씀하시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낚는 어부입니다. 사람잡는 어부가 아네요. 어부의 일이 재해석 되었죠. 과거의 삶과의 연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밤낮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데 골몰할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데 시간 쏟느라 너무 돌아왔다 후회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나쁜 일이면 어떻습니까? 이 일이 어떻게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재해석 재구성 될 것이냐. 그것을 묵상한다면 꽤 괜찮은 결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나무 심는 사람이나 혹은 건물 짓는 사람이라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는 그들의 과거와 관련된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겠죠. 昢凉 神父… 더보기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끝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즈음 듣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무너진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는다. 모든 관계가 다 무너진다고 예고 하셨죠. 전쟁과 반란, 민족끼리 나라사이의 충돌,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 하늘의 표징 이런 것들이 다 관계의 붕괴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사람 사이의 관계의 붕괴,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붕괴가 있게 된답니다. 그러니 어지간히 시끄럽고 요란하게 된답니다. 무너지는데 조용할 리가 없죠. 옛것이 무너질 때 먼지나고 소음에 진동에 보통 아닙니다.
다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믿는 이들에게는 그 위기 상황이 두렵고 떨리는 순간인 것만이 아니라 호기가 된답니다. 왜 호기인가요?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가 드러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고 하느님께서 놀라운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때가 됩니다. 모든 사람이 미워한데요. 부모형제 친척 친구까지 다 적대적이 되는데 또 어떤 일이에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고 인내로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 생명을 얻게 되는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기 상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딱 드러납니다. 그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죠. 친구들도 밥사주고 같이 비위 맞춰주고 내가 잘해주고 혹은 나 잘나갈 때 나한테 뭐 얻을 것 있을 때는 그들이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연인들도 그렇죠. 같이 데이트하고 알콩달콩 재미진 일이 너무 많아요.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 그럴 때는 사랑하는 것 같죠. 계속 같이 있고만 싶어요. 그런데 그 친구, 내가 정말 힘들게 되었을 때 이를테면 사업하다가 어려워졌어요. 여기저기 다 자금줄도 막혔는데 그래도 내가 그동안 해준 것 있으니 모른척 않겠지. 어떻게든 변통해주겠지. 아니 위로라도 해주겠지. 뭔가 조언이라도 있지 않을까-그런데 어렵게 전화 하면 어때요. 귀신같이 알았나봐요. 내 사정이 어려운 것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딱 차단해놓죠.
위기가 닥치면 그놈이 어떤 놈인지 대번에 알게 된다는 겁니다. 친구 아니였어요. 나한테 뭐 얻을려고 뜯어먹을려고 붙어 있었던 겁니다. 연인도 그렇죠. 힘들게 되면 얼굴빛이 싹 변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결별해요. 오히려 연애 기간에 어려움을 같이 겪어 봐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오죠. 그래서 혼인 면담할 때 꼭 물어보는 것이 같이 연애 얼마나 해봤냐. 저는 기간을 물어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적어도 네 계절 같이 지내라. 왜요? 봄에 멀쩡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가을에 결혼했는데 겨울만 되면 돌변하는 성격일 수 있죠. 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좋을 때 몰라요. 어려울 때만 압니다. 왜 조강지처가 위대한가요. 지게미 겨, 조강(糟糠之妻)입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같이 겪어온 그 사람이 말이죠. 요사를 떨면서 꼬리를 살랑대면서 오빠 사장님 어쩌고 하는 마담언니들, 지지배들하고 비할 데 없는 사람인 것은 그 진심이 어렵고 고단한 가운데 다 입증된 사람이란 말이죠. 끝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그렇죠. 예수님이 어렵고 힘겨운 순간 에 '내가 원하는 것은 축복, 형통이고 은혜인데 하면서 다 떠나는 이 가짜 중의 가짜라 하신 것이죠. 어려운 일만 생기면 생기기도 전에 여수같이 알아채고 발을 쓱 빼는 종자들 있다니까요.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런 사람은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종자라고 하라고. 그런 종자하고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셨어요. 말은 안하지만 딱 알죠. 가짜구나. 진품은, 진짜 친구는, 진짜 사랑하는 이는, 어려움을 같이 겪겠다 이 자세가 먼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짜인가요? 昢凉 神父… 더보기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5-6)
오늘 복음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마사다 성채에서의 최후의 전투 이후 유다인들은 완전히 결단났고 그 이후 유다인들은 떠돌이 유랑민족의 신세가 되었죠. 1948년 2차 대전 이후 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그 시절은 계속되었던 것이죠. 이런 배경하에서 오늘 복음을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읽고 들었던 것입니다.
이 성전은 수십 년간 어마어마한 재원을 동원하여 건설된 성전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면적의 1/4이나 차지하는 규모로 이스라엘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온다-당대의 신심가들이 듣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죠. 돌기둥에 금가는 것이 아니래요. 완전히 깨끗하게 무너진다는 것이죠. 사실 모든 것은 다 사라지기 마련이죠. 지상에서 영속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 위대한 업적도 사라집니다. 그 위대한 인물도 결국 사라지죠.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상전벽해 되기도 하지만 초토화되기도 합니다.
결국 다 사라지고 오직 하느님 말씀과 약속만이 변치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죠. 다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 쓸쓸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좋은 것만 사라집니까? 아니요. 나쁜 것과 험한 것도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돌 하나도 돌 하나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진다.’ 복숭아빛 괜찮던 피부 미인이었고 쌩얼이라죠 민낯으로 나서도 자신 있었습니다. 삼단같은 머리까지는 아니어도 찰랑 찰랑 괜찮았죠.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구요. 작년 이맘때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지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기미도 늘고 잔주름도 생기고 새치인줄 알았는데 흰머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라지는 이런 것들을 멈추게 하고 늦추려고 별 수를 다 쓴단 것이죠. 콜라겐 바르면 좋다니까 열심히 발라요. 열심히 글루코사민 먹어서 뼈 노화 늦추려 해요.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려 하고 나이 들어감을 저지해보고자 합니다 가련하고 애타는 이 모든 노력에 무색하게 그러나 결국은 어떠냐? 사라질 것은 사라지더라는 것이죠.
성전이 다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에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표징이 따르겠느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속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죠. 사기 치는 이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때가 가까웠다고 현혹하는 이들. 무슨 말씀입니까? 속지 말고 사라질 것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는 것이죠. 좋은 것만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사실은 더불어서 나쁜 것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들어가고 쇠약해지지만 사실은 눈꼴 사나운 것 절대로 못참더던 그 급하던 마음도 사라져요. 분노와 미움과 섭섭해하던 일도 점차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안사라진다면 그것은 정말 사라져야하는 것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죠. 사라짐을 묵상하며, 사라지는 것들 붙드느라 애쓸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여야 할 때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1-4)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이야기가 불경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전해집니다. 성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어느 과부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세존께서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각각 신분에 걸맞게 공양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가난한 여인이 한탄합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공양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하여 온종일 구걸하여 한 푼을 마련합니다. 그 한 푼으로 기름을 마련하여 등을 하나 밝혀 석가 세존께 바칩니다. 밤이 깊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수많은 등불이 하나둘씩 꺼져 갑니다. 기름이 충분했던 왕과 고관들의 등불도 꺼져 가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바친 등불은 꺼지지 않고 사방을 밝게 비칩니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도 옷자락으로 흔들어도 그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난타였고 후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과부와 사위국의 가난한 여인은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봉헌과 시주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식으로 자주 해석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성당이든 예배당이든 절집이든 모스크든 부유함을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되면 결국 끝장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수많은 쉬는 신자, 소위 냉담자가 있습니다. 개신교에는 하나님을 믿긴하나 교회에는 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가나안 신자’(교회에 ‘안 나가’를 거꾸로 한 조어입니다. 기발하죠)가 수백 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천 년을 장엄하게 지켜온 불교는 지속적 교세 하락으로 신음하면서도 연일 시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공통적으로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예측합니다.
거룩함과 진리를 추구하나 현실적인 종교 조직에는 속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열렬한 믿음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숨겨져 있습니다. 다만 종교가 제도로 고착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에 모순을 느끼면서 떠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어야 할 이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네가 가르치는 것을 사는 것으로 보이라는 정당한 요구였던 것이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봉헌으로 성당을 세우고 성직자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여러 사업도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업체가 즐비합니다. 세속적 의미에서도 교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외적 성공의 밑바닥에 가난한 과부의 한 닢이 있음을 잊게 되면 우리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호화로운 성당 안에 좌정하시지 않고 살아있는 믿음의 자녀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거리 거리에 계시고 부처님은 장엄한 불단에 주석하시지 않고 고통받는 중생들의 업장 속에 나투시는 것이죠.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그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재림주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부르신답니다. 주님의 호출을 받고 모든 이들이 다 모여왔어요. 그런데 두부모 가르듯 딱 갈라서 두 부류로 나눌 것이다 이거죠. 좌우로 나뉘는데 나누어지는 기준이 뭐냐 이겁니다. 최후 심판의 지침, 주님 대전에서 우리가 치를 시험에 뭐가 나오는지를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시험에 풀어야할 문제는 아주 단순합니다. ‘너, 이 작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니?’ 미소한 자를 향한 나의 태도와 실천! 그것이 예수님이 평가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은 이들이 누굽니까? 키작은 사람이 아니라 누굽니까?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 갈증으로 쓰러지는 이, 떠도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갇힌 이 그러니까 약자들이죠.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주장할 수 있는 힘도 없는 이들 예수님이 작은 자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내 곁에 있으면 나를 번거롭게 만들것이 분명한 사람, 한마디로 귀찮은 이, 구질구질한 사람 그가 누구라구요? 지극히 작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럴 때 있단 말이죠. ‘아무 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바로 그 사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우리가 함부로 하기도 했죠. 왜요?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내가 어떻게 해도 나한테 반발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것이죠. 그렇게 해도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그는 너무 작은 사람어서 내 명성에 아무 훼손을 줄 수 없어요. 내 삶의 영향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그가 바로 지극히 작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땅에서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았어요. 모른 척 해도 아무 탈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 심판대 앞에 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는 겁니다. 아무 영향력 없던 그 작은 자가 나의 구원을 결정한데요. 내가 오른 쪽에 설 것인가 왼쪽에 설 것인가? 그 자격을 누가 결정하나요? 왕으로 심판의 옥좌에 앉으신 주님이 결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주님이 결정하시는 것은 그 작은 자에 대한 나의 태도로 결정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실상은 그 작은 이가 결정하는 겁니다. 그가 작은 사람인 것은 이 땅에서만 작은 것이지 하느님 심판 대전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야 시험에 우리가 통과하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도왔고 함께 했던 내가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자가 사실은 예수님이셨다, 주님이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을 하느님에게서만 찾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안보이시는 분이니 우리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으려면 반드시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가장 작은 자를 찾으면 하느님을 찾는 것이에요. 지겹게 잔소리하는 우리집 마나님, 번번히 시험에 낙방한 애물단지 아들 녀석, 눈에 안뜨이는 것이 오히려 속편한 우리 레지오 아무개 단원. 누구입니까? 내 하느님이시죠. 믿겨지시나요. 昢凉 神父…더보기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루카 34-26)
연세있는 할머니가 신부님 찾아와서 당신이 선종하게 되면 치러질 장례절차를 미리 의논했습니다. ‘신부님, 죽고 나면 화장하고 재를 납골당이 아니라 이마트 주변에 뿌려주세요’, ‘왜요? 하필이면?’, ‘그래야 자식들이 한주에 두 번씩 저를 찾아올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인생의 종지부를 무덤으로 마감하죠. 무하마드는 죽어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인도 쿠시나가라에 말라족의 땅, 사라쌍수 밑에서 열반하시어 화장하셨고 남겨진 사리를 분배하여 처음에는 여덟 개의 불탑에, 후대 아쇼카 왕 시절 다시 이 탑을 해체하여 84,000개의 사리탑에 봉안했죠. 공자님 산동성 곡부 공림에 모셔져 있죠. 결국 죽음이 지배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의 무덤이 있죠. 그러나 빈무덤입니다.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마트에 유골을 뿌려달라던 할머니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죠. 이마트에 쇼핑오는 자녀를 그래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늘 사두가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사두가이들의 주장, 견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땅의 삶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두가이들이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채 사는 사람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죽어가고 있지만 살아있는 삶, 되살아날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사람들이었죠.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있죠. 미래의 부활 믿지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죠. 돈에 탐닉하고 명예에 도취도어 있죠. 그 모습이 예수님께는 죽은 이로 비쳐진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세상은 죽음의 세상이 아니라 부활의 세상, 생명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이 부활신앙을 빈정대는 계략을 아시고 그들을 무력하게 하십니다.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있던 사두가이들에게 바로 그 모세오경을 가지고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시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는 현재형입니다. 오직 살아있는 이만이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면 그들도 살아있는 것이죠. 죽은 그들이 살아있으려면 부활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때 부활은 하느님을 믿는 안에서 죽은 이의 이 세상의 삶이 끝나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의 부활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부활과는 다른 부활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고,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과 주님 다시 오실 때 새 몸을 입고 새 삶을 시작하는 부활의 약속을 보증받은 이들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 매인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 나라로 향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저 세상, 부활의 세상, 생명의 세상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을 간직하면 이 세상이 저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치고 준비하는 참 좋은 시간임을 알기에 이곳에 충실하면서 저곳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에요. 열심히 부활 세상을 달음질치는 이 세상의 하루를 살아갑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5-46)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 일행이 곧장 성전에 들이닥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무엇입니까? 단순한 종교집회의 공간이 아니었죠. 하느님과의 계약과 그분의 말씀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시온산이고 야훼께 대한 신앙의 충절의 상징인 성소였죠. 지상에서 거룩한 곳이 있다면 그곳뿐이었던 것이에요. 성전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질곡의 삶 속에서도 축복과 회생의 희망이 가능했던 것이죠.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지켜온 성전이거든요.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보신 것입니다. 계셔야할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는 없더라는 겁니다. 장사꾼들의 이기심과 탐욕이, 흥정과 결탁의 악취가 진동했다는 것이에요. 사제들은 제물 봉헌에 필요한 제수품을 교환하고 판매할 자리, 좌판을 배정해주고 리베이트, 이권을 챙긴 것이죠. 성전 상인 조합과 사제들의 이런 결탁은 결국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제물용 짐승의 흠을 잡아서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제물시장에서 비싸게 강매했던 것이죠. 눈물을 머금고 사서 바칠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성전체제를 제일 표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고난의 삶을 예수님은 지켜보고 알고 계셨죠.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 앞에 가져온 것은 단지 제물이 아니라 그들의 피눈물 나는 삶이고 마음이었는데 그걸 이용해 먹는 작자들이 눈에 뜨인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 둬야 하나요? 아니요. 고리를 끊어야 악순환의 사슬이 풀리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성전정화의 사건, 이것이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결국 예수님은 되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신 것이죠.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은 처형당하실 수 밖에 없게 되고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기소 공격당하신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내란 선동, 독성죄 가중처벌되시는 것이죠. 유다의 전통에 대한 폭도와 같은 반역 국가기강 문란케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그러니 아버지의 집이 허가받은 강도들에게 짓밝히고 있는데, 분노하지 않는 이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에도 성전에 날마나 머물려 가르치셨다는 것이죠. 난동이 아니었어요.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집인 것이죠. 뒤짚어 엎고 그만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씀으로 그 집을 채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사랑하는 이가 아니면 교회를 진정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는 제도 교회의 일원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누군가가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언제나 자신을 포함한 비판인 것입니다. 나 빼놓고 아니에요. 자기가 속해 있기에 비판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몸담고 있는 그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죠. 자기 조직이 병들고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지켜보고 방관하는 것은, 불의함에 공조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끝까지 그 안에 머무시면서 쇄신과 사랑의 노력을 접지 않으셨어요. 교회에 머물면서 자주 쓴소리를 던지는 이유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루카 19,41-42)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며 우시는 장면, 예수님의 눈물에 관한 복음입니다.
남자가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여 더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남자는 평생 몇 번 우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자칫하면 완고한 가부장주의나 성차별적인 언사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갓난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댑니다. 사내 녀석이라고 덜 우는 것 아닙니다. 외려 더 우렁차게 울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일까요? 눈물이 그러므로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눈물 비치는 것을 극도로 통제하는 교육과 분위기 탓인지 혹은 애초에 (그럴리야 없겠으나) 그맘때는 눈물 흘릴 일이 없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눈물 흘릴 겨를도 없는 탓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동명 영화와 소설이 여러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울지 않습니다. 울 수 없습니다. 울어서는 안됩니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가리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는 법을 잃어버린 아득함으로.
멜 깁슨이 제작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마지막 장면, 십자가에 매달려 처절한 고통 중에 예수님의 눈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바짝 타들어가는 골고타의 흙먼지 위에 떨어집니다. 십자가로부터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파형을 이루며 땅 위에 추락하는 그 순간, 예수님이 맞이한 죽음이 어떻게 부활로 연결되는지를 영화적 상상력은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눈물은 그리고 그 눈물을 흘리게 한 심중의 사랑은 헤아릴 길 없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김현승 ‘눈물’ ) 네 살배기 아들을 잃은 후 시인이 슬픔의 극한에서 써낸 시는 절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합니다. 가슴을 찢은 후에 흘리는 눈물은 이미 소리를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겪어야할 고통과 참담함을 예견하실 때 그분은 우셨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어주는 것,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아마 우리가 눈물을 잃어버렸다면, 누군가를 위해 울지 못하고 있다면 그 메마름이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미나의 비유는 자캐오 이야기에 덧붙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난을 받기 직전에 그를 만났습니다. 로마 제국의 부역자이던 세리, 로마 제국에서 민족을 해방하리라는 기대를 받던 예수의 이 만남은 얼마나 극적인지요. 예수님은 자캐오와의 만남을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로 당신의 사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시고 이 미나의 비유를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이해하려면 자캐오 이야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미나의 비유는 바로 이렇게 당신이 잃어버린 이를 찾으러 오신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어느 귀족이 왕권을 받으러 떠나며 종들에게 미나를 나누어 주고 벌이를 하라고 명합니다. 미나는 실은 백 드라크마입니다. 한 드라크마가 하루 품삯이라니 뭐 많다면 많지만 서너 달 치 임금 정도이니 실은 벌이를 하기에는 좀 소소한 액수입니다. 사업 자금치고는 좀 적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적은 액수입니다. 미나를 받았다하더라도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역사적 정황을 생각하면 로마 당국에 왕위를 받고자 했던 이들은 거의 실패했던 것을 이 이야기를 듣던 당대 청중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미나를 받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귀족은 종들이 얼마나 벌이를 하였는지를 헤아립니다. 열 배, 다섯 배로 불린 종들도 있지만 맡긴 미나를 수건에 싸서 그저 보관해 둔 종도 있습니다. 우선 그는 자기 주인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건에 보관한 방식, 곧 주인이 맡긴 미나를 소홀히 처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처벌을 누가 받습니까? 귀족이 왕권을 받는 것을 반대한 이들이 처벌을 받습니다. 한 미나를 그대로 돌려준 이가 아닙니다.
미나를 맡은 이들에게는 잠재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지 아닐지 불확실합니다. 사업 밑천으로 미나는 턱없이 작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불확실한 삶을 사는 이는 누구입니까? 바로 앞의 바르티매오 그리고 자캐오, 예수님이 찾아오신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바로 우리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주인의 관심은 얼마를 남겼는가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일을 해냈는지였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 미나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터무니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나요. 불확실함 속에서도 당신의 말씀을 계속 지키고 지지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터무니없는 삶, 자캐오가 예수님 만난 후 얼마나 터무니없는 삶을 살았나요. 가진 것을 나누고 갚아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 역시 이 터무니없는 복음을 살라고 미나를 맡기신 것이 아닐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8-50)
성모님께 대한 4대 교의가 무엇인지 당연히 천주교 신자는 다 알고 있겠지요. 글쎄요. 생각보다 다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외워야할 필요는 없더라도 알쓸신잡(알면 쓸데있는 신비에 관한 잡학사전)이 되겠습니다. 처음은 천주의 모친, 당연하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낳아주심으로 나자렛의 마리아는 성모님이 되셨음이고 1월1일에 대축일로 지냅니다. 다음, 성모승천 곧 죽음의 부패에 물들지 않으시도록 특별한 은총으로 들어올려지셨다는 것이죠. 8월 15일 대축일 지내죠. 그다음은 무염시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시라는 것이죠. 시작부터 특전적인 가호로 원죄에서 해방된 존재셨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죠. 12월 8일 대축일 지냅니다. 마지막은요? 평생동정!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였죠. 예수님 낳으시기 전에도 그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고 고백합니다. 축일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평생 동정 마리아 축일은 별도로 없습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동정 성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축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등등 온갖 축일에 동정 마리아를 수식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기념합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리아를 요아킴, 안나 부부께서 바치셨다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께 봉헌하여 하느님 소유로 삼도록 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을 얼마만인지 찾아온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을 어찌보면 박절하게 내치시는 내용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복음이죠. 이것 봐라!! 예수님도 어머니를 이렇게 하셨쟎니 하면서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어머니됨을 부정하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불효막심한 자로 만들면 좋은 것일까요.
동정이시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이시기도 하거든요. 이게 말이 안되는 것 실은 말이 됩니다. 어머니신데 동정이시다. 어떻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어머니셨기에 아들을 낳으시고도 여전히 동정이실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아버지의 뜻은요 그분을 독생성자의 어머니로 삼으시고자 선택하셨으면서도 여전히 동정을 지니게 하신 것이었거든요. 그분의 순명, 완전한 일치, 갈림없는 추종 그 모든 것이 어머니께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은 그 모든 것을 이미 바치셨다는, 봉헌된 이라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 바쳐지셨습니다. 우리는? 바치나요? 우리도 바치긴 합니다. 봉헌금! 바치죠. 시간도! 바치죠. 재능도! 바칩니다. 바치긴 바쳐요.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바칩니다. 일부만 바칩니다. 바치면서도 아까워하면서 바칩니다. 계산하면서 바치죠.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바치죠. 바치긴 바치나 진짜 바치는 것이냐? 사실은 살짝 빌려드리는 것처럼 여기죠. 설마 그냥 입 씻으시겠어 하면서 말이죠.
성모님의 바치심은 그런 것 아니었거든요. 그냥 완전히 바치시는 것이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이것은 이제 내 뜻은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는 항복선언인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부분이 아니라 통으로, 전체로 실행하는 바치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마저 혈육으로만 성모 마리아를 여기는 것을 교정하시는 것이에요. 불효자가 아니시죠. 말씀을 곡해하면 그렇게 예수님을 만들고 버리고 맙니다. 완전한 봉헌, 그것이 마리아의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뻐하는 축일에 왜 오늘 복음이 선택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루카 18,40-41)
막차를 타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혹은 친구와의 술자리가 길어져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숨가쁘게 달렸던 기억, 종종 있습니다. 막차를 놓치게 되면 낭패인지라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리다가도 저만치서 다가오는 마지막 운행되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발견하면 마음이 그렇게 턱 놓일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몰려옵니다.
공관 복음에서 막차를 탄 사람이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 여정에 들어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소경이었던 바르티매오입니다(루카 복음에는 바르티매오 이외에도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도 등장하긴 합니다). 신학생 때부터 이상스럽게 바르티매오에게 소위 꽂혔습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과제를 낸 적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르심 받고 마지막으로 치유된 사람,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붙든 바르티매오가 겪은 일이 뭔지 모르게 나와 유사하네 싶었습니다. 마지막이면 어떤가요. 막차 타도 집에만 가면 되는 것이죠.
볼 수 없던 바르티매오가 어떤 심정으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담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리 깔고 구걸하면서 연명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에서 아직은 누구인지 환히 모르지만 그러나 무엇인가를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희미한 믿음에서 그는 외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 간절함으로, 그 절박함으로, 그 처절함으로 그는 자비를 주십사고 외쳤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며 구걸하느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외쳤을 법한 그의 목소리는 예수님을 부르면서 달라집니다. 가능한 가장 큰 소리로,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로 부릅니다. 불가능의 처지의 자신을 가능하게 할 분은 저분 이외에 없다는 직감이 있었던 것이죠.
마지막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간절함으로 살면 그만입니다. 다음이 없다면 이번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기회일까요. 절집에서 수행할 때 ‘할 뿐’을 끊임없이 상기하도록 합니다. 밥 먹을 때는 밥 먹을 뿐이고 참선할 때는 참선할 뿐입니다. 다른 것이 지금 이 시간에 끼어들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죠.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이 ‘지금’이라지 않습니까. 일상의 시시하고 그저 그런 일들도 이번이 마지막이고 유일하다면 완전히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사도 바오로도 그리하여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2코린 6,2)이라고 지금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죠. 昢凉 神父…더보기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0-21)
다섯 탈렌트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해서 다섯 탈렌트 남깁니다. 두 탈렌트 받은 이는 최선을 다한 결과 두 탈렌트 남깁니다. 그리고 결산을 합니다. 주인에게 가서, 탈렌트를 활용해서 얻은 이득에 대해 셈을 헤아립니다. 그들은 좋은 투자를 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00%의 수익률, 대단합니다. 그런데 만일 비유가 얼마가 남겼는가 관심이 있다면 주인의 칭찬은 각각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칭찬은 똑같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렇죠. 수익에 따라 칭찬하면 다섯 탈렌트 더 거둔 친구한테는 말리부 여행권 줘야하고 두 탈렌트 더 거둔 친구는 제주도 여행권 정도가 인센티브여야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평가와 대접인 것은 결국 주인의 관심사가 얼마를 거두었는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탈렌트 받은 이는 땅 속에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둡니다. 그리고 셈을 하게 됩니다. 한 탈렌트 원금만 가져온 종은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24-25절)라 말합니다. 이 종에게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이라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한 탈렌트 맡은 종이 원금은 그래도 남겼음에도 심판받게 됩니다. 너무 과한 판결 아닌가요?
실은 얼마를 남겼는가 아닌가가 주인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탈렌트를 맡길만큼 배포가 있는 분입니다. 얼마를 더 버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초점은 맡겨진 탈렌트를 활용하여 거둔 열매나 결과가 아닙니다. 실상 문제되는 것은 종들의 주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종들은 활용을 했습니다. 사업을 벌였습니다. 사업하고 장사하면 꼭 성공하고 벌게 되냐요? 아니요. 망하고 거덜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사업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 장사 한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죠. 맡긴 것을 엎어 버려도 나를 내치지 않을 분임을 아는 이는 장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하는 그 말의 뜻은 주인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망할지도 모르지만 활용합니다. 뭔가 합니다. 남기는 것이 주인에게는 중요치 않기에, 무엇인가 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인을 알고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모르고 오해하니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이죠.
연중 33주일, 결산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결산은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가 얼마 거두었는가에 관심 없으십니다. 그럼 무엇이 평가되는가? 내가 올 한해 주님을 어떤 분으로 알게 되었는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만들었는가,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이 온전한가-곧 그분을 아는 것이죠. 昢凉 神父…더보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7-8)
법은 만인에게 공평해야하는데 실제로는 만 명에게만 공평하다는 냉소가 있습니다. 복음의 비유에서 끈질긴 과부와 불신과 냉혹함을 지닌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이런 걸 보면 예수님 시대의 사법도, 타락하였나 봅니다. 이 재판관은 올바른 판결,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이다. 과부가 휘말린 송사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비유에서 설명되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과부-당시로선 약자의 대명사인 과부-가 부당한 판결에 저항하고 민원을 제기하고 아마 일인시위도 하고 촛불집회도 열고 인터넷에서 서명운동도 받고(?) 그랬나 봅니다. 부당함의 대명사인 이 재판관이 결국은 끈질긴 과부의 노력에 공정하게 판결내렸다는 것이죠. 가만있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인데. 그녀는 그냥 겪으면서 감내하는 여인은 아니었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녀의 끈질긴 간청, 졸라댐의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재판정의 정의의 상실, 사법의 타락이죠. 그것을 그냥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나 하나 저항한다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오히려 더 화를 일으키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그녀는 당하고 말았겠죠. 그래서 저항권은 시민의 기본적 권리에 속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그 재판관처럼 불의하고 부당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우려에서 루카는 이 비유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란 의미라고 미리 설명과 단서를 달고 있죠. 곧 끈질긴 기도, 끝까지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이 표면적인 내용이라면, 또 한편 하느님께선 그 재판관과는 달리 정의로우신 분이시니 그에 입각해서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죠. 굳이 판결이 어떨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냥 잘 살면, 말씀대로 살면, 뜻대로 살면, 기도하며 살면, 희생하고 살면, 내가 조금 더 사랑하고 살면 언제나 판결은 정의로운, 합당한 것이라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체없이, 곧 시간 간격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행한 그 즉시 이루어지는 판결이죠. 게다가 공정하고 형평에 맞는 것이 하느님의 판결하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은 의아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올바른 판결을 내릴 만한 근거, 판결의 건덕지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함의가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과부가 끈질기게 청해서 얻었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이 소송에는 과부에게 유리한 것, 과부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 있죠. 그에 반하는 판결은 부당한 것이죠. 그러니 과부는 그런 확신으로 끈질지게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올바르게 판결하실 것이나,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받을 만한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엉망으로 살고도 내게 유리하게 판결내려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심판의 타락인 것이죠. 그래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안타까움의 토로인 것입니다. 글쎄요. 찾아볼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루카 17,26-30)
오늘 복음은 흉흉합니다. 협박 비슷한 말씀입니다. 노아 시대 흥청거리면서 살다가 홍수로 멸망했다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도 설마 그런 일이 하면서 살다가 물에 휩쓸려 가버렸다는 위협적 이야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이야기도 덧붙이시죠. 불과 유황이 쏟아져 순식간에 파괴된 소돔의 예를 기억하라는. 너희도 그럴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조언하고 변화하여야한다고 충고하고 이끌었음에도, 예수님 당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온화하게 이야기하니 도무지 메시지가 먹히질 않는 겁니다. 그러니 하도 답답하셨는지, 맘먹고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무시무시한 예를 들어가며 충격요법을 쓰시는 것이죠. 그럼 그런 말씀이 우리보고 망하라는 것인가요? 아니죠. 살 방법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애가 사춘기가 되어서, 완전히 제멋대로입니다. 학교를 밥먹듯 빼먹습니다. 집에 안들어오고 빙빙 겉돕니다. 자기가 집시인줄 알아요. 동가식 서가숙합니다 머리에 뭘 발랐는지 희한하게 하고 다니고, 하는 말투가 곱질 않습니다. 인상도 점점 험악해집니다. 기다리면 나아지겠지, 더 많이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지-하면서 엄마가 오히려 전보다 더 맛있는 간식도 준비하구요. 쪽지도 써서 가방 속에 슬쩍 넣어두기도 합니다. 아이 눈치보면서 살피기도 하구요. 그것도 안먹히면 눈물로 호소합니다. 손잡고 애원하며 기도하기도 하구요. 이것저것 오만가지 다 써보았어요. 그런데 애가 도무지 꿈쩍도 안하는 것이죠. 그럼 최후 수단으로 매를 듭니다. 멱살이라도 잡고 어떡하든 붙들어 놓습니다. 초강수를 씁니다. 왜요? 미워서? 밉기도 하지만 다가 아니에요. 포기가 안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변화시켜보려는 그 마음, 꽃으로 때리지 말아야한다지만 회초리로 때리는 그 마음 오죽하겠어요.
예수님의 위협의 말씀도 그렇죠. 하다하다 안되면 쎄게 하시는 것이죠. 그것이 충격요법의 목적입니다. 완고한 이들을 뒤흔들어서라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것, 구약의 예언자들의 전한 하느님의 신탁을 보면 더 대단하니다. 나는 사람도 짐승도 쓸어버리고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도 쓸어버리며, 악인들을 비틀거리게 하리라. 사람도 땅위에서 없애 버리리라. 스바니야서말씀이에요. 다른 곳곳에서도 무시무시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이런 위협인지, 경고인지 촉구인지가 싹 다 없어졌죠. 교회 안에는 위로의 말씀과 치유의 시간이 있어야지. 와서 불편하게 느낄 말은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신자들이 그런 것을 불편해하기에. 서비스 정신이 너무 철저해서인지, 이제 그만 복음의 정신은 희미해져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 자신을 향해 쓴소리를 던지는 교회와 신앙인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달콤한 이야기에 길들여져서 썩어가는데도 썩어간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굉장히 전복적이고 강력하시죠. 너무 안이하게 이 모든 것이 영영세세 계속될 줄 착각하는 이들에게 멸망이 가까워졌다고, 삶은 유한한 것이라고, 먹고 마시는 그 사이에 도둑처럼 닥치는 무엇이 있으리라고.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알고, 말해야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임을. 昢凉 神父…더보기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1)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제자들에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느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 말하더라도 찾아나서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오히려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 사람의 아들이 고통을 겪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고통의 순간, 하느님께서 거기 계실 리 없어 생각되는 거기에 계시다는 것이죠. 그러니 연말 시상식 장면에서 흔히 듣게 되는 멘트, ‘이 모든 영광을 하느(나)님께 돌립니다’는 맞기도 하지만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가 제일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일까요? (지진으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입시를 앞두고 조바심낼 때죠. 남자들이라면 군입대해서 무지막지하게 훈련할 때죠. 여자들이라면 산이 무너지는 고통이라는 아이 낳을 때일수 있죠. 온 몸이 불덩이같은 신열이 나서 잠도 못자는 병중일 때 있죠. 죽음의 그 순간 맞이하여야 할 때까지. 하여간 그렇게 이 문제 끝나나 싶으면 또 저기서 예상치 않은 문제가 터집니다. 인생살이가 온통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 해도해도 너무하신다’. 그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제발 끝나고 지나가라-그런 마음 듭니다. 힘드니까요.
많는 부모님의 근심 걱정이 있습니다. 자식 키우면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면서부터 그 근심걱정이 가시질 않습니다. 분홍 옷 준비할까, 파란 옷 준비할까-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애가 젖먹이일 때 밤낮이 바뀌어 울어 제낍니다. 힘들죠. 좀만 자라라. 자랐습니다. 걷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 부딪칠까 걱정이죠. 말문 늦게 트일까 그것도 걱정입니다. 학교만 가도 다 키운 것 같겠네 그럽니다. 학교갔습니다. 그럼 남들한테 뒤쳐질까, 친구들과 잘지내나, 왕따당하지 않을까, 선생님 눈밖에 나지 않을까-매양 걱정입니다. 공부도 걱정 키 크는 것도 걱정입니다. 사춘기 됩니다. 엇나갈까. 똑 걱정바람이죠. 문 닫고 제방에 틀어박히, 부모맘 저리 모를까 속상합니다. 대학만 가라. 그러면 좋은 학교 못가서 인생 힘들까봐. 술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아무나 친구만나고 다닌다고, 누구랑 제짝을 만나는가. 시집장가 보내면 밥은 얻어먹고 사는-등등 걱정의 연속, 근심의 늪인 것이죠. 눈감는 순간까지 그럴 것이죠. 일평생 문제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근심걱정 뿐인가요? 하느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뭔가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으시죠. 딱 그때만 주시는 보석같은 기쁨과 감동이 있는 것이죠. 다른 때는 그걸 못느낍니다. 딱 그때만!! 아이가 젖먹이일 때 그 꼬물거림이 주는 옹알이할 때 그 영특함이 주는, 제 몫을 조금씩 해나갈 때 그 대견함이 주는, 결혼하고 독립하고 살 때는 또 그 나름으로-기쁨을 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대개는 다 놓치고 삽니다. 나중에 누릴 거야..그게 문제죠. 나중에는 없습니다. 지금 못누리면. 지금 못느끼면. 왜 나중이 지금되면 모두 아쉬워할까요? 왜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복음은 하느님 나라는 여기 저기, 어디 먼곳이 아니라 바로 ‘너희 가운데,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은 당신의 날이 힘겨운 순간에 있다고 말씀하시죠. 힘겨운 순간이 우리에겐 주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만나는 황금기인 것이죠.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여름에 비해 성장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그러나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 단단하고 치밀하다는 사실. 하느님 나라 그러니 우리 인생이 그리고 우리 주님이 왜 고난과 배척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도 오롯이 있는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17-18)
내가 잘해서 일이 이루어진 경우 있지만 과연 정말 순전히 내가 잘했기 때문이기만 했을까- 곰곰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변의 무수한 도움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래서 누군가 와서 내게 감사하며 ‘덕분에 잘 되었다’하면 내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게다가 별 것 아닌 것에도 감사하면 오히려 민망합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감사합니다.’할 때 실은 당연히 한 일인데 그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행복해하실까요? 우리가 감사할 때가 아닐까요. 그런데 원망 불평이 많지 감사는 참 드물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나병, 죽음같은 병이고 육체적 질병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죽음입니다. 가족들에게마저 외며받고 쫓겨나고 격리됩니다. 사회적 죽음을 맛본 나병환자들이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면 감사가 나올 것 같은데 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열 명중 아홉은 감사를 모르더라는 것, 단 한명만 돌아왔습니다. 십분의 일, 감사가 얼마나 드물었나 딱 보여줍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우리는 자기 문제에 집착할 때가 많아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이 어려움만 사라지면 감사할 터인데 하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열 명의 병자들이 다 상황은 똑같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소수인 것이죠. 최절정의 믿음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무엇일까요? 감사는 되돌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반추하는 것입니다. 반추 동물, 소가 그렇습니다. 자꾸 씹고 되씹습니다. 감사는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그는 보았습니다. 되돌아 보았습니다. 자기 상황을 다시 보았습니다. 앞으로만 가지 않고 보았더니 깨끗하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곧 그는 돌아왔습니다. 되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앞만 보고 갑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셨네-자기를 보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 건강한 것-당연한가요? 지금 여기 있는 것 당연한가요? 순간순간 지켜주시고 이끄시는 결과입니다. thank 와 think 어원이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필요하단 말이죠. 영적 지혜는 중간중간 돌이켜 보게 합니다. 하루를 돌이켜 보고, 일주일 돌이켜보고 한 해를 돌이켜 보고, 그렇게 반추하는 이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종일 밭일을 하고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저녁 식사 마련하고 식탁에서 온갖 시중을 다 들고 나서야 남은 것으로 식사하여야 하는 종의 모습. 자기 권리가 없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인권유린 아닌가요. 주인이 있고 종이 있고 명령하는 사람이 있고 따라야 하는 이가 있는 이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지 지금은 신분에 의해서 살아가는 시대가 아니죠. 누가 나를 종처럼 부려 먹는다면 가만 있지 않죠. 당장 사표 던지고 그만두지. 정당하게 대접 안 해주면 화나고 그렇죠. ‘나를 이런 취급한단 말이야. 대체 나를 뭘로 보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찾고 자기 몫을 알아서 챙겨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그럴 수 있다 쳐요. 권리-의무 관계가 명확해야만 또 서로 동등하고 평등하게 존중해 주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네 상사니까 너는 내 부하직원이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이것 안통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나는 부모니까 너는 내 자식이니까. 내 뜻대로 복종해라. - 그런 방식으론 관계만 악화되죠. 위와 아래, 상하관계가 명확하고 아래의 의견은 묵살해도 괜찮던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중심이 이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우리가 소통, 소통 소통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귀기울여 듣는 경청의 리더쉽이 있어야 한다고, ‘자, 내가 결정했으니까 너는 무조건 잔말말고 따라라’ - 그렇게 하지도 말고 그렇게 해선 될 일도 안된다고 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뭡니까? 정말 종이 입에서 나온 말대로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나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따름이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그것이 당연한 거야. 나는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저, 뭡니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종을 그렇게 부려먹고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이는 누구냐? 오직 주인만 그래야 하는 것이죠. 다른 이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쟎아요. 주인의 종이지 나의 종이 아닌 것이에요. 주인에게만 속한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복음을 오해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해석해서 누구에게 부당하게 요구하고 마구잡이로 일시키고 할 일 했을 뿐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이렇게 해서는 안되죠.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다 종들입니다. 이 말은 뭡니까? 주님께 우리 모두 동등하게 속해 있단 말이죠. 세상의 질서가 있으니까 누구는 사장이고 누구는 대리이고, 누구는 시키는 사람이고 누구는 따르는 사람이지만 누구는 사제이고 누구는 평신도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다 어떻습니까? 다 종이란 말이죠. 주님의 계획 안에 똑같이 있는 이들, 게다가 예수님은 요한 15,15에서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하셨단 말이죠. 하느님 앞에 마땅히 묵묵히 일하는 것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데 할 수없이 억지로, 떠밀려서 아니란 말이죠. 친구로 일하는 사람, 기꺼이 하는 것이 더 귀하고 가치로운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요 당신이 종이 되셨어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몸소 낮아지셨죠. 그러니 종처럼 일하지 말고 내게 맡겨주신 것들을 기쁨으로 당당하게 의젓하게. 昢凉 神父…더보기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루카 17,1-2)
내가 죄짓는 것도 부끄럽고 화끈거리는 일이지만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죄짓는 것은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가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담을 꼬드겨 같이 죄를 범하게 한 일이었습니다. 죄의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죄는 죄를 낳습니다. 죄인은 공범자를 만들어 냅니다. 죄는 끊임없이 확산되는 증식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 평화도 번져가지만 죄 역시도 그렇습니다. 감옥이 교정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학교가 된다는 현실도 그렇고 일상 안에서도 죄의 증식은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신학생들이 신학교 못자리에서 신앙과 학문만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일학년 친구들을 보면 모든 것이 얼떨떨합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의레 긴장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신학교의 엄격한 내규를 지키자니 여러모로 힘들기 마련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일을 해야 합니다. 같이 일어나고 같이 움직입니다. 대침묵 시간에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말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렇게 규칙을 배우고 지켜가며 조금씩 익숙해져 갑니다. 학년이 올라가면 많이 느긋해 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학문도 배우지만 눈치와 요령도 늘어갑니다. 어떻게 해야 학교 신부님들 눈 밖에 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생존의 비법’을 찾아 배웁니다. 내규는 허술해지고 적당히 준수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이 생존의 비법을 전수합니다. 남을 죄짓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요. 연자매를 매어 줘야 할 지경입니다.
타인을 죄의 굴레로 유인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서도 일어납니다. 정의가 사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죄에 대해 둔감해지기 때문입니다. 뇌물과 친분에 의해 일이 결정되는 사회가 되면 나 역시 그 구조에서 생존을 위한 요령에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지를 말씀하실 때 개인적인 도덕성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사회 전체가 정의를 살아가야 한다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나만 깨끗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죄가 구조의 결과는 아니지만 구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납니다. 우리는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같은 세상 안에 살고 있기에 그 영향에서 벗어난 고립된 자유를 살 수 없습니다. 연결된 세계에서 선한 영향력을 키우고 정의를 쌓아가는 것, 복음이 그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마태 2511-5)
열 명의 처녀가 등장합니다. 들러리 역할을 하는 처녀들이 똑같이 등을 들고서 신랑이 오기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다섯 명은 기름이 떨어집니다. 그 다섯 명은 문전박대 당하고 다른 다섯 명은 결혼식에 들어가 축제를 즐기게 됩니다. 차이는 기름병 한 병을 더 준비했는가입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미련한 처녀라고 하는 이들은 일견 억울해 보입니다. 사실 늦은 것은 신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처녀가 보기에 신랑이 제시간, 정시에 와준다면 이런 문제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도 등잔에는 기름이 있었거든요. 정시까지는 등을 밝힐 기름이 있었어요. 신랑이 왜 늦었을까요? 인륜지대사에 지각하는 것은 게으르고 무심한 신랑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들은 승승장구하구 자기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내 인생에는 그렇게 태클이 많습니다. 남들은 잘되는데 나는 안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은 척척 사람도 잘 만나는데 나는 모태 솔로에요. 맞선을 봐도 도저히 좋은 사람 발견하지 못해요. 그럴 때 드는 생각, 억울하고 인생 재미없고 답답합니다. 바로 그럴 때,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되는가에 대한 복음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주식투가에는 포트폴리오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주식시장에는 여러 변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종목에만 집중해서 투자하지 말고 분산투자하고 합니다. 한 바구니에 달걀을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녀들은 다 정해진 시간에 결혼식이 열리리라고 기대했겠죠.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 다섯은 자기 생각대로 준비하지 않고 신랑입장에서 준비했습니다. 항상 신랑이 이 결혼식의 변수라고 생각하고 혹시 늦게 올 때 어떻게 하나 예측하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지혜와 미련의 차이, 지혜는 내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는 것이고 미련함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배제하고 내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라 내 생각만이 항상 옳고 관철되어야 하는 것 미련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너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13절) 너희가 생각한 시간대로 삶을 설계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인생의 스케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이죠. 이 정하신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은혜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내 뜻이 안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하시고 버리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교만을 죽이고 우리의 자아를 파괴해서 하느님의 기름으로 채우시는 과정입니다. 나의 등잔에 하느님의 기름, 성령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이 오히려 유익이기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거기까지 이를 수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 계획의 좌절은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사인이고, 내 생각의 무너짐은 더 큰 것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안배하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청하며 쌀쌀해진 겨울의 들머리를 맞이합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광야의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우리 삶에 다가오는 유혹의 전조를 보여 준 사건입니다. 유혹자가 예수님에게 던진 첫 시험은 허기진 육체의 요구를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자는 허기진 삶은 ‘하느님 아들’의 삶이 아니라는 전제를 암시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주의 특권을 사용하면서 배부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생존과 직결된 가장 근원적인 욕망, 잉여의 욕망을 부추겼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자와 달리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하느님의 아들 됨’이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욕망 충족의 삶은 예수님에게 있어 ‘욕망 충족만의 죽음’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가톨릭 노동운동의 대모인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유혹자가 내건 시험을 일러 '빵만의 죽음'을 택하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욕망과의 타협은 종교의 도덕적 위기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늘 서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만을 경배하라!’ 예수는 선명한 하느님 신앙의 길에 서서 유혹자의 유혹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 신앙이 나의 안전의 도구, 나의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교회 안에서 가장 비신학적인 주장이 철칙처럼 강조되기도 합니다. 말라키서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말라 3,10)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내 축복의 수단으로 여기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드려진 헌금이 축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신학은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투전판에서나 있을 법한 "돈 놓고 돈 먹기" 논리입니다. 탐욕에 빠진 교회는 탐욕에 빠진 세상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도 있다는 헛된 생각을 교회 안에서마저 강화하고 있지 않은지요. 昢凉 神父… 더보기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루카 16,8)
참 비유가 오묘하고 기이합니다. 복음에서 제일 난해하고 고약하게도 여겨지는 비유입니다. 주인의 재물을 맡은 관리인은 일정 권한을 가진 사람, 월급 사장 정도에 해당하겠죠. 그가 주인 의도와 상관없이 낭비하고 제 맘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초지종 조사하고 이사회열어서 해고 통고한 것이죠. '너 해고됐어!' 그때 이 청기기 관리인이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살 방도를 찾아냈어요. 차용증서 위조죠. 죄를 지어서 자기 살길을 찾았습니다.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이자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하여 주었다는 것이죠. 비유가 정말 난감한 것은 주님께서 약삭빠른 이 사람에 대해서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용인하시다니.
이 종이 했던 일에 대해 주인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종이 끼친 손해에 대해 처벌하고 피해받은 것에 대해 원상복구시키는 방법이 있겠죠. 또 무엇이 있느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중요한 것은 뭡니까? 평판이죠. 사회적 위신이 중요하쟎아요. 그런데 이 종이 말이죠 빚진자에게 일정 부분 탕감해주었어요. 빚진 자는 거의 가난한 이들이죠. 이들이 빚을 탕감받고 나서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동네 사람들이 누구를 칭송하냐. 결국 종이 아니라 주인이에요. ‘아 그 주인 아주 관대한 사람이야. 어려운 사람 사정 아는 사람이야.’ 이렇게 소문나고 사회적 위신이 높아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결국 종이요 주인에게 영광을 돌려지도록 만든 것이죠. 주인은 어떻게 해요. 돈 손해는 보았지만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칭송하는 것으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단 말이죠. 종이 어떤 종이에요. 주인의 가치와 의도와 분위기와 성품 그의 인격을 너무 잘 알았단 말이죠. 그러니 이 종은 주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것이죠. 결국 종의 승리에요. 주인의 너그러움과 용서와 자비에 자기 운명을 걸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한 마음에 자기의 불한당 같은 짓을 용서받으려 올인한 것이란 말이죠. 그것을 주인은 지혜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이 지혜롭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에 운명을 거는 태도를 슬기롭다고 하는 것이죠. 돈관리 물질관리 잘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법에 고발당한 이 불의한 집사, 그 다음에 더 나쁜 짓 했지만 그 불의 속에 주인의 자비하심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라구요. 온갖 불의와 죄를 짓는 죄인이라는 것이죠. 이 집사가 누구에요. 계속해서 죄짓고 또 그것을 덮기 위해 다른 죄짓고 그런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죠. 어떻게 해야하는가? 주인의 자비함에 의지해야만 결국 산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지혜래요. 다시 살길이 있데요. 우리가 참된 슬기, 지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똑똑하고 명민한 아귀가 맞는 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국 들통난 자,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집사같은 존재란 말이에요. 그러나 살길 있다-이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에요.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느님의 자비 거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엎어져도 십자가 앞에 엎어지면 다시 일어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 불리는 라테라노 성전 봉헌 축일에 들려지는 복음은 성전 정화 이야기입니다. 보편교회의 구심점이고 일치의 가시적 상징으로 이 성전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 이 축일을 지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꼭 들어맞는 내용은 아니다 싶기도 하죠.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 성전 정화라고 부르지만 무슨 청소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난동 내지 공공 질서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고 그래서 정화라는 표현은 너무 순화시킨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환전상과 장사치들을 내쫓으시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성수 뿌리면서 우아하게 행해진 정화 예식은 아닌 것이죠.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온 순례객들이 당시 장정만도 13만명 가량 되었고 그들이 이 축제 기간에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만도 최소한 25만 마리 정도 였다고 추정합니다. 성전 주변의 올리브산에만 네 개의 대규모 가축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당연히 이권을 둘러싼 온갖 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 수많은 순례자들이 의무적으로 바쳐야할 성전세는 일인당 반세켈인데 통용되던 화폐에서 세켈로 환전하는데 수수료로 50% 받았다고 합니다. 누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느냐. 산헤드린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뭘까요. 주교회의 정도에 해당할까요? 순례자들의 신심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축재할 수 있는 그런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복음이 이런 성전을 등장시키면서 웅변적으로 역설하는 것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성전을 이윤추구의 장소로 만들어버린 죄인들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현장에 참된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완력으로 그들을 다 쫓아내십니다. 허상들이 물러나고 실체가 들어서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한 형식만 남은 종교 행위에 대해 질책하시는 주님의 모습, 그런데 그 지적을 못마땅해하면서 그분을 죽이려고까지 이를 악무는 이 현장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비추어진다면 과민한 해석일까요?
유다인들이 열심을 다해 성전의 제사를 바치고 하느님께 예배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그 성전은 그래서 마땅히 파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당히 리모델링해서 쓰기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던 것이죠.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에 굴복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그런 행위를 주님께서 뒤짚어 엎으셔서 이것을 강렬하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교황님께서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에서 강력하게 질타하신 내용을 들은 바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기사 제목은 교회는 섬기는 곳이지 돈버는 곳이 아니다-이렇게 뽑았습니다. 씁쓸한 기사 제목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부유해져서 망한 교회는 있지만 가난해서 망한 교회는 없다는 것이죠. 존 웨슬리, 감리교를 연 인물이죠. 그의 촌철살인의 경구가 있습니다. 웨슬리가 갈파하길 지갑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허무셔서 새롭게 새우시겠다고 한 성전, 그리스도의 교회가 돈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돈을 부리는 교회, 더 좋은 가치를 위해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교회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모든 교회의 어머니인 라테라노 성전 축일에 기도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33)
취업난 시대에 구직자들은 하나라도 더 자격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학교에서는 학점 관리, 외국어 능력 인증, 공모전 출전을 위해 시간을 쏟습니다. 사회봉사도 이력에 반영된다기에 신경쓰고 면접을 위한 언변 향상과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 또 인맥 관리를 위해 노력합니다. 오죽하면 취업 성형이란 말도 있을까요. 또 막상 직장에 들어가서는 실적을 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 몸값과 존재감을 스스로가 올려야 하는 세상은 사실 좀 많이 피곤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한 성장도 합니다. 대충 살려고 하는 본성이 확고한 목교와 지향을 통해 수련되는 것이죠. 신앙에서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 신앙, 안됩니다. 목표와 지향이 확실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영적 자기 계발도 요구됩니다. 그냥 있다고 우리 내면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됨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친분관계와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가입니다. 둘째는 그 부인의 토대 위에 십자가를 수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따르겠다고 나섰는데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로 대표되는 지난날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세계를 부인하는 것, 곧 과거와의 단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게다가 자기 자신마저, 예전의 나, 따르기 이전까지의 나를 고스란히 지니고는 안된다는 겁니다. 스승님께서 전하시는 믿음, 스승님께서 알려주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 예수님께서 살기 원하시는 모습, 그것을 따르고 이루려 왔는데 구태의연한 옛 삶을 고수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끊어내는 작업, 그 아픔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추종을 위해 요구되는 자기 부인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과거와 단절되고 나서는 새 삶의 목표은 십자가 수용에 주어집니다. 이것을 질것인가 팽개칠 것인가, 도 아니면 모입니다. 적당히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되고자 하는 이라면 스스로가 과연 그런 역량이 있는지 분석해보라시죠. 공사비가 있는지 따져 보라시죠. 맞서 싸워 이길만한지 점검해 보라는 것이죠. 집지을 때도 공사비를 따져보면서, 전쟁 선전포고 할 때도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어떻게 인생을 건 추종자가 되려한다면서 미리 따져보지 않고 시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아마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긴 했는데 중간에 탈락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었던 것 같아요. 사전 점검없이, 전제가 되는 준비 과정을 생략하고 무턱대고 온 사람,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 따르겠다 온 사람 한 둘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나섰다가 슬퍼하면서 떠난 사람이 부자 청년 하나만은 아니었겠죠. 청운의 꿈을 품고 오긴 왔는데 중도 탈락자가 속출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 원인이 뭐냐? 예수님 보시니 자기가 따를 만한지 아닌지 제가 되겠다고 온 이들도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 부모가 등떠밀어서 온 사람, 있었던 모양이죠. 신학교, 수녀원, 성당에 아빠가 가라해서 엄마의 처녀적 꿈이 수녀님되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해서 온 이들이 천지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끊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 어려운 일만 생기면 쪼르르 집에 달려가서 해결책을 받아오는 경우, 없었을까요? 마마보이, 파파걸이 너무 많았을 수도 있죠? 자기 스스로 서야하고 누군가에 기대서는 갈 수 없는 길이 예수님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죠. 십자가 짊어지는 것, 고생길이 훤한데 요만큼만 문제가 생기면 이구동성, ‘괜히 왔나봐, 이럴줄 몰랐네’, 징징거리면서, 뭐 그런 말들이 수시로 들리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아예 내거신 것이죠. 예수님 예수님 공동체의 입학조건!! 그것은 단절의지가 강할 것, , 웬만한 문제 생겨도 잘 견디는 투철함이 있을 것이죠. 옛 삶에서, 낡은 자아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새 시간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더보기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루카 14, 22-24)
잔치에 초대받았는데 초대를 거절한 이들이 많았답니다. 주인 입장에서 난감합니다. ‘괘씸하고 고약한 것들. 감히 내 초대를 거절해.’ 이유야 많죠. 어떤 이유입니까? 밭을 샀다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 밭이 용도 변경되게 생겼어요. 2종 주거지역에서 1종 상업지구로 바뀐다는 설이 있어요. 기분 어때요. 완전 봉 잡았습니다. 한몫 단단히 챙기게 생겼어요. 지금 잔치에 갈 입장이 아니에요. 그 밭이 내 노후를 책임지고 그 부동산이 나를 지켜주게 생겼단 말이죠. 갈비탕 먹자고 잔치 갈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요. 잔치의 기쁨이 아니라 뭐가 중요해요. 내 소유를 지키는 것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이죠.
또 어떤 이유죠. 겨릿소를 샀데요. 겨릿소, 겨리를 끄는 소, 겨리가 뭐냐.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죠. 그러니까 그만큼 일이 많은 것입니다. 물 들어올 때 배 띄운다고 지금 일이 몰려들고 있단 말이죠. 처리할 일이 많아요. 내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라서 한시라도 다른 것에 관심 둘 겨를이 없죠.
또 어떤 이유에요. 장가 들었데요. 지금 막 웨딩마치 올리고 몰디브로 달콤한 신혼 여행 떠나는 길인데 잔치가 웬말입니까. 지금 내가 함께 지내고 싶은 이는 누구에요. 영원히 사랑을 맹세한 이 여인, 이 사람이란 말이죠. 이 사람하고 지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한 것이에요. 결코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신경써야할 일이 너무 많아요. 기쁨의 잔치는 내가 굳이 가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오겠죠. 잔치자리에 왜 빈자리가 그리 많고 텅 비었죠.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내 삶의 이유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들은 모두 양해를 구합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에요. 마태오에서 같은 비유는 조금 더 과격하죠. 초대받은 사람들이 초대장 가지고 온 종들, 모시러 온 종들을 마구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쟎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훨씬 완곡하죠. 나도 가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현실의 일이 현실의 관계가 이렇게 있으니 양해해달라-일견 타당해보입니다. 나라도 어떻게 할 수 없지 뭐.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당장 생각나는 이들은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다’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잔치의 호스트가 되셔서 초대하시고 우리가 초대받았죠.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초대하셨데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들은 그 잔치에 동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이었어요. 아프고 지치고 힘들고 장애가 있고 온갖 삶의 풍상을 겪은 이들이죠. 갈아야할 밭도 없고 몰아야할 겨릿소도 없고 사랑을 나눌 사람도 없는 이들. 그들이 잔치를 차지합니다. 주인의 초대가 너무 고마운 겁니다. 자기같은 사람을 불러주다니 감격스럽고 황송합니다. 그러니 잔치 초대에 응답한 사람은 바로 우리같은 사람입니다. 응답의 결과로 복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도 자격없고 너도 자격없고 모두 자격없고, 나도 아프고 너도 힘들고 나도 지쳐있고 너도 만만챦고. 그래서? 복된 사람이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지난 주에 이어 잔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잔치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라는 주제입니다. 누구를 초대할까요? 사람사는 세상에서 애경사를 잘 챙기는 것이 인맥관리 차원에서 또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려기 위해 또 친분상의 이유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이번달에는 청첩이 얼마나 될려나, 부고는 어디서 날라올려나 하면서 축의금이나 부의금으로 얼마를 준비해야할지 ‘3-5-7’에서 ‘5-7-10’으로 봉투 금액이 올랐다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입니다. 고민은 그 집에서, 그 친구가 지난 번에 얼마를 부조해주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거래(?)가 없었다면 다음 번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쪽에서 얼마나 부담할 것인가를 예상하면서 봉투를 준비한다고도 하더군요. 결국 주고 받고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내가 준대로 받을 것을 기대하고 네게 받은 대로 줄 것을 결정합니다. 상호 부조라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의 이면에 씁쓸한 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에 ‘잔치’라는 말이 나오면 ‘하느님 나라’를 연상하시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이 잔치에 초대받을 사람은 누구인가-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보답할 수 없는 사람이 초대된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초대 방식을 알고 있다면 너희도 보답할 수 없는 사람, 곧 다음에 내게 돌려줄 여지가 없는 사람, 인간적 도리를 다하지 못할 사람, 내 도움을 모른 척할 그런 사람, 내 봉투를 받고 입씻을 사람을 초대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고 받음의 논리를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고 받음의 거래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해드린 것이 있기에 그 댓가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의로만 이루어집니다. 내 정성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만큼 준비했으니 초대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탈락입니다. 그는 거래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는 그야말로 호스트의 전적인 주도권과 결정에만 달려 있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는 기준없음의 상태여서 엿파는 아저씨 기분에 좌우되어 엿을 더 많이 혹은 덜 받게 되겠지만 하느님 뜻대로는 세상의 일반적 기준 반대쪽 언저리에 있다고 보면 엇비슷합니다. 누가 초대되는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실제로 없을뿐더러 내가 드린 것이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이들, 약자들, 주변인들, 관심 영역 바깥에 있는 이들, 하느님께 합당하지 못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간주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대로 그렇게 하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음은 그분의 호의이지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안다면 네게 돌려줄 것이 없는 이들과 함께 하라는 말씀. 저 사람은 내 미래에 유익할 것이라고, 앞으로 뭔가 도움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맺은 인맥이 편의와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그래서 이왕이면 저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티안나게 노력해야겠다고 사람살이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내게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라는 난감함을 일으킵니다. 멀리하려한 그에게 다가가고 귀기울이고 입장을 이해하려 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면서 우리의 초대가 하느님 나라의 초대와 닮아가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마태 23, 8-10)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복음화의 저해가 되는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려면 하느님의 품성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반영되어 드러나야 할 터인데 딱히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복음과 무관하거나 더 나쁘게는 복음에 반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만 반대하지 않고 하느님도 거절하게 됩니다.
비단 교회 바깥에서만 교회를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 서로를 향한 공격과 알량한 권력 다툼, 관용의 부족, 상식과 윤리에 위배되는 행태는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싫다거나 납득할 수 없어서, 신학적 문제 때문에 교회를 등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신앙이 약화됩니다. 말은 번지르하지만 삶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 괴리는 치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그들의 말은 옳은 것이기에 실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구분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가 하는 말의 진리치는 말 자체에 있지 않고 삶 속에서만 입증됩니다. 하여 말하고자 하는 내용, 그 가르침과 말하는 이, 화자는 중첩되어 딱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지만 그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의 말, 그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것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승, 아버지, 선생’이라고 불리지 말라-전통 사회에서 권위를 지닌 호칭들이고 누군가를 인도하고 규율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 호칭과 지위가 불필요하다거나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에 따른 중차대한 무게감 없이, 자기에게 부여된 영향력에 대한 숙고없이 그저 가르치려 하고 사사건건 지시하려 할 때 그 호칭과 지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벼가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데 곧 스스로에게 적용되지 않은 가르침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봉사직에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겠습니다. 사제들은 영적 스승이(어야 하)고 아버지(father, 神父)라 불립니다. 과분하고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는 호칭입니다. 제 앞길 걸어가기에도 급급한데 스승으로서 누군가를 돌보고 이끌어야 하고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건만 아버지로서 공동체를 보호하고 부성적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나도 못하면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도 안하면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일이 한두 번 아니겠지요. 한심스러운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 하신 말씀이 빈정거리는 투가 아니라 직격탄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니 스승이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느냐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스승다움, 아버지다움을 보기를 원한다는 간절함이 ‘스승이라 아버지라 불리지 말라’는 본뜻이겠지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일구려는 지향을 다시 세워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0-11)
어제에 이어 어느 바리사이에게 초대된 자리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제는 ‘자리’입니다. 어디에 앉을 것이냐? 내 자리는 어디인가? 많이 달라졌다지만 우리에게는 엄격한 서열과 위계, 질서의 문화가 깊이 침윤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야 말로 위계 질서의 끝판왕입니다. ^^ 한국 가톨릭 교회는 유교적 영향까지 더해져서 서열이 어마어마합니다. 신학교에서 살면서 학생들에게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어떤 안건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어야 하는 회의나 모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발언 순서와 기회는 언제나 학년 순입니다. 부제가 이야기하면 아래 학년은 꼼짝없이 동의합니다. 다른 의견이 나올 법한데 여간해선 그런 일 없습니다. 사제들 모임을 규율하는 것은 ‘ordo(라틴어)-order’입니다. 서품 순서에 따라 모든 일은 진행됩니다. 동등한 관계, 민주적 의사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복음적 권고인 ‘순명’이 남용되어 강제되기도 합니다. 너는 아랫사람이니 무조건 순명하라-이것은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왜곡된 권위주의의 영향으로 사목자와 신자 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자리는 결정하는 자리이고 네 자리는 복종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뚜렷할 때 종종 민망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끝자리, 낮은 자리가 우리 자리라 생각하고 거기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집단은 제가 알기로는 닭입니다. 닭들의 세계는 우두머리 수탉을 중심으로 힘의 질서에 의해 움직입니다. 가장 높은 횟대는 우두머리 차지이고, 먹이도 제일 먹는 특권을 누립니다. 닭은 그렇다지만 인간이 딱 그 수준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겠지요. 저도 슬금슬금 그렇게 변질된 것을 종종 느낍니다.
신학교에 들어갔더니 신학생을 부르는 호칭은 학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때 20대 미소년(?)에게 ‘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생경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본당에 가면 연세 지긋한 분들도 ‘학사님’이라 부르는데 몸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세월이 흘러 서품을 받고 새신부 때 식사 자리, 회식에 가면 상석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가운데 자리, 안쪽 자리에 앉으면 내 자리 아닌 듯한데 굳이 거기 앉으라며 자리를 내어주는데 가시방석이었습니다. 고기라도 구워볼까 집게와 가위 잡으면 빼앗아 가며 그냥 드시라는 말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디 가려하면 모시러 오겠다는 배려가 번거롭기만 했습니다. 지금은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로는 섬기는 자가 되겠다지만 대접받는 것이 익숙하고 그 정도 예우와 배려는 당연한 것으로 당당하게 받을 수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게 되지요. 낮은 자리를 산다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힘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겸손을 가장한 교만에도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을 높여주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스스로를 낮추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자리가 허락된 것인 양 착각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경건함으로 성별되었다는 우월감으로 스스로를 과대포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 딱 걸린 것이죠. 높은 자리에 도취되지 말고 진짜 네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분별하라고 일침을 높으신 것이죠. 누군가 슈바이처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여행하실 때마다 삼등석을 이용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사등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맨 끝에 제일 낮은 곳에 모두가 외면하는 거기에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위령성월 지내며 죽음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보면 좋은 영상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루카 14,5)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대체로는 바리사이와 예수님은 케미가 맞지 않았고 숱한 충돌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도 더러는 있었으니 친분이 있는 이들도 그중에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을 모두가 환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묘한 위로를 줍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었음을 진술합니다. 심지어는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반감으로 살해 모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루카 4,29) 골고타와 십자가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하는 이로 이스라엘에 등장하셨던 것이죠. 내가 환영받지 못하고 거부된다고 그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이 늘 찬사를 받지는 않습니다. 선한 일을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거부당할 때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왜 꼭 환영받아야만 하나요.
거절은 우리에게 큰 상처입니다. 받아들여진다는 안정감, 어디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때 자기 존중감이 높아집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거부될 때 분노와 씁쓸함, 적의와 보복의 감정들이 치올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달랐습니다. 초대받았긴 했으나 그 자리는 일종의 ‘간보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는 아니 어쩌면 트집잡기 위해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도 그런 묘한 분위기를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수종 환자(우리가 제일 많이 들은 수종은 ‘뇌수종’이죠)를 불러 안식일에 금지된 치유를 행하십니다. 사람을 고치고 자유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당신이 하실 일, 그 자리에 오신 목적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죠. 거절 당하는 자리, 불편한 자리이지만 그저 할 일을 하셨습니다.
우울하다고 할 일을 미룹니다. 분위기가 안좋아서 자꾸 위축됩니다. 호응이 없으니 더 이상 하지 않겠다 합니다. 거부당하고 있으니 나도 같은 방식으로 거부해 버립니다. 같은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그 결과는? 상황이 날로 더욱 악화됩니다. 관계는 어차피 좋지 않았는데 사명마저, 책임마저 무산됩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둘 다 놓쳐 버립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내가 어떤 대접과 처우를 받는지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사명에 집중하라는 것이죠. 가족들이 섭섭하게 해도 엄마는 꼬박 밥을 차려 식구들을 먹였습니다. 굶겨 보아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겠지하며 살림 파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속상하게 할지라도 그 시절 신부님은 주어진 사목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들이 나를 이렇게 홀대한다고 냉랭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속끓여보아야 달라질 것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나서야 정리가 됩니다. 그때 엄마가 차려준 그 밥이 얼마나 그리운지를, 그때 그 신부님이 속으로 얼마나 힘들게 그 미사를 드리셨을지를, 그때 예수님이 반대자들을 향해서도 얼마나 가련한 마음을 보이시며 품어가셨는지를. 그래서 지금은 그냥 할 일을 할 뿐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욥 19,26-27, 첫째 미사 1독서)
결국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했다 해도 인생은 한순간이고 한계가 있습니다. 과정도 참 중요하고 결과도 참 중요하지만 끝이 나쁘면 결국은 모든 것이 나쁜 것이죠. 마무리가 좋아야 정말 좋은 것입니다. 우리 생에서 그 마무리는 죽음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됩니다. 성무일도 끝기도의 마무리는 늘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입니다. 그런데 험하고 흉한 죽음의 아니라 거룩한 죽음이 되고자 한다면, 끝이 아름답고자 한다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 들어요.
근대화된 세상에서는 일상의 영역에서 죽음을 추방합니다. 죽음의 이미지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면서, 가능하면 가립니다. 지상 생의 종결인 죽음을 미화할 필요는 없겠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내 누이인 죽음, 뭐 그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런데 죽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전는 삶의 마침은 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깥에서 명을 달리하면 객사라고 해서, 불길하게 여길 정도였죠. 그래서,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집안 어른, 동네 이웃의 죽음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임종을 지키는 것이 자식의 도리 중의 도리였죠. 그래서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병원이 우리 생을 마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너무 아이러니한거죠. 살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병원인데, 한편은 죽음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되어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할아버지 입관때 아이들 안데리고 간답니다. 정서에 안 좋을까봐, 그렇다네요. 활짝 핀 꽃만 보고 아름답다는 정서가 전부인 것이죠. 그러나 꽃이 다 진자리 보고서도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마음이 좋은 것이죠. 하여간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음도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너무 멀리 있도록 차단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웰빙도 결국 웰다잉을 통해 완성되고 절정을 맞게 되는 것이죠.
신부님들 상이 나면, 명동 지하 성당에 시신을 모십니다. 입관 때까지 유리관에 모시고 연도와 위령미사가 계속되죠. 새신부들이 일년간 교구 사제들 상주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그순간 딱 드러납니다. 거쳐간 본당, 만나 신자들이 얼마였을까요? 내 장례 미사에 올 사람, 의무 참석이 아니라 그 삶을 아쉬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러 온 분들이 얼마인가, 눈에 딱 뜨입니다. 천상의 환대 못지 않게 지상의 환송도 따뜻한 장례가 있고, 반명에 썰렁한 장례도 있더라구요.
이왕이면 우리의 마지막이 기도소리로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는 아쉽지만 그러나 당당한 생의 마침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피정에선가 죽음 묵상이 있었어요. 유언장을 작성하구요, 내 영정사진 꾸며놓고, 그 앞에 초 켜놓고 자신에게 문상하는 겁니다. 레퀴엠 틀어놓고, 한참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불편한 겁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고 싶은 일 얼마나 많은데, 그게 너무 아쉽고 시간이 더 있어야해 그러는 것이죠.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가상이니까 정말 다행이지, 진짜라면 큰일이다. 그런데 사실 언제인지 모른다는데 우리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라고 하였습니다. 순서대로가 아니라는 것이죠. 순서대로가 아니기에 내 차례가 바로 다음인양 그렇게 위령의 날을 지내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그러나 마음이 가난해야 그 행복을 얻습니다. 그래서 팔복의 맨 처음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마음의 가난이 없으면 모든 것을 원래 내 것인줄 알고 타락하거나 주신 목적을 이루기 전에 넘어지거나 내가 잘나서 그것을 이룬 줄 알기에 교만하게 됩니다. 지금 누리는 행복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 주신 행복에 감사하면서 가난 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의 시작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무엇이기에 복을 받을까요? 가난한 마음이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가난하지 않은 마음이면서도 받은 복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마음. 그것은 바닥일 때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잘 되고 난 후에 어렵던 옛시절을 기억하는 것이죠.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하는 개구리....가난한 마음의 개구리인 것이죠. 연탄 아궁이에 때며 살던 시절, 연탄가스 마시면서 불갈던 시절에 눈이 내리면 연탄재 꺼내서 길에 깔았습니다. 빙판길 되니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눈 내리는 아침이면 여기저기서 연탄재를 깨서 길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좋은 환경이 되고 아파트 살고 평수 늘려가면서 불평이 계속 나옵니다. 이 집은 너무 좁다고 낡아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죄다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이미 부유해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부유해진 마음은 불행을 자초하게 만드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그래서 지엄한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을 잊지 않았던 다윗의 마음이죠. 직장 없을 때는 나를 써줄 곳만 있으면 하다가도 막상 취업되면 일이 많다고 상사가 까다롭다고 불평하는 마음은 가난과 담쌓은 마음이죠. 신학교 들어오면 그 전에는 그렇게 갈망하다가도 막상 들어와보니 살기가 힘들다는 것도 이미 부유해진 마음입니다. 기다리고 노력해서 사제가 되었으면 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나름 원하는 소임이 여기가 아니라고 입이 이만큼 나오면 그는 가난하지 않은 것이죠.
그렇게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은혜는 못갚아도 내게 조금 섭섭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돌에 새깁니다. 내가 누군데 하면서 분을 못참습니다. 그것도 이미 부유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꾼이 그 품삯 받는 것 당연하지만 일 하고 난 뒤에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라셨습니다. 내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조차 하느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입니다. 나의 모든 염려를 맡기는 것이죠. 주님께만!
그러기에 팔복의 첫 번째는 가난한 마음의 행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일곱가지를 누리기 위한 전제가 됩니다. 그렇게 가난한 마음은 가장 우선적이고 다른 행복의 관문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만 다른 모든 것을 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입맛이 없마음에 행복이 사라지는데 다른 모든 것을 주더라도 느낄 수 없는 것이죠. 입맛이 없으면 천하진미도 별로인 것처럼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다른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게 됩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지내면서 그 행복한 가난을 누리는 마음을 주시도록 전구를 청합니다. 그리고 다른 행복들도 넉넉히 허락하시도록. 昢凉 神父…더보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루카 13,19-20)
우리 인생에는 사실 대단치 않은 것, 별것 아닌 것들인데 실상은 결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1986년 1월28일 우주 왕복선 챌린저는 발사 후 73초 만에 공중 폭발합니다. 후에 규명된 원인은 뜨악했습니다.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우주왕복선에서 가스 누출을 방지하는 직경 0.28인치의 '오링(O-ring)'이란 부품 불량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이 부품은 1달러도 안되었고 발사 전에 부품 불량에 대한 지적이 나왔지만 그 작은 부품 하나 때문에 발사 연기는 불가하다는 자존심으로 밀어붙이다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별것 아닌 것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 때는 대수롭지 않았던 만남이, 별것 아니었던 사건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데 하느님 나라도 그러하답니다. 복음은 어마어마한 무엇이 아니라, 사소한 무엇 안에, 지나칠 법한 무엇 안에 하느님 나라가 숨어 있다며 겨자씨와 누룩에 빗대고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그것은 저절로 자라고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잠재적 상태에 있던 한탄 씨앗과 누룩은 처음에는 그 자체로는 있으나 마나인 미소한 무엇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적절한 때를 맞거나 인연을 얻으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에요. 이런 변화의 엄청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겨자씨와 누룩섞인 밀가루의 비유입니다.
모든 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이러한 변화, 변혁의 체험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새사람이 된다, 혹은 거듭 태어난다, 주님 안에 새 피조물이 된다거나 불교에서 성불한다, 깨닫는다 혹은 대각의 경지의 이른다, 해탈한다, 유교에서 소인배에서 군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 변혁을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죠. 궁극적인 변화, 인간에게 가능하며 이런 변화의 결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존재가 펼쳐진다는 통찰을 모든 종교는 가르칩니다. 인간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떤 식으로든.
그런데 이런 변화는 변화의 주체인 당사자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에 새들에게도 좋은 것이죠. 겨자씨가 발아해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은. 하늘의 새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변화가 오는 것이니까요.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밀가루의 발효를 통해 얻어지는 빵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뭐라구요? 그렇게 밭의 흙속에, 양푼의 밀가루 속에 섞여 들어가 과거와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내고 주변을 이롭게 하는 능력으로 충만한 나라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인이 무엇이냐? 겨자씨를 이랑에 뿌리는 그 농부, 누룩을 밀가루 속에 넣는 어느 여인이 있어야 합니다. 곧 가능성은 늘 있고 미래의 시간은 열려져 있고, 잠재적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누군가에 의해서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싹틔우고 부풀어 오르게 할 누구, 그 누구를 하느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나일까요? 혹은 당신이신가요? 昢凉 神父…더보기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카 13,11-13)
거룩한 시간,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 회당에서 일어난 일. 등장한 인물은 허리 굽은 한 여인이지만 다른 환자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회당장의 입을 통해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말한 것을 감안하면 그렇죠. 루카는 의사입니다. 그는 정확하게 이 여인의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꼬부랑 할머니는 평생 밭에서 부엌에서 일하느라 허리가 굽었지만 이 여인은 병마에 의해 척추가 휘어진 상태. 땅만 보고 산지 어언 열 여덟 해,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거룩한 시간과 장소에 부적합한 삶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죠. 단번의 안수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여인에게 투영된 상징은 당시의 유다인들이 율법에 짓눌려 굽어있는 상태입니다.
깊은 슬픔과 오랜 아픔이 있습니다. 한 해 한해 겪었으니 이제는 익숙해질만 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장은 무시합니다. 오늘 하루 더 굽은 채로 산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냐고. 내일 고쳐주는 것이 율법에 맞는 일이라고. 어차피 열 여덟 해나 그러고 있지 않았느냐고. 그는 냉정하지만 옳은 판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롭지만 율법에 위배된 치유를 행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어쩌면 예수님이 틀렸다고 그분이 그러시면 안된다고,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수많은 환자들을 그동안 보아왔습니다.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부질없는 기도를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저는 믿긴 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고쳐주시라고 청하면서 성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런 상태라면 그다지 오래가지 못할 수 있다고 단정하면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치유자이신데 나는 무능력하니까 간신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한탄하면서 말입니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는 이들을 떠올려봅니다. 병석에 누운지 이미 오래인지라 잊혀진 이들이 되어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온갖 고질병과 온갖 불치와 난치병으로 신음하는 이들. 손을 얹어 안수할 때 내 손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 겹쳐져 어루만져 주시기를. 그의 상처에 주님의 상처가 합해지기를. 그의 짓눌림에 십자가의 짓눌림이 일치되기를. 그리하여 주님이 선언하신 바,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는 해방의 말씀이 현실이 되기를. 昢凉 神父… 더보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마태 22,37-38)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을 느끼는 것과 사랑을 사는 것은 비슷한 만큼 다르니 말입니다. 우선 뭔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먼저 호감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참 좋아했습니다. 수의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꼬물거리는 것은 뭐든지 좋았습니다. 동네 뒷산에 개미집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염없이 들여다보느라 저녁 때를 놓치곤 했습니다. 그냥 끌렸던 것이죠. 별 이유랄 것도 없이. 그래서인지 어디를 지나가도 강아지를 파는 곳은 지나치지 못했고 수족관이나 반려동물 샵이 어디 있는지 꿰뚫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가입한 동물 관련 커뮤니티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귀찮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새와 고양이를 돌보는 것을 보니 이 녀석들을 많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찾게 되고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떨까요?
사제로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 하겠지만 문득문득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민망하게도 ‘글쎄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 아닌지. 마음을 다했다기에는 저의 관심이 다른 많은 것들에 분산되어 있고, 목숨을 다하기에는 애착이 여전히 남아 있고, 정신을 다하지 못한 무심함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호감으로 시작했지만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부끄러운 삶일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음이 실제인 것이죠.
게다가 더 문제는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평하면서, 이만큼이라도 어디냐고 변명하면서 교회 안에서 누리게 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죠. 열정은 어느 틈엔가 가뭇하게 식어갑니다. 이러면 안된다고 성찰하는 것도 잠시, 뻔한 삶으로 다시 흘러가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지 못한 부실한 사랑이, 목숨을 걸지 못한 알량한 사랑이, 정신을 쏟지 않는 허황한 사랑이 그저 그런 상태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죠.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알지만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 느끼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언제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한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는 그런 날이 오기는 할는지. 무뎌지고 굳은 믿음을 흔들어 제자리로 만들어 주시겠지요. 불량 신부… 더보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조안 치테스터 '변화의 바람' 중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은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약했고 성격이 급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베드로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가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속셈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필립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맹목적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지성과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필립보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느님 나라보다 돈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외톨이였습니다. 유다는 성실하지 않았습니다.유다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마태오는 돈에 굶주렸습니다. 마태오는 사람들을 괴롭혔고 과거는 깨끗하지 못했습니다.마태오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토마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토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토마는 의심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토마는 세상 경험이 없었습니다. 토마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토마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냉소적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세속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아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혁명당원 시몬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호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에게는 섬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시몬은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루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루카는 강건하지 못했습니다. 루카는 복음이 요구하는 어려운 투쟁을 직면할 수 없었습니다. 루카는 옳은 것을 떳떳이 말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루카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코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지나치게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신경증 환자였습니다. 마르코에게는 기쁨과 낙천적인 성격이 없었습니다.
마르코는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르톨로메오와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와 야고보는 세상에 기여할 바가 없었습니다. 바르톨로메오와 야고보는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르톨로메오와 야고보는 카리스마가 부족했습니다.
바르톨로메오와 야고보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용기, 순수한 동기, 지성과 통찰력, 성실함, 깨끗한 과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성숙함, 섬세한 감정, 진리를 선포하는 용기, 기쁨과 낙천성, 특별한 카리스마가 부족합니다.
우리 역시 부족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따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실까요. 자격이 없는 이들만 죄다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중대한 원칙입니다. 예수님의 인사조건이 까다로왔더라면 우리같은 사람은 불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가 이해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나의 약점뿐이라고 하신 까닭이 말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남달리 뛰어났더라면, 재능이 출충했더라면, 기획능력이 있고 굉장히 우월한 이, 한마디로 잘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좋았을까요?
그러면 아마 교회는 잘난이들의 공동체, 엘리트들의 모임이 되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들, 못난 이들은 발붙일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인의 친구, 버림받은 이들의 동조자이십니다.…더보기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54-59)
선거철만 되면 민의야 어떻든 자기 잇속 챙기느라 어영부영하던 이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입만 열면 역사의 대의를 들먹이고, 자신들의 결정이 여론을 따르는 일이라고 강변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합니다. 사실 곧이 곧대로 믿는 순진한 국민들도 이젠 없습니다. 하도 속아와서인지 정치라면 신물을 내고 그저 방관자로 지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정치에 무관심해, 그냥 정치 모리배들하는 짓거리는 흙탕물 튀는 일이야 에이, 멀리 떨어져 있자-라고 무시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것은 또 없을 듯 싶습니다. 모름지기 국민들이 무관심해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부패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서슬 퍼렇게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감시하고 점검하는 것은 천부적인 인간의 권리입니다.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시대의 징조는 알지 못하느냐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마음 고쳐 먹지 않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이셨습니다. 내심으로는 그래서는 안되 하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과 자기 운신에 사로잡혀 하늘을 가리고 자기를 속이는 짓거리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위선자라고 한탄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징조는 구태로부터 벗어나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변화를 요구하고 쇄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량한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고 신념과 지조도 죄다 팔아버리고 이리저리 이합집산하고 야합하는 못난 모습을 우리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철새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철새가 무슨 죄입니까? 철새는 자기가 언제 이동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고 하늘과 땅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갑니다. 괜히 죄없는 철새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알고 있는 시대의 뜻을 모른척해도 되려니 하는 무책임한 이들에게는 다른 별명을 붙여 주어야 할 듯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로마 제국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음모에 희생되셨습니다. 아마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전형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팔아서라도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려는 소인배였기에 배반의 길을 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분이 원하시는 시대의 변화를 한 마디라도 알아들었다면 예수님을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님 제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철새가 있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이제나 저제나 시대의 뜻을 모르는 이들이 역사를 더디게 만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정에 관한'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세상을 향한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 충실하게 가르치고 있는 문헌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 49.51)
신학생 시절 제 출신 본당은 참 심난했습니다. 본당 설정된 뒤에 조그만 성당을 짓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져갔습니다. 성당 옆집 하나 사서 교리실 늘리고 또 하나 사서 창고로 쓰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30년이 되니 구조도 들쭉날쭉 설비도 어수선한지라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본당신축위한 기도를 시작했죠. 계속 기도했합니다. 미사 때마다 기도합니다. 시간이 흘러 서품 받았는데도 여전히 기도합니다. 한참 지났는데도 계속 기도만 합니다. 그동안 삽질 한번 안하고 정리 안된 채로 계속 살았죠.
저는 본당 떠나 사목지로 갔지만 소문이 들려옵니다. 아직도 기도하고 있더라. 그러던 어느날 전기 배선이 합선되어서 수녀원에 불이 났고 간신히 진화되었답니다. 그제서야 신자들이 ‘이대로 살다간 큰일나겠다’며 드디어 기도한지 거의 이십년이 되어서야 성당을 지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불은 정말 예수님이 지르신 것이 틀림없다.’ 너희는 도대체 언제 벽돌을 올릴꺼니, 그냥 그대로 살려면 기도는 왜 한단 말이니. 성당은 돈으로 짓지 않고 기도로 짓는다지만 손과 발도 움직여야 하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의 처신, 우선 방화범으로 자처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명히 불을 지르십니다. 봄이 되면 둑방에 불을 놓습니다. 해충도 박멸하고 잡초 태워서 땅도 비옥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심지어는 한 집안도 갈라져서 맞세게 하려고 하실 거랍니다. 가정파괴범이신 것이죠. 방화에 가정파괴, 이정도면 중범죄이고 가중처벌 됩니다.
주님 말씀은 우리의 통념을 부수십니다. 거짓된 평화 있습니다. 위장된 일치가 있습니다. 그 때 참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다 태워버리고 갈라질 것은 갈라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선택하면 교회가 당하게 될 고난과 시련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은 세상과 불화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다가올 상황을 예고하셔서 준비시키려는 것이죠.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하셨기에 무수한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던 것이죠. 구약시대 아들을 바치는 시험을 거쳤던 아브라함, 광야에서 한없이 고독했던 모세, 고난을 겪은 모든 예언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댓가를 평생 치루어야 했던 사도들, 그리고 교회 2천년 역사가 품고 있는 많은 박해받은 믿음의 자녀들, 고통의 어머니 우리 마리아. 이 모두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를 체험한 이들이죠. 바로 주님 때문에 세상과 분리되는 아픔, 그에 따른 분열과 갈등이야말로 예수를 따른다는 진정한 표지입니다. 아무런 분열도 갈등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이 아니라 다른 허상을 쫓고 있는 것이죠.
주님이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삿된 것, 악한 것들을 다 태우시고, 그분이 불 지르실 때 우리는 정화됩니다. 용광로를 통과한 광물의 불순물이 다 제거되어 순수해지듯 그렇게. 昢凉 神父…더보기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똑같이 잘못했는데 더 혼나기도 하고 덜 혼나기도 하고 공평하지 않다 싶기도 합니다. 동일한 행동에 대한 상이한 처벌-더 혼난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 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잘못했는데, 안 혼나거나 덜 혼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혼내시는 것도 사랑이고, 야단 맞는 것도 기쁨이 될 때가 있죠. 부모님이 혼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아주 자식들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지면, 내 속으로 낳았지만 정말 저것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고. 그냥 속만 부글부글 끓지 안혼내시더라는 것이죠. 야단치는 것도 다 애정이 있어야 하지, 될 대로 되어라, 그래 네 인생 어찌되나 보자. 여기깢 이르면 혼내지 않습니다. 포기합니다. 혼내는 데도 지쳐 버리면 더 이상은 혼내지 않습니다.
복음은 준비하지 못한 종들, 주인이 모든 것을 다 맡겨주고 떠났건만 나 몰라라하며 지내는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종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들의 경우에는 꾸중의 정도가 경감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왜 그리스도인이 더 많이 혼날 수 있을까요? 내 자식이니까, 내 새끼니까, 다 맡겨준 사람이니까, 많이 받았으니까-더 사랑받았으니 더 혼날 수도 있습니다. 남의 자식이면 잘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가요. 그런데 내 자식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금쪽같은 내 아들, 딸일 경우에는 다릅니다. 열손가락 깨물면 다 아프지만 더 아픈 손가락 있을 수 있쟎아요. 내가 더 혼나는 것 같은 이유는 하느님께 내가 더 아픈 손가락이기 때문인 것이죠.
어떡하든지 바로잡아야 해.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거든요 그러니 더 심하게 혼내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방식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12, 47-8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믿고 고백했어요. 그런데 제대로 안한다, 알고도 모른 척, 괜찮거니 강심장입니다. 그 결과는,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모르면 차라리 경감될 벌이 알고도 꿈쩍 안했기에 더 거센 책임을 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은 때려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가르치고 바로잡고픈 부모의 애달픈 마음으로 하시는.
세상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교롭게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냥 비난받는 것보다 더 비난이 쏟아집니다. 알만한 사람이, 우리하고 다르리라 여기는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죠. 하느님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더 윤리적으로 헤이하고, 더 몰상식하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하느님마저 욕되고 수치스럽게 합니다. 더 욕먹을만 하다고 세상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앙인의 책임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받은 이는 더 돌려드려야 한다는 말씀의 무게감. 더 많이 받은 자의 가치로운 사명감. 昢凉 神父…더보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루카 12,37)
복음은 충성스러운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주인에 대한 충성스러움이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장면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을 켠 상태에서 서 있는 종들이 등장합니다. 충성스러운 제자들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종들은 왜 그렇게 있는가요? 주인이 혼인잔치에 갔더랍니다. 즐거운 자리에 가서 사람들 만나 이런 저런 얘기하고 피로연도 즐기면서, 주인은 종이 기다리든 말든 돌아갈 시간에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종은 언제일지 정해지지 않은 주인의 귀가를 기다려요. 실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종의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힘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저 세세하게 마음을 모아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가 된다는 것이죠.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을 보고 주인이 기뻐하겠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에 대해 하느님이 기뻐하시겠구나-그것이 충성입니다.
팀장님이 외근 나갔습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사무실로 오지 않습니다. 퇴근 시간 지났지만 팀원은 계속 기다립니다. 뒤늦게 돌아온 팀장이 기뻐할까요? 왜 안가고 기다렸나며 흐뭇해할까요. 글쎄요. 저녁 한끼 사줄 수는 있겠지요.
복음의 종이 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즉시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렸습니다. 감시하는 CC TV없을 테니 누워있어도 앉아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그는 굳이 서서 기다립니다. 주인이 당도하면 즉시 열어주기 위해서, 주인이 오늘 하루 피곤하시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되겠다-이런 마음입니다. 그에게는 긴장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종의 정체성으로 이렇게 한다면 불평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늦냐. 오늘따라 더 늦네. 나 왜 이러고 있나.’ 그런데 종은 툴툴거리면 짜증내지 않습니다. 이 정도 되면 종이 아니라 친구가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일에 애정을 담는 것, 영혼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애정이 있으면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생겨서, 애정을 담아 기도하고 섬기고 맡기신 일 감당하게 됩니다.
이런 종의 충성스러움에 대해 주인은 아주 아주 파격적으로 대하는 일이 일어난답니다. 돌아온 주인이 기다린 종을 섬기는 일. 이 주인은 그러고보면 너무 이상한 주인입니다. 사회적 신분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충성하는 종에게 주인이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너 여기 앉아봐. 내가 너 시중들테니.’ 주인 자신이 종처럼 오히려 그들을 섬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종에게는 과분하기 짝이 없는 대접입니다. 종은 충성스러웠지만 주인이야말로 이 종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수고합니다. 누가 알아줍니까? 밤늦게까지 기다립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노라. 주인이 만들어줄 마지막 엔딩을 기대할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주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아는 것이 종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한주간 시작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부유함에 대한 예수님의 질타입니다. 좀 껄끄러울 수 있습니다. 대체로 교회 안에서 돈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잘 말해봐야 본전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돈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교회 안에서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거나 세속적이라고 질타하는 것은 그저 맘 편하자고 회피하는 것이거나 말해야 하는 것을 유예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돈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복음은 다름 복음에 비해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도 그렇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가르침도 그렇고,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다는 경구도 있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초대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 약은 청지기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이 비유와 이야기는 루카복음에만 고유하게 전해집니다. 루카 복음은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해 선포된 복음입니다. 아마도 초세기 교회부터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믿음을 저버린 이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루카복음의 후속작인 사도행전에도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살던 그 시절에도 자기 몫을 챙기는 아나니아와 사피라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실을 외면해서는 해결되지 않으니 대면하고 복음적 해결책을 구하라고 복음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 가족의 행복 너무 중요하죠. 내 자녀의 교육 역시 중요합니다. 내 노후가 어떨까 관심없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부자는 나의 곡식, 나의 창고, 나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두고 복음은 어리석은 자라고 지칭하죠. 이유가 뭐죠? 그의 관심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것이 다른 사람이 다른 고통이 눈에 들어올리 만무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재산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고 굳게 믿기에 그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었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포론(αφρων), 이것은 무지함 혹은 단순무식함 이런 일차적 의미를 갖지만, 허무함 내지 부질없음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곧 흘러가는 것인데 그것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그것이 어리석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었습니다. 지나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이 마음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무한 질주하게 되는 것이죠. 어떻게? 더 많이, 더 대단하게를 요구하는 것이죠. 더 더 더!
그런데 모든 만족은 욕심의 크기를 줄일 때 옵니다. 욕심의 크기가 무한정이면 그 무엇도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무한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무한뿐입니다. 더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덜 원하는 사람만이 만족합니다. 항상 ‘더 많이’를 달고사는 이는 그 무엇도 채울수 없습니다. 설령 창고는 가득채울지 몰라도 그 마음은 안 채워집니다. 안 채워지니 허기지고 갈증을 느끼죠. 내 욕심의 크기를 줄이는 연습, ‘이만하면 되었지 뭘 그래’. 정말 그렇지 않나요.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
전교주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선교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교, 절집 용어로 보시(布施)란 말 있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널리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하비다. 베푸는 것에는 재물로써 베푸는 재시(財施)와 두려움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 )석가의 가르침, 즉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시(法施) 의 셋으로 구분합니다. 그중 제일 큰 보시는 법보시, 부처님의 진리를중생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주는 것은 현세의 삶을 돕는 것이나 불법을 전하는 것은 그를 극락왕생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 식으로는 봉헌 혹은 선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도 제일 큰 봉헌, 내가 바칠 수 있는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봉헌, 우리 하느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당신 자녀들, 당신 백성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재물의 봉헌 아니라 사람의 봉헌을 원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욕심내십니다. 선교는 하느님께만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에게 구원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교라는 말보다는 구령(救靈)이라는 말을 선호하였습니다. 영혼을 구하는 일, 다른 무엇에 비길데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 신앙을 전해주는 것인데, 그래도 ‘나는 못하겠다, 남들에게 신앙을 전하지 못한다, 천성이 소심해서 자신있게 전교 못한다’ 합니다. 물론 나름 다 이유가 있더라구요. 너무 바빠서 못하고,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설득력이 없어서 못하고, 내 신앙도 코가 석자인데 누굴 전교하냐며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다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고 사실 핑계가 있고 구구절절 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화되어야 내가 전하는 복음에 힘과 권위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나도 복음화 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야말로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안 전하니까 나도 이 모양인 것이죠. 내가 복음화에 완성되고 충만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그렇다고 하면 과연 누군들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하느님을 아직 모르는 이에게 알려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 하느님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나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막 자랑하고 싶은 그 마음. 나를 사로잡은 사랑이 깊어져서 그분의 꿈, 예수님의 꿈. 세상 끝까지 모두 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 그 꿈이 어느새 나의 지향이 된 그런 마음이 샘솟아 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10)
사극에서 편전에 문무백관들이 양편으로 도열해 있습니다. 용상에는 임금이 근엄하게 좌정해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신하들이 갑론을박합니다. 그런 장면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대사는‘전하, 아니 되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수염을 실룩거리며 전하께서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한마디 호통을 칩니다. ‘지금 경들은 과인을 능멸하려는 것이요?’ 그러면 서슬 퍼렇던 대신들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전하의 호통에 반박 못하고, 전하께서 능멸한다 느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왕의 뜻대로 일은 처리되기 마련입니다.
복음에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그만큼 엄중한 죄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용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 그것이 성령모독죄인 것이죠.
모고해, 모영성체, 신성모독- 우린 이런 말을 가끔 씁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뭐가 있는가? 성령모독! 도대체 용서받지 못할 성령 모독죄가 무엇인지요? 우리가 별별 죄를 다 지어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셨으니. 그런데 딱 하나 용서받지 못할 죄 그것은 절대로 우리 인생에서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에서 제외되니 이것만은 절대 피해야합니다.
성령모독죄! ‘성령 정말 나쁘네. 성령 못 쓰겠어’-이런 거 아닙니다. ‘성령 귀찮아 죽겠어, 하라 마라 왜 간섭이야.’ 이런 것이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것 아닙니다.
앞뒤 대목을 참조하면 성령모독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죠. 천사들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대변하지 않는데요. “쟤는요 주님을 모른다고 한 성령모독죄를 지었어요” 우리를 오히려 고발한다는 것이죠. “주님, 쟤는요 모른 척하셔도 되요. 지가 스스로 모른다고 했답니다”
11절에는 뭐라하셨나요. 회당, 관청, 관아에 끌려갔을 때 답변의 요령이나 내용에 대해 걱정말라셨습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령께선 우리의 증언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을 고백하게 하고 다른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증언하게 추동하시는 분, 성령이시죠. 이런 성령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모독이랍니다. 전하라 하실 때 전해야죠, 고백하라 하실 때 고백해야죠, 찬미하라 하실 때는 물론 찬미해야죠, 담대하게 맞서라 하실 때는 맞서야죠. 성령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심에 나를 내어맡기는 것이죠.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을 내 입술에 담아 주실 때,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나는 세상에 속하고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 휘둘리는 자 아니라고 드러내면 됩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세미한 소리를 거절하지 않으면 됩니다. 내면의 미세한 소리, 성령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내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의 속삭이심을 외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아버지를 모독한 것, 아들을 모독한 것, 그 외에 어떤 잘못도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어리석은 것인지 얼마나 한심한 일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쳐나가며 계속 성장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조건은 뭐냐? 내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미세한 움직임과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죠. 이런 전제를 거부할 때는 아무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죠. 들려주시는 대로 잘 듣는 것이 시작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루카 12,4-5)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설레고 두근거렸던 아침을 맞이하고 계신가요. 대개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고 정해진 시간에 미사 드리고 하루가 뻔하게 흘러가고 해야할 비슷비슷한 일들의 반복됩니다. 별다를 것이 여간해선 없습니다. 그러니 흥분할 일도 없고 성질부릴 일도 없고 딱히 걱정스러운 일도 그다지 없습니다. 많은 이가 부러워할만한 그런 삶일 수 있겠고, 이 정도면 정말 꽤 괜찮은 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은 그러나 치명적 결함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월하게 흘러가다보니 좋은 의미에서의 긴장감도 상실되어 버립니다. 새로울 것이 없다보니 나오는 행동과 말, 관계는 습관으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괜찮은 날이지만 이대로 괜찮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서 누룩은 ‘위선’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경건함을 표방하나 실은 부패를 감추고 있는 삶, 거룩을 가장한 세속적 욕심의 추구, 남의 이목에는 민감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심함-이 모든 것들이 바리사이의 누룩일 것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적 누룩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시며 당신의 벗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두려움을 잃어버렸기에 누룩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삶에 만족합니다. 아주 자주 하느님을 자기 편의에 맞추어서 재단하고 이용합니다. 믿음으로 가득 찬 것 같으나 실은 자기 자신을 믿는 셈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 내 노력의 반대급부로 얼마든지 거룩해지고 진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점점 이 누룩은 확산되어 갑니다. 그 종착은 아무 것도 새롭지 않은 그저 그렇고 뻔한, 그러나 겉으로는 꽤 괜찮아보이는 삶입니다.
바리사이의 함정에 빠져 있지 않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별 문제 없으니 괜찮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 없으니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실은 오판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만족과 자부는 하느님 없는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잠언 1,7)임을 놓쳐버릴 때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에 갇혀 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살아계심을 알고 받아들이고 느끼라는 초대입니다. 거룩하신 분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을 때 오늘 내가 맞이하는 아침이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이 되고 그러면 어제보다 더 설레면서 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루카 11,47-48)
‘화’를 잘 낼 줄 모르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그렇게 잘 억누르고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지낼 수 있을까. 겉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냅니다. 그런데 결국에 풍선에 공기가 과해지면 터집니다. 잘 참는다고 하는 것은 그 인격과 성품이 넓고 깊어서 수많은 자극이 들어와도 그때그때 반응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인데. 결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마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결국 넘칩니다. 그래서 심리 상담 하는 이들이 이구동성 ‘참다가 사고친다’입니다. 화산 중에서 수증기가 계속 나오는 화산은 내부 압력을 줄여서 급격한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우리 마음도 그 비슷해서 중간 중간 조금씩 해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당하고 살고 집에서도 풀 데가 없고 그냥 나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며 사는데, 나중에 보면 엉뚱한 일이 일어납니다. 내 안에 화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다가 문제가 더 커집니다. ‘아무개야, 너 지금 화났구나. 어떡하니’- 답이 나옵니다. ‘지금 좀 쉬어야해.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영화도 보고 좀 그러자.’ 뭔가 긴장 해소의 방법이 나옵니다.
또 화를 풀기도 하지만 내기도 잘 내야 해요.
아마 예수님도 일상이 짜증스러우셨을 것이죠. 제자들은 하나같이 딴청피우죠 사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본다면 노숙자, 상거지에 가깝습니다. 동가식 서가숙의 처량한 인생. 복음 전할 때 미래가 탄탄하게 별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도 많았을 겁니다. 이럴 때는 주님은 따로 시간을 내서 기도하셨죠. 외딴 곳으로 가서 아무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 예수님이 그 시간을 통해 재충전되고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잘 해소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또 새로 시작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화를 잘 푸셨기 때문에 그 고단한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셨죠.
그런데 그렇게 푸는 것으로 안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어떡하는가. 참지 말고 화를 내는데 화를 잘 내야해요. 화내는 타겟이 정확하셨던 것이죠. 바리사이 율법학자, 저자들이 하느님을 얼마나 왜곡해서 전달하는지 예언자들을 박해했던 이스라엘의 긴 역사, 정말 그 지겨운 역사의 정점에 저들이 있음을 아셨어요. 그리고도 얼마나 말은 청산유수인지 남들마저도 그 파국의 일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이죠.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방해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하는 말, 당연히 믿는 사람 많았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이 많은 영혼을 파괴하기에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데 그 가르침 때문에 더 힘들게 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딱 지적하고 고발하시는 것이죠. 많은 경우에 이럴 때 에둘러서 회피합니다. 그러면 마음속의 화, 분노가 계속해서 쌓이게 됩니다.
화를 내야하는 그 대상이 아니라 다른 데로 분출해요. 주로 약한 곳으로 돌려집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죠. 남편이 집에 돌아와 짜증내요. ‘집안 꼴이 왜 이 모양이야. 집에서 종일 뭐하는 거야.’ 엄마가 논 것이 아니거든요. ‘이 인간이 나한테 왜 그래’ 그리고 꼭 아이에게 부글부글 잔소리 폭발합니다. ‘니 애비 닮아서 공부도 안하고. 못살아 못살아’ 애는 가만있다 무슨 죄에요. 얌전히 꼬리치며 반겨주던 해피 걷어차죠. 해피도 분해서 골목에 나가서 지나가던 사람 짖어대고 물어버립니다. 화가 제대로 방향을 안잡으면 돌고돌고 돌아서 돌아버립니다. 화를 제대로 잘 내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내가 화가 났구나. 나 건드리지마.’ 그리고 이 분노가 무엇 때문인가 정확하게 알아내야죠. 화 내지 않는 것이 성숙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화를 내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10,1-2)
예수님이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먼저 일흔 두 제자, 열 두 사도가 아닌 이들을 파견합니다. 당신에 앞서 둘씩 팀을 만드셔서 보내셨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복음을 전한 ‘앞서가는 자’입니다. 믿음의 경주가 있다고 한다면 선점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앞선 이들인가를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선 추수하는 일꾼이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물주고 김매고 가꾸어 가을에 열매 익으면 거두어들입니다. 거두지 않으면 일년 농사 헛 짓이 됩니다. 모든 수고의 결실이 밭에서 다 떨어져 썩으면 소용없습니다. 물론 추수할 일꾼은 낟알과 과실이 아니라 영혼의 추수꾼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영혼은 버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거두어질 영혼들이 추수할 일꾼을 만나지 못하고 그들이 제 몫을 하지 않으면 거두어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가 망한 것은 결국 추수꾼인 나의 직무유기 때문인 것입니다. (추수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조심스럽긴 하네요.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 익히 들어 아시겠지만 그들이 이단 사설을 퍼뜨리는 이들을 추수꾼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 말의 의미를 오염시켰습니다.) 이 영혼의 알곡을 인도하고 전교해서 주님의 곳간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일, 그런 일이 추수꾼들에게 사명으로 맡겨진 것이죠.
일흔두 제자는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사도는 풀타임 복음선포자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 일흔두 제자는 파트타임 복음 선포자였던 것 같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평신도의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 직업과 생활터전이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주님이 특별히 쓰신다는 것이죠. 추수밭은 바로 그들의 삶의 터전인 것이요. 구역반장님들이고 레지오 단원들이고 파티마 회원들이고 주일학교 교사들이고 성가대 단원이고 등등. 뭐 그런 교회의 일원들인 것입니다. 오늘 축일 지내는 루카는 사실 사도 명단에 오른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사였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런데 선교사업에 매진한 이였던 것이고, 복음도 집필했죠. 그래서 오늘 복음이 적합한 것이죠.
평화를 받은 이가 앞서가는 자입니다. 앞서가는 자는 평화의 축복을 받습니다. 앞서가는 이를 보내시면서 주님은 축복의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빌어주는 대로 평화가 내린다는 것입니다. 평화받을 사람 있으면 빌어주는 평화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그 평화를 받을만한 이가 없다면 다시 되돌아 온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주하는 인생이어서는 안되죠. 저주도 마찬가지에요. 저주받을 이 아닌데 그렇게 저주하면 다시 부메랑이 됩니다. 늘 평화를 빌어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포하는 이가 앞서가는 자입니다. 어느 고을에 들어가면 주는 대로 음식을 먹고, 까탈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는 자기 기호가 사실 없어야 합니다. 자기 기호가 없다는 것은 편안한 사람입니다. 한식, 일식, 중식 뭐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먹습니다. 스트라이프, 도트, 체크 그냥 걸려 있는대로 입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 만나고 함께 합니다. 뭘 좋아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은 그런 점에서는 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것이 아직도 이리 분명하니 말입니다.
주는 주는 대로 먹고 할 일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이것이 전할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주님 보다 앞서서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 앞선 자이기 때문입니다. 추수밭에 익어가는 낟알을 보며 앞선 자로 살고 있는지 묻습니다. ‘너의 발걸음이 뒤처지고 있지 않은지’ 昢凉 神父…더보기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39-41)
코로나가 한참일 때 온 국민에게 손씻기가 강조되었습니다. 버스 앞에 지하철 안에 길거리에 커다랗게 붙어 있던 안내 포스터 문구는 ‘손을 씻읍시다.’ 이거 어릴 적에 자주 듣던 말이쟎아요.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 ‘손 씻거라.’ 심지어는 손씻는 요령도 가르칩니다. ‘흐르는 물에 30초 이상 비벼서 씻으면 안전합니다.’ 전염될까봐 모두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손세정제가 불티나게 팔려가지고 원료인 알콜 공급업자가 대박났었죠. 서로 악수도 못하고 주먹 인사를 합니다. 손 씻는 것으로 본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복음에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자리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두고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지 위생상의 문제 아니라, 정결의 예법조차 준수하지 않는 종교상의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페루 원주민 선교가신 아는 수녀님이 계신데 몇 년 만에 휴가 받아 오셨어요. 선교사로의 고뇌와 보람에 대해 이야기 듣는데 고백하시길, ‘신부님, 다 감당할 수 있는데 제일 힘든게 뭔지 아세요.’ ‘뭔데요.’ ‘안데스 산맥에는 물이 귀해요. 그게 제일 힘들어요.’ 수녀님들은 대개 결벽증처럼 씻는 것 좋아하시더라구요. 하여간 그 수녀님 마실 물도 귀하니까 씻는게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 생각이 드시더래요. ‘아, 하느님 없이는 살아도 물없이는 못살겠구나.’
세례와 정결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단 한번 유일합니다.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결례는 반복해야해요. 세례는 한번 받으면 끝이죠. 재세례란 없습니다. 난 유아세례라 기억없으니 다시 해주세요. 안됩니다. 세례는 손을 씻고 몸을 닦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씻는 것이니까요. 한번 씻어내면 그만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씻는 것 싫어하셨나? 아니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요한 세자에게 세례를 청하자 요한이 거절하거든요. 어떻게 제가 감히 주님께 세례를 씻겨드립니까? 그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나를 씻겨줘야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셨죠.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 발도 씻겨주셨거든요. 그런데 발이 아니라 실은 제자들의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 씻겨주신 것이죠. 그것이 주님께는 때를 없애고 먼지를 닦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었죠.
공중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 설치했데요. 관찰해보니 거의 안씻더래요. 남들이 안보면요. 씻어도 대충 씻는 사람이 태반이래요. 더러워 불결해요. 그런데 옆에 누가 있으면 손을 씻는 이가 늘어난데요. 결국 마음이 문제겠죠. 마음이 중요하죠. 미인대회 인터뷰 보면 천편일률입니다. 앞으로 어떤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나요-질문하면.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이가 되고 싶다는 하나마나한 대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내적인 아름다움을 찾겠다는 그녀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나온 것이죠. 게다가 누가 진으로 선발 될 것 같냐고 물으면, 옆에 언니가 되야 한답니다. 자기가 양보하겠데요. 다 거짓말이죠. 우리는 씻어야 삽니다. 매일 세수하고 머리감고 샤워하고 가끔 이태리 타월로 북북 밀기도 하고 그러지만 마음도 그만큼 씻는가-묻게 됩니다. 손씻는 만큼, 청소하는 만큼, 설거지 하는 만큼 내 마음과 영혼의 상태도 개운하게 씻어내고 있는가? 아무도 안본다고 생각해서 대충 오염되어도 그냥 그대로 머무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은 잔과 접시의 겉이 아니라 속을 바라보고 안을 닦으라고,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셨는데, 내 마음 속에 씻어내야 할 것은 왜 이리 많은지. 神父 昢凉…더보기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말세야 말세! 흉악한 사건 일어나면 말세라고 세상 끝날 때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기냐고 합니다. 이런 세태가 계속되니느니 차라리 확 망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까지 합니다. 말세라고 투덜거리는 속에는 세상이 별로 변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있는 것이죠. 이 악함이 계속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말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세대가 악하기 그지 없다고 하시는 이유는 이 세대가 주님께 표징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이죠. 곧 예수님이 메시아 구원자라면 뭔가 눈에 띄는 증거를 더 보여달라는 강력한 요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적이 없으면 믿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이라면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내가 이렇게 어려운데 곤란 중에 있는데 도대체 왜 가만히 있느냐, 곧, 뭔가 해결책 좀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표징을 보여달라는 요구는 실은 이렇게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 없는 노릇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악한 신앙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공생활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십일 지내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에게 던진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 높은데서 뛰어 내려보아라. 사탄이 요구한 것이 표징입니다. 증거를 보여봐! 왜요? 그 표징을 보여주었다면 사탄이 믿게 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타은 단지 떠볼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불신의 이유를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보여주시지 않기 때문으로 정당화해요. 하느님이 풍성하게 보여주셨다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요나의 표징 외에 보여주실 것이 없다고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표징은 없답니다. 조건부로 믿는 믿음은 믿음, 아니라는 겁니다. 조건부의 표징 요구, 곧 표징을 보여주면, 하늘로부터 오는 일임이 확실한 놀라운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믿겠다는 것은 믿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불신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조건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죠. 믿음을 가지기에 앞서 만일 어떤 표징, 기적이 있었다고 쳐봅시다. 놀라운 일, 초자연적인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믿을 수 있죠. 야, 정말 놀라운 일이 생겼구나.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 없어. 이게 믿음인가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요 이미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대한 수긍과 인정이에요.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강요된 것이죠. 믿지 않을 도리 있나요.
그러나 믿음은 자유로운 선택이죠. 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믿어져.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할 상황에서도 여전히 믿을 것이야. 이게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꾸 주님께 무엇인가 보여 달라고 그러면 믿겠노라고 칭얼거리면서 윽박지르면서 믿는 불신의 태도가 아니라, ‘주님, 놀라운 일이 없다하더라도 여전히 믿어집니다’ 그런 믿음의 하루가 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왕자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 초대를 거절한 비유입니다. 먼저 복음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여간 임금의 초대인데 사람들이 거절했다? 이럴 수 있을까요.
어릴 적에 골목에서 열심히 놀았죠.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놀 것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노는 것 잘 보세요. 그러면요 아주 온 존재를 다 바쳐서 놉니다. 흙투성이가 되도록 놀죠. 그런데요 저녁 되어 해가 뉘엿뉘엿 지면 어두워져서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이에요. 엄마가 아무개야, 이제 그만 놀고 와서 씻고 저녁먹어. 그러면 네 엄마 하고 한 번에 들어간 사람. 없습니다. 몇 번에 들어가죠. 아니요. 말로 해서 들어간 사람 없어요. 기어이 엄마가 나와서 질질 끌려가죠. 왜요? 그 시절에는 엄마가 차려주는 따스한 밥 한공기, 아웃국의 가치를 몰라요. 그 녀석에게는 지땅도 아니면서 내가 더 많이 차지해야 하는데 그 땅따먹기가 그렇게 소중하단 말이죠. 걔한테는 그것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왕이 베푼 혼인잔치에 초대받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상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죠. 가치에 눈뜨지 않는 사람은 죽어다 깨어나도 그 가치를 모르니까 밭으러 가고 장사하러 갑니다. 돈벌러 갑니다. 임금의 초대보다는 나의 삶, 나의 삶이 우선적입니다. 잔치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이들은 일차로 초대장 받았을 때는 가겠노라고 대답했던 이들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않겠다 했으면 이렇게까지 주선자 호스트인 임금이 화를 낼 리 없어요. 가겠노라 철썩같이 약속해놓고 막상 당일에는 안오는 이들, 한둘이 아니더라는 것이고 잔치를 망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긴급하게 임금이 조치를 취합니다. 길거리에 나가 누구나 다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간신히 잔치 자리를 채웠어요. 그런데요 왕이 마지막 점검하러 들어와서 모인 사람들 보고 흐뭇해하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다 데리고 왔습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복을 입혔습니다. 중동 지역 문화상 이 정도의 혼인잔치 로열 웨딩은 손님들에게 답례품으로 예복 한 벌씩 선사하는 풍습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거리에서 불려 온 이 사람들은요 파티장에 입장하기 전에 입구에 죽 걸려있는 옷 중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 입고 들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어요. 그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을까요. 벌거 벗고 있진 않았을 것이죠. 그럼 무슨 옷? 자기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옷을 입고 있는가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있는가 이 차이죠. 마태오 복음은 자기 옷을 입고 사느냐 주인이 입혀준 옷을 입고 사는가, 이것이 신앙의 관건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을 모를 때는 신앙 생활하는 것 같지만 계속 자기 옷을 걸쳐 입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서 주님이 주신 옷을 입는 투쟁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 주님 스타일로의 전환. 초대된 이들이 입은 옷은요 자기가 준비한 예복이 아니라 그 자리에는 주인이 준비한 옷 그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 선택된 이들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만든 이가 아니라 자격은 없지만 주인이 준비한 옷을 입고 초대에 응한 사람이죠. 그가 행복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초대되어 온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 하는 것이죠.
이제는 내 힘으로 살래 네 힘으로 살래?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생이냐 아니면 하느님 안에 삶을 던져서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행복으로 넘치게 살것이냐. 어느쪽 할래-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지금 행복한가요?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여인...당신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에서의 통상적 인사말은 샬롬, 샬롬 엘레카(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입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이에게는 샬롬이라는 말 외에 너를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 그렇게 인사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자기 때문에 부모가 칭송을 듣는 것은 최대의 명예라는 생각입니다. 반면 반대도 있죠. 네 엄마가 너 낳고도 미역국 먹었다냐-이것은 최대의 모욕이죠.
이런 기준을 가지고 주님께 경의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너무 훌륭하신 것을 보니, 당신 어머니는 정말 복된 분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보통 이 정도 인사를 받으면요, ‘이제야 알았니. 어머니가 이 말을 들으시면 얼마나 기쁘실까.’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겠죠. 그런데 인사하는 어떤 여인이 생각하는 행복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달랐다는 것, 그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주님이 생각하시는 행복. 마찬가지로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준을 세울 것인가가 중요하죠. 주님이 생각하시는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당장은 50% 행복한 거죠. 왜요? 말씀을 들었으니까.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어떤 예언자도 들어보지 못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셔야 합니다. 꼭! 그런데 얼만큼. 절반만의 행복이에요. 그런 행복, 듣기만한 행복은 절반입니다. 듣고 나서 가서 지키면 100% 행복에 도달합니다. 완전한 행복은 듣고 지키는 것이기에.
그런데 우리는 보통 지키는 것,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들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다, 분명 그것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들어야만 지킬 수 있습니다. 나머지 50% 행복의 전제는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듣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요. 자기 인생에만 몰두하고 함몰되어있을 경우입니다. 들리면 들은 것을 기억하고 기억한 대로 우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그 사이에 불순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들음과 지킴 사이에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끼어들어서 방해합니다.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맺지 못합니다. 무엇인가가 계속 끼어들기 때문이죠. 들음과 지킴 사이에 불순물이 있을 때 사실 우리 힘으로는 없앨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정화시켜 주셔야만 없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청할 수 있는 것은 그 불순물을 성령께서 몰아내시고 없애주십사는 것이죠.
들음으로 시작하고 행함으로 완성하는 것, 영적인 궁극 목표를 향해 오늘도 한걸음을. 昢凉 神父…더보기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루카 11,24-26)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험담합니다. 꼭 만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죠. 마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겉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 같지만 예수가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것이 베엘제불과 한통속이다-그러니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험담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베엘제불, 마귀의 수괴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수하 마귀들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시기와 질투의 소산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해 배알이 꼴리는 것입니다. 소인배들의 전형적 행동이죠.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잘도 같다 붙이면서 공적은 깍아 내리는 것입니다. 기를 쓰고 말이죠.
잘했으면 그냥 잘했다고 인정하는 좋으련만 그게 안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하면 되는 것을 무엇이 그리 어려운지 비비꼬면서 말하는 것이죠. 큰인물을 키우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바로 그런 헐뜯기 풍조가 퍼져 있습니다. 험담의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편에 서지 않으면 반대하는 사람이며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그러셨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반대의 자리 흩어버리는 자리가 아니라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더욱 잘 되도록 빌어주는 모아들이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시샘과 시기 질투 이런 것들로 날을 지새는지 참 사람의 심성은 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저서 중에 '텅빈 충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을 뭐라고 합니까... 형용모순이라고 하죠. 소리없는 아우성. 국어 시간에 수사법에서 배웠습니다. 전혀 상반된 것이라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수사학적으로는 유용한 것, 형용모순입니다. 텅비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없다는 것이고 충만하다는 것은 채워져 있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텅빈 충만-비긴 비었죠. 그런데 비어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뭔가가 채워져 있는 어떤 경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외적으로 단촐하게 살아가지만 내적으로는 풍성하기 그지 없는 삶을 그렇게 표현하셨죠.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비긴 비었는데 공허한 비어있음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진 상태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채워짐이 없는 비어있음은 문제가 됩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 좋은나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입니다. 오히려 비어있으려면 더 무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이 나갔어요. 깨끗해졌죠. 순수해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데요. 더러운 영이 다시 오는데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일곱 영을 더 데리고 온답니다. 하여 상황이 처음보다 더 악화된다는 것이죠. 의학적으로 처음에 병이 걸렸을 때 때맞춰 잡아주면 치료가 됩니다. 초발(?) 은 비교적 치료가 쉽습니다. 그러나 재발하면 어렵습니다. 완쾌된 후에 몸이 회복되고 정상화되도록 신경써야합니다. 영적으로도 피정하고 나서 고해성사하고 나서 그 가장 깨끗한 순간이 더 위험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비어있음이 아니라 채워져 있음이 궁극 목적인 것입니다. 비우고 채움을 통해 우리는 강해질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루카 11,9-10)
인간은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 한계가 있고, 인간관계의 한계가 있고 가정의 한계, 지성의 한계. 저마다 각자 다 다르지만, 한계가 있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죠. 유심히 보면, 그 역시 어떤 문제로 알지 못하는 아픔과 힘겨움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우리는 너나없이 약한 존재인데, 문제는 그 약함 속에서도 알량하게 자존심을 세우면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누군데,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든 한번 해봐야지. - 사실 안되는 줄 알면서 그냥 둡니다.
벌써 꽤 오래전에 샤이쇼 히로시의 저술 ‘아침형 인간’이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죠. 아침형 인간이란 술어가 거의 고유명사처럼 되었습니다. 모든 성공하는 이들은 다 아침형 인간이었고 너도 성공하고 싶으면 아침 시간을 활용하라. 뭐 그런 것이죠. 한 친구가 그 책을 읽고 감명받고 나도 그러리라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그렇게 선언했답니다. ‘나도 이제부터 아침형 인간이 되겠어요’ 그러자 동생 왈, ‘형은 먼저 인간이 되어야해!’ 그런 것입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에요. 내 힘과 능력과 결심과 의지의 한계가 있거든요.
극장에 가면, 영화 상영 시작되면서 모든 불을 다끕니다. 객석은 어둡죠. 불을 끄는 이유는 우선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무한히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좁은 좌석에서 꼼짝 못하게 되죠. 내 돈내고 보는데도 영화 재미없으면 그런 고문이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죠. 내 인생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불을 끄시는 이유도 마찬가지! 내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에요. 또 하나 불을 끄니까 스크린만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그 목적 때문에 암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불을 다 끄시는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당신께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위기 중에 하느님만 보이는, 볼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드셔서 그 때마다 주님의 인도하신과 도우심을 구하면서 부르짖게 하시는 것이죠. 오직 내 도움은 전능하신 천주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죠. 대개 어려운 환경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없을 때 진정으로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이죠. 진정한 믿음은 바로 주님이 동반하신다는 확신, 그분이 만사를 이루신다는 압도적인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그것도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그래서 오늘 복음은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명령이죠. 꼭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이 신자에게는 필수적이라는 것이죠. 인생에 불이란 불이 다 꺼졌어요. 아무런 기대도 남아 있지 않고 끝나려나 보다 싶을 때 분명 있죠. 그러나 그 순간이 되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더 이룰 것이 없는 때가 되면, 내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무능함이 절정에 달할 때면, 그러나 그제야 이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둠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제야 하느님만을 바라볼 자세를 갖게 됩니다. 스크린에서 영화 장면이 지나가듯, 하느님의 일하심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죠. 아직도 그분께 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내 인생의 어둠 한 가운데에서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찾아야할 순간인 것이죠.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청할 것이고 찾을 것이고 계속해서 두드릴 것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루카 11,2)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이것을 기도하여라’ 이라기보다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였습니다. 기도의 내용만이 아니라 기도의 방법이랄까 틀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의도도 있죠. 말마디 그 자체보다도 기도의 틀을 주시고자 하는 영적 교육의 의도를 염두에 두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자녀들 곁에 머무는 분으로 하느님을 부르라는 것이죠.
또 필요한 청원도 드릴 수 있죠. 현재의 양식, 먹고 사는 문제, 네게 진짜 필요한 것 구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과거의 잘못 연약함들도 회개하면서 용서 구하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유혹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이죠.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필요를 다 구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것들에 앞서 기도에 더 앞서야 하는 순서도 있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가 오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청원이라기 보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기도했기에 그분의 이름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했기에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거나 거부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가 아닌가에 연계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 안에서 혹은 영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기에 앞서 그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죠. 하느님께 대한 절대 신뢰, 그것이 있은 후에야 우리의 필요를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커 보이는 이에게는 상황이 주는 압박과 결핍이 별 것 아닌 것으로 다가옵니다. 반면 하느님이 너무 작아 보이기에 매번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다스리심을 먼저 고백하는 그리고 감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독점적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느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죠. 내 의지만의 나만의 하느님으로 게토화되면 절대 주변을 못보게 됩니다.
멕시코 남부 타바스코주(州)의 아야파 마을에는 지구상에서 단 두 사람만 사용하는 '아야파네코어(語)'라는 희귀 언어가 있다네요. 이 언어의 '원어민'은 마을에 사는 마뉴엘 세고비아(75)와 이시드로 벨라스케스(69)씨 단 둘 뿐이래요. 두 사람의 자연 수명이 끝나면 사멸하고 말 이 언어가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 더 빨리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답니다. 왜냐면 500m쯤 떨어져서 사는 두 사람은 서로 만나는 것을 꺼리고 대화도 나누지 않기 때문이래요. 둘이 어지간히 사이가 나빠서 말을 안한다네요. 말 통하는 사람 한명밖에 없는데도 말을 안한데요. 정말 대단한 단절이죠.
그래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그 기도가 그래서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안열리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헛기도가 될 것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이 먼저 열리면 기도도 열리고 기도가 열리고 나면 비로소 인생의 새로운 장면이 열리게 됩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12)
예수님처럼 얘기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얘기했다가는 어떻게 될까요? 밥얻어 잡수시기 힘드실 것이죠. 언제나 밥먹여주는 사람, 밥 차려주는 사람이 사실 제일 실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타 눈 밖에 나면 예수님도 아마 쉽지는 않으실 걸요. 앞치마 입고 고무 장갑 낀 마르타가 그 집의 실질적 총책임자라는 저도 아는 그 사실을, 정말 모르셨나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무 바쁘셔서 끼니 드실 겨를도 없었다는데, 어쩌면 아무도 끼니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여튼 그러니까 맛없어도 정말 맛있다고 해야죠. ‘되게 맛없네, 간을 발로 한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래, 그럼 이다음부터는 니가 차려먹어. 입맛도 더럽게 나쁘면서 꼭 미식가인척 하네, 성질 나쁜 사람이 밥투정부터 한다더니’-이런 얘기 듣습니다. 간이 조금 짜거나 싱겁거나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왜 이렇게 짜, 왜 이렇게 심심해-뭐 혀에 느껴지는 대로 이야기했다가 찬밥에 김치 쪼가리도 없기 십상입니다. 그저 칼과 도마 쥐고 있는 분한테 잘 보여야죠.
그런데 어쩌자고 마르타의 속을 확 긁어 놓으시는 것일까? 손님 대접하느라고 고생스럽게 전도 지져내고 가지나물 맛깔스럽게 무쳐내고 솜씨 발휘해서 만두전골도 보글 끓여놓고 한상 거하게 차려내고 있는데, 그런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 대범함을 넘어서 좀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녀는 너무 바빠서 부뚜막에 앉을 겨를도 없었거든요. 그저 잘 차려서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스승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으로 내놓기를 원했거든요. 그러니 마리아에게 도와달라고 해주십사하는 정도의 말이 뭐 그렇게 못할 말도 아니쟎아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지경인데, 뭐 그정도 투덜대는 것은 괜찮지 않나요?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한가지 필요한 것, 그 몫을 가진다는 것, 말씀을 듣고 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이 마르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엄마가 뿔났다. 그런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뿔나서 가출까지 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평생을 그렇게 헌신했는데 남는 것이 없다!! 헛된 것 같다!! 그러니 나를 찾아야겠다!! 그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이땅의 수많은 마르타들도 때로는 꿈을 꿉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누군들 궁상 떨며 앞치마 입고 부엌데기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마르타들이 자부심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난 이등 제자야, 난 마리아에게 밀렸어,’ 이런 생각이 들고 그래서 마르타가 의기소침해지도록 하면 안됩니다. 마르타가 서운해서는 공동체가 결단납니다. 오히려 나도 마리아에게 뒤지는 것 아니야.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의 배경에는 마르타가 있음을 인정해해야 합니다. 다 마리아처럼 굴면 큰일 납니다. 쫄쫄 굶고 집안도 본당도 사회도 엉망이 됩니다.
본당에 큰 행사에 언제나 작은 마르타들이 분주합니다. 주방에서 분주하고, 뒤편에서 분주합니다. 집에서도 식구들 건사하느라고 손에 물마를날 없는 마르타 엄마는 본당에서도 거의 같은 처지, 마르타 자매가 될 경우가 많죠. 뭐 한다고 국수말고 바자회 준비하고 대청소에 걸레질하고. 그래서 좋고 건강한 공동체는 마르타의 수고를 인정해줍니다. 마르타는 주목받지 못하는 생애일 수 있죠. 그러니 마르타에게도 그럴 기회, 좋은 몫을 택할 기회를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여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르타의 자기 몫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인정해줘야 하죠. 왜요? 그래야 밥 얻어 먹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6-37)
북한 난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활동가들이 북한에 가서 놀라는 점은 세상에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쪽에 와서 더 놀란답니다. 같은 동족이라면서 피를 나누었다면서 이렇게 부유하게 살면서 북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을수 있지?- 그것에 놀란답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진로 자신의 앞길에만 관심을 가지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실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우리시대에 오늘의 복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관심이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분노와 미움이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한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서 일어날 힘이 없는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또다른 방식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
강도 만나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는 한 사람, 그가 광야에 내버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와 레위인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피하여 지나갑니다. 오늘에도 세상 안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교회 안에서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한 이들 분명 있죠. 그러나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곤란한 일이 생길까봐, 나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까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셨지만 그러나 한명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한명씩 치유하시고 한명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목자는 양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신다고 하셨죠. 사람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나의 믿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나의 믿음마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듣는 표적 청중은 어떤 율법교사였습니다. 그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서요. 그리고 이 비유의 등장인물은 유감스럽게도 사제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인들을 향해 통렬하게 책망하시는 내용인 것이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면서도 아무 사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믿음은 그저 죽은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도 받은 능력과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이 드러날 때 나도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안에 주신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 혼자서 일어날 수 없는 영혼들을 찾아갈 때 그 출발이 그를 살리고 나도 결국 살게 하는,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죠.
핵과 미사일이 위협이 되지만 더 큰 위협은 사람이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향해 있습니다. 세상 곳곳의 내전 속에서 희생되는 작은 생명들에게, 수십만이 고향을 떠나야하는 난민들에게, 풍요의 세계 속에서 굶주림으로 사라지는 숱한 이들에게 과연 누가 이웃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인데, 포도원을 훌륭하게 가꾼 주인이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멀리 갔다가 소작세 받으려고 하였더니만, 농부들이 소작료를 주기는커녕 때리고 모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을뿐더러, 참다못한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냈더니만 한 술 상속자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사태가 일어났고 주인이 그들을 다 잡아 없애고 처벌하고 포도원을 다른 이들에게 주었더라는 약간 스릴러 이야기입니다.
소작인같은 사람들의 행태, 죄악을 자행해도 어떤 징계도 없으니 점점 죄악의 폭이 커져갑니다. 어떤 제제도 하느님께서 안하시면 야 이거 아무 일도 없구나 하면서 점점 강도를 더해갑니다. 종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주인은 내 아들만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보냅니다. 그 아들마저 죽여 내던집니다. 예언자들 가지고 아니 되겠다 하여 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그런 것임을 비유는 알려줍니다.
마침내 주인이 찾아와서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그 민족이 이제 구원역사의 중심을 잃게 됩니다. 소출을 잘 내는 신약의 교회가 이제 포도밭을 새롭게 맡게 됩니다. 되돌려 드려야 할 것이 있음을 알고 사는 것이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죠. 새로 맡았지만 되돌려 드리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구원 공동체의 위치를 언제라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끝을 볼 줄 아는 눈,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지금 괜찮다고 계속 괜찮은 것, 아닙니다.
우리 하느님은 힘이 없어서 지신 것이 아니라 단지 져주신 것이에요. 부모님이 자식들한테 져주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시니까 지신 것이죠. 이길 수 있지만 그저 자식에 대한 그 사랑으로 참고 참고 받아들이는 것 뿐이죠.
우리 하느님은 참으시는 하느님, 인내에 능하신 분입니다. 맞아요. 그런데 참으시는데 오래 참으실 뿐이라는 것이죠. 곧 하느님의 인내의 시간도 한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죠. 하느님은 아예 참으시고 완전 참으시지 않는 것이죠. 그분도요 영구적으로 참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참는 것보다 시간이 길뿐이지 하느님도 분명 분노하신다는 것이죠. 우리의 죄악 허물에 대해 더 이상 져주시지 않고 우리 인생에 개입하실 때 끝장낼 때가 오는 것이죠. 직접 그분이 건드리시면요 그렇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해결 할 수가 없고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맺으시면서 예수님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버린 돌이 있었는데 성전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주님이 하신일 놀라운 일이래요. 쓸모가 없구나. 버렸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신앙을 버리고 기도를 버리고 예언자들을 버렸죠. 그런데 그 쓸모없다는 내버린 돌, 유익하지 않다고 버린 돌. 그것을 가지고 머릿돌 주춧돌 삼았데요. 일에 빠져서 일상에 치인다고 버린 우리의 기도와 헌신과 봉헌을 버렸어요. 신앙을 버렸어요. 지금 쓸모가 없거든요. 시간 부족한데 내일 중간고사인데 어떻게 주일 지키라고 그래!! 어떻게 열심히 놀아야 할 때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그래!! 지금 쓸모가 없고 도움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버렸어요. 주일 버렸어요. 기도 버렸어요. 예수님 버렸어요. 그런데 그 버린 돌이 내게 도움 안된다고 버린 그것이 중심 중의 중심이 되어 버린 다는 것. 눈앞의 욕심 채우기 위해 버린 것 있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우리가 별 것 아니라고 버렸는데 그것이 모퉁이 돌이 될 때 정말 후회스러운 것이죠. 공부에 사업에 내 연애에 내 휴식에 몰두하기 위해서 버린 그것이 그 기도가 그 봉헌이 그 사랑이 내게 가장 중요한 머릿돌, 모퉁이돌이 될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박상운신부의 묵주기도 학교
1강 묵주기도의 의미1
복되신 성모님의 묵주는
저희를 하느님께 묶어주는 아름다운 사슬이며,
저희를 천사들과 결합시켜주는 사랑의 끈입니다.
묵주기도는 지옥의 공격을 물리치는 구원의 보루이며
모든 난파선이 찾는 안전한 항구입니다.
저희는 묵주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묵주는 저희에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삶을 마치며 묵주에 마지막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묵주의 모후이신 성모님,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죄인들의 피난처,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더보기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10,18-20)
예수님이 이스라엘 각 고을로 파견한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옵니다. 제자들이 그곳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죠. 마귀들까지 제자들에게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제자들의 보고에서 알 수 있죠. 바로 “주님의 이름 때문에”(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다른 능력이 아니죠. 주님의 이름,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고 나가니 일흔 두 제자가 갑자기 엄청난 구마자가 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흡족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예수님의 약속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지 않은지요. 더럽고 추한 악한 영, 원수의 힘들이 꼼짝 못한다는 약속. 우리에게 주신 그 권한을 행사한다면! 우리를 해칠 자 아무도 없다는 것. 사탄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답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걸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과감하게 고백하면 주님의 능력이 고스란히 내게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악한 것들을 제압하시기 위해 이 공동체를, 우리 신앙인들을 이땅에 보내신 것이죠. 우리의 거룩함으로 모든 추악함을 없애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로 인해 이 곳이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복음의 터전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그냥 보내시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걸고 보내신 것이랍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더 기뻐할 일이 있답니다. 악한 영이 복종하는 것 그 정도가 아니라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예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이유라는 것이에요. 내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었다구요. 가족관계기록부, 주민등록 등본, 어느 학교 졸업증서, 국가공인 자격증에 기록된 것이 아니죠. 하늘에, 아버지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 우리 존재가 미약한 것 같아도 우리 품위가 정말 지극한 것입니다. 나는 하늘 아버지께서 손수 기록해서 당신 소유로 삼은 존재에요. 당당할 충분한 이유가 넘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즐거워하며 기도하셨다네요. 제자들이 거둔 성과가 얼마나 뿌듯하셨으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을까 싶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운 이적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기도 안에 나옵니다. 그들이 남달리 지혜로웠기 때문에가 아니에요. 슬기로웠기 때문도 아니에요. 마귀 쫓아내는 학위를 땄다거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죠. 아이큐가 엄청 높았던 것 아니죠. 오히려 그렇게 자기 능력으로 사는 이에게는 이 신비가 감추어져 있답니다. 철부지들, 어린이들, 주님 없으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이 하늘의 신비는 드러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이를 선택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랍니다. 그래서 여기 남 라파엘 철부지, 맹 마리아 철부지, 민안나 철부지 그리고 또 수많은 철부지들이 모여 있는 것이죠. 믿음의 철부지들은 ‘나는 모르지만,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게는 안되는 일이지만, 하느님은 알고 계시고, 하느님은 넉넉히 하실 수 있고, 하느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이죠. 그런 철부지가 하느님께는 기쁨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루카 10,13)
제자들을 이스라엘 각처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평화를 빌어주라고 보내셨는데 성과가 양분됩니다.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대목이 17절부터 나옵니다. 더러운 영들이 제압당하고 복종했다고 제자들이 보고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앞, 오늘 복음은 성공과 놀라운 성과에 앞서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고을로 대표되는 실패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파견으로 일했지만, 사람들이 환대하고 스펀지처럼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리 떼 같은 이들이 물려고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내시면서 미리 준비시키시고 당부하신 것이죠.
오히려 잘되기만 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착각 중의 하나는 교회가 하는 일인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왜 문제가 생기고 잘 안되고 다툼도 있고 그러느냐는 것이죠. 또 내가 이번에 누군가 예비자로 인도하려고 마음 먹고 기도하면서 준비했는데 막상 입교 권면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면박당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강제로 신앙을 가지라고 강요하냐며 싸늘하게 바라봅니다. 그게 이상한가요? 하느님의 일이고 좋은 일인데 왜 그러냐? 왜 잘 안풀리냐? 왜 성과가 그렇게 없느냐? 아니요.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제자들 보내시면서 실패할 것을 예상하셨습니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죠. 대부분 다 실패했습니다. 귀기울이지 않는 이들, 마음이 무딘 이들을 많이 만난 것이죠.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야 내일 듣게되는 복음의 놀라운 성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코라진의 강팍함을 마주한 제자들이 이럴 수밖에 없나 하면서 포기했더라면 마귀가 번개처럼 떨어지는 그런 경험 못하는 것입니다. 중도 포기했으니. 벳사이다의 냉정함에 질려서 되돌아서면 말이죠.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죠.
카파르나움의 완고함 때문에 상처 받아서 복음이 힘이 없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고 실망 좌절하면 철부지들에게 하늘의 신비가 전해지는 것은 목격할 수 없습니다.
모든 명작은 다 아픔의 산물입니다. 실패가 따르지 않는 승승장구하는 인생은 축복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강팍함과 냉정함과 완고함을 겪은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너희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있을 것이야. 그러면 그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고 다음 고을로 가면 된다’-11절에서 미리 언질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발에 먼지 털고 다음 단계로 가지 않고 아주 주저앉아서 곰곰이 실패를 곱씹곤 하죠.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내가 능력부족인가. 여기서 중단해야 하나-그러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다 심각한 우울증에 걸립니다. 예수님이 왜 이 고을들을 유별나게 저주하셨나요. 안타까움도 있죠. 구원에서 멀어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 주신 메시지도 있는 것 같아요. ‘네 잘못이 아니야. 이 고을들이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없는데 어쩌겠니.’
실패한 자신에 대해 자책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어도 안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나 자부심이 있으면 되요. ' 나는 할 바를 다 했다. 그렇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 최선을 다한 실패는 자랑스러운 훈장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루카 10,3-4
둘씩 짝지어 이스라엘로 보내십니다. 둘은 신명기에 증인의 수로 거론됩니다. 둘이 다니면 마음 맞을 때는 문제 없지만 서로 의견과 취향이 다르면 복잡해집니다. 혼자서 하는 것이 더 좋으련만 그럴 때가 있죠. 그러나 둘, 최소한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약점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죠. 일의 효율성이 중요한 것은 세상의 논리이지만 하느님의 일은 함께 하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같이 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 복음의 길은 그렇습니다. ‘나 혼자 산다’는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우리는 같이 살고 같이 걸어가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고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파견된 이는 아무 것도 지니고 갈 수 없습니다. 이것도 참 낯선 것이죠. 단단한 준비로도 될까 말까,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준비없이 떠나라.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걱정마라,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제자들은 이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하느님 의지하는 법이어야 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그런 훈련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갔습니다. 광야의 모든 삶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농사지을 수도 무엇을 생산할 수도 없는 악조건에서 오직 하늘의 만나에만 의지하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 아래 광야를 건너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파견의 말씀이었습니다. 광야에는 쿠팡도 없고 배달의 민족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계신 것이죠.
그리고 머무는 곳에 맞춰 살아야 한다. 이 집 저 집 옮겨다니지 말고, 주는 대로 먹고 만족하라는 것이죠. 까다로운 자기 취향을 드러내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는 대로 먹는 것’, 자기 입맛을 맞추는 삶은 복음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뭐 좋아하세요?’ 가끔 물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디 식사 한 번 하자고 하시면서 말이죠. 대답이 난감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적당할까요. ‘저는 촌사람 입맛이라 고추장찌개 좋아해요’하자니 그분을 무시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전 중식당 팔선 음식이 맞더라구요. 어디냐면 남산 자락, 신라호텔에 있어요’ 이러자니 너무 속물같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대답은 아무거나입니다. 아무 거나, 주는 대로가 속 편합니다. 괜히 부담주기도 싫고 까탈스럽게 보이기는 더욱 싫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즉, 하느님의 사람은 사람들에게 편안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점점 자기 취향이 없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호불호가 없어지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티를 안내게 되어 갑니다.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제자의 떠나는 길에 하신 당부 말씀을 통해 되새겨봅니다. 같이 하는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 것, 너무 요란떨고 살지 말 것, 과하게 준비하느라고 때를 놓치지 말 것, 유난스러운 자기 주장으로 복음을 가리지 말 것, 가능한 가볍게 살고 하느님 하실 일에 훼방되지 않도록 조금 더 낮추어 볼 것, 아무거나 잘 먹어 줄 것 등. 어렵다면 어렵지만 또 지극히 상식적인 일 아닌가요. 昢凉 神父…더보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최고로 하는 전문가는 그 일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입니다. 일반인과는 한 차원 다른 실력을 가지고 위기 상황에서 대처능력도 뛰어납니다. 전문가는 기계가 대처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에 그래서 전문가 장인이 수제로 만든 제품은 명품으로 대접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도제식 교육을 받은 복음의 전문가들이죠.
오늘 복음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온 이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냉정하고 단호한 말씀입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단순한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야기입니다.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고 한 어떤 사람. 그 말만으로만 보면 사실 굉장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는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하시죠. 주님 보시기에 그의 마음 속에 내 평생 따르겠다는 그 결심이 아마 충만한 의지가 아니라 감정이었을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감정은 잠깐이면 식어버리고 지나가고 맙니다. 그러니 감정으로 일하지 말고 기도의 영성, 이성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대응입니다. 감정적 제어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하다보면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더 좋아 보이는 그것에 끌려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 두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에서 주신 메시지입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고 오겠다는 것은 일견 보편타당하고 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상외로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기준으로 일의 순서를 매기다보면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서는 주님이 정하시는 것, 우리는 주님의 순서에 맞춰가야 하는 제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조차도 버려야할 때가 있다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는 쟁기잡고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것, 그것은 지속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나름의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할 때 절대로 이것만은 안된다고 반발하는 것이 각자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것은 다 되더라도 결코 이것은 안돼! 그러나 주님의 가라하신 길을 갈 때 그것마저도 내려놓으라 요구하시는 난감한 상황이 옵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그것을 붙들고 있는 한, 당신이 주시고자하는 것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쟁기잡은 다음에 뒤돌아보면 결국 놓치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포기가 수반됩니다. 신앙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렇습니다. 선택의 다른 말은 포기인데, 문제는 모두 가지려고 하는 과욕이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 우물을 파야 물이 솟구칩니다. 이것 조금 하다가 저것 좋다고 하니까 또 바꾸고, 학원도 여기 다니다가 또 저기가 좋다며 거기 좇아가고, 이 문제집이 좋다며 이것저것 하나가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그런 식으로 찔금찔금하니 깊이있게 천착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집중하는 것, 제자로 살아가는 길은 결국 그것뿐이니 말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루카 9,53-55)
내가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게 될 때 자연스레 나오는 반응은 가볍게는 서운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지만 격렬하게는 분노, 복수심, 파괴하고픈 마음입니다. 제까짓 것들이 뭔데 나를 거부해-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학교나 직장 같은 소속 집단으로부터, 또 교회로부터 우리는 수없는 층위에서 받아들여짐으로써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내가 실은 버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상처가 부정적인 힘을 내 안에 형성합니다. 복수할테다. 기회만 주어지면. 내 있는 힘을 다 하여 뭐라도 하겠다는 힘을 끌어내는 것이죠.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침윤된 불신과 모독, 경계와 앙금으로 인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역사의 피해자였고 유다인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의 상종못할 부류였습니다. 서로를 밀어내어야만 스스로의 정당성이 유지되는 일종의 적대적 공생이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에는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누시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을 복음의 삶을 실제적으로 사는 사람으로 언급하셨지만 그 기나긴 질곡의 상처가 한 순간 사라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사마리아로부터 거부당하시자 불을 내려다가 살라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폭언을 퍼부은 것도 ‘우리 선생님이 너희들을 얼마나 우대하시고 살뜰하게 대하셨는데 감히 이럴수가’, 뭐 그런 심정이 깔려있었을 것이죠.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셔서 사마리아인들의 그런 태도를 옹호하시는 듯 합니다. 그들이 겪은 아픔과 상처가 아직 다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더 어루만지고 더 감싸주고 더 헤아리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죠. 사마리아인들이 너무 긴 시간동안 모두에게 거부당했던 그 심정을 이해하니 그들의 태도를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거부하는 이들이 악질적이고 교묘하며 심성이 비뚤어진 그런 이들일 수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무례하고 냉정합니다. 그렇다고 나의 저주가 정당하지는 않습니다. 정 견디기 힘들면 그 자리를 슬쩍 피하면 그만입니다. 분노와 복수가 가진 연쇄작용을 끊기 위해서는 그래야하지요.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거든요. 조금만이라도 이해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탈출 23,21-23)
옛날 기도책이나 신앙서적 보면 수호천사란 말보다는 더 예스러운 용어, 호수 천신이라고 그랬습니다. 뭘 모를 때 그리고 한자 병기가 없으면 호수 천신, 호수 천사 그러니까 천사가 지키는 영역에 따라서 호수 지키면 호수 천사, 바다 지키면 바다 천사, 앞산 지키면 앞산 천사…그런 줄 알았던 때도 살짝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수호 천사의 옛 용어이더군요.
옛날 기도서인 천주성교 공과에 호수 천신께 드리는 경, 수호천사 기도가 있었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천지 대군(天地 大君)의 신사자(神使者)여,
나 세상에 듦으로부터 이제까지,
너 나와 한가지로 계셔 잠간도 떠나지 않으사,
나에게 선을 가르치며 악을 징계하며,
사마(死魔)를 금지하여 나를 임의로 해치 못하게 하시며,
나 행하매 너 내 길을 가르치시며,
나 게으르매 부지런함을 면려(勉勵)하시며,
나 근심하매 내 마음을 위로하시며,
나 선공(善功)을 세우매 너 천주께 받들어 드리시며,
나 죄를 범하매 너 대신하여 사하심을 구하시는지라.
나 이제 이왕에 여러 번 네 은혜를 잊고,
네 가르치심을 좇지 아니하고,
네 징계하심을 듣지 아니한 것을 생각하여 깊이 뉘우쳐 아파하고,
마음을 정하고 뜻을 세워, 이후로는 네 은혜를 감사하고,
너 내 앞에 계심을 공경하고, 네 권고하는 정을 사랑하고,
네 가르치심을 들어 좇아, 힘써 선을 하고 다시 악을 하지 말아,
다시 네게 근심을 이루지 않으려 하나이다.
간절히 구하오니 나를 끊어버리지 말으시고,
너그러이 가르쳐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하여,
천당에 올라 너와 한가지로 영락(永樂)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또 짧은 기도문도 있습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 아멘.‘(영광송을 일곱 번 바칩니다.)
아름다운 기도들입니다. 일년에 한 번 기념일에만 기억하는 수호 천사일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어버이날 하루만 효자되는 격이랄까요.
’성교 요리문답‘, 일제시대까지 쓰던 교리 요약집이죠. 여기에 천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문 : 각 사람이 호수 천신께 할 본분은 무엇이뇨?
답: 각 사람이 호수 천신께 할 본분은, 저를 경애하며 그 도움을 구하며, 또한 그 잠잠히 타이름을 잘 들음이니라.
잠잠히 타이름을 잘 들어라. 천사가 수행하는 기능 천사의 일이 하느님의 일을 이땅에 이루어나가는 역할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수호자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대변인. 그리하여 그 타이름이 잠잠한데, 그것을 잘 들어라-우리가 할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수호자가 뭡니까. 우리 개인의 보디가드, 악과 유혹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경호원. 경호의 제일원칙은 무엇인가요. 자기를 안돌보는 것, 경호하는 상대를 위해서 위험에 처하면 온몸으로 막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됩니다. 보디가드와 사랑에 빠지다.
파라오와 이집트의 강력한 통치를 뚫고 해방된 히브리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면서 그 백성의 수호자, 인도자, 선도자로 천사들을 보내주셨다는 탈출기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아모리, 히타이트, 프리즈, 가나안, 히위, 여부스 족 강력한 부족들이 우굴거리는 험한 지역에서 그들의 생존을 천사가 보호하도록 안배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돌보심의 세미한 존재인 수호 천사와 사랑에 빠지지는 못하더라도 옛날 바치던 기도 한 자락 바치는 것 좋겠습니다. 어버이날 하루만이라도 효자되고 싶은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가겠습니다. 아버지!” (마태 21,30)
지난 주일에 이어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비유입니다. 지난 주일 포도밭 주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일꾼들을 뽑아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일을 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들 모두에게 품삯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포도밭 주인의 마음이었고 그 마음 덕에 모두가 한 데나리온, 약속된 품삯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2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으로 가서 일하라 합니다. 맏이는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일하러 갑니다. 둘째는 가겠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은 하느님 앞에 드린 약속을 어떻게 이행하는가의 유형을 보여줍니다. 말과 실천이 다른 두가지 모습입니다.
약속했건만 헌신짝처럼 여기는 둘째는 당대의 율법교사와 지도자층을 상징합니다. 반면 거절했지만 포도밭에 간 맏이는 당대의 죄인으로 여겨지던 세리와 창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대놓고 율법교사와 지도자들을 질타하고 계신 것이죠. 약속을 남발하면서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이중성을 받아들이실 수 없었던 것이죠.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은 헛된 약속을 남발했을까요. 오죽하면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기라고 하는 것이란 말까지 있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한두번 약속을 어기다보니 신뢰를 잃게 됩니다. 한두번 약속을 어기다보니 약속 위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됩니다.
차라리 약속이나 하지 말 것을, 그때는 왜 꼭 지킬 것처럼 손가락 걸고 다짐했던가요.
그것도 하느님 앞에 드린 약속이건만 수시로 잊고 어기고 모른 척 하면서 우리는 대담해지다못해 뻔뻔해 집니다.
지금은 새 성가책에서 빠졌는데 예전 성가 500번, ‘평화의 하느님’은 제가 즐겨 부르던 성가입니다. 특히 2절 가사를 아주 좋아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우리 맺은 사랑 인연, 영영 풀지 못하리라.’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하느님과 내가 맺은 천상의 인연은 결코 풀리지 않는단 것이죠. 하느님은 그러하십니다. 그러니 언제나 내가 문제입니다. 수시로 약속을 잊고 온갖 핑계로 약속을 무효화시키는 나로 인해 하느님과 내가 맺은 굳은 약속이 혹여 흔들리지는 않는지, 가라고 하신 포도밭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향할 때 영영 풀리지 않는 약속은 완성되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3b-45)
시험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만, 사실 불쑥 느닷없이 보는 시험은 없습니다. 학기 초에 언제쯤 시험 있을 것임을 통지하고, 일정만이 아니라 시험 기간 몇 주 전에 시험범위가 다 정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난 번 시험 본 다음부터 이번에 배운데 까지!! 그것뿐이 아니라, 평가할 만한 부분이 어딘지, 핵심적인 부분도 미리 선생님이 다 짚어주십니다. 여기서 이것은 꼭 외워야 한다. 밑줄 쫙! 확인해주시고 다시 강조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친절한 남선생님은 이번 시험에 이 문제는 꼭 출제할거라고 공언까지 하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꼭 나온다고 한 그 문제, 답까지 미리 알려준 그 문제조차 틀리는 녀석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모르는 문제도 아니고 뻔히 다 알고, 백퍼센트 출제될 그 문제를 틀리수 있느냐. 일부러 오답쓰려 해도 안될텐데. 그런데 문제를 알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허점입니다. 정답을 알려줘도 꼭 오답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단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강조하십니다.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말이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강조하고 중요한 것이니 꼭 기억하고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이신 당신이 사람들 손에 넘겨서 폭력을 겪으시는 것, 일어날 일이랍니다. 이게 핵심이고 백번 시험보면 백번 다 언제나 나오는 필수 문제이고, 출제자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제자들조차 몰랐다는 겁니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해가 딸리면 질문이라도 해야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주님!!- 질문조차 하지 않는 모습.
사실 질문도 좀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이 합니다. 반평균 깍아먹는 녀석들은 질문도 없어요. 아는 친구들은 오히려 질문하는데 모르는 녀석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에요. 친절한 예수님은 신비 중의 신비인 수난의 신비를 알려주셔서 신앙인들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시려는데. 인자의 수난, 하느님인 당신이 사람들에게 난도질당하리라, 모진 일을 겪게 되리라- 그것이 우리의 시험에 언제나 출제되는 문제이고 이 신비를 체득해야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인데.
구원의 공식이 수난의 신비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으로 우린 구원되었고 온전해졌고 자녀와 상속자가 되었고 영생의 선물을 받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구원공식입니다. 응용력이 없으면 어떡해야 하느냐? 일단 공식을 외우면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수학문제가 복잡한 것 같아도 기본공리는 몇 가지 안됩니다. 언제나 전제되고 적용되는 것이 공리, 이 기본이 탄탄하면 웬만한 문제 다 해결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복잡하고 난해한 듯 해도, 실은 기본 공식이 몇 가지 있고 이 믿음의 공리로 인해 지탱될 수 있음을. 주님의 수난은 헛되지 않다는 것이죠. 그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으신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믿음의 공식, 전제입니다.
예수님은요 문제도 알려주셨습니다. 정답도 알려주셨습니다. 어떡해야 하나요? 귀담아 들어라. 귀담아 들어라. 제발 귀담아 좀 들어다오. 소리를 들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신비를 이제 고백하라는 말씀!! 그 십자가로, 그 못박히심으로, 그 피흘리심으로, 그 숨을 거두심으로 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 겪으심으로 나는 살게 되었음을. 들어다오-하시는 호소를.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요엘 2,26)
복작거리던 서울 거리가 얼마나 한가한지 몰라요! 한가~~해서 한가위! 설마요.
더위 몰아낸 바람 불어오고 보름달 휘영청 뜨는 저녁이 아름다워서 가을 추(秋), 저녁 석(夕)이라고 아슴한 이름을 지어 놓았던 것일까요. 여튼 오곡이 무르익습니다. 가을 수확은 아직 조금 더 남았지만 미리 설레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깨끗한 때입니다. 좋은 날이죠. 얼마나 좋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였을까요.
어릴 적에는 큰집이라고 친척들 죄다 모였죠. 명절 기분은 다 모여야 나기 마련이거든요. 어머니는 숙모들과 기름 냄새 고소하게 풍기면서 종일 지지고 볶아 음식 차리셨습니다. 며느리 명절 증후근 이런 것 있단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그때는 너무 귀했던 ‘해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선물 받으면 많이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요새는 그런 것 없는 것 같아요. 설빔, 추석빔 이런 것 말입니다. 추석날이라고 특별히 옷을 해입는다? 아마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서울역 앞에서 밤새면서 귀향기차표를 사느라 고생하던 시절 다 아스라한 이야기일 뿐이죠.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 싶은 것은 왜일까요? 아름답고 안타까운 시절에 대한 향수탓이기만 한 걸 까요?
그런데요 커가면서 한가위같은 이름다른 날, 명절이 점차 별로가 되더라구요. 명절 지나면 좀 피곤해요. 긴 연휴도 때론 부담스럽다는 이들 주변에 꽤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한가위는 명절이 아니라 휴가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가족도 친척도 단촐해지는 세태다보니 명절에 어디 인사갈 곳도 별로 없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원래 우리네 명절은 연결의 축제이거든요. 부모-자식이 연결되는 날이죠. 탯자리 찾아 선물 꾸러미 들고 금의환향은 아니어도 찾아갑니다. 우리 동네, 마을과도 연결됩니다. 동네 어른들 다 인사드리고, 동네 잔치와 함께하는 놀이가 있었던 것이죠. 추석에는 풍물을 치고, 여인네들은 강강술래!! 이날에는 살아있는 후손이 죽은 조상들과 연결됩니다. 벌초를 하고, 묘를 찾고 차례를 올리죠. 믿음 안에서 이날은 하느님과도 연결됩니다. 오곡백과의 풍성함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인생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묵상하게 하죠. 이날은 이렇게 연결되는 날이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끊어져 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이 끊어지고, 우리 동네란 의식 자체가 희미해지고, 죽은 조상들에 대한 기억도 형식적이 되고, 하느님이 더해주신 풍성함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만 이해되는 것이죠.
복음에서 부자였으나 어리석다 평가되는 이는 모든 풍성함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나의 노력과 애씀의 결과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넉넉한 수확물을 자신이 독차지 하려고 곳간을 지을 생각이나 합니다. 그는 독자적이었고 연결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오늘 한가위가 연결의 신비가 드러나는 날이길 원합니다. 내가 나됨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부모 형제자매와, 동네-지역사회와, 이미 앞서간 조상들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맺어주시는 연결시키시는 한 분 하느님. 그 모든 연결로 말미암아 단절된 것들이 이어지고 회복되는 더없이 좋은 하루 되십시오. 昢凉 神父…더보기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카 9,9)
당황한 헤로데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헤로데를 ‘여우’라 쏘아붙이셨습니다(루카 13,32). 어찌되었든 로마 치세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았던 자가 헤로데입니다. 그는 어디에 붙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알았죠. 그것도 정치력이라면 정치력입니다. 세간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하고 비겁하다는 평판이 있더라고 개의치않고 그저 힘있는 이에게 굴복해서 그 힘을 나누어 받을 줄 아는 인물. 전형적인 정치꾼의 모습이 그에게서 발견되죠.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처참할 정도로 강한 이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명분도 중요하지 않고, 대의도 따지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치부로 얼룩지고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하며 공동체도 안중에 없고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하늘의 소리라는 여론도 대충 흘려 듣습니다. 무지한 이들의 헛소리로 치부합니다.
그런 헤로데가 요한을 처형한 이후 예수님을 두고 백성들이 ‘요한의 환생’이라며, 불의 예언자 엘리야가 재등장한 것 같다며 그분은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수군거리자 당황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황은 그런데 자신의 죄상이 다시 언급되는 것에 대한 당황이죠. 껄끄러운 일을 피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자 당황하는 것이죠.
그는 당황했지만 우리는 황당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있느니만 못하거든요. 예수님은 정치를 넘어서신 것이지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의 악행을 지적하시며 예언적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본래 예언적 사명은 이땅의 현실을 향한 하느님의 의지를 전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권력의 입장에서는 껄끄럽습니다. 왜 저렇게 떠들어,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헤로데의 몰락의 길은 그가 정치적 수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박해하고 제거하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죽일 수 있었죠. 힘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 자체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담긴 그 말씀, 나를 일깨우시는 그 말씀,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말씀이 나를 찌를 때, ‘지금 너 잘못살고 있는 거야, 너 그런 식으로는 안돼’ 하실 때 있죠. 말씀 안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그 말씀을 무시하거나 미루어놓거나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말씀 앞에 두려움, 경외심이죠, 거룩한 두려움을 상실해요.
그만 두라 하실 때 그만두면 됩니다. 계속해라 하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의 뚝심으로 계속하면 됩니다. 결국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품고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지키는 자가 승리합니다. 이 신앙의 법칙이 우리 삶 안에 관철되도록 섭리하시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당장 입에 달면 삼킵니다. 쓰면 뱉아냅니다. 주님의 말씀은 대체로 달디 달지만, 예언자적 사명을 담은 말씀은 쓰죠. 나의 삶을 바꾸시려는 말씀이니 지독하게 쓰고 우리 심성과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시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얄팍함이 결국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스스로가 등을 돌리고 결국은 인내하시던 주님마저 그런 그에게 등돌리시는 것이죠. 헤로데가 등을 돌렸더니 결국 주님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셨습니다. 망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헤로데처럼 하면 되죠. 망조든 인생의 본보기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나이다.’ 사무엘의 고백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순종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복음과 졸업식 풍경이 복음에 오버랩 됩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난 언니가 아닌데 졸지에 그렇게 됩니다. 또 의례적으로 무슨 이사장상이니 공로상 주루룩 시상됩니다. 내 차지도 아닌데 남의 시상에 박수 쳐주는 것도 식상합니다. 그래도 아, 이제 이 학교 이 선생님 이 친구들과 영 이별이로구나. 무딘 사람들도 조금은 뭉클하고 그런 것이 졸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졸업식의 압권은? 역시 교장 선생님, 총장님 말씀입니다. 졸업하는 마당에 들려주시는 마지막 말씀!! 역시 지루합니다. 월요 조회 때 예전에는 꼬마들을 운동장에 주욱 줄지어 세워놓고 땡볕에 약한 꼬마들 어지러워 쓰러져도 아랑곳 않고 훈화는 계속됩니다. 에, 마지막으로!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마지막이 한 10분 걸리죠. 졸업식 때 그 말씀, 너무 뻔했죠.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서 새 출발이며... 이제 여러분의 학교의 명예를 걸고... 어쩌고... 레파토리가 별로 새롭지 않은 그런 류의 말씀... 그것이 졸업식사입니다. 사실 아무도 안듣고 그러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말씀은 그 구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의 파견사, 예수님 학교의 졸업식사를 오늘 듣습니다. 그런데 공식적 말씀치고는 단도직입적이고 실질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하죠.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환영받지 못하면 즉시 떠나라. 곳곳으로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나마나한 소리, 추상적인 뜬구름 잡는 이야기 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이죠. 이미 가서 뭐해야 하는지는 다 들려주시고 알려주신 터입니다. 이미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배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떠날 때는 말없이!! 아예 아무 말 안하시기 그러니까 딱 한마디만 하시는 것이죠. 더 말하면 군말이 됩니다.
길 떠날 때 여장 법칙이 하나입니다. 잔뜩 트렁크 챙겨서, 배낭 꾸려서 가지가지 생필품 편의품 꾸려서 만반의 준비를 했던 베드로는 아마 짐 풀어야 했을 것이죠. 지갑에는요 삼성카드에 롯데카드까지 넣고, 쟈켓 네 벌에, 등산화에 뭐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 하면서 다 집어넣었던 그래서 한진 트랜스 불러서 선교 여행 갈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죠. 다 지니고 갈려고 했더니만 하시는 말씀. 너 그거 다 필요없어.
예수님의 여행 법칙은 단촐한 배낭여행, 무전여행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고로 신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필요한 것은 현지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가는데 고추장에 고기 다져서 달달 볶아서 챙기고, 김 서너 톳 들기름 발라서 구워 밀봉하고, 피부 보습제도 넣고 등등. 자질구레한 것 다 챙겨간다?? 적응안하겠다는 것이죠. 그냥 거기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복음의 전략입니다. 다 챙겨간다?-그것은 그냥 그대로 살겠다는 것이죠. 다 챙겨가서 그대로 사는 것은 복음전파하는 이의 자세가 아니죠. 내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에서 둔한 행동이 나오고 적응은 멀어집니다.
세상에서도 현지화가 중요합니다. 기동력이 있어야 살아남습니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살아남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곳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복음 이외의 것들에는 다 현지상황에 적응해야하는 것이죠.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가벼운 하루가 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19-21)
교구에서 사제들 어머니가 모여 단풍관광을 가셨더랍니다. 내장산 울긋불긋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관광버스 춤추다가 지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항상 엄마들은 자식자랑이 빠지지 않죠. 아들이 본당 신부님이 어머니가 말합니다. ‘신자들이 우리 아들 신부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입만 열면 우리 신부님, 우리신부님 그런다우. 바로 걔가 내 아들이에요’ 그 옆에 자매가 기도 안차다는 듯 말합니다. ‘아,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말말아요. 우리 아들은 그냥 신부도 아니고 주교님이쟎아요. 교구 모든 신부님들이 우리 주교님, 우리 주교님 그러쟎아요.’ 빙그레 웃고만 있던 그 옆 어머니가 ‘대단치도 않은 걸 가지고 그러시네요들. 우리 아들은요 본당이고 병원이고 학교고 부임해서 갔다하면 얼마 안되어 우리 아들 신부님 나타나기만 하면, 얼굴만 보고도 사람들이 그런답니다. 오 마이 갓!!'
지금은 덜하지만요 예전에 사제관 살림은 어머니, 누나 친인척 중 누군가가 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면 신자들이 그럽니다. ‘야, 본당 신부님 모시기도 힘들고 벅찬데 우리 성당에는 주교님도 계신다!!’ 가족이 있어서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것이죠. 주님 복음 전하는데 보탬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된답니다. 오히려!!
여북하면, 예수님 말씀하시길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태 10,36)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정에 이끌리고 인연에 치우치다보면 하느님의 일도 꼬이고 비틀린다는 것이죠.
때로는 수도생활, 사제생활이 자기 출신에서, 일차적으로 피붙이의 인연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느 수녀님의 고백을 들었는데요. 수도회 입회할 때 부모님 계셨고 무남독녀였답니다. 수도생활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요 병약한 아버지, 힘겨울 어머니 생각 드는 겁니다. 종신 서원할 즈음, 부친상 치렀대요. 몇 해 더 있다가 어머니도 뒤따르셨더래요. 그런데 장례 치르고 수도원 돌아오니 슬픈 것도 슬픈 것이지만 ‘아, 이제야 내가 수도생활 제대로 하겠네’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것이 슬퍼서 더 울었답니다.
석가모니 싯달타 부처님, 출가전에 아들이 있었죠. 아들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어요. 범어로 ‘장애물’ 이라는 뜻이거든요. 자기 아들 인생 망치려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작명을 합니까? 그런데 깨달음의 여정에 넘어지게 만드는 돌부리같은 존재가 아들이었다는 것이죠. 부처님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성철 스님도 속가에 딸을 두셨는데 나중에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었죠. 그 딸 법명을 불필, 아니불, 반드시 필 불필(不必)이라 지어주신 겁니다. 필연적이지 않다. 내 딸이 아니다. 그런 뜻이죠. 못된 아버지, 여기 또 있어요.
남의 집 얘기만 해서 그런데 우리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아들 하나를 두셨죠. 그 이름이 ADEODATUS-'하느님께서 주셨다, 주님의 선물' 이런 뜻이에요.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이 주셨으니, 뻔뻔한 아버지 추가입니다.
아닙니다. 인연은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요 때로는 그 끄달림을 넘어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때로는 잔인하고 몰인정해보여도 일차적인 그 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성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내 어머니, 형제들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주십니다. 일종의 대안가족입니다. 진정한 가족은 그냥 혈연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우린 그렇습니까? 믿음으로 가족이 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혈연의 관계만으로 가족이 되어서 다투고 오해하고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昢凉 神父… 더보기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루카 8,16)
등불은 등경 위에! 당연히 높은 데 두어야만 더 넓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등불은 높은 곳이 자기 자리입니다. 식탁, 탁자 뭐 그런 곳입니다. 위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죠. 영향과 위치는 언제나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배는 물위에, 자동차는 도로 위에! 제기능을 할려면 위치 선정이 제대로 되어야지, 육지에 있다면 항공모함도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이라시는데 참으로 그러려면 있어야 할 바른 위치를 점해야 합니다.
사람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선택한 위치가 그래서 그의 인격입니다. 나의 현 위치가 나의 현 인격의 직접적 반영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있고 우리가 없어야 할 곳이 있는 것이죠.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는 사람.’ 시편 1편의 첫 시작입니다. 행복의 길은 복되지 않은 이들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을 자리를 잘 골라야 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가 진리의 가치를 약화시킬 수도 강화시킬 수도 있는 때문이죠. 우리가 위치 선정에 실패하면 인생 자체가 실패할 공산이 너무 커집니다. 제자들이 십자가 밑에 있어야 하는데 도망쳐 흩어져 있다~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물리 과목에서 위치 에너지를 배웠습니다. 수력 발전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낙차에 의해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힘은 어디서 생기는가요. 높이라고 하는 수준차에서 발생합니다. 수준 차가 클수록 큰 힘이 발생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할 때 에너지가 발생하듯, 신앙인들도 세상의 기준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때 더 거룩한 위치에 있을 때 바로 거기서 영향력이 생겨납니다.
빛의 기능을 다하기 위한 출발은 그러기에 우리가 머문 자리가 어딘가를 먼저 살피는 것부터입니다. 등대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가지 않습니다. 해안가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난파한 배의 희망이 됩니다. 파도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우리도 죄의 자리에서의 어울림이 아니라 다른 위치에 있음으로서 빛을 발하는 희망이 증거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어디 계신가요. 昢凉 神父… 더보기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마태 20,15-16)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 나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일한 만큼 받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받아갈 것이 있노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출발이 다르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잔인한 세상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첫째와 꼴찌를 역전시키시는 하느님의 놀라움을 바라보라고. 세상과 하느님 나라는 달라도 그렇게 너무 다릅니다.
주인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선택되어 아침부터 일하도록 몇몇을 불렀습니다. 조금 더 늦게 포도밭에 불려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다 저녁때도 여전히 일거리를 얻지 못한 이들을 불렀습니다. 선택의 시점은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가 시간차가 있음은 한명 한명을 향한 하느님의 스케줄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왕이면 뒤늦게 와서 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포도밭에서 흘린 땀이 주인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습니다만 그 땀흘림은 일꾼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하게 하심도 감사한 것이고 일한 것이 별로 없음에도 동등하게 대우해주심도 감사한 것입니다. 아침부터 일했으니 댓가를 받을 만해서 받았다고 당연하고 일한 바 없으나 주셨으니 얼결에 받았으니 죄송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민망하게 받는 구원입니다. 누구도 당당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이 없으니 사양하지 못하며 받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 모두 꼴찌인 자로 포도밭에 왔던 것이죠. 누가 감히 받을 만해서 받은 것이라고 자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포도밭 일꾼의 맨 끝에 서서 주인이 주는 품삯을 받아 이 하루를 살게 되겠지요. 주인의 그 호의에 놀라워 하면서 말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1 티모 6,14-16a)
잘 살아 보겠다고 결심하는 즉시 허점이 노출됩니다. 이왕이면 용서하며 살자고 마음 먹으면 미운 인간들이 더 눈에 뚜렷하게 보입니다. 내가 먼저 희생의 모범을 보이자 다짐하건만 그래봐야 아무 쓸모없다는 반감이 더해집니다. 빛 속에 머물자하면 어둠이 짙음을 발견합니다.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래서 결심이 흔들립니다. 대충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이 들어 속상합니다.
허점투성이 인생입니다. 유약함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듭니다. 성덕에 이르기는커녕 악행만 더해갑니다.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무망한 것만 같습니다.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제자 티모테오에게 바오로 사도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킬 것을 명하고 주지시키면서 즉시 덧붙입니다. 그 일을 이루실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너의 결심이 아무리 단단해도, 너의 실천이 아무리 확고해도 결국 그것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간파하고 있는 것이죠. 티모테오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티모테오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그렇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여 우리의 나약함이 노출되면 될수록 유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진다는 것은 가능성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24-25)
자꾸 자꾸 나의 불가능성이 나타날 때마다 나의 가능이신 분께로 나가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되어야 함을 깨달으면서 실패하고 넘어질 것입니다. 잘 살겠다-결심할 일이 아니라 주님이 이 실패를 어떻게 바꾸시는지 체험하면서 말입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2-3)
일하려하다보면, 제대로 하려면 혼자서는 절대 못합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이들을 도우셨지만 그분 자신도 도움을 받으셨죠. 복음 선포를 위해 온 천하를 다 다니시니 경비도 웬만큼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죠. 비록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처지셨고 끼니를 드실 겨를도 없었다고 복음은 예수님의 사목생활의 팍팍함에 대해서 전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들이 한둘이었을까요.
예수님에게도 그래서 그분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이들이 있었고 오늘은 특히 숨은 여인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들은 소위 은혜받은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악령과 병에서 해방된 여인들, 막달레나,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밖에 다른 여인들 다수!!
예수님 사목회의 여성 총구역장 막달레나, 성모회장 요안나, 자모회장 수산나 뭐 그런 식인것이죠. 그밖의 다른 여인들은 여성 구반장님들이나 레지오 단원들 뭐 그정도.
헌신적인 봉사를 하면서도 이름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그런 여인들입니다. 어찌보면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남성 제자들은 기세등등하게 예수님과 동반하면서 제자로, 사도로 자리매김되는데, 이 여인들은 몇몇의 이름만 간략히 전해질 뿐 그 이후에는 잊혀집니다. 좀 티나는 일하고 어깨에 힘도 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숨은 봉사라니, 말이 좋지 얼마나 힘빠지는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그래도 하느님은 아신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아주면 얼마나 더 좋을까요.
진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그런데 이런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오 6장에서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하느님은 숨은 일을 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숨은 일이야말로 하느님께 갚음받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드러난 일은 사람들로부터는 보상 받지만 하느님께로부터는 받을 것이 더 이상 없습니다. 이 여인들은 하느님께 갚음받기를 선택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초라한 믿음은 세상에 기대서 행동합니다. 위대한 믿음은 내 제비와 내 몫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숨은 일을 하는 이름을 얻지 못한 위대한 수많은 이들, 그들을 기억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2-13)
‘여자라서 행복해요’, 지금은 한 시대의 추억 비슷하게 된 미모의 여배우가 냉장고에 기대어 딸기를 입에 물고 미소를 짓던 광고 카피입니다. 저 냉장고를 집에 들이면 나도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상을 한껏 자극했죠. 물론 아무 여자나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런 젊음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에,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배경에, 언제든지 꺼내쓸 수 있는 넉넉한 잔고를 가진 계좌에, 고단할 일이 없는 일상까지 다 갖추고 거기다 그 냉장고를 턱 들여놓으면 행복이 완성된다는 그런 비현실적인 삶이어야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죠.
‘죄인이라서 행복해요.’ 이런 언어도단은 어떤가요. 여기서 죄인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떠나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범죄자, 흉악범, 법적 단죄를 받은 이들 나아가 율법과 계명의 미준수자들도 다 포함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뭔가 삶이 꼬이고 결핍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환멸로 이 삶을 계속 유지할 이유를 찾지 못한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우리 모두 안에 저마다 있는 구원되지 못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약속이 주어져 있어서입니다. ‘의인’, 그것은 이미 다 채워진 삶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굳이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하다 할 수 있는 셈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미 다 채워져 차고 넘치는 그는 예수님과 관련없습니다. 부활 성야 때 울려퍼지는 부활 찬송의 한 대목은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입니다.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했다? 죄가? 죄로 인한 타락과 저주가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오시고 구하시는 일을 선사했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단절되었지만 죄로 인해 하느님을 다시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신비입니다. 그러니 죄인이라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죠. 내가 의인이었다면 주님을 만나고픈 마음은 모르고 살았을테고 내가 의인이라면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초점은 무엇인가요? 죄가 있고 없음이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주님의 호소를 듣고자 하는가 모른척 하는가-초점은 여기 있습니다. 공적 죄인으로 간주되던 세리 출신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신 주님께서 왜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했던 ‘의인’이 아니라 도저히 어쩔 길 없던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이기에 행복’하다는 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모든 죄인들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거기에 닿아 있기에. 昢凉 神父…더보기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32)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불평한데요. 우리는 피리 불면서 혼인 잔치하면서 놀고 있는데 너희는 왜 춤추지 않아. 우리가 곡을 하면서 장례놀이 하는데 왜 너희는 같이 맞장구치면서 울지 않아. 결혼식 놀이 장례식 놀이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친구들에 대해 비난하는 이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냐? 이 세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한테 맞춰주지 않느냐고, 왜 우리 분위기에 즐겁게 춤추고 슬피 울지 않느냐고 했다는 것이죠. 왜 우리와 안 놀아주냐고요. 그 시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 그랬다는 것, 그리고 요한 세자에게도 그랬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어제 복음,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에서 어떻게 하셨어요. 우셨나요? 온 마을 사람들이 따라와서 울었지만,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은 드셨지만 울지는 않으셨어요. 오히려 그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울지 마라 하셨죠.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말이죠. 예수님은 다른 방식으로 그 젊은이를 살리셨어요. 모두가 곡을 하건만 예수님만은 울지 않았죠.
요한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광야의 예언자로 거칠고 황량한 그곳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서 왕궁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를 그리고 회개를 주장했어요. 예수님도 요한도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정면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도 세상을 불편하게 하면서 기존의 관습과 전통과 규범과 관례와 가치를 따르지 않았어요. 다들 노래하는데 노래하지 않았죠. 다들 곡하는데 울지 않았어요. 소수의 길, 혼자만의 길, 마이웨이를 걸어가셨단 말이죠.
그런 예수님을 그런 요한을 향해서 타박하고 비난하는 것이 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가 그랬고 우리 시대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왜 우리처럼 살지 않니-동조하기를 자신들의 전통과 가치를 따르기를 요구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세상이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대 관습과 전통 그 시대의 가치에 정면 도전하시겠다. 너희의 기대를 채우지 않겠다. 이 비유에 담긴 주님의 뜻이죠. 우리가 시대의 가치와 경향을 쫓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수가 이 길로 가라고 합니다. 노래하라고 곡하라고 요구한단 말이죠. 그러나 로마서 12장 2절에서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세상의 트렌드가 아니라 우리가 쫓아야 할 것은 따로 있음을. 우리 시대의 가치와 기대, 경향과 필요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과 복음이 기준이 되어야 함을.
그래서 춤추지 말라. 울지 말라.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굴복하지 말라. 부화뇌동하지 말라. 오늘 세상과 구별된 사람으로 다시 서서 나가라고. 昢凉 神父…더보기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3-14)
예수님 일행과 장례 행렬이 마주 쳤습니다. 나인성 갈릴래아 남부의 작은 고을 성문에 이르렀을 때였다죠. 죽은 이를 메고 오는 장례 행렬, 큰 무리가 그 장례에 함께 하고 있었죠. 그런데 보통의 장례가 아니라, 젊은이의 장례였어요. 그러니까 더욱 슬픔이 가중됩니다. 아직 채 다 피지 못한 인생, 게다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어머니는 과부로 이제는 사고무친이 된 것이죠. 훨씬 구슬프고 비극적인 미래를 상실해버린 그런 장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엾은 마음으로, 슬픔에 공감하며, 이 어미를 향해 ‘울지 말라’고 ‘눈물을 거두라’고 깊은 연민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셨어요. 정결법에서 금하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젊은이야 일어나라’ 명령하십니다. 시신을 두고 무슨 의아한 말일까-사람들은 주목합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납니다.
이 일화는 열왕기 상권 17장에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와 연결욉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자 온갖 방법을 다해 다시 소생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서는 너무 단순하게, 말씀하시자 즉시 소생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대비시키는 것이죠. 하여 이 젊은이의 일어남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일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은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놀라움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이 젊은이의 소생을 이루어진 고백은 하느님이 백성을 돌보신 사건이라는 것이죠. 비극적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 그래서 메시아 시대를 꿈꾸며 그 희망으로 간신히 버티던 이들, 그런데 그 기다림, 언제 하느님이 오셔서 이 절망 가운데 건지실 것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런 시대가 끝났음을 목격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끝나고 성취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비극이 끝난 것만이 아니죠. 이제 구원이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분이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연민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젊은이의 소생이 담고 있는 것은 새 시대의 개막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새 시대는 눈물이 거두어진 시대이고 죽었던 것들이 다시 깨어나 힘차게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장례지내야 할 것은 젊은이가 아니라 죽음인 시대입니다. 일어나야 할 것은 새로이 회복된 생명의 시대입니다. 주님의 두 가지 명령이 자꾸 울려옵니다. ‘울지 마라’ 그리고 ‘일어나라’. 昢凉 神父…더보기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루카 7,9)
믿음에 크기를 잴 수 있다면 가장 큰 믿음의 보유자로 여겨지는 이는 단연 오늘 복음의 주연인 백인대장이 되겠지요.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으니 말입니다. 할 수 있다면 복음의 인물 중에 만나보고 싶은 백인대장입니다. 도대체 그는 이방인이면서 그런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고 싶습니다. 갈수록 튼튼해지는 믿음이어야 할텐데 제자리는 커녕 걸핏하면 물러지는 믿음이기에 백인대장에게 묻고 싶습니다.
개다가 백인대장은 평판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백인대장의 호의와 풍모에 대해 호평하면서 예수님께 청을 드리고 있기까지 합니다. 힘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된사람인 것이죠.
그가 예수님께 드린 청이 앓고 있던 자기 노예의 치유였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일개 종, 당대의 통념으로는 인간의 범주에도 들지 못했을 노예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을 향한 지극함과 연민이 가득한 사람, 그가 백인대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격찬하신 그의 믿음이 자기 집에 오시는 번거러움을 없이 그저 계신 자리에서 말씀만 하셔도 족하다고한 주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약한 이를 향한 어루만짐이기도하고 쓸모없다하여 내버리지 않는 책임지는 든든함이기도 합니다. 그의 믿음은 클 뿐만 아니라 그렇게 멋진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이런 인물들을 만나면 부러움이 솟아납니다. 샘난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백인 대장이 샘나고 바르티메오가 샘나고 세자 요한이 샘납니다. 이렇게 샘나면 비슷하게라도 닮고 싶은 마음도 더러 생겨나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순교자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나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7-39)
주일학교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우리나라 성인들이 모두 몇 분이실까?’ 손을 번쩍 들고 자신있게 답하는 겁니다. ‘세 분이요’. 도대체 교리교육 누가 시킨 걸까? 어이가 없어서 ‘세 분이라고 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정하상 바오로...그리고 동료요’. 그렇게 셋이랍니다.
순교자 성월을 한 달이나 지내면서, 우리는 ‘이땅의 모든 순교자여’ 이렇게 시작되는 성월기도를 바치고 있죠. 입만 열면 한국 가톨릭 교회는 자랑합니다. 말이지, 우리 교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없이 시작된 자생적인 교회라구요. 늘 덧붙여 지는 말은요, 이것은 세계 교회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라구요. 분명 최초이고, 아마도 앞으로도 다시 없을 전무후무한 성령의 역사다 이거죠. 이렇게 외부에서 전파되어 수용된 신앙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태동한 신앙이라고, 게다가요 성직자 없이 평신도에 의해 신앙의 씨가 뿌려지고 그것도 진리를 찾고 있던 학자들이 서학을 연구하면서, 전근대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혁신적이고 계몽적인 돌파구를 서학 천주학에서 찾아냈다고요. 이것이 신앙으로 실천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시작부터 우리 교회는 굉장한 엘리트들의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자랑할만합니다. 자부심 가져도 좋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에요.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실천이 우리 교회의 특징었다는데, 그래서 성인호칭기도 보면 김아기, 박아기, 한아기, 이간난, 박큰아기 마리아 성녀와 그나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아카타, 이 바르바라, 이카타리나도 계십니다. 아무리 여인이 이름을 갖지못하던 시대라해도 정말 평범한 이름도 없는 분들이죠. 그분들이 우리 순교성인들이십니다. 다수가 그저 그런 지위였어요. 대단한 자리도 얻지 못한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분들이 전례 축일표도 없이 이레마다 하루씩 파공하고 재를 지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지 보면 정말 놀랍게도 아무 것도 안하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뭔가 시켜야만 그제야 움직거리는 이들의 대명사, 천주교 신자죠. 신앙의 역동성이 완전히 결여된 것입니다. 찾아서 하는 믿음의 일꾼이 아니라 시키면 그제야 조금 할까 하는 수동적 신앙으로 전락된 것이죠. 잘 안움직여요. 열정은 없는 신앙이죠. 냉담자이거나 곧 냉담자가 될 예정이거나 냉담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긴 했는데 그 근처 어딘가에 있는 우리가 아닌가요. 순교자들의 그 한결같음을 생각합니다. 그 피흘림을 통해 남겨진 믿음의 유산이 흩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루카 6.43-44)
유전자 결정론에 의하면 모든 유기체의 생명 현상이란 결국 유전자가 자기를 보존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인간마저도 실상은 유전자들이 서로 교섭하고 결합하면서 생겨난 존재라고까지 말합니다. 실제로 유전자가 주인이어서 모든 것을 다 관장하고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죠. 극단적인 물질주의 혹은 유물론적 사유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식의 ‘결정론’들은 과학이라는 외피를 입고 현대인의 인식을 장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틈이 있으니 유전자의 이런 결정에 반하는 현상도 있습니다. 돌연변이가 그것이죠. 유전자 결함이 아님에도 별난 놈이 하나씩 생긴답니다. 네 잎 크로바도 나오고요 엄마 아빠는 흰토끼인데 그 사이에서 얼룩이도 나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돌연변이가 생물 다양성에는 아주 큰 보탬이 된다고 하네요.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는 팥이 나온다는 것이죠. 가시나무 가시덤불같은 변화되지 않은 마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에서는 포도나무 무화과 같은 아름답고 쓸모있는 것은 안나온다고 강조하십니다. 악을 경계하고 그 악의 근원을 지적하시는 것이죠. 시기, 질투, 경쟁, 증오, 분쟁 등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인적이나 집단적으로 겪는 모든 악과 비극의 근원은 세상을 너와 나로 분리 대립하는 차별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자기 중심성의 극복이 모든 종교의 지향입니다.
인간 본성에 박힌 원죄의 유전자대로만 산다면 끊임없이 악한 열매만 양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일종의 영적 전환이 이루어지면 본성 자체가 성령으로 치환되어 새로운 경지가 펼쳐진다는 것이죠. 사랑, 평화, 공존, 상생, 부드러움의 열매들이 맺힐 수 있으니 이것은 일종의 영적 돌연변이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원래 나올 수 없는 것들이나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에게는 나올 수 있는 덕행들입니다.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그 열매들이 삶에서 주령주렁 맺혀지는 가을 날이면 좋겠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요한 19,25)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다음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연이어 지냅니다. 십자가를 겪으신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고통이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으로 전달되고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죠. 철학적 시각으로는 절대자는 고통을 겪을 수 없습니다. 개념상 신은 고통을 겪을 수 없습니다. 신은 완전해야 하고 완전함이람 고통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십자가는 이런 신개념과 상반됩니다. 우리 하느님은 몸소 고통을 겪으신 하느님이시고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셔서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인간이 살아있는 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신비를 알려줍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고 가능한 내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바람이지만, 피하고 싶다고 해도 여전히 다가온단 말이죠. 아무리 해도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구원의 현의는 피할 수 없는 그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하느님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마리아도 역시 그 아래서 찢어지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동참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같은 아픔으로 하나가 됩니다.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나만 고통 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그 고통을 느끼신다. 상상이 가시나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도 극도의 고통, 죽음으로 나가셨지만 십자가 아래 어머니의 고통도 동시에 느끼신 것입니다. 왜 고통을 우리는 신비라고 하는가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십여 년전 사극에 나와 아직도 회자되는 명대사죠. 너의 아픔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이된다는 겁니다. 정말 사랑할 때 아픔이 내게도 전달되더라는 것이죠. 아플 때 힘들 때 외로울 때 슬플 때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동일하게 겪는 내 하느님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인간이 아픕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아프십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6-17)
하느님 사랑은 먼저 하신 사랑이라서, 먼저 사랑하셨기에 내가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나의 감정 상태에 관계없이 사랑하시는 것이죠.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나를 사랑하신 것은 나의 사랑의 댓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임은 하느님의 목적은 구원이고 영원한 생명 은혜가 목적이고 하느님의 절실한 본심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이 고난을 주시기도 하죠. 시험을 감당하게도 하시죠. 마냥 문제없는 삶만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재앙을 허락하시면서도 그 재앙에 숨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읽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부모의 회초리 매 뒤에 숨겨진 아비어미의 안타까움과 눈물이 있듯이. 매가 본심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부모의 진심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손에 든 회초리 매만으로 평가하지만 그러나 그 이면, 자식보다 더한 아픔을 보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불변의 사실은,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식었군요!’
그러나 실은 하느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계신데 내 사랑이 식으니 오해가 생깁니다. ‘그렇지, 하느님! 그럴 줄 알았어!.’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오해의 원인은 하느님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죠. 내가 사랑하지 않으니까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럽고 이상하게 여겨지죠. 그러나 사랑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받아들여집니다. 문제는 저쪽이 아니라 여기 있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2-23.26)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위에 오르셔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기에 산상설교라고 부르는데,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에서 설교하십니다. 힘겹게 오른 산이 아니라 들판,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전할 때 이런 장소적 차이가 메시지에도 미묘한 차이를 줍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산상 설교는 참된 행복, 진복팔단으로 시작되는데 루카 복음은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내 앞에 있는 가난한 그대들 얼마나 행복하냐. 배고픈 그대들 얼마나 행복하냐. 지금 우는 그대들 얼마나 행복하냐.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요 확신하고 계신 것이에요. 우리는 무엇이 충족되어야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도 그렇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부족하고 힘겨운 그 모든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고 왔습니다.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요지인 즉 ‘너희는 변화되면 달라지면 채워지면 그러면 행복한 줄 알고 여기 왔구나.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어떤 악조건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그 행복은 세상이 이야기하는 행복 아니야.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하다 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어’입니다. 이미 다 가지고 있고, 이미 다 채워져 있고, 이미 다 위로받고 있으면 좋지만요 하느님의 새로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엄청난 풍요로움을 갈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조건과 상관없이, 상황과 무관하게 행복하다는 이 행복은 도대체 어떤 행복일까요? 주님 앞에서 생명의 말씀 듣을 수 있다는 그 행복, 감히 생각지도 못한 자격을 내게 주셔서 자녀 삼아주셨다는 행복, 우리의 부족한 기도가 하느님 앞에 상달된다는 행복, 남들은 몰라도 하느님께서만은 우리의 처지를 이미 헤아리신다는 그 행복, 그 거룩한 행복을 느끼고 누리지 못하면 어떤 것이 주어져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행복이 예언자에 관한 것입니다. 예언자의 길을 가는 이들, 거짓 예언자의 길을 가는 이들이 그렇죠. 주님의 말씀을 품고 전하는 이들인 예언자들, 그런데 그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자고로 대우받으며 예언직 수행하는 참된 예언자는 없고, 또 홀대받는 거짓 예언자도 없다는 것이죠. 요새 말로 하면 참된 예언자에게는 안티가 많아요. 거짓 예언자에게는 팬이 많아요.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속내를 들추는 말을 하죠. 그가 성격이 비뚤어져서가 아니에요. 하느님의 공의로우심,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전할 때 그것은 당연히 세상과 충돌하는 것이죠. 세상의 가치와 상반되는 가치를 말해요. 기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천국 진리를 전해요. 반면에 거짓 예언자는요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귀에 솔깃하고 달콤한 말을 들려주니 인기가 높죠.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죠. 충성스러운 말은요 귀에 거스르는 것(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이에요. 내쳐지고 매도당하고 모함받고 결박당한다고 그릇된 것은 아니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늘 그랬어요. 예수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잘되는가 아닌가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하시니 세상 행복 추구하는 이에게 복음은 큰 도전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를 선발하실 때, 아마도 후보자가 될만한 이들을 면밀하게 검토하셨을 것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선발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은 산기도, 철야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중대한 일을 앞두고 당연히 기도합니다. 주님도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일상이 기도이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가려놓은 시간은 필요합니다. 사도 선발을 앞두고 어떤 주제로 기도하셨을까요?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대개 누가 좋은가 괜찮은가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을 해야할까 그만두어야 할까 등을 가지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고민을 기도라고 생각하곤 하죠. 이것은 착각 내지는 착오입니다. 우리의 고민거리를 가지고 끙끙앓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건 아닌 것이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잘 맡기도록 기도하는 것인데 거꾸로 하느님을 조정하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고민하는 것, 내가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느님 앞에 내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나, 이것이 결정을 앞둔 이의 기도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되 잘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렵습니다. ‘잘’ 한다는 것의 기준이 모호하기에.
사도들 선발 이후의 사건들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좀 의아한 것이 하나같이 결격 사유가 있는 이들이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의 일하심은 부족함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를 뽑는다고 한들 하느님께 보탬이 되거나 적어도 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죠.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좀 바꿔야 겠습니다. 누구나 될 수 있을뿐더러 아무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심사숙고하시면서 밤 새워 그런 기도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무라도 상관없고 누구라도 가능하다. 그 사람이 일한다고 한다면 어렵겠지만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면 사정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잘 기도하신 덕분에 우리 역시 제외되지 않습니다. 고민으로 기도하지 않고 내어맡김으로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8-9)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주는 안정감이 분명 있을 수 있겠죠. 모든 제도는 일관성 지속성을 가지기 마련이라 삶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할 지를 매번 숙고해서 그때마다 답을 찾아야 한다면 피곤하기 이를데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서 최적화된 답을 찾아내고 제도화시킵니다. 제도라는 틀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들어낸 삶의 준거가 됩니다. 그리고 종교는 그 제도화에 가장 강력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근대 이전 시대에는 왕권의 최종적 정당성은 신수설이었죠. 왕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토대를 놓는 것이죠. 근대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인권의 존엄성과 고유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겨졌지요. 천부인권설입니다. 초점이 어디에 두어지느냐에 따라서 종교적 근거가 절대 권력을 지지해준다고 보기도 하고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유다 사회의 시간을 규정하는 강력한 제도입니다. 시간에 리듬을 형성하여 주고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삶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제도가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갈등의 원인이 되어 버렸죠. 손이 오그라든 병은 불편하기는 해도 당장 고치지 않더라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피해서 안식일 지난 하루 이틀 뒤에 고치셨다면 논란을 굳이 야기하지 않으셨을 수 있었을 것이죠. 게다가 복음에는 안식일 준수를 신주단지처럼 여기던 이들이 빌미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알 수 있었으니 이 치유를 안식일에 행하심으로써 일정한 도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절대시하면서 놓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고자 한 것을 요즈음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이 먼저다 이정도가 되겠지요. 사람을 놓친 제도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쏠립니다. 자기 유지가 최종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제도는 쉽게 경직됩니다. 생명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성장하면서 동일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복음과 관련없을 뿐 아니라 복음적 가치에 반하는 관료주의의 경직성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이 사목이 아니라 경영이 되고 경제적 효율성이 앞서게 되어 숨쉬고 살아가는 사람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는 것이죠. 사람을 보는 것, 조막손으로 불편한 한 사람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을 잠시라도 미루고 싶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임을 알기 위함입니다. 제도가 아니라, 틀이 아니라, 전체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사람, 아파하고 신음하며 또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한 사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오늘 복음을 보통 ‘공동체 규칙’이라고 부릅니다. 여럿이 모여 살면 생길 수 밖에 없는 분란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잘 타일러보고 그도 안되면 뜻을 같이하는 이와 연대하여 해결책을 구해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잘못하고 있는 이에 대해 어떻게 충고하고 견책할 것인지 말씀하시고 나서 즉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연달아 말씀하십니다. 두사람이 청한다. 마음을 모아서. 공동체의 기도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있다. 교회 공동체죠. 교회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의 힘이 있다는 것이죠. 하늘을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죠. 함께 모인 이, 연대하는 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냐? 두세 사람 모여서 각자 필요한 개인적 기도 지향을 놓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죠.
왜냐하면, 사실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 두세 사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보면 복음의 앞에서 타인에 대해 충고와 지적을 할 때,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말해야 한다는 대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세 사람은 모여서 무엇을 놓고 어떤 지향으로 기도한다는 것인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변화되고 달라져야 할 사람이 있단 말이죠. 사회적 구조일 수도 있어요. 그것을 놓고 기도할 때, 두세 사람이 그때 그 기도 안에 어떻게 하실 것인가?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기도 공동체에 현존하시고 그들과 연대하신 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편을 드시겠다는 겁니다.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이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다 무릅쓰는 바로 거기에.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바로 우리들과 함께.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루카 6,1-2)
어릴적 골목길에 살았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가실 즈음이면 동네 꼬마들이 죄다 모여 얼음땡, 술래잡기, 비석치기 등 온갖 놀이들이 골목에서 펼쳐집니다. 다행히 아날로그적인 시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동네에는 자그마한 뒷산도 있었습니다. 이맘 때면 잠자리가 떼로 날고 살이 오른 메뚜기는 풀숲에서 푸드덕이며 날아올랐습니다. 아쉬운 것은 그래도 시골 마을의 분위기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좋을 법했다는 것이죠. 가끔 외갓집에 가게 되는 것으로 시골의 삶을 살짝 맛보는 것이 그래서 좋았습니다. 외갓집 동네 형들은 서리에 저를 끼워 주기도 했습니다(주범은 아니었답니다). 앵두나무집 할머니네 밭에 참외가 샛노랗게 익어갑니다. 큰 숙부네 뒤꼍에는 담장 너머까지 오이 넝쿨이 뻗어나와 있습니다. 아이들은 별 큰 죄의식 없이 그 밭의 과일을 뚝뚝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놈들아’ 불호령과 함께 쫓아오시는 엄한 할아버지도 간혹 계셨지만 대개는 눈감아 주는 것이 상례이고 인정입니다. 밭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이랑에서 하나나 둘, 눈치껏 이루어지는 것이 서리입니다. 그건 절도와는 좀 다른 것이죠. 동네 꼬마들을 함께 키워내는 공동체적 양육방식, 후한 인심인 것이죠. 우리 아이도 저 안에 섞여 있을 수 있으니 말이죠. 그렇게 없던 시절에도 먹는 것 가지고는 박하게 살지는 않았던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보인 행동을 밀서리 정도로 보고 싶습니다. 길다가다 밀이삭 훑은 것이니 당연히 자신들의 밭은 아닙니다. 그리고 굉장히 허기져있음은 밀을 분쇄해서 가루 내어 제대로 빵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비벼서 껍질만 대충 벗겨내고 먹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장난삼아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허기가 진 상태였던 것이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제자들이 허겁지겁 밀 몇 이삭 털어넣는 것에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마음이 얼마나 굳은 자인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꼭 트집잡는 이들이 있더란 것이죠.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율법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규칙을 따지고 나오더라는 것이죠. 사람의 일은 알고 보면 이해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처한 그 상황을 감안해보면 죽고 죽이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이해가 됩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요. 그의 행동과 선택, 그가 그렇게 한 것도 무리가 아니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봐주는 마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법대로 좋지만, 정상 참작도 있어야 세상은 숨통이 트입니다. 약함을 봐주지 않는 세상은 팍팍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도 결국 법대로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봐주시겠다는 것이죠. 우리의 연약함을 감안하여 그냥 넘어가 주시겠다는 관대함이며, 두 눈 부릎뜨고 하나하나 다 죄대로 헤아리지 않으시고, 지나치다싶게 봐주시는 덕분에 용서됩니다. 하느님도 우리보고 ‘니들이 오죽하면 그러랴’ 이런 마음이시지 않을런지요. 昢凉 神父… 더보기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3)
하느님을 ‘만난다’ 혹은 하느님께 말씀 ‘드린다’는 식의 표현을 할 때 거기에는 마치 인간이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일관된 기조는 하느님은 만날 수 없는 분 혹은 만나서는 안되는 분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몇몇 예언자들을 제외하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분과의 만남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순간이기에 두려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이들을 통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가장 안전한 것이었습니다. 구중궁궐의 임금님은 만날 수 없기에 그립기도하고 오묘하기도 한 것이지 막상 만나게 되면 백성들에게는 피곤하고 골치아픈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하느님은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던 이스라엘에서는 이해 가능하지도 않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죠. 실은 우리도 인간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거기서 멈춰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지 날리는 팔레스티나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예수가 있었음은 분명한데 그가 다름아닌 하느님, 오늘 복음의 표현으로는 임마누엘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주춤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어서 도저히 하나로 합해질 것 같지가 않은 것이죠.
그리하여 우리 믿음,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저 무작정 혹은 대책없이, 아무런 질문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그냥 믿어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냥 믿으면 속이야 편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편한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하면서 답을 찾아가면서 때로는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수렴되어 갑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동정녀를 통해 오셨다는 것이, 그분이 오신 사건의 궁극적 의미가 ‘임마누엘’이라는 것이 그래서 세상과 하느님이 만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답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느님이 몸소 만나러 오셨습니다. 신비 중의 신비를 오늘 묵상하고 이 신비를 이루어주신 동정 성모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루카 5,4-6)
인생에는 굴곡이 있는지라 슬럼프가 다가옵니다. 경제도 불황이 오곤 합니다. 슬럼프의 극복, 우리에겐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겐네사렛 호수가에서 예수님이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어느 아침,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허탈한 아침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공허한 상태로 다음 날 작업을 위해 그물을 하릴없이 손질하고 있었죠.
그때 예수님이 깊은 데 그물 내려 고기 잡으라고 명령하시는데 정황을 생각하면 생뚱맞기 이를데 없습니다. 작업은 이미 다 끝난 상태였으니 말이죠.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장모님도 고쳐주셨죠. 열병 고쳐주셨어요. 그래서 그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지친 상태, 버닝 아웃의 상태, 슬럼프의 상태 겪을 때 있죠. 노력했어요. 힘이 들어요. 그런데 남는 것이 없단 말이죠. 기도했어요. 응답이 없어요.
그런데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베드로의 배뿐 아니라 동업자 제배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배까지 가득 찰 정도로 고기가 잡혔다는 것이죠.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표현은요 이야기 시작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군중과 같은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사명을 받습니다. 부르심을 체험합니다.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베드로는 수많은 물고기를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잡았죠. 베드로는 수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이제 뭐에요 수많은 군중, 사람들을 건져 올리게 될 것이죠.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면 삼천명, 오천명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그들을 건지는 사람이 된단 말이죠. 이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죠.
실패 이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죠. 그러나 믿음은 다시 일어서는 힘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그냥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재도약할려면 뭔가가 필요합니다. 실패의 수렁 속을 허우적일 때 새 능력, 더 많은 힘을 주시라고 기도해야죠. 그리고 그물을 정리해야죠. 재정비하며 있는 것을 잘 살펴야죠. 그리고 깊은데 다시 던지는 것이죠. 슬럼프일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렇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 곳으로 가셨다.” (루카 4,4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의 풍경을 전해줍니다. 수많은 병자들과 부마자들을 만나십니다. 다른 고을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며 떠나가십니다. 이곳저곳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이 밀려옵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 불철주야로 바쁘고 고단한 카파르나움에서 펼쳐진 예수님의 하루입니다.
원래 능력이 많은 사람은 피곤을 달고 삽니다. 거기에 남의 부탁과 요청을 거절못하는 성격까지 겹치게 되면, 어휴 늘 시간에 쫓기고 살게 됩니다. 그러니 붐비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문난 맛집에는 뭔가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비법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 이유야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기가 해결하지 못한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고, 풀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죠.
능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허탕치는 곳에 가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를 주신 까닭은, 실은 더 예수님을 찾으라 하심인 것이죠. 혼자 해봐야 해결 안된다! 그러니 내게 와서 답을 구하거라. 원래 출제자가 답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출제자이신 주님께 가야 마땅합니다.
슬픈 것은 그런데 너무 많은 이들이,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외딴 곳, 그곳은 재충전의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외딴 곳은 어디인가요? 주님은 나의 외딴 곳이 되셔서 기다리시건만 왜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의 기도는 갈 곳을 잃은 수많은 냉담자들을 위해 바치려 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가톨릭 하상 앱을 통해 신앙 생활의 편의를 높이고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꼼꼼히 보시고 앱 설치와 사용이 어려우신 경우
가족들 중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아 보시고
그래도 어려우신 경우에는
사무실에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더보기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루카 4,36)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사명을 선포하시고 즉시 실천하십니다. 마귀들린 이를 해방시키시는 것이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유대사회에 등장하셨을 때 대중의 공통적 반응은 놀라움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에 놀랐고 예수 기적에 대해서도 놀랐습니다. 예수님은요 놀라운 분이셨어요. 놀라움을 일으키는 분, 곧 그분은 뻔하지 않았다는 것. 놀라워하는 것은 예상과 상식을 초월했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도 놀라긴 놀라는 경우가 있긴한데 많은 경우에는 부정적인 놀라움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놀라죠. 신앙인이 신앙인답지 못하면 놀라죠. 교회는 이래야해 신자는 이래야해 기대치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닌 것에요. 너무 교회답지 못할 때 무슨 신부가 저모양이야 할 때, 이것은 부정적인 놀라움을 줍니다.
한편으로는요 경이감의 상실이 현대인의 질병이라고도 합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이 계속되어서 오늘이 어제같고 내일도 오늘같다는 것이죠. 뭔가 놀랄 일이 없데요.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만 놀랄 뿐 아니라 마귀도 놀란다. 경악하죠. 그러면서 예수와 나는 상관없다고 무관계성을 강변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가 귄위있는 말씀이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와 실력이 있을수록 그래서 복잡하지 않습니다다. 푸닥거리, 굿판 따라 다녀보아서 아는데, 열두거리 정식 굿판이 벌어지면, 몇날 며칠 계속됩니다. 울긋불긋 차려입고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 울리고 요란하죠. 그러나 주님은 점잖게 한마디 툭 던지시는 것이죠. ‘꺼져.’ 그러고는 끝입니다.
영화 속 조폭들도 어찌보면 비슷합니다. 동네 뭐라나 그냥 건달들이나 설치고 다니지 진짜 큰두목들요 코트깃 척 해우고 나타나서 몇마디 안하더구만요. 조폭도 그럴 때 멋져보이죠. 어두운 권위, 요새말로는 포스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진짜 권위는 놀라움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경이로움의 자각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그 말씀이 내게 내려오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내가 변하는 것, 그 성체가 죄인의 몸에 들어오니 그가 용서의 은헤를 입는다는 것, 내가 네가 우리가 모두가 다 그분의 도우심에 힘입으니 안된다 여기던 것들이 되게 된다는 것 등등. 그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합니다. 많이 놀라는 것, 다른 말로 반응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은혜 그리고 도우심 또한 한결같으신 사랑에 매일매일 놀라는 반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 18-19)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벌어진 어느 안식일에 있었다는 예수님의 출사표를 묵상해 보면서, 우리가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이미지가 많이 윤색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달관한 현자나 선비같은 예수님, 혹은 대가집의 귀한 자제, 뭐랄까요 아주 예의바르고 의젓하기만한 예수님, 윤리와 도덕, 자비로 무장한 점잖고 온유한 예수님 등등. 우리가 각자 주님께 가지고 있는 이러 저러한 이미지들이 예수님의 실재에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요? 노련하고 그래서 원만한 분,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으나 애늙은이 같은 분?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서른 즈음에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이죠. 많다면 많다고 하겠으나 실은 패기만만하고 열정적인 때일 것입니다. 인생에 뭔가 이룬 것들에 머물기보다는 판을 새롭게 짜려는 마음이 솟구치는 때였으리라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한 대목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케일이 남다르게 웅대합니다. 억압된 것들에 대한 해방을 거침없이 선포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확신이 넘쳐납니다. 얌전빼는 샌님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야성적 젊음이 물씬합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복음 자체라고 할 때 얼마나 역동적인가요.
우리가 오래도록 잃어버리고 있던 그리스도교 영성의 한 축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고요하고 초연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야성적이었다는 것이죠. 침묵, 관조, 초탈, 신비 같은 전통적 측면에 갇혀있지 않고, 바깥을 향해 당신 자신을 쳘쳐 보이시는 의연하고 패기 넘치는, 그래서 요즘 용어로 정말 상남자! 젊은 청년 예수님을 케케먹은 퇴물처럼 박제화시키면서, 이미 다 산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도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의 영에 가득차서 ‘뭐든 올테면 와 보라구!’, 부딪치며 극복해 나가겠다는 그 야성, 도전의 시선이 회복되면 그는 청년 예수님과 동반하고 있는 것이죠. 昢凉 神父…더보기
연중 제22주일 말씀 한모금 “반석과 걸림돌 사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1-2: 2독서)
지난 주일 복음에 뒤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카이사리아에서의 신앙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맺고 푸는 권한, 사죄권과 수위권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따라다닌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고백한 결과였고 하느님께 그가 수용된 것입니다. 그에게 베드로-반석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졸지에 사탄이라는 오명을 뒤짚어 쓰게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리라고 죽음이 오리라 예고하시자 반박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겠다고 그야말로 뜯어 말린 것입니다. 베드로의 반박이 과연 사탄이라는 말을 들을만한 것이었을까요? 너무 과하지 않나요. 사탄이라뇨. 으뜸 사도와 사탄 사이, 베드로는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십분 이해됩니다. 아니 어떤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님이 위험스러운 일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간다는데 ‘뭐 그러신 데는 깊은 뜻이 있겠지’하며 수수방관한단 말입니까? 뭐라도 해볼려고 할테지요.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은 것이 자연스럽고 또 마땅히 해야할 일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을 막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충정이었고 진심이었을 것이죠. 내가 선생님을 지켜 드리고야 말겠다는 그의 우직함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고 ‘걸림돌’이며, ‘하느님의 일에 대한 방해자’라고 질타하신단 말이죠. 너무 합니다. 억울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면 의당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일이라면 갈등과 어려움의 요소들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일이면 탄탄대로, 원만하게 흘러 갈 것이다. 하느님의 일이라면 만사형통, 잘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일 뿐이고 오히려 하느님의 일에 대한 오해 혹은 억측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탄적 생각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하느님의 일이기에 많은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는 하느님의 일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기에 더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온갖 어려움을 제기합니다. 하느님의 일임에도 난관과 장애가 첩첩이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인데 결과는 처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 고백 위에 성공이나 승리를 향한 자신의 열망을 슬쩍 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자면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요.
오늘 로마서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우리 자신이 변화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휩쓸리거나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죠. 부화뇌동은 힘이 들지 않지만 독야청청은 각오해도 어렵기 그지 없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지상형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담아두고 갈망하는 천상형 인간으로 살아가려니 내 안의 ‘사탄’이 얼마나 축출되고 주님을 향한 ‘걸림돌’이 얼마나 뽑혀나가야 할런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마태 25,24-25)
탈렌트는 무게를 자는 도량형입니다. 약 35Kg에 해당합니다. 금으로는 한 탈렌트는 만 돈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이죠. 돌 축하 선물로 받은 반지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한 탈렌트를 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것에 비견되겠죠. 복음의 탈렌트의 우화는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나눠주고 재량껏 활용하도록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지나 셈을 헤아리는데 다른 종들은 모두 곱절의 수익을 거두었는데 한 탈렌트 받은 종은 고이 묻어두었다가 원금만 돌려주었다가 주인의 불호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흔히 주신 것을 잘 활용하라, 탈렌트(하느님이 주신 재능, 능력, 은혜)를 묵혀두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맞습니다만, 그런 교훈이 이 이야기가 전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이 우화가 겨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맡기시고 정확하게 셈을 헤아리시는 분이라거나 우리는 탈렌트의 관리자이기에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한 탈렌트를 그대로 묻어두었던 종을 향한 주인의 꾸짖음은 바로 종이 주인에게 품었던 마음, 태도, 관점에 있습니다. 그가 주인을 심지도 뿌리지도 않은데서 모으고 거두는 모진 분으로 알고 두려워했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주인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엄격하기 이를데 없는 냉혈한, 그가 주인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하여 그 두려움이 종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실행할 수 없고 전전긍긍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사도 요한은 선언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주인에 대한 사랑없음이 종을 마비시킨 것이고 그 두려움이 탈렌트를 묻어 버리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맡겨 주신 것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만들었죠. 주인은 종들을 깊이 신뢰하여 어마어마한 탈렌트를 맡겼는데 말입니다.
두려운 하느님을 만나고 단죄하는 하느님을 대면하고 인간을 처벌하는데 거리낌없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듭니다. 주인이 종을 믿었기에 탈렌트를 맡겼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으셔서 자유로이 파견하셨음을 알아들으라는 말입니다. 또 되돌려드려야한다는 강박도 필요없습니다. 우화에서 주인이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착하고 성실한 종들이 거둔 탈렌트를 다시 맡겨 내어 줍니다. 애초에 회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죠. 담대하게 자유롭게 살면서 주신 것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손해보는 것, 실수하는 것도 주인에게는 무방한 것이니 말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마태 25,10)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혼인하러 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기다리는 열 처녀(아마 신부쪽 들러리 정도)가 신랑이 오는 것이 지체되자 잠이 들고 맙니다. 신랑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깨어나는데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이 넉넉했지만, 기름이 부족한 다섯 처녀는 기름 구하러 가는 바람에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내려지는 결론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입니다.
주목할 점은 열 처녀가 기다리다 지쳐 모두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깨어있지는 않았던 것이죠. 다른 점이라면 준비한 기름의 양의 많고 적음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라’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가 된다는 것은 뭔가 어색합니다.
이를테면 슬기로운 처녀도 잠을 참아가면서 기다린 이들이라 신랑이 오는 시간에 맞아들였다고 한다면 ‘깨어 있으라’가 맞겠지만 그들은 마찬가지로 곯아 떨어졌단 말이죠. 신랑이 온다는 소식에 놀라 깨어났을 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기름이 충분해서 신랑이 오는 길을 밝힐 수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무엇보다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똑같이 자고 있었는데 누구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누구에게는 문이 닫혀 버린다는 것은 잠을 안자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 행위가 깨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깨어 있음은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신랑이 들이닥치더니 기름이 충분한 처녀만을 선택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문을 잠근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위해서,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삶, 그것이 기름을 준비한 삶이 됩니다. 실수하고 실패하는 모습이 나올지라도, 곧 잠자는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온 관심과 신경이 온통 신랑에게 향해 있는 것 그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우리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기름이 충분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끊임없이 당신 것으로 삼으시더니만 드디어는 혼인 잔치로 끌고 가신다는 선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된 이들이라는 것이고, 이렇게 선택된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놓지 않으시고 기어이 붙드셔서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하리라는 약속해주는 것이죠. 그 약속 앞에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4,4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신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 때문이라고. 포인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라는 것이죠. 내가 예상하는 시간, 내가 계획하는 때, 내가 감안하고 있는 시간과 주님이 섭리하시고 나를 찾으시는 시간에는 분명히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차가운 겨울이 계속되지 않고 꽃바람 부는 봄이 온다는 확신이 겨울을 견디게 하죠.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도 처서 지나면 꺽이더라는 경험이 가을을 준비하게 합니다. 반면 갑자기 치러지는 시험은요? 평소에도 준비가 잘 된 사람마저 당황하게 하죠.
그런데요 소설을 읽을 때,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그 다음 장면이 내가 생각한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그때는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극적인 내러티브를 즐기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대로 이야기가 풀려지면 그 이야기는 별로 재미 없습니다. 예측을 넘어서고 파괴할 때 멋진 작품이 되는 법이죠.
우리 삶도 그렇죠. 부르심의 삶은 더욱 그렇죠.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다음에는 어떤 소임을 맡아 이러저러한 일을 하겠구나. 연중시기 끝나가니 곧 대림시기겠구나. 그런데 문제는 예측되는 대로만 펼쳐지게 되면 적응이 되고 성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고 뻔해진다는 것이죠. 소임 몇 년 하고 나면 사제생활은 다 그런거야. 수도생활은 그런거야 하면서 타성이 붙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 삶을 크고 작게 흔들어서 그 타성을 깨시는 것입니다.
나의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 상황과 환경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오시기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순간에 가시기도 하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오라시면 오고 가라시면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게 하십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마태 23,27)
‘너희는 회칠한 무덤같다.’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름에 대한 지적입니다. 겉은 번지르하다. 그런데 안은요. 썩어가고 있다. 내면이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나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더 열심히 더 진지하게, 비교할 수 없게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무덤은 무덤이지 그 무덤이 아무리 명당 자리에 있고 최고의 명품으로 장식하고 꾸며놓아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모르게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은 아시는 것이죠. 그리고 자기도 알고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허언증이라고 있쟎아요. 허구로 말하고 진짜로 자기도 믿는 것 말입니다. 거짓말인데 이것이 진짜 자기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이죠. 난 이러 이러한 사람이야. 난 거룩한 사람이야. 난 능력있는 사람이야. 난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야. 그런데 원래 아니란 말이에요. 한번 두 번 하다보니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인줄 확실하게 믿어요. 공상이 거짓이 가짜가 실제와 참과 진짜를 완전히 가리는 것, 허언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질병이죠.
안과 바깥이 다른 삶을 살게 되면 어떤 증세가 생기는가요. 일단 불안해집니다. 들통나게 될까봐 그렇죠. 이거 실제를 알게 되면 절대 안되는데, 내 원래 모습이 드러나면 절대 안되는데 그러니까 더 꾸미는데 보여지는 것에 몰두합니다. 악순환입니다. 겉에만 몰두하니까 더 안쪽은 형편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더 기를 쓰고 안의 모습을 감추어야 해요.
그래서 너무 근사해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뭘 모르는 것이죠. 사람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로마서 3장 10-12,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곧 인간은 다 율법 아래 죄인의 존재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실체를 인정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건강 상태가 안좋아요. 소화도 안되고 변비에, 혈관도 막히고 엉망이에요. 그런데 그걸 감추려고 아무리 샵에 가서 머리하고 메이크업 두껍게 하고 필러 보톡스 맞아도 소용없습니다. 삼시세끼 균형있게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맘 편안히 먹고 스트레스 안받고, 병원에 가면 늘 듣는 이야기이고 기본입니다. 건강은 엉망인데 아무리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바깥은 그렇게 돌보면서 안은 안 돌보는 것은 뭔가 본말이 전도된 것이에요. 겉꾸밈, 위선은 바깥에 몰두하는 것은 다 어디서 나오느냐. 안이 자신이 없어요. 옷매무새는 다듬으면서 내면은 돌보지 않는 불균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속사람을 보신다, 중심을 보신다고 합니다. 네가 어떻게 얼굴 꾸몄는지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 앙심과 저주와 불평을 품어서 독기 어린 얼굴이 되고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면 열심히 우리가 무덤에 회칠하고 있는 것입니다.…더보기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마르 6,18)
한명은 ‘옳음’의 대명사인 요한 세례자입니다. 굽은 길을 곧게 펴는 예언자였어요.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 헤로데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옳음입니다. 다른 한명 헤로데는 어떠하냐. 그는 ‘오름’의 대명사입니다. 올라가는, 오르다 할 때의 오름이죠. 높아지려고 하는 것, 올라서서 남에게 위세를 부리려 하는 오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옳음과 오름의 충돌합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옳은 말, 옳은 행동을 증언하고 살아가는 이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기 힘을 틀어쥐고 권좌를 차지하고자 오르려 하는 사람, 그 충돌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거의 대부분 옳음이 패배합니다. 옳음은 옳지만 무력하죠. 오름은 비열하지만 권력을 쥐고 있죠. 역사의 비극이 그런 것입니다. 옳음이 승리하고 오름이 패배해야 정의로운 것인데 이 정의가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더란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입니다.
생명을 뺏은 이는 생명을 뺏긴 이에게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진실을 밝혀주고 패한 이의 옳음을 기억해준다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의인의 죽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헤로데와 요한 누가 최종적 승리자인가. 박해자와 순교자가 누가 최종적 승리자인가. 역사는 누구를 승리자로 기억하며 살아있게 만드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정의 유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로마에 빌붙으면 자신의 자리가 보존 가능하고 줄 잘서면 수월하고 화려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을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넘어서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 믿음이란 그런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그릇된 힘에 굴종하지 않은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교회 안에 계속 기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패배의 사건, 소멸의 사건이 사실은 승리와 영광이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간직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 23,13-14)
‘악표양’이란 말은 거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만 전용되는 말로 보입니다. 뭔가 모범적이지 못한 그래서 다른 이들의 수군거림을 야기할 행동을 할 때 쓰이지요. 반면에 ‘선표양’이라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악표양은 규범에 어긋나거나 범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런 행동 모두에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악표양은 믿는 사람들, 신자들, 성직자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는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들의 행동으로 제한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똑같이 부정행위를 했더라도 믿지 않는 이의 부정행위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지는 반면, 믿는 이의 부정행위는 더 많은 비난과 질타를 받게 되는 그야말로 악표양이 되는 것이죠. ‘믿는 사람이 왜 그래!’ 그런 평가는 그의 인격과 태도에만 관련되지 않고 그의 신앙 전반에 대한 평가인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악표양이 되어 하느님과 복음으로 나가는 길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에게 있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그런 악표양의 대명사였습니다.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자’인 것이죠.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섬기고 열심하고 주님의 법에 정통하며 철저한 삶을 산다고 자부했고 또 남들로부터도 인정받았건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뭣이 중한지’도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남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내로남불’의 신앙인들이었던 것이죠.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영향력과 권위가 지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향력과 권위 앞에서 사람들은 침묵했지만 그러나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말만 번지르르한 이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작자들’이고, ‘하느님과 그 법을 이용해 먹고 사는데 능숙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서서히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아주 정당하게 말이죠. 그런 이들을 내세우는 하느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 아니었던 것이죠.
가톨릭 신자가 한국에서는 열에 하나 정도입니다.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니 직장이나 학교, 지역 사회, 친구들 모임, 동호회 등등에서 가톨릭 신자인 나는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파견된 대표선수 격이지요. 아마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톨릭 교회와 그 신앙, 하느님에 대해 평가하며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릴 수도 있고 하느님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나의 표정 하나, 건네는 말투, 일처리의 성실함,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등등 그 모든 것이 나를 평가하게 만들고 나아가 내가 믿는, 내가 속한 하느님과 교회도 평가하게 만들겠지요. 악표양이 되지 않은 것, 그것은 선교의 최소한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5-17)
이스라엘 최북단, 이방인의 도시 카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성도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수님 활동의 중심지 가파르나움도 아닌 하필이면 카이사리아였습니다. 황제(카이사르)에게 헌정된 도시에서 절정의 신앙 고백이 바쳐지고 그 고백 위에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매고 푸는 권한, 우리가 수위권이라고 부르는 그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교회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울타리와 경계를 넘어서 불신의 세상 한 가운데 세워지리라는 상징적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믿어야할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에 의지하라는 유혹이 넘쳐나건만 불신이 난무하는 그 상황 속에 이루어진 고백이라면 그 가치와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그동안 들어온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니, 그동안 지켜본 예수님의 행적을 보니, 그동안 함께했던 예수님과의 시간을 보니 이제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이죠. 당신 안에 하느님이 온전히 계시다는 사실 앞에 무릎 꿇겠노라고 말이죠. 하여 카이사리아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그동안의 모든 경험이 다 쌓여 있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백을 수락하시면서 베드로의 고백이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도하셔서 그렇게 고백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고백의 주체가 베드로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고백하게끔 하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다가 아니라 믿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처럼 말이죠. 신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에 ‘주부적’(注賦的)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부어 넣어주었다’, 곧 자체적으로 생성되지 않고 외부에서, 하느님에게서 유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그렇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고 하신 말씀이 같은 맥락이죠. 그렇게 믿음을 선물로, 당신이 주도하여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백(告白)을 이렇게 풀기도 하더군요. ‘고(GO)’, 그리고 ‘백(BACK)’. 앞으로 나가는 것과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이 두 방향성이 있어야 고백이랍니다. 세상 속으로 전진하되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올 때 우리의 믿음이 드러난답니다. 불신의 도시 카이사리아에서의 고백이 우리가 사는 이 불신의 세상 속에서 펼쳐지도록 앞으로 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청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12)
로버트 그린리프가 1970년대 제창한 리더십 개념인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카리스마와 권력으로 조직을 이끄는 전통적 리더십 개념에 일대 혁신을 일으킵니다. 상명 하복과, 생산성, 경쟁, 일의 결과를 중시하던 전통적 리더십과 달리 과제가 아니라 사람, 존중과 관심, 공동선, 상호 관계 등을 우위에 둔 리더십이 경영과 조직 운영의 측면에서 더 효율적일 뿐 아니라 지속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복음은 바로 이 섬김의 리더십의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는 혁명적 선언이 그것입니다.
사회 각 분야의 갑질의 폐해와 실상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갑질은 인간에 대한 무례입니다. 군림하고 짓밟고 정복하고 내 욕구를 관철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 갑질입니다. 걸핏하면 위계질서를 따지고 나이와 지위를 이용하여 너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갑질을 일상화시키기도 하지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섬김은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는 것이죠. 발을 씻어주시는 최후 만찬의 장면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그분에게 섬김은 낮음의 표시가 아니라 최고로 존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섬기면서 자존심이 다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섬김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갑질’은 자신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되겠습니다. 나보다 더 낮은 사람은 없다는 그 겸손함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밝고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 36-39)
복음의 기준으로 보면 하느님 안 믿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불신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망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느님을 믿은 다음에는 사랑 없음이 가장 큰 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없는 행동과 삶이라면 그것이 가장 큰 죄, 곧 외면의 죄라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학자가 던진 질문,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이웃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인데 첫째와 둘째의 이 사랑이 실은 동등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없음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하느님께 속하고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요한1서는 단언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5,7-8)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 다음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면 사랑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심판의 기준은 단 하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있느냐의 여부죠. 지극히 작은 이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리고 부활 이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즉시 당부하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라.’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섬기는 것이 연결된다는 것이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깊이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섬김으로 나아간다면 우리의 사랑이 완성되는 날이 다가오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1,48)
바르톨로메오란 이름은 히브리식 작명입니다. 공관복음의 사도 명단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이는 톨로메오의 아들(바르), 그의 가계를 알려주는 이름이죠. 사도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 시몬 바르요나를 생각하면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를 동일 인물로 간주한 교회 전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는 ‘귀한 아들’이란 뜻이라하고 나타나엘는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께서 주셨다’라는 의미라고 하니, 톨로메오의 아들인 나타나엘, 오늘 기리는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아들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긴 이름입니다. 아마 그 집안에 어렵게 어렵게 얻은 그런 자손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여하튼 그는 필립보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사실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만난 것이 분명하죠.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반문합니다. 참 메시아는 다윗고을 출신이라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베틀레헴 출신이어야 했죠.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를 만나셔서 참 이스라엘사람이라고 거짓없는 자라고 극찬을 하시죠. 이상하쟎아요. 나타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본심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거짓이 하나도 없는 사람!! 분명 과한 칭찬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무 아래 그가 있었다는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거기는 뭐하는 곳입니까? 율법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은 찾고 있던 사람이죠. 무화과 나무 아래서 하느님의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주의 말씀을 반추하고 곱씹고... 그러니까 비록 예수님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 의구심은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눈에 나타나엘은 가능성이 넘쳤습니다. 그 정도 열심이라면 그 정도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찾는 사람이라면 제자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죠.
분명 부르심 받기 전에 나타나엘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하고 세상이 가진 편견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서 묵상하고 성경을 읽던 그런 열심에 방향만 제대로 잡히면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무엇인가 하는 사람을 세상은 감당치 못합니다. 처음에는 신통치 않아도 결국 그 열심함 부지런함 성실함은 제 궤도를 찾아 가도록 하는 동력인 것이죠. 오늘 하루 시작하면서 부지런히 성실하게 이 시간을 봉헌하면 주님이 무어라 하실 것인가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알고 있다. 그럼 된 것 아닌가요. 昢凉 神父… 더보기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마태 20,14)
어느 포도원 주인이 하루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주기로 하고, 이른 아침에 장터(아고라), 곧 인력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한데 이들이 일하고 있는 사이에, 9시쯤 주인은 다시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꾼들을 더 데려오고, 그러더니 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심지어 5시에도 또 데려온다는 것입니다. 참 무계획적인 고용이다 싶습니다.
하루가 저물고 드디어 정산할 시간이 됩니다. 주인은 5시에 와서 일한 일꾼들부터 차례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내심 좀 더 받겠거니 기대에 부풀어 있었겠지요. 한데 야속하게도 주인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지불하죠. 부아가 치밀어 오른 이들이 항의합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투덜거리며 따지죠. 그러자 주인이 타이르기를, 당신들도 애초에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지 않았는가, 약속대로 주었는데 뭐가 잘못인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한 것이 그리도 비위에 거슬리는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산업 혁명에 성공한 영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산업 혁명의 성공의 결과만큼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사람이 더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회는 이 문제에 책임지기는커녕,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돌리는 비겁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영감을 받아 대안 경제학을 제시하였고,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발간합니다.
러스킨은 이웃이 이웃이 가난 속에 방치되어 있는데도 자신의 이윤추구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근대경제학을 ‘암흑의 학문’이라 질타하면서, 이 불의한 경제를 구원하는 길에 도덕과 영성이 필요한데, 이것은 포도원 주인이 보여준 대로 ‘자진해서 손해 보기’를 기쁘게 감내하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지를 알려주고 있고 그 주인이신 하느님의 관대함을 전하는데 일차적 초점이 있습니다만, 또한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하는 경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알려줍니다. 昢凉 神父… 더보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태 19,24-26)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돌아간 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술렁거렸습니다. 부자는 복받은 자라고 하는 당시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부자의 구원 불가능성에 대한 말씀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자도 되고 싶고 구원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말씀을 해석하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견해! 성경이 전해지는 과정에 오류가 있지 않을까? 하여 사실 낙타(kamelos)가 아니라 원래는 밧줄(kamilos)라고 말씀하셨다는 해석이 등장합니다. 밧줄이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을 잘못 알아듣고 스펠링을 잠시 착각하여 낙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낙타보다는 밧줄이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할 수 있으니까요.
또 다른 의견도 제출됩니다. 바늘구멍이 옷을 꿰맬 때 쓰는 그 바늘구멍(바늘귀)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중에 ‘바늘구멍’이라는 문이 있었다는 것이죠. 광화문같은 큰 성문이 아니라 아주 좁은 문인데 여기를 통과하려면 낙타가 짐을 다 내려놓고 굽혀서 통과해야 했다는 것이죠. 이 모든 해석은 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고 싶은 다시 말하면 나는 부자도 되고 싶고 하느님 나라도 가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 안쓰러운 시도입니다.
부자여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그럼 가난하다고 가능한 것이냐? 역시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되어서 혹은 무엇을 해서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일하심과 선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죠. 우리 쪽에서의 불가능성에 대해 인정할수록 하느님으로부터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커져 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던지는 질문, 또 우리도 궁금해하는 질문이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누가 구원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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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사순 제4주일 주보입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ㄴ-34)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전부를 쏟아 붓는다.’ 근사한 말입니다만 그저 근사한 말에 그치곤 합니다. 아침을 일깨우며 기도로 시작합니다. 과연 마음을 다했을까요? 여전히 숱한 분심 속에서 기계적으로 바친 기도이기도 했음을 저는 압니다. 순교자의 후예라고 하면서 마치 교회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 바칠 각오가 되있는 듯 그렇게 떠벌이지만 조금의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근성은 얼마나 질긴지 모릅니다. 내 모든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어떤 시간만 하느님께, 그것도 가능한 적게 드리고 나머지는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니 정신(생각)의 이런 분산으로 감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힘들다, 어렵다, 피곤하다를 연발하면서 지내는 모양새는 하느님을 위해 내 힘을 다했노라기엔 민망한 노릇입니다. 첫째 가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함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하여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여 과연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내가 가상으로 지어낸 하느님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마음의 혼란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노하우는 가졌다는 것이죠. 내가 하느님을 고작 요정도 사랑한다는 것을 신자들이 안다면 아마 아무도 내가 집전하는 미사에는 오지 않을 터인데 신자들이 모르니 참 다행이다-이것이 면피성 위로가 되는 셈이죠.
한때는 마치 하느님을 사랑하고 게다가 하느님만을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이나 착각하던 때도 있었읍니다만 이제는 ‘난 하느님을 사랑하고 말고’ 그렇게 말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음을 압니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한다면 왜 이 모양이지’를 거듭하면서 정직하게 알게 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보여지는 나’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혹은 사랑한다고 보여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은 구분됩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바쳐지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바쳐지는 기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죠.
‘내 몸처럼 이웃(가족, 친구, 신자, 교회 구성원 등)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사랑에서 이탈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면서(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쓰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래서 남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자부심) 그것을 사랑이라고 우기고 있는 격입니다.
전부 다 쏟아붓는 사랑은 애초에 글러 먹은 비관적 사태가 아닐까 의심이 자꾸 듭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내 사랑의 한계가 폭로되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신 주님의 말씀 앞에 선뜻 그렇게 하고 있다고 혹은 그렇게 하겠노라 하지 못하는 못난 모습이 드러납니다.…더보기
루카11,14-23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복음을 보면서 이 노래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동지의 약속’이란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그냥 부르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오른손을 불끈 쥐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독재정권에 맞서서 젊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며 부르는 노래였고 생존을 위해 노동 현장을 사수하는 노동자들이 목청이 쉬도록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죠. 흩어져도 흔들려도 안되고 대동단결할 때만 강력한 상대와 맞설 수 있다는 것을 고무하면서 말입니다.
벙어리 마귀 축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일이 베엘제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일어난 일이라고 예수님을 매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예수 저자는 마귀와 한패가 아니냐는 모함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반박하시죠.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지는 법인데 사탄이 서로 갈라서지 않고서야 이런 일들이 있겠냐고 예수님이 맹공을 퍼부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느님의 손가락,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제압하시는 것으로 이는 하느님 나라가 이리 도래하였다는 표지가 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 전선에서 중립의 자리,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사탄의 편이 되던지 그리스도의 편이 되던지 양단간 결정하라!!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은 반대하는 이들, 흩어버리는 이들이 된다고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귀신같이 안다’ 그러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이 정말 잘 알고 있다는 것!!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공략해야 하는지 언제가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시간인지, 귀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많은 영혼을 생명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치밀한 작업을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악한 영, 사탄, 어두운 힘, 지옥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관심도 별로 없고 그런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미신적이라고 치부하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사탄과의 영적 전쟁 이런 이야기는 별로 안하는 추세입니다. 또 그 이유는? 신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것은 사탄의 놀라운 계략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탄 마귀를 말씀하시고 대적하셨다면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그런데 마귀와의 대적은 완전히 무장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서로 뺏고 뺏기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지킬 때만 안전하고, 더 힘센 자의 침입이 올 때 무장해제되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더 철저하게 결합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교구 안에 본당 안에 수도 공동체 안에 이런 저런 견해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차이들이 논의되고 수렴된 뒤에는 결정된 바에 대한 완전한 복종, 순명이 필요합니다. 치열하게 싸우고 논쟁하여 이루어진 의견을 다 함께 고수해주는 것, 싸움에는 그렇게 임해야 하죠. ‘흩어져도 흔들려도 죽는다!!’ 그 노래로 그 강력한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듯 주님도 당신 편에 서서 사탄과 흑암의 세력에 대해 맞서는 교회와 신앙의 자녀들이 갈라지지 않도록 하나로 모으시는 것입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7-19)
예수님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당시 그 누구와도 다르게 가르쳤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도대체 저 가르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율법과 문자에 갇혀있는 고답적인 신학을 예수님은 걷어냈습니다. 관습과 전통의 굴레에 묶여있는 삶의 실천들도 다 치워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달랐던 것입니다. 기존의 것들이 그분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분은 신선하면서도 위험한 분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율법에 갇혀있던 고루한 이들과 다르셨고 성전 체제에 기생하던 이들과도 다르셨습니다. 주님께는 통념이란 없으셨습니다. 그 강고하던 남자와 여자, 유다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의 엄격한 구분은 예수님께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어린이도, 죄로 간주되는 병에 걸린 이들도, 심지어 마귀들린 이들도 곁에 두셨습니다. 온갖 죄인을 다 품으셨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율밥과 예언서와 옛 계약과 아무 상관없는 돌출적인 분이셨을까요? 실상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없는데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고 그분의 창조는 바로 그러한 것이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그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니다. 예수님은 다른 분이셨지만 모든 과거와 단절하신 분은 아니었고 언제나 과거의 토대하에서 시작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천지가 사라지기 전, 곧 종말 이전에 하느님 말씀이, 율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리라’ 확신하신 것입니다. 온고지신의 자세, 옛것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중, 곳간에서 새 것과 헌 것을 다 꺼내어 쓴다는 비유가 그러합니다.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그냥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더라도 물려받은 것을 통해 일하는 것이고 주신 것을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옷 잘입는 패션 감각이 남다른 이들이라고 매번 철마다 새 옷을 사지는 않겠지요. 진정한 패셔니스타는 코디의 달인입니다. 그저 옷장 안에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던 것들이 그의 감각을 통과하면 멋진 아이템이 됩니다. 있는 것으로 승부하는 것이죠. 본당에 신부님이 새로 부임하면 몇 달동안 있던 것을 다 없애는 것을 종종 봅니다. 전임자 지우기입니다. 세상의 다른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일입니다. 정치권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도, 세상의 실력도 이미 있는 것, 해본 것 가운데서 괜찮은 것과 쓸만한 것과 효과 있던 것을 다시 재점검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새로움이 좋다고 하여 지난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뭉게고 시작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남은 철저한 단절이 필요하지만 나머지 인생 살이는 과거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습니다. 실은 당신이 걸어온 길이 당신의 미래이기도 하니까요.
집이 낡고 동네가 오래되어 불편이 이만 저만 아닐 때, 싹 다 밀어내고 최신 공법으로 재건축할 수 있지만 더러는 적당히 고쳐가면서 세월을 품어가면서 사는 것도 품위 있는 일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하지 않고 지난 체험 안에 해답이 있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살피는 것도 지혜로운 일상일 터이지요.…더보기
마태 18,21-35
많은 사람들이 용서에 대해 ‘내가 이번에는 참는다. 그러나, 다음에 또 같은 잘못을 하면, 용서 못한다.’면서 용서의 한계를 정합니다. 나쁘진 않지만 용서가 아니라 실은 이는 다만 ‘자기 화의 폭발’을 다음으로 연장하거나 유예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또다시 잘못할 것입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죠. 베드로의 일곱 번 용서 뒤에는 여덟 번째 단죄가 있던 것이죠.
어떤 임금에게 일만 탈렌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일 탈렌트만 해도 보통 노동자의 20년 품삯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 정부에서 징수한 조세의 총액이 약 800탈렌트 정도 되었다고 하니 이것의 12배가 넘는 일 만 탈렌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달러로 환산하면, 대충 30억불이 넘는 큰 금액입니다. 일만 탈렌트의 빚은 보통 사람의 경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입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큰 빚인데 그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엄청난 빚을 전부 탕감하여 줍니다. 해서 그 종은 그 엄청난 빚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기서 ‘빚’이라고 함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죄’입니다. 빚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펠레이 (ὀφειλὴ)는 ‘의무’의 뜻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죄(罪)를 빚이란 말로 표현하셨나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행치 아니하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으며 하느님을 사랑치도 아니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왔습니다. 죄인이 판관을 두려워하듯이, 빚진 자는 빚을 준 자를 무서워하고 피합니다.
또 많은 죄들이 돈과 연루하여 일어납니다. 또한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죄는 채무나 의무의 불이행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하느님에 대한 모든 채무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전부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빚 곧 죄를 탕감하여 주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가 우리의 죄를 탕감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빚 또는 죄를 다 탕감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죄의 빚을 용서하여 주심으로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 빚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이들, 이방인들에게도 갚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갚을 길 없는 빚을 하느님께로부터 탕감 받았는데 일만 탈렌트 빚을 탕감 받은 종과 같이 그저 적은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의 빚 또는 잘못에 대하여 따지일만 탈렌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빚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고,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아내야 하는 부르심 앞에 서게 됩니다.
그 하나는 ‘용서 받은 사람의 삶’이니 용서 받은 사람의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용서 받았으면, 이제 용서를 자꾸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죠. 하느님이 나한테 거저 용서를 주셨는데, 내가 이 세상 사람들하고 원수를 맺으면 되겠느냐 이 말이다. 용서해야 우리가 이미 거저 받은 용서가 유지됩니다. 우리가 형제의 작은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 갚을 것을 호통치는 꼴이니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미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더보기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인 카파르나움에 들르셨을 때 사람들은 이적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다른 곳에서 보였다는 치유와 구마의 능력에 대하여 익히 들은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냉담하셨고 오히려 그들의 부아를 돋구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바로 구약의 두 사례, 곧 엘리야 시절에 시돈 지방 사렙타의 한 과부에게만 내린 하느님의 돌보심과 엘리사 예언자 때에 시리아 사람으로 나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혜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는 닫혀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화가 치밀어 주님을 벼랑끝까지 몰고가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선택된 민족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은혜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유대교적인 신앙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런 배타성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심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보여지지요. 생존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해 안가는게 아니긴 합니다. 또 민족종교로서 출발했기에 곧 민족 전체의 운명을 자신들의 신과 동일시 하였다는 것에서 이런 배타성이 유래하였던 정황일 수 있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부족적이고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선 분이셨던 것이지요. 애초에 그분께는 그런 제한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시공간을 넘어서시는 하느님께서 혈연에 얽매이실 이유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국수주의적 신앙이랄까 배타적 신관이랄까 하는 영향들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아만 이야기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를 일부러 끄집어 내셔서 유대인들의 부아를 돋구시는 것은 바로 그같은 편협함을 뒤흔드시기 위함이지요. 하느님은 편드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거죠. 유대인 편이 아니시죠.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 편이 아니시라는 거죠. 대대손손 하느님을 섬겨왔다는 것이 구원의 자동통로로 연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거죠. 어쩌면 교회의 편만도 아니시라는 거죠. 차별적이지 않은 사랑, 인간적인 배경에 제약받지 않으시는 사랑이 하느님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만의 하느님도 아니시고, 세례받은 이들만의 하느님도 아니시고, 그리스도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이들만의 하느님 아니시고....모든 만물과 생명, 온 우주 천지 만물의 하느님이시다...뭐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독점권의 파기,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드신 예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다름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입니다. 은혜 받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받을 자격이 없으면 됩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없음을 자랑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격없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더보기
요한 2,13-25
성소국에서 일할 때 주일이 고민입니다. 어디서 미사드리나? 사제가 ‘주일 미사 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해 성사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주일에 혼자 미사 지내는 것도 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그렇게 할 수도 없고 혼자 1, 2독서 복음까지 다 봉독하고, 혼자에게 강론하고-어색하죠.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창들 본당에 순회 방문 미사를 가자! 이것들이 본당에서 잘하고 있나, 감시도 하고 잔소리할 겸. 물론 간다고 말하지 않고 불시에 갔습니다. 오늘은 이 본당, 다음 주는 저 본당으로 출몰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소문이 좀 났습니다. ‘남신부가 갑자기 미사오니 주의하고 깨어 있어라’ 뭐 그런 것이죠.
저는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어라, 저것봐라. 미사 준비 안하고 있네’ 미사 전 준비 부족! ‘저것 봐라. 오늘 강론에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구만.’ 강론 내용 부실 낙제! ‘강론은 그렇게 대충하더니 공지 사항은 무지하게 길게 잔소리를 하네.’ 사제적 덕목 C! 뭐 이런 식입니다. 친구라고 봐주는 법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사목하는 본당에 가면 제일 먼저 신속하게 절대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물색합니다. 기둥 뒤나 구석 자리를 잡고 고개를 좀 숙이고 있어야 합니다. 들키면 곤란합니다. 거의 눈치채지 못했는데 딱 한 번, 눈이 마주쳤습니다. 복음을 읽던 모 신부가 하필 저와 눈이 마주친 것이죠. 주춤 하더니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고 허둥거리더군요. 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왕 알아본 김에 빙그레 웃으며 주시했습니다. 동창이 강론 끝무렵에 그러더군요. ‘여러분, 지금 이 미사에 유다가 한 명 숨어 있습니다.’ 그러더니 ‘그 유다가 얼마나 봉헌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졸지에 유다가 된 저는 예물 봉헌하며 삼 만원을 꺼내어 봉헌 바구니 앞에서 그 친구를 향해 펴들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설렁탕이나 먹자는 녀석에게 우겨서 꽃등심을 먹고 싶다 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성전 의식을 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는 예언자적 행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 불충으로 단죄되었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성전 예배의 타락상은 하느님께 대한 예배가 사람들의 이권에 의해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사칭한 장사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죠. 순례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성전 앞 마당에서 제물로 드릴 가축을 파는 대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일년에 양만 하더라도 30만 마리가 봉헌되었답니다. 그를 둘러싸고 온갖 로비가 다 벌어집니다. 좋은 몫을 차지하기 위한 상인들의 암투와 거래, 로비. 담당 사제들에게 사과 박스에 담긴 현금이 배달되고 때마다 봉투가 오고 가고 그랬다는 것이죠. 환전상들은 공식 환율보다 턱없는 계산으로 한 몫 두둑하게 챙기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가장한 타락과 부당한 부의 축적,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 이런 것들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분노는 돈벌이 수단이 된 예배를 종식시키고 이제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질 새 성전, 당신의 몸을 새 성전으로 삼아 새로운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제는 당시에도 돈입니다. 사람이 모이니 돈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투명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들은 하느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바치는데 실상 하느님이 아니라 성전을 이권의 장으로 여긴 이들의 주머니를 채우고 말았던 것이죠.
가톨릭 신자들의 여섯 가지 의무 중에 교회 재정을 부담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무 못지 않게 중시 되어야 할 것은 교회 재정의 합당한 집행이겠지요. 성전 예배의 타락이 보여주고 중세 교회의 축적된 부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추문이 된 것을 반면 교사 삼아서 말입니다. 봉헌의 순수함도 필요하지만 봉헌된 재물을 사용하는 이들도 순수한 지향을 가져야 합니다. 이래저래 돈으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더욱 깨어 지켜야합니다.…더보기
루카 15,1-3.11ㄴ-32
원래 둘째는 그렇다 칠 수 있죠. 흠이 있긴 하지만, 둘째니까 막내니까 접어 둘 수 있어요.
맏이는 어떻습니까? 집안의 기둥이죠. 부모 마음을 그래도 잘 헤아리는 속깊은 자식이 맏이, 맏딸 맏아들이에요. 동생들도 건사하고 그러는 겁니다. 집안 걱정 제일 많이 하는 겁니다. 맏이의 책임감이 그래서 막중하고 스트레스도 많을 수 있어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보통 둘째가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그리고 그 타락한 삶에서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는데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만, 오늘은 이 복음을 맏아들에 중점을 두어 보기로 하죠.
사실 잃어버린 것은 둘째 아들만이 아니었죠. 집떠나 방황하던 동생이 둘째가 돌아온 것입니다. 냉담자가 회두한 것이죠. 그것도 쉽진 않지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실상 문제는 맏이에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 곁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동반했을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는 오히려 둘째보다 더 멀리 있었던 겁니다.
냉담자 중 다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신앙생활을 쉬고 있지만 언제든 돌아가야지 돌아갈꺼야 내가 갈 곳이 있어- 이렇거든요. 그러니 시간의 문제지 결국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죠.
큰아들은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여러ㅍ해 동안 철들고 나서 계속 열심히 아버지를 섬겼죠 아버지 말씀을 떠받들었겠죠.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노라고, 아버지 당신의 것이 다 큰아들 맏이인데 니 것이 아니냐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큰 녀석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 적이 없던 거죠. 열심히 했지만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억지로 그런거죠. 섭섭함도 있었어요. 염소 새끼 한 마리 안주시는 아버지께 대한 화가 치밀었습니다.
신앙 생활, 사제 생활, 수도 생활 열심히 한 것입니다. 정말 손발이 닳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속마음은 건조하기 이를데 없어요. 그냥 하는거에요. 신나서 하는게 아니라 해야하니까 마지못해 한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니까 돌아갈 곳도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 둘째가 먼 고장에서부터 다시 돌아온 것보다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마음을 읽는 것이 더더 어려운 것이죠.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냉담자가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쉬울 수 있을 터인데 열심하다는 이가 아버지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이 비유의 청중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가까이 하자 탐탁치 않아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잃은 자들을 다시 찾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은 거룩한 자신들이 절대로 상종못할 부류였습니다. 아버지를 섬긴다고 했지만 그 열심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었을 따름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맏아들-변질된 타성에 젖어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서 돌아서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이해도, 동생에 대한 사랑과 포용도 없으면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 사실이 큰아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제일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을 어겨놓고,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놓치면 다 놓친 것이다. 맏아들은 염소 새끼를 바라고 일한 것입니까가? 칭찬과 격려가 없으면 일하려 하지 않고 꼭 남들이 봐야 하고 박수받아야만 일합니까? 그저 묵묵히 이름없이 일하면 안되나요? 우리는 매번 인정받으려 한다. 교회에서 상처입었다? 마음 속에 염소 새끼 바라고 있던 사람들이 상처입습니다.
비유는 32절에 끝납니다. 그러나 33절을 써나가야 합니다. 통회와 반성, 그 마음을 몰라드렸다는 회개-33절에 쓰여져야할 내용입니다.…더보기
마태 21,33-43.45-46
주인이 최고의 포도밭을 만들어 시설을 다 갖추어 놓고 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농사 때가 되어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을 죽였습니다. 누구입니까? 구약의 예언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나중에 보다 못해 상속자가 될 실질적 주인인 아들을 보냅니다. 그 아들마저 포도원 밖에서 죽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이 농부들이 소출 바치기를 거절한 탐욕이 동기인가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소출 바치기를 거절하고 포도원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동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성경의 여러 문헌을 동원해서 이해해보면 이들이 소출 바치기를 거절한 것은 이들이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가졌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은 하느님 나라에 걸맞는 열매를 맺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마다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들포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자기 한계에 갇힌 이들이었습니다. 주인의 기대에 부응할 역량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집짓는 이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의 실권자 포도원의 농부같은 이들이죠. 이들이 버린돌이 있답니다. 바로 예수님이죠. 이돌을 왜 버렸을까요?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달리 머릿돌부터 집을 지어나갑니다. 보통 우리는 공사의 맨 끝에 머릿돌을 두죠.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소서 2,20-21)
유다인들은 머릿돌에서부터 건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돌이 누가 버린 돌이라구요. 집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란 말이죠. 왜 이 돌을 버렸을까요? 이 돌은 자기들이 머릿속에 이해하고 설계한 집과는 안맞는 돌이었던 것이죠. 이 돌은 이 집과는 깔맞춤이 안되는 것이죠. 종교 지도자들이 이해한 신앙과 윤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것과는 너무 달랐던 것이죠.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바로 그 내버린 돌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꾸 현대세계의 조류 흐름과 원리를 흉내낼 때가 있습니다. 효율 합리성, 경쟁, 최신 유행을 어쭙잖게 따라합니다. 그런 것들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누구와도 맞지 않을 수 있는 그 복음, 주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과 그 복음을 가르칠 때만 교회는 교회인 것이죠. 세상을 흉내내는 것은 교회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이죠. 세상보다 더 비교우위에 놓이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갈 때 교회인 것입니다. 집짓는 이들, 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짓는 집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버립니다. 죽입니다.
교회가 왜 십자가에서 시작해야 하느냐? 그 십자가가 바로 내버린 돌의 자리입니다. 밀알이 되고 녹아지고 십자가를 질 때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앙을 좋아하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은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죄송하지만 주목하지 않는 주변에서 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없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런데 세상이 듣기 싫더라도 교회는 매력없는 소리를 해야 합니다. 비위맞추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매일 축복만 이야기하고 만사가 잘 될것이라고 고무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귀에 달콤하게 들리지만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버린 돌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가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더보기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읽고 너무 서둘러 부자는 다 지옥가고 가난한 거지는 모두 천국 간다는 유치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인 것은 맞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규정하는 부자와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이 세상의 재화를 많이 쌓아두고 소유한 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여전히 품은 채 그 ‘나’라는 우상의 유익과 발전과 성공을 위해 사는 모든 존재입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그의 소유의 다소에 관계없이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자를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 복음 살짝 위로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루카 6,13-14)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시자 바리사이들이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비웃음의 원인은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이 ‘나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모든 구제와 선행과 율법 준수가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였다는 것이죠. 그것은 전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인기와 명성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이 부자들의 실체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율법주의자인 바리사이들에게 자기 부인은 불가능하고, 자신 행위의 가능성을 굳게 신뢰하는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뽐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사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비유의 부자는 그런 존재의 대표자입니다.
반면 라자로가 천국에 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라자로의 천국행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라는 실명을 쓰셨습니다. 비유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라자로를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그 라자로죠. 곧 라자로,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의미를 가진 이 이름 하나로 거지 라자로가 천국에 갔음을 설명해내는 것이죠. 그가 천국에 간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다!
이 비유는 부자와 가난한 이의 대결을 부추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내세에서는 운명이 역전된다는 것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 일임을 알려줍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고 우리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고 드러내고 그것으로 구원도 얻을 수 있다는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선 믿음, 곧 하느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더보기
오늘의 복음: 마태 20,17-28
앞날에 보이는 것이 조롱,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죽음이라고 제자들을 불러 주님께서 나직하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단에서는 딴생각이 가득하고 음모와 술수가 난무합니다. 철모르는 모습뿐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도 로비가 있었습니다. 제 한 몸 입신하고자 원칙을 어기고, 남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치맛바람까지 동원됩니다.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뜨리고 혼란하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어미의 지극한 모성을 앞세워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나라가 서고, 왕으로 오시게 될 때 제 아들들에게 한자리씩 얻게 해달라는 청탁입니다. 말이 좋아 인사청탁이지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물을 흐렸다 지탄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다른 제자들이라고 하여 그다지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아뿔사, 한 발 늦었구나. 나도 한 자리 얻었어야 하는데’ 그리하여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며 화를 내었다는 것이죠.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이제껏 불러 함께 하며 가르치고 알려주었건만 당신의 가르침이 스며들지 않는 현실 앞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딴청 피우는 제자들의 민망스러운 모습들 말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내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가 안정을 보장해주고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이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은 그래서 제자들의 변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과 속상함입니다. 그 자리는 남을 끝까지 섬기는 자리이고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자리이고 다른 이들을 위해 몸값을 치르는 자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자리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완전히 오해하고 몰라도 단단히 몰랐던 탓에 그 자리를 타했던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계적 구조를 가집니다. 교황님 아래 엄격한 서열과 일종의 기수라고 할까요-그런 질서들이 물샐틈없이 조직되어 유지됩니다. 사람이 모여 살다보니 이런 저런 직책이 생겨나고 일이 분담됩니다. 모임도 많고 행사도 적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방편인 조직과 직책이 어느틈엔가 권력, 그것도 알량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늘 있습니다. 누구나 선호하는 좋은 본당이 있다고 하고 대부분 기피하는 험한 소임이 있다고 합니다. 끝발좋은 사람은 늘 영전하는 자리로 발령받고 그저 수더분한 사람은 좀 아닌 자리를 늘 메꾼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자리 가기 위한 인맥도 중요해지고 듣자하니 불미스러운 일들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이 뼈저립니다.
교회 안의 모든 봉사, 모든 일의 원칙은 결국 ‘섬김’뿐입니다. 일의 효율성보다도, 매끄러운 처리와 괜찮은 결과보다도, 일방적 지시와 일사분란한 집행보다도 아니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원칙은 ‘섬김’입니다. 오로지 하나의 섬김, 오로지 하나의 헌신, 오로지 하나의 봉헌만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당부는 바로 그런 섬김을 우리 안에서 보고 싶어하는 간절함인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져라는 말씀을 되새길 때 ‘높’자를 뒤집어 봅니다. ‘푹’자가 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이는 푹 꺼질 수 있다. 조심해라, 뭐 그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겠지요.…더보기
오늘 복음: 마태 23,1-12
반그리스도교적 모습이 사회에서 비등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게다가 교회 마저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 않는가 의심스럽기도 하니 참 곤란한 상황입니다. 세상이야 원래 그렇다하여도 교회가 그리고 교회를 이루는 신앙인들이, 무엇보다 사제들이 믿음의 본령을 지키고 삶을 통해 그 믿음이 향기를 알려도 될까 말까인데 드러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도 합니다. 죄송스럽고 얼굴 화끈거리고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다시 보고 속된 자신을 단죄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온전한 믿음을 간직할 때는 호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배타적이고 자신을 과시할 때 논란이 일어나고 배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자기 욕망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 종말적 징조라고 할 정도로 성경은 자기를 드높이려는 욕망을 경계합니다. 현대의 우상숭배는 자기예찬과 자기 만족의 교묘한 형태를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우를 범할 수 있고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 세상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다시 본질에 비추어 다시 겸손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거룩하다고 자처한 이들을 향해 공격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시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타인을 조롱하고 얕잡아 보는 바리사이들, 그 모습이 우리 안에 다시 재현되지 않는지 하는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영적이라고 하는 그 순간 가장 교만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열심히 살아간다고 훌륭하게 믿는다고 내가 자부할 때 타인을 우습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내내 열심히 살았다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실은 저는 자부했습니다. . 시간을 쪼개서 헛되이 안보내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때 공부도 대충해 기도도 헐렁하게 해 그런 동기가 눈에 띄입니다. 마음 속에 어떤 비교의식이 슬그머니 생겨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야, 네 녀석이 시간 지나서 신부가 되면 나는 천사가 되겠다.’ 뭐 그런 마음이죠. 세리를 대하던 바리사이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가 자기 우월감 가지고는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적 은총을 바라보지 않고 나라고 하는 새로운 우상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사실 그리스 로마적 문화에 대해서 대항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분리된 자들로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이들이 오히려 율법을 왜곡하는 이들로 변질되었습니다. 율법이 자기 자랑이 되어 버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되어 버렸던 것이죠.
내가 잘 율법으로 잘 준비되어 있다고 자부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은 단지 나의 완벽함을 확인하는 부차적인 무엇으로 전락한 것이죠. 하느님은 일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잘하고 있기에 일하시는 것뿐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거저 주시는 은총이라고 말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해도 그것은 댓가일 뿐이죠. 내 노력을 알아주신 댓가, 내 위치를 인정해주신 그 댓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려하게 말하는 바리사이의 행태, 높은 자리 선호하는 그 모습을 지독하게 싫어하신 것이죠. 누가 스스로 낮출 수 있습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군요-인정하는 자 그가 진짜 겸손한 자의 자격을 얻습니다.…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6-38)
그야말로 자승자박입니다. 자기 줄로 자기 몸을 옭아맨다는 것이죠.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제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격입니다. 동앗줄이나 체인 같은 것으로 자기를 꽁꽁 묶고서 풀어달라고 한다?- 그렇게 제정신 아닌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있답니다. 자기를 묶습니다. 묶을 때 대충이라도 묶으면 풀기라도 쉬우련만, 매듭을 아주 복잡하게 절대 안풀리게 묶으면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게 됩니다.
열심히 묶었는데 그래놓고 보니 자기 자신이더라는 것입니다 묶을 때는 몰랐습니다. 남인줄 알고 묶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를 묶고 있던 것이라는 이 어리석음.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는 말씀이 그것이죠. ‘너희가 다른 이들을 묶었느냐, 실은 너 자신을 묶은 것이다.’
나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가 심판의 자리로 나가고 있음을, 남들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에 대한 단죄가 바로 그 순간 가중되고 있음을. 용서해 주어라는 말씀은 그래야 너에게도 용서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음을, 주어라는 말씀은 결국은 너도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 의하면 용서라 실은 극히 이기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참된 이기심은 나를 살리고 나를 구원하는 것이라 한다면, 결국 우리가 용서한다 함은 유난히 선한 성품이어서가 타인의 실수와 허물과 죄와 부족함에 대해 관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원래 워낙 선한 나머지 형제 자매의 잘못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공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잘못, 내게 준 상처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저걸 죽여, 살려’ 부글거립니다. 그런데 무섭고 더러워서 혹은 귀찮아서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너그러워졌다면 그것은 자기를 이기는 일이기에 공로가 됩니다.
우리는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승자박이로구나, 아 실은 나를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로구나 절감한다면 심판의 강도가 약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그를 몰아세우다간 안되지, 나도 무결점의 사람은 아닌데 나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때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해 주셔야 할텐데 싶다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昢凉 神父…더보기
오늘의 복음: 마르 9,2-10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거룩한 변모가 일어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대한 때마다 이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특별히 이 셋을 데리고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이 세 제자는 수제자이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오히려 반대죠. 가장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기에 친히 데리시고 예수님이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변하신다는 것이 수동태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변화는 스스로 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변형시켰다고 해야 의미가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 셋은 복음서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언급되고 사건에 개입될 때마다 언제나 선한 쪽으로 개입된 경우가 없어요. 셋만 나왔다하면 항상 문제가 일어나고 시비가 일었어요. 불평불만이 터졌어요. 그 문제적 핵심 인물들이죠. 예수님 입장에서는 제일 안심이 안되는 이들이란 말이죠. 그런 측면에서 특별한 총애를 받은 이를테면 관심제자들이죠. 이 셋이 다른 제자 그룹속에서 제일 먼저 변화가 필요한 대상이었던 것이죠. 이 셋의 공통점은 문제가 많았다는 것 말고도 이 셋은 크기의 논리, 수의 논리, 힘의 논리에 굉장히 찌든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변하지 않고서는 제자단 전체가 변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셋을 데리고 가셔서 변화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높은 산!! 높은 산 가끔 가시쟎아요. 동네 앞산 보다는 더 높은 좀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그런 산. 정상에 올라가면 아래를 보면 아득할 때가 있죠. 저 산 아래 전부 조그마한 점에 불과하죠. 그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고 좀 생긴 이도 있고 덜 생긴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산 위에서 보면 다 점에 불과하죠.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보입니다.
성경에 산이 등장할 때 그것은 높다라는 공간적 개념보다는 사실 하느님과 가깝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초월적 위치에서 보면 아래를 보면 모든 것이 다 점에 불과해요. 롱다리도 점, 숏다리도 점, 잘난 이도 점, 못난 이도 점, 별거 없어요. 드디어 그 높은데 올라가야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미미한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호연지기죠. 그런데 산 아래 풍경은 어떻습니까? 웃기죠. 뭐 좀 가진 것 가지고 대단히 잘난 것 같고 조금 크다고 대단히 위대한 것 같고 또 조금 작다고 굉장히 죽을 것같이 살고. 그러고 삽니다. 서로를 비교하면서 물고 뜯고 젠체하면서 그러고 산단 말이죠. 그것이 산 아래 인간의 풍경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전장이는 가죽을 표백하는 사람이란 말인데요. 옥시크린 엄청 써서 하얗게 선명하게 한 것보다 더 새하얗게 돼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단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마침내 도달해야할 도착지점을 예수님이 미리 보여주시는 계시적 장면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0)
지금 예수님의 옷이 변화되셔서 빛났어요. 이 말은 세 제자, 그리고 장차 이땅에 만들어질 하느님의 공동체 교회, 신앙인들이 무엇을 입으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로 옷입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 13,14)
우리의 옷이 그리스도에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이는 그리스로 옷입으라는 말은 우리 내면의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변화되는 성품과 성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 가치, 우리 기준을 매일 버리고 그리스도 그분으로 매일 옷갈아입듯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복음이 기준이 되고 하느님이 나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오늘의 복음 : 마태 5,43-48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삶에 대해 입을 열어 가르치신 대목을 우리는 산상수훈 혹은 산상설교라고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5장부터 시작됩니다. 이 산상수훈을 보통 그리스도인의 대헌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하는가의 대강을 묶어 놓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큰 줄기는 구약의 계명과 규정들을 예수님이 풀이하고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옛 계명의 새해석이라고 할까요? 유다인들의 삶을 규율해왔던 계명과 규정, 전통과 관습들을 보다 철저화하고 보다 근본화하며 보다 내면화하는 것, 산상수훈은 그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을 살아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완전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말인즉 그만큼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안되는 바람에, 쉽지 않은 까닭에 여전히 고민하고 분투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명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종적 완성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원수 사랑이야말로 그 절정인 것이죠. 그것은 한마디로 하자면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그 말을 내뱉은 자, 나를 휘저어 놓은 자에게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죠. 내 마음이 요동칠 때 그것을 부정적으로 강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죠.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한다는 자연적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적 포용성이 넓어져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실 하느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고 찢어지게 만든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신 분이심을 생각하면 내게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품을 때 우리는 원수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인색함과는 달리 하느님은 넉넉하시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그 넉넉함으로 나를 채우는 것, 그리스도의 헤아릴 길 없는 부요함으로 나를 다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인인 자를 위해 십자가 달리신 분을 우러르면서 자신의 삶도 그렇게 넉넉함 품음을 살도록 부르심 받은 이들인 것이죠.
하느님이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비와 햇볕을 내리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만이 아니라 괴롭히고 박해하고 원수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의 인색함이 나조차도 인색하도록 자꾸 유혹합니다.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너도 잘해. 그것으로 충분해’ 하고 유혹합니다. 그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음씀씀이가 넉넉해지는 것, 그것이 세리와 이방인의 의로움을 넘어서서 완전해지는 길,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넉넉하게 그가 원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상상 그 이상으로 베풀고 다가갈 때 하느님의 완전성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죄인을 품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그 넉넉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오늘 복음: 마태 5,20ㄴ-26
어느 통계를 보니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전에 미디어에서 살인 장면을 평균 8천번 보고 폭력장면을 10만 번 이상 본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폭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하간 때로는 생명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다루는 풍조들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게임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집니다. 그냥 게임 상이니까 큰 문제 없겠지 싶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폭력이 현실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게도 됩니다.
세상 무엇보다도 인간은 비할 데 없이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을 닮은 주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기 때문이죠. 그가 어떻든 무한한 존엄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죠. 이렇게 나도 존귀하지만 다른 이들도 똑같이 존귀하다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살인에 이르지 않는다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죠. 형제에게 성내는 자, 바보라고 하는 자, 욕하는 자는 다 재판에 넘겨지고 심판 앞에 서고 불붙는 지옥에 서게 된다는 말씀. 단순히 과장일까요? 엄포용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윤리적 자세와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내 앞의 상대를 자극해서 격분하게 만드는 것조차도 하느님이 심판의 범주에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라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격모독의 말입니다. 영혼의 살인에 이르는 욕설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기에 그 인격을 모독하는 것은 결국 뭐에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괴롭힙니다. 뒤에서 숙덕거리고 욕합니다. 그가 나의 인격을 모독했으니 말이죠. 나도 똑같이 갚아 주리라. 그런데 똑같은 방식으로는 결국 화해는 너무 요원합니다.
가족 안에 직장 안에 이웃과 함께 공동체 안에 화목과 화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제단에 예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더 먼저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타인과의 온전한 관계 없는 예물은요 그런 기도는 그런 예배는 부적당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화해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완벽한 화해를 이루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어린 녀석들이 싸우면 ‘야, 너 얼른 손 내밀어. 너도 손 내밀어 악수해.’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시킵니다. 물론 아이들은 쭈뼛거리면서 하긴 합니다. 효과가 있을까요? 그럼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사과하려하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꾸 미루다보니 결국은 사과의 타이밍, 화해의 시점을 놓치게 됩니다. 일단 말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하라는 것이에요.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의 제물이 되셨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 그래서 십자가의 화해를 믿는 이의 사명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하는데있어 이유 불문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조건없이도 사랑해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그러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그 사랑을 무제한으로 공급하셔서 부어주셨음을 믿습니다. 내 사랑으로 사랑하면 제한이 있지만 부어주신 사랑으로 사랑하면 할수 없는 그런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차례, 월요일 목요일 단식 규정을 지켰습니다. 금욕적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행보가 달랐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광야에서 사탄과 대적하실 때 단식하셨죠. 그러나 공생활 중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예수님을 그렇게 비아냥거릴 만큼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잔치를 벌이시고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도 스승님과 궤를 같이했기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신 후 그리스도인들도 단식하기 시작했죠. 100년경 쓰인 디다케에는 그리스도인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 단식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받아서 재의 수요일, 성금요일에 한끼 단식, 곧 대재(大齋)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엄격성은 떨어지죠. ‘한끼는 단식, 한끼는 소식, 한끼는 정상적’으로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단식은 이제 자선행위와 연결될 때 의미를 가집니다.
풍요한 시대에 단식의 의미는 가난하셨던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한때는 육신이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몸을 학대하고 고행을 통해서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대도 있었죠.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단식이 자신의 거룩함, 그것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다른 많은 이들과 대비되는 거룩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 단식은 전부 보여주기 위한 단식,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기 위한 자랑이 되는 행위로서의 단식을 폐지하셨습니다. 오히려 단식의 영적인 차원을 더 강조하셨죠. 이 풍요로운 시대에 먹을 것이 지천인 시대에 단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고 물으라는 것이죠.
그것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여전히 굶주린 이들이 이땅에 있고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사야서 말씀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양식이 없어서 굶고 정의에 목말라 지쳐있고 억압의 멍에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외면하면서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 단식하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느님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 헛것이고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예언자는 끊임없이 일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빵도 먹어야 하지만 다른 것, 무엇이에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 인간 존재는 그럴 때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것이죠. 결국 왜 단식합니까? 한없이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죠.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에요.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의 말씀, 그분의 정의, 한결같은 충실함, 하느님만의 나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이 사순절 절제와 희생을 바칩니다.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면 형식만 남습니다. 신앙의 모든 행위가 그 진실함, 원래 제정된 그 목적을 잘 헤아리지 않으면 빈껍데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단식했다 희생했다 절제했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무엇을 했다는 성취와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한다는 너무도 기초적인 이 사실이 먼저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2-2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질문 이후의 말씀입니다.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관계냐는 것이죠.’ 본적도 없는 분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제가 되면 알게 될까 했고 사제가 되면 대단한 존재가 되는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죠. 사실 어떤 때는 약간 권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단조롭기도 하고 여러 부담도 있습니다. 때로는 밑천이 다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계에 부딪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요. 그런 허한 느낌을 갖게도 됩니다.
그런데 실제는 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저주의 십가가에 매달리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자리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바리사이들이 왜 골고타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나요.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저 파멸의 십자가에 달려있다고-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버림받는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도 하실 수 있으련만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받으셨음은 그래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도대체 왜 다른 수월한 방법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야할 버림받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셨을까-이 질문 앞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최대치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오늘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르려는 자, 자기를 매일 버리고 십자가 지고 따르라!
자기를 잃어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이 신비를 주님이 먼저 보이시고 우리에게 다시 그 길밖에 없음을 확인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로 오르심을 통해 모든 이름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고 세상에 비길데 없는 기쁨과 영광을 주신 것이죠. 그러면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결코 자신을 잃으려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박수받지 못할 때 나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버려야한다고 하시는데 자꾸 누리려고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람. 사순시기는 그런 사람이 되려는 수련의 시기입니다. ‘극기의 보루로 진을 치고’-사순시기에 자주 쓰는 표현이죠. 극기- 자기를 이긴다. 자기와 싸운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런 전투적인 심리상태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이가 있긴 하더군요. 걸핏하면 우리가 그런다는 것이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그래서 승리했다. 성공 거두었다. 그러면서 왜 자기와 싸우냐. 자기와 잘 지내야지-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진짜 잘 지내야 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지어 보내주신 나 자신.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나와 잘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자기를 버리고 발견한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십자가를 더 많이 선택함을 통해 가짜에 오염된 내가 정화될 수 있기를, 하여 오늘 내게 십자가를 하느님께서 더 지어주시는 까닭은 나를 거짓의 함정에서 건지시는 하느님의 개입하심임을 깨닫기를. 昢凉 神父…더보기
재의 수요일 복음은 자선, 기도, 단식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마태오 복음 6장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라는 표현을 다섯 번 반복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선, 기도 ,단식이 오히려 자기를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살아있어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며 남에게 보이려는 외부적 동기로 움직일 때 그런 자산과 기도와 단식은 헛것이 됩니다.
1965년 프랑스의 앙드레 라프레라는 사람이 기분좋은 계약을 맺었답니다. 프랑스에는 앙티아제라는 복지 제도가 있는데, 이를테면 주택 연금 비슷한 것이라죠. 노인이 소유한 아파트를 담보로 계약을 맺고 매달 그 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간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제도랍니다. 노인의 사망 후 그 아파트는 노인의 생계비를 지원해준 이의 소유가 된다지요. 그런데 라프레는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이 90대 할머니하고 계약을 맺었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60년대 다 지나고 70년대 다 지나가고 80년대도 다 지나가구요. 그런데 안돌아가셨데요. 결국 95년에 라프레가 먼저 죽고 할머니 장 칼망은 무려 123세까지 사셨답니다. 그가 시작한 것은 한 노인을 도와주는 순수한 마음일 수 있겠죠. 그런다가 아파트 하나 가질 수 있겠다 하니까 달라진 것이죠. 어디에 관심을 갖는가가 내 마음의 진실인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이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는다는 것에 그 아버지께서는 숨은 일도 보신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관심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이 거기 있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구경거리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연도 볼거리가 되죠. 동물도 구경거리가 됩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상호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구경하고 소비하면 그뿐입니다. 인간의 시선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 추방하는 것이고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런 현상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사용하고 있는 표현 ‘미사를 본다’, 그것은 구경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관심은 일방적이고 구경거리고 주님을 소외시키고 내 삶에서 배제된 무엇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에 자선에 단식에 대해 관심 가질 수 있지만 그 형식에 관심 갖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관심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무서운 얘기죠.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 숨은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진실을 아시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관심-그것이 우리의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상호시선이 있어서 마주봄이 있어야 하고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램프를 비비면 지니라는 요정인지 거인인지가 나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자죠. 지니는 필요할 때마다 비비면 바로 나옵니다.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시죠. 때로는 숨어계시는 것 같고 버리시는 것도 같죠. 또 지니는 소원을 듣고 바로 접수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소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기도 하죠. 또 요구도 하십니다. 그리고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고 끝나면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동행하시고 현존하시죠. 그런 것이 좀 거북하다는 것이죠 많은 이들에게는. 이렇게 우리 삶의 한복판에 지니처럼 내가 필요할 때만 그리고 필요없으면 사라지는 소외된 상태가 아니라 그분은 내 삶에서 인격적인 교류하시고 공유하시는 그런 상태를 가지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 안에 있더고 해서 다 괜찮은 거룩한 신앙인인가여? 결국 하느님과의 상호 시선이 마주치고 그분을 내 안에 초대하고 주님과 공유하는 시간이 있고 주님께 관심의 초점이 있지 않으면 다 헛것이고. 은밀한 것을 다 보시는 주님이 더 이상 보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에 골몰하다 주님을 몰라보지 않도록 주님께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의 진심, 나의 진실이 되기를 이 사순시기 시작하며 원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분부하셨다.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14-21)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성과 여성의 간극에 관한 고전적 저술입니다. 뭐 복잡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또 살다보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합니다. 왜 내 생각과 같지 않고 왜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왜 나와 다르냐고 사사건건 충돌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는 사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그와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죠. 원래 그는 그랬습니다. 다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가 원래 그랬다는 것을 잊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원래 그랬습니다. 우리의 건망증이 원래 그가 그랬다는 것을 깜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둔함에 대해, 그들의 건망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오병이어, 칠병땡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 순간은 너무 감격스럽고 경이롭고 대단하고 벅차올랐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불과 얼마 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틈엔가 그 깨달음과 감격과 환희는 사라지더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계하라-입니다. 누룩은 대체로 유다인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옳지 않은 것들, 비신앙적인 것들, 외식주의와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를 주의하라는 말씀을 누룩에 비유해서, 그것들이 누룩처럼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가니 조심하라는 뜻일 것인데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에 엉뚱하게 ‘빵’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두고 시비합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주님께서 약간 어이없고 기막혀 하시는 것이죠. 당신은 빵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작 빵 정도의 문제라면 호수 저편에서 다 해결하실 수 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해도 기억도 하지 않게 되니 다시 빵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은총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나아가 깨닫고 다시 살리는 것은 별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야훼의 권능을 체험했지만 얼마 못가 그 역사를 까맣게 잊고 불평과 원망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은총의 건망증이야말로 치명적 불신앙의 증거인 것이죠.
다시 기억합니다. 다시 간직합니다. 다시 깨닫습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으로 실은 충분하다는 것을, 차고 넘치게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이미 받은 것, 이미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억의 힘이겠습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이 일이 마무리됩니다. 이방인의 땅, 겐네사렛에서 수많은 이들 고치셨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더러운 영 들린 딸도 원격 치료됩니다. ‘에파타’, 말씀으로 귀먹고 말 못한 이가 온전해졌습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한량없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기적의 날들이고 흘러넘치는 기적이 있었죠. 그런데 결국 오늘 바리사이와의 논쟁을 통해서 어떤 결론이 났을까요? 기적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그들은 또 요구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 그자체일 수 밖에 없는 노릇. 더 어떻게 보여주나요.
사람은 만족을 모릅니다. 사랑받고 있는데 더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감질난다고 나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대해 역정을 내시며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처음으로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표징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사용됩니다. 기적은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죠. 하느님이 하셨다고 놀라게 만드는 일이 기적입니다. 불치병에 시달리던 이가 고쳐집니다. 기적입니다. 더러운 영에 인생이 파탄난 이가 회복됩니다. 기적이죠. 말씀하시니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기적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빵으로 백성들이 먹고도 남습니다. 한량없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아직 표징이 아닙니다. 기적은 놀라운 일이죠. 놀라운 반응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냐에 연결될 때 그것은 표징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표징이 되려면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 체험이 거기에만 머물면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 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가 일으키셨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작은 일이지만 ‘주님께서 하셨구나’로 연결될 때 표징입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일이어도 ‘어쩌다 생겼나봐. 우연의 결과네’-그러면 표징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구합니다.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표징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죠. 표징이 될 기적은 이미 있었죠.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 물으시죠. 그들이 표징을 구한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기 위해,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한 가지 더 기적을 보여주지?’하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롭지 못하다’의 반대말은 ‘은혜롭다’가 아니라 ‘식상하다, 지루하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미사가 지루해. 강론이 식상해.’ 무슨 뜻인가요?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니 이미 익숙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신선한 미사, 좋은 강론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을 더 잘 믿고 사랑하기 위해 신선하고 좋은 미사 분위기, 강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고 그저 너의 능력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바리사이가 되는 것이죠.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 지루하다고 답답하죠. 뭐가 답답한 것인가요? 결국은 자기 영혼이 답답한 것이죠. 그 답답함을 푼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바리사이를 향한 주님의 경고를 주의깊게 새겨야죠. 주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리셨습니다. ‘너희에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어!’ 무슨 뜻일까요? 그런 것을 찾아다니면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적, 이미 주어진 치유와 은혜를 통해 만족함이 먼저입니다. 식상함과 지루함과 싸워야 합니다. 신앙은 그것입니다. 신앙은 반복되는 메시지에 대해, 반복되는 주제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더 더 더! 자극을 추구하는 한 끝없는 반복의 순환에 빠집니다.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는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 그리고 기적찾는 것에만 몰두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더보기
중국 음식점에서 몇 사람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나오다가 입구에서 분무기를 꺼내서 옷에다 서로 뿌려주더군요. 저것 뭐지? 아, 삼겹살 집 같은데 가면 가끔 뿌려주는 곳이 있더라구요. 탈취제 같은 거시죠. 맛은 있는데 먹고 나면 옷에 배인 냄새가 곤욕이죠. 그런데 그곳은 중국 음식점이었습니다. 중화 요리에 냄새가 그다지 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뿌릴까 싶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불콰하더라구요. 짐작에 음주단속 피할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지만 옷 턴다고 완전 제거되나요. 뭐 뿌린다고 해결되나요. 임시방편이죠. 오히려 더 강한 향으로 이미 배어있는 냄새를 없애려고 하다가 더 문제가 됩니다. 방향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빨래를 해야죠. 창을 열어서 환기시켜야죠. 그게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악취가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그런데 익숙해져서 나만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픔과 죄와 더러움이 들어오는데도 자기만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르면 정말 없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나병환자는 바로 그런 익숙함에 젖은 것의 상징입니다.
나병의 특징 또 하나는 전염성입니다. 현대에는 전염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그렇죠. 다른 이들에게 퍼지기에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병과 죄가 유사성을 사람들은 추리해내었습니다. 나병도 죄도 둘 다 역겨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둘 다 무감각함을 일으킵니다. 둘 다 전염됩니다. 죄인데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죠.
인터넷 계정이 여러 개다 보니 어떤 메일은 아예 가입해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그 메일함을 열어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어떻게 메일주소를 알았는지(정보 유출의 결과겠지요) 모르지만, ‘오빠. 연희에요’, 그런 식의 제목을 단 메일들이 즐비합니다. 연희가 누구일까요? 내가 아는 그 연희 소피아인가? 보고 그런데 오빠라니, 얘가 돌았나. 이러고 궁금해하면 안되죠. 클릭하는 순간, 어휴! 매일 지워도 매일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래서 메일인가요? ^^
죄의 확산성과 전파성은 더 집요하고 은밀합니다. 남욕할 때 절대 혼자 하지 않죠. 공원벤치에서 혼자 남 욕합니까? 남들을 끌어들이죠. 능력있는 사람은 아파트 한 동 전체를 끌어들여서, 우리 반 전체를 끌어들여서 욕을 합니다. 죄의 전염성이죠. 우리가 2천 년 전 나병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은 이 시대는 이제는 영적 나병, 인생의 나병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원치 않는데 그런 삶을 사는 이가 많다는 것이죠. 가방 대신 죄책감을 들고 다니는 이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나병환자가 오늘 주님께 나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어 그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그가 주님께 나오는 것은 절대 쉬운 일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나올까 말까, 다가갈까 말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죠. 그분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원문은 연민으로 가득차서(filled with compasion)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나올 때만 고쳐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만지셨죠. 터치, 접촉-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늘 들어왔습니다. 엄마 손에 무슨 항생제, 진통제가 분비되나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정말 나았다니까요. 싸르르 하던 배가 가라앉아요. 손을 대심은 다 버려도 주님만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모두에게 버림받았건만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음을 말로하지 않고 그에게 손을 대셔서 알려주신 것이죠. 누구도 만지지 않은 나를 만지셔서 그분은 앞으로 나온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연민의 힘입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5-40
앞서가신 조상들을 기억하며 갑진년을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부고를 많이 받게 됩니다. 본당에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잊을만하면 장례가 납니다. 한 사람을 보내드린다는 것은 유족들도 힘들지만 장례 미사 집전하는 것도 꽤나 힘이 듭니다.
동기 신부들 부모님 장례는 그중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내 부모님 네 부모님 따로 있지 않고 다 우리 부모님이라고 여기고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저희 반은 유독 더 그렇습니다.
저희 서품 동기들간에는 암묵적 약속이랄까 철칙이 있습니다. 동기들 부모님 상을 치를 때면 장지까지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장례 일정을 다 마치고 나면 꼭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때 부터인가 인증샷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진말입니다. 그 사진에 내 얼굴이 꼭 있어야 합니다. 거기 얼굴이 나오지 않으면 두고두고 욕먹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 동기 부모님 장례에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나’며 졸지에 패륜아까지는 아니어도 하여간 눈총 깨나 받게 됩니다.
지난 번 장례 때 찍은 그 사진은 동기신부들 단체 sns 메인 사진으로 올려집니다. 다음 번 장례가 날 때가 되면 새로 사진을 찍어 교체합니다. 그 사진을 무심히 보는데 머리 희끗희끗해진 친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모이면 여기저기 아프다고 요즘 병원 다니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고 하는 친구들이 속출합니다. 자기는 예수님 덕분에도 살지만 홍삼 먹으면서 간신히 일어난다고 너스레 떠는 녀석도 있습니다. 시간이 속절없다고 한탄하는데 이르면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압니다.
설날이 되었습니다. ‘설’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낯설다’가 기원이라는 설명이 확 와닿습니다. 묵은 시간이 지나고 온 새로운 시간이란 뜻이겠지요. 복음은 ‘깨어 있어라’라며 이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자칫하면 그냥 흘려보내기 십상인 시간인지라 잠들어 있는 무력한 상태로 지내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죠. 낯선 시간은 다시 주신 시간입니다. 그야말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었을 터입니다. 그 정도면 지난 시간은 괜찮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지난 것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 따위가 왜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다행히 또 주어진 시간을 깨어 살아갈 기회가 있으니 더 괜찮습니다.
대림으로 교회는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양력으로 2024년도 탈없이 맞았습니다. 설을 지내면서 우리는 또 새해를 맞았다고 복을 빌어줍니다. 어느 때부터 새해라고 해야 하는지 헛갈리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거듭 시작하고 다시 출발하도록 주시는 기회인 셈 치고 낡은 삶이 아니라 낯선 삶을 향해 조금쯤 설레며 맞이해도 좋은 그런 날 되시길 청합니다.…더보기
못 듣고 말 못하고 그래서 깨닫지 못함을 총칭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갈릴래아도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다에 속한 갈릴래아와 이방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하여 호수 남쪽은 유다, 저쪽은 이방인 지역에 속하는데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속한 갈릴래아입니다. 그 지명이 바로 티로, 시돈, 데카폴리스가 그런 이방 지역 도시죠.
마르코 복음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점점 대상이 좁은 대상에서 넓게 확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상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제자들에게로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더 광범하게 전해집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 구원의 역사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역적인 배경을 통해 알려줍니다.
오늘 그 가운데 이방 지역 주민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중복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곳곳이 막히고 가리워져 있는 세상, 참된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인간의 고통을 그가 겪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을 독특하게 고치시죠.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시고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모습. 이런 방법은 주님이 사용하시기에는 좀 많이 지저분하다 할 수 있지요. ‘침을 뱉는다.’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성경의 맥락에서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 10,34) 예수님을 극도로 모욕하기 위한 침뱉음입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마르 14,65)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마르 15,19) 수난 이야기에 예수님이 침뱉음을 겪으신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가장 침뱉음 당하고 모욕 겪은 분은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증언합니다. 바로 ‘예수님’ 그분이시다!! 주님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말 못하는 내적 생명이 사라진 영혼을 보면서 당신이 어떻게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겪으셔서 이 어둠의 땅을 밝히시고 살리고 회복할 것인가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린 입이 열 개라도 억울하다는 소리 할 수 없게 됩니다. 살다보며 억울할 때 있지만 주님 앞에서는 못하는 것이죠. 인간이 토해낼 수 있는 모든 악이 다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갑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해서 가까이 갈수록 더욱 서로 찔러댑니다. 인간 세상의 타락한 모습이 그렇단 것이죠.
그런데 죄없는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로부터 침뱉음 당하셔서 살려내고 고쳐내신 것이죠. 오늘 복음은 그 주님 사랑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듣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주님이 침을 바르시고 만지십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게 되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를 고치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는 것, 이것은 하늘로부터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셨다, 탄식하셨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은혜를 구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에파타’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열려져라’, 곧 수동형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는 것이죠. 하느님이 여셔야지 내가 여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문 꼭 닫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갇혀본 적이 있으시면 알죠. 바깥에서 닫혀 못 들어간 적 있지만 안에서 갇혀본 적 있다면 알게 됩니다. 갇혀있는 나를 바깥에서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답답할 때, 주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곧 열려질 때까지! 그렇게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방인들의 땅에서 귀먼 자의 열림과 혀를 풀어짐을 목격하게 하셔서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열려질 때까지, 에파타의 말씀이 들릴 때까지! 우리가 끝까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더보기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을 떠나 티로, 현재 시리아 지역으로 가십니다. 거쳐온 겐네사렛처럼 잘 사는 지역입니다. 이때 여인이 하나가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입니다. 그냥 마귀가 아니라 더러운 영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데 이 더럽다는 표현이 항상 사람을 괴롭히는 영의 수식어로 쓰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무엇을 더럽다하셨나요? 들어가는 것,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하셨습니다. 씻지 않은 손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빵을 먹고 행동한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손이 더러워지니까(중동 지역은 수저나 포크가 아니라 손으로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빵 부스러기로 손을 닦습니다. 손 닦은 부스러기는 상 아래 마구 버렸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의 새끼’들이 주워 먹습니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굉장히 험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라고 표현한 것은 실은 너무 순한 표현입니다. 정확히는 ‘개의 새끼’입니다.
이 복음에 여인의 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는 자기 딸의 고통을 끌어안고 나옵니다. 티로 지방, 시리아 페니키아출신인 이 여인은 콧대높은 일종의 귀족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적 고민 다 있다는 것이죠. 그녀의 아픔은 딸입니다. 온갖 기대를 다 걸고 키워냈지만 더러운 영에 들려있습니다. 어머니에겐 방법이 없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와서 엎드립니다. ‘엎드린다’ 이것은 예배한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의 냉정한 말씀이죠. 자녀들 곧 유다인들이 먼저 빵을 먹어야 한데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빵 먹다가 생긴 정결 논쟁에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싸늘한 말씀에 응수합니다. 강아지도 부스러기 먹을 자격 있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는 음을 먹고 손을 씻고 버린 그 부스러기란 말이죠. 그리고 여인은 개보다 더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게 되시는 것이죠. 처절한 상황 때문에 이 여인이 이렇게 낮추어진 것일까요. 이 여인은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마태오 복음 병행 대목에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죠.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상대를 주님이라고 인정할 때만 이렇게 자신이 낮아져도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것이죠.
주님이시니 그 앞에 자존심이 어디 있나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딸아이 문제로 인해 나온 이 여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누구의 문제였을까요? 딸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어머니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치유가 유다인의 문제를 고발할 내용이라면 이것은 이방인의 땅의 어두운 상태를 고발합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막힌 담을 허무신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신 것이죠. 손을 씻은 빵부스러기 먹었다면 그 강아지도 더러워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엎드려 바친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럽지 않다. 주님 앞에 엎드리면 다 정결해진다.’ 그래서 정결논쟁 다음에 이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 부분만 딱 떼어놓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게 되면 여인의 믿음, 겸손, 끈질김 정도가 보이지만 전체 맥락 안에서 보면 주님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가 보입니다.
본래 우리는 청정무구한 존재입니다. 비록 온갖 때가 묻고 죄에 물들었어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원래의 그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것을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하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합니다. 존귀한 존재인 나, 인간-그렇게 존귀하게 대하고 있는지요.…더보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 7,23)
입맛 까다로운 사람, 대개 성격도 유난합니다. 가리는 것이 많다는 것은 요새 말로 까칠하다, 도도하다 유난스럽다 그럽니다. 뭐도 안먹고 뭐는 못먹고, 툭하면 간이 안 맞는다 밥에 찰기가 없다는 둥하는 사람은 일처리하거나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변덕스럽고 별나다는 것이 대체로 경험상 맞습니다. 깨작깨작 밥알 세며 먹으면 복달아난다고 타박하셨던 어른들 말씀이 그냥 생긴 것 아니죠. 복스럽게 밥먹는 사람치고 두 마음 가진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편식하지 않는 것이 영양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골고루 감사하면서 먹음으로서 우리는 원만한 삶을 위한 준비를 매일 세 번씩 훈련을 하는 것이죠. 준대로 맛있게 깨끗이 밥 한공기 뚝딱 해치우는 이라면 일단 기본 점수 주고 믿어도 좋지 않을까요.
유다인들은 개인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입맛이 길들여졌습니다. 레위기의 온갖 규정에 정한 음식-섭취 가능한 것, 부정한 음식-피해야 하는 금기 음식에 대한 까다로운 지침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리는 게 많다보니 그들은 까다로운 사람, 같이 있기에 불편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또 저러니 안된다’며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먹을 것이 별로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음식의 정함과 부정함에 자신의 정함과 부정함을 결부시켰습니다. 깨끗한 음식 먹으면 나는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끗하려면 가려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 살아도 좋은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관습적 생각과 풍토에 대해 일축하시죠. ‘야, 먹는 것 가지고 까탈부리지 말라.’ 음식은 그저 소화되면 그뿐이라는 것이에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먹고 하는 짓이 문제라는 것이죠. 모든 음식은 깨끗하건만 그런데 그걸 먹고 하는 짓거리,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지적하십니다.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 이 모든 것이 먹고 한 짓이라는 것이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 것은 먹고 하는 짓에서 비롯됩니다.
저주하는 이의 입김은 독성이 엄청나답니다. 엘마 게이츠 박사는 호흡할 때 나뿜는 입김을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내뿜는 입김을 차가운 유리관에 모아 식힌 침전물은 사람의 감정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네요. 마음이 평온할 때의 입김은 무색, 화가 났을 때는 고동색 슬퍼할 때는 회색, 괴로워 할때는 담홍색으로 차이가 난답니다. 그중 화가 났을 때의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만, 쥐는 버둥거리다가 죽어버렸데요.
천년의 보물 석굴암이 훼손되는 원인이 인간이 내뿜는 그 탄산과 거기 섞인 불순물들이 그 단단단 화강암을 부식시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담겨 있다가 나온 것이 우리를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은 그냥 경고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암물질, 해되는 먹거리는 피하면서 정작 발암물질, 독성물질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젖소가 물을 먹으면 우유, 살모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그런 말이죠. 같은 물인데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나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반응과 삶이 나옵니다. 아웃풋은 인풋이 뭐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가공되고 수용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 나의 반응능력 내적인 가공능력의 수준을 높이면 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벗어나는 것도 우리의 반응에 달려있습니다. 누가 험담해도 허허 그렇구나 웃고 넘기면 그만, 그런데 만일 발끈해서 성질 부리면 벌써 마음에서 독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이 바깥을 향해 그 놈을 상하게 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상하게 합니다. 다 좋게 생각하는 것도 습관 그리고 다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도 버릇입니다.…더보기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마르 7.13)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악한 죄인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세리, 윤리적으로 불순한 창녀도 다 품으셨지요. 그러나 한 부류만의 예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들에게만은 냉정하시고 때로는 혹독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 겉꾸미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들이 세리와 창녀와 다른 죄인들보다 더 문제가 큰 것일까요? 겉꾸밈이 뭐 그리 큰 죄일까요? 결론적으로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식하는 것이 겉꾸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허세나 넘길만한 위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을 속이는 불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겉꾸밈은 신앙의 암초같은 것이어서 하느님을 향한 삶을 전복시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을 본받지만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자주 경고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모습, 증세가 나옵니다. 우선 눈치가 늘어납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이의 시선을 중대하게 의식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하느님 앞에 순전한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것이 결국 중요해질 수 밖에 없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왜 손 안닦고 음식을 먹느냐는 항의에 대해 맞서신 주님의 결론은 그래서 ‘너희들 말이야, 손만 닦지 말고 마음도 좀 닦지’ 그런 뉘앙스인 것이죠. 일상에서 손만 잘 닦아도 많은 질병이 예방된다죠. 그런데 마음 닦으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유리창은 한 면만 닦아서는 안됩니다. 양쪽을 다 닦아야죠. 안에만 아니라 바깥도 잘 닦아야 투명함을 유지합니다. 내면과 외면이 다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삶이고 영성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외적으론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대로 십일조,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관리되지 않으니 정당하게 보이는 외적 행동마저 결국 겉꾸밈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죠. 그렇게 잘못되어 갑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내면을 어떻게 동일하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죠. 기도는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아는데 적당한 행동 안나오면 욕먹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는 참 잘해’,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입니다. 한쪽 날개로는 못나는 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요.
바리사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결국 하느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식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를 하느님이 쳐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느님의 현존을 시시때때로 상기할 때 약점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을 보통 현존연습이라고 합니다. coram deo(코람 데오)-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순간순간, 떠올리고 주님이 나의 최고의 관객임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 이것이 신앙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야구선수는 없습니다. 관객없는 배우는 힘이 빠집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 덕분에 홈런이 의미가 있죠. 공연을 보는 이가 있어 그 드라마가 감동을 일으키죠. 그런데 우리 삶의 경기와 우리 삶의 드라마에서 나를 열렬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그 관객이 주님이심을 알 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예민함이 대충 살고 싶은 욕구를 이겨낼 수 있게 만듭니다. 좋고 쉬운 것만 하고픈 적당히 살고싶은 그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완주라는 고단함을 받아들음은 주님이 지켜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관객,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 지켜보심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임을 알 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갈 것이죠. 昢凉 神父…더보기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3-56)
풍랑을 잠재우신 후 예수님은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이 제자들을 예수님이 제자들을 벳사이다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마르 6,45)
벳사이다가 목적지였는데 겐네사렛에 도착합니다. 가고자 했던 벳사이다는 안갔느냐? 가긴 갑니다. 8장, 벳사이다에서의 맹인의 치유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벳사이다 가는 길에 겐네사렛을 들렀던 것이죠. 겐네사렛 지역은 이방인 땅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살인적인 햇볕이 녹아내릴 듯 내리쪼이는 유다 광야 그 가운데 유일하게 풍성한 곳, 겐네사렛입니다. 사계절 과일이 넘치고 물산이 풍부한 그래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이곳에는 이방종교가 넘실거리는 곳이기에, 유다인 입장에서는 이곳은 부정한 땅이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여기에 배를 대도록 하셨을까? 이것이 당시 정황을 알면 참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유다인에게 저주와 경멸의 대상인 이 곳, 죄악으로 해가 뜨고 지는 이곳 사람들이 한눈에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호수 건너편 유다인의 땅에서 보였던 반응과 절묘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알아보아야할 것 같은 이들은 몰라보고 몰라볼 것 같던 사람들은 알아봅니다. 호수를 건너면서 풍랑이 일어나자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쳤던 이들은 다름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상 주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겐네사렛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알아본 겐네사렛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를 데려오기 시작하였고 마을 고을 촌락마다 예수님 들어가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문장이지만 이런 문장은 복음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겐네사렛 사람들은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병자들을 데려오고 손을 대달라고 부탁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문장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고치시고 손을 대시고 일으키시고 마귀를 쫓으시는데 여기서는 겐네사렛 주민들이 주체가 됩니다. 그들이 열심히 예수님 앞에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겐네사렛 저것들, 죄인들이야. 저것들 믿을 수 없는 이들이야.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과거에 어떠했는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무시와 폄하를 당하던 겐네사렛 사람들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겐네사렛은 부유했지만 인생의 본질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똑같이 눈물이 있고 똑같이 애끓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곳 겐네사렛을 그냥 피해가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구할 자 구하시고 나서야 그 후에 벳사이다로 가셨습니다. 겐네사렛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직장이 학교가 실은 죄다 겐네사렛입니다. 눈물짓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래서 나의 따스한 손길, 알아주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겐네사렛, 그곳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다면 벳사이다로 가는 길을 늦추어서 거기로 돌아갈 밖에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오늘 복음 속에 담겨진 아프고 눈물짓는 이를 향한 그 마음을 발견하는 이는 그렇게 가던 길을 멈추게 되는 법이겠지요. 昢凉 神父…더보기
마르코 복음의 1,21-39절까지를 보통 ‘카파르나움의 하루’라고 이름 붙여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지내셨던 어느 하루의 일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이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서자 마자 할 일이 다시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던 집을 찾으시고, 해가 저물자 다시 많은 이들이 몰려 옵니다. 늦게까지 동분서주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쉬신 것이 아니라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복음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강도로 일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지 않았더라도 틀림없이 과로사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분주하게.
어떻게 보면 주님의 생애 전체가 이런 날들의 반복이었을 것입니다. 문전성시를 이룬 사람들, 하셔야 할 많은 일들, 그리고 틈을 내어 기도하시는 시간. 주님께는 빈손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빈손을 채워주시고자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습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자리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분주하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에 지쳐 피곤하기도 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루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날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그 무미건조한 날, 매일매일 반복되는 듯 보이는 날,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늘 그것을 기쁘게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가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이고 관건입니다.
영원을 잘 사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아니요.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 뿐입니다. 그저 바로 지금 뿐입니다.
불교의 수행법 중에 ‘다만 할 뿐’의 수행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밥먹을 때는 밥먹을 뿐, 공부할 때는 공부할 뿐, 쉴 때는 쉴 뿐입니다. 일상을 그렇게 차곡차곡 만들어 가는 것이 해탈의 길, 완성의 연습이란 것이죠. 그런데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수행이 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해본 이는 압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곳에 있기도 합니다. 몸만 여기에 있고 생각과 마음과 지향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죠. 온전히 한 순간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니 그런 갈라진 상태는 늘 허전함을 일으키곤 하죠.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바로 지금 하는 일에만, 바로 지금 있는 여기에만 머문다면 예수님이 하루처럼 내 하루도 조금은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다른 곳에 이미 가있는 마음을 다시 붙들어 여기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지금 하는 이 일이 지금 있는 이 곳의 소중함과 의미를 완전히 보듬어 갈 수 있게 됩니다. 昢凉 神父…더보기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
살림하는 사람이 매일 마사지샵 네일샵 갑니다. 피부는 매끈하고 손톱은 아름답지만 집안은 엉망입니다. 애들은 꼬질꼬질 냉장고에 열어보면 상한 음식이 가득합니다. 구석구석 먼지가 굴러다닙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집 아이들 안타깝다며 혀를 찹니다. 또 출근하는 사람이 자기 취미와 여가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업무는 뒷전입니다. 처리할 일은 쌓이고 직장에서의 관계는 틀어집니다. 그런 가장을 둔 집은 걱정이 태산. 사람들은 그 집 살아가는 꼴이 영 아니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는 중심을 잡아야 하죠. 아빠는 그런 것이고 엄마는 그런 것입니다. 생명을 키우고 지키는 위대한 그 일을 위해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때로는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그 일을 해내는 것이죠. 멋진 아빠가 아니라 일하느라고 지친 아빠가 진짜배기이고 손이 고운 엄마가 아니라 거친 손으로 돌보는 엄마가 진짜입니다. 일하느라 터지고 갈라진 손이 섬섬옥수 곱디고운 손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방에서 몰려든 이들, 그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이들을 향한 아픔을 느낍니다.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움직이시죠. 오고가는 이들에 치여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움직이십니다. 식구들 죄다 밥먹이고 치우고 나면 찬밥 한덩이 먹을 시간 없던 그 옛날 어미의 처지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엄마 없는 가족들 같았기에 매만지고 격려하고 손을 얹으시고 쉴틈도 없이 돌보시는 것이죠. 엄마가 필요한 것처럼 목자가, 착한 목자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새신부 때 김수환 추기경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추기경님께서 물으셨었죠. ‘그래, 새 신부들 이제 서품 받았으니 우리 교회에 감사할 것이 많겠지? 뭘 감사하는지 말해보게.’ 동기 신부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신자들 기도하고 복음을 살고자 애쓰는 것에 감사하고, 본당 일에 헌신적 봉사에 감사하고, 신부 수녀들을 그래도 존경해주는 것에도 감사하고....’ 여러 감사할 일이 줄이어 거론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시던 추기경님이 ‘그래,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가보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신자들이 너무 열심하지는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해.’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열심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니. 그때는 2000년대 초반이라 우리 교구의 외적 규모가 신자 100만 이상, 본당 200여개 이던 시절. 추기경님이 그러시더군요. ‘평균 한 본당에 신자가 5,000명이라네. 각 본당에 신부는 하나나 둘이 파견되지 않나. 그런데 그 신자들 모두가 빠짐없이 주일 미사에 나온다 생각해보게. 지금 주일 미사 3-4대 드리는 것으론 어림도 없겠지. 두 배로 늘려야 할꺼야. 그 신자들이 꼬박 고해성사 본다면 아마 고해실에서 빠져나올 겨를이 없고 주일학교는 미어터지고 성사 집전 만으로도 신부들은 과로사할 걸세. 그러니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냉담하는 것도 어찌보면 다행아닌가.’ 그렇습니다. 만일 모든 신자들이 그 정도의 열심을 보인다면 저는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장로교로 옮기고 싶을지 모르죠. 일에 치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그 말씀은 아픈 말씀이었습니다. 목자가 돌보지 못한 빈구석이 너무 많은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면서 방치된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새신부들에게 분발하라 말씀하신 것이죠.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니 주님은 더 이상 쉬실 수 없었습니다. 외딴 곳까지 몰려온 이들을 보니 무엇인가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 안타까움은 예수님을 움직인 동력이었습니다.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교회가 활력을 잃어간다면 지금은 ‘목자 없는 양’이 문제가 되지만 언젠가는 ‘양떼 없는 목자’가 되지 않을지. 하느님의 백성을 향해 느끼신 안타까움은 모든 피곤함을 이겨냅니다.…더보기
오늘 지내는 봉헌 축일은 예수님 탄생 후 40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날 일 년간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본당에서는 제대 앞에 초를 가득 대개 상자 째 잔뜩 쌓아두고 축복합니다. 그거 아시나요? 원래 우리가 기도에 사용할 성물을 축복할 때 통상 초는 축복하지 않습니다. 성상이나 묵주, 성경은 축복합니다. 이런 것들은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초는 불을 켜고 사용하는지라 태워 없어지는 것이기에 축복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 모르는 신자분들이 초를 들고 와서 ‘축복해주세요’하면 굳이 설명하기도 그래서 축복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죠.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오늘 축일에는 기도용 초를 공연히 축복함으로써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봉헌이란 하느님께 바쳐서 그분의 뜻대로 사용되고 결국 없어지는 것이다-뭐 그런 의미 말입니다.
또 이날을 기점으로 앞뒤 날에 많은 수도회에서는 수도자들의 서원식이 있습니다. 사제 서품식도 열립니다. 어제는 우리 교구 서품식이 열렸습니다. 저는 신학 과정이 6년 반이던 시절이라 김대건 신부님 대축일인 한 여름에 서품되었죠. 무지하게 덥고 습했습니다. 이후 7년 과정으로 변경되면서 2월에 서품식이 열립니다. 이번에는 춥기가 이를데 없죠. 그래서일까요? 농담처럼 한 여름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다혈질이 많고 한 겨울 서품된 사제들 중에는 냉혈한이 많다는 농담이 있을 지경입니다. 물론 저처럼 ^^ 냉온탕을 오고가는 변덕질도 있습니다만.
서품미사를 드리며 드리면서 늘 그렇지만 어제는 더욱 마음이 벅차고 기쁘면서도 뭔지 모를 안타까움이랄까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신학교에 와서 만났을 때 4학년이던 아직 뽀시래기같던 친구들이 부제가 되어 뭐한다고 신학교 누비고 다니는 모습에서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솔직히 ‘와 허세 쩐다’였습니다. 사실 부제는 교회 안에 별 권한도 없고 여전히 애송이 취급받곤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그 친구들이 이제는 제대 앞에 엎드려 세상 안에 죽고 주님 안에 살겠다고 하니 솔직히 죽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그 장한 마음과 그동안 겪었을 온갖 일들이 얼마나 스쳐갔을까요? 앞으로 살 날이 그리 녹록치는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실 기쁨이 여간하지 않겠지만 또 주님이 지어주실 십자가도 너끈히 지고 가기에는 힘에 부칠 때가 많을 터이니 말입니다. 어느 본당에서는 함께 사는 신부님의 시집살이가 호되어서 눈물 깨나 흘릴 일도 있을 것이고 하느라고 열심히 하는데 열매가 없어서 허탈할 날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쩔쩔매기도 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자 싶다가도 온갖 유혹들이 가만히 나두지 않는 연약한 자신에 절망하기도 하겠지요. 그런 온갖 생각이 서품식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새신부님들, 부디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그대들의 삶을 봉헌하시길, 그리고 주님께서 자비로이 이들을 받아주시기를.
다시 봉헌 축일, 하느님께 바칩니다. 가톨릭 성가 221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리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다시는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이 축일에 봉헌된 초가 말끔히 다 태워져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든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자기 생을 다 바칠 수 있도록 그렇게. 昢凉 神父…더보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셔서 양성과정을 거칩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았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치유하실 때 사람들의 믿음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기초적인 교육이 끝났고 이제 세상을 향해 뛰어들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셨어요. ‘너희들 할 수 있어. 너희는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야. 지켜 본 것, 배운 것을 가지고 활용하면 된다’고 격려하신 것이죠. 그래서 품안에 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각 고을로 보내시는 것이죠.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규칙이 있습니다. 우선 빈손으로 파견하십니다. 지팡이 달랑 하나, 이것은 일종의 호신 수단이었죠. 허리 아파서 필요한 지팡이가 아니라 거친 길을 가는데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야생동물 달려들면 내치기 위한 지팡이! ‘그래 그것은 필요하지. 그것은 가져가도 좋아.’
그런데 빵, 여행 보따리 그리고 전대에 돈 같은 것은 필요 없답니다. 한솥 도시락 싸들고 샘소나이트 트렁크에 필요한 것 자꾸 챙겨가고 신용한도 무제한 카드 챙겨가고 이런 것은 안된답니다. 신발은 걷는 것이 주로 이동수단이었으니까 괜찮지만 여벌옷 바리바리 싸가는 것은 안됩니다. 왜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단촐해야 하기에. 짐에 눌려서 일을 그르치면 안됩니다. 하여 최대한 간소하게! 지금 왜 파견되는 것인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하러 그러니 복음 받들고 주님 모시고 가야합니다.
준비는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위험한 가능성에 대비해야죠. 그런데 준비하다 정작 일을 시작도 못해요. 위험한 것 없나 살피다가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못할 수 있죠. 진짜 능력은 현지 적응 능력이거든요. 민첩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면 되죠. 선교지 가서 국에 밥에 일식 오찬 차려놓고 먹을 겨를이 어디 있어요. 그곳에 가면 그곳에서 필요한 것 조달해가면서 살아야죠.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때 작은 부족인 몽골이 세계 제패하는 비법은 신속성이었어요. 요새 말로 육포 같은 것 씹으면서 동에 서에 번쩍한 것이죠.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때 그 이전의 부대와 달리 엄청나게 신속하게 부대를 이동시켰다죠. 병조림을 발명해서 이동 중에 식사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둘씩 보내십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것이죠. 외톨이 신앙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귀찮아요.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하느님 섬김은 안됩니다. 주님은 둘씩 혹 셋씩 짝으로 보내서 제자들이 서로를 지지해주기를 원하셨죠. 나를 부축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대비책은 나와 뜻을 같이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동반자이며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 ‘함께’입니다. 외골수는 위험하고 반복음적입니다.
이렇게 단촐하게 떠났더니만 회개의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마귀가 굴복되었고 고통중의 병자들이 치유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같은 결과가 폭발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실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었잖아요. 그럴 만한 결과가 일어나기엔 영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당부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했더니 나약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아가니 엄청 불편했으나 이 불편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불편이었고 이 불편을 감수하니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으로 인해 불편함이 있습니까? 마냥 편안합니까? 주님이 지어주신 불편은 세상 눈으로는 바보짓이지만 하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나의 자아와 세상이 선택하고 유혹하는 안락함은 편안하게 만들지만 결실을 주지 못하죠.믿음은 세상의 안락과 주님의 불편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인가? 답은 분명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예수님 태를 묻은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생애 대부분은 나자렛에서 자라셨습니다. 나자렛은 주님의 고향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주로 활동하신 곳은 카파르나훔, 위로의 마을이라는 이름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시다가 약 30여분 떨어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허름한 동네인 나자렛, 그 동네 이름은 구약의 나지르인과 같은 어원입니다. 구별된 동네란 뜻입니다.
복음에 보면 전에도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마르 3,20-21에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 전합니다. 곧 1차 방문때 예수님은 재미를 못보셨던 것이죠. 미쳤다고 하고 붙들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차 방문 때는 제자들 거느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환호는커녕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두고 놀라긴 했는데 ‘목수가 아니야’ 이 말인 즉,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어도 뭐라 해야 하나요. ‘요셉의 아들’, 가부장적 사회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앞에 붙일 때는 홀어머니, 과부 아들 곧 애비없는 자식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홀대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목수 아니냐.’ 무시하는 표현이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옛날 찌질이 아냐. 이런 식인 것이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가족의 상황과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예수님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배척과 불신앙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이런 그룹 있을 수 있단 말이죠. 난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나름대로 그분께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데 알고 있나요? 그 안에 불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하느님 섬김다’ 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안에 불신앙이 도모될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실은 잘 믿고 섬기지 못하고 있구나-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관계적 측면에서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타박합니다. ‘내가 뭘 안해 줘. 월급 꼬박 바치고 술주정 안하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고 이래.’ 그런데 남편 생각과 달리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부란 그것이면 다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럽니다. ‘여보. 오늘 맛있는 피자 먹고 싶다.’ 콧소리를 살짝 섞으면서 그럽니다. 그럼 남자는 얼른 네이버 검색합니다. ‘돈암동 피자 맛집’- 그리고 열심히 찾아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여기가 맛있는 피자집이래. 거기 가서 먹어.’ 그걸 뭐라 그럽니까. ‘천치’라고 그럽니다. 아내가 피자 먹고 싶다는 것일까요? 어디 같이 바람도 쐬고 시간 보내고 싶단 말이지, 피자 쪼가리 먹고 싶어 안달났다는 것 아니거든요.
예수님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으로 가슴으로는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단 말이죠. 이것이 신앙인의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관습적으로 믿고있는 우리 내면의 현실이 과연 우리한테 없나요? 질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를 알고 있었지만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이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고는 있지만 관습적으로만 그분을 아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昢凉 神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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