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 주일 성인 강론 (가해)
제 1 독서 : 이사 8.23b-9.3
제 2 독서 : 1고린 1,10-13. 17
복 음 : 마태 4,12-23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이 땅의 그늘진 곳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고, 또 기쁜 소식을 전할 첫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탄생 순간부터 또 공생활의 시작부터 만민의 구세주로 당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이 그러했고, 특히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등장하는 즈블룬과 납달리 지방, 요르단강 건너편이라 하면 이스라엘 땅이면서도 이방인들의 세계처럼 여겨지고 천대받던 갈릴래아 지방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방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 군대의 침입으로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끌려가고, 대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정착한 곳입니다. 따라서 갈릴래아 지방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 역사적으로 치욕의 장소이고, 현실적으로도 수많은 이방인과 소외된 유대인들의 정착지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오늘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결코 유대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보입니다. 유대인의 왕,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께서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의 한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결코 유대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갈릴래아 지방의 네 어부를 첫번째 제자로 선택하셨고, 유대인의 최후의 자존심과도 같은 율법을 거침없이 어기셨고, 또 당대의 현실적 메시아관과는 달리 십자가에 매달린 힘없는 왕의 모습으로 드러나시는 등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든 것이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참된 의도는 무엇입니까?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기 위함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릇된 선민사상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유대인들을 정화시키고 진정한 구원과 해방의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첫번째 제자들은 분명 유대인들입니다. 비록 유대인 사회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처지에 있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은 네 복음서가 모두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거의 비슷한 내용과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이들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며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또 부모와 가족을 남겨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부르심과 응답, 이것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당신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고 계속 이어갈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아닌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제자선택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제자로 안드레아와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역시 공관복음과는 달리 "와서 보시어" 하는 초대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잠깐이나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인식과 고백은 안드레아가 자기 동기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을 통해 증거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듯 요한 복음 사가는 첫번째 제자 이야기 안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는 구세주를 알아보고 따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과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또 안드레아를 통해서는 체험과 증거의 삶이 참된 제자의 모습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도 체험과 증거의 제자직에 대해 열 두 제자를 뽑는 대목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3장 13-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도적으로 마음에 두셨던 이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을 파견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죄와 악의 세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스승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삶의 교육, 체험의 교육을 통해 사도들을 양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 봅시다.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또 절절한 사연 속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에 응답해 신앙의 길, 제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찌보면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양성하는 제자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이 학교의 주된 교육과정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 바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끼는 것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들이 3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숨었던 사실은 이 과정이 결코 쉽지도 또 단기간에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을 느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중도에 좌절하고 냉담하며 보다 분명하고 감각적인 하느님 체험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우 훌륭한 교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서가 그 교재입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삶을 가장 진솔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예수님과 만나고 그분 안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자주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이 바쁜 현대생활 속에서 쉽지는 않지만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원천이자 바탕이 됩니다.
오늘 복음을 잠시 묵상해 봅시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측면에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천대받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또 사회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별반 영향력도 없는 어부들을 제자들로 뽑으셨을까? 더 합리적이고 수월한 방법도 많았을텐데.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 또는 율법학자들을 제자로 뽑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면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왜 그러셨을까? 이렇게 묵상해 보시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하고 예수님 안에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나를 원하고 계시고 또 우리 공동체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사도로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