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쁨

2008. 3. 27. 오후 7:08:17

글자
안녕하세요. 네스똘입니다. 먼 삼촌벌 되는 수사님이신데 매일이 왔네요.
 
좋은 내용일것 같아 공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항상 우리 가운데....
 
거룩한 사순시기를 막바지에 두고 거룩한 전례와 거룩한 기도 생활에 충실하리라 믿습니다. 여름같은 봄을 지내고 있는 저에겐 시카고의 추위에서 기다리던 부활이 그립습니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알렐루야로 풀어지고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질 때 부활의 기쁨이 더 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몇일 전 어느 신문사에 계신 분과 부활에 대해 나눈 것을 정리하여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 이리 소식 전합니다.
 
 
부활은 체험입니다.
부활이 체험되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그 부활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베드로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리고 토마스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부활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복음을 근거로 세 개의 장면을 보도록 합시다.
 
장면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레아 호수 변으로 베드로를 찾아가셨을 때 베드로는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분과 적어도 삼년이나 함께 동거 동락했던 베드로는 바보스러우리만치 이상하게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얘들아 무엇을 좀 잡았느냐?”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왼쪽에 쳐 보아라.”
그러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혀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예수님인가 보우...” 그러자 베드로는 물로 뛰어들어 그분을 만나러 뭍으로 나옵니다.
 
장면 2
 
마리아 막달레나가 아침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은 이미 치워지고 없었습니다. 놀래서 무덤을 들여다보니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슬피 울면서 그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그분이 나타나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그런데 막달레나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 인줄 알고 묻습니다.
“혹시 당신께서 내 주님을 모셨거든 알려주십시오. 내가 모시겠습니다.”
“마리아야......!”
“라뽀니!” 라뽀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장면 3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제자들이 고향인 엠마오로 여행을 떠납니다. 걸어가면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 묻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고 있는거요?”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시우?”
“아니 당신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나오면서 요 근래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짜증나는 목소리었을 겁니다.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보시오.”
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얘기라면서 어떤 여자가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했다고 하면서 이상한 사건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약 반나절 동안, 그것도 대낮에 함께 걸어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감동을 받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격의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말입니다. 이제 그들의 목적지가 다 되어서 헤어질 때가 되자 그들은 그분께 청합니다.
“선생님 이미 날도 저물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어 쉬고 가십시오.”
“그럽시다.” 하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주실 때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위의 세 가지 장면들은 복음에서 부활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화들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 중에 공통된 것이 있다면
1. 그들은 예수를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2. 그들이 예수를 만났던 곳은 그들의 일상의 한 순간이고 평범한 일이었다.
3.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는 때는 그들이 예수와 함께 했던 체험을 기억해 낼 때였다.
 
기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래서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빈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찾는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낚시를 가본적이 있으세요?
내가 고기를 낚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묻습니다. “뭐좀 잡았수?” 내가 무엇을 잡던 못 잡던 그들의 알아야 할 일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무슨 일로 슬퍼한 적이 있으세요?
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 묻습니다. 그가 그 일을 해결해 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행해 보신 적 있지요?옆에 있는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데 와서 이런 저런 얘기로 귀찮게 할 때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처럼 말이죠.
 
그래서 어쩌면 부활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일들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만날 때 안개가 깔리고 음악이 깔리며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그저 영화에 나오는 장면일 뿐 복음에서 말하는 부활의 실제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야 하는 것이지요. 아니 그분은 우리의 일상을 통해 나타나신 다는 것이지요. 해서 영화의 한 장면이나 기적을 상상하는 우리 같은 범인은 부활을 교회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속으론 믿으면서도 혹시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니까 그저 입으로만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이고 가장 큰 사건인 부활을 이렇게 못 믿으니 우리의 신앙이 그저 입으로만 외는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0년전의 사건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설명하려면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우리는 그것을 보려하지 않고 아니 어쩌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함께 먹고 자고 일했던 그분의 모습을 어떻게 3일이 지난 후에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요? 복음이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면 평범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장면을 상상하고 있기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의 사건을 기억해 낼 때 그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그는 어부였고 똑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를 때 그분의 사랑스러운 음성을 듣고, “라뽀니”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으면서도 못 알아 보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비로소 그분이 누군가를 알아보았지요. 즉 예수님과 함께 했던 주의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면서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습득된 지식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되려면 체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체험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신비일 수도 있습니다. 해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게 됩니다. 해서 부활은 신비입니다.
 
어떻게 부활을 체험하냐구요?
어디서 부활을 체험해야 하냐구요?
 
어디서 그분을 만나십니까? 여러분의 일상에서 만나야 합니다. 바늘을 방에서 잃어버렸는데 그 잃어버린 바늘을 밖이 환하다는 이유 하나로 밖에서 찾고 있다면 절대 찾을 수 없겠지요.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평범이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깊숙이 관여하고 계시는 분을 하늘만 쳐다본다고 하늘이 열리겠습니까?
 
성서를 읽으십시오.
그 성서가 이 천년 전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지금 행해지고 있는 뉴스의 생생한 보고라고 생각하고 내 처지를 성서 안에 집어넣으십시오. 전쟁 중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어머니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모님으로 보시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지금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유괴범을 바라보는 그들의 부모의 마음이 성모님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마음이라면 너무 지나친 상상입니까? “하느님,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십자가에 달려 울부짖는 예수님의 비통한 절규를 “하느님이 어디있냐?”,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 아이가 유괴당하고 죽임을 당했느냐” 고 외쳐대고 울부짖는 이웃의 소리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성서를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니 체험하게 되고, 그분이 다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하게 될 때 우리가 믿는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 되고 그분의 부활을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알렐루야를 노래할수 있을 겁니다.
 
밤에 서울 상공을 날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많은 십자가의 네온사인의 불빛을 보면서 울부짖는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아니 웅장하게 서 있는 교회 앞에서 부서지고 낮추어진 이웃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부활을 체험 할 수 없을 겁니다. 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가장 근본 교의조차 의심하며 하느님을 의심하고 교회를 의심하는 얕은 신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저 부활은 성서에 적혀있는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실제입니다. 그 실제를 체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온 마음으로 알렐루야를 노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볼 수 있을 때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소리치며 울부짖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 부활하셨네. 알렐루야를 그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참 기쁨으로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부활을 체험하실 수 있도록 기도로 함께 합니다. 부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성 금요일 아침에,
두지니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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