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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교향곡 9번 E장조작곡과 배경]:카페 "향기로운 삶의 쉼터"'하늘바람꽃'님글.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9번을 위해서,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작업했다. 9번은 그의 마지막 최후의 삶에 대한 결정체이다. 숨을 거두는 그날에도 마지막 악장을 잠시 작업하다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에게 이 곡을 바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곡의 음악적인 형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선율의 처리 방법은 복음정을 각별히 많이 구사하였으며, 풍부한 하모니는 바그너적인 반음계법이 침투하여, 음의 장대한 흐름은 아주 개성적인 면모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을 통해서 더욱 베토벤의 교향곡적인 형식을 발전시킨 셈이 된다. 9번의 최초의 스케치는 63세 때인 1887년 9월이며 그후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3악장까지 작곡하고 200페이지 분량의 피날레 스케치를 코다까지 남겨둔 상태로 서거하게 된다. 이 피날레를 가지고 브루크너의 의도와 비슷하게 다시 완성하려는 시도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코다 부분은 브루크너의 영면과 함께 엄숙한 세계로 완결 지어졌기 때문에 굳이 피날레 부분에 손을 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브루크너는 마지막에 이 피날레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바랬었다.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인 1903년 2월 11일 빈에서 Ferdinand Lowe 지휘로 당시 막 창단된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 (Wiener Konzertvereinsorchester)에 의해 행해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에 해당한다. 뢰베는 작품의 연주를 원활히 한다는 미명하에 브루크너의 악보를 수정했으며 그 수정본이 Doblinger에 의해 이듬해 출판된다. 1934년에야 Alfred Orel이 편집한 오리지날 악보가 출판되게 된다. 크나퍼츠부쉬 (1950)를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1944), 아벤트로트 (1951) 등은 모두 이 오리지날 악보를 쓰고 있다.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1951년에 출판된 Leopold Nowak판을 이용하고 있는 추세다. '브루크너’란 단어를 대면 사람들은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갈리기 마련이다. “그 지겨운 걸 어떻게 참고 들어요?” 혹은 “진실로 숭고하고 감동적입니다!” 브루크너에 대해 이렇게 선호가 갈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사람들의 통상적인 기호나 취향에 발맞추기보다는 꿋꿋하게 자신의 것만을 추진해 나아갔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만만디 정신’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초인적인 딜레탕트적 아집’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소박하지만 집요한 면모를 보이는 음악어법, 느리게 꿈틀대는 선율 윤곽, 그리고 오르간을 닮은 독특한 관현악법 등은 청취 집단을 찬동자와 반대자로 양분하고야 만다. 이런 ‘브루크너 문법’에 감화 받은 이는 넘치는 황홀경에 이른바 중독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는 그런 현상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이러한 일은 브루크너 당대에도 허다했다. 브람스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가리켜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취상태이며 1, 2년 안에 잊혀질 것이다.” 라고 말하였고, 브람스를 옹호한 음악 비평가 한슬릭은 브루크너 교향곡 초연에 참석하여 친절하게도(?) 늘 신랄한 악평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반면 브루크너의 제자인 프란츠 샬크와 요제프 샬크, 구스타프 말러 그리고 말러의 동창생이었던 크쥐자노프스키와 한스 로트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 였다. 말러의 첫 출판물이 브루크너 교향곡 제3번의 피아노 편곡반인 사실은 결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천국적인 길이’로 교향곡을 만들듯이 번식하며 팽창하는 브루크너 특유의 작곡기법은 베토벤의 논리성을 추종하는 브람스파보다는 바그너파에 가까운 젊은 작곡가들을 자극했다고 할 수 있다. [음반 리뷰] :웹사이트 "Go classic 김성익님의 글"
세르쥬 첼리비다케 (지휘)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본 신보와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하 SRSO이라고 약칭함)과 뮌헨 필과 녹음을 비교해보면 21년의 시간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모든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녹음에서 공해 절대 지울 수 없는 첼리비다케만의 향이 스며 나오는 점은 기존의 지휘자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브루크너 음악의 이상향을 찾아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차지하는 SRSO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뮌헨 필과의 연주가 매우 훌륭한 연주로 평가되는 것과 별도로, SRSO 연주 또한 그리 가볍게 지나칠 연주는 아니다. 이 녹음은 음향적인 기술이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첼리비다케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면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뛰어난 지휘자의 면모를 과시하는 여러 부분의 모습을 통해서 첼리비다케를 다시금 생각케 만드는 연주다.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과의 탁월한 교감에 앞서서 SRSO를 통해서도 충분히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펼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결국 7번, 8번과 함께 발매된 DG의 첼리디다케 브루크너 에디션 1집 중에선 이 9번 연주가 가장 뛰어나다. 수많은 브루크너 음악 연주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연주들에도 적용되겠지만 가장 뛰어난 연주가 지녀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점은 작곡자, 즉 브루크너가 원했던 것처럼 악보에 충실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지휘자는 악보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관점들을 청자들에게 던져줄 수 있어야만 한다. 전자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자만 강조한다면 이는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셈이 된다. 대부분의 지휘자는 전자를 충족시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다. 최근 반트와 베를린 필과의 연주 (RCA)는 악보에 충실하고자 하였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실성이 부족한 음향 때문에 드러나는 아쉬움은 매우 안타깝다. 그리고 반트는 더 이상 진취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더 새로운 성찰이나 고찰은 없었기에 상당히 내용적으로는 빈약함을 면할 수 없었다. 물론 첼리비다케와는 달리 5년이라는 세월 차가 존재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겉을 화려하게 꾸미더라도 속이 텅 비었다면 처음에는 잠시 귀를 혹할 수 있겠지만 마음까지는 무리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첼리비다케의 SRSO와의 연주를 살펴보기로 하자. 1악장 제시부 제 1주제까지의 첼리비다케는 매우 악보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악상 지시어에 표시된 부분이외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조절하는 등 매우 절제된 표현이다. 이 때문에 자칫 소극적인 표현으로 일관되기 쉬우나 이는 기우다. 또한 음량이 이렇게 절제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녹음과 관련된 부분일 수도 있다. 전체적인 녹음레벨을 리마스터링되면서 저음보다는 중, 고음을 매우 가다듬은 노력이 엿보인다. 저음 과잉으로 성공적인 연주를 이끌어낸 음반이 적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엔지니어의 선택에 공감한다. 이는 브루크너 교향곡 9번에서 콘트라베이스나 팀파니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떤 선택이 효과적인 표현인지는 분명하다. 전개부 (9:56)이후부터 코다까지도 악보상의 지시에 충실한 면을 보이며 갑작스런 템포변화보다는 안정된 진행을 우선한다. 현의 터치는 매우 부드러우며 금관은 큰 음량보다는 세밀한 표정에 중점을 두며 목관 역시 클라리넷을 중심으로 선명한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코다 (22:11)로 접어들면서 목관, 금관 순으로 곡을 고조시키지만 마지막 코다가 끝날 때의 제 1트럼펫이 등장하는 563, 564 마디는 미온적인 형태로 접고 만다. 반트 (베를린 필)보다는 조금 낫지만 반트 (NDR)에 비하면 매우 약하다. 첼리비다케의 EMI 녹음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약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것을 녹음이나 라이브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다. 재현부의 투티 밸런스로 볼 때 충분히 이 정도는 완성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건적인 표현으로 마무리짓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2악장 3악장 전개부에서는 제 1주제와 2주제가 번갈아 가면서 곡을 변화시키며 곳곳에 첼리비다케의 박자 짚는 구둣발 소리는 또 하나의 타악기인 셈이다. 재현부의 제 1주제 (18:11∼19:57)로 넘어가면서 커다란 투티를 정점으로 서서히 곡은 코다로 치닫는다. 마지막 모든 힘을 발휘하면서 투티를 이루지만 금관의 힘이 모자라서 현과 끝까지 일치하지 않지만 반트 (베를린 필)보다는 훨씬 강력한 투티를 형성하며 경과구로 치닫는다. 곡은 점차 플룻, 금관, 현으로 천천히 끝맺는다. 결론적으로 이 연주는 최후의 뮌헨 필의 연주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연주를 듣고 뮌헨 필의 연주를 다시 듣게 된다면 첼리비다케가 평생 추구한 브루크너의 결론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 과정을 상실하고 마지막 결과만 가지고서는 그 참뜻을 이해하기가 힘든 만큼 이 연주는 첼리비다케의 연주에 대한 이해의 열쇠에 해당하는 것이다. DG에서 많이 음색 보정에 신경을 섰으며 이로 인해 매우 따뜻한 감정이 살아났다. 그러나 한껏 부드러움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미세한 부분까지 표출하고자하는 의도를 반영한다. 녹음소스가 그렇게 탁월한 음색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첼리비다케의 솜씨가 드러나는 연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