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박정희

이기종·2013. 8. 11. 오후 10:29:11

내 글의 나쁜 점 하나가 긴 것인데 다 쓰고 보니 이 글은 특히 더 길다.
그러니 짧은 글 좋아 하시는 분들은 지나치시는 게 좋겠다.


중학교 시절의 내 고향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가난에 찌든 시골 마을이었다. 
약 60호 쯤의 윗동네와 100여호의 아랫동네가 300m 정도 거리로 떨어져 있고 우리집은 윗동네에 있는데
아랫동네는 전기가 들어와 여러 집들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우리동네는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와도 사용하기 어려운 가난한 집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은 부자는 아니고 겨우 '먹고 살만한 집'이라 전기를 사용할 수는 있었는데
당시의 군과 읍사무소가 몇 집을 위해 전봇대를 세울 수 없다고 하여 '석유 등잔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에서 빌려온 세계명작소설을 밤 늦도록 읽고나면 아침에 세수할 때 시커먼 콧물이 나왔다.
장시간 독서로 눈이 침침해지면 등잔불 심지를 올리게 되고 불은 밝지만 끄름이 생긴다.

그 시절의 시골 동네는 우리 동네처럼 가난했고 몇 집의 부잣집 일을 해주면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처럼 가난해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고 부모들은 자식들 먹이고 입히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당시는 국민학교(초등학교)도 월사금이 있어서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린 아이들은 옷이 없어 벌거벗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았지만 조금 큰 애들은 부모와 함께 일해야 했다.

정부는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 '낫놓고 기억자'를 모르는 청년들도 징집연령이 되면 입영통지서를 보냈다. 
6.25로 인해 군 인력이 부족해선지 신체검사 '갑종'합격자 외에 '을종'까지 징집할 때도 있었으며 
강원도 최전선에서 1년에 한 번 뿐인 휴가를 나올 때 열차를 잘못 갈아 타 아까운 날짜를 허비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일 없는데다 한글을 몰라 잘 가르쳐 줘도 역과 열차를 잘못 타거나 내린 탓이다.

전 국민의 70%가 가난한 농어민이던 1950년 대 후반의 내 중학교 시절은 그랬다.
아이들은 많고 먹을 것이 없는 겨울은 부잣집 일도 없어 가난한 농민들은 춥고 배고픈 고통스런 계절이었다.
봄에 일해주기로 하고 부잣집에서 '장래쌀'을 빌릴 수 밖에 없는데 필요한 만큼 주지 않았다.
부자들은 머슴을 몇 명씩 두고 있어 그 많은 동네 사람들이 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햇보리 추수 때까지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야 했고 그게 '초근목피'였다.
하지만 산의 나무들이 땔감으로 없어져 민둥산이 된지 오래라 '목피'조차 없어 '초근'으로 버텨야 했다.
그렇다 보니 구정 지나 장래쌀이 떨어진 봄에는 다들 얼굴이 누렇고 바짝 말랐다.
봄에 농사가 시작되고 부짓집에서 '장래쌀' 값을 해달라고 부르면 그 날은 식구들도 배부르게 얻어 먹었다.

그런 농민들에게 정부는 있으나 마나였고 정부도 나라가 가난하여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
실제로 6.25의 폐허에서 유엔과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버티는 형편이라 도움을 바라지도 바랄 수도 없었다.
며칠 지난 신문에서 정부와 정치 관련 기사를 보고 탄식하는 이들은 동네마다 한두 명 뿐인 배운 사람들이고
라디오도 귀했지만 전기가 없어 대부분 농민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그러던 차에 4.19혁명이 일어났는데 농민들은 '이제 세상이 좀 달라지려나?' 기대하다가 곧 머리를 저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에는 해 먹는 놈은 해 먹고 잘 사는 놈은 잘 살았어도 세상은 조용?했었는데
중3의 어린 내 눈에도 4.19 후에 장면 내각이 들어선 후부터는 조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운 어른들은 '세상이 바뀌니까 그동안 못해 먹은 놈들이 해 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며 탄식했다.

그처럼 낙심하며 탄식하는 이들은 몇 명 안 되는 '유식한 사람' 이고 가난한 동네 어른들은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일상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좋은 음식과 옷과 집을 바라는 것도 아니며 그저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편히 쉴 집이면 족했다.
그들은 그 같은 생활도 못하면서 대대로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받으면서도 불평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유식한' 어른들이 또 세상이 뒤집혔다면서 처음 듣는 '쿠데타'니 뭐니 하며 흥분했다.
하지만 가난한 어른들은 이번에도 '자신들과 상관없는 배부른 사람들의 일'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세상은 계속 술렁거렸고 뭔가 달라지는 듯한 분위기가 계속되더니 '화폐개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너 고등학교 못가게 됐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군사정부가 처음 시행한 국가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준비해 놓은 입학금 7만 환이 갑자기 7천 원이 된 것이다.
어렵게 장만한 '7만 환'이 1/10로 줄어 '7천 원'이 되었으니 아버지도 나도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나 억을하여 꼬박 밤을 새우고 고등학교 교무실로 달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때는 농민들이 다 그렇게 순진 순박했고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다.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어린 나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고 몇 집은 라디오를 장만했지만 대부분은 듣기만 하는 '스피커'를 달았다.
그리고 동네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초가지붕을 기와 또는 함석으로 바꾸고 동네 길을 넓혔다.
먼저 동네 진입로와 골목길을 넓힌 후 들판의 전답 농로를 넓히니까 지게 대신 경운기와 리어카가 등장했다.

하지만 부잣집이 경운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며 살던 가난한 살람들의 일감이 대폭 줄었으며
나이 많은 이들은 두려워 동네를 떠나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갔다.
그리고 마침 군소 영세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때라 돈은 못 벌어도 먹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군사정부는 농촌 뿐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며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것이다.

70년 4월에 군생활 41개월을 마치고 제대하여 돌아와보니 이처럼 완전히 변해 어릴적의 고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상 대대의 원시적인 논촌을 누가 바꾸었고 잘 살게 했느냐를 중시하게 되었고
45년 해방되고 48년 건국 후 이승만 정부와 허정 과도내각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의 장면 내각이 있었지만
어느 정부도 전 국민의 70%인 농어민들과 20%인 도시빈민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했는데
박정희가 전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희망을 주었고 실제로 잘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만큼 성격이 급했고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에 분노했으며 
항상 엄격하게 옛날 법도를 말씀하시며 꾸중하시는 부친에게 항거?한 자유분방한 여러 형제 중의 막내였다.
따라서 박정희의 가차없는 부정부패 척결과 과감하고 역동적인 경제개발정책에 열열히 환호했다. 
그러한 진보적인 사고는 그 당시 가난했던 젊은이들과 그들의 배고픈 고통을 잘 아는 젊은이들 모두 그랬다.

나이 많은 농촌의 어른들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두려워 하면서도 군사정부를 지지했다. 
잘 먹이지도 가르치기도 못한 자식들이 빈손으로 도시에 나가 돈 벌어 자립하고 결혼도 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변화는 농촌을 지키며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온 그들로선 꿈에도 생각 못한 기적이었다.

민주화? 가난한 농촌에서 굶주리며 살아온 젊은이들에게는 '사치'였다.
그래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민주화를 주장하며 데모할 때 그들은 배고픈 고통을 몰라 그런다며 비웃었다. 
민주화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중요한 문제지만 의식주가 더 급했고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국민들이 바라는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민주화는 의식주가 해결되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이며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민주화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례 요구하게 돼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민주화 성공은 경제발전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생각하고
군사정권 시대에 고도성장하다 문민정부부터 둔화되어 오늘까지 거의 멈추어 있는 원인도 그에 있다고 본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독재를 '개발독재'라고 하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모든 환경은 국가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독재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하기 어려웠으며 
오직 인력자원 밖에 없는 상태에서 국가를 재건하려면 일정의 독재는 부득이한 일일 수 있다.
나는 오늘날 중국 경제가 급성장한 것도 박정희 식 독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사람들은 흔히 '오늘의 잣대'로 옛날을 재단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잣대로 옛날을 재면서 비판하고 있고 그것도 일부를 전체인 양 왜곡하고 있다. 
박정희는 개발독재든 그냥 독재든 독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이 말했듯이 그의 독재로 3만명이 고통받았지만 3천만명이 굶주림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18년이나 장기집권했지만 부귀영화의 사치한 생활도 치부도 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가 가장 범하기 쉽고 보기 흉한 짓이 치부인데 그 이후 대통령들 모두가 그 짓을 했지 않았는가? 
그리고 34년 전에 죽은 박정희를 비난하면서 3년 전에 죽은 노무현 비난은 안 된다는 주장도 이상하고
두 당사자가 죽었고 NLL도 그대로 있다 하지만 현실은 두 사람을 계승하는 집단과 세력이 존재하지 않은가?

나에게 박정희는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가장 훌륭한 국가 지도자였기에 존경하는 마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독재는 대부분 국민들과 무관했고 그 당시 국내 형편과 사정상 불가피했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오늘날 우리의 민주화도 박정희가 이루어 놓은 경제발전의 토대가 있었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북한 독재정권을 포용하여 도와야 한다는 '넓은 마음'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독재가 별 것 아닐텐데
더구나 그의 경제부흥 정책으로 가난을 탈출한 나잇살 먹은 이들의 비난은 더 이해할 수 없다.
내 어릴 적의 부자들 대부분은 일제시대에도 부자로 잘 살았고 어떤 형태로든 일제에 협조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박정희의 경제정책 성공으로 가난을 벗은 이들이 아니라면 어떤 경우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박정희의 리더십과 국가경영을 배우고 연구하느라 바쁘다고 하던데
우리 사회에는 박정희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 게시판에도 적지 않다.
나는 젊은이들의 박정희 독재 비난은 이해하지만 나잇살 먹은 이들의 비난은 그의 사상과 이념을 의심한다.
그리고 그들이 박정희를 비난하면서 북한 정권을 두둔 비호하면 정신병자로 본다.  


★ 며칠 전에 이 글을 굿 게시판 제주기지토론방에 올렸으나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다.
관리자가 보내온 쪽지에는 정치/북한 관련 글이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어 삭제한다고 했다.
그러나 제주기지 토론방에 게시된 글 중에 제주기지와 관련 없는 것이 나의 글 뿐인가?

어제 이 모 형제의 댓글로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관리자가 본문을 삭제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본문에 딸린 댓글이 문제라면 그 댓글만 삭제하면 되는데 엉뚱한 이유로 본문까지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 중에 그 본문과 댓글을 읽으신 분들은 그 본문이 삭제된 전말을 잘 아시겠으나
나는 관리자 쪽지조차 며칠 지나 확인한 터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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