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생각나는 두 분 선생님
엇그제 스승의 날 굿게시판에서 유정자 자매님의 글을 읽으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의 전순영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많은 담임 선생님들 중에서 초등학교 때 전순영 선생님이 생각난 것은 유 자매님의 글에 '삐아노'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전순영 선생님은 나보다 10년쯤 연상이셨으니 아마 70대 중반쯤 되셨을텐데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그리고 전순영 선생님과 결혼하신 남상필 선생님도 70대 후반쯤 되실 것이고 역시 건강하시고 잘 지내시리라 믿고 싶다.
주만사인지 굿게시판인지 오래 전에 두 분 선생님에 대한 글을 올린 기억이 있지만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즐거운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돌아보는데 두 번이면 어떻고 세 번이면 어떤가. 해마다 스승의 날이 돌아오고 한번도 찾아 뵌 일 없어 죄송천만이지만 말이다.
전순영 선생님은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담임이었는데 그 시절 영자 숙자 정자 같은 흔한 이름이 아닌 예쁜 이름인데다 용모도 이름 만큼 예쁜 편이었다. 사범학교를 갖 나온 20대 초반이라 짙은 녹색 원피스를 입으면 5월의 신록처럼 싱그러운 예쁜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학교에 '삐아노"는 없고 '풍금'만 있었다. 그래서 음악시간마다 그 무거운 풍금을 교무실에서 들고 오는 일이 큰 일이었다. 항상 덩치 큰 남학생 5~6명이 단골로 옮기면서 불평이 많았지만 예쁜 선생님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신이 나서 그 귀찮은 일을 반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남학생들 모두가 싫어하고 기피하는 교단 앞에 나와 노래 부르는 일을 그들에게는 시키지 않으셨다. 그날 배운 곡을 교단 앞에 나가서 부르는 것이 왜 그렇게 떨리는 것일까. 여학생들은 잘 부르는데 남학생들은 긴장으로 혀가 굳어 잘 부르지 못했다.
그래서 "누가 앞에 나와서 부르겠느냐?" 하시며 주욱 훑어 보시면 남학생들은 모두 팩상 밑에 머리를 숨기기 바빴다. 그리고 선생님이 "너!" 하고 누군가를 찍으시면 그 학생은 마치 어떤 큰 죄를 진 죄인이 되어 벌개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걸어 나가 망신을 당하곤 했다.
우리 반 남학생 대부분이 한두 번 이상 망신을 당했고 나도 물론 당했다. 교단 앞에 나가서 부를 때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고 여학생들이 킥킥거리는 바람에 가사를 잊어버리고 멀뚱히 천장만 바라본 대 망신을 당하고부터 음악시간이 끔찍한 시간이 돼버린 것이다.
그런데 6학년 때 우연히 중학교 남상필 선생님의 연애편지를 전해 준 것이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편지 심부름을 계속하게 되었고 그후 두 분은 결혼하셨다. 그리고 또 잊을 수 없는 것은 남상필 선생님 덕분에 그토록 끔찍했던 음악시간을 좋아 하게 된 일이다.
내 초등학교 모교는 시골이지만 몇해 전 방송 보도에 전국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다고 했다. 그 당시 한 반에 60~70명이었고 전교생이 약 2,000명이었는데 지금도 2,000명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몇 년 전에 본 모교는 크고 넓었던 운동장 두 개가 교사건물이 들어차 손바닥 크기로 작아졌다.
교실마다 한 분단에 8~9명 씩 8개 분단이었고 수업이 끝나면 각 분단이 돌아가며 교실을 청소했다. 책 걸상을 한 쪽으로 옮긴 다음 교실 바닥을 쓸고 걸래로 닦고 나서 책 걸상을 반대편으로 옮기고 똑 같이 청소하는 식이다.
그리고 교실 유리창을 깨끗이 닦고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잠그면 청소는 끝난다. 분단장이 교실 출입문을 잠그고 열쇠를 교무실 담임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하교하는데 어느날 청소가 끝나 유리창문을 잠글 때 창문 밖에서 멋진 젊은 신사가 나를 불렀다.
이 교실이 전순영 선생님 교실 맞는가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봉투 하나를 주며 선생님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선생님이 퇴근하고 안 계시면 책상 위 책꽃이에 봉투가 조금만 보이게 꽃아 놓으라고 했지만 마침 선생님은 책상에서 뭔가 하고 계셨다.
그 때는 순진한 12살이라 그 봉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 신사의 심부름을 거부할 수 없어 교실 열쇠와 함께 선생님께 드린 것인데 선생님은 나를 흘낏 보셨지만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교문을 나서니까 그 신사가 기다리고 있어 선생님께 직접 드렸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 지나 그날도 청소를 마치고 교실문을 잠그는데 그 신사가 또 불렀다. 물론 그 때도 봉투 심부름이었다. 그리고 두 번인가 세 번을 더 해 주다가 졸업하게 되어 같은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 신사가 내 담임 선생님이 된 것이다.
아니, 나중에 알았지만 그 신사가 나의 담임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선생님이 나를 자기 반에 넣은 것이다. 암튼 반과 담임이 정해지고 첫날 인사하는 시간에 그 신사가 웃는 얼굴로 교실에 들어오는 것 아닌가. 난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중학교는 한 반에 60명이었고 내 키가 중간쯤이라 가운데 섞여 있어 선생님이 나를 찾으려면 잠시 두리번 거려야 하는데 교실에 들어서자 마자 대뜸 내 눈과 딱 마주쳤고 크게 놀라는 내 모습이 우스워 그런지 아니면 신입생들이 반가워서인지 웃는 얼굴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음악을 담당한다고 하셨을 떄 나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음악이 너무 싫었고 콩나물 대가리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기 때문이다. 당연히 음악성적은 항상 0점이었고 간혹 5점일 때도 있지만 최고가 20점 이었으니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동안은 선생님 눈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그게 계속 그럴 수 있는 일인가.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상담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한참을 웃으시고 나서
"너 음악은 완전 빵이던데 왜 그러냐? 다른 과목들은 잘하면서 빵이 뭐야 빵이? 음악이 평균 점수를 왕창 까먹어 석차가 떨어지는 게 속상하지 않냐? 암튼 말야. 내가 담임이고 음악을 하는 이상 이제는 안 돼. 음악 어려운 거 아냐. 다른 과목 잘하면 음악도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편지 이야기 아무한테도 안 했지? 아주 잘 한거야. 앞으로도 그래야 하고. 이제는 소문나도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문 안 나는 게 더 좋거든. 아마 나하고 전 선생님하고 얼마 안 있으면 결혼하게 될거다. 그때까지는 소문 안 나도록 해. 알았지?"
편지 심부름은 2학년이 되어 담임이 바뀌었어도 계속했다. 주로 토요일에 전했고 초등학교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에 있어 힘든 일도 아니었다. 1학년 때는 2주에 한 번이 보통이었는데 그게 매주 토요일이 되더니 2학년 되던 해 늦은 봄에 결혼하면서 끝났다.
음악 점수도 많이 올랐다. 담임 선생님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는데 어쩔 것인가. 그런데 막상 집중해보니 담임 말씀대로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성적이 올라가니까 음악시간이 즐거워졌고 음악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보다 더 기뻐하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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