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덕분에 살아난 대만(臺灣)

이기종·2012. 7. 9. 오후 5:35:42
지구상에서 한국에 가장 감사해야 할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대만이다. 한 때는 자유중국으로 불리다가 대만으로 불린다. 한국은 1992년 노태우 정부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까지 대만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대만 정부 창설자 장개석은 1949년 모택동에게 밀려날 때까지 중국 본토를 다스리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대만 정부 총통일 때 6.25전쟁에 참전하여 한국을 도왔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중국 본토 정복을 끝낸 뒤 대만으로 도피한 장개석 군대를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1950년 초 약15만 명의 상륙 병력과 약4000척의 선박을 중국측 대안(對岸)에 집결시켰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대만에 대한 모든 군사적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대만을 포기한 것이다. 그 때문에 중국의 대만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트루먼의 발표가 있었던 1950년 1월5일에 모택동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동맹 협상을 진행중이었다.


미국이 이 때를 잡아 대만 포기를 선언한 것은 모택동에게 소련과 중소동맹을 맺지 않으면 미국이 문호를 열어놓고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스탈린 역시 모택동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공산 중국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과 수교하여 독자노선을 걷게 되면 소련과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지도력은 약해지고 미국은 중소를 분열시키려고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그런 이유로 모택동의 중국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두기 위하여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받으려고 보채기 시작했다. 

 
전쟁과 정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노련하고 냉정한 스탈린은 김일성과 모택동을 조종하면서 미국을 괴롭힐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1949년 여름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무기 독점 시대를 끝냈다.


그리고 중국이 바로 그 무렵에 공산화된 것이다. 핵무장한 소련과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이 손 잡으면 미국 등 자유세계에 대항할 힘이 생긴다. 따라서 중국이 중립진영과 미국 등 서방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 소련 영향권에 붙잡아 두는 것이 중요했고 또한 세계정세의 판도를 결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바로 그러한 때에 김일성이 남침 허가와 함께 군사적 지원과 전쟁 지도까지 해달라고 스탈린에게 매달린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한반도를 국제 전쟁터로 만들어 중국과 미국이 싸우도록 하면 중국은 자연히 소련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미국과는 적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이었다. 모택동은 대만 공격 시기를 1950년 여름으로 설정했다. 김일성의 남침 예정시기와 겹친 것이다. 만약 모택동의 중국군이 미국에게 버림 받은 대만을 먼저 공격해 점령하면 모택동은 홀가분한 입장에서 대만점령을 방임해준 미국에게 접근하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을 한반도에서 싸우게 할 수 없게 된다. 모택동의 대만 공격이 먼저인가, 김일성의 남침이 먼저인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세계사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스탈린 입장은 대만침공인가 한국공격이냐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거의 동시에 스탈린에게 공격을 위한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먼저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무기를 지원하겠다. 전쟁계획도 만들어 주겠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해도 소련군을 보낼 수는 없다"고 못 박으며 조건을 달았다. 

 
 "모택동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얻으라. 양해를 얻지 못하면 지원을 재검토하겠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에 모택동을 보증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김일성은 5월에 모택동을 찾아갔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미군이 개입하면 중공군을 파병할 것까지 약속했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스탈린과 트루먼 같은 노희한 정치가들이 요리하는 냉전시대의 국제정치판에서 무식한 김일성은 이용가치밖에 없었다. 스탈린이 자신을 미끼로 한반도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여 중국과 싸움을 붙이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남침했다. 미국 시간으로 6월27일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장관들과 의회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두 가지 역사적 발표를 했다. 하나는 미국의 해공군력으로 한국을 지원하도록 했다는 것.(3일 뒤 육군파병 결정) 


또 하나는 미7함대를 대만 해협에 보내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대만을 지키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트루먼의 결단으로 두 나라가 살아났다. 그리고 두 나라는 그 뒤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1인당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에서 머지 않아 미국을 따라잡게 된다. 

 
김일성이 먼저 남침하는 바람에 모택동의 대만 점령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유엔군이 인천상륙 후 북한군을 무너뜨리면서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모택동에게 파병을 압박했다. 김일성도 파병을 애걸했다.


모택동은 대만 점령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병력을 한국전에 보내게 되었고 스탈린의 계획대로 미국과 싸웠다. 그 때문에 미국과 친선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던 아주 짧은 기회는 사라지고 기나긴 미중 적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미국과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되었고 선진기술을 도입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모택동이 일으킨 대재앙 즉,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수천 만 명이 죽어나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후 22년 뒤 닉슨 대통령 시대에 비로소 미중 관계에 돌파구가 생겼고 본격적인 개혁 개방은 또 30년이 흐른 1980년대부터였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용당해 수많은 자국 국민들을 죽게 했고 그처럼 긴긴 오랜세월을 도탄에 빠뜨려 고통을 준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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