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되면 누가 간첩인지 알게 될것이다.
이형근 예비역 대장의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1920년 충남 공주 출생, 일본 육사(56기) 졸
'46. 5. 제1대 육사 교장, '46. 9. 국방 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사 교장
'48. 2. 통위부 참모총장, '49. 6. 제8사단장
'50. 6. 제2사단장, '50. 10. 제3군단장
'51. 8. 교육총장
'51. 9. 휴전회담 대표, '52. 1. 제1군단장
'54. 2. 합참의장, '56. 6. 참모총장
'59. 8. 대장 예편
※ 국군 군번 '1'번 : 당시 군번은 ‘조선경비대 입소 선착순 1번’ 을 의미 함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적의 움직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5월께는 내가 지휘한 8사단뿐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다.
내가 지휘한 8사단의 경우
1950년 3-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 심문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육본에 수차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둘째,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대 인사이동이다.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이다.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 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과 지형은커녕 부하들 신상파악조차 못한 상황에서 남침당했다.
당시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시기에 대대적인 교대를 단행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넷째,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6월 10일에 있었던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해 평양 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6월 23일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점이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북한측은 남북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시지를 받으라고 했다.
남한측은 이들을 그날 38선 남방 1Km지점에서 만나 메시지를 인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감시위원단에게도 수교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다.
우리 경찰들이 이들을 체포했고 북측은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강력한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남북이 티격태격하고 있는데도 육군본부는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한 것이다.
다섯째, 이런 위기상황에서
육군본부는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육군 장교클럽 건축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고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까지 갔다고 한다.
나도 초청장을 받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한 것이어서 불참했다.
일곱째, 적의 남침이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군사적 기초상식을 깬 이상한 작전지도였다.
여덟째, 6월 25일-27일 중앙방송이 허위방송을 한 일이다.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인데도 6월 25일-27일 우리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하며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중이던 국군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군본부는 그들을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하게 하여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홉째, 우리측의 한강교 조기폭파도 이해 안 되는 일이다.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우리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에 국군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 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한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 고관, 육군 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이남으로 도피한 뒤에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행위였다.
열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하여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인데
그 책임을 혼자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이토록 급하게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6·25 초전의 패배 책임을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미국의 오판이 가장 컸다.
미국은 애초부터 싸우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다.
특히 1950년 1월 21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공표한 것은
적에게 침략해 달라는 초대장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군 수뇌부의 잘못이 간과될 수는 없다.
◆ 세계 최대 간첩단을 운용한 동독 슈타지
1989년 동독정권이 무너지기 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비밀정보원이 2~3만 명이었다.
1950년 대초 미국 메카시 상원의원이 간첩으로 지목한 미국내 인사들도 대부분 소련 간첩으로 확인되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도 공산화된 뒤 월맹의 고정간첩으로 드러났다.
◆ 우리도 자유통일되면 누가 간첩질을 했는지 밝혀질 것이다.
그들은 자유민주통일이 아니라 김씨세습왕조의 적화통일을 바라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통일을 하면 그동안 김씨왕조 간첩질을 한 것이 드러나 매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조의 그림자가 짙어가고 있는 북한을 필사적으로 도우려 몸부림치는 자들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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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의 비밀 정보원 수는 2만명이 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소련의 간첩이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는 공산화된 뒤 월맹의 고정간첩으로 드러났다.
냉전시대에 공산국가들이 자유 진영에 대규모로 간첩을 보냈음을 입증하는 놀라운 실례들이다. 요즘 국내에서도 종북 논란과 함께 골수 좌파들의 발악으로 시끌시끌하다. 그래서 현대사에 기록된 간첩들 활동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생각되어 몇 가지 사례를 옮긴다.
◆ 세계 최대 간첩단을 운용한 동독 슈타지
"비밀 정보원 수 2만~3만명. 첩자로 포섭된 서독 연방의원의 숫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 총리 보좌관, 여당 원내총무, 통일부 장관도 간첩으로 포섭. 미남 공작원을 통해 서독 거물인사들의 여비서를 유혹해 정보 수집. 정계 재계 학계 종교계 언론계 학생운동권 등 사회 전반에 침투."
이처럼 동독 비밀 정보기관 슈타지(Stasi)는 서독을 상대로 미국 CIA나 소련 KGB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대적인 공작을 벌였다. 후베르투스 크나베가 쓴 '슈타지 문서의 비밀'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크나베는 수만건에 달하는 슈타지 공작문서들을 정리·분석하는 과정에서 슈타지의 서독 침투.파괴 활동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범위하고 깊숙이 진행됐음을 알게 됐다.
심지어 서독의 학생운동도 슈타지의 손아귀에 있었다. 서독 학생운동 조직 간부였던 볼프강 크라우스하르는 1998년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창시절'이란 글을 발표해 큰 파장을 불렀다. 동독이 서독 학생조직에 간첩을 침투시켜 반미시위와 반전운동을 조장한 것이다.
◆ 매카시가 지목한 사람들 대부분 실제로 간첩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공화당)은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후 4년간 미국 조야를 떨게했던 매카시즘 선풍의 시작이었다. 매카시즘은 6·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 좌파들의 집요한 반격으로 매카시즘은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를 드러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매카시가 지목한 사람들이 실제로 간첩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1995년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미국의 극비문서가 공개되면서다. 이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얄타회담에 참가한 국무부 고위 관료 엘저 히스,원자탄 기술을 소련에 넘긴 로젠버그 부부, 브레튼우즈 협정을 탄생시킨 재무부 고위 관료 해리 화이트 등이 소련 간첩이었음이 밝혀졌다. 모두 매카시가 간첩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이었다.
로젠버그 부부 등은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음에도 미국 좌파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됐다고 선전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물론 이 땅의 좌익들도 메카시를 엉터리 미친 헛소리 하는 자로 매도하면서 보수들을 케케묵은 망령을 말을 신봉한다며 비웃고 있다.
◆ 스스로 간첩이라고 말하는 간첩은 없다
1967년 전쟁 와중에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11명의 후보 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지도자 쭝딘쥬의 사례를 보면, 그는 민주 투사를 자처하며 유세 중 선동적인 연설로 반전 여론을 일으키고 월맹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했다. 월남이 공산화된 뒤에야 그가 월맹의 고정간첩이었음이 알려졌다.
공산국가 간첩들의 공통점은 건전한 민주화 운동가나 민족주의자, 환경주의자들과 흡사한 주장을 펴면서 철저히 신분을 감춘다는 점이다. 슈타지의 경우 서독 양심세력들의 학생운동 평화운동 반전운동 등을 자신들에게 새로운 간첩을 공급하는 인력 창고로 여겼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반전·반미·자주·통일을 외치며 남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듯하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핵을 개발해 온 것과 마찬가지다.
크나베는 동독 공산당이 40여년간 장기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부분 서독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서독에서 활약한 간첩의 숫자나 범죄행위보다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당시 서독 사회의 정치적·지적 분위기가 더 문제였다"고 밝혔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 김수임. 이수근 등 우리 역사에서 첩자들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700년간 서로 275회의 전쟁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은 첩자가 암약할 수 있는 온상이란 점에서 삼국시대는 첩보전의 시대기도 했다. 대표적인 첩자가 고구려 승려 도림과 백제의 좌평 임자였다.
도림은 백제로 들어가 뛰어난 바둑 솜씨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었다. 백제의 내정을 살피는 동시에 개로왕을 부추겨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쳐서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게 했다.
임자는 백제의 최고위급 실력자(좌평)였지만 나라 정보를 적국 신라의 장군 김유신에게 넘겨 결국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한 첩자였다. 임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부 정보를 유출함으로써 신라군은 마음놓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김유신은 실제 전투뿐 아니라 첩보전의 대가라는 평가도 받았다.
또한 낙랑군을 멸망시킨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우리 역사 최초의 부부 간첩단인 셈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도 첩보전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9년(1596년) 사헌부에서 군사기밀이 새나가는 것은 간첩 때문이라며 비변사(비상 내각)와 승정원(왕 비서실)의 책임을 묻자 선조가 도승지를 파직하고 비변사의 관료를 구속 수사했다.
근래에 들어선 해방 직후 미 군정기에 간첩으로 활동한 김수임과 1960년대 위장 귀순 간첩 이수근 사건이 유명하다. 김수임은 미모의 인텔리로 영어회화에 뛰어나 미군 통역으로 활동하며 사교계의 여왕이 됐다.
그는 공산주의자 이강국(북한 초대 외무부장)의 연인으로 월북한 이강국의 대남 공작을 도와 자기 집을 남조선노동당의 거점으로 제공하고 각종 기밀을 넘기다 체포돼 6·25 직전 처형됐다.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던 이수근은 1967년 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했다. 그는 북한 실정을 폭로하는 강연 등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남한의 기밀을 북한으로 보내다 발각돼 사형에 처해졌다.
1989년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전 서독에서 활동한 동독의 비밀 정보원 수는 2만명이 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이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 소련의 간첩이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는 공산화된 뒤 월맹의 고정간첩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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