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

이기종·2012. 5. 25. 오후 11:08:36

박정희는 구데타로 집권하자 미래를 계획하고 강력히 추진하면서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일이 체크했다.
건축에 비유하면 기획 - 설계 - 시공 - 감리를 모두 직접 지휘한 격이며 
최고의 부가가치인 CM(Construction Management)개념을 혼자 터득하고 이를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처럼 흔치 않은 희귀한 사고의 소유자로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한 애국자였고 국가 지도자였다.
그에 비하면 전두환은 박정희 같은 사고를 할 수 있는 두뇌가 없었고 애국심도 없었다.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오야맘대로' 권력을 휘두른 권력자에 불과했다.
 

전두환의 업적 중에 '오늘의 애국보수 진영을 만족시키는 가장 훌륭한 업적'은 삼청교육대일 것이다.
오늘날 통진당과 민통당 하는 짓을 보고 삼청교육대가 다시 설치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그런데 전두환은 놀랍게도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 장군을 삼청교육대에 보냈다.
 

장군출신이 장군을 삼청교육대에 보낸 것은 장군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킨 행위였다.
그리고 전두환이 장군을 삼청교욱대에 보냈듯이 김영삼도 전 대통령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 나라 상류사회의 품위를 격하시킨 사람이 바로 전두환과 김영삼인 것이다.
 

전두환이 좌익들을 잡기 위해 386주사파들을 강경 진압한 조치들은 돋보이는 잘한 조치들이었지만
그 대신 수많은 독선행위와 부정부패를 저지름으로써
오히려 빨갱이들이 번식할 수 있는 자양분과 기반을 그 이전의 어느 대통령들보다 더 많이 제공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연좌제를 풀어 오늘날 이 감당하기 어려운 빨갱이 세력들을 양산해 냈고
그 빨갱이 세력들에게 국가기관 곳곳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튼튼한 인프라를 구축하도록 해주었다.
전두환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줄 알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능력이 없어 앞으로 조금 남고 뒤로는 크게 손해보는 방향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1963년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냈다.
그리고 수출할 것이 없어 쥐를 잡아 코리안 밍크로 수출했고 머리를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했다.
그러면서 유엔 운크라의 도움을 받아 기술고등학교를 많이 만들어 기능공을 양성했고
그렇게 양성한 기능공들이 서독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1. 2, 3등을 매년 싹쓸이 했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세계에 각국에 특사를 보내 한국에 질 좋고 온순한 기능공이 많다며 한국에 공장을 새우라고 권했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외국자본이 물밀듯 들어와 공장을 세우다 보니 당연히 일자리가 폭증했다.
그 당시 실업율이 32%라 말 그대로 살인적인 실업률이었던 것이다.
 

1965년에는 두 개의 큰 마일스톤을 놓았다.
하나는 한일국교정상화로 대일청구자금은 물론 포항제철 건설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자본을 들여왔고
그리고 월남파병을 통해 월남특수와 중동특수를 창조하여 경제를 엘리베이터 식으로 수직상승 시켰다.
 

1966년에는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두뇌들을 모두 유치하여 KIST를 설립하고
박정희는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일본에서 받은 8억 달러 중 일부를 여기에 사용한 것이다. 
그때 많은 KIST 박사들 중에는 박정희의 열성에 감복하여 과로하다가 순직한 사람도 여러 명이었다.
 

1966년에는 포항제철 건설에 착수했으며 1973년 7월 3일부터 연간 103만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를 설치하여 대한민국의 방향을 과학입국의 길로 잡고 초석을 마련했다.
박정희가 과학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말해 주는 일화가 있다.
국무회의를 하다가도 과기처 장관이나 KIST 소장이 전화를 하면 뛰어나와 전화를 받아주었다고 한다.
 

1968년 2월1일에는 국가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하여 1970년에 준공시켰으며
1970년에는 ADD(국방과학연구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청와대에 박격포, M16소총, 군용전화기를 마련해 놓고 국방과학연구소장(심흥택)을 불러
 

“임자, 이와 똑같은 장비를 생산하시오”
 

그의 명령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행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석사와 박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과학원(오늘의 KAIST)을 설치했다.
 

1972년에는 8.3조치를 공표하여 그 당시 볼품 없었던 대기업들이 사용한 사채를 동결시켰다.
국민들이 워낙 못 살다 보니 은행에는 저축된 돈이 없었고 기업들은 암시장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다.
사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횡포가 심하여 결국 기업들이 도산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사채를 동결시킨 것은 그 돈들이 고위공직자들이 부정하게 모은 돈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업들에게 사채를 일체 갚지 말라고 지시했고 그 덕분에 기업들이 살아난 것이다.
또 그는 지하자금을 지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지하자금으로 기업을 창업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그 결과 지하자금이 지상으로 올라와 오늘의 재벌과 계열사들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가 이처럼 정신 없이 국가를 위하여 혼신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아는 것도 생각도 없는 정치 모리배 건달들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사사건건 방해하며 국민을 선동했다.
그에 미련한 일부 국민들은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 경제건설로 달려가는 진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이해할 때까지 계속 설명하면서 양해를 구할 시간이 없었던 박정희는
거머리 같고 개미 같은 그러한 저질 방해꾼 건달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막아 버렸다.
물론 갈 길이 바빠 빨리 뛰어 가기 위해서였는데 72년 10월 17일 통과한 유신헌법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은 그 유신헌법이 발효된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남한의 경제가 1972년부터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이 1972년부터 연평균 12%의 가파른 가도를 힘차게 달려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세계경제가 1973년의 오일쇼크를 맞아 침체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2년부터 1979년까지 8년간 율곡사업계획(전투력증강사업)을 추진하면서
GNP의 6%를 국방예산으로 투입했다.
1971년 계획당시의 경제성장 속도로 계산한 결과 8년 동안 소요 예정인 율곡예산은 15억 달러였다.
 

하지만 1972년부터 경제성장 속도는 박정희도 미쳐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GNP가 큰 폭으로 성장했다.
그 때문에 15억으로 예상했던 율곡예산이 실제로 투입된 금액은 6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처음 계획했던 율곡사업보다 4배 이상 확대되어 그만큼 국방력이 더 강화되었다.
 

박정희는 주로 미국에서 사양화된 군용제품의 기술자료(TDP)를 배로 무더기로 들여왔다.
그리고 공단을 세우고 기업을 입주시켜 한 두 가지 씩 제품을 지정해 주면서 생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외국어로 된 제품 설계도면과 설명서를 읽을 사람이 그 기업들에게 없었다.
 

KIST 과학자들과 국방연구소 과학자들이 그 기업에 나가 적당히 생산하려는 기업인들을 혼줄을 냈다.
시쳇말로 조인트를 까면서 철 재료의 강도와 제품의 정밀도를 강요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방산기술은 이처럼 강요된 훈련을 통해 이룩되었고 그 무렵 실업율은 거의 0%였다.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에는 박 대통령이 며칠 씩 묶으면서 유도탄 개발을 격려했던 작은 집이 있었다.
이름은 '영빈관'이지만 보통의 여느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에는 그 어느 대통령도 이 영빈관을 찾지 않았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은 과학을 모르는 정치 건달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집권하자마자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연구소들을 상당부분 파괴하거나 축소했다.
그러면서 1980년에 한국은 90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며 그 돈을 어디에 쓰느냐며 수선을 떨었다.
이 흑자의 결과는 1979년 10월 말에 서거한 '박정희 시스템' 의 산물이었지 전두환의 업적이 아니었다.
 

이처럼 돈이 넘쳐나는데도 전두환은 과학기술과 연구개발 활동을 대폭 축소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교가 무슨 석사를 하고 박사를 하느냐?”



ㅡ 지만원(시스템클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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