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학 한림원 대상 받는 오원철

외론별·2011. 9. 10. 오후 11:05:20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보(國寶)라고 부르며 신뢰했던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한국공학 한림원 대상"을 받는다는 보도를 접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오원철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산업화의 주역이었다.
그러한 그가 한국의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공로와 업적를 30년만에 인정받아
"대상"을 받는다고 하니 그 상의 무게감을 떠나 감개무량하다.


오원철은 70년대초에
그야말로 척박하기 이를데 없는 불모지에서
철강과 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의 6대 핵심분야의 육성정책을 입안하고 밀어붙여
오늘의 한국경제 초석을 닦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다.

박 대통령이 국보라 칭할 만큼 그를 빼고 한국의 경제 성장사를 말하기 어렵다.
세월을 약 40년전인 1973년 1월12일로 되돌려 그때 그가 한 일들을 돌아본다.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중화학공업 선언을 발표했다.
그때는 농업과 경공업으로 겨우 일어서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한국경제를 단숨에 중화학공업 위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때문에 외국뿐 아니라 국내 정통 경제학자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럼 박 대통령은 왜 그 당시 그렇게 중화학공업을 서둘렀는가.
69년 7월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아시아지역의 주한미군 감축을 선언했다.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생할 경우 1차적 방어책임은 당사국에 있으며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인 지원만 한다."

그러면서 미국은 1년만에 주한미군을 2만명이나 철수시켰다.
그리고 카터정부까지 이어진 그 '닉슨독트린'은 김일성의 오판을 부추켰고
김일성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등소평과 한반도 전쟁시나리오까지 협의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대해 미국을 믿고 의지해 오던 마음을 접었으며
그리고 70년에는 우리 스스로 지킬수 있는 역량을 강조하며 자주국방을 선언했다.

호전적인 김일성 때문에 한반도는 항상 긴박한 전운이 감돌고 있던 시절이라
김일성의 무력도발에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무기를 국산화하는 일이 제일 시급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떠나면 자주국방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조건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을 서둘러 선언하게 된 주요 배경이며
그러나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을 선언한 후부터 미국과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자신들 뜻대로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박 대통령이 그들에게 달가울 리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제와 국방에 대하여
두 마리 토끼를 최단 기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잡아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중화학 공업의 책임자로 엔지니어 출신 테크노크라트인 오원철을 선택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식 경제를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을 물리치고
테크노크라트를 중용한 건 경제성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그에 김형아 교수는 '박정희 양날의 선택' 이란 저서를 통해
그 당시 급속한 산업화가 가능했던 중요한 이유로
박 대통령과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들이 미국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한미간에 충돌을 야기하면서까지
독립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또 과감하게 추진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어도 자주국방 정책을 놓고 미국과 철저히 불가근 불가원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전시작전권도 마찰을 빚을 만큼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72년 10월유신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박 대통령이 선택한 카드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주국방 그림속에는 이미 핵무기개발이란 비밀 프로젝트가 숨어 있었다.
미국의 주권 침해적인 지나친 견제와 북한의 도발이라는 절대절명의 난제에 대해
그러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핵무장 뿐이었으며
하지만 그러한 정책 추진은 유신이라는 체제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유신은 독재인가?
그렇다. 유신은 분명 독재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선택한 유신체제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신은 정치적으로 독재인 건 분명하지만
그 당시 같은 혼돈과 격랑의 시대에서 과연 박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누가, 어느 지도자가 그러한 과감한 결단을 내릴수 있었을까.

박 대통령의 10월 유신은
79년 불의의 서거로 인해 한국사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미완성의 상처로 남는다.
생각없는 일부정치인들과 좌파 청맹과니들은 박정희 시대를 이렇게 평가한다.

"당시 고도성장은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지
 결코 박정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오로지 '유신독재'라는 용어로 박정희시대를 규정지으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로운 평가이다.
국민들이 신바람나게 일할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최고 영도력인 것이다.

좌파들이 비호하는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위대한 영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들이 게을러 빠져서 거지가 많고 굶어죽고 있다는 말인가.


하순봉 경남일보회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 마지막 완성을 위해 극비 프로젝트로 핵개발을 지시했다.
그리고 1981년 10월 1일 국군의날 행사장에서 핵무기를 공개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을 하야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72년 초 당시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을 불러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핵기술을 확보하라" 
비밀히 지시했고 70년대 말 핵 프로젝트는 거의 완성 단계까지 진행됐다고 했다.

미국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이 막바지로 치닫던 79년 1월1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 공보비서관 선우연 의원을 부산으로 불러 이런 말을 했다.
아래는 선우연 전 의원의 생생한 증언이다.

"나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2년 뒤 1981년 10월에 그만 둘 생각이야.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공개한 뒤에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할 거야."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후 하야할 계획이었다는 것은
당시 많은 측근들이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다.

70년대에 5년간 박 대통령의 부관을 했던 이광형씨도
박 대통령은 80년에 헌법을 개정하고 81년 쯤에 하야를 선언
그리고 낙향을 준비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정렴 비서실장 역시
78년에 박 대통령에게서 유신헌법의 전면 개정을 연구하라는 밀명을 받았으며 
그때 임기 만료 1년전에 하야할 뜻을 비췄다고 증언했다.

많은 이들이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독재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위의 증언들에서 알다시피
18년 박 대통령시대가 장기집권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체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종신집권을 꿈꾸었다면
78년 당시 62세였던 박 대통령이 측근들에게 유신헌법을 손질하라 하고
자신의 하야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겠는가.

유신은 정부기구를 준 전시상태로 유지하는 체제로 분명 독재 요소는 있다.
그러나 안으로는 기적과도 같은 고도성장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그러면서 북한의 남침야욕과 맞 상대해야 했으며
또 미국의 감시와 통제속에서 자주국방 목표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즉, 유신체제만이 최선이라고 믿고 생각한 것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없다.
일제 식민지 생활 36년
그리고 해방되자마자 6,25 사변으로 국토와 국민은 극심한 피폐를 겪었다.

열등의식, 패배감, 무력감, 나태함....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헤어날 길이 없었고 
국가마져 중심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식민사관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민의식 혁명없이는 나라의 미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다른 나라들이 100년에 걸쳐 이룩한 국가경쟁력을
20년에 완수하겠다는 국가재건 계획을 세워 실천했고 또 기적처럼 성공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시작이 5,16이고 마지막 완성이 유신인 것이다.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그리고 하야계획....
이것이 유신을 독재로만 매도하면 안 되는 이유인 것이다.

미국, 일본, 중국, 소련...
한반도 지도를 보면 대한민국은 열강들의 입에 들어있는 미미힌 존재이다.
지도를 보시라... 당시 박 대통령은 배수진을 친 것이다.

육지에는 김일성이 이빨을 드러내고 배후에는 중국과 소련이 있으며
대한해협 맞닿은 곳엔 사악한 일본이 혀를 날름거리고
태평양을 넘어온 미국은 아시아의 기지로 우리나라를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협소하고 보잘것 없고 미미한 아시아의 귀퉁이 반도에 있는 조그만 나라...
게다가 식민지 나라라는 3류보다 못한 루저국가 아닌가.
그러한 형편없는 나라를 당당한 자주국가 대한민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박 대통령이 얼마나 고뇌하고 노력했던가.

그는 독재자란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나 크고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국가의 운명은 지도자의 철학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이 왜 북한의 깡패집단에게 끌려가고 있는가.

혁명의 마지막 완성을 눈앞에 두고 악마의 흉탄에 서거하는 바람에
30년이 넘도록 북한에 끌려다니고 종래는 핵 인질이 되고 있는 것이다.
30년전 그때 진작에 끝났어야 할 남북대결이
오늘까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팔순을 훌쩍 넘긴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그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상을 받는다고 하니 풍운의 감회가 남 다르다.
여담이지만 나도 서슬퍼런 유신시절 청와대 재단의 고등학교에 다니며
간도 크게 데모를 주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학교를 떠나야 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었지만
후임 국가 지도자들을 겪으면 겪을수록
또 그 시대를 알면 알수록 박 대통령의 위대함은 더 크게 다가왔다.

대한민국에 홍복이 있어
내 평생에 한번 더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볼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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