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과 형제나라 터어키군

외론별·2011. 6. 26. 오후 5:46:50
6.25 남침과 형제나라 터어키군의 용맹성
 
 
 


북괴의 6.25 남침전쟁
아직 휴전중인 전쟁
잊혀져 가는 전쟁
동족상잔 등으로 수식되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사람으로 보면 회갑을 넘어 진갑이 되는 날이다.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에 잠길 나이다.
이제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면서 다가올 인생의 겨울 문턱을 준비하는 나이다.

그러나
6.25 때 고귀한 피로서 공산세력의 침략을 막아준 16개국 유엔군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되며
꼭 기억하고 보답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페허속에서 전세계  100여개 신흥독립국 중 꼴찌에서 2번째였던 나라를
이제는 세계 7위에 이르는 눈부신 발전과 부흥을 이룬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패망 위기에서 지켜준 모든 유엔군 장병과 장렬히 산화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터어키(turkey)

6,25 때 16개 우방국 중 15,000명의 군대를 보내 주었고
약 3,400명의 전상자를 낸 유엔군 최고의 용맹스런 군대로 공인받은 터어키 군...
'형제의 나라' 터어키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터어키의 어원(語源)은  투륵치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투룩 + 치 이다.
이 뜻은
투룩(용맹한) + 사람(치) = 용맹한 사람
 
원래 몽고부족의 하나로 퉁구스계의  우랄 알타이어를 사용한다.
우리와는 역사적으로 한민족의 황금기인 고구려 시대 역사에 등장한다.(연개소문 등)
투룩의 한자어 음역인 돌궐(突厥)족으로 불리우는 민족이다.
중국의 변방에 사는 모든 부족들을 폄하하는 말 오랑케
즉, 이른바 중화사상의 잔재로 오랑케라고 불리운 민족이다.

그런데 터어키와 우리나라는 거의 8,000Km나 떨어져 있는데 어찌 같은 형제의 나라인가?
생긴 모양도 우리보다 서양계가 더 가까운데 어떤 이유로 몽고계라고 하는가?
또 우리 역사에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는데 왜 형제의 나라인가?

간단하게 터어키 역사를 살펴보면

1.중국북방 지금의 몽고지방에서 활동했다.
2.중국의 세력에 밀려 서진하여 2개의 돌궐국으로 분리되었다.
3.사라센제국(페르시아)의 용병으로 중근동에서 활약했다.
4.사라센을 제압하고 셀주크 터어키로 터어키의 기본틀 형성
5.강성한 오스만 터어키가 20세기까지 아랍의 패권을 잡고 있었다.

돌궐족은 유목민족이었다.
우리와 같은 농경정착민족이 아니다.
사냥감이나 목초지가 부족하면 언제든지 이동수단인 말을 타고 이동했다.
지구를 동그란 사과처럼 보면 직선거리는 멀지만 북극쪽으로 가면 매우 가깝다.
국내와 해외항공의 북극권 사용 항로를 참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서쪽 아랍권으로 진출하면서 오랜세월을  통한 혼혈로 인해 용모가 서구화되었다.
우리 역사책에는
일제 때에는 우리의 만주지방 제패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였고
해방 후에는 고구려와 발해 등의 유적지들이 북한, 중국, 소련지방에 산재해 있어
연구와 조사의 어려움으로 주로 신라와 백제의 연구 조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터어키의 고대문자가 19세기 말  몽고의 오르콘 강 지방에서 비석문이 발견되고
고대 터어키 문자의 해석으로 그들의 정체와 거주지 역사를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역사책에 고구려와 한국이 그들의 형제 나라로 기록하고 가르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터어키는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아래의 비디오는 터어키 보병여단의 활약에 관하여 어느 터어키인이 쓴 영문판이다.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아래글 SKIP)

6.25 참전에 관한 혈맹 터어키 병사들의 이야기이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화이다.
터어키 군의 한국전 파병은 국회 동의도 없었으며
적군인 북한과 중공, 소련에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헌법(국제법) 위반사항이다.
하지만 터어키 국민들은 모두 형제 나라인 한국을 돕는 전쟁에 참전하기를 원했다.

터어키 국민들은 한국전 참전에 필요한 절차와 요식행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피흘리는 형제나라를 생각하며
너무 많은 군인들이  지원해서 추첨으로 지원병을 뽑았다 하니 세계전사에 기록될 일이다.
 
거의가 다 장교와 직업군인 등 출신으로 수준 높은 제1진 5,000 여명이 
미국군함에 승선하여 터어키 출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구 등지에서 약 1달에 걸친 화기교체 작업 및 교육을 끝내고 나서
(그들이 가져온 무기 성능이 좋지 않았다.)
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중공군과 일전을 벌였다.
그리고 매우 용맹스럽게 싸워 유엔군 최고의 군인으로 표창되고 한국전사에 기록되었다.

한국전의 은인 맥아더 장군은 터어키군을 영웅 중에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회교도인 터어키 군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돌격 때마다 알라신을 찾으며 
(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른 전투에서 두개골 파열 및 창상을 입고 사망한 적의 수효가
약 5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이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준다.)

그 때 터어키군 피해는 약 40여명이며 1당 10의 백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이다.
그야말로 일당 백이나 다름 없는 훌륭한 전공인 것이다.
과연 용맹한 군대였고 선조들의 전통을 이은 군대였다.
후퇴를 모르는 알라의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 대민지원 사업에도 힘썼으며
전국에 약 50여개의 고아원과 학교를 세워
전후의 고아들과 불쌍하고 굶주린 형제들을 도왔다.
1953년 휴전 이후 유엔군 일부로 남어있던 그들은 1966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철수했다.
 


 

6.25 때 전사한 터어키군 어머니의 너무나 슬픈 애가(哀歌)레퀴엠




전쟁고아였던 한국인 양녀와 터어키군 양아버지와 60년 만에 극적인 만남



터어키와 우리의 친선관계를  자세히 명시한 대단히 중요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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