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역설적 진리' 에 대한 의문 (김00)
※ 파란색 글은 손 신부님의 글이고 보라색 글은 '김00' 교우의 글입니다.
1.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에 여러 권의 대담집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독일의 저널리스트 페테 제발트와의 대담집에서 읽은 한 대목이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교황님이 가톨릭 교회 내에서 저질러진 죄와 잘못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씀을 하신 대목입니다.
“중세 때 교황청에 여행을 왔다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만 유다인 이야기를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돌아오자 교황청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식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지요.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가?'
그러자 그 유다인은 '그래, 물론 스캔들과 같은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네. 그 모든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그건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일세!'라는 식자의 말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가 계속해서 존속해 왔다면 그야말로 다른 누군가가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일세.'[...]
제가 보기로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이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 안에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이 없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교회는 물론 한숨과 신음 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위대한 순교자를 배출해 냈고, 위대한 신앙인, 선교사, 또 간호사, 교육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그런 점이 이 교회를 지탱하는 다른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음을 말해 주지요."(요셉 라칭거,『하느님과 세상』, 성바오로출판사, 82-83쪽).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광풍이 일어도 교회는 영원하리라는 걸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있는 ‘한숨과 신음 소리’ 그리고 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순교자 성인......’
하나는 사람 탓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타자가 방방이로 공을 때려서 담장을 넘기듯 이 세상에 던져 주신 거라고요? 이분법적 전제군요.
인간은 성령의 은총으로 비로소 진리를 찾아 나서는 시동을 걸 수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나 은총은 아무데나 개밥 던져주듯 내려 주시는 건 아닐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받을만한 자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이 ‘한숨과 신음소리’는 물론 성령께서 개입하지 않으셨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시지 않으셨음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
성인, 순교자를 보내주는 ‘그 어떤 존재’가 교회에 쇄신할 게 있으면 어련히 그리고 온전히 알아서 하실 터이니 각 개인이 쇄신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을 과연 예수님께서도 추인을 해 주실까?
두려움을 조성하고 우민화를 도모하여 추종케 하는 사목은 이미 박제화 되어 박물관으로 보내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2. 교황님의 말씀대로 가톨릭교회 안에는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이 늘 있어 왔습니다. 이미 열두 사도들에게서 그런 점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이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들 중에서 으뜸이며 후에 교회의 수장이 된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승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사실은,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어둠과 죄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황님이 지적하신 대로 교회는 자신 안에 있는 어둠과 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거룩한 인간들을 배출하면서 거듭 새로워졌고, 이런 점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감지하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성 베네딕토(+550)는 당시의 시대적 방종에 대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을 통해 교회가 새롭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다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226)는 철저한 가난의 삶으로써 세속적인 부와 권력에 묶여 있던 교회에 거룩한 기운을 불어 넣었습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556)는 이른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혼란의 와중에 있던 교회에 쇄신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예수회를 설립하여 교회가 구원의 도구로 재정비되는 데에 길잡이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복자 교황 요한 23세(+1964)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서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캘커타의 복녀 데레사 수녀(+1997)는 현대의 물질문명의 질주 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진 이들에게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때 하느님은 거룩한 인물들을 통하여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죄와 잘못을 유야무야해도 된다는 말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약점과 잘못에서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한다.'(교회헌장 8항)는 고백을 했습니다.
‘항상 정화 되어야’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적시에 성인들을 전권대사로 파견을 시키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니 도무지 너희들이 감히 나설 일이 아니니 깝죽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인류문명의 발달사는 물론이고 교회사의 변천 역시 대중으로부터 움터 자란 것입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교회를 쇄신하였거나 추스른 성인들도 당시의 신학이나 대중의 염원을 예언자적 혜안으로 대변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교회 정화 쇄신을 인정하시면서도 그 몫은 교회와 성인 교부들에게만 있다고 윽박지르는 건, 막하 본바닥인 유럽 교회가 박물관이 되고 쇼핑센터가 되는 판에 기둥뿌리 썩는 줄도 모르고 헛도는 유성기판 돌아가는 소리입니다.
민주주의가 발흥하고 꽃피기 위해서는 검정고무신 한 켤레에 한 표 찍는 민도로서는 그 어떤 유능한 정치인이 있다 손쳐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민도와 비례합니다. 교회 정화 쇄신도 평신도의 열린 신앙의식의 업그레이드로만 가능합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3. 교회 안에 있는 “인간적 무능함과 약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교회가 곧바로 쇄신되고 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 지식이 많다는 이들, 사회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데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비판정신이 있어야 사회든 교회든 정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하얀 종이에 있는 점들은 누구나 쉽게 발견합니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조금만 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참 궁색한 논리로군요.
비판을 귀 기울이고 반기고 중히 여길 줄을 모르고 한없이 경원시 하고 비하 하시는군요.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불만이나 트집 따위는 비판이 아닙니다. 비판과 비난의 차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시라면 비난하기는 쉽지만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맞습니다.
비난 [非難] :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음.
비판 [批判] :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시정잡배의 주관적인 궁시렁거림과 진지한 비평을 싸잡아 평가절하의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인류는 비판을 먹고 자라왔습니다.’-김은자- 유치한 권위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발상입니다.
‘비판정신이 있어야 사회든 교회든 정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하신 거라면 하얀 종이에 점 하나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쌔고 쌘 일이라느니 하는 말씀은 거두십시오.
이곳 게시판을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쇄신이라는 글자만 뜨면 꼭 염병이라도 돈 것처럼 난리법석인 것은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 법석에는 손 신부님도 끼어 계신 겁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한다.'(교회헌장 8항)>, <비판정신이 있어야 사회든 교회든 정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라는 인용을 하시면서도 주접떨지 말고 죽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대중의 태반은 쇄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부정이라도 타는 것 같아서 집으로 뛰어가 귀를 씻으려 합니다. 이와 같은 전통의 연유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겠습니까?
나는 교회를 뜯어 고치려고 설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평신도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고 말끝마다 외쳐왔을 뿐입니다. 그것을 호소하기 위하여 교회의 이러저러한 모순을 한두 개씩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나를 음해하는 자로 분류하십니다.
이에 비해서 교회는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덕분에 거듭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교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주님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는 성경의 말씀과 성사, 특히 성찬례를 통해 지속적으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서 우리를 성화의 길로 부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서툰 말재주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성직자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하자 없이 베풀어주십니다.
이렇게 전해진 은총에 힘입어 변화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인간적인 무능함과 약점”으로 점철되어서 한숨과 탄식을 자아낸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서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쉽사리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천상의 소리에는 귀가 먹고 인간의 소리에만 귀가 열리는 미물이라선지 는 모르겠습니다만 참 헛갈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죄와 잘못을 유야무야해도 된다는 말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약점과 잘못에서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항상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유야무야’해서도 안 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면서도 성령께서 다 하시는 일이니 신자들은 그저 구구리고 입 다물고 눈감고 귀 막고 있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 단순논리는 이제 좀 진화되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인간의 얕은 지각으로 함부로 하느님의 뜻을 가늠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맹종과 광신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권위주의를 양산하고 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경고 쯤 할 줄 아는 성직자, 교회로 열려야 하지 않겠는지요. 신부님의 말씀은 죄송하지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피정지도 수준 논리입니다.
4. 교회를 정화하고 쇄신하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고, 인간은 단지 하느님의 주도하시는 손길에 응답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의 쇄신과 정화를 인간의 손으로 완수할 수 있는 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신부님. 참 큰 일 났습니다.
누가 교회를 뒤엎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누가 감히 교회를 정화하겠다고 연장 들고 나선다는 말입니까? 누가 교회를 험담 합니까? 누가 흉 거리를 흔들어 일반화 합니까?
여전히 신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려다보는 버릇이 안타깝습니다. 교회 쇄신은 분명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요한23세께서 느닷없이 떠오른 개인적 발상으로 소집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학계를 비롯하여 백성들에게 무릇 익어왔던 ‘성사’였습니다.
쇄신은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에 의하여 찾아올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쇄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모습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조급증에 걸리거나 낙담과 절망에 빠져 냉소적이며 공격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뜻하는 대로 교회가 쇄신되고 정화되었다고 해도 그 공을 주님께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업적인 양 우쭐하여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은 거룩함의 원천이신 주님께 의지하면서 그분의 성화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새롭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누구나 하느님의 도구로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교회 쇄신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길은 그분 뜻을 깨닫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새로운 모양새를 갖추려고 애쓰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이란 (많은 교회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없어지고, 그리하여 그분 것,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때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성인들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구조를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한 성인들입니다. 어느 시대건 인간의 필요에 답하기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룩함이지 경영수완이 아닙니다.”(요셉 라칭거,『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67쪽).
우리가 원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하시러 오신 대상인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자고 염원하는 것입니다.
곧 “‘개혁’이란 우리의 것이 되도록 없어지고, 그리하여 그분 것,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쇄신의 시작과 끝은 어디이겠습니까.
진정한 쇄신은 성인이 나타나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거룩한 신앙으로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가야파의 사제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맹신 맹종을 지고지선지순의 신앙으로 학습시키고 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은, 전례가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날마다 새롭게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고 수단입니다.
수도자가 청빈, 정결, 순명을 서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요 수단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뜻을 전해야지 제도교회를 위한 교리를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더러워진 샘의 한 구석에서라도 맑은 물이 솟아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그 샘은 다시 깨끗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거룩하고 새롭게 되는 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실천입니다. 남에게 성화되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우선 내 자신부터 거룩해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씀입니다.
‘한 구석에서 솟을지도 모른다는 맑은 샘물’ 과 각자 묵묵히 할 일만하는 걸 동격으로 상치시키심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문맥으로 보아 ‘떠벌이지 말라 신상에 해롭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본바닥 유럽교회가 저 모양이 된 것은 그렇지를 못해서 저 모양으로 황폐화 되었나요? 그 반대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는 품고 있는 구성원이 성화의 춤을 출 수 있는 멍석을 거두었습니다.
내 자신이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미약하더라도 나의 성화와 쇄신을 통해 교회의 일부가 성화되고 쇄신되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탓하는 데에 머물기 보다는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노력이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그 작은 촛불의 구체적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 촛불조차도 종이컵으로 가려서 빛이 새나가지 않게 덮으라고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군요.
21세기의 최대 미스테리는 교회가 하늘나라와 인간을 이어주기보다 그 사이에서 위를 팔아 아래에 군림하는 전제군주 체제로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교회가 천년 이상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서구 사회에서 근세 이래 주변 집단으로 서서히 밀려나게 된 결정적 원인을 당국자들이 ‘시대의 징표’를 간과하고 그리스도의 복음 아닌 신성 로마 제국교회의 전통 요소들을 고수하는 데 급급한 데에서 보고 있으며, 한국교회가 7,80년대에 이룩한 역동적 성장세를 90년대 이후에 지속시키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 또한 ‘시대의 징표’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지 않고 역행하는 지도자들의 안일한 자세에서 보고 있다.········”
-심상태 몬시뇰의 “잘 뜨다가 추락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 중에서-
“권위주의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사실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최근 우리 사회가 과제로 했던 구조조정이라는 것 안에 권위주의의 청산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안다.
경직된 권력 구조는 오늘과 같은 다원사회 안에서 그 조직의 실효성을 저하시켜서 그 조직이 지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한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인간 모두가 각자 필요한 정보를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현대 문화권 안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지구화 현상은 다원적, 수평적,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제도만이 인간의 창의력과 실효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회의 제도는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대는 베드로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의 성문들도 그것을 내리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그대가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 16,18-19).
복음의 이 말씀을 축자영감(逐字靈感)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의 현재 제도와 관행을 하느님의 뜻이라 주장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 서공석 신부의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중-
“양식 있는 신자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다. 그들의 솔직한 말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날 것이다. 제도권에 몸담은 사람들의 대오각성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평신도 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서 삶의 장에 새로운 복음체험과 표현들이 발생하게 해야 한다. 높은 사람 존경받고 낮은 사람들 하릴없는 우민(愚民) 교회를 만들지 말자. 현실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 서공석 신부의 ‘교회의 쇄신, 또 한 번의 말잔치?’ 중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 추기경들에게 교회가 지금 세상을 구원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두들 가톨릭 신학교를 세우는 일, 성당을 배로 늘리는 일, 사제를 늘려야 한다는 등의 대답을 하였지만 교황님께선 “아니오. 각 본당에서 덕망 있고 참다운 사도적 정신을 가진 평신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라고 하셨습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입니다.
“자신을 만나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들리게 됩니다.......
4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저술가인 에바그리오 폰티쿠스는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입니다.
“영성생활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고 해방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로부터 받는 고통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세상이 아닌,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하느님께서 만든 사람,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진실로 자유롭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복음이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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