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이미지 타령인가?

전하는소식·2007. 8. 13. 오전 11:10:36
언제까지 이미지 타령인가?  
교인 수 감소, 남 탓하지 않는 자기 성찰 필요 
 
                                    김기현 목사(부산 수정로침례교회)  
 
   통계청이 지난 5월에 발표한 종교 인구 동향이 우리 기독교계 내에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876만 4000명이 기독교인라고 합니다. 1200만 신자, 적게는 1000만 신자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얼마나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는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가톨릭과 불교는 같은 기간에 늘어난 반면에 유독 기독교만이 줄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통계가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은 각 교단과 교회의 출석 교인 보고는 뻥튀기가 많았고 교계 내외의 뜻 있는 인사이 한국교회에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경고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을 무조건 비관적으로 전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입니까>의 저자인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저자의 말’에서 부임한 후 2년 동안 극성스러운 조직과 전도 덕분에 184명에서 600명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급격한 성장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그는 2주간의 말미를 얻어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던 중,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가 200명에서 600명이 된 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간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도 자란 것이 아니라 살이 쪘던 모양입니다. 그 살이 빠지는 것이라면 이 조사가 한국 기독교의 우울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기독교만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가톨릭의 경우, 외관상 신자 수는 증가했지만, 실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무늬만 신자’가 169만 명으로 전체에서 36%를 차지하고, 10년 새 두 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그렇지 불교는 더 심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일 년에 겨우 사월 초파일 하루 정도 절에 들르는 신자가 부지기수인 것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것도 하지 않는 불자들도 허다하다고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입과 말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중시하고, 게다가 정기적인 모임을 강조하고, 다른 어떤 종교보다 공격적인 전도와 선교 활동을 펼치는 기독교로서 신자 감소는 이만저만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타종교야 그들의 문제라고 간단히 넘기더라도 현재 한국교회 상태가 다이어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식습관을 중심으로 생활 자체의 개선이 있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음식량을 줄인 것도 아닌데, 그리고 더 살이 찌기를 바라서 계속 식사를 더 많이 하는데도 이상하게도 살이 계속해서 빠진다면, 그것은 이상 징후일 것입니다. 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목협의 8차 전국수련회’ 참석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는 현재의 위기를 바라보는 교회, 특히 목회자들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연합뉴스>의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응답자들은 기독교인의 감소 이유로 '대외 이미지 실추'(25.41%)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이어 '교회가 사회 변화를 인식하지 못함'(21.62%), '각 교단의 교세 보고의 거품'(11.35%)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도한 <국민일보>에 따르면 한목협은 “기독교 이미지가 많이 손상된 것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고 대부분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통계청의 결과를 수용하는 입장이”이라고 분석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해왔으나 그것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채 부정적인 면만 부각된 것도 이미지 실추의 주요인이라는 목소리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문 조사에 나타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진단이 잘못되었으니 처방 또한 잘못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하는 일이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진단과 처방입니다.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환자와 그의 질병에 맞는 처방·곧 약·수술·운동 등을 처방하여 병을 낫게 합니다. 하지만 병의 원인 자체를 잘못 진단한다면, 소 뒷걸음하다가 쥐 잡은 격으로 우연히 나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리고 증세와 상관이 애초에 없었으니 큰 탈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병명을 나중에서라도 올바로 찾고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을 도리어 악화시키기 일쑤일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설문 조사 결과 분석


   왜 진단이 잘못되었을까요? 이 설문 조사에서 수위를 차지한 3개항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선, 각 교단·교회의 교세 보고 거품은 한국교회의 부정직·물량주의·성공주의를 반영합니다. 이는 익히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의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보다는 외적인 화려함을 쫓습니다. 거품과 뻥튀기가 일반화 되었습니다. 표면적 신자는 신자가 아니며 이면적 신자가 참 신자입니다.(롬 2:28~29) 그러니까 이면적 신자, 즉 경건의 모양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훈련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회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에 응한 분들이 말한 사회적 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식의 변화인지, 사회적 환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어쨌든 양자 모두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옛 습관과 고루한 전통에 얽매이다보니 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위기가 사회 변화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것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선결 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입니다. 신약은 우리를 일컬어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에 비해 제자라는 명칭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제자의 진정성은 스승을 본받고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스승을 본받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건강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의 교회다움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길에 철저한가에 달려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신자 수가 급감하고,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한 달란트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가 복음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시고 때로는 거부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예민하게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구약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이 주변의 당대 문화를 기웃거린 것을 그들이 심판받은 이유라고 말합니다. 신약 역시 우리가 이 세상을 본 받거나, 사랑하는 것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여, 급변하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한 원인일 수 있으나, 부차적인 요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암묵적 전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전제란, 순수한 복음을 너무 완고하게 붙잡느라 세상의 변화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을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성경만 냅다 읽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분별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이 들립니다. 제가 보기에 정 반대입니다. 성경을 너무 안 읽고 신문만 읽었거나, 성경을 읽었지만 신문 같지 않은 신문을 탐독했기 때문입니다. 제 지도 교수가 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해서 다들 크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목사들은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조선일보>가 있다고.


   재벌들이 공적인 재산을 사유화하여 자녀에게 대물림하듯이 교회도 세습을 일삼았고, 언제부터인가 목사를 목자가 아니라 CEO가 되었고, 교회는 목양이 아니라 경영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학법이나 <다빈치 코드> 영화 상영과 같은 일에 순교의 각오로 싸우는 것은 조잡한 이기주의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사례가 너무 많아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리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변화를 안 따라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따라간 것이 문제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그러고도 세상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세상을 쫓아가야 그만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미지 실추 문제입니다. 교회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해서 실체와 별반 상관없는 부정적인 이미지 탓에 교인 수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원인을 차지했다고 하니 실로 답답했습니다. 한 마디로 실체는 그렇지 않는데 홍보를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인으로는 첫 번째이고, 해결책으로는 두 번째를 차지했습니다. 전혀 수긍 못할 바도 없습니다. 예컨대, 영화 <다빈치 코드>를 상영 반대하는 데 특정 단체의 입장이 너무 부각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일부 물의가 빚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봉사와 구제에 어느 종교 단체보다 기독교가 앞장 서는 것이 여러 가지 데이터가 입증해 줍니다. 그러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 이미지는 실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복음의 본연에 충실하게 살았지만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는 바람에 세상이 영 몰라주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는 사회적 이미지가 실추될 만한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나빠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을 교회 자신도, 세상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로날드 사이더가 쓴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비복음주의 교회·비신자를 상대로 한 윤리 의식과 행태에 관한 조사를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폭력, 이혼, 가정불화, 인종차별 등과 관련해서 미국의 신자들은 불신자들과 하등 다른 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주제가 이혼이 되었든, 물질주의, 무절제한 성생활, 인종차별, 결혼 생활에서의 신체적 학대, 혹은 성경적 세계관의 부재가 되었든 여론 조사 결과는 소위 복음주의자이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성경의 명백한 도덕적 요구에 뻔뻔스런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통계 수치들은 정말 충격적이다.’(<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18쪽)


   이 결과를 미국과 전혀 다른 정황인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얼마간의 무리가 따르겠지만,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에 그리 큰 문제는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이 미국 개신교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미국의 뒷북을 치는 경향을 살펴 보건대, 곧 따라 잡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뚜렷한 도덕적, 윤리적 우위를 점하기는커녕 매일반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의 위기가 이미지 실추가 아니라 본질 자체가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사과를, 무화과나무가 올리브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주님의 말씀입니다.(마 7:17~19, 12:33~35) 주님은 우리더러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마 5:14) 빛은 어둠 가운데 찬연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동네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고, 우리의 착한 행실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결과로 예상했던 대로 교인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육신의 정욕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빚어진 것입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말입니다. 실력이 빼어난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이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다면, 절로 불신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홍보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속은 비어 있는데도 이미지 타령만 한다면, 그것은 회칠한 무덤이 되는 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예수님은 경건에 극히 중요한 세 가지 요소인 기도와 헌금, 금식을 가르치면서 누차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하셨습니다.(마 6장) 하나님 아버지가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미지 개선한다고 교회가 부흥하고 역사가 변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쁘고 아름다운 고급 페인트로 아무리 칠을 하려는 이미지 타령은 그만하고, 내 송곳을 열심히 갈아야 하겠습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내실을 튼튼히 다져야 하겠습니다. 이미지를 탓하거나 홍보 부족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절로 좋은 열매를 얻게 됩니다.(2006. 8. 4.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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