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토요일(2008-04-19) 전례 말씀

2008. 4. 19. 오전 9:46:31

글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진리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예수님과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스로 그 진리를 깨닫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 구원의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께 마음을 둘 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미사 추천성가] :
시작성가 : 3번 빛의 하느님 봉헌성가 : 513번 면병과 포도주
성체성가 : 178번 성체 앞에 파견성가 : 135번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 예수
     
     

 

♧ 부활 제4주간 토요일(2008-04-19) 전례 말씀 ♧ ♥♥♥ ****** [독서 : 사도 13,44-52] :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떠나 세 차례의 전도 여행 때마다 긴 연설을 하였다. 첫 번째 여행 때에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는 유다 회당에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이 설교에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에게 배척당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한 것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찬양하였다. 이스라엘은 구원 선포를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들 가운데에 교회가 탄생한다. *** [복음 : 요한 14,7-14] : 필립보는 하느님의 모습을 진정으로 보기를 바라고 있다. 필립보 사도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맺으신 깊은 일치를 분명히 밝히시게 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며, 예수님의 행동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통하여 일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은 앞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게 될 것이다. ****** ♥♥♥
     
     

 부활 제4주간 토요일(2008-04-19) 미사 전례

     

 [입당송] : 1베드 2,9 참조

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주님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찬양하여라. 알렐루야.

 [본기도] :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대축제를 지내게 하시어, 천상의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현세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말씀의 초대] :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친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랐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바오로 일행을 시기한다. 사람들을 선동해 그들에게 시비를 걸게 한다(제1독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모른다. 단순한 진리를 외면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복음).

 [제1독서] :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예물기도] :

주님, 주님께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마음에 드시는 하나뿐인 희생 제사를 바치셨듯이, 저희 온 생애도 주님께 드리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부활 감사송 참조>

  [영성체송] : 요한 17,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지내 왔습니까? 그럼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수도 없이 이렇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삼위일체의 주님을 찾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님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늘 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에는 감사를 드리고, 시련에는 그 의미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성체로 저희를 기르시니, 저희가 간절히 바치는 기도를 들으시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파스카를 기념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신 이 성사로, 언제나 주님의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우리 주…….

 [파견] :
시편 98(97),1.2-3ㄴ.3ㄷ-4(◎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 끝들이 모두 보았도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도다. 주님의 오른손이, 주님의 거룩한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도다. ◎
○ 주님께서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의 구원을 알리셨도다.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도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의 자애와 성실을 기억하셨도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 끝들이 모두 보았도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 환호송]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한 8,31ㄴ-32ㄱ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게 되리라.
◎ 알렐루야.

 [복 음] :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부활 제4주간 토요일(2008-04-19) 복음산책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사도 13,44-52 / 복음 : 요한 14,7-14 *

     

<독서강론-1> :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복음

바울로의 복음 선포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에 회당의 핵심 인물들은 바울로에게 위협을 느껴 그를 반대하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바울로 일행은 확신에 차서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선포했다.

이처럼 바울로는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들은 복음을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바울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가 정당하며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언한다. 또한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이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섬기던 바로 그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암시한다.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신도가 되었고,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갔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선동하여 바울로와 바르나바 일행을 추방했다. 그리하여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그 마을을 떠났지만,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전교로 신도가 된 마을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도처럼 성령을 받았으며(2,4; 4,31; 10,44) 이 지역 교회는 점점 더 융성해 갔다.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은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오히려 복음을 거부했다. 그들은 메시아는 정치적인 왕이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결코 정치적 메시아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믿음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바울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믿음으로 볼 때, 바울로 일행은 분명 이단이며, 하느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바울로 일행을 반대하고 추방했던 것이다.

잘못된 믿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종교를 믿는 믿음은 자칫 하느님을 거스르기 쉽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수없이 박해하고 죽였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에 바울로 일행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을 거부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자유의지까지도 받아들이실 정도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을 그만큼 존중하시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떠나시는 것이다.

루가복음(2,7)을 보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관에 들어가시지 못하고 떠나시어 외양간으로 가신다. 그 여관에는 사람이 들어갈 많은 방이 있었지만, 주님을 모실 방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그 여관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음의 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모실 방이 없으면 주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다. 바울로 일행이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실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마음의 방을 비우는 것이다. 그 빈 방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담는 것이다. 때문에 마음의 방을 비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떠나실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 마음의 방을 깨끗이 비우자. 마음속의 빈 방에 주님을 초대하는 하루가 되자..................◆


[말씀자료 : 경규봉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1> :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신앙인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시기하며 박해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먼저 율법을 받아들여만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법의 준수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이 종말에 새로워진 하느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율법 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된다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들의 믿음이 허사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신들의 수고를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과 영생이 중요했다. 더욱이 구원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총임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방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며 신도가 된다. 유대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고 쫓아내지만, 사도들은 계속하여 다른 지역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다. 구원이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라면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분도 없으므로 열심히 살 이유도 없고, 열심히 사는 것이 손해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만 바라보기 때문에 갖는 어리석은 생각이며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바라보고 산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많은 죄를 지었으며, 헛되게 살았는가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티끌과 먼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신을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칫 자만심과 우월심에 빠지거나 반대로 자기 비하를 하거나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

믿음이란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깊은 사람은 항상 겸손하다. 그러한 믿음이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 자신의 올바름과 의를 믿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신들과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을 같이 취급한다고 사도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은 그들을 비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기쁨에 넘쳤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사람을 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람 앞에 서기보다 하느님 앞에 서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을 내세우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겸손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2> : 화안한 자작나무 같은 사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얼마 전 복스럽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와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닷가에 두고 왔지만, 얼굴 못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그 녀석 얼굴이 자주 떠오릅니다. 빨리 보러 가야겠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되는 흰색 진돗개 순종입니다.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눈에 쌍꺼풀까지 있습니다. 하는 행동이 얼마나 예쁜지, 또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그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미물인 강아지 한 마리에게도 이렇게 애정이 가는데, 어린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 마음은 얼마나 더 각별하겠습니까?

우리 어린이들, 옆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다들 예쁩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 새싹 같습니다. 새순 같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 같습니다.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가끔씩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도 시시한 놀이인데도 정말 재미있게, 신나게, 괴성까지 질러가면서 열심히 놀이에 몰두합니다.

그들 삶의 모습에서 배울 것도 많습니다. 제가 볼 때 별것도 아닌 것인데 엄청 기뻐합니다. 특별한 것도 아닌데 펄쩍 펄쩍 뛰면서 행복해합니다. 정말 작은 것인데도 크게 감사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의 얼굴이 그렇게 뽀얗고 통통하고, 빛깔이 좋은가봅니다.

확실히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삶이 행복해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린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삶과 관련된 특징 한 가지가 있더군요.

어린이들은 인생에 대한 기대치가 어른들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기성세대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얼굴이 피어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타인에 대한 기대치 역시 우리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 이유로 그들의 삶이 그렇게 빛나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날을 맞아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너무 영악하게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느라, 그들 특유의 해맑음과 순수함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새롭고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며 가슴 뛸 줄 아는 사람,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깊은 산 속 키 큰 나무 곁에 혼자 서 있어도 화안한 자작나무’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구세주를 자신의 목전에 두고 “구세주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코앞에 메시아를 두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어린이의 마음, 어린이의 순수성, 어린이의 겸손함, 어린이의 단순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도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한번 제대로 뵙고 싶습니까?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자만심의 키를 낮추십시오. 무거운 죄의 짐을 떨쳐버리십시오. 선입견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십시오. 마음의 때를 씻고 또 씻으십시오. 고정관념과 집착의 틀을 깨고 또 깨십시오.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이런 노력을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우리의 눈이 맑아져 지존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명료하게 바라 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양승국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3>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여러분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도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특히 사제성소의 길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자 숱한 질문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을 만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간절히 바래왔습니다. 하느님만 아니 예수님만 아니 성모님만 아니 성인 중에 한분만이라도 만나기를 바라면 그러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나의 삶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과 신앙을 구별하여 생각하고 생활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의 결여로 인하여 갈등과 혼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의 신앙이란 바로 삶이라는 삶이 또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신앙의 확신을 얻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곤 합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또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함께 생활해온 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직접 그분께 묻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또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숱한 조상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하느님의 사람. 곧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이신가하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여러 조상들이 하느님께 받으려 했던 그 큰 선물이 지금 자신들에게 와 있는지를 묻는 대단한 질문이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오늘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또한 허탈함마저도 느껴집니다.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의 답은 바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청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는 목적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마쳐갈 무렵에 제자들을 앞에 두고 확신을 주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오늘 복음으로 읽고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갖는 삶의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날 희망을 갖고 사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시기에 가져야 할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할 줄 안다면, 부활시기를 지내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어떻게 준비하며 사십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멘..............◆


[말씀자료 : 김형태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4> : 참 행복, 참 생명을 주시는 분

찬미 예수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의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 계속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다가오신 것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과 당신이 앞으로 하실 일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계속해서 들려주는 장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은 하느님이신 주님의 정체에 대해 아직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주님이 하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앞선 요한 14장 5절에서 토마스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겠느냐"고 주님께 되묻는 장면과 오늘 복음 8절에서 필립보가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두 장면을 보더라도 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주님이 정말 누구신지 모르고 있으며, 또 주님께서 앞으로 하실 구원 섭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왜 공생활 내내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 했고 주님의 말씀과 행적과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지켜보면서 가끔 그리스도임을 고백했던 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여전히 주님께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가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고 여전히 확실한 믿음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어리석고 무식한 제자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모습이나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모습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가 "아버지 하느님을 뵙게 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한 간청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바라고 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하느님이신 주님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함께 살았던 필립보도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 했는데, 하물며 직접 주님을 볼 수도 없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란 더 많이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혹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직접 주님을 본 필립보도 주님을 몰라 봤는데, 하물며 주님을 한번도 직접 보지 못한 지금의 우리들의 신앙이 약한 건 당연하거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주님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필립보의 몰이해를 통해서 주님은 오늘 아주 중요한 신앙의 진리를 이 시대의 필립보인 우리들에게 아주 자상하고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과 하느님과의 완벽한 일치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믿으라"고 명하십니다.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 사실을 믿어야 되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보아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 진실을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행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과 내가 관계를 맺는 신앙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직접 이야기해야지만 성장하고 굳건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봤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또 하느님을 봤다고 해서 저절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자신의 신앙이 굳건하게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그리고 내 영혼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 진정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하느님을 본 것이란 말입니다. 필립보처럼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봤다고 해서 진정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그 구한 바를 실천할 때 참으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서 함께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업적을 이루신 것처럼, 마음으로 믿고 구하는 제자들 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고 나를 통해 구원 업적을 행하실 수 있는 참 제자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자료 : 강지원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5> :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토요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나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지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야 다가오는 주일이 더 즐거울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진정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따르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한 주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좋은 묵상 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이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영광을 실현시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이 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우리들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름 앞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아로새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이 불려지는 이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 즉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1독서에서 그러한 갈등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배척받게 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환영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받아들일 것 같았던 유다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환영받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믿고 따르기가 쉽지 않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삭막한 도시 생활과 경제 중심의 활동에서는 오는 여러 가지 물질적 욕심도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바로 우리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개인주의적인 마음이 더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관대히 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가 아닌 '나 자신의 이름으로'구하는 나의 모습이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은 할 뿐 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내 안에서 머물고 말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주님이 주신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이 지상의 모든 잘못됨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가 단순히 자신만의 안녕과 자신만의 편의에서 벗어나 진정 우리가 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웃 사랑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부활 4주간 토요일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번 한 주간을 돌아보며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 넣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다운 마음으로 새로이 한 주간을 시작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자료 : 장훈철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복음강론-6>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라고 필립보 사도가 주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 질문은 하느님을 보다 명확하게 알고 싶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소망을 표현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은 중요한 초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자신의 지적인 면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질문은 하느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모든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욕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1,17)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필립보의 요구에 예수님은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9-10절) 하신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참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이미 아닐 것이며 믿음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우리 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게 된다. 즉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은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친교,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말씀하시고 행하신다. 즉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신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체험 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올바로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청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외자(局外者)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말씀자료 : 외방선교회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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