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여 황새바위, 또는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하여 항쇄바위라고도 불리운 이곳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를 기록으로 남기며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이 된 순교지이다.
당시 공주에는 충정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충청감사)와 감영(현재의 市)이 있었다. 공주 감영에는 세칭 ‘사학(천주학) 죄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끌려와 감사의 명령에 따라 황새바위에서 처형당하곤 하였는데 공개적인 처형이 있을 때면, 맞은편 산 위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병풍모양으로 구경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처형된 순교자들의 머리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시키기 위해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았으며, 시신은 일반 죄수들과 섞인 채 지금보다 훨씬 넓은 황새바위 앞의 제민천에 버려져 금강을 순교자들의 붉은 피로 물들이곤 하였다.
순교자들은 참수(목을 베어 죽이는 것), 교수(목을 옭아매 죽이는 것), 옥사(고문이나 벌 때문에 감옥 안에서 죽는 것), 아사(굶어 죽는 것),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밧줄을 죄수의 목에 씌우고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낸 수 옥 안에서의 신호에 따라 밖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 당겨 죽인 후 시체를 밭에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어 죄수의 목을 옭아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인 1866년과 그 다음해에 가장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었으며,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꼬와 10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았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순교자들의 이름조차 알수 없었으나, 현재 공식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도 248위이며, 이들 중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103위 성인품에 오르셨다. 최연장자는 84세 남상교 아우우스티노(성 남종상 요한의 부친, 1866년 1월 옥사)이며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10살 밖에 안 되었던 김춘겸의 딸(1866년 4월 교수형) 이었다.
20여명에 달하는 20세 미만의 어린 교우들과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켜낸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지금도 순교자들의 고결하고 굳건한 신의 숨결이 살아 이곳 황새바위에서 후손들과 함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