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2006. 9. 27. 오후 1:26:00
글자
□ 한국 교회사
1. 한국 최초로 입국했던 성직자는 누구일까요?
① 샤스땅 신부 ② 세스페데스 신부 ③ 주문모 신부 ④ 베르네 범 주교
☞ ②
2.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과정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특징적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에 의해 전교 된 것이 아닌 스스로 학문적 탐구에 의해 찾아서 얻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벽 등이 참여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던 단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강학회
3. 다음에 제시되는 사건들과 관련된 교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1784년경 겨울부터 시작된 지금의 서울 명동, 즉 명례방에 위치한 이 교우의 집에서였습니다.
② 대부분은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부자 등 양반이었으나, 이 교우만 중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양반집 자제는 훈방되었으나, 이 교우만 중인 계급이어서 구속되었습니다.
③ 그러나 권일신 부자 등은 압수된 물건을 요구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이 교우처럼 천주교를 신봉하니 같은 처벌을 받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형조판서는 이들을 다시 훈방하고 이 교우에게 배교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형벌을 가한 후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④ 이 교우는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조선 정부 문헌에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⑤ 이 교우는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 김범우
4.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에는 성직자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 있어 교리 지식에 대한 부족에서 나온 선의의 과오로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은 스스로 성직자의 교계 체제를 설정하여, 성사를 집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가교계제도'라고 합니다. 당시 고해 성사에 있어서 죄에 대한 보속은 일반적으로 남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선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죄를 범한 경우, 그 보속이 무엇일까요?
☞ 조선시대의 관습을 적용하여 신부에게 직접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5. 초창기의 한국 교회는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 출신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명은 역관 출신으로 한국 교회에 있어 첫 회장이 되었는데 그는 누구일까요?
☞ 최창현(요한)
6. 다음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일까요?
①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입니다.
② 회원들은 소수로 구성되어 집회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신앙의 진리를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였습니다.
③ 황사영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모임이 여섯 군데에서 열렸다고 해서 육회라고 불렀습니다.
☞ 명도회
7. 우리 나라에 천주교 설립 연도는 1784년이고, 교구 설정은 1831년입니다. 그러면 초대 교구장은 누구일까요?
① 뵈르네장 주교 ② 삐레스 주교 ③ 브리기에르 소 주교 ④ 까벨라리 주교
☞ ③
8. 한국에서 최초로 선발하여 파견한 세명의 신학생은 누구일까요?
☞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9.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용산 신학교입니다.
☞ X
10.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주교 서품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김수환 추기경 ② 노기남 주교 ③ 김남수 주교 ④ 김옥균 주교
☞ ②
11. 1770년대 후반기에 와서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학을 연구하게 됨으로써 이 천주학을 종교로서 받아들이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 때 남인 학자였던 권철신을 중심으로 이벽, 이승훈, 정약종 등 10여명이 주어사 천진암에서 천주교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이 모임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요?
☞ 강학회
12. 1783년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던 이승훈은 1784년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종교 서적과 성물 등을 가지고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후 그는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고,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로서, 이 초기 교회 공동체가 종교 집회를 갖던 곳은 어디일까요?
☞ 한성 명례방
13.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의 순교 사실을 「기해일기」에 첨가하여 「기해, 병오 순교자전」을 프랑스어로 편집하였는데, 이것을 한 조선인 신부가 라틴어로 옮겨 로마에 보냄으로써, 로마에서는 이 문헌을 토대로 1857년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 중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이들 중 79명이 1925년 복자위에 올랐다가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같이 많은 순교 성인들은 모시는데 크게 기여한 이 조선인 신부는 과연 누구일까요?
☞ 최양업 신부
14. 을사사건 이후 교회를 재정비하고 신앙 강화를 위해 '가성직자 제도'를 마련하지만, 그 제도가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된 초기 천주교 공동체는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를 요청하게 됩니다. 결국 몇 차례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게 되는데, 1794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입국한 최초의 성직자는 누구였을까요?
☞ 주문모 신부
15.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주문모 신부에게 바오로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로 33년 동안 '목자없는 시대'에 들어서자, 북경을 여러 번 왕래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여 결국 한 명의 중국인 신부와 세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를 모시는 등 평신도로서 신앙을 증거하고 결국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 분은 누구일까요?
☞ 정하상(바오로)
16.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권기인의 편지와 정하상의 편지 등이 교황청에 도달하자 로마 교황청의 포교성성은 프랑스의 한 선교회에 조선 선교를 부탁하게 됩니다. 결국 1831년 브뤼기에르 신부를 시작으로 이 선교회에 의한 선교가 본격화되고,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치명 순교하였는데 이 선교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파리 외방 전교회
17. 한국 최초의 성직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솔외에서 태어나 15살의 어린 나이로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1845년 조선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귀국한 지 약 8개월만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심문을 받고 결국 순교하게 되는데,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 당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 한강 새남터
18.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로 천주교인들은 '사학죄인'이란 미명아래 숱한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 나갔습니다. 많은 박해 중에서도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4대 박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대 박해 중 1846년에 발생한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말미암은 박해는 어느 박해였을까요?
☞ 병오박해
19.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분으로서, 1849년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한 이후, 12년 동안 사목 활동을 벌이다 급환으로 선종하여 베론에 묻히신 분으로, 한국의 두 번째 성직자인 이분은 누구일까요?
☞ 최양업 신부
20. 이 박해는 1866년 2월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일어난 대박해입니다. 이 박해로 9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양화진 등에서 순교하였으며,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박해는 무슨 박해일까요?
☞ 병인 대박해
21. 1873년 11월 10년 동안 집권하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왕비 민씨 일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조선의 내외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는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와의 조약들 중에서 신교의 자유와 전교의 보장 등 종교문제가 취급된 것은 어느 나라와의 조약이었을까요?
☞ 프랑스
22. 조선 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블랑 백 주교는 교회의 자선 사업을 위해 수녀회의 조선 진출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88년 4명의 수녀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지금의 명동성당 안에 수녀원이 자리잡게 됩니다. 한국에 최초로 들어와 자선 활동과 교육 사업에 큰 역할을 담당한 이 여자 수도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샬르트 성 바오로 수도회
23.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를 책임 맡은 이후로 항상 조선인 사제 양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초로 베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이후, 강원도 지방의 부엉골, 다시 지금의 용산 자리로 신학교가 이전하게 됩니다. 1887년 3월 개교한 용산 신학교는, 지금의 혜화동에 위치한 신학교로 이전하기 전인 194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방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지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용산 신학교의 공식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 예수 성심 신학교
24. 조선 교회의 발전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역사적 사건은 방인 주교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2년 1월 3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당시 종현 성당의 보좌 신부였던 조선인 사제를 주교로 임명하게 됩니다. 1942년 12월 20일, 명동 성당에서 최초의 방인 주교로 성성된 그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노기남 주교
25. 샬르트 성 바오로 수도회에 이어 많은 여자 수도 단체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수도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26. 일제 강점 시대에 교회 당국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였지만, 평신도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에 입단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자를 제거하거나 국외 독립군 모금 운동을 벌이고, 항일 시위에 가담하는 등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감옥에서 순국한 이 사람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안중근 토마스
27. 이승훈이 1783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은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창설일로서,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200주년 기념행사를 여의도 광장에서 전국의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한 바 있습니다. 한편 한국 교회는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도 80년대에 여의도에서 개최하였었는데, 그렇다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교구가 설정된 해는 몇 연도일까요?
☞ 1831년 (9월 9일)
28.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는 그 원인에 있어서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박해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조선의 국교로서 정치, 사회, 가족 등의 제도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던 이 '종교'와의 마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종교'는 무엇일까요?
☞ 유교
29.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큰 시련의 역사로 장식된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와 또 다른 박해를 포함해 우리는 4대 박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4대 박해 중에서 1846년에 일어났던 박해는 무엇일까요?
☞ 병오박해
30.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기세가 하늘을 치솟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주요 요지에 비석을 세웁니다. 거기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써 놓았습니다. 이 비석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척화비
31. 병인박해를 직감해서인지 1857년 3월 25일, 베르뇌 주교는 앞으로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교구장이 순교하더라도 그를 대신해 교회를 영속시킬 주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다블뤼 신부를 그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기 위해 교구회의를 소집합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과 소수의 평신도 회장들이 모여 3일에 걸친 토론 끝에 성직자들의 행동 지침과 활동 계획,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향상과 교세확장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을 수립했습니다. 이 회의의 결정사항은 사목교서로 발표되었는데, '교우들끼리 소러 돌려보라'는 뜻의 회람 성격을 지닌 이 사목교서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 장주교윤시제우서
32. 1864년 1월에 철종이 선왕과 마찬가지로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왕위계승을 두고 외척간에 암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풍양 조씨 가문으로 왕위 계승자 지명권을 갖고 있는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흥선군의 둘 때 아들을 국왕으로 간택하였는데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가 어려 정치적 실권은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몰락한 왕족으로서 정치적 사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방탕한 생활을 가장하여 정치 무대에 등극한 대원군은 조선 천주교회에 또 다른 대박해의 피바람을 몰고 오는데요, 그러면 흥선대원군의 본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이하응
33. 흥선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신자인 남종삼과 토론하면서 조상 제사 금령 이외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수긍하였습니다. 또한 대원군의 주위 인물들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고종의 유모였던 이 여인은 대원군의 아내이며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 민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왕가에 천주교를 전파했습니다. 이 여신자는 누구일까요?
☞ 박 마르따
34. 이러한 왕가의 호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에 대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교회 지도층은 기해박해를 일으킨 풍양 조씨 가문의 재등장과 득세를 목격하고 대원군의 난폭하고 과격한 성격과 학정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장래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염려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호의와 적의가 혼합된 정치 상황 속에서,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이 완산항에 나타나 조선정부에 통상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침 의도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한 교회의 몇몇 신자들은 '삼국 동맹안'을 제시하면서 종교 자유획득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삼국 동맹'은 조선과 그리고 다른 어떤 두 나라를 지칭할까요?
☞ 프랑스와 영국
35. '삼국 동맹안'에 대한 대원군의 면담 수락 소식을 듣고도 신자들은 지방에 있는 주교들들을 모시고 오기에 필요한 재력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대원군의 사위인 조기진이 여비를 보태어 주는 동시에 교군을 보내어 주교가 김면호의 안내로 상경합니다. 이에 따라 남종삼은 주교들의 상경을 대원군에게 품고하였지만 대원군의 태도는 의외로 냉담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한 대원군은 자기 요청에 천주교측이 2주일이나 지연한 사실을 무성의와 불경으로 속단해 구정이 가까이 왔다는 이유를 달아 면담을 연기합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북경에 간 동지사 일행의 편지가 불에 기름을 당기듯 병인박해의 화근으로 작용하였는데요, 중국에서 날아든 소식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 중국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식
36.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대원군과 면담을 위해 입궐 대기 중에 주교 댁에 있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면서 병인대박해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3월 4일에는 전국에 천주교 서적 압수령과 소각령이 선포되었고, 3일 후에는 천주교인 색출을 위해 상벌제도를 실시하라는 훈령이 내려졌으며, 배교자들이 묘사한 선교사들의 인상 착의에 대한 기록을 전국 관청에 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당시 정부가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통주를 두고 통내에 천주교인이 있으면 통주까지 처벌하는 연대책임법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오가작통법
37. 6월말에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에게 박해 소식을 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는 7월 13일에 중국 황제에게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선전 포고한 사실을 통보하였고, 중국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중재하였지만 대원군이 이를 내정 간섭으로 일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박해를 가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면 조선이 프랑스와 대결한 이 전쟁을 한국사에서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병인양요
38.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은 9월 10일에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항하여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상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10월 14일에 다시 일곱 대의 군함을 이끌고 원정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3일 후에 조선 정부는 불법 입국한 선교사 처형의 당연성과 함대의 즉각 퇴각을 주장하면서 이에 맞섰습니다. 결국 강화도의 한 절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막강한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도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의 공격에 많은 부상자를 내며 11월에 퇴각하기에 이릅니다. 이 전투를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전등사 전투
39.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배외사상이 극도에 달했고 대원군은 기세 등등하여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해 교회 박해는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등지에서 순교하였고 조선 교회는 신유박해 이후 '제2의 목자 없는 시대'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당시 (병인박해 때) 순교 장소 중에서 프랑스 함대의 첫 원정 시에 침입한 곳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처형장이 된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 양화진
40. 병인박해의 대표적 순교성지 중에서, 현재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위앵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인 황석두(루가),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요셉) 등 다섯 명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 갈매못
41. 순교자드의 피로 자라난 조선 교회는 1886년 한불 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 일기」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치명 일기」에 기록된 877명의 순교자 중에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의 반열에 든 분은 몇 분일까요?
☞ 24위
42.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순교의 배경과 과정으로 보아 특이할만한 치명자로 다음에 설명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먼저 천주교를 믿게 되어 세례 받기를 재촉 받았지만 입료를 뒤로 미루고 있는 사이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체포된 자식을 보기 위해 자수하여 옹진관가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한양의 포도청으로 송치되면서도 서로 볼 수가 없었다. 포도청 감옥에서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를 대면했을 때 그의 마음이 움직여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고, 영세준비로 며칠동안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어 김대건 신부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옥중 세례를 받았다. 한 때 포졸이었던 그는 동료 포졸들의 배교 회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모딘 고문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내었다. 실례로, 포장이 십계명도 제대로 외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비웃자 그는 무식한 자녀도 효도할 수 있듯이 교리지식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만 믿어도 넉넉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혹독한 고문으로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관장은 한 마디의 신음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바로 배교의 표시라고 엄포를 놓자 뼈가 살을 에리는 고통 속에서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절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장살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임군집
43. 병인박해의 폭풍전야와도 같았던 조선 철종시대에 교회는 비록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이 철회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 천주교회는 이 땅에 신앙을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으로 교계 체제를 재정비하고, 조신인 성직자 양성하는 한편 출판과 자선을 통한 대사회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특별히 성모 신심을 강화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는 1861년 성직자들의 담당구역을 다시 확정할 때 각 지역을 성모 축일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조선교회의 주보성인은 성모님의 어떤 축일과 연관되어 있을까요?
☞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44.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다음에 설명하는 평신도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북경에서 세례 받은 충주 목사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가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풍양 조씨 일파에 의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 하기 위한 방안으로 '삼국 동맹안'을 조정에 건의하였다는 죄목으로 지명 수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천주교가 올바른 종교라는 신앙고백과 자신의 건의안이 매국의 계략이 아니라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봉주(토마스)와 함께 모반죄인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복자로,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남종삼
□ 최양업 토마스
1. 우리나라의 최초의 방인 사제는 김대건 신부님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이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세례명은 무엇일까요?
☞ 토마스
2. 최양업 신부님은 1821년 3월 1일에, 순교자 집안에서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탄생하셨는데, 그분이 탄생하신 곳은 충청도 어디일까요?
☞ 홍주 지방에 있는 다래골
3. 최양업 신부님은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프란치스코)는 천주교의 회장이였기 때문에,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장독으로 옥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최경환의 죄명은 무엇일까요?
☞ 사학죄인
4.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 이성례는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갖은 형벌을 다 받았고 결국은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이 때 그녀는 아들들이 보면 미진한 육정에 유감이 들까 하여 오지 말라고 하였다. 이 아들 중 막내는 한 푼 한 푼 동냥을 하여 그의 어머니가 순교하는 당일에 옥사장을 찾아가 "칼을 잘 갈아 형을 집행할 때 부디 고통이 없게 해달라"고 청하였다는 감명 깊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어머니인 이성례의 세례명은 무엇일까요?
☞ 마리아
5. 우리나라 천주교 전래 초창기 때에, 모방 신부는 조선 교회의 방인 사제의 양성을 고려하여 신학생 세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이들 신학생들은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인데, 이들 중 두 번째로 선발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 최방제
6.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이들 세 신학생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수도회는 어디일까요?
☞ 파리외방전교회
7.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1844년 12월 부제로 서품 받으셨고, 그 이듬해인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로 그리고 최양업 신부님은 고국 조선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시려다 실패하시고 김대건 신부님보다 4년 늦은 1849년 4월 15일경에 사제로 서품을 받으셨는데, 어느 곳에서 서품을 받으셨을까요?
☞ 중국 상해
8. 최양업 신부님은 부제 때부터 고국에 입국하려고 시도하였스니다. 과연 몇 번이나 시도하여 입국에 성공하셨을까요?
☞ 5번
9.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신부님이 사제로 서품되면 보통은 사목임지를 발령 받고 그곳에서 사목활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최양업 신부님께서 발령 받은 최초의 사목임지는 어디일까요?
☞ 충북 진천
10. 최양업 신부님은 12년간의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한 결과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으며, 1861년 자신의 사목 사황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시는 도중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 지역은 어디일까요?
☞ 문경새재
11. 최양업 신부님은 1850년부터 1861년까지 12년 동안 직접 걸어 다니시며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갑자기 이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병은 무엇일까요?
☞ 장티푸스
12. 최양업 신부님의 사상이나 생애를 걸쳐 이룩하신 업적은, 그 분이 "서민 대중을 교화" 시킨 사제이며 서민 대중을 위한 사제로서 "평등 정신의 실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부님은 사목활동 외에도 번역과 저술에 힘쓰셨는데, 「한국 천주교회사」의 발간을 도우셨고, 교리서 등을 번역하였으며, 특히 교우들의 교리 지식함양과 신심생활 활성화를 취해 조선의 전통적 가사 문학인 4.4조의 가사체로 「이것」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글을 모르는 이들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들을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 천주가사
13. 한국의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며, 최양업 신부님의 묘가 있는 곳은 어느 곳일까요?
☞ 충청도 베론
14. 흔히들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피의 순교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우리나라에서 1년 정도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최양업 신부님은 "무엇의 순교자"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참수형을 당사힌 것이 아닌, 김대건 신부님보다 긴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양업 신부님에 대해서는 "무엇의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 땀의 순교자
□ 한국의 성지
1. 1881년이래, 신학생들의 페낭으로의 유학이 기후 등의 문제로 어렵게 되자, 블랑 백 주교는 1885년 페낭서 돌아온 신학생 4명과 새로 입학한 3명 등 총 7명으로 조선 땅에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세워 운영하게 됩니다. 박해는 가라앉았으나 아직 위험하였던 시기라 산골에 세워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용산으로 옮겨갔지요. 이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은 어디일까요?
☞ 부흥골(범골)
2. 김대건 신부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 형장에서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동안이나 백사장에 가매장된 채 군졸들의 엄중한 감시 하에 있게 되는데, 이 때 17세에 어린 나이로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꼬박 7일간 200리의 산길을 걸어, 고향인 미리내로 가서 자신의 종산에 김대건 신부를 안장한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 이민식 원선시오
3. 미리내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초대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입니다. 한편 김대건 신부 묘 옆에는 또 한분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분은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을 준 분으로서, 평소 김대건 신부를 잊지 못하고 지내다가 죽으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히게 해 달라고 유언하였다고 합니다. 이분은 누구일까요?
☞ 페레올 고 주교
4. 다산 정약용에게 종부성사를 준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로서 조선에 처음 온 모방 나 신부가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망월리 한경변의 거북동처럼 생긴 야트막한 야산을 낀 자연부락으로, 초기 교회 교우마을이었고 순교자 김성우(안당)을 비롯하여 7분의 순교자가 묻혀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 구산
5.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운영하면서 학사들은 천주학이라는 학문적 지식을 천주교의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러한 신앙을 노래를 통하여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어와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로 시작하는 천주공경가의 지은이는 누구였을까요?
☞ 이벽
6. 이곳은 권철신이 학문 연구를 위해 머물던 곳으로, 천진암과 함께 강학회가 열리던 곳이기도 합니다. 천진암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 발상의 기반을 구축하는 요람의 구실을 했던 이곳은 어디일까요?
☞ 주어사
7. 두 번에 걸친 대박해인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로 무려 350여명의 교우들이 치명한 곳으로, 이곳에서의 최초의 순교자는 구산에 묻혀 있는 순교자입니다. 구산에 인접해 있으며, 살아서 동문으로 걸어 들어간 교우들이 죽어서 시체가 되어 수구문으로 나왔다고 전해지는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남한산성
8. 안양시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져있는 곳에는 수리산이 있습니다. 이곳은 19세기 초 박해를 피하여 신자들이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고 담배를 재배하며 교우촌을 형성하였던 곳입니다. 또한 이곳은 아들 최양업 신부를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고 하여 1839년 기해박해 때 40여 일 간의 고문 끝에 순교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인품에 오른 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요?
☞ 최경환 프란치스코
9. 충청도로 가는 산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서 박해시대에 전교여행을 다니는 선교사드의 신변 안전을 도모할 수 가 있어 많이 이용했던 곳으로, 앵베르 범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공소에서 은신하였다고 합니다. 현대 성당으로 되어있는 이 성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왕림 성당
10. 이곳은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최초로 사목 했던 동골 마을이 있고, 베르뇌 장 주교가 3개월 가량, 깔레 신부가 1년 남짓 사목 한 곳입니다. 지금은 무명 순교자의 묘소가 산재해 있고 기념 성당과 연자 맷돌로 14처를 세워놓은 동산이 있는 청주교구에 속한 이 성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베티성지
11. 이곳은 성 황석두 루가, 성 이윤익 요한의 탄생지이고, 최양업 신부의 전교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 곳 출신의 전교 회장 추순옥을 비롯 김 마르틴, 마태오 부자 등 여러 순교자를 배출하였고, 국내에서 가장 큰 십자가와 성모상을 비롯하여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 5인상, 황석두 묘소 등이 잘 정비되어 있는 이 성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연풍 성지
12. '죽산'은 삼남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으로서, 병인박해 때 살육이 자행되던 곳으로, 기록에 남은 순교자만 24명이나 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죽산에서 8Km 떨어져 있으며, 신자라는 사실만 확인 되면 심문의 여지도 없이 끌어다 죽이거나 생매장했다고 알려진, 죽산의 사형터 이름은 무엇일까요?
☞ 이진터
13. 한강 상류 팔당에서 양수리 한강물 사이로 머리를 불쑥 내어민 곳에 '마재'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인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4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다채로운 교회 행사가 마련되는 등 많은 교회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 성지에는 누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을까요?
☞ 다산 정약용
14. 이곳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그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내포지방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영세 받은 후 교우마을을 이루게 된 곳입니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로부터 32년간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데, 이 가문이 생활했던 이 곳은 오늘날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 솔뫼
15. 이곳은 최양업 신부와 최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곳입니다. 또한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혹은 홍주에서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기의 묘가 줄무덤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 다락골
16. 이곳은 박해 80여 년간에 걸쳐 수천명의 교우들이 순교하여 '신앙의 묘자리'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은 당시 내포 지방 여덟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포 일원의 교우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형, 효수형, 생매장 등으로 순교하였습니다. 1975년 이곳에 순교탑이 건립되었고, 또한 현재 지석루 앞에는 순교돌이 옛 그대로의 형태를 보존한 채 서 있기도 합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 해미
17. 갈매못 성지는 프랑스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여 신앙을 전파했던 한 분의 주교와 오매스뜨르 신부, 위앵 민 신부 등 두 명의 사제, 그리고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분이 병인박해 때 군문효수를 당한 곳으로서, 이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으로서 이곳에서 순교하여 성인품에 오른 그 한 분의 주교는 누구일까요?
☞ 다블뤼 안 주교
18. 이곳은 공주로 들어오는 입구의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꼬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당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는 손자선(토마스), 최지혁 등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여 대전 교구 신앙 요람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 황새바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