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지, 한티와 신나무골

2006. 8. 18. 오후 1:14:39

글자

한티와 신나무골 사진은 며칠안으로 올리겠습니다.

관덕정 사진을 구하지 못해 아쉽군요.

혹시 가지고 있으신 분 올려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한티 교우촌에 신자들이 살기시작한 때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혀있던 신자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또 1860년 경신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이 모여들어 교우촌이 크게 번성되었던 곳이다. 1862년에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 보고서에 보면 '칠곡 산 중턱에 굉장히 큰 외딴 마을에 40명 가량이나 되는 신자들이 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침내 병인박해로 평화롭던 이 마을이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 자리에서 몰살당하여 순교자들의 묘가 군데군데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순교하여 이름이 남아 있는 순교자는 서태순, 이 곤자가, 조 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뿐이고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했다.

 

 

신나무 골은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화리를 중심으로한 신나무 골이라 부르지만 도암, 완정, 왜관의 가실, 동명의 어골 등 근처에 있는 교우촌을 모두 포함한다.
신나무 골에 교우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의 우련밭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명이 체포되었지만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 교우촌에는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 등이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샤스탕 정 신부가 1839년 순교한 후로 다블뤼 신부가 사목했고, 다음은 최양업 신부가 12년 간 사목한 곳이다. 그 후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담당했고, 1866년 박해 이후에는 신자들이 흩어졌다. 다시 1882년부터는 한 로베르 신부가 사목하면서 1883년에 신나무골에「연화서당」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에 서울에 설립한 한한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순교자 묘는 경상도지방 박해 때 포졸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 산 21번지 선산에 묻혀있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으로 1984년에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2006 08 20 대구 신나무골, 한티 성지순례[1]06.08.21조회 41[축하] 스테파니아 자매님 개인 성경쓰기 명예의 전당에 올랐습니다.[2]06.08.19조회 44대구 성지, 한티와 신나무골06.08.18조회 41[2차]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 - 김진홍 요셉 형제님 수고하셨습니다.06.08.17조회 37[책 발송] 김한솔 펠릭스 학생에게 "고난의 밀사" 보냈습니다.06.08.17조회 35[2차] 판관기, 룻기 입력완료 - 가브리엘라 자매님 수고하셧습니다.06.08.15조회 38새로 가입하여 성경을 쓰시는 자매님도 책(순교자 관련)을 보내드립니다.06.08.15조회 34명동 대성당 오늘 파견성가는 애국가06.08.15조회 33[2차] 요한 묵시록 총405절 입력완료 -김진홍 요셉 형제님 수고하셨습니다.06.08.10조회 36스테파니아 자매님 개인성경쓰기 현재시각 124위 - 4명 추월하면06.08.10조회 34[2차] 여호수아기 입력완료 - 가브리엘라 자매님 수고하셨습니다.06.08.10조회 36나바위에서 바라본 풍경06.08.10조회 38김대건 신부 복자비06.08.10조회 37나바위와 망금정06.08.10조회 35나바위 망금정 - 대구대교구장의 피정하시던 곳[1]06.08.09조회 36대구대교구와 나바위 성지의 인연[1]06.08.09조회 35나바위 성모상과 성지 야외 제대06.08.09조회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