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성지 1

2011. 6. 23. 오후 1: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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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성지 순례를 하였습니다.

날씨가 늦은 가을이라 그런지,아님 성지의 사연이 그런지 ......

어찌 사람들이 그리 잔혹한지.......

아직도 구멍뚫린 바위에  선혈 자국이..........주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043) 833-5064

■ 지리좌표  황석두 루가 묘지 앞 북위 36°45′49″ 동경 127°59′41″
■ 문 의 처  사무실 (043) 833-5064
■ 찾아가는 길
   충주에서 3번국도를 따라 남행하면 수안보 온천에 이른다. 수안보에서 계속 3번국도를 따라
12Km쯤 가면 삼거리에 닿는다. 이 지점에 검문소가 있고 34번 국도 쪽으로 800m쯤 가면 연풍성지
안내 푯말을 볼 수있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국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옯겨져 묻힌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가(1811-1866년)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서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못했다.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 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연풍성지와 관련하여 선종하신 오기선(요셉) 신부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연풍성지 - 처형터라 함 -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성 토마스 손자선(孫--)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마을 부유한 농가이자 3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일의 기도생활과 생업에 충실하였으며 주위에서는 그의 규칙적인 생활과 좋은 행실을 칭찬하였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될 때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의 집을 뒤져 돈과 물품을 약탈해갔다. 덕산관아에서는는 주교를 체포한 후 더 많은 신자들을 체포하고자 꾀를 내어 관인들이 약탈해간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어렵게 살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 혼자서 그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아에서는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재물과 신변보호로 유혹했지만 단연코 거부하였다. 또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해미로 이송되었고,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5월 18일 공주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다음 천상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나이:22세/순교연월일:1866.3.31    순교장소:공주감영/형벌:교수

 

 
 

댓글 1

  • 2013년 1월 7일 오후 8:11

    초창기에 가보았는데 지금은 더 성스럽게 꾸며져있군요.

성지를 찿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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