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마태15,21-28;마르7,24- 30)

2015. 9. 4. 오후 3: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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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마태15,21-28;마르7,24- 30)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 주십시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에 의해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그 부인은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모욕스런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응답하였다.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이토록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입술로는 공경하면서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섬긴다."라고 말씀하셨던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들과 이 여인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립힌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더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안에서 사람을 더립히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것은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즉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먼저이고 나중이고, 거짓이고 진리인지를 구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이 사람을 더립힌다. 예수님은 이런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어리석은 이"라고 하였다.

그럼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어리석음은 어둠이다. 어둠은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까 구분할 수 없다. 매일 보아도 그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그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헤메이다가 구렁텅이에 빠지고 넘어지고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마르 4,12)고 하였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까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귀머거리, 소경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고 말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깨달아야 한다. 즉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고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 곧 어둠을 제거하고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마르7,1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깨달음은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안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주어지는 은총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4,16)라고 예언했던 대로 빛으로 오셨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닫기 시작할 때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그 세계는 육의 세계가 아니라 영의 세계요, 땅의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요, 유한의 세계가 아니라 무한의 세계요, 거짓의 세계가 아닌 진리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렇게 영적으로 눈이 뜨일 때 그 때부터는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하는 사람은 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즉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즉 어둠에서 빛을 보기 시작하고 그 빛을 통하여 보지 못했던 주변을 보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음식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아닌지, 무엇이 나에게 이롭고 해로운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한다. 지금 무엇을 말해야하는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무엇이 우선이고 나중인 지를 구분할 수 있다. 어리석음은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없다. 어둠이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 못하고 "불륜, 도둑질,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중상, 교만"등과 같은 해로운 일들을 마치 자기에게 이롭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행한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바로 자기들 앞에 생명의 빵이시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알아 보지 못하였지만 부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보았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유령이다"라고 불렀다. 유일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이는 이 부인 뿐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으로 알아 본 이들과 알아 보지 못한 이들과는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기는커녕 트집이나 잡으려 하고 , 마음으로 공경하기는커녕 입술로만 공경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고 자기들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는 어리석음 행동들을 하지만 이 부인은 그렇지 않다. 이 부인은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앞에 엎드렸고, 더러운 영이 들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고,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더욱 간절하게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간청하였다.

 

이 부인이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즉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였고 이 부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본 것이 그 차이점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 물을 필요로 하는 나무 뿌리가 물을 찾아 뿌리를 뻗치듯이 주님을 찾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알아 볼 수 있고 주님을 알아본 사람만이 그분 앞에 엎드려 간청할 수 있고 어떤 난관과 시련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매달리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생명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복음을 알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부인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치유해달라고 청하는 모습에서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지도자의 역할을 본다. 교회의 지도자나 자녀를 둔 부모들은 적어도 이 여인처럼 주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입술로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하고 알아 볼 수 있도록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더러운 영이 들린 자기 딸을 치유 받게 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 주위 사람들한테 이런 저런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응답하고, 자기 딸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는 이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주님이 숨어 있어도 찾아 낼 수 있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고 자기의 어려움을 하소연 할 수 있지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즉 어리석은 사람은 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지른다거나 예수님을 보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트집이나 잡으려 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뜨이지 않는 한 우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게 되고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유광수 신부-

 

 아 여인아!> (마태 15,21-28)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정녕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우리는 오늘 믿음이 큰 여인을 만남으로써 정말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하게 된다. 교회는 이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활성화되고, 가르침을 주고,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병든 이들이 치유 받는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큰 이 여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자.

우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라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수님이 떠난 그곳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이 떠나 온 그 곳을 간단히 말하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15,8-9)라고 말씀하셨던 대로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눈먼 이들,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사람의 규정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가르치면서 헛되이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소에 경 읽기와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시어 이방인들이 사는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 가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지역인 그곳에서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주님을 만나러 나왔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그곳에서 떠나 아예 믿음이 없는 지역인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셨는데 믿음이 없는 이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서 여인이 나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은 믿음이 없는 지역을 떠나 나온 것이고 예수님은 믿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을 떠나 이방인이 사는 곳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은 믿는 이의 만남이다. 비록 이방인의 지역에서 사는 여인이었지만 이 여인은 얼마나 큰 믿음이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믿음이 있는 이를 찾아 나서서 결국은 믿음이 있는 이를 만나지만 그래서 더욱 큰 믿음으로 성숙되고 큰 은총도 받지만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믿지 않고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진실한 믿음이 없는 이는 오히려 믿음이 있는 이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의 빵"마저도 찾아 먹지 못하고 빼앗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이는 비록 신분이 형편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도 없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은혜를 받는다. 결국 은혜는 장소나 신분이나, 지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 믿음을 갖고 참 믿음을 계속해서 성숙시켜 나가려는 갈망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성숙하는데 몇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이 여인은 믿음이 없는 그 곳에서 나와 믿음이 있는 예수님께로 왔다는 것이다. 믿음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예수님께로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요, 모험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려면 이런 용기와 모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믿음이 없는 이들과 같이 어울리고 다니면 우리의 믿음은 점 점 더 믿음에서 멀어져 간다.

즉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과 어울리면 나의 믿음 생활도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는 믿음 생활이 될 것이다. 또 우리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생명인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않고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 나의 신앙생활도 복음이 중심이 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을 마치 복음인양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신앙생활로 타락할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가 만나는 어려움을 잘 극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는 대로 금방 무엇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여인이 큰 소리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대로는 우리의 간청에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 침묵을 견뎌내야 한다. 침묵은 무응답이 아니라 무언의 말이다. 무관심이 아니다. 침묵은 우리의 소리를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세 번째는 우리 믿음의 성숙을 방해하는 잡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 가 "저 여자를 돌려 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듯이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잡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외딴 곳에 가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는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실 때가 있다.

어떻게 들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불신하고 조롱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전혀 당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귀찮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을 때 거부하지 말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또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여인처럼 비록 예수님한테 청을 들였다가 오히려 모욕을 받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본래 갖었던 그 믿음으로 그리고 그런 순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고 "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간곡하게 청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예수님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씀을 하였지만 여인은 그 말씀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무조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이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숙되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을 방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장소나 분위기, 그런 말들과 행동들에서부터 떠나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믿음의 성숙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나의 믿음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정녕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칭찬이 바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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