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그리스도교 영성사 - 교부들의 영성
(1) 성 바실리오(330~379)
카빠도키아라고 하면 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고대 국가 (현재 터어키의 중부 지역)로서 후에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지역을 말하는데, 여기서 출생한 세 교부들 바실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닛사의 그레고리오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을 마지막 으로 격퇴시킨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지식인들에게 전하려고 하였고 이단을 격퇴시킴으로써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수하였다. 그들이 남겨놓은 불멸의 영성생활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성 바실리오(330-379)는 체사레아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친 덕분에 그 당시 카빠도키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의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수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할머니 마끄리나와 부모와 누이 마끄리나, 동생들인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떼의 베드로는 모두 교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젊을 때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에서 공부할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를 만나 절친한 친구이자 선의의 경쟁자로 지내 다가 함께 세례를 받고(27세)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영향을 받아 속세를 버리고 수행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그는 금욕생활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고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얼마동안 수도생활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32세에 사제가 되고 40세에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 때 까지 독수자로 살았다. 열심히 사목에 힘쓰다가 9년 후에 귀천 하였다.
바실리오는 위대한 목자와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가정적인 배경과 수행생활 그리고 교회 행정과 올바른 가르침 등으로 인해 동서방 교회로부터 훌륭한 영적 지도자와 덕망있는 분 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 당시와 사후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이렇게 존경해 왔으므로 민심이 천심이 아니겠는가?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을 이어 받아 자신의 실질적 교회론 을 결합시켰다. 그는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과 교회 공동체를 옹호 하면서 나타난 아타나시오의 태도에 오리게네스의 학구적 태도와 신심을 결합시켰고 아리우스 이단을 반대하였다. 그의 중심 사상은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사목적이고 전례적 관습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면서 구원의 경륜(oeconomia)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조사해봄으로써 그분의 신적 본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령은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신적이므로 피조물들을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을 성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는 규범과 의식을 통해서, 성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록된 신구약의 책들을 통해서 영성생활의 직접적 근원이 되므로 이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풍부한 교회론과 성령론을 강조하여 아타나시오의 강생적 영성을 발전시켜나갔다. 그의 수행생활은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 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고 오리게네스의 글을 모아 필로칼리아 (Philokalia)란 선집을 만들었다. 그 당시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제자들이 복음적 포기의 요구들을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받아 들여 교회에 방해가 될 정도로 하나의 큰 단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실리오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정신과 반대되는 그들의 동기를 파악한 후 복음의 정신을 인문주의적 문화와 연결 시켜 지혜와 고결한 인품과 교화를 선호하였다. 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동정생활이나 청빈생활을 본질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는 자선사업에 힘쓰는 목자였다. 나환자들을 직접 돌보고 병원을 방문하여 애덕 실천의 모범을 남겼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28. 교부편 (9) 대 바실리오
교회 사회활동 선구적 개척
구빈기관 세워 노인 등 돌봐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
4대 공의회로 일컫는 니체아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에페소공의회(431), 칼체돈공의회(451)는 당시 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것은 대중의 대량 입교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편 아리우스 이단, 단성론 등 여러 이단들에 대한 논쟁이 들끓었는데 각 공의회들은 그같은 이단들에 대항해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정 공포했기 때문이다.
325년 개최된 니체아공의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천주 성부의 첫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위계적인 성삼론을 폈던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의 의견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교 기본 교리인 성삼론과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이단은 황제와 정치권의 비호를 받으며 세미 아니아니즘 등으로 변형돼 계속해서 교회 안의 뜨거운 감자로 골치거리로 남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가빠도기아의 3대 교부로 꼽히는 대(大) 바실리오(329∼379)는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니체아공의회 결정 사항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신학자다. 동방교회 4대 교부중 첫 번째로 꼽히는 그는 이름 앞에 「대」(Magnus)명칭이 붙을 만큼 학자로서의 업적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바실리오는 가빠도기아 체사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처음 아버지에게서 수사학을 배우다가 당시 일반 지식인들처럼 체사레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에서 수학했으며 체사레아에 정착한 뒤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교육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356년 세례를 받고 「복음 정신에 따라 하느님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 이집트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다니며 수도승들을 만나는 수행 생활을 했다.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청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네오 체사리아의 이리스 강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에서 만났던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가 찾아와 수도 생활에 합류하게 된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함께 가빠도기아 3대 교부중 한명으로 꼽힌다. 바실리오는 여기서 오리제네스 저서에 심취, 그레고리오와 함께 오리제네스의 작품들에서 여러 구절을 뽑아 사화집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공동으로 편찬했다.
체사레아 대주교 에우세비오의 설득에 따라 365년 사제품을 받은 바실리오는 이후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지침으로 80개 항목의 「도덕집」(Moralia)을 펴내기도 했다. 370년 에우세비오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대주교직에 오른 바실리오는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목,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바실리오는 교회 사회 활동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깊은 가난 속에 제국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에 휘둘리는 민중들을 보며 또 고리대금업이 활개를 칠만큼 황폐해진 사회 현실에 직면하여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것」, 「모든 인격은 고귀하다는 것」, 「탐욕과 축재 제한을 위해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 발전시켰다.
「바실리아데」라고 부르는 구빈 기관을 만들어 노인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시스템을 갖춘 것은 혁신적이었다. 이러한 바실리오의 노력에 대해 나지안츠의 그레고리오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평했다. 「복음의 내적 충동으로 움직인 최초의 사회활동가 가운데 한사람」이라는 바실리오의 면모가 드러난다.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업적외에도 심각한 분열 현상을 겪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교회 일치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로마 교회와의 일치 없이는 교회의 진정한 일치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교황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바실리오는 수도생활 전례 면에서도 탁월한 유산을 남겼다. 「성령론」 서두에서 새로운 영광송을 제시했으며 서간 207편에서는 새로운 전례 음악을 도입했던 그는 수도원들의 전례기도를 개혁했다. 또 「1시경」과 「끝기도」를 시간 전례에 처음 시도했다. 그의 전례는 수도원을 통해 동방 교회 및 이탈리아까지 널리 전파됐고 987년에는 블라드미르 대공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에도 도입됐다. 비잔틴 예식을 지키는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실리오 전례가 사순절과 연중 대축일급 전례에 사용되고 있다. 바실리오는 한편 자신의 수도생활 경험을 통해 「바실리오 규칙서」를 내놓음으로써 수도승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조직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것은 바실리오가 사제 주교 서품 후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자들이 질문했던 내용과 응답을 모아놓은 것으로 「도덕집」, 「대수덕집」, 「소수덕집」 등이 있다. 모아진 응답들은 3차례에 걸쳐 편집됐고 편집 때마다 새로운 응답들이 첨가돼 여러 모음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소수덕집에는 수녀들에 관해 언급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도회 역사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수녀들에 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바실리오 규칙서는 복음적 성격과 형제들의 상호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수도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규칙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동방교회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성인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