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0일 화요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성령 안에서(루카10,21-24)
제1독서<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이사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화답송 시편 72(71),1-2.7-8.12-13.17(◎ 7ㄴㄷ 참조)
◎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
복음<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루카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야11,1-10)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6)
이사야 11장 3-5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함에서 우러나온 메시아 공의의 통치의 면모를 묘사하였다. 이제 11장 6절 이하 9절에서는 메시아 통치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신세계적 평화의 나라를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단락은 신,구약 성경 중에서 매우 큰 사랑을 받는 본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들을 애송함으로써,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 평화와 용기를 얻고 있다.
먼저 이같은 평화의 나라가 성취되는 시기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과 재림 사이 교회의 시간에 성취된다고 하는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이 왕국은 교회와 동일시되며,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교회에서는 원수와 싸움이 없고,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게 될 것임을 본단락이 예언한 것이 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된다고 보는 해석이다.
즉 이 나라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이며, 젖먹이가 독사 굴 속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어도 아무런 해입지 않는, 생태계의 기본 원리인 천적 관계조차 사라진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신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이 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본단락의 묘사가 교회의 시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으며, 슬픔과 근심,걱정과의 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슬픔도 근심도 눈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묵시21,4.5).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새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서 11장 6절 이하 9절의 예언은, 교회의 시간에는 부분적으로 성취되다가 그리스도 재림 이후 완전하게 성취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메시아 왕국의 본질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왕국은 성경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실제로 새끼 양이 늑대와 함께 놀아도 해를 받지 않고, 사자 등 육식 동물이 옆에 있는 먹이조차도 물지 않는 세상이 된다. 즉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도 천적 관계가 없어지는 완전한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 왕국은 영적인 나라인 것이다.
이 동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영적 상태를 대표하는 것이 된다. 사나운 사람들, 압제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영적 세상에서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이 세상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교회안에서 가라지가 밀이 되듯이, 악인이 변해 선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시점을 메시아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 왕국은 메시아 왕국에서 죄와 죽음의 모든 위험이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비유를 사용하여 묘사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메시아 왕국의 실현 시기와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각각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해석의 가능성들을 열어 놓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이 단락에 접근하는 것이 좋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예언인 동시에,그것을 넘어서 재림 이후 완전히 성취될 예언이며, 영적인 현상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종말에,그리고 종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질 예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 예언서 65장 25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어 강조된다.
한편,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으로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 것이 제시된다.
'늑대'(이리) 즉 '제에브'(zeeb)는 매우 사나운 들짐승으로서 새끼 양이나 새끼 염소와 같은 연약한 동물들을 먹이로 삼는다(요한10,12). 늑대(이리)의 이러한 점은 스바이냐 예언자가 탐욕스럽고 불의한 판관들을 '이리'로 표현하였고(스바3,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데서도 잘 드러난다(마태10,16).
또한 '새끼양'에 해당하는 '케베스'(kebes)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어린 숫양을 의미한다(민수15,11). 이러한 '새끼양'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 그러나 이처럼 사납고 잔인한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천적 관계를 형성하는 이런 동물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러한 천적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여기서 표범은 앞서 제시된 늑대와 동일한 이미지를, 새끼 염소는 새끼 양과 동일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지내리라'에 해당하는 '이르빠트'(irbats)의 원형 '라바츠'(rabats)는 네 발 가진 동물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옆으로 드러눕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약육강식의 관계에서 서로 먹고 먹혀야 할 천적 관계에 있는 두 짐승은, 한편은 먹기 위해 웅크리고,다른 한편은 먹히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도피하고 도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들 두 짐승이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 역시 메시아가 새롭게 창조하는 세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어지는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라는 표현에서도 계속된다.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앞선 내용은 흉폭한 동물과 약한 동물,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천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함을 열거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이제 본문은 단지 짐승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짐승들과 인간들 사이에도 평화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 가운데 가장 연약한 어린 아이가 초식 동물은 물론, 사자나 표범 같은 사나운 육식 동물들을 몬다는 것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고 축복하신 것이 다시 회복됨을 의미한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 세상이 되면,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파괴된 창조 질서와 섭리가 다시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나아르 카톤'(naar katon)은 또 다른 측면에서 메시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죄를 모르는 순수한 분으로서, 죄와 무관한 새로운 세계, 죄를 청산하고 새롭게 조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지도자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7)
11장 6절에서 이어 7절에서도 암소와 곰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것들의 새끼들도 함께 어울림을 묘사하고 있다. 원문에 보면 '곰'에 해당하는 '도브'(dob)는 여성형, 즉 암곰을 가리킨다. 잠언 17장 12절에서는 매우 사나운 짐승으로 '새끼잃은 암곰'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새끼잃은 암곰은 몹시 민감하여 새끼에게 다른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에서는 이러한 동물의 본능까지도 변하게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다고 묘사횐다. '여물'(풀)에 해당하는 '테벤'(theben)은 볏단을 말려 작두로 썬 짚을 지칭하는 것으로서(창세24,32),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집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이다.
육식을 하는 사자가 그 습성을 버리고 여물을 먹게 되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송곳니도 평범한 어금니로 변해야 하고, 그 체질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차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벽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젖먹이가 독사 굴위에서 장난하며' (8)
8절은 젖먹는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젖먹이의 피부는 유약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처럼 유약한 아이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독사굴에 손을 넣는 장면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결과만이 예상된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사야는 그렇게 해도 전혀 해가 없을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것은 메시아가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에서는 해를 받는 일이 전혀 없을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장난하며'에 해당하는 '웨쉬아샤으'(weshyashah)의 원형 '샤아으'(shaah)는 어린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이사66,12). 이것은 세말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따른 놀라운 변화, 제한없고 완전한 평화의 구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선명하게 확증하고 있다.
한편, 이처럼 젖먹이, 젖뗀 아이가 아무런 염려도 없이 독사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이러한 일은 독사의 이빨이 빠지고, 그 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독사의 이빨이나 독은 악의 요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메시아를 통해 구현될 새로운 세계에서는 악의 요소가 자취를 찾을 수 없을만큼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자신의 생각(뜻)에 묶여 하느님의 뜻을 못 보는 모두를 의탁하며~
(루카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 앞17절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사탄의 복종보다 하늘의 존재가 되었음을 더 기뻐할 수 있는 *이것이다. 이것- 그것은 인간의 지혜, 슬기로 알 수 없음을 , 될 수 없음을, 그래서 철부지들에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좋은 뜻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힘, 능력으로 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자신의 지혜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 사랑의 전능하신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이루실 구원이기에 善, 좋은 뜻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 앞에 사탄이 쫓겨난다는 것은 죄를 빌미로 사탄이 일으키는 죄의 삯인 죽음, 그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사탄이 쫓겨나는 이유이다. 그런 의미도 모르고, 믿지도 못하고 행하는 구마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그는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 못한다. 타 종교에도 있는(하는)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 안에, 내 죄의 속죄 제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로 있다면, 그것이 구마의 힘이지만 그보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될 기쁜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의 말씀중에서 ~
(이사11,9)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 바다를 덮는 물? 고통의 시련의 바다 같은 삶, 그로인한 죄들을 덮으시어 생명을 주시는 물이다. 모든 상처와 죄악들을 덮으시고 치유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복음 말씀(물)을 구원의 진리로 갖고 있다면(안다면) 하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며, 그것이 구마의 힘, 권위인 것이다.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를 믿다면 사람들이 서로 잘났다고, 옳다고 할 것이 없으니 서러 다툴일이 없다는 것이다.)
(1요한2,2)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사53,4-5)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 이 모든 말씀은 구원의 힘으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한 복음이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 허락된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보내신 당신의 영을 받아, 그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을 두드려(공부하는 일) 성령을 청하고 구하라’고 주님의 기도를 주셨고(루가11,1-13), 그 영을 받지 않은,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로마8,9참조)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 이름에 구마의 권위가 있는 그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보는 눈이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율법의 실체이시며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진리이신 예수님(말씀)이시다.
(루가24,27.32)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 사람의 지각, 지혜로는 타오를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지혜) 이시다. 사람의 생각, 뜻으로 먹지 말고(듣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 천주의 성령님 자신의 생각(뜻)에 묶여 하느님의 뜻, 그 구원의 말씀을 못 보는, 못 먹는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아루어졌습니다." (21)
루카 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신다. 여기서 '즐거워하며'에 해당하는 '에갈리아사토'(egalliasato; rejoice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높이다'는 뜻을 지닌 '아갈로'(agallo)와 '껑충껑충 뛰다'의 뜻을 지닌 '할로마이'(hallomai)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몹시 기뻐하다', '크게 기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기쁨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신 것은 예수님의 열린 영안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펼쳐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루카 복음 10장 21절과 22절의 말씀 또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신적(神的) 통교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구약적 표현으로서,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서 비롯되는데,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또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아람어 '압바'(abba)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간의 부자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매우 친근한 호칭인 것이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여기서 '이것을'로 번역된 '타우타'(tauta)는 가까운 사물이나 내용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후토스'(hutos)의 복수형으로서 '이것들'(these things)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즉 그가 베푼 기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 및 일흔 두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을 모두 다 가리킬 것이다(루카10,9.11절).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대조법을 통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다.
'지혜롭다는'으로 번역된 '소폰'(sophon; wise)은 '지혜있는'을 뜻하는'소포스'(sophos)에서 비롯되었고, '슬기롭다는'으로 번역된 '쉬네톤'(syneton;prudent)는 '지식있는', '이해하는'(마태11,25; 사도13,7)을 뜻하는 '쉬네토스'(synetos)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던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느님의 계시,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루카11,42~52).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대조되는 '철부지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철부지들'이라고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 little children; babes)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 ,즉 '편견과 아집으로 때묻지 않고 천진무구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율법이나 종교 위식을 엄밀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한 지혜와 보잘것 없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루카14,13.21.24).
이 구절은 전통적 유대 사상인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이다.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숨겨진 반면에, 영적으로 주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했던 세리와 죄인,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경들과 장애인들(루카14,21)에게는 계시로 나타나졌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18,3.4)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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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30일 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를 따르라 (마태4,18-22)
제1독서<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로마10,9~18)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는 '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와 '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과 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 '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를 '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퀴리오스'(kyrios)는 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②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④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는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를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브'(leb)와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곧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나 '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2020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자들을 본 받자’가 아니라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그 ‘예수님의 길을 진리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로마10,9-18. 21)
9 형제 여러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내)의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고, 죄인인 우리(나)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음을 마음으로 믿어 받는 구원이다.(로마4,25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내 모든 것의 주인, 곧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1,4)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는 현상, 곧 기적(奇蹟), 발현(發顯)등을 보고 믿는다는 것은 거짓된 믿음으로 구원의 힘, 능력이 없다. 의로움 또한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사도는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계명을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함을 앞 1-3절에서 말했고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힘, 능력이 있는 의로움이어야 한다.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로마3,20-24참조)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이름~ 주님의 생각, 뜻, 주님께서 가신 그 대속의 길이 참 진리임을 믿고 따르는 삶, 그래서 세상 가치관으로 살았던 나를 否認하는 삶,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드리는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의 삶, 생명이였던 배와 그물, 아버지까지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곧바로 따랐다고 聖經은 전한다, 오늘 그 한 부분만 보고 그들을 본받자 하면 안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위해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산들의 고달픈 삶을 버린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현재의 것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속셈을 드러낸다.
(마르10,37. 41)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 모두 자신들의 뜻을 위해 따랐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들을~ 주님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배우는 것이 신앙의 일이다. 제자들을 본받자가 아니라 주님으 사랑, 그 길을 배우는 것이 신앙이다. 곧 성경속 인물들의 잘못, 죄성을 보고(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 등) 그들의 그 죄들을 주님, 당신의 죽음으로 대속 하셔서 그들을 善(구원)으로 이끄시는, 죄인인 우리(나)를 용서하시는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람을 배우고,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예배의 삶을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요한4,21-24참조)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 태워버리는 불을 보면 모두 도망가지만 달려드는 나방도 있다. 곧 십자가의 의로움, 그 기쁜 소식을 듣고 자기 의로움이 부인당해도, 다 타버려 없어져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핍박하며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히브12,29) 29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구약의 하느님이 아닌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완성하실 것을 이미 창조이전에 계획하셨기 때문이다.(에페1,4~)
그것은 땅, 흙인 인간은 스스로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없기에, 하늘이 흙에 들어가 죽어, 그 흙과 하나되어 그 흙의 사람을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자비의 구원의 계획, 그 뜻인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슬람도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대속의 그리스도는 믿지 않기에 그들에게 완성된 구원이 없는 것이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오늘도 말씀이 찾아 오셨다. 그리고 기다리신다. 자신의 길(말)을 버리고 주님의 길, 그 말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신다.
21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아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복음 (마태4,18-22)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공관 복음은 공통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는 이제 사람을 낚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그들이 지체 없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제자들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독서의 표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의 응답은 믿음의 행위이고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한 제자들도 아직 확고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오해하기도 하고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 번 응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주 그 말씀을 듣고 되새기며 그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의 믿음이 깊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그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1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告白)하고
독서(로마10,9-11)
9 예수님은 주님(주인, 머리)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우리의 죄로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리신 그 하느님의 아타의 사랑을 진리로 믿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이 구원이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로마4,23-25)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1코린15,17)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2코린5,15)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이 모든 말씀을 믿는 것이 구원이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 믿음이 의로움이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 죄인(罪人)인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났고 의롭게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분을 나의 주인, 머리로 그분의 지체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곧 자신을 위한 삶을 버리고 하느님, 예수님의 뜻을 위한 삶, 곧 이웃과 함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 영광(榮光)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척, 자신을 버린 척한다는 것이다.
복음(마태4,18-22)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그물과 배, 그리고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다.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보관(保管)해두고 따랐던 것이다.(마르10,35-45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구원의 믿음이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背叛)하고 떠났던 것이고, 배를 찾아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던 것이다.(루가22,54-62 요한21,3참조) 그랬던 그들이 성령(聖靈)께서 오신 후에야 자신을 위한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요한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자신의 뜻을 위해 살았던 삶에서, 영(靈)의 구원을 위해 육(肉)이 원하지 않는 삶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는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아 들어야한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모습이다. 곧 성령께서 참 자유,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을 알고 깨닫고 믿게 하신다는 것이다.
(갈라5,17)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마태4,18-22)은 사도(사람)들을 본받지가 아니라 성경(聖經) 전체를 통해) 구원으로 이끄실 보호자(保護者) 성령을 의탁해야 함을 ‘알아라.’ 하시는 것이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육의 욕망을 위한 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고 의탁하며 고백하는 그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솔직한 나를 보게 하소서.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