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어느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시지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께서 첫째라고 말씀하신 대목은 바로 오늘 제 1 독서로 들은 신명기 6, 4-5를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들의 신경이었지요. 쉐마라고 불렀는데, 쉐마는 ‘듣는다.’ 라는 히브리어의 명령형이지요.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쉐마, ‘들어라.’ 라는 말을 항상 문장에 맨 앞에 두지요. 쉐마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선언으로 그들은 회당에서 예식을 할 때도 항상 쉐마로 시작했지요. 그들이 신경으로 만든 쉐마의 온전한 문구는 신명기 6, 4-9와 11, 13-21과 민수기 15, 37-41을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마태 23, 6)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성구 갑에 쉐마를 넣어 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쉐마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이 다름 아닌 바로 너희가 매일 외우고 소중하게 넣고 다니는 그 쉐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우고 성구 갑에 넣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둘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레위기 19, 18절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시지만 여기에서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키십니다. 그들에게 이웃은 오직 이스라엘 동포였지요.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다른 대목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시니 결국 우리는 이 둘이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두려움 없이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성 이냐시오는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고 하셨지요. 가만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선뜻 이웃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상처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제가 서품 받을 때 만드는 상본에 넣을 성구로 택한 구절이기도 하지요.
제가 얼마 전에 올렸던 칼릴 지브란의 On Love라는 시에서 지브란도 사랑을 하면서 열망을 지녀야 한다면 “그대가 사랑을 앎으로써 상처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피 흘리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 쉽지 않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거기 반드시 피 흘리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두려워 선뜻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참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요한의 말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가장 알기 쉬운 해설이기도 하고요.
우리 언제나 잊지 않기로 해요. 모든 사랑은 그분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가 살면서 참 사랑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느끼고 알 때, 우리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던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사랑의 마술이지요.
칼릴 지브란의 시 마지막 행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루의 삶이 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잠을 깨면 마음을 드높여
사랑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날에 감사를 드려라.
정오에 휴식을 취하며 사랑이 주는 황홀감에 젖고
땅거미가 질 때면 감사의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