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위령의 날) - 류해옥

2006. 11. 6. 오후 4:46:01

글자

동행

 

오늘은 위령의 날로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요. 저는  이미 하느님 안에 계시는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 용어로 그분들과 ‘통공’을 이루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날이지요. 오늘 저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의‘통공,’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사랑과 일치를 느낍니다. 오늘은 일 년 중에 유일하게 세 번의 미사가 따로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셋째 미사의 복음이 ‘열 처녀의 비유’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고 “그러니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뜻이 무슨 의미일까요? 늘 잠을 자지 않고 잠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라는 말은 분명히 아닐 테고요.


제가 최근에 [We walk the path together]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좋은 책이니까 꼭 읽어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동행]에서 깨어 있다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나누며 여러분 모두와의 동행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예수회 신부인 안토니 드 멜로는 자신의 문화적 바탕인 힌두교 전통의 지혜에서 예화를 이끌어 내곤 한다. 그는 인도의 스승인 구루와 제자가 나누는 대화에서 깨어 있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제가가 구루에게 물었다.

“스승님, 제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스승은 지혜롭게 대답했다.

“그대가 아침에 태양을 떠오르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네.”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스승님이 가르쳐주시는 영적 수행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깨어 있기 위함이라네.”


깨어 있음의 주제는 ‘하느님의 빛을 보는 것’에 대한 가르침과 호응을 이룬다.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 영혼 안에 떠오를 때 우리는 아침을 맞는다.”

그는 영적 여정의 과정을 빛이 있는 하루에 비유한다. 영혼의 빛이 그 순간 하느님의 빛과 결합되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 빛이 필요 없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이 주제에 대해 수련자들을 위한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영적 수행을 하는 사람은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의식적으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마치 망루의 감시자가 적이 어디로부터 침입하는지 사방을 치밀하게 둘러보는 것과 같다. 영적 수행을 하는 사람은 늘 부지런해야 하며 모든 감각과 마음을 쏟아 깨어 있어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깨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른 종교 전통의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정신을 현재에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 위함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태이(틱낫한을 부르는 존칭)는 제자들에게 매 순간 깊이 바라보는 수행을 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깊이 바라볼 때 이해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해는 깊이 바라보는 과정에서 열리게 된다. 선 수행은 어떤 사물을 깊이 바라보고 깊이 어루만진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바라본다.’ 고 하지 않고 굳이 ‘깊이 바라본다.’ 고 하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던 태이가 천천히 걷다가 멈추어 서서 꽃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보았다. 태이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꽃들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꽃잎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그 모습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물을 대충 훑어보는 사람은 결코 ‘깊이 바라본다.’ 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에크하르트는 깊이 바라보려면 ‘우리의 감각과 정신의 능력을 온전히 쏟아 부어야 한다.’고 말한다. 리처드 우드 역시 관상에 대해 ‘하느님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사물 안에서 왜곡됨 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깊이 바라본다.’ 라는 의미는 이미 에크하르트가 말했으며 또한 성 이냐시오에 의해 잘 알려진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늘 깨어 있으라고 일러준다. 잠에 빠지는 사람은 만남의 위대한 순간을 놓치게 된다. 잠에 빠지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태이는 우리의 영(靈)이 게으르거나 잠에 빠져들면 우리는 현재의 이 순간 진정한 고향에 머물 수 없다고 말한다. 깨어 있는 상태인 정념에 이르지 못하면 정신이 산만해져 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타타가타의 집에 머물 수가 없다. 타타가타는 직역하면 ‘본래의 상태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태이는 13세기 베트남의 왕이었던 트란 타이 퉁을 한 예로 든다. 그는 습관적으로 영혼을 산만하게 하여 유혹에 빠진 전형적인 인물이다. 트란 타이 퉁은 타타가타의 집에 초대를 받았지만 영혼을 산만하게 하는 게으름 탓으로 갈대숲에 잠들어서 타타가타의 집에 이르지 못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깨어 기다리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열 처녀 중 다섯은 지혜롭게 등불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섯 처녀는 등잔에 채울 기름이 없어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에 신랑이 도착했을 때 다섯 처녀들은 그곳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하신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 13)

우리가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현재의 시간과 장소에서 멀어지고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는 사랑하는 그분을 만나는 신비로운 선물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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